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핵무기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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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으나, 전쟁 말기까지 기술적, 자원적 한계로 인해 실패했다. 육군과 해군은 각각 니고 계획과 F-Go 계획을 통해 우라늄 농축 연구를 진행했으나, 도쿄 대공습 등으로 연구 시설이 파괴되면서 중단되었다. 종전 후, 일본은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비핵 3원칙을 채택했지만, 핵무기 개발 능력과 관련한 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현재 일본은 핵연료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 시설을 보유하고 있으며, 필요할 경우 단기간 내에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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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핵무기 개발 | |
|---|---|
| 개요 | |
| 프로그램 시작 | 1940년 (1945년에 종료) |
| 첫 번째 실험 | 없음 |
| 첫 번째 핵융합 | 없음 |
| 마지막 실험 | 없음 |
| 최대 출력 | 없음 |
| 총 실험 횟수 | 없음 |
| 최대 비축량 | 없음 |
| 현재 비축량 | 없음 |
| 현재 사용 가능한 비축량 | 없음 |
| 현재 사용 가능한 비축량 메가톤수 | 없음 |
| 최대 사거리 | 없음 |
| 관련 정보 | |
| 국가 | 일본 제국 |
| 관련 사건 | 제2차 세계 대전 |
| 관련 인물 | 니시나 요시오 |
2. 개발 배경
1934년, 도호쿠 대학 교수 히코사카 다다요시가 발표한 "원자 물리학 이론"은 원자핵에 막대한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으며, 이를 이용해 원자력 발전뿐만 아니라 강력한 무기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시했다.[2] 이후 1938년 12월, 독일의 화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은 우라늄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는 실험 중 바륨 원소를 발견했다는 결과를 학술지 ''자연과학''에 보고했다.[3] 이들은 실험 결과를 리제 마이트너에게 알렸고, 마이트너는 조카인 오토 로베르트 프리쉬와 함께 이 현상이 바로 핵분열임을 정확히 밝혀냈다.[4] 프리쉬는 1939년 1월 13일 실험을 통해 핵분열을 성공적으로 재현했다.[5] 이 발견은 전 세계 물리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과학자들은 핵분열을 이용한 핵연쇄반응이 가능하며 이를 통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즉시 인지하고 각국 정부에 알리기 시작했다.
1930년대 후반 핵분열 현상이 발견되면서 세계 각국에서 핵무기 개발 가능성이 대두되었다. 일본에서도 도호쿠 대학의 히코사카 다다요시 등이 원자력의 군사적 이용 가능성을 제기했으며,[6] 특히 이화학연구소(리켄)의 저명한 물리학자 니시나 요시오는 핵분열 연구를 주도하며 일본 양자역학 도입에 기여하고 사이클로트론을 건설하는 등 핵물리학 연구 기반을 마련했다.[6][7][8] 니시나는 미국의 핵개발 가능성을 우려하며 핵무기의 군사적 잠재력을 인지하고 있었다.[9]
일본에서 원자력 연구를 주도한 인물은 니시나 요시오 박사였다. 그는 닐스 보어의 가까운 동료였으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동시대에 활동한 저명한 물리학자로, 클라인-니시나 공식을 공동으로 발표하기도 했다.[6][7] 니시나는 기초 과학 연구를 장려하기 위해 1917년 도쿄에 설립된 이화학연구소(RIKEN)에 1931년 고에너지 물리학 연구를 위한 자신의 연구실을 열었다.[8] 그는 일본의 핵물리학 연구 기반을 다지기 위해 노력하여 1936년에는 일본 최초의 약 66.04cm 사이클로트론을, 1937년에는 더 큰 규모인 약 152.40cm 220톤 사이클로트론을 건설했다. 또한 1938년에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로부터 사이클로트론을 구매하기도 했다.[6]
당시 일본은 독일과의 동맹 관계 및 독일의 4개년 계획의 영향을 받아 서구 열강과의 기술 격차를 줄이기 위해 핵 과학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니시나는 일본에 양자역학을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9] 1939년에 이르러 니시나는 핵분열이 가진 가공할 군사적 잠재력을 명확히 인식했으며, 특히 미국이 일본을 겨냥한 핵무기를 개발할 가능성에 대해 깊이 우려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8월, 헝가리 출신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와 유진 위그너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이름으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 이른바 아인슈타인-실라르드 서한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 서한은 "극도로 강력한 새로운 유형의 폭탄" 개발 가능성을 경고하며 미국의 핵 연구 착수를 촉구했다.[10] 이를 계기로 미국은 핵무기 개발을 위한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게 되었으며, 공교롭게도 일본이 사이클로트론을 구매했던 버클리 연구소가 이 계획의 핵심 연구 시설 중 하나가 되었다.
