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그라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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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노그라피티는 오카노 아키히토(보컬)와 신도 하루이치(기타)로 구성된 일본의 록 밴드이다. 1990년 결성된 밴드 NO SCORE를 거쳐 1994년 포르노그라피티로 결성되었으며, 1999년 싱글 "아폴로"로 메이저 데뷔했다. "사우다지", "뮤직 아워" 등 다수의 히트곡을 발표했으며, 2000년대 초반 앨범 "foo?", "구름을 잡는 사람들" 등을 통해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인기를 얻었다. 2004년 베이시스트 Tama가 탈퇴한 후, 2인조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2010년대에는 해외 진출과 데뷔 15주년 기념 앨범 발매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2020년대에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솔로 활동에 집중했으며, 2021년 싱글 "테마송"을 발매하며 밴드 활동을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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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라피티 - [음악 그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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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포르노 그라피티 |
별칭 | 포르노 |
원어명 | ポルノグラフィティ (Poruno Gurafiti) |
활동 기간 | 1994년 - 현재 |
장르 | 대체 록 파워 팝 펑크 록 알터라티노 |
출신지 | 히로시마현오노미치시 |
![]() | |
공식 웹사이트 | 포르노 그라피티 Official Site |
구성원 | |
현재 구성원 | 오카노 아키히토 (보컬) 신도 하루이치 (기타) |
이전 구성원 | 나카오 아키나리 (드럼) 오리하타 에이지 (드럼) Tama (베이스 기타) |
음반사 | |
레이블 | SME 레코드 (1999년 – 현재) |
소속사 | |
소속사 | 어뮤즈 |
유튜브 채널 정보 | |
채널 URL | 포르노그라피티 Official YouTube Channel |
활동 시작 | 2012년 |
장르 | 음악 |
구독자 수 | 59.4만 명 |
조회수 | 5억 1047만 5833회 |
통계 업데이트 | 2024년 12월 28일 |
2. 멤버
- '''오카노 아키히토''' (岡野 昭仁|오카노 아키히토일본어) : 보컬
- '''신도 하루이치''' (新藤 晴一|신도 하루이치일본어) : 기타
- '''타마''' (白玉 雅己|시라타마 마사미일본어) : 베이스 기타 (2004년 탈퇴)
2. 1. 현 멤버
데뷔 당시에는 아티스트명을 가타카나 표기('''아키히토''', '''하루이치''')로 사용했으나, 2001년 발표된 7번째 싱글 『보이스』부터 현재의 한자 표기('''오카노 아키히토''', '''신도 하루이치'''[20])를 사용하고 있다. 멤버는 이름 변경에 대해 "깊은 의미는 특별히 없지만, 전부터 바꾸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을, 우연히 이 타이밍에 바꾸게 되었다[300]."라고 언급했다.담당 | 이름 | 생년월일 | 혈액형 | 출신지 |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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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 리듬 기타 | 오카노 아키히토 (岡野 昭仁) | 1974년 10월 15일 | A형 | 히로시마현 인노시마 | [21] |
리드 기타, 백 보컬 | 신도 하루이치 (新藤 晴一) | 1974년 9월 20일 |
2. 2. 이전 멤버
데뷔 당시 멤버들은 가타카나 표기('''아키히토''', '''하루이치''', '''시라타마''')를 사용했으나, 2001년 발표된 7번째 싱글 『보이스』부터 한자 표기('''오카노 아키히토''', '''신도 하루이치''', '''시라타마 마사키[20]''')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멤버들은 이름 변경에 대해 "깊은 의미는 특별히 없지만, 전부터 바꾸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을 우연히 이 타이밍에 바꾸게 되었다[300]"고 언급했다.담당 | 인명 | 생년월일 | 혈액형 | 출신지 | 재적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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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 | 나카오 텐세이 | 1975년 4월 6일 | O형 | 와카야마현 | 1994년 ~ 1995년 | 포르노그라피티 결성 당시의 드러머로, 타마가 당시 다니던 음악 전문학교의 동급생이었다.[38] 본인에 따르면, 입학 첫날 수업에서 옆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이 타마였다고 한다. 1995년 12월 탈퇴 후 KOBAKO를 결성했으며, 현재는 드럼 강사 및 드럼 튜너로 활동하고 있다. |
