맨위로가기

키오이자카의 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키오이자카의 변은 1878년 5월 14일, 메이지 시대의 정치인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된 사건이다. 암살범들은 정한론에 찬동하고 메이지 정부 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족 출신 6명으로, 시마다 이치로가 중심이었다. 이들은 고관 암살을 계획, 오쿠보가 마차로 이동 중 습격하여 살해했다. 사건 이후 암살범들은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오쿠보에게는 사후 정2위우대신이 추증되고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이 사건은 정부 고관 호위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오쿠보의 죽음은 일본 근대화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78년 일본 - 군구정촌 편제법
    군구정촌 편제법은 1878년 일본에서 제정된 지방 행정 제도로, 군수와 구장은 관선으로, 정과 촌의 호장은 민선으로 선출하도록 했으며, 중앙 집권 체제 강화 목적에도 불구하고 부락 단위 결속으로 인해 완전한 해체에 실패하고 1921년에 폐지되었다.
  • 1878년 일본 - 다케바시 사건
    다케바시 사건은 1878년 도쿄에서 근위 포병 대대 병사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서남 전쟁 후 군인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징병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 되어 아카사카 이궁 점거를 시도했으나 진압되었고, 메이지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군 내부 질서 유지를 위해 헌병을 창설하고 군인칙유를 발안했다.
  • 사족 반란 - 신푸렌의 난
    신푸렌의 난은 1876년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정책에 반발한 구 히고번의 경신당이 구마모토 진대를 습격하며 시작된 반란으로, 사회적 혼란에 영향을 미치고 이후 봉기로 이어졌으며 소설에도 등장했다.
  • 사족 반란 - 히라오카 고타로
    히라오카 고타로는 일본 메이지 시대 자유민권운동에 참여하고 겐요샤를 발전시켜 규슈 철도 창설과 야하타 제철소 유치에 기여한 정치 운동가이자 기업인으로, 후쿠오카현 경제 발전에 공헌하고 중의원 의원을 6선 역임하며 쑨원을 지원하는 등 중국 혁명에도 관여했다.
  • 지요다구의 역사 - 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국가적 위기와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설립되었으나, A급 전범을 포함한 전쟁 관련 인물들의 합사로 인해 주변국들의 반발을 일으키며 과거사 논쟁의 중심에 있는 신사이다.
  • 지요다구의 역사 - 도쿄니치니치 신문
    도쿄니치니치 신문은 1872년 창간되어 정부 발표 대행, 어용 신문 비판, 후쿠치 겐이치로 주필 취임 후 대중지 전환,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매각 후 국제 정세 보도 및 사회 문제에 대한 진보적 논조, 도쿄 5대 신문 성장, 관동대지진 이후 아사히 신문과 경쟁, 시사신보와 합병 후 마이니치 신문 통합, 문화 사업 기여, 전쟁 찬양 보도 비판, 석간 복간 후 휴간 등의 역사를 가진 일본의 일간 신문이다.
키오이자카의 변
사건 개요
명칭기오이(紀尾井) 언덕의 변
위치도쿄부 고지마치구 고지마치 기오이초 시미즈다니
위도북위 35도 40분 51초
경도동경 139도 44분 8.2초
발생 날짜1878년 (메이지 11년) 5월 14일
사건 상세
원인불만
방법일본도
사용된 무기일본도
공격 인원6명
표적오쿠보 도시미치 내무경
사망자오쿠보 도시미치
나카무라 타로
부상자없음
실종자없음
피해자오쿠보 도시미치
나카무라 타로
범인시마다 이치로
초 렌고
스기모토 오토기쿠
와키타 고이치
스기무라 분이치
아사이 히사아쓰
관련자마쓰다 히데히코

2. 암살범의 동향

암살을 실행한 이들은 이시카와현 사족 시마다 이치로, 나가 렌고, 스기모토 잇키쿠, 와키타 코이치, 스기무라 분이치 및 시마네현 사족 아사이 히사아쓰 6명이다. 이들은 모두 정한론에 찬동하며, 메이지 정부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와키타는 암살로 죄가 집에 미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사족을 사임하고 평민이 되었다.