1940년 초여름, 니시나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야스다 다케오 육군 중장을 만났다. 당시 육군 항공기술연구소 소장이었던 야스다에게 니시나는 핵무기 제조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설명했다.[11] 하지만 일본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뒤인 1941년 4월이었다. 당시 육군대신이었던 도조 히데키가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야스다 중장은 이 명령을 이화학연구소 소장인 오코치 마사토시 자작에게 전달했다. 오코치 소장은 다시 이 임무를 니시나 박사에게 맡겼다. 1941년 당시 니시나의 핵 연구소에는 이미 100명이 넘는 연구원들이 소속되어 있었다.[12]
3.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태평양 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일본 군부는 본격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대일본제국 육군은 1941년 4월, 육군 항공 기술 연구소를 통해 이화학연구소의 니시나 요시오에게 원자폭탄 개발 연구를 의뢰하며 '니고 계획(ニ号研究)'을 비밀리에 시작했다.[11][12]
대일본제국 해군 역시 육군과는 별개로 독자적인 핵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해군 기술 연구소의 이토 요지 대좌 등이 초기 연구를 주도했으며, 특히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참패 이후 핵무기 개발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 교토 제국 대학의 아라카츠 분사쿠 교수에게 연구를 의뢰하여 'F-Go 계획(F研究)'을 진행했다.[9][65][68] 아라카츠는 저명한 핵물리학자였으며, 그의 연구팀에는 훗날 일본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되는 유카와 히데키도 참여했다.[16][66]
그러나 육군과 해군의 핵 개발 시도는 여러 가지 심각한 난관에 부딪혔다. 고품질 우라늄 광석 확보가 매우 어려웠으며, 중수와 같은 필수 자원도 부족했다. 또한 기술적인 문제와 부족한 자금 지원 역시 연구 개발을 더디게 만들었다. 특히 1945년 초 도쿄 대공습으로 이화학연구소의 핵심 연구 시설이 파괴되면서 육군의 니고 계획은 사실상 중단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9][12] 해군의 F-Go 계획 역시 기술적 한계로 설계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12][17] 전쟁 말기에는 육군과 해군 간의 정보 교환이나 협력 시도도 있었으나[65][101],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결론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일본의 핵무기 개발 노력은 기초 연구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1945년 여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일본이 패전하면서 모든 핵 개발 계획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패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일본 내 모든 사이클로트론 등 핵 연구 관련 시설을 파괴하고 원자력 연구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18][19][104]
3. 1. 니고 계획 (육군)
대일본제국 육군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은 "2호 연구"(ニ号研究, 니고 계획)로 불린다. 이는 연구 책임자였던 니시나 요시오의 머리글자 '니(ニ)'에서 유래했다는 설[65] 또는 군의 극비 연구 부호 순서(이, 로, 하, 니...)에 따라 '니' 부호가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1940년 4월, 육군 항공 기술 연구소 소장 야스다 타케오 중장은 부하 스즈키 신자부로[69]에게 원자폭탄 제조 가능성 조사를 명령했다. 야스다는 이전부터 핵물리학에 관심을 가져 이화학연구소(리켄)의 니시나 요시오 등을 초빙해 강연을 열기도 했다.[65] 스즈키는 도쿄 제국 대학의 사가네 료키치 조교수의 조언을 받아 2개월 후 "원자폭탄 제조 가능" 보고서를 제출했다. 야스다는 이를 도조 히데키 육군 대신 등 상층부에 보고하고 관련 기관에 배포했다.
1941년 5월, 육군 항공 기술 연구소는 이화학연구소의 오코치 마사토시 소장에게 "우라늄 폭탄 제조 가능성" 연구를 공식 의뢰했고, 니시나 주임 연구원이 6월부터 연구에 착수했다.[75] 1943년 5월, 니시나는 "기술적으로 우라늄 폭탄 제조는 가능하다고 생각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76]
이 보고를 받은 야스다 중장은 즉시 부하 카와시마 토라노스케 대좌에게 연구 추진을 명령하고, 이를 최고 군사 기밀로 지정하여 항공 본부 직할 연구로 삼았다. 이는 극히 이례적인 조치였다.[77][78] 이로써 1942년부터 이화학연구소에서 니고 계획이라는 실험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계획의 목표는 우라늄-235를 열 확산법을 통해 분리하는 것이었으며, 전자기 분리, 기체 확산, 원심 분리와 같은 다른 방법들은 고려되지 않았다.
