팻 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팻 맨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에서 개발된 플루토늄을 사용한 내폭형 핵무기이다. 1941년부터 시작된 맨해튼 계획을 통해 개발되었으며, 리틀 보이와 함께 최초의 핵무기 중 하나이다. 팻 맨은 1945년 7월 트리니티 실험에서 최초로 실험되었고, 같은 해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되어 큰 피해를 입혔다. 이후 크로스로드 작전 핵실험에도 사용되었으며, 1940년대 후반까지 생산, 비축되었다. 팻 맨은 3.25m의 길이, 1.52m의 지름, 4,672kg의 무게를 가지며, 플루토늄 코어, 폭축 렌즈, 중성자 반사체, 뇌관 등 다양한 부품으로 구성되었다. 팻 맨의 기폭 과정은 32개의 기폭전교선형 뇌관을 시작으로, 충격파를 통해 핵분열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제2차 세계 대전의 미국 무기 - 리틀 보이
리틀 보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이 개발하여 히로시마에 투하, 막대한 피해를 준 우라늄 총열식 원자폭탄으로, TNT 1만 5천 톤의 폭발력을 지녔으며, 맨해튼 계획의 결과물이고 비교적 간단한 구조이지만 완전한 시험 없이 투하되어 논란이 있는 폭탄이다. - 제2차 세계 대전의 미국 무기 - 아존
-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고쿠라시
고쿠라시는 1900년부터 1963년까지 일본 후쿠오카현에 존재했던 시로, 고쿠라번의 성하마을로 발전하여 교통 요충지이자 기타큐슈 공업 지대의 중심지였으나, 주변 도시와 합병하여 기타큐슈시가 되면서 소멸되었다. -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은 1996년에 개관하여 나가사키 원자 폭탄 투하의 역사와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리고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제2차 세계 대전, 원자 폭탄 투하, 나가사키 재건, 핵무기 개발의 역사를 전시한다. - 원자폭탄 - 리틀 보이
리틀 보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이 개발하여 히로시마에 투하, 막대한 피해를 준 우라늄 총열식 원자폭탄으로, TNT 1만 5천 톤의 폭발력을 지녔으며, 맨해튼 계획의 결과물이고 비교적 간단한 구조이지만 완전한 시험 없이 투하되어 논란이 있는 폭탄이다. - 원자폭탄 - 일본의 핵무기 개발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은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전후 평화헌법과 비핵 3원칙을 채택했지만, 핵무기 생산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대에 이르러 핵무장 논의가 부상하고 있다.
팻 맨 | |
---|---|
개요 | |
![]() | |
종류 | 핵 분열 중력 폭탄 |
설계 |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
생산량 | 120발 |
제원 | |
길이 | 3.25 m |
직경 | 1.52 m |
원산지 | 미국 |
폭발성 | 예 |
무게 | 4,672 kg |
충전재 | 플루토늄 |
충전재 무게 | 6.2 kg |
폭발력 | 21 kt(TNT) (88 TJ) |
생산 및 사용 | |
생산 시작 | 1945년 |
생산 종료 | 1949년 |
식별 정보 | |
명칭 | Mark 3 팻 맨 |
2. 개발 배경 및 초기 결정
팻 맨은 맨해튼 계획의 일환으로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에서 만들어진 핵폭탄이다. 리틀 보이가 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건배럴 방식의 원자 폭탄인 것에 비해, 팻 맨은 플루토늄을 이용한 내폭형(인플로젼 방식) 원자 폭탄이다.
미국은 1941년부터 맨해튼 계획을 추진하여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우라늄을 이용한 포신형 핵분열 무기인 리틀 보이가 개발되었으나,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무기는 핵 연쇄 반응이 너무 빨라 임계 질량을 유지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1944년, 맨해튼 계획은 플루토늄 핵무기 개발에 포신형 방법을 포기하고 내폭형 방식을 채택하였다.
팻 맨의 핵 물질로는 플루토늄-239가 사용되었으며, 핵출력은 TNT 환산 21kt이었다. 내폭형 방식에 사용된 폭축 렌즈는 존 폰 노이만 등이 완성한 기술이다. 사용된 플루토늄은 핸포드 부지에 있던 B-반응로에서 제조되었다.
1945년 7월 16일, 팻 맨을 사용한 최초의 원자폭탄 시험인 트리니티 실험이 이루어졌다. 맨해튼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팻 맨은 3발이었으며, 하나는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되었고, 다른 하나는 크로스로드 작전(1946년)에 사용되었다.
1945년 7월 헨리 스팀슨 장관에게 팻 맨형 원폭은 매월 1개 생산이 가능하다고 보고되었으나, 1945년 8월 15일 전쟁 종결로 생산량은 축소되었다. 플루토늄을 생산하던 핸포드 반응로도 중성자 조사 손상으로 1946년 생산을 중지했다.
팻 맨은 전후에도 생산이 계속되어 1947년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 60발 분의 부품이 비축되었고, 미국 병기창에는 사용 가능한 팻 맨형 원폭 13발이 비축되었다. 1948년까지 50발, 1949년에는 120발까지 생산되었다. 1949년부터는 개량형인 마크-4 핵폭탄이 생산되었다.
2. 1. 초기 핵무기 설계 논의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42년 6월 시카고에서, 7월에는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핵폭탄 설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여러 엔지니어와 물리학자들을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두 개의 임계 질량 미만인 "탄환"을 "표적"에 발사하여 결합하는 총형 설계가 채택되었다.[1] 리처드 C. 톨먼은 폭축형 핵무기를 제안했지만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2]1942년에는 플루토늄 폭탄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영국의 "튜브 얼로이즈" 프로젝트 책임자인 월리스 에이커스는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넌트에게 제임스 채드윅이 "플루토늄은 불순물 때문에 무기로서 실용적인 핵분열성 물질이 아닐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고 말했다.[3] 코넌트는 어니스트 로런스와 아서 컴턴과 상의했고, 이들은 버클리와 시카고의 과학자들이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지만 즉각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코넌트는 맨해튼 계획 책임자인 레슬리 R. 그로브스 주니어 준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로브스는 로렌스, 컴턴, 오펜하이머, 맥밀란으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검토하게 했다. 위원회는 높은 순도를 요구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4]
오펜하이머는 1943년 초에 자신의 선택 사항을 검토하고 총형 무기에 우선순위를 부여했지만,[5] 사전 폭발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세스 네더마이어 지휘 하에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 E-5 그룹을 만들어 폭축을 연구하게 했다. 폭축형 폭탄은 폭탄 내 핵분열성 물질의 단위 질량당 폭발 수율 측면에서 훨씬 더 효율적인 것으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압축된 핵분열성 물질이 더 빠르게 반응하고 더 완전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루토늄 총이 연구 노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불확실성이 가장 적은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우라늄 총형 폭탄은 플루토늄 총으로부터 쉽게 적용될 수 있다고 가정했다.[6]
2. 2. 플루토늄 폭탄의 실현 가능성 문제