특히 중심적인 존재는 시마다 이치로였다. 시마다는 가가 번의 아시가루로서 제1차 조슈 정벌, 보신 전쟁에 참가했으며, 메이지 유신 후에도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걸었지만, 정한론에 공감하여, 메이지 6년의 정변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하야한 것에 분개한 이후 국사에 분주하게 되었다.

스기무라 히로마사 (스기무라 분이치의 형) 등도 정한론에 따라 종군을 요청했다. 타이완 출병에 있어서는 스기무라, 나가 등은 다시 종군을 요청했으며, 타이완 출병 중단 소문에 대한 반대 건백서나 사가의 난의 처리를 비판하는 건백서에는 스기무라(히로마사), 시마다, 후에 참간장을 기안하는 리쿠 요시나오(리쿠 큐코)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건백서는 기대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시마다 등은 실력 행사 노선을 채택하게 된다.

1874년 (메이지 7년)에 시마다와 나가 도쿄에서 만나 의기투합한다. 나가는 1874년 (메이지 7년) 6월에 타이완 출병에 대해 사이고, 기리노 도시아키의 견해를 듣기 위해 스기무라(히로마사), 리쿠와 함께 가고시마로 들어갔다. 반년 정도 가고시마에 체류하며, 사학교에 유학했다. 1876년 (메이지 9년)에도 가고시마로 들어가 기리노 등과 구교를 나눴다.

나가가 귀현한 10월에는 신풍련의 난, 아키즈키의 난, 하기의 난사족 반란이 잇따랐고, 시마다는 가나자와에서 거병 계획에 분주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다음 해 1877년 (메이지 10년)의 세이난 전쟁에서는 시마다와 나가 협력하여 거병 계획에 분주했지만, 주변의 설득에 고심하는 사이에, 4월에 정부군이 구마토성에 입성했다는 정보를 얻고, 승패는 결정되었다고 계획을 중지했다.

이후, 시마다 등은 고관 암살로 방침을 변경한다. 스기모토, 와키타, 스기무라 등도 이 시기에 시마다의 계획에 가담했다. 와키타는 10월, 나가 11월, 스기무라 12월, 시마다, 스기모토는 이듬해 4월에 상경했다. 유일한 시마네현 사람인 아사이는 세이난 전쟁 당시 경시청의 순사이며 경시대에 속해 종군했고, 1877년 (메이지 10년) 8월에 도쿄로 개선했지만, 금령을 범하여 1878년 (메이지 11년) 2월에 면직되었고, 3월에 시마다 등의 암살 계획을 알고 계획에 가담했다.

그들의 암살 계획은 여러 경로를 거쳐, 당시 경찰의 수장인 대경시 가와지 도시요시의 귀에도 들어갔지만 가와지는 "이시카와현 사람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상대하지 않았다[3]。 또한 다카시마 도모노스케가 이와 유사한 말을 하고 있는데, 그 증거로서 "(사건 직후에) 가와지는 현장에 달려와 수첩을 꺼내 사람 이름을 가리키며, 이 6명의 짓임에 틀림없다며 수첩을 두드리며 눈물을 흘렸다"고 증언하고 있다[4]。한편, 가와지는 오쿠보의 장례식 다음 날 "오쿠보 참의 사변에 관한 진퇴 사임서"를 제출하고 거부당했다.

2. 1. 시마다 이치로

시마다 이치로는 가가 번 출신으로, 아시가루로서 제1차 조슈 정벌보신 전쟁에 참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군인의 길을 걸었으나, 정한론에 공감하여 메이지 6년의 정변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하야하자 이에 분개하여 국사에 뛰어들었다.

1874년 (메이지 7년), 시마다는 나가 렌고와 도쿄에서 만나 의기투합했다. 신풍련의 난, 아키즈키의 난, 하기의 난사족 반란이 잇따르자, 시마다는 가나자와에서 거병을 계획했으나 실패했다. 1877년 (메이지 10년) 세이난 전쟁에서도 거병 계획을 세웠지만, 구마모토성에 정부군이 입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했다. 이후 고관 암살로 방침을 변경, 1878년 (메이지 11년) 4월에 상경하여 거사를 준비했다.