연구는 난항을 겪었다. 1944년 봄까지 Clusius tube에 사용할 육불화 우라늄(UF6) 부족과 구리관 부식 문제로 거의 진전을 보지 못했다.[9] 1945년 2월, 이화학연구소 단지 내의 기초 분리 장치에서 소량의 물질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지만, 사이클로트론 분석 결과 우라늄-235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원자로 건설 시도는 없었고 중수도 구할 수 없었으나, 분리 장치를 담당했던 타케우치 마사는 우라늄을 5~10% 농축할 수 있다면 경수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계산했다.[12]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으로 이화학연구소 건물이 파괴되면서 분리 장치 프로젝트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 공격으로 Clusius tube 역시 파괴되어 일본이 핵무기를 개발할 기회는 사실상 사라졌다.[9][12]
한편, 육군과 해군은 우라늄 확보에 필사적이었다. 후쿠시마현 이시카와정 등지에서 우라늄 광석을 찾았으며, 한반도, 중국, 버마 등지로 탐사를 확대했다.[12] 이이모리 사토야스의 기술 지도로 북조선 지역에서 유망한 우라늄 매장지가 발견되기도 했다.[93] 1944년 12월부터는 후쿠시마현 이시카와정에서 우라늄 채굴을 시작했고, 1945년 4월부터 종전까지 이이모리 사토야스가 이끄는 '리켄 희토류 공업 부상 제806 공장'에서 지역 중학교 학생들을 근로 동원시켜 섬우라늄광 등을 채굴하게 했다.[94][95][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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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채굴량은 극히 미미했고 우라늄 함유율도 낮았다. 또한 동맹국인 나치 독일에게서 560kg의 미가공 산화 우라늄을 잠수함 U-234 편으로 수송받으려 했으나, 1945년 4월 출항한 잠수함은 독일의 항복으로 대서양에서 미국에 나포되었다. 이 산화 우라늄은 "U-235"로 표시되었으나, 실제로는 무기급 물질이 아니며 항공 연료용 합성 메탄올 생산 촉매제였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13][14]
1945년 초, 해군 기술 관계자가 육군 항공 본부를 방문하여 니고 계획의 실험 데이터 공유를 요청했고, 육군은 "육군이니 해군이니 할 때가 아니다"라며 데이터를 넘겨주었다. 교토 제국 대학에서 육불화 우라늄 제조를 담당하게 된 사사키 신지가 리켄의 키고시를 방문하여 제조법을 견학하기도 했다. 또한 아라카츠 분사쿠 교수도 리켄을 방문하여 니시나의 안내로 열확산 분리통을 보고 물자 부족 속에서의 노력을 평가했다.[65] 육군 측은 우라늄 광석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 고다마 요시오를 통해 상하이 암시장에서 우라늄을 구하던 해군에게 광석 분배를 요청하기도 했다.[101]
결론적으로 니고 계획은 고품질 우라늄의 절대적 부족과 도쿄 대공습으로 인한 핵심 시설 파괴로 실패로 돌아갔다. 역사학자 윌리엄스는 "독일 원자력 프로젝트를 방해했던 충분한 고품질 우라늄 부족이 일본의 시도 또한 방해했다"고 지적했다. 다만 맨해튼 프로젝트 정보 그룹은 일본 핵물리학자들의 수준 자체는 다른 국가들과 동등하다고 평가했다.[15]
3. 2. F-Go 계획 (해군)
대일본제국 해군은 대일본제국 육군의 '2호 연구'와는 별개로 독자적인 원자폭탄 개발 계획을 추진했는데, 이를 F-Go 계획(F 연구)이라고 한다. F는 핵분열(Fission)의 머리글자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육불화우라늄의 플루오린(Fluorine)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이 있다.[65]해군 내에서 원자폭탄에 처음 주목한 인물은 해군 기술 연구소의 이토 요지 기술 대좌로, 1939년경이었다. 1940년경 독일 잡지에 실린 우라늄-235의 잠재력에 대한 논문이 번역되어 해군 간부들에게 공유되면서 관심이 높아졌다.[68] 1941년 5월, 해군은 교토 제국 대학의 아라카츠 분사쿠 교수에게 핵분열 기술을 이용한 폭탄 개발을 의뢰했다는 기록도 있다. 같은 해 11월, 미국의 움직임을 감지한 이토 대좌는 사가네 료키치 등 도쿄 제국 대학 교수들과 상담 후 해군 기술 연구소 차원에서 '원자력 기관' 연구 조사를 시작했다.[65]
1942년 7월부터 1943년 3월까지 니시나 요시오를 위원장으로 하는 '핵물리학 응용 연구 위원회'가 10여 차례 열렸으나, "원자폭탄 제조는 가능하지만 전쟁 중 실현은 미국이라도 어려울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레이더 연구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활동을 중단했다.[65][9][12]
그러나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한 후 위기감을 느낀 해군 함정본부는 원자폭탄 연구 개발 재개를 모색했다. 함정본부의 이소 메구미 대좌 등은 교토 제국 대학 이학부의 아라카츠 분사쿠 교수에게 연구를 의뢰했다.[65][77][68] F 연구의 정확한 시작 시점은 불분명하며, 관계자들의 증언이 1942년 10월부터 1945년 초까지 다양하다. GHQ에 제출된 공식 보고서에는 1943년 5월로 기재되어 있다.[65][68]
아라카츠 분사쿠는 어니스트 러더퍼드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에게 직접 배운 저명한 핵물리학자로, 1939년 우라늄 핵분열 시 발생하는 중성자 수를 거의 정확하게 계산(2.6)하는 등 뛰어난 연구 성과를 가지고 있었다.[66] 그의 연구팀에는 훗날 일본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되는 유카와 히데키도 포함되어 있었다.[16]
F 연구는 육군의 열확산법 대신 원심분리법을 이용한 우라늄-235 분리를 목표로 했다. 매분 6만 회전으로 회전하는 초고속 원심 분리기 개발을 위해 홋신 전기, 도쿄 계기 등과 협력하고 독자적인 연구도 진행했다. 압축 공기로 회전체를 띄우는 방식 등을 고안했으나, 베어링 마찰 문제와 고속 회전을 견딜 초초두랄루민 같은 특수 재료 부족으로 설계 초안 단계에서 중단되었다.[65][79][12][17]

한편, F-Go 프로젝트는 중수 확보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보고서에 따르면, F-Go 프로젝트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 북동부 흥남과 규슈의 전기분해 암모니아 공장에서 매달 20g의 중수를 얻었다고 한다. 흥남에는 1927년 산업가 노구치 준이 설립한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소속 질소비료 공장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중수 생산 프로그램이 가동되고 있었다. 그러나 충분한 양의 중수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중성자 감속재로 사용하여 중성자 증식 연구를 수행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12]