1942년 플루토늄 폭탄의 실현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영국 "튜브 얼로이즈" 프로젝트 책임자 월리스 에이커스는 11월 14일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넌트에게 제임스 채드윅이 "플루토늄은 불순물 때문에 무기로서 실용적인 핵분열성 물질이 아닐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고 말했다.[1] 코넌트는 어니스트 로런스와 아서 컴턴과 상의했고, 그들은 각기 버클리와 시카고의 과학자들이 그 문제에 대해 알고 있지만, 즉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고 인정했다. 코넌트는 맨해튼 계획 책임자인 준장 레슬리 R. 그로브스 주니어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로브스는 로런스, 컴턴, 로버트 오펜하이머, 맥밀란으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검토하게 했다. 위원회는 높은 순도를 요구하는 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2]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43년 초에 자신의 선택 사항을 검토하고 총형 무기에 우선순위를 부여했지만,[3] 사전 폭발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세스 네더마이어 지휘 하에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 E-5 그룹을 만들어 폭축을 연구하게 했다. 폭축형 폭탄은 폭탄 내 핵분열성 물질의 단위 질량당 폭발 수율 측면에서 훨씬 더 효율적인 것으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압축된 핵분열성 물질이 더 빠르게 반응하고 따라서 더 완전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루토늄 총이 연구 노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불확실성이 가장 적은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우라늄 총형 폭탄은 플루토늄 총으로부터 쉽게 적용될 수 있다고 가정했다.[4]
2. 3. 오펜하이머의 결정과 내폭 연구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42년 6월 시카고와 7월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핵폭탄 설계에 대한 회의를 열고 여러 엔지니어 및 물리학자들과 이 문제를 논의했다. 이들은 두 개의 임계 미만 질량을 "탄환"처럼 "표적"에 발사해 결합하는 방식인 총형 설계를 선택했다.[1] 리처드 C. 톨먼이 폭축형 핵무기를 제안했으나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2]1942년에는 플루토늄 폭탄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영국의 "튜브 얼로이즈" 프로젝트 책임자인 월리스 에이커스는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넌트에게 제임스 채드윅이 "플루토늄은 불순물 때문에 무기로서 실용적인 핵분열성 물질이 아닐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3] 코넌트는 어니스트 로런스와 아서 컴턴과 상의했고, 이들은 버클리와 시카고의 과학자들이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지만 즉각적인 해결책은 없다고 인정했다. 코넌트는 맨해튼 계획 책임자인 레슬리 R. 그로브스 주니어에게 알렸고, 그로브스는 로렌스, 컴턴, 오펜하이머, 맥밀란으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를 소집해 검토하게 했다. 위원회는 높은 순도를 요구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4]
오펜하이머는 1943년 초에 자신의 선택지를 검토하며 총형 무기에 우선순위를 두었지만,[2] 사전 폭발 위협에 대비해 세스 네더마이어 지휘 아래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 E-5 그룹을 만들어 폭축 연구를 진행하게 했다. 폭축형 폭탄은 폭탄 내 핵분열성 물질 단위 질량당 폭발 수율 면에서 훨씬 효율적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압축된 핵분열성 물질이 더 빠르게 반응하여 더 완전하게 반응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플루토늄 총이 연구 노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불확실성이 가장 적은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우라늄 총형 폭탄은 플루토늄 총에서 쉽게 적용될 수 있다고 가정했다.[5]
3. 명칭
씬 맨과 팻 맨은 각각 총기형 및 내폭형 설계를 지칭하는 암호명이었다. 이 암호명은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제자이자 맨해튼 계획 참여자인 로버트 세르버가 만들었다. 그는 설계 모양에 따라 이름을 선택했는데, 씬 맨은 매우 긴 장치였고, 대시엘 해밋의 탐정 소설 ''The Thin Man''과 영화 시리즈에서 따왔다. 팻 맨은 둥글고 뚱뚱했으며, 해밋의 ''The Maltese Falcon''에 나오는 시드니 그린스트리트의 등장인물에서 따왔다.[21][22] 리틀 보이는 우라늄 총기형 설계로 나중에 등장했으며, 씬 맨과 대조를 이루기 위해 이름 붙여졌다.
일본어에서는 "후톳초(뚱뚱이)"[21][22] 또는 "데부"(『맨발의 겐』 등)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팻 맨" 표기도 있다.[23]
4. 개발 과정
미국은 1941년부터 맨해튼 계획을 통해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우라늄을 이용한 포신형 핵분열 무기인 리틀 보이가 개발되었으나, 플루토늄을 사용한 핵무기는 자체 핵 연쇄 반응이 빨라 임계 질량 유지가 어려워 1944년 내폭형 방식을 채택했다.[1]
팻맨은 플루토늄-239를 핵 물질로 사용했으며, 핵출력은 TNT 환산 22kt이었다. 폭축 렌즈는 존 폰 노이만 등이 완성한 기술이었고, 사용된 플루토늄은 헨포드 지구의 B-반응로에서 제조되었다. 1945년 7월 16일에는 팻 맨을 사용한 최초의 원자폭탄 시험인 트리니티 실험이 실시되었다.
4. 1. 내폭 방식 연구
1944년 맨해튼 계획은 플루토늄 핵무기 개발에 포신형 방식을 포기하고 내폭형 방식을 채용하였다. 팻맨의 핵 물질로는 플루토늄-239가 사용되었고, 핵출력은 TNT 환산 22kt을 기록했다. 내폭형 방식에 사용된 폭축 렌즈는 존 폰 노이만 등이 완성한 기술이었다.[1]
세스 네더마이어는 여러 조각을 조립하는 방식 대신 폭발성 쉘로 속이 빈 구체를 내파시키는 방식을 채택했다. L. T. E. 톰슨은 내파가 충분히 대칭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나, 네더마이어는 내파가 실용적이라고 믿었다.

존 폰 노이만은 구체를 내파하기 위해 성형 작약에 고폭약을 사용하는 것을 제안했다. 그는 이것이 포신 방식보다 핵분열성 물질을 더 빠르게 조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물질의 양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에드워드 텔러는 무거운 압력 하에서 밀도가 높은 금속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플루토늄 금속이 압축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에밀리오 G. 세그레의 실험에서 반응로에서 생산된 플루토늄에 플루토늄-240 불순물이 포함되어 자발 핵분열률이 너무 높아 사전 폭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따라서 플루토늄을 사용하려면 내폭 방식이 필수적이었다.
제임스 L. 턱이 제시하고 폰 노이만이 개발한 3차원 폭발 렌즈는 모든 판이 동시에 안쪽으로 움직이는 절대적인 정밀도가 필요했다. 루이스 월터 알바레즈와 로렌스 H. 존스턴은 폭발 브리지와이어 기폭 장치를 발명하여 정밀도를 높였다. 로버트 크리스티는 고체 아임계 플루토늄 구체가 임계 상태로 압축될 수 있는 방법을 계산하여 "크리스티 가젯"이라고 불렸다.
야금학자들은 플루토늄을 구체로 주조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여러 플루토늄 동소체가 존재하여 어려움을 겪었으나, 플루토늄-갈륨 합금을 사용하여 δ 상을 안정화시키고 열간 압착하여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 수 있었다. 플루토늄의 부식 문제로 인해 구체는 니켈로 코팅되었다.[1]

폭탄의 크기는 노먼 포스터 램지 주니어가 적합성을 조사한 결과, B-29 슈퍼포트리스에 의해 제한되었다. 낙하 시험 결과, "캘리포니아 낙하산"이라고 불리는 안정기 상자 및 핀 조합이 승인되었다.
초기 Y-1222 모델은 약 1,500개의 볼트로 조립되었으나, 1944년 12월 Y-1291 설계로 대체되었다. 최종 전시 Y-1561 설계는 90개의 볼트로 조립되었다.