2. 2. 암살 계획

실행범은 이시카와현 사족 시마다 이치로, 나가 렌고, 스기모토 잇키쿠, 와키타 코이치, 스기무라 분이치 및 시마네현 사족 아사이 히사아쓰 6명으로 구성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심적인 존재는 시마다 이치로이다. 시마다는 가가 번의 아시가루로서 제1차 조슈 정벌, 보신 전쟁에 참가했으며, 메이지 유신 후에도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정한론에 공감하여, 메이지 6년의 정변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하야한 것에 분개한 이후 국사에 힘썼다.

스기무라 히로마사(스기무라 분이치의 형) 등도 정한론에 따라 종군을 요청했다. 타이완 출병에 있어서는 스기무라, 나가 등은 다시 종군을 요청했으며, 타이완 출병 중단 소문에 대한 반대 건백서나 사가의 난의 처리를 비판하는 건백서에는 스기무라(히로마사), 시마다, 후에 참간장을 기안하는 리쿠 요시나오(리쿠 큐코)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건백서는 기대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시마다 등은 실력 행사, 즉 고관 암살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1874년 (메이지 7년)에 시마다와 나가 도쿄에서 만나 의기투합했다. 나가는 같은 해 6월에 타이완 출병에 대해 사이고, 기리노 도시아키의 견해를 듣기 위해 스기무라(히로마사), 리쿠와 함께 가고시마로 들어갔다. 반년 정도 가고시마에 체류하며, 사학교에 유학했다. 1876년 (메이지 9년)에도 가고시마로 들어가 기리노 등과 교류했다.

나가가 귀향한 10월에는 신풍련의 난, 아키즈키의 난, 하기의 난사족 반란이 잇따랐고, 시마다는 가나자와에서 거병 계획에 힘썼지만 실패했다. 다음 해 1877년 (메이지 10년)의 세이난 전쟁에서는 시마다와 나가 협력하여 거병 계획을 세웠으나, 주변의 설득에 고심하는 사이에 정부군이 구마모토성에 입성했다는 정보를 얻고 계획을 중지했다.

이후, 시마다 등은 고관 암살로 방침을 변경한다. 스기모토, 와키타, 스기무라 등도 이 시기에 시마다의 계획에 가담했다. 유일한 시마네현 사람인 아사이는 세이난 전쟁 당시 경시청의 순사이며 경시대에 속해 종군했고, 1877년 (메이지 10년) 8월에 도쿄로 개선했지만, 금령을 범하여 1878년 (메이지 11년) 2월에 면직되었고, 3월에 시마다 등의 암살 계획을 알고 계획에 가담했다.

그들의 암살 계획은 여러 경로를 거쳐, 당시 경찰의 수장인 대경시 가와지 도시요시의 귀에도 들어갔지만 가와지는 "이시카와현 사람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상대하지 않았다.[3]

2. 3. 세이난 전쟁 이후

세이난 전쟁 이후, 시마다 이치로 등은 고관 암살로 방침을 굳혔다. 나가 렌고, 스기모토 잇키쿠, 와키타 코이치, 스기무라 분이치 등이 이 시기에 시마다의 계획에 가담했다. 1877년 10월, 나가, 11월, 스기무라, 12월, 시마다, 스기모토는 이듬해 4월에 도쿄로 상경했다. 유일한 시마네현 사람인 아사이 히사아쓰는 세이난 전쟁 당시 경시청의 순사였으며 경시대에 속해 종군했다. 1877년 (메이지 10년) 8월에 도쿄로 개선했지만, 금령을 범하여 1878년 (메이지 11년) 2월에 면직되었고, 3월에 시마다 등의 암살 계획을 알고 계획에 가담하여 6명의 암살단이 구성되었다.

그들의 암살 계획은 여러 경로를 거쳐 당시 경찰의 수장인 대경시 가와지 도시요시의 귀에도 들어갔지만, 가와지는 "이시카와현 사람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상대하지 않았다.[3] 다카시마 도모노스케가 이와 유사한 말을 하고 있는데, 그 증거로서 "(사건 직후에) 가와지는 현장에 달려와 수첩을 꺼내 사람 이름을 가리키며, 이 6명의 짓임에 틀림없다며 수첩을 두드리며 눈물을 흘렸다"고 증언하고 있다.[4] 한편, 가와지는 오쿠보 도시미치의 장례식 다음 날 "오쿠보 참의 사변에 관한 진퇴 사임서"를 제출하고 거부당했다.