연구 진척이 부진하자 1944년 봄에는 육군-해군 기술 집행위원회가 구성되었고,[9] 1945년 초에는 해군이 육군의 '2호 연구' 데이터를 제공받기도 했다.[65] 또한 아라카츠 교수와 교토 대학 관계자들이 육군 연구 시설을 방문하여 기술을 견학하는 등 교류가 있었으나, 해군이 고다마 요시오를 통해 확보한 우라늄 광석을 육군에 나눠달라고 요청받기도 했다.[101]
1945년 7월 21일, 비와코 호텔에서 교토 대학과 해군 관계자들이 모여 첫 합동 회의를 열었으나 이것이 마지막 회의가 되었다.[65] F 연구는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일본의 항복으로 종료되었다. 다만, 연구 과정에서 교토 대학 공학부의 오카다 타츠조가 일본 최초로 금속 우라늄 제조에 성공했고(3cm 각, 두께 1mm),[65] 유카와 연구실의 고바야시 미노루가 우라늄-235의 임계량을 이론적으로 계산(반지름 10cm에서 20cm 정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65] 해군은 F 연구를 통해 연합군의 원자폭탄 공격에 대한 방어책 연구도 고려했으며,[81]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에는 연구 관계자들이 현지 조사에 참여하기도 했다.[82][83]
3. 3. 연구 중단과 패전
1944년 봄까지 니시나의 니호 연구(육군)는 육불화 우라늄 부족으로 거의 진전을 보지 못했다.[9] 구리 튜브 내의 우라늄은 부식되어 우라늄-235 동위원소를 분리할 수 없었다.[9] 1945년 2월, 소수의 과학자들이 이화학연구소 단지 내 분리 장치에서 소량의 물질 생산에 성공했지만, 사이클로트론 분석 결과 우라늄-235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12]특히 1945년 3월 10일 도쿄 대공습으로 이화학연구소의 열확산 분리통 건물이 소실되면서 육군의 니호 연구는 사실상 중단되었다.[12][102] 원자로 건설 시도는 없었고, 중수 확보도 어려웠다. 다만 니시나 팀의 타케우치 마사는 우라늄을 5~10% 농축할 수 있다면 경수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계산했다.[12] 이 공습은 일본이 핵무기를 개발하여 전쟁에 영향을 미칠 기회를 효과적으로 파괴했다.[9]
해군의 F-Go 프로젝트(교토 대학 아라카츠 분사쿠 중심)는 원심분리법을 연구했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분당 6만 회전을 목표로 한 초원심분리기 설계만 완료된 상태였다.[12][17] 1944년 봄, 핵무기 개발 진전이 없자 육군-해군 기술 집행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45년 7월 21일 F-Go 프로젝트 과학자 회의가 열렸으나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동위원소 분리 연구 시설인 49동이 파괴되면서 연구는 종결되었다.[9]
자원 확보 노력도 결실을 보지 못했다. 육군과 해군은 후쿠시마현 등지에서 우라늄 광석을 찾고[12], 동맹국 독일에 우라늄을 요청했다. 1945년 4월, 560kg의 가공되지 않은 산화 우라늄을 실은 독일 잠수함 U-234가 일본으로 향했지만, 독일 항복 후 대서양에서 미군에 나포되었다. 이 산화 우라늄은 "U-235"로 표시되었으나, 무기급 물질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3][14] 맨해튼 계획 정보 그룹은 일본의 핵물리학자 수준은 높지만, 독일과 마찬가지로 고품질 우라늄 부족이 일본의 원자폭탄 개발을 방해했다고 결론지었다.[15]
1945년 5월 중순, 니시나는 연구자들을 모아 니호 연구 중지를 결의하고[78], 5월 말 항공 본부에 연구 불가 입장을 전달했다.[78] 육군은 6월 28일 공식적으로 연구 중단을 결정했고[78], 7월에는 해군도 연구를 중단하여 일본의 원자폭탄 개발은 완전히 좌절되었다.[98] 결국 일본의 핵 개발은 기술적 한계와 자원 부족으로 기초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 피폭 후 일본은 8월 14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했다. 패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일본의 핵 연구 시설 파괴를 명령했다.[98] 1945년 11월 24일, 이화학연구소와 교토 대학, 오사카 대학의 사이클로트론이 파괴되어 도쿄 만에 버려졌다.[18][19] 니시나는 사이클로트론이 무기 개발과 무관한 기초 연구용이었다고 항의했지만[19], 아라카츠 분사쿠 역시 순수 학술 연구 시설임을 강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04] 아라카츠는 연구 노트 제출 요구에 "실험 노트를 꼭 남겨두고 싶다"고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107] 이 파괴 행위는 이후 미국 내에서도 비판받았으며[103], 당시 미국 육군 장관 로버트 P. 패터슨은 이를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인정했다.[104] 1947년 1월 극동 위원회는 일본의 원자력 연구를 금지했고, 이는 점령이 끝날 때까지 유지되었다.[104]
니호 연구와 F-Go 연구에는 당시 일본의 주요 핵물리학자들이 참여했으며, 전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유카와 히데키도 F-Go 연구에 참여했다.[109][80] 니호 연구에 투입된 연구비는 당시 약 2,000만 엔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미국의 맨해튼 계획에 투입된 약 22억 달러(당시 약 103억 엔)와 비교된다.[98]
4. 전후 상황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5년 10월 16일, 니시나 요시오는 미국 점령군으로부터 리켄 연구소의 사이클로트론 2기를 생물학 및 의학 연구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허가받았다. 그러나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1월 10일, 워싱턴의 미국 육군 장관은 리켄 연구소뿐만 아니라 교토 대학, 오사카 대학의 사이클로트론까지 모두 파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18] 이 지시는 11월 24일 실행되어 리켄의 사이클로트론은 해체된 뒤 도쿄만에 버려졌다.[19]