1945년 7월 16일, Y-1561 모델 팻 맨이 트리니티 테스트에서 폭발했다.[2] 필립 모리슨은 "근본적인 것은 물론 거의 같았습니다."라고 회상했다.[3]
4. 2. 폰 노이만의 제안과 폭발 렌즈
1944년 9월 존 폰 노이만은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에 합류하여 팻 맨에 사용될 폭축 렌즈 개발에 참여하였다. 폰 노이만은 에드워드 텔러 등과 함께 구체를 내파하기 위해 성형 작약에 고폭약을 사용하는 것을 제안했다. 폰 노이만은 이 방법이 포신형 보다 핵분열성 물질을 더 빠르게 조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밀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필요한 물질의 양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
제임스 L. 턱이 제안하고 폰 노이만이 개발한 3차원 폭발 렌즈는 모든 판이 동시에 안쪽으로 움직이는 절대적인 정밀도에 달려 있었다.[2] 여러 번의 폭발을 동기화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루이스 월터 알바레즈와 로렌스 H. 존스턴은 정밀도가 낮은 프리마코드 폭발 시스템을 대체하기 위해 폭발 브리지와이어 기폭 장치를 발명했다.[3]
4. 3. 플루토늄-240 문제와 내폭 방식 채택
미국은 1941년부터 맨해튼 계획을 추진하여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로 포신형 핵분열 무기인 리틀 보이가 개발되었다. 맨해튼 계획에서는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무기 역시 포신형을 사용하고자 하였으나, 플루토늄 자체의 핵 연쇄 반응 속도가 너무 빨라 임계 질량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결국 1944년, 맨해튼 계획은 플루토늄 핵무기 개발에 포신형 대신 내폭형 방식을 채택하였다.[1]내폭형 방식 채택은 플루토늄-240이라는 불순물 때문이었다. 클린턴 엔지니어 웍스의 X-10 흑연 반응로와 핸포드 부지의 B 반응로에서 생산된 플루토늄에는 플루토늄-239보다 자발적 핵분열률이 훨씬 높은 플루토늄-240이 섞여 있었다. 이 때문에 반응로에서 생산된 플루토늄은 사전 폭발 가능성이 매우 높아, 폭탄이 임계 질량에 도달하기 전에 스스로 파괴될 위험이 있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포신형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플루토늄을 압축하는 내폭형 방식이 채택되었다.[1]
1944년 7월 17일, 로스 앨러모스 회의에서 플루토늄을 사용한 포신형 폭탄의 비실용성이 합의되었다. 맨해튼 계획의 모든 포신형 작업은 농축 우라늄을 사용한 리틀 보이 개발로 집중되었고,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는 팻 맨 폭탄의 내폭형 방식 개발에 주력하게 되었다.[1]
3차원 폭발 렌즈를 사용하는 아이디어는 제임스 L. 턱이 제안하고 존 폰 노이만이 개발하였다. 폭탄이 성공하려면 모든 폭발이 동시에 안쪽으로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했다.[1] 여러 번의 폭발을 동기화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루이스 월터 알바레즈와 로렌스 H. 존스턴은 폭발 브리지와이어 기폭 장치를 발명했다.[1] 로버트 크리스티는 고체 플루토늄 구체가 임계 상태로 압축될 수 있는 방법을 계산하여, "크리스티 가젯"이라고 불렸다.[1]
4. 4.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재편성과 크리스티 가젯
오펜하이머는 내파 방식을 새롭게 검토하기 위해 1944년 9월 존 폰 노이만을 로스 앨러모스로 초빙했다. 폰 노이만은 에드워드 텔러와 논의한 후, 구체를 내파하기 위해 성형 작약에 고폭약을 사용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이는 포신형 방식보다 핵분열성 물질을 더 빠르게 조립할 뿐만 아니라, 밀도를 높여 필요한 물질의 양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1] 이러한 압력 하에서 플루토늄 금속이 압축될 것이라는 개념은 텔러가 제시했으며, 그는 무거운 압력 하에서 밀도가 높은 금속의 거동에 대한 지식을 지구의 핵에 대한 전전 이론 연구에서 얻었다고 밝혔다.[2]더 효율적인 핵무기의 가능성은 오펜하이머, 텔러, 한스 베테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지만, 그들은 폭발물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조지 키스티아코프스키가 즉시 거론되었고, 1944년 10월 컨설턴트로 프로젝트에 합류했다.[3]
내파 방식은 1944년 4월까지는 보조적인 수단으로 남아 있었으나, 에밀리오 G. 세그레와 그의 P-5 그룹의 실험에서 클린턴 엔지니어 웍스의 X-10 흑연 반응로와 핸포드 부지의 B 반응로에서 생산된 플루토늄에 플루토늄-240이라는 불순물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플루토늄-240은 플루토늄-239보다 자발 핵분열률과 방사능이 훨씬 높았다. 이로 인해 반응로에서 생산된 플루토늄은 자발 핵분열률이 너무 높아 사전 폭발 가능성이 매우 커져, 폭탄이 임계 질량에 도달하기 전에 스스로 파괴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플루토늄을 사용하는 폭탄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파 방식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4]
플루토늄을 사용한 포신형 폭탄의 비현실성은 1944년 7월 17일 로스 앨러모스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합의되었다. 맨해튼 계획의 모든 포신형 폭탄 개발은 농축 우라늄을 사용한 리틀 보이로 집중되었고,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는 팻 맨 폭탄의 내파 문제에 모든 연구를 집중하며 재편되었다.[5]
3차원 폭발 렌즈로 성형 작약을 사용하는 아이디어는 제임스 L. 턱이 제안했고, 폰 노이만이 개발했다.[6] 폭탄의 성공은 모든 폭발이 동시에 안쪽으로 정확하게 이루어져야만 했다.[7] 여러 번의 폭발을 동시에 일으키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루이스 월터 알바레즈와 로렌스 H. 존스턴은 정밀도가 낮은 프리마코드 폭발 시스템을 대체하는 폭발 브리지와이어 기폭 장치를 발명했다.[8]
로버트 크리스티는 고체 상태의 임계 질량 이하 플루토늄 구체가 임계 상태로 압축될 수 있는 방법을 계산하여, 이전의 속이 빈 구형 쉘 압축 시도보다 훨씬 간단하게 만들었다.[9] 크리스티의 보고서 이후, 고체 플루토늄 코어를 사용한 무기는 "크리스티 가젯"으로 불렸다.[10]
4. 5. 야금학적 과제와 플루토늄-갈륨 합금
야금학자들의 과제는 플루토늄을 구체 형태로 만드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플루토늄의 밀도를 측정하려는 초기 시도는 일관성 없는 결과를 보여주어 어려움을 겪었다. 처음에는 오염이 원인이라고 생각했으나, 곧 여러 플루토늄 동소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 실온에서 존재하는 취성 α 상은 더 높은 온도에서 가소성 β 상으로 변한다. 그 후, 300°C에서 450°C 범위에서 주로 존재하는 더 유연한 δ 상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 δ 상은 알루미늄과 합금하면 실온에서 안정화되었지만, 알루미늄은 알파 입자와 충돌할 때 중성자를 방출하여 사전 폭발 문제를 악화시켰다.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야금학자들은 δ 상을 안정화시키면서도 원하는 모양으로 열간 압착이 가능한 플루토늄-갈륨 합금을 개발하였다. 그들은 구체 대신 반구를 주조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발견했고, 코어는 두 개의 반구로 구성되었다. 이 반구들 사이에는 삼각형 단면의 링을 넣어 정렬을 유지하고 제트 형성을 방지했다. 또한, 플루토늄은 쉽게 부식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구체는 니켈로 코팅되었다.[1]
4. 6. 낙하 시험과 설계 개선
팻 맨의 초기 설계는 여러 조각을 조립하는 방식 대신 폭발성 쉘로 속이 빈 구체를 내파시키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 과정에서 휴 브래드너, 찰스 크리치필드, 존 스트라이브 등이 참여했다. 그러나 내파 방식의 대칭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존 폰 노이만이 고폭약을 사용하는 성형 작약을 제안하여 핵분열성 물질을 더 빠르게 조립하고 필요한 물질의 양을 줄일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1]
1944년, 에밀리오 G. 세그레의 실험을 통해 반응로에서 생산된 플루토늄에 불순물(플루토늄-240)이 포함되어 자발 핵분열률이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포신형 폭탄은 플루토늄 사용이 불가능해졌고, 내파 방식이 유일한 대안이 되었다. 1944년 7월 17일 회의에서 포신형 폭탄 개발은 농축 우라늄을 사용하는 리틀 보이로 전환되었고, 팻 맨 개발에 집중하게 되었다.[2]
제임스 L. 턱과 폰 노이만은 3차원 폭발 렌즈로서 성형 작약을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루이스 월터 알바레즈와 로렌스 H. 존스턴은 폭발 브리지와이어 기폭 장치를 발명하여 폭발 동기화 문제를 해결했다. 로버트 크리스티는 고체 아임계 플루토늄 구체를 임계 상태로 압축하는 방법을 계산하여, "크리스티 가젯"이라고 불리는 고체 플루토늄 코어 무기를 개발했다.[3]
야금학자들은 플루토늄을 구체로 주조하는 과정에서 여러 동소체 문제에 직면했다. 최종적으로 플루토늄-갈륨 합금을 사용하여 δ 상을 안정화시키고 열간 압착하여 원하는 모양을 만들었다. 플루토늄의 부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니켈로 코팅했다.[1]
팻 맨의 크기는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기에 의해 제한되었다. 1944년 3월부터 낙하 시험이 시작되었고, 꼬리 날개 문제로 인해 "캘리포니아 낙하산"이라는 안정기 상자 및 핀 조합이 개발되었다. 초기 Y-1222 모델은 1,500개의 볼트로 조립되었으나, Y-1291 설계로 대체되면서 재설계되었다. 최종 전시 Y-1561 설계는 90개의 볼트로 조립되었다.