3. 참간장(斬奸状)

시마다 등이 오쿠보 도시미치 암살 시 지참했던 참간장(斬奸状)은 1878년 4월 하순에 시마다의 의뢰를 받아 리쿠(陸)가 기초했다. 거기에는 유사전제의 죄로서, 다음의 5가지 죄를 열거하고 있다.


  • 말하되, 국회도 헌법도 개설하지 않고, 민권을 억압하여 정사를 사사로이 한다. 그 죄 하나이다.
  • 말하되, 법령의 조령모개가 심하고, 또 관료의 등용에 정실, 커넥션이 사용되고 있다. 그 죄 둘이다.
  • 말하되, 불필요한 토목 사업·건축으로 국비를 낭비하고 있다. 그 죄 셋이다.
  • 말하되, 나라를 생각하는 지사를 배척하고, 내란을 일으켰다. 그 죄 넷이다.
  • 말하되, 외국과의 조약 개정을 수행하지 못하고, 국위를 훼손하고 있다. 그 죄 다섯이다.

3. 1. 참간장의 내용

시마다 등이 오쿠보 도시미치 암살 시 지참했던 참간장(斬奸状)은 1878년 4월 하순에 시마다의 의뢰를 받아 리쿠(陸)가 기초했다. 거기에는 유사전제의 죄로서, 다음의 5가지 죄를 열거하고 있다.

  • 말하되, 국회도 헌법도 개설하지 않고, 민권을 억압하여 정사를 사사로이 한다. 그 죄 하나이다.
  • 말하되, 법령의 조령모개가 심하고, 또 관료의 등용에 정실, 커넥션이 사용되고 있다. 그 죄 둘이다.
  • 말하되, 불필요한 토목 사업·건축으로 국비를 낭비하고 있다. 그 죄 셋이다.
  • 말하되, 나라를 생각하는 지사를 배척하고, 내란을 일으켰다. 그 죄 넷이다.
  • 말하되, 외국과의 조약 개정을 수행하지 못하고, 국위를 훼손하고 있다. 그 죄 다섯이다.

4. 암살 당일

5월 14일 이른 아침, 오쿠보 도시미치후쿠시마현령(지사) 야마요시 모리노리의 귀향 인사를 받았다. 두 사람은 2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야마요시가 떠나려 하자 오쿠보는 30년 계획을 언급했다. 이는 메이지 원년부터 30년까지를 10년마다 3기로 나누어, 첫 10년을 창업 시기로 하여 보신 전쟁이나 사족 반란 등의 병란에 소비하고, 다음 10년을 내치 정리·식산흥업의 시기로, 마지막 10년을 후계자에 의한 수성의 시기로 삼아, 자신은 제2기까지 힘을 쏟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5월 14일 오전 8시경, 오쿠보 도시미치메이지 천황을 알현하기 위해 2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아카사카 가이코(가황궁)로 향했다.[6] 마부인 나카무라 타로와 종자가 동행했다. 오전 8시 30분쯤 기오이초 시미즈다니(현재의 참의원 시미즈다니 의원 숙소 앞)에서 암살범 6명이 마차를 습격했다.[6]

암살범들은 먼저 일본도로 말의 다리를 잘라 마차를 멈추고, 마부 나카무라 타로를 찔러 죽였다.[6] 마차 안에서 서류를 보던 오쿠보는 이변을 눈치채고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암살범들은 양쪽 문을 막고 오쿠보를 끌어내렸다. 오쿠보는 "무례한 자들"이라고 호통쳤지만, 호신용 무기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참살되었다.(향년 49〈만 나이〉, 만 47세 사망)[6]