니시나는 이 파괴 조치에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리켄의 사이클로트론이 핵무기 생산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지만, 대형 사이클로트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전시 핵무기 개발 계획인 니고 계획의 일부였다. 니시나는 사이클로트론이 원자력 기초 연구에 기여할 수 있다고 제안하여 계획에 포함시켰는데, 이는 연구를 계속하고 자금을 확보하며 연구원들의 군 징집을 막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일본이 핵무기를 생산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기에 이러한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다고 해명했다.[19]
전후 일본은 핵무기 개발을 공식적으로 포기했지만, 1960년대에는 서독 정부에 핵무기 공동 개발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이 있다.[120] 당시 일본 외무성의 한 당국자는 "국제적인 감시에도 불구하고 핵분열 물질의 5% 정도는 추출을 막기 어렵기 때문에 핵탄두 생산 기반이 될 수 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121] 실제로 원자력 발전소 연료로 사용되는 저농축우라늄(SEU)의 수출입 과정에서는 오차가 발생하기 쉬운데, 2010년 일본이 사용한 연간 SEU 양인 1,600톤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5%인 80톤을 다른 용도로 전용할 수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농도 5% SEU 80톤은 고농축우라늄(HEU) 4톤에 해당하며, 이는 TNT 20kt급 핵폭탄 약 800발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122]
4. 1. 핵무기 실험 보고서
1946년 10월 2일, 애틀랜타의 ''애틀랜타 헌법''(Atlanta Constitution) 신문은 기자 데이비드 스넬(David Snell)의 기사를 게재했다.[20] 스넬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한국에서 미 육군 제24범죄수사대 소속 조사관으로 활동했으며, 기사에서 일본이 소련군에게 점령되기 전인 1945년 8월 12일 함경남도 흥남 (고난) 앞바다에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정보를 1945년 9월 서울에서 만난 일본군 장교로부터 얻었다고 밝혔는데, 이 장교는 '와카바야시 대위'라는 가명을 사용했으며 흥남에서 방첩 업무를 담당했다고 한다.[21][22][23] 그러나 당시 일본의 핵물리학 연구에 대한 정보를 엄격히 통제하던 SCAP 관계자들은 스넬의 보고서를 신빙성이 낮다고 판단하여 일축했다.[24]1947년부터 1948년 사이에 진행된 조사에서는 해당 핵 개발 프로젝트에 대해 알고 있었거나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일본 과학자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조사 결과, 많은 수의 일본 과학자들이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건너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스넬 이야기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은 더욱 커졌다.[22]
스넬의 주장은 이후 로버트 K. 윌콕스(Robert K. Wilcox)가 1985년에 출간한 저서 ''일본의 비밀 전쟁: 자체 원자 폭탄을 만들기 위한 일본의 시간과의 경쟁''(Japan's Secret War: Japan's Race Against Time to Build Its Own Atomic Bomb)에서 다시 언급되었다. 윌콕스는 이 책에서 일본이 흥남 지역에서 원자력 프로그램을 진행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새로운 정보 자료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25]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에너지부 직원 로저 M. 앤더스(Roger M. Anders)가 학술지 ''군사 문제''(Military Affairs)에 기고한 서평,[26] 과학사 학자들이 학술지 ''이시스''(Isis)에 발표한 논문,[27] 그리고 학술지 ''정보 및 국가 안보''(Intelligence and National Security)에 실린 또 다른 논문 등에서 신뢰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반박되었다.[28]
한편, 중국, 러시아, 북한 등 주변국에서는 일본의 핵실험 또는 핵무기 개발 시도에 대한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 '''중국''': 중화인민공화국 국토자원부 산하 중국지질조사국은 2015년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일본이 1939년에서 1940년 사이에 중국 랴오닝성 안산시 해성 지역에서 우라늄 광맥을 발견한 뒤 일본 내에서 핵무기를 제조하고 실험을 진행했다고 주장했다.[112] 일본 측 기록에도 만주국 해성현에서 채취된 유크센석(우라늄 함유 광물)이 도쿄 제국대학 기무라 겐지로 연구실에서 분석되었다는 내용이 있으나,[115][116] 이것이 핵무기 제조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이화학연구소의 공정 기록에도 유크센석을 이용한 우라늄 추출 과정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나가시마 오토키치가 현지에서 채취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크센석 표본은 현재 나카츠가와시 광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117]
- '''러시아''': 러시아 국영 통신사인 스푸트니크는 2013년 기사에서, 일본이 1945년 8월 12일 함흥 앞바다에서 소형 선박에 핵탄두를 싣고 폭파 실험을 했으며, 이로 인해 직경 1km의 화구가 발생하고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고 보도했다.[113] 이 주장은 윌콕스의 저서[118] 내용과 유사하지만, 일본의 과학사가 야마자키 마사카츠는 "직경 1km의 화구는 히로시마 원폭의 10배에 달하는 1메가톤급 위력으로, 당시 기술 수준을 고려할 때 불가능하다"고 지적하며 윌콕스가 인용한 GHQ 자료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여러 모순점을 비판했다.[119]
- '''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로동신문은 2018년 기사에서 "일본은 패전 직전까지 함흥의 흥남 해역에서 핵폭발 실험을 실시하려는 무모한 노력을 했다"고 주장하며, 일본을 "장래에 핵범죄를 저지를 예비군"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일본의 핵실험에 대한 주장은 주로 외부에서 제기되었으나, 일본 내부 기록이나 과학적 검증을 통해 명확히 확인된 바는 없으며, 특히 함흥 핵실험 주장은 구체적인 반박에 직면하는 등 전반적으로 신빙성이 낮다는 평가를 받는다.