1945년 7월 16일, Y-1561 모델 팻 맨("가젯")이 트리니티 핵 실험에서 성공적으로 폭발했다.
4. 7. 트리니티 실험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의 외딴 지역에서 "트리니티"라는 암호명으로 Y-1561 모델 팻 맨, 즉 가제트를 이용한 핵무기 실험이 진행되었다. 이 실험에서 약 25kt(TNT)의 위력을 기록했다.[2] 트리니티 실험 결과에 따라 설계에 약간의 변경이 이루어졌으며,[3] 필립 모리슨은 "중요한 변경 사항이 몇 가지 있었지만... 근본적인 것은 물론 거의 같았습니다."라고 회상했다.이 실험은 미국 뉴멕시코주 알라모고도 사막에 있는 화이트 샌즈 사격장에서 진행되었으며, 인류 역사상 최초의 핵실험이었다.
5. 구조 및 구성 부품
팻 맨은 다음과 같은 주요 부품으로 구성되었다.
- 기폭 전교선형 뇌관: 32개 뇌관의 점화 시간 오차는 0.1 마이크로초 이하여야 했다. 이를 위해 새로운 원리의 뇌관이 개발되었다.
- 기폭 장치: 5kV 1000A의 대형 고압 오일 콘덴서와 1마이크로 패럿의 저 캐패시턴스 스위치 기구가 필요했다. 전력 공급을 위해 신형 전지가 개발되었다. 콘덴서와 전지만으로 1ton에 가까운 무게를 차지했다.[1]
- 폭축 렌즈: 폭약만 2.5ton이 사용되어 팻 맨의 무게와 부피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2]
- 알루미늄 합금제 푸셔: 폭약과 천연 우라늄, 플루토늄 사이의 밀도 차로 인한 충격파 반사를 줄이고, 레일리-테일러 불안정성을 막기 위해 사용되었다.[3]
- 중성자 반사체 겸 템퍼: 천연 우라늄으로 만들어졌으며, 중성자가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핵분열 물질을 한 곳에 잡아두는 역할을 했다. 두께는 7cm였다.[4]
- 중성자 점화기: 플루토늄의 핵분열 반응을 시작하기 위한 최초의 중성자를 방출하는 장치이다. 베릴륨과 폴로늄-210으로 구성되었다.[5]
폭탄의 전체 길이는 약 326.07cm였고, 지름은 약 153.03cm였으며, 무게는 약 4656.12kg이었다.[6]
5. 1. 전체 구조

# AN 219 접지식 기폭장치
# 대지측거용 안테나
# 전원
# 기폭용 콘덴서
# 폭탄의 전후 타원부분을 고정하는 경첩
# 플루토늄과 폭축렌즈
# 대지측거용 레이다와 기폭용 타이머등의 제어장치
# 기폭제어장치
# 꼬리날개(약 50.80cm 알루미늄제)
기폭전교선형뇌관은 충격파가 1mm/s 때 8m를 진행하기 때문에 32개의 뇌관 점화 타이밍 허용오차는 0.1마이크로초 이하여야 한다. 그래서 원폭용으로 새로운 원리의 뇌관이 개발되었다.
기폭장치는 기폭전원을 위해 5kV 1000A의 대형 고압 오일콘덴서가 필요했고, 0.1 마이크로 초 이하의 오차에서 작동하기 위해 1마이크로 파란트의 저 인더크탄스 스위치 기구가 필요했다. 전력 공급을 위해 신형전지가 개발되었다. 콘덴서와 전지만 1톤에 가까운 중량이 되어 폭축렌즈의 폭약 다음가는 중량을 차지하는 부품이 되었다. [1]
폭축렌즈는 폭약에만 2.5톤이 필요해 팻맨의 중량과 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최대의 부품이다. [2]
알루미늄 프레셔는 폭약과 천연우라늄, 플루토늄 사이의 밀도차가 커서 반사파가 커지고 레일리-테일러 불안정 등의 유체역학적 불안정성이 커져 충격파의 높은 구대칭성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장치이다. 레일리-테일러 불안정이 커지면 레일리-테일러 파가 발생하여 압력이 저하되는 것을 막는 목적도 있다. [3]
중성자반사체 겸 덤퍼는 핵분열물질에서 발생하는 중성자가 외측으로 달아나 연쇄반응이 정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천연우라늄의 중성자반사체가 필요하다. 중성자반사체로써 두꺼운 3cm가 필요했고, 1나노 초 사이에 80회의 연쇄반응이 되풀이되어 핵분열물질을 한 곳에 머물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을 붙잡아 두는 것이 덤퍼이다. 1나노 초의 순간을 붙잡기 위해 어느 정도의 관성물질이 필요했고, 그 때문에 7cm의 두께가 되었다. [4]
중성자점화기는 플루토늄이 핵분열반응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최초의 중성자선을 방출하기 위한 장치이다. 점화기란 명칭은 연소(핵분열반응)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종화라는 중성자를 방출하기 위한 장치인 것에서 유래했다. 구조는 중량 7g의 베릴륨 구체 표면에 15개의 형을 0.1mm 금으로 실시하고, 거기에 폴로늄-210 11mg를 도포한 것이다. 폭축에 의해 급속하게 베릴륨과 폴로늄이 혼합되어 폴로늄이 방사한 알파 입자가 베리리움 원자에 충돌해 속박에서 해방된 중성자를 방사한다. [5]
폭탄의 길이는 약 326.07cm였고, 지름은 약 153.03cm였다. 무게는 약 4656.12kg이었다.[6]
5. 2. 내부 구조
# AN 219 접지식 기폭 장치
# 대지 측거용 안테나
# 전원
# 기폭용 콘덴서
# 폭탄의 앞뒤 타원형 부분을 고정하는 힌지
# 플루토늄과 폭축 렌즈
# 대지 측거용 레이더와 기폭용 타이머 등의 제어 장치
# 기폭 제어 장치
# 꼬리 날개(20인치 알루미늄제)
폭축 렌즈에는 총 2500kg의 폭약이 사용되었다. 그 내부에 각각 120kg의 알루미늄 합금제 푸셔와 천연 우라늄 구체가 있으며, 중심에는 6.2kg의 δ상 플루토늄 합금이 수납되어 있다. 팻 맨의 질량의 절반 이상을 폭축 렌즈의 폭약이 차지하며, 직경은 137.8cm나 되어 팻 맨(뚱보)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기술 수준에서는 필요한 압력을 얻기 위해 이 정도의 분량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조성 B/알루미늄 합금제 푸셔/천연 우라늄 중성자 반사체/플루토늄 핵의 순서로, 밀도비는 1.65/2.71/19.05/19.8이다.