오쿠보는 전신에 16곳의 상처를 입었고, 그 중 8곳은 머리 부분에 집중되었다. 목에 찔린 칼은 땅에까지 닿아 있을 정도였다.[6] 사건 직후 오쿠보의 시신을 본 마에지마 미쓰루는 "'''살이 튀고 뼈가 부서져, 또 두개골이 찢어져 뇌가 아직 미동하는 것을 본다'''"라고 표현했다.[6]

시마다 등 암살범들은 칼을 버리고 오쿠보에게 경례를 하고 철수했으며, 같은 날 오쿠보의 죄 5가지와 다른 정부 고관(기도 다카요시, 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마 시게노부, 이토 히로부미, 구로다 기요타카, 가와지 도시요시)의 죄를 열거한 참간장을 손에 들고 자수했다.[6]

4. 1. 암살 실행

5월 14일 오전 8시경, 오쿠보 도시미치메이지 천황을 알현하기 위해 2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아카사카 가이코(가황궁)로 향했다.[6] 마부인 나카무라 타로와 종자가 동행했다. 오전 8시 30분쯤 기오이초 시미즈다니(현재의 참의원 시미즈다니 의원 숙소 앞)에서 암살범 6명이 마차를 습격했다.[6]

암살범들은 먼저 일본도로 말의 다리를 잘라 마차를 멈추고, 마부 나카무라 타로를 찔러 죽였다.[6] 마차 안에서 서류를 보던 오쿠보는 이변을 눈치채고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암살범들은 양쪽 문을 막고 오쿠보를 끌어내렸다. 오쿠보는 "무례한 자들"이라고 호통쳤지만, 호신용 무기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참살되었다.[6]

오쿠보는 전신에 16곳의 상처를 입었고, 그 중 8곳은 머리 부분에 집중되었다. 목에 찔린 칼은 땅에까지 닿아 있을 정도였다.[6] 사건 직후 오쿠보의 시신을 본 마에지마 미쓰루는 "'''살이 튀고 뼈가 부서져, 또 두개골이 찢어져 뇌가 아직 미동하는 것을 본다'''"라고 표현했다.[6]

시마다 등 암살범들은 칼을 버리고 오쿠보에게 경례를 하고 철수했으며, 같은 날 자수했다.[6]

5. 사건의 여파

이토 히로부미는 오쿠보가 암살되기 직전 자신에게 보낸 편지가 그의 유작이 되었다고 회고했다.[7] 사건 다음 날, 오쿠보에게는 정2위우대신추증되었고, 근대 일본사 최초의 국장급 장례가 거행되었다. 아이즈 번 출신 시바 시로는 아이즈 전쟁의 원한으로 인해 오쿠보의 죽음을 당연한 결과로 여겼다. 반면, 이시카와현 출신 중에는 이 사건을 쾌재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정부 고관 호위가 강화되었고,[8] 암살범들은 국사범으로 처리되어 행정 재판소인 임시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오쿠보는 사재를 털어 공공 사업을 할 정도로 청렴했으나, 사망 후 8,000엔의 빚이 발견되었다. 정부는 유신의 삼걸인 오쿠보의 유족을 위해 16,000엔을 모금하여 지원했다.

사건 발생 10년 후인 1888년에는 "증 우대신 오쿠보 공 애도비"가 세워졌다. 암살에 가담한 마츠다 히데히코는 복역 후 다이 니폰 부토쿠카이에서 활동했다. 오쿠보가 소지했던 사이고 다카모리의 편지와 암살 당시의 마차, 칼 등은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11]

기오이 사카의 변의 석비

5. 1. 처벌

정부는 암살범을 형법상 규정이 없는 "국사범"으로 처리하여 대심원에 "임시 재판소"를 개설하여 재판을 진행했다.[10] 임시 재판소는 형식상 대심원 안에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태정관의 결재에 의해 개설되었고, 태정관으로부터 사법성에 위임된 권한에 근거하여 판결을 내리는 사실상의 행정 재판소였다.[10] 사법 경에 의해 임명된 타마노 요리 판사들은 그 해 7월 5일에 판결안을 작성하여 사법성에 질의를 했고, 사법성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7월 17일에 태정관에 질의서를 제출했다. 태정관은 7월 25일에 결재했고, 7월 27일에는 6명에게 판결이 내려져 즉시 참수형에 처해졌다.[10] 참간장을 기안한 리쿠 요시나오는 종신 금고형에 처해졌지만, 1889년 (메이지 22년)에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에 의해 특사를 받아 석방되었다.