4. 2. 플루토늄 문제
플루토늄은 핵무기로 사용되는 대표적인 물질이다. 북한이 플루토늄 60kg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어 전 세계가 크게 우려하는 상황에서, 일본은 유럽으로부터 수입한 40ton의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플루토늄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그리고 IAEA와 맺은 원자력 협정에 따라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다.4. 3. 핵연료 재처리 시설 및 우라늄 농축 시설
핵연료 재처리는 사용후 연료에서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추출하여 원자력 발전소에서 다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북한의 영변에도 PUREX 공정을 이용한 재처리 시설이 존재한다.일본은 1977년 미일 원자력 협정에 따라 이바라키현 도카이촌에 일본핵연료변환회사(JCO)의 재처리 공장을 건설했다. 이후 아오모리현 롯카쇼촌에는 1992년 12월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이, 2006년 3월에는 재처리 공장이 완공되었다.[123] 2006년 기준으로 상업용 재처리 공장을 가동 중인 국가는 일본, 러시아, 인도, 영국, 프랑스 5개국이었다.[123]
핵폭탄 제조에는 우라늄의 무기급 고농축 방식도 사용될 수 있으므로, 우라늄 농축 시설 역시 국제적인 규제 대상이다. 일본은 우라늄 농축 공장을 보유하고 있으며,[124] 미일 원자력 협정에 따라 우라늄 농축도가 20%를 초과할 경우 미국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한다.[125]
5. 탄도 미사일
일본은 평화헌법 제9조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지대지 탄도 미사일을 보유하지 않는다. 해군 구축함의 함대지 미사일이나 공군 전투기의 공대지 미사일 장착 또한 제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자위대라는 준군사조직을 보유하고 있으며, 2005년 당시 관방장관이었던 아베 신조 총리는 지대지 핵탄두 미사일 보유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발언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일본은 우주발사체 개발을 통해 탄도 미사일과 관련된 기술을 꾸준히 축적해왔다. 1970년에는 독자 개발한 고체연료 로켓 람다 4S로 일본 최초의 인공위성 오스미 위성을 발사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 미국의 기술을 일부 도입한 액체연료 로켓 N-I 등을 개발했다. 일본 정부는 우주발사체는 탄도 미사일과 다르다고 주장하며, 현재 미사일 없이 우주발사체만 보유한 유일한 국가임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일본의 상업용 로켓 기술이 군사적 목적으로 쉽게 전용될 수 있으며, 기술적으로 탄도 미사일과 구분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126]
일본은 M-V와 같은 고체 연료 로켓을 개발했으며, 현재는 엡실론을 운용하고 있다. 또한 대기권 재돌입 기술 관련 경험도 축적해왔다.[42] 이러한 기술적 기반은 일본의 잠재적인 핵 억제력 확보 논의와도 연결된다. 전 국방부 장관 이시바 시게루는 상업용 원자로를 유지하는 것이 단기간 내 핵탄두 생산 능력을 확보하게 해주는 "묵시적인 핵 억제력"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42] 일각에서는 일본의 핵 억제력이 탄도 미사일 잠수함을 갖춘 해상 기반 형태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43]
5. 1. 고체 로켓
일본은 우주발사체 또는 관측 로켓이라는 명목으로 고체연료 로켓 기술을 꾸준히 개발해왔다. 1966년부터 시험 발사를 시작하여 1970년에는 독자 개발한 고체연료 로켓 람다 4S로 일본 최초의 인공위성 오스미 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초기에는 연필 크기의 펜슬 로켓, 아기 크기의 베이비 로켓부터 개발을 시작했다.일반적으로 민간용 우주발사체는 효율성이 높은 액체연료 로켓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군사용 탄도 미사일은 신속한 발사가 가능한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고체연료 로켓은 액체연료와 달리 장시간의 연료 주입 과정이 필요 없어 발사 준비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군사 정찰위성 등에 의한 사전 탐지가 어렵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연료를 미리 주입한 상태로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여 유사시 즉각적인 발사가 가능하다. 이러한 군사적 효용성 때문에 국제사회에서는 대형 고체연료 로켓 기술의 확산을 경계하며 개발 및 이전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일본은 평화헌법에 따라 탄도 미사일 보유가 금지되어 있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으며, 우주발사체는 탄도 미사일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일본이 개발한 상업용 우주발사체와 탄도 미사일 사이에 기술적인 구분이 사실상 어렵다고 지적한다.[126]
일본이 개발한 대표적인 고체연료 로켓은 다음과 같다.