오리하타 에이지 | 1971년 6월 23일 | B형 | 오사카부 | 1995년 ~ 1997년 | 1995년 12월에 열린 첫 단독 라이브부터 합류했다.[38] 당시 멤버들이 자주 다니던 악기점 겸 스튜디오의 드럼 판매점에서 일했으며, 포르노그라피티가 도쿄로 상경하기 전인 1997년 5월경 탈퇴했다.[38] 탈퇴 후 음향 기술자 및 드럼 강사로 활동했으며, TOKIO의 마츠오카 마사히로에게 드럼 지도를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 |
베이스 | 타마 (白玉 雅己|시라타마 마사미일본어) | 1974년 4월 27일 | O형 | 히로시마현 인노시마 | 1994년 ~ 2004년 6월 | 전신 밴드 NO SCORE 시절부터의 멤버이자, 포르노그라피티의 메인 작곡가 중 한 명이었다. "더욱 더 자신을 추구하기 위해"라는 의향에 따라, 2004년 7월 발매된 베스트 앨범 2장의 제작을 마지막으로 탈퇴하고 솔로 아티스트로 활동했다.[22] 2010년 이후 사실상 활동 휴지 상태였으나, 2019년부터 본명 시라타마 마사키 명의로 활동을 재개했다.[23][24] |
오카노 아키히토(Vo)와 신도 하루이치(Gt)로 구성된 2인조 일본의 록 밴드[7]이다. 1994년 오사카에서 결성[38]되었으며, 데뷔 당시에는 타마(Ba)를 포함한 3인조였다. 밴드 이름은 미국의 록 밴드인 엑스트림이 1990년에 발매한 앨범 "''Extreme II : Pornograffitti''"에서 유래되었다. 일본에서는 흔히 '''포르노'''라는 약칭으로 불린다.
3. 역사
1999년 9월 8일, 싱글 アポロ|아폴로일본어로 메이저 데뷔를 하였다[8]. 데뷔 초에는 프로듀서 혼마 아키미츠(ak.homma)와 타무라 미츠요시가 함께 음악 작업을 담당했다.[37] 데뷔 싱글 '아폴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로 인해 밴드 이름이 잘못 알려지거나 일회성 히트로 인식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ミュージック・アワー|뮤직 아워일본어, サウダージ|사우다지일본어, サボテン|선인장일본어, アゲハ蝶|아게하쵸일본어 등 히트 싱글을 연이어 발표하며 J-POP계 정상급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했다[8][9]. 특히 サウダージ|사우다지일본어와 アゲハ蝶|아게하쵸일본어는 밀리언셀러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으며, 두 번째 앨범 foo?일본어 역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또한 Mugen|Mugen일본어은 2002년 한일 월드컵 NHK 공식 테마송으로 사용되어 국민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현재까지 다수의 싱글과 앨범이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했다.
2004년 7월, 첫 베스트 앨범 『PORNO GRAFFITTI BEST RED'S』와 『PORNO GRAFFITTI BEST BLUE'S』를 동시에 발매하여 2주 연속 오리콘 차트 1, 2위를 독점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8]. 그러나 이 앨범 제작을 마지막으로 같은 해 6월 22일, 베이시스트 타마가 탈퇴하여 오카노와 신도의 2인 체제로 전환되었다[10].
2인조 재편 이후에도 ハネウマライダー|하네우마 라이더일본어, 今宵、月が見えずとも|오늘 밤, 달이 보이지 않더라도일본어, オー!リバル|오! 리발일본어, THE DAY|THE DAY일본어 등 꾸준히 히트곡을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왔다[11]. 라이브 공연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으며[12][13][14][15], 단독 콘서트 외에도 록 페스티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16][17].
2024년 9월, 메이저 데뷔 25주년을 맞아 베스트 앨범 『포르노그라피티 전서 ~ALL TIME SINGLES~』를 발매하고, 고향 이노시마와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기념 야외 라이브 『이노시마·요코하마 로맨스 포르노 '24 ~해방구~』를 개최했다[18][95][19].