5. 2. 정치적 영향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 고관이 이동할 때는 수 명의 근위병들에 의한 호위가 따르게 되었다.[8]

암살범의 출신지인 이시카와현은 사건 발생 당시, 구 엣추국 전역 및 구 에치젠국의 대부분을 포함한 큰 현이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메이지 정부는 이시카와현을 큰 현인 데다가 불평사족이 많아 다루기 어려운 현이라고 경계하게 되었고, 이시카와의 힘을 줄이기 위해 (사건으로부터 약 3년 후) 1881년에 구 에치젠국을 후쿠이현으로, 1883년에 구 엣추국을 도야마현으로 각각 분현시키는 것으로 이어졌다.[10]

5. 3. 오쿠보의 유산

오쿠보 도시미치는 막대한 빚을 남겼지만, 공공 사업에 사재를 사용하는 등 청렴한 정치가였다.[10] 그 때문에 사망 후 8,000엔의 빚이 발견되었으나, 채권자들은 유족에게 반환을 요구하지 않았다.[10] 정부는 유신의 삼걸 중 하나인 오쿠보의 유족을 지원하기 위해, 오쿠보가 가고시마현에 기부한 8,000엔을 회수하고 추가로 8,000엔을 모금하여 총 16,000엔으로 유족을 부양하기로 결정했다.

5. 4. 역사적 평가

오쿠보 도시미치의 암살은 메이지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된다.[7][8][9][10][11] 그의 죽음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오쿠보가 암살되기 직전 자신에게 보낸 편지가 그의 유작이 되었다고 회고했다.[7] 사건 다음 날, 오쿠보에게는 정2위우대신추증되었고, 근대 일본사 최초의 국장급 장례가 거행되었다.[7] 아이즈 번 출신 시바 시로는 아이즈 전쟁의 원한으로 인해 오쿠보의 죽음을 당연한 결과로 여겼다.[7] 반면, 이시카와현 출신 중에는 이 사건을 쾌재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7]

이 사건으로 정부 고관 호위가 강화되었고,[8] 암살범들은 국사범으로 처리되어 행정 재판소인 임시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7] 오쿠보는 사재를 털어 공공 사업을 할 정도로 청렴했으나, 사망 후 8,000엔의 빚이 발견되었다. 정부는 유신의 삼걸인 오쿠보의 유족을 위해 16,000엔을 모금하여 지원했다.[7]

사건 발생 10년 후인 1888년에는 "증 우대신 오쿠보 공 애도비"가 세워졌다.[7] 암살에 가담한 마츠다 히데히코는 복역 후 다이 니폰 부토쿠카이에서 활동했다.[7] 오쿠보가 소지했던 사이고 다카모리의 편지와 암살 당시의 마차, 칼 등은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11]

참조

[1] 트위터 襲撃場所は紀尾井坂ではありません https://twitter.com/[...] 株式会社ゼンリン公式twitter 2021-10-31
[2] 웹사이트 大久保利通暗殺事件 http://www.spacelan.[...]
[3] 서적 利通暗殺 行人社 1986
[4] 서적 大久保利通 講談社学術文庫 2004
[5] 문서
[6] 웹사이트 『贈右大臣正二位大久保利通葬送略記・乾』(国立公文書館デジタルアーカイブ) https://www.digital.[...] 2024-07-18
[7] 서적 『伊藤侯,井上伯,山県侯元勲談』近代デジタルライブラリー
[8] 서적 日本旅行記
[9] 뉴스 「島田一郎の斬姦状」1878年5月15日朝野新聞『新聞集成明治編年史. 第三卷』 https://dl.ndl.go.jp[...] 国立国会図書館近代デジタルライブラリー 1878-05-15
[10] 뉴스 お隣さん17 第2章 分かれる・7 分県認めた政府 『富山新聞』 2020-01-21
[11] 뉴스 『東京日日新聞』 1878-05-2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