후년에는 폭약 부분의 밀도를 높이거나 아임계계를 작게 함으로써 급속히 소형화가 이루어져, 최종적으로는 100킬로톤급의 핵무기에서도 직경 30cm 정도로 소형화되었다.
; 기폭 전교선형 뇌관
: 충격파는 1밀리초당 8미터나 진행하기 때문에 32개의 뇌관이 점화되는 타이밍의 허용 오차는 0.1 마이크로초 이하가 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원자폭탄용으로 새로운 원리의 뇌관이 신규 개발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폭 전교선형 뇌관 항목을 참조.
; 기폭 장치
: 기폭 전원을 위해 5킬로볼트 1,000암페어의 대형 고압 오일 콘덴서가 필요하며, 0.1 마이크로초 이하의 오차로 작동시키기 위해 1 마이크로 패럿의 낮은 캐패시턴스의 스위치 기구가 필요하다. 여기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신형 배터리가 개발되었다. 콘덴서와 배터리만으로 1ton에 가까운 질량이 있으며, 폭축 렌즈의 폭약 다음으로 질량을 차지하는 부품이다.
; 폭축 렌즈
: 폭약만으로 2.5ton이나 되며, 팻 맨의 질량과 부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가장 큰 부품이다. 자세한 내용은 폭축 렌즈 항목을 참조.
; 알루미늄 합금제 푸셔
: 폭약과 천연 우라늄, 플루토늄 사이의 밀도 차가 너무 커서, 폭축에 의한 충격파의 반사파가 커진다. 그러면 레일리-테일러 불안정성 등의 유체역학적 불안정성이 커져서 충격파의 높은 구형 대칭성이 무너지기 때문에, 일단 알루미늄 합금제 푸셔로 충격파를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다. 레일리-테일러 불안정성이 커지면 레일리-테일러 파가 발생하여 압력이 저하되는 것을 막는 목적도 있다.
; 중성자 반사체 겸 템퍼(Tamper)
: 핵분열 물질에서 발생한 중성자가 외부로 빠져나가 연쇄 반응이 멈추지 않도록 하기 위해 중성자 반사체가 필요하다. 팻 맨에서는 천연 우라늄을 사용하고 있으며, 중성자 반사체로는 두께 3cm로 충분하지만, 1 나노초 동안 80번의 연쇄 반응을 반복할 때까지 핵분열 물질을 한 곳에 잡아둘 필요가 있다. 이것을 억누르는 것이 템퍼이다. 핵분열 물질을 1 나노초간 억누르기 위해 템퍼에는 어느 정도의 관성 질량이 필요하며, 이것을 겸하기 위해 7cm의 두께가 되었다. 후년의 연구에서는 열량의 20%는 천연 우라늄에 의한 아임계계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 중성자 점화기
: 이 장치는 플루토늄이 핵분열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초의 중성자선을 내보내기 위한 장치이다. 점화기라는 명칭은 연소 (핵분열 반응)를 시작하는 데 필요한 불씨가 되는 중성자를 내보내기 위한 장치라는 데서 유래한다. 구조는 질량 7g의 베릴륨 구의 표면에 쐐기 모양의 홈 15개를 파고 두께 0.1밀리미터의 금 도금을 하고, 거기에 11mg의 폴로늄-210을 도금한 것이다. 폭축에 의해 갑자기 베릴륨과 폴로늄이 혼합되면, 폴로늄이 방사한 알파 입자가 베릴륨 원자와 충돌하여, 결합에서 풀려난 중성자를 방출한다.
5. 3. 플루토늄 코어 (핏)
팻맨의 플루토늄 코어는 중성자 점화기, 중성자 반사체 겸 템퍼, 알루미늄 프레셔로 구성되어 있다. 폭축 렌즈에는 총 2500kg의 폭약이 사용되었으며, 그 내부에는 각각 120kg의 알루미늄 합금제 푸셔와 천연 우라늄 구체가 있고, 중심에는 6.2kg의 δ상 플루토늄 합금이 있다.; 중성자 점화기
: 이 장치는 플루토늄이 핵분열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초의 중성자선을 내보내기 위한 장치이다. 점화기라는 명칭은 연소 (핵분열 반응)를 시작하는 데 필요한 불씨가 되는 중성자를 내보내기 위한 장치라는 데서 유래한다.
: 구조는 질량 7그램의 베릴륨 구의 표면에 쐐기 모양의 홈 15개를 파고 두께 0.1밀리미터의 금 도금을 하고, 거기에 11밀리그램의 폴로늄-210을 도금한 것이다. 폭축에 의해 갑자기 베릴륨과 폴로늄이 혼합되면, 폴로늄이 방사한 알파 입자가 베릴륨 원자와 충돌하여, 결합에서 풀려난 중성자를 방출한다.
; 중성자 반사체 겸 템퍼(Tamper)
: 핵분열 물질에서 발생한 중성자가 외부로 빠져나가 연쇄 반응이 멈추지 않도록 하기 위해 중성자 반사체가 필요하다. 팻 맨에서는 천연 우라늄을 사용하고 있으며, 중성자 반사체로는 두께 3cm로 충분하지만, 1 나노초 동안 80번의 연쇄 반응을 반복할 때까지 핵분열 물질을 한 곳에 잡아둘 필요가 있다. 이것을 억누르는 것이 템퍼이다. 핵분열 물질을 1 나노초간 억누르기 위해 템퍼에는 어느 정도의 관성 질량이 필요하며, 이것을 겸하기 위해 7cm의 두께가 되었다.
: 후년의 연구에서는 열량의 20%는 천연 우라늄에 의한 아임계계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 알루미늄 합금제 푸셔
: 폭약과 천연 우라늄, 플루토늄 사이의 밀도 차가 너무 커서, 폭축에 의한 충격파의 반사파가 커진다. 그러면 레일리-테일러 불안정성 등의 유체역학적 불안정성이 커져서 충격파의 높은 구형 대칭성이 무너지기 때문에, 일단 알루미늄 합금제 푸셔로 충격파를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다. 레일리-테일러 불안정성이 커지면 레일리-테일러 파가 발생하여 압력이 저하되는 것을 막는 목적도 있다.
6. 기폭 과정
플루토늄 핏은 직경이 약 9.19cm였고, 직경이 약 2.03cm인 "Urchin" 변조 중성자 개시자를 포함하고 있었다. 약 22.23cm 구체인 감속 우라늄 탬퍼는 약 0.32cm 붕소 함침 플라스틱 쉘로 둘러싸여 있었다. 플라스틱 쉘에는 사과 속의 구멍처럼 약 12.70cm 원통형 구멍이 뚫려 있어 핏을 최대한 늦게 삽입할 수 있었다. 핏을 포함하는 탬퍼 실린더가 빠지면 주변 약 46.99cm 알루미늄 푸셔의 구멍을 통해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었다.[4] 핏은 만져보면 따뜻했고, 코어의 경우 약 15W, 2.4 W/kg-Pu를 방출했다.[5]
폭발은 "Urchin"이 자유 중성자를 더하여 핵분열 연쇄 반응을 시작하기 전에 플루토늄을 정상 밀도의 두 배로 대칭적으로 압축했다.[6]
결과적으로 핏에 있는 플루토늄 중 약 16%가 핵분열되었으며, 의 폭발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방출했다.[9] 위력의 약 30%는 우라늄 탬퍼의 핵분열에서 나왔다.[6]
아래는 팻맨의 기폭 과정을 요약 설명한 것이다.