| 로켓 이름 | 최초 발사 | 단 구성 | 무게 | 탑재 능력 (LEO) |
|---|---|---|---|---|
| M-V 로켓 | 2000년 | 3단 고체 | 140ton | 1800kg |
| 엡실론 로켓 | 2013년 | 3단 고체 | 90ton | 1200kg |
특히 M-V 로켓은 미국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인 LGM-118A 피스키퍼와 디자인 면에서 유사성이 지적되기도 했으며, 이를 통해 일본이 미사일 기술 기반을 확보했다는 평가도 있다. 현재는 M-V 로켓보다 발사가 용이한 2세대 고체연료 로켓인 엡실론을 운용하고 있다.
또한 일본은 OREX, HOPE-X 등의 프로젝트를 통해 대기권 재돌입 기술에 대한 경험을 축적해왔다. 전직 자위대 중장이자 도쿄도청 고문이었던 시카타 토시유키는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진행된 하야부사 탐사선의 귀환 임무 성공이 일본의 탄도 미사일 관련 기술의 신뢰성을 입증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42] 이는 일본의 고체 로켓 및 관련 기술이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는 배경이 된다.
6. 아베 신조와 일본의 핵무장론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일본의 핵무장 가능성에 대해 꾸준히 언급해왔다. 그는 관방 부장관이던 2002년 5월 13일, 와세다 대학교 공개 강연에서 "일본이 원자탄을 갖는 건 헌법상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며, "결심하면 1주일 이내에 핵무기를 가질 수 있다"고 발언했다.[127] 이는 단순히 한두 개의 핵탄두 보유를 넘어, 단기간 내에 실질적인 핵 능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이스라엘의 핵무기 보유 방식과 비교되기도 한다. 이스라엘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과 핵탄두의 설계, 생산, 배치, 실험까지 완료한 상태에서, 필요시 며칠 만에 수백 기의 미사일에 핵탄두를 조립하여 즉시 발사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의 군사전문 그룹 제인스는 이스라엘이 약 30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으며, 대부분은 유사시 신속하게 조립할 수 있는 상태로 보관 중이라고 분석한다.[128]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 방식은 아베 전 총리가 언급한 '1주일 내 핵무장'의 현실적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거론되기도 한다.
일본 내에서 핵무장 논의가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경험으로 강력한 반핵 정서가 형성되었고, 전후 평화헌법은 공격적 군사력 보유를 금지했으며, 1967년에는 핵무기 3원칙(비핵 3원칙)을 채택하여 핵무기의 생산, 보유, 반입을 금지했다. 그러나 1964년 중국이 첫 핵실험에 성공하자, 당시 총리였던 사토 에이사쿠는 1965년 1월 미국의 린든 B. 존슨 대통령에게 중국의 핵 보유에 맞서 일본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토 총리는 당시 일본 여론이 이를 허용하지 않겠지만, 젊은 세대를 '교육'하면 여론을 바꿀 수 있다고 덧붙여 미국 측을 놀라게 했다.[29]
사토 내각 시기에는 핵무장 옵션이 계속 검토되었다. 특히 전술 핵무기는 대규모 전략무기와 달리 방어적 성격으로 해석될 수 있어 헌법에 위배되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훗날 총리가 된 나카소네 야스히로 당시 방위청 장관이 의뢰한 한 보고서는 소규모의 순수 방어용 핵무기 보유는 합헌일 수 있으나, 국제 사회의 부정적 반응과 전쟁 발발 위험 등을 고려하여 "현재로서는"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29] 아베 전 총리의 발언은 이러한 과거의 논의들과 맥락을 같이 하며, 일본 내 보수 세력의 핵무장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6. 1.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핵무기 은닉 의혹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했을 당시, 일본이 미국의 지원 제안을 거절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중국은 일본이 원자력 발전소 내부에 핵무기를 숨겨두었기 때문에 미국의 지원을 거부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129] 일본 정부는 이러한 의혹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7. 트럼프 대통령의 한일 핵무장 허용 발언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공화당 경선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는 한국과 일본의 자체 핵무장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2016년 3월 29일(현지시간), 트럼프는 CNN 주최 타운홀 미팅에서 핵 확산 자체는 반대하지만, 이미 많은 국가가 핵무기를 보유한 현실을 지적하며 "북한이 핵무기를 가질 때 일본도 이를 갖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언급했다. 그는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등 더 많은 국가가 자체 핵무기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반복하기도 했다.[130] 이러한 발언은 미국의 전통적인 핵우산 정책에 변화가 생길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동북아시아 안보 구도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8. 연표
- 1957년: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국회 답변에서 자위를 위한 핵 보유는 합헌이라고 발언했다. A급 전범이었던 기시 총리는 미국 정부에 "방위상 핵무장 필요에 쫓기게 되면 일본은 핵무장을 한다"는 비공식 방침을 전달했고, 이는 미국의 미일동맹 강화 추진으로 이어졌다.
- 1961년 11월: 이케다 하야토 총리가 방일한 딘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에게 "내각 안에 핵무장론자가 있다"고 언급했다.
- 1964년 10월 16일: 도쿄올림픽 기간 중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일본이 강력히 반발했다.