'''프로듀서'''
데뷔 초부터 2012년까지는 혼마 아키미츠와 타무라 미츠요시의 2인 체제로 프로듀스를 담당했다.[37]인명 프로듀스 기간 비고 요시마타 료 1998년 타무라 미츠요시 1998년 - 현재 데뷔 전부터 현재까지, 전 곡의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혼마 아키미츠 1998년 - 2012년 1998년 여름에 프로듀서가 되어, 2012년 3월 발매된 9번째 앨범 『PANORAMA PORNO』까지 토탈 프로듀스를 담당했다.
ak.homma 명의로 アポロ|아폴로일본어, サウダージ|사우다지일본어, アゲハ蝶|아게하쵸일본어 등의 작곡, 거의 모든 곡의 편곡을 담당했다.
3. 1. 결성 이전 (1990년 ~ 1994년)
오카노는 일본 음악에서는 THE YELLOW MONKEY나 유니콘 등, 팝 음악에서는 본 조비나 건즈 앤 로지스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건즈 앤 로지스에서 받은 영향이 커서, 보컬 액슬 로즈에 대한 동경으로 고등학교 3학년 축제에서 연주했을 때 의상은 아버지의 낚시용 조끼였다고 말했다[38]. 또한, 자신이 작사 작곡한 「Let's go to the answer」와 「도쿄 랜드스케이프」의 가사 중에는 건즈 앤 로지스의 곡 「Welcome to the Jungle」과 「It's So Easy[39]」가 각각 등장한다[40].
한편, 신도는 일본 음악에서는 BARBEE BOYS나 체커즈, 나카모리 아키나 등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BARBEE BOYS의 영향이 커서, 신도가 처음 구입한 악기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산 소프라노 색소폰으로, KONTA처럼 색소폰을 불면서 보컬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으며, 고등학교 2학년 축제에서는 BARBEE BOYS의 커버 밴드를 결성하여 연주했다[41]. 팝 음악에서는 건즈 앤 로지스나 익스트림, 에릭 클랩튼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익스트림의 기타리스트인 누노 베텐코트에 대한 동경이 강해서, 시그니처 모델 기타도 소유하고 있다[42][41].
또한, 두 사람 모두 밴드맨을 지망하게 된 계기는 "중학생 때 X를 들었던 것"이라고 말했으며, 신도가 처음 커버한 곡은 「홍」이다[43].
'''고등학교에서의 밴드 활동'''
포르노그라피티의 원형은 이노시마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90년에 신도 하루이치를 중심으로 결성된 '''NO SCORE'''(읽는 법은 「노 스코어」. 당시 드러머가 "스코어 안 봐도 칠 수 있어"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했다[38])라는 밴드이다[38]. 이 밴드는 신도가 "KONTA처럼 색소폰을 불면서 보컬을 하고 싶다"며, 같은 학교에 다니던 사촌들을 꼬드겨 결성한 BARBEE BOYS의 커버 밴드로, 처음에는 신도가 보컬을 맡았다[38].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문화제에서 코러스로 참가해 주지 않겠니"라는 신도의 권유로, 동급생 오카노 아키히토가 가입하여, 1991년 가을 문화제가 NO SCORE의 첫 라이브가 되었다. 결성 초부터 신도가 보컬을 맡았지만, 코러스로 참여한 오카노 쪽이 노래를 더 잘했고, 문화제 후에 드럼을 치던 사촌으로부터 "너, 기타 안 칠래?"라고 간접적으로 해고 통보를 받게 되자, 신도는 기타에 전념하고, 오카노가 코러스에서 보컬로 승격되었다(나중에 신도는 "아키히토는 확실히 엄청 (노래를) 잘했지만, 그 이전에 내가 너무나도 못했기 때문에 보컬 자리가 바뀐 거야"라고 당시를 회상했다[133])[41][38]. 그 후에는 주 1회 페이스로 활동했지만, 고등학교 3학년 문화제를 앞두고 베이스가 수험 때문에 빠지게 되자, 신도의 소꿉친구이자, 유게 상선 고등전문학교에 다니던 Tama가 새로운 베이스로 참여하게 되었다[38]. 3명이 처음으로 모인 문화제에서는 X, ZIGGY, BOØWY, 성기사II 등 총 10곡을 연주했고, 친구들이 스모크나 풍선을 이용한 연출을 해주는 등 따뜻한 분위기의 라이브였다고 한다[38]. 1993년 봄에 오카노, 신도 등이 이노시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NO SCORE는 졸업식 직후 교내 라이브를 끝으로 사실상 해산되었다[38].