7. 나가사키 투하
1945년 8월 9일, B-29 폭격기 보크스카의 기장 찰스 스위니 소령은 나가사키에 팻 맨을 투하했다. 원래 예정지는 고쿠라였지만, 전날 미군의 공습으로 인한 연기와 기상 악화로 인해 폭격기 조종사는 제2순위였던 나가사키로 향했다.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시 북부(현재 마쓰야마마치) 상공 550m에서 팻 맨이 투하되었다.[25]
팻 맨의 위력은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에 투하된 리틀 보이보다 약간 강했지만, 나가사키는 기복이 심한 지형이어서 피해 규모는 히로시마에 비해 작았다.
당초 폭격 목표는 고쿠라였으나, 후쿠오카현 야하타에 대한 소이탄 공습으로 발생한 구름과 연기로 인해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3번의 폭탄 투하 시도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결국 대체 목표였던 나가사키 역시 구름에 가려져 있었으나, 폭격수 커밋 K. 비한 대위가 구름 사이로 틈을 발견하여 팻 맨을 투하, 고도 약 502.92m에서 폭발했다.[11]
나가사키 폭격으로 인한 즉사자는 약 35,000~40,000명, 장기적인 건강 영향(특히 백혈병)까지 포함하면 총 60,000~80,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11] 직접적인 사망과 부상의 대부분은 탄약 또는 산업 노동자들이었다.[12] 진주만 공격에서 투하된 91식 어뢰를 제조한 미쓰비시-우라카미 병기 공장은 폭발로 파괴되었고, 미쓰비시의 산업 생산 또한 공격으로 인해 중단되었다.[12][13]
7. 1. 조립
팻 맨은 통상 최종 단계 조립이 이루어지기 전 상태로 보관해 사용 직전에 조립 작업을 벌인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안전상의 이유'''
완전히 조립된 상태의 팻 맨이 화재 및 탑재된 항공기의 추락 등의 사고로 인해 폭축 렌즈가 기폭되면 핵폭발이 일어나 대참사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보관 상태에서 최악의 사고가 일어나더라도 핵폭발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 '''설계상의 이유'''
기폭 장치에는 매우 큰 전원이 필요하며, 완성된 상태에서는 배터리가 며칠 만에 열화되기 때문이다.
보관 상태에서는 "전부 외각", "후부 외각", "플루토늄과 폭축 렌즈 덩어리", "전원 장치", "중성자 점화기"의 5가지 부품으로 분해되어 있다. 중성자 발생기를 제거한 빈 공간에는 작은 쇠구슬이 채워져 있다. 이는 폭축 렌즈가 기폭하여 플루토늄이 폭축되더라도 중심에 쇠덩어리가 들어가 있으면 그것이 방해하여 폭축이 진행되지 않아 핵분열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조립 작업에는 48시간이 소요된다. 조립된 상태로는 배터리가 며칠 만에 열화되므로, 48시간 이내에 사용되지 않으면 다시 분해하여 배터리를 교체해야 한다.[7]


7. 2. 투하 과정
''Bockscar''는 1945년 8월 9일 03시 47분에 이륙했으며, 주요 목표는 고쿠라였고, 나가사키는 부차적 목표였다. 무기는 이미 장전되었지만, 녹색 전기 안전 플러그는 여전히 꽂혀 있었다. 애쉬워스는 스위니가 약 5181.60m까지 올라가 폭풍 구름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10분 후에 이를 빨간색으로 교체했다.[11] ''Bockscar''의 비행 전 검사 중에, 비행 기술자는 스위니에게 작동하지 않는 연료 이송 펌프로 인해 예비 탱크에 실린 640USgal의 연료를 사용할 수 없다고 알렸다. 이 연료는 여전히 일본까지 왕복 운송해야 했고, 더 많은 연료를 소모할 것이었다. 펌프를 교체하는 데는 몇 시간이 걸릴 것이고, 팻 맨을 다른 항공기로 옮기는 데도 같은 시간이 걸릴 수 있었고, 폭탄이 작동 중이어서 위험하기도 했다. 따라서 폴 티베츠 대령과 스위니는 ''Bockscar''가 임무를 계속 수행하기로 결정했다.[12]고쿠라는 전날 224대의 B-29가 인근 후쿠오카 야하타에 대한 대규모 소이탄 공습으로 시작된 화재에서 발생한 구름과 연기에 가려졌다. 이것은 고쿠라 지역의 70%를 덮어 조준점을 가렸다. 다음 50분 동안 세 번의 폭탄 투하가 이루어졌고, 연료를 소모하고 항공기를 야하타의 강력한 방어에 반복적으로 노출시켰지만, 폭격수는 시각적으로 폭탄을 투하할 수 없었다. 세 번째 폭탄 투하가 이루어질 즈음에는 일본의 대공포화가 접근해 왔고, 제이콥 베서 중위는 일본 통신을 감시했으며, 일본 전투기 지휘 무선 주파수 대역에서 활동이 보고되었다.[13]
스위니는 그 다음 나가사키의 대체 목표로 향했다. 그곳 역시 구름에 가려져 있었고, 애쉬워드는 스위니에게 레이더 접근을 명령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폭격수[11] 커밋 K. 비한 대위[14]는 구름 속에서 구멍을 발견했다. 팻 맨은 투하되어 43초의 자유 낙하 후 현지 시간 11시 02분에 고도 약 약 502.92m에서 폭발했다.[11] 구름 덮개로 인해 시야가 좋지 않았고, 폭탄은 의도한 폭발 지점에서 거의 2마일 빗나갔기 때문에 피해는 히로시마보다 다소 적었다.
나가사키 폭격으로 즉사한 사람은 약 35,000~40,000명으로 추산된다. 장기적인 건강 영향, 그중 가장 강한 영향은 폭탄 피해자에게 46%의 기여 위험이 있는 백혈병을 포함하여 총 60,000~80,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15] 다른 사람들은 관련 폭발 및 화상 부상으로 나중에 사망했으며, 수백 명이 폭탄의 초기 방사선 노출로 인한 방사선 질환으로 사망했다.[16] 직접적인 사망과 부상의 대부분은 탄약 또는 산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발생했다.[17]
도시에 있는 미쓰비시의 산업 생산은 공격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조선소는 3~4개월 이내에 전체 용량의 80%를 생산했을 것이고, 제철소는 상당한 생산으로 돌아가는 데 1년이 걸렸을 것이며, 전기 공장은 2개월 이내에 일부 생산을 재개하고 6개월 이내에 용량을 회복했을 것이고, 무기 공장은 이전 용량의 60~70%로 돌아가는 데 15개월이 걸렸을 것이다. 진주만 공격에서 투하된 91식 어뢰를 제조한 미쓰비시-우라카미 병기 공장은 폭발로 파괴되었다.[17][18]
7. 3. 피해
B-29 폭격기 보크스카의 기장인 찰스 스위니 소령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실시했다.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북부(현재 마쓰야마마치) 상공 550m에서 팻 맨이 투하되었다.[25] 팻 맨의 위력은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에 투하된 리틀 보이보다 약간 강했지만, 나가사키는 기복이 심한 지형이어서 피해 규모는 히로시마에 비해 작았다.당초 폭격 목표는 고쿠라였으나, 후쿠오카현 야하타에 대한 소이탄 공습으로 발생한 구름과 연기로 인해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3번의 폭탄 투하 시도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결국 대체 목표였던 나가사키 역시 구름에 가려져 있었으나, 폭격수 커밋 K. 비한 대위가 구름 사이로 틈을 발견하여 팻 맨을 투하, 고도 약 502.92m에서 폭발했다.[25]
나가사키 폭격으로 인한 즉사자는 약 35,000~40,000명으로 추산되며, 장기적인 건강 영향(특히 백혈병)까지 포함하면 총 60,000~80,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11] 직접적인 사망과 부상의 대부분은 탄약 또는 산업 노동자들이었다.[12]