- 1964년 12월: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에드윈 라이샤워 주일 미국 대사에게 "타인이 핵을 가지면 자신도 가져야 한다는 건 상식"이라고 말했다.
- 1964년 12월: 사토 내각 내각조사실에서 정책 브레인 와카이즈미 게이가 '중공 핵실험과 일본의 안전보장'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는 일본이 비핵화를 유지하되, 중국보다 뛰어난 핵무장 기술 보유를 과시해야 하며 이를 위해 대규모 원자력 연구와 우주로켓 연구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사토 에이사쿠 총리는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동생이다.
- 1965년 6월: 미국 군비관리군축국에서 '일본의 핵무기 분야에 관한 전망'이라는 45쪽 분량의 비밀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문서는 2004년 5월 10일에 비밀 해제되었다.[131]
- * 1971년까지 연간 30개의 핵무기를 제조할 능력이 있다.
- * 1975년까지 핵무기 탑재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을 연간 100기 개발할 수 있다.
- * 1971년이면 핵실험이 가능하다.
- 1967년: 사토 총리가 '핵무기를 보유하지도, 만들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비핵 3원칙'을 발표했다. 그는 이 공로 등으로 197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 1968년: 사토 내각 내각조사실 보고서에서 소량의 핵무기 제조는 용이하며, 1972년 재처리 공장이 준공되면 핵무기 제조가 가능하다고 평가했다.
- 1969년: 일본 외무성이 비밀보고서 '외교정책의 대강'을 작성하여 잠재적 핵보유 능력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 1970년: 사토 내각 내각조사실 보고서에서 일본의 핵무장이 세 가지 이유로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 * 좁은 국토에서의 지하 핵실험 어려움
- * 산업 집중에 따른 핵공격 취약성
- * 핵무장에 따른 외교적 고립
- 1970년 2월 11일: 일본이 우주로켓 발사에 성공했다.
- 1975년: 일본 과학기술청 원자력담당 과장이 도쿄 주재 영국대사관 측에 "일본은 3개월 안에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다"고 발언한 사실이 2005년 12월 28일 공개된 영국 외무부 기밀문서를 통해 확인되었다.
- 1999년: 방위청 정무차관 니시무라 신고가 "핵무기를 갖고 있는 것이 일본의 안전보장에 유리하다"고 발언했다가 경질되었다.
- 2001년: 일본 정부 고위 관료가 잡지 인터뷰를 통해 "3년이면 핵무장 가능하다"고 발언했다.
- 2002년 5월 13일: 아베 신조 관방 부장관이 와세다 대학 강연에서 "자위를 위한 필요최소한도를 넘지 않는다면, 핵무기든 재래무기든 상관없이 보유하는 것을 헌법이 금하고 있지는 않다"고 주장했다.
- 2005년 2월 25일: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가 "일본은 마음먹으면 90일 안에 핵폭탄을 제조하고 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는 기술적 능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제1차 핵실험에 성공했다.
- 2006년: 아베 신조 관방장관이 "일본이 원자탄을 갖는 것은 헌법상 아무 문제가 없다"며 "결심하면 1주일 이내에 핵무기를 가질 수 있다"고 발언했다. 아베 신조는 외조부인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를 자신의 이상형으로 언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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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cading Chaos in Nuclear Northeast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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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終的な階級は陸軍中佐、1944年に理研仁科研究室に派遣されニ号研究に携わ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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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科芳雄博士生誕120周年記念講演会 日本現代物理学の父 仁科芳雄博士の輝かしき業績―ウラン-237と対称核分裂の発見―表1関連事項年表(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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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軍反省会五 34-36頁『広島上空八時十五分―被爆地調査(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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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軍反省会五 38-40頁『「新型爆弾」の正体を巡る議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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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話 被爆国・日本にもあった「幻の原爆開発計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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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争体験 少年も国のため死のうと覚悟した時代 - 原爆製造へウラン掘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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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爆開発は被爆国日本でも 葬られた極秘の開発計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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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の原爆」語り継ぐ ウラン採掘の体験者から学生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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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クシマ、秘められた原爆開発 戦争末期にウラン選鉱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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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研八十八年史より - 二つの「計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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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年5月日本化成株式会社となり2018年4月三菱ケミカル株式会社に吸収合併さ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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放射化学の泰斗 飯盛里安博士
福島県石川町教育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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旧理研研究者が「日記」 長男が保管、「仁科書簡集」収録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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荒勝文策氏:日誌に「原子核研究、芽つまれた」 サイクロトロン、GHQが破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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加速器と社会 京大サイクロトロンの歴史を語り合う ドキュメンタリー上映試写会か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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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後76年 刻む つなぐ】京大名誉教授 政池明さん(86)京大「未完」の原爆研究/科学の探究 情熱と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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いずれもウラン、希元素製品の原料、ウランの含有量は非常に低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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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産含稀元素鑛石の化學的研究(其三十五)滿洲國海城縣産ユークセン石に就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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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1960년대에 핵무기 개발 시도..서독과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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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전 日 정부 "핵보유 능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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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오모리현 우라늄농축공장 조업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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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백화종 칼럼] 일본이 핵무장을 하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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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6번째 핵무기 보유국"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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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트럼프 "韓·日 핵무장이 美 안보부담 경감" 재차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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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70년대초 핵무기 연간 30개 제조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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