나중에 멤버들은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보며, 오카노는 "고등학교 2학년 문화제에서의 첫 라이브는 지금 생각해도 형편없었고, 엉망이었지만, 거기서 받은 후배들의 성원에 큰 꿈을 품게 되었다[134]", "우리들의 착각의 시작[134]", 신도는 "포르노그라피티의 원형은 이노시마 고등학교 문화제의 동아리에서 시작되었고, 거기서부터 쭉 이어져 왔다[135]"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1년'''
고등학교 졸업 후, 오카노는 재수생이 되어 오사카의 예비 학원에 들어가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38]. 신도는 후쿠야마시의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같은 시내에서 자취를 시작했지만 학교에는 실질적으로 2개월 정도밖에 다니지 않았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을 때 막연하게 "오사카에서 밴드를 하자"라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38]. 고등전문학교 4학년으로 진급한 Tama가 이노시마에서 밴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도는 후쿠야마에서 이노시마까지 통근하며 밴드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Tama와 오리지널 곡을 제작하게 되었다(이 시기에 「M・O・O・D」와 「딜레마」가 제작되었다[38])[41]. 보컬은 오디션을 개최하는 등, 여러 사람들과 모색하면서 활동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점차 "역시 아키히토와 하고 싶다"는 마음이 굳어져 갔다고 한다[38]. 여름에는 히로시마현 내의 여러 콩쿠르에 출전하기 시작하여, 그랑프리와 상을 수상[38]. 양쪽 모두 이 무렵부터 프로를 의식하게 되었다고 하며[38], Tama는 간사이의 음악 학교에 입학할 뜻을 굳혔고, 그것을 들은 신도도 "아키히토도 있고, 오사카에서 밴드를 결성하자"라며 오사카행을 결심한다[41][38].
3. 2. 오사카에서의 인디즈 활동 (1994년 ~ 1997년)
1994년 봄, 오카노 아키히토는 오사카 학원 대학에, Tama는 앙 뮤직 스쿨 교토교에 각각 입학했고, 신도 하루이치도 오사카로 이주했다.[38] 고향 친구였던 이전 밴드 'NO SCORE'의 멤버 5명 전원이 오사카에서 다시 모였으나, 생활고 등으로 인해 밴드 활동은 어려웠고 결국 2명이 탈퇴했다.[38] 같은 해 여름 무렵, 오카노, 신도, Tama는 Tama와 같은 음악 학교에 다니던 드러머 나카오 텐세를 영입하여 4인조 밴드 '''포르노그라피티'''를 결성하고 새롭게 활동을 시작했다.[38] 10월에는 우메다 바나나 홀에서 첫 라이브를 가졌고, 11월부터는 라이브 하우스 공연과 함께 데모 테이프를 제작하여 레코드 회사 등에 보내는 활동을 병행했다.[38]
1995년 여름, 오사카 남항에서 열린 아마추어 밴드 야외 이벤트에 출연했을 때 SME의 신인 발굴 담당자로부터 명함을 받았다.[38] 나중에 이 담당자가 당시 대학생 아르바이트였고, 이벤트에 참가한 거의 모든 밴드에게 명함을 건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38], 당시에는 이 일이 밴드에게 큰 자신감과 동기 부여가 되었다고 신도는 회고했다.[41] 같은 해 가을부터는 오사카성 공원 (통칭: 성천)에서 스트리트 라이브를 시작했으며, 11월부터는 신사이바시스지 2초메 극장[136]에서 젊은 개그맨들의 공연 사이에 라이브를 열기도 했다.[38][137] 이 시기 멤버들은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라이브 활동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했고[41], 한 달에 십여 차례 라이브를 소화하며 점차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38] 12월에는 스이타의 라이브 하우스 '프리버드'에서 첫 단독 라이브를 개최하여 80명의 관객을 동원했다.[38] 이 라이브를 기점으로 드러머가 나카오 텐세에서 멤버들이 자주 가던 악기점 겸 스튜디오 직원이었던 오리하타 에이지로 교체되었다.[38]