진주만 공격에서 투하된 91식 어뢰를 제조한 미쓰비시-우라카미 병기 공장은 폭발로 파괴되었고, 미쓰비시의 산업 생산 또한 공격으로 인해 중단되었다.[12][13]
구분 | 피해 내용 |
---|---|
사망자 | 약 73,900명 |
부상자 | 약 74,900명 |
피해 면적 | 6702300m2 |
전소 및 전괴 가옥 | 약 12,900동 |
8. 전후 개발
전후, 팻 맨 모형이 여러 곳에 전시되었다.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핵실험 박물관과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시의 원자력 박물관에는 실제 크기 모형이 전시되었다. 대부분 모형은 외관만 볼 수 있지만, 짐 산본의 모형은 내부 주요 부분을 볼 수 있다.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와 육군 항공대는 팻 맨 설계를 개선하기 시작했다. 노스아메리칸 B-45 토네이도, 컨베어 XB-46, 마틴 XB-48, 보잉 B-47 스트라토제트 폭격기는 팻 맨보다 길지만 폭이 좁은 그랜드 슬램 폭탄을 탑재할 수 있었다. 당시 팻 맨을 탑재할 수 있는 미국 폭격기는 B-29와 컨베어 B-36뿐이었다. 1945년 11월, 육군 항공대는 로스앨러모스에 팻 맨 200개를 요청했지만, 플루토늄 코어와 고성능 폭발물 어셈블리는 두 세트밖에 없었다. 육군 항공대는 제조, 조립, 취급, 운송, 비축을 쉽게 하기 위해 설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전쟁 중 진행된 프로젝트 W-47이 계속되었고, 1946년 1월 투하 시험이 재개되었다.[15]
1946년 중반, Mark III Mod 0 팻 맨 생산이 시작되었다. 고성능 폭발물은 프로젝트 캐멀의 일부로 맨해튼 프로젝트에 의해 설립된 솔트 웰스 파일럿 플랜트에서 제조되었고, 아이오와 육군 탄약 공장에 새 공장이 설립되었다. 기계 부품은 록 아일랜드 군수창에서 제작 또는 조달되었으며, 1946년 8월까지 약 50개 폭탄의 전기 및 기계 부품이 키틀랜드 육군 비행장에 비축되었지만, 9개 플루토늄 코어만 사용 가능했다. 1948년 12월 Mod 0 생산이 종료되었을 때에도 53개 코어만 사용 가능했다. Mod 0은 Mod 1 및 2로 알려진 개선된 버전으로 대체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변경 사항은 항공기에서 해제될 때까지 X-유닛 발사 시스템의 커패시터를 충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1949년 3월과 7월 사이에 Mod 0은 운용에서 제외되었고, 10월까지 모두 Mod 1 및 2로 재건되었다.[16] 1947년에서 1949년 사이에 약 120개 Mark III 팻 맨이 비축되었고,[14] 이후 Mark 4 핵폭탄으로 대체되었다.[15] Mark III 팻 맨은 1950년에 퇴역했다.[14][15]
1940년대 후반, Mark III 팻 맨의 제약으로 인해 핵 공격은 어려운 과제였다. 뇌관 시스템에 전력을 공급하는 납산 배터리는 36시간 동안만 충전 상태를 유지했고, 이후에는 재충전이 필요했다. 재충전에는 72시간이 걸렸고, 폭탄을 분해해야 했다. 배터리는 9일 후 부식 방지를 위해 제거해야 했다. 플루토늄 코어는 열이 고성능 폭발물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오래 방치할 수 없었다. 코어를 교체하려면 폭탄을 완전히 분해하고 재조립해야 했다. 이 작업에는 약 40~50명 인원과 56~72시간이 필요했으며, 미국 군 특수 무기 프로젝트는 1948년 6월에 단 세 팀만 보유하고 있었다. 팻 맨을 운반할 수 있는 유일한 항공기는 실버플레이트 B-29였고, 이를 장착한 유일한 부대는 뉴멕시코주 로즈웰의 워커 공군 기지에 있는 제509 폭격 비행단이었다. 이들은 먼저 샌디아 기지로 가서 폭탄을 수집한 후 공격을 위한 해외 기지로 이동해야 했다.[17] 1948년 3월 베를린 봉쇄 당시, 모든 조립 팀은 오퍼레이션 샌드스톤 테스트를 위해 에니웨톡 환초에 있었고, 군 팀은 아직 핵무기 조립 자격이 없었다.[18]
1948년 6월, 오마 브래들리 장군, 알프레드 그린터 소장, 앤서니 맥올리프 준장이 샌디아와 로스앨러모스를 방문하여 핵무기의 "특수 요건"을 보여주었다. 그린터는 케네스 니콜스 준장에게 "진짜를 언제 보여줄 건가요? 이 실험실 괴물은 우리가 비축해 둔 유일한 유형 원자 폭탄은 아닐 것입니다."라고 질문했다.[18] 니콜스는 더 나은 무기가 곧 나올 것이라고 답했다. 오퍼레이션 샌드스톤의 "놀랍도록 좋은" 결과에 따라 개선된 무기 비축이 시작되었다.[18]
8. 1. 크로스로드 작전

전쟁 이후, 2기의 Y-1561 팻 맨 폭탄이 태평양의 비키니 환초에서 진행된 핵실험인 크로스로드 작전에 사용되었다. 첫 번째 폭탄은 1946년 영화 ''길다''에서 리타 헤이워드가 연기한 배역을 따서 ''길다''로 명명되었으며, B-29 ''데이브의 꿈''에 의해 투하되었으나 목표 지점에서 약 649.22m 벗어났다. 두 번째 폭탄은 ''비키니의 헬렌''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꼬리 날개 어셈블리 없이 잠수함의 함교에서 제작된 강철 케이슨에 배치되었다. 착륙정 USS ''LSM-60'' 아래 약 27.43m 지점에서 기폭되었다. 두 무기의 위력은 각각 약 23kt(TNT)였다.[14]
8. 2. Mark III Mod 0 생산과 퇴역
전후, 각지에서 팻 맨의 모형이 전시물로 제작되었다. 미국의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핵실험 박물관 및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시의 원자력 박물관에는 실제 크기의 모형이 전시되었다. 대부분의 모형은 외관만 볼 수 있지만, 조각가 짐 산본(Jim Sanborn)의 모형은 내부 주요 부분을 볼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전쟁 이후, 2기의 Y-1561 팻 맨 폭탄이 태평양의 비키니 환초에서 진행된 핵실험인 크로스로드 작전에 사용되었다. 첫 번째 폭탄은 1946년 영화 ''길다''에서 리타 헤이워드가 연기한 배역을 따서 ''길다''로 명명되었으며, B-29 ''데이브의 꿈''에 의해 투하되었으나, 목표 지점에서 약 649.22m 벗어났다. 두 번째 폭탄은 ''비키니의 헬렌''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꼬리 날개 어셈블리 없이 잠수함의 함교에서 제작된 강철 케이슨에 배치되어 착륙정 USS ''LSM-60'' 아래 약 27.43m 지점에서 기폭되었다. 두 무기의 위력은 각각 약 23kt(TNT)였다.[14]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와 육군 항공대는 이미 설계를 개선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노스아메리칸 B-45 토네이도, 컨베어 XB-46, 마틴 XB-48, 보잉 B-47 스트라토제트 폭격기는 팻 맨보다 훨씬 길지만 넓이는 좁은 그랜드 슬램을 탑재할 수 있는 폭탄창을 가지고 있었다. 팻 맨을 탑재할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의 폭격기는 B-29와 컨베어 B-36이었다. 1945년 11월, 육군 항공대는 로스앨러모스에 200개의 팻 맨 폭탄을 요청했지만, 당시 플루토늄 코어와 고성능 폭발물 어셈블리는 단 두 세트만 있었다. 육군 항공대는 제조, 조립, 취급, 운송 및 비축을 더 쉽게 하기 위해 설계 개선을 원했다. 전쟁 중의 프로젝트 W-47이 계속되었고, 1946년 1월에 투하 시험이 재개되었다.[15]

Mark III Mod 0 팻 맨은 1946년 중반에 생산이 명령되었다. 고성능 폭발물은 프로젝트 캐멀의 일부로 맨해튼 프로젝트에 의해 설립된 솔트 웰스 파일럿 플랜트에서 제조되었고, 아이오와 육군 탄약 공장에 새로운 공장이 설립되었다. 기계 부품은 록 아일랜드 군수창에서 제작 또는 조달되었으며, 약 50개의 폭탄에 대한 전기 및 기계 부품은 1946년 8월까지 키틀랜드 육군 비행장에 비축되었지만, 9개의 플루토늄 코어만 사용할 수 있었다. Mod 0의 생산은 1948년 12월에 종료되었으며, 그 시점에도 53개의 코어만 사용할 수 있었다. 이 폭탄은 몇 가지 사소한 변경 사항을 포함하는 Mod 1 및 2로 알려진 개선된 버전으로 대체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항공기에서 해제될 때까지 X-유닛 발사 시스템의 커패시터를 충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Mod 0은 1949년 3월과 7월 사이에 운용에서 제외되었고, 10월까지 모두 Mod 1 및 2로 재건되었다.[16] 1947년에서 1949년 사이에 약 120개의 Mark III 팻 맨 유닛이 비축되었고,[14] 이후 Mark 4 핵폭탄으로 대체되었다.[15] Mark III 팻 맨은 1950년에 퇴역했다.[14][15]
전후 1940년대에는 Mark III 팻 맨의 제약으로 인해 핵 공격이 어려운 과제가 되었을 것이다. 뇌관 시스템에 전력을 공급하는 납산 배터리는 36시간 동안만 충전된 상태를 유지했으며, 그 이후에는 재충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폭탄을 분해해야 했고, 재충전에는 72시간이 걸렸다. 어쨌든 배터리는 9일 후에 제거해야 부식이 발생하지 않았다. 플루토늄 코어는 오래 방치할 수 없었는데, 열이 고성능 폭발물을 손상시켰기 때문이다. 코어를 교체하려면 폭탄을 완전히 분해하고 재조립해야 했다. 여기에는 약 40~50명의 인원이 필요했고, 폭탄 조립 팀의 기술에 따라 56~72시간이 걸렸으며, 미국 군 특수 무기 프로젝트는 1948년 6월에 단 세 팀만 보유하고 있었다.

폭탄을 운반할 수 있는 유일한 항공기는 실버플레이트 B-29였으며, 이를 장착한 유일한 부대는 뉴멕시코주 로즈웰의 워커 공군 기지에 있는 제509 폭격 비행단이었다. 그들은 먼저 폭탄을 수집하기 위해 샌디아 기지로 날아가서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해외 기지로 이동해야 했다.[17] 1948년 3월, 베를린 봉쇄 기간 동안, 모든 조립 팀은 오퍼레이션 샌드스톤 테스트를 위해 에니웨톡 환초에 있었고, 군 팀은 아직 핵무기를 조립할 자격이 없었다.[18]
1948년 6월, 오마 브래들리 장군, 알프레드 그린터 소장, 앤서니 맥올리프 준장이 샌디아와 로스앨러모스를 방문하여 핵무기의 "특수 요건"을 보여주었다. 그린터는 케네스 니콜스 준장에게 "진짜를 언제 보여줄 건가요? 이 실험실의 괴물은 우리가 비축해 둔 유일한 유형의 원자 폭탄은 아닐 것입니다."라고 질문했다.[18] 니콜스는 그에게 더 나은 무기가 곧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오퍼레이션 샌드스톤의 "놀랍도록 좋은" 결과가 나오자, 개선된 무기의 비축이 시작되었다.[18]
소련의 첫 번째 핵무기는 클라우스 푸흐스, 시어도어 홀, 데이비드 그린글래스와 같은 스파이들이 맨해튼 프로젝트와 팻 맨에 대한 비밀 정보를 제공한 덕분에 팻 맨의 설계를 면밀히 따랐다. 이 무기는 1949년 8월 29일 오퍼레이션 "퍼스트 라이트닝"의 일환으로 기폭되었다.[14][15][16]
8. 3. 소련의 핵무기 개발
클라우스 푸흐스, 시어도어 홀, 데이비드 그린글래스와 같은 스파이들이 맨해튼 프로젝트와 팻 맨에 대한 비밀 정보를 소련에 제공하였다. 소련의 첫 번째 핵무기는 팻 맨의 설계를 면밀히 따랐으며, 1949년 8월 29일 오퍼레이션 "퍼스트 라이트닝"의 일환으로 기폭되었다.[14][15][16]참조
[1]
웹사이트
You don't know ''Fat Man''
http://blog.nuclears[...]
Restricted Data: The Nuclear Secrecy Blog
2014-04-04
[2]
논문
A New Yield Assessment for the Trinity Nuclear Test, 75 Years Later
2021-10-11
[3]
문서
[4]
웹사이트
Section 8.0 The First Nuclear Weapons
http://nuclearweapon[...]
2007-07-03
[5]
웹사이트
Kilotons per kilogram
http://blog.nuclears[...]
Restricted Data
2013-12-23
[6]
웹사이트
The Fat Man's Uranium
http://blog.nuclears[...]
Restricted Data
2014-11-10
[7]
뉴스
What About Nagasaki?
https://www.newyorke[...]
2024-07-28
[8]
웹사이트
World War II: the battle for Kiska (pt 2). - Free Online Library
https://www.thefreel[...]
2024-07-28
[9]
웹사이트
The harrowing story of the Nagasaki bombing mission
https://thebulletin.[...]
2024-07-28
[10]
웹사이트
Bockscar … The Forgotten Plane That Dropped The Atomic Bomb « A Little Touch of History
http://awesometalks.[...]
Awesometalks.wordpress.com
2008-08-07
[11]
webarchive
Columbia university center for nuclear studies: Hiroshima and Nagasaki: The Long Term Health Effects
http://k1project.org[...]
2015-07-23
[12]
서적
Nuke-Rebuke: Writers & Artists Against Nuclear Energy & Weapons (The Contemporary anthology series)
The Spirit That Moves Us Press
1984-05-01
[13]
웹사이트
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Summary Report (Pacific War) The Effects of the Atomic Bombs
http://www.anesi.com[...]
U.S. Strategic Bombing Survey
[14]
간행물
Spies Who Spilled Atomic Bomb Secrets
https://www.smithson[...]
2009-04-19
[15]
논문
Soviet Scientists Speak Out
https://books.google[...]
[16]
웹사이트
Section 8.1.1 The Design of Gadget, Fat Man, and "Joe 1" (RDS-1)
http://www.nuclearwe[...]
2007-07-03
[17]
문서
Reassessment of the Atomic Bomb Radiation Dosimetry for Hiroshima and Nagasaki –Dosimetry System 2002 –, chapter1
https://www.rerf.or.[...]
[18]
문서
[19]
서적
Critical Assembly: A Technical History of Los Alamos During the Oppenheimer Years, 1943–1945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20]
서적
Atom Bombs: The Top Secret Inside Story of Little Boy and Fat Man
J. Coster-Mullen
2012
[21]
웹사이트
広島・長崎の被災状況
https://nagasakipeac[...]
長崎市
2023-06-01
[22]
웹사이트
知っ得・なっ得コーナー
https://h-nomore-hib[...]
北海道ノーモア・ヒバクシャ会館
2023-06-01
[23]
웹사이트
長崎原爆資料館リーフレット
https://nagasakipeac[...]
長崎市
2023-06-01
[24]
뉴스
"[천자칼럼] 원폭이 없었더라면…"
http://news.hankyung[...]
2018-10-25
[25]
문서
원자폭탄 떨어진 그곳 철창에서 갇혀 죽은 조선인들
http://www.ohmynew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