1996년 7월, 신사이바시 뮤즈 홀에서 두 번째 단독 라이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후[38], 여름 동안 여러 아마추어 및 신인 밴드 콘테스트에 참가했다.[38] 당시 멤버들은 "도쿄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상경 전에 오사카에서 무언가 성과를 남기고 싶다"는 마음으로 콘테스트에 임했지만 최고 성적은 2위에 그쳤다.[38] 같은 해 11월, NHK가 주최한 『뉴 BS 영 배틀』 전국 대회에 오사카 대표로 출전했지만, "포르노그라피티는 이미 완성형에 가까워, 장래성이 있는 밴드에게 우승 기회를 주고 싶다"는 이유로 입상하지 못하면서 밴드는 방향성을 잃고 침체기를 겪었다.[38]
1997년 초에는 멤버들의 의욕 저하로 해산 이야기까지 오갔다. 하지만 때마침 신사이바시 클럽 콰트로에서의 단독 라이브가 결정되었고, 2년 전 명함을 주었던 SME 담당자로부터 "3월에 도쿄에서 오디션이 있는데 참가해 보지 않겠느냐"는 연락을 받았다.[38]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참가한 'SD 오디션'[138]에 합격하여 SME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38] 4월 27일, 신사이바시 클럽 콰트로에서 열린 단독 라이브는 550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오사카에서의 마지막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SME 측에서 이벤트 기획사나 케이터링, 잡지 광고 등을 제안했지만, 멤버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해내고 싶다는 생각에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38] 5월에는 소속사로 아뮤즈가 결정되었으나, 이 시기에 드러머 오리하타 에이지가 탈퇴하면서 오카노, 신도, Tama의 3인조로 재편되었다.[38]
3. 3. 도쿄 상경과 메이저 데뷔 (1997년 ~ 1999년)
1997년 9월 말, 메이저 데뷔를 목표로 활동 거점을 도쿄로 옮겼다.[41] 그러나 바로 데뷔가 결정된 것은 아니었고, 약 2년간의 긴 육성 기간을 거치게 된다.[41] 처음 1년 동안은 특별한 활동 지시 없이 2주에 한 번 곡을 제출하는 정도의 활동만 있었으며, 멤버들은 이 시기를 "계속 망설이거나 고민하는 날들이었다"고 회상할 만큼 데뷔 방향성에 대해 어려움을 겪었다.[41][38] 이 기간 동안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하고(1997년 3월), 소속사로 아뮤즈가 결정되었으며(1997년 5월), 도쿄, 치바, 군마 등지에서 '라이브 서킷'을 개최하고(1998년 9월~11월), '도쿄 로맨스 포르노'와 같은 자체 기획 라이브를 꾸준히 열며(1999년 1월, 4월) 인지도를 쌓아갔다.
1998년 여름, 타무라 미츠요시와 혼마 아키미츠가 음악 프로듀서로 합류하면서 밴드의 방향성이 점차 명확해지기 시작했다.[38] 같은 해 12월 무렵부터는 메이저 데뷔를 위한 본격적인 곡 제작 및 레코딩 작업에 돌입했다.[38]
데뷔는 당초 1999년 4월로 예정되었으나 두 차례 연기[38]되어 최종적으로 9월 8일에 이루어졌다. 첫 번째 싱글 アポロ일본어 (아폴로)를 발표하며 메이저 데뷔를 했으며[38], 데뷔 당시 멤버는 오카노 아키히토, 신도 하루이치, 그리고 타마 3명이었다.
'아폴로'는 발매 초기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 84위[38]로 출발했으나 (고향인 이노시마가 포함된 히로시마현 차트에서는 1위를 기록했다[38]), 여러 음악 방송 출연과 TBS 계열 프로그램 '여기가 이상해 일본인'의 타이업 곡으로 사용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최종적으로 오리콘 차트 최고 5위, 누적 판매량 40만 장을 넘어서는 히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 성공으로 인해 '포르노그라피티 = 아폴로'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밴드 이름이 '아폴로그라피티'나 '아폴로'로 잘못 불리는 경우가 많아졌고, 일회성 히트 밴드가 아니냐는 시선을 받기도 했다.
데뷔 직후인 1999년 하반기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 FM홋카이도, TOKYO-FM, FM 에히메 등에서 새로운 라디오 프로그램을 시작했으며, 'Act Against AIDS '99' 출연 및 연말 단독 라이브 '도쿄 로맨스 포르노 vol.3'를 개최했다.
3. 4. 2000년대: 전성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포르노그라피티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2000년에 발표한 싱글 ミュージック・アワー|뮤직 아워일본어, サウダージ|사우다지일본어, サボテン|선인장일본어 등이 연이어 히트하며 일본 대중음악계의 정상급 아티스트로 부상했다.[8][9] 특히 サウダージ|사우다지일본어와 2001년 발표한 アゲハ蝶|아게하쵸일본어는 밀리언셀러에 가까운 판매량을 기록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2001년에 발매된 두 번째 정규 앨범 《foo?일본어》 역시 밀리언셀러를 달성했다. 2002년에는 싱글 Mugen|무겐일본어이 2002 FIFA 월드컵의 NHK 공식 테마송으로 선정되어 국민적인 인지도를 더욱 높였다. 이 시기 포르노그라피티는 다수의 히트 싱글과 앨범을 발표하며 오리콘 차트 상위권을 기록했다.
2004년에는 첫 베스트 앨범 《PORNO GRAFFITTI BEST RED'S》와 《PORNO GRAFFITTI BEST BLUE'S》를 동시에 발매하여 두 앨범 모두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고, 2주 연속 오리콘 앨범 차트 1, 2위를 독점하는 등[8] 기록적인 성공을 이어갔다. 이 베스트 앨범 제작을 마지막으로 베이시스트 타마가 탈퇴[10]하여 2인조로 재편되었으나, 이후에도 꾸준히 히트곡을 발표하며 활동을 지속했다. 2000년대 포르노그라피티의 성공에는 데뷔 초부터 함께한 프로듀서 ak.homma (혼마 아키미츠)와의 협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4. 1. 2000년 ~ 2003년
2000년에 들어서 1월에는 두 번째 싱글 『ヒトリノ夜일본어』을, 3월에는 인디 시절부터의 곡을 중심으로 한 첫 번째 정규 앨범 『ロマンチスト・エゴイスト일본어』를 발표했다. 두 작품 모두 판매량은 데뷔 싱글 『アポロ일본어』에 미치지 못했지만, 첫 라이브 투어 『1st 라이브 서킷 "tour 08452 ~Welcome to my heart~”』와 첫 홀 공연 『도쿄 로맨스 포르노 vol.4 "요코 G"』를 개최하며 팬층을 넓혀갔다. 7월에는 오츠카 제약의 포카리스웨트 2000년도 CM송으로 사용된 세 번째 싱글 「ミュージック・アワー일본어」를 발매하여 『アポロ일본어』를 넘어서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이후 4번째 싱글 『サウダージ일본어』와 5번째 싱글 『サボテン일본어』을 연이어 발매하여, 두 곡 모두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8] 같은 해 연말에는 처음으로 『제51회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하여 인지도를 더욱 높였다.
2001년 2월에는 두 번째 정규 앨범 『foo?일본어』를 발매하여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3월부터는 닛폰방송에서 라디오 프로그램 『ポルノグラフィティのallnightnippon SUPER!일본어』의 진행을 맡았고, 첫 홀 투어인 『3rd 라이브 서킷 "재팬 투어”』를 개최했다. 투어 종료 후인 6월에는 6번째 싱글 『アゲハ蝶일본어』를 발매하여, 발매 첫 주에 자체 최고 판매량을 기록하고 3개 싱글 연속 오리콘 주간 차트 1위를 달성했다. 이 싱글은 최종적으로 약 92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2001년 오리콘 연간 싱글 차트 10위에 오르는 히트를 기록했다.
2002년에는 9번째 싱글 『Mugen일본어』이 2002 FIFA 월드컵의 NHK 방송 테마송으로 사용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5th 라이브 서킷 "BITTER SWEET MUSIC BIZ"』의 추가 공연으로 처음으로 일본 무도관에서 4일간의 라이브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2003년 하반기에는 싱글을 연이어 발매했다. 8월의 11번째 싱글 『音のない森일본어』을 시작으로, 『メリッサ일본어』, 『愛が呼ぶほうへ일본어』, 『ラック일본어』을 차례로 발표했다. 12월부터는 "20대의 집대성"이라는 의미를 담아 『6th 라이브 서킷 "74ers"』 투어를 개최했다.
3. 4. 2. 2004년: Tama의 탈퇴
2004년 1월, 라이브 투어 '6th 라이브 서킷 "74ers"' 종료 후, 베이시스트 타마(Tama)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고 싶다"며 탈퇴 의사를 멤버와 스태프에게 밝혔다.[139] 이후 약 반 년간 포르노그라피티는 활동을 중단하고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었다.[139][140] 이 기간 중 5월 13일에 오사카성 홀에서 열린 라이브 이벤트 REQUESTAGE 2 출연이 결과적으로 3인 체제로서의 마지막 공식 활동이 되었다.
6월 22일, 타마는 팬클럽 'love up!' 회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탈퇴를 표명했다. 다음 날인 6월 23일,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7월 발매 예정인 베스트 앨범 제작을 마지막으로 타마가 포르노그라피티를 떠나며, 앞으로는 오카노 아키히토와 신도 하루이치 두 사람으로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공식 발표되었다.[10]
타마의 탈퇴에 대해 멤버들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신도 하루이치:
:: "처음부터 그의 의지는 굳건했다[140]"
:: "타마를 생각하면 억지로 붙잡는 것이 그의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초기의) 스태프와 함께 보는 포르노의 성공 사례는 '다운타운 씨나 타모리 씨 옆에 서는 것'이라고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하면서 해왔어요. 적어도 저나 아키히토는, 분명. 결과적으로 타마는 그것과는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지만[41]"
: 오카노 아키히토:
:: "10년을 함께 해왔고, 똑같이 시간을 쌓아왔는데, 그 안에서 개인이 목표로 하는 이상과 밴드에 대한 이상이 달랐으니까요. 깨달았을 때는 그렇게 되어 있었으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139]"
:: "밴드라는 운명 공동체에서 한 발짝 떨어져, 한 명의 인간으로서 함께 해온 타마를 생각하면, 역시 타마가 결정한 대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어요[139]"
3. 4. 3. 2004년 ~ 2009년
2004년 6월 22일에 베이시스트였던 타마가 탈퇴하면서, 이후 오카노 아키히토와 신도 하루이치 2인 체제로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 동안 "ヴォイス|보이스일본어", "ラック|라쿠일본어", "Winding Road", "あなたがここにいたら|아나타가 코코니 이타라일본어" 등의 싱글과 "THUMPχ", "PORNO GRAFFITTI BEST ACE" 등의 앨범이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했다. 또한, 데뷔 초부터 함께한 프로듀서 ak.homma(혼마 아키미츠)는 이 시기에도 계속해서 포르노그라피티의 곡 작업에 참여했다.[50]
3. 5. 2010년대
2010년 3월, 8번째 정규 앨범 『∠TRIGGER』를 발매하여 오리콘 주간 앨범 랭킹 1위를 차지했다. 이 앨범 발매와 함께 역대 최다인 44개 도시 56회 공연의 홀 투어 『11th 라이브 서킷 "∠TARGET"』를 개최했으며, 모든 공연의 티켓이 매진되어 약 12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8] 팬들의 요청에 따라 연말에는 추가 공연인 『11th 라이브 서킷 "∠TARGET" ENCORE』를 열어 이틀간 약 2만 5천 명을 동원했다.[8]
2011년에는 처음으로 게츠쿠 드라마의 주제가로 사용된 32번째 싱글 『EXIT』를 발표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츠마고이 로망스 포르노 '11 ~포르노 마루~』, 10월에는 『도호쿠 로망스 포르노 '11 ~포르노 항구~』, 12월에는 『마쿠하리 로망스 포르노 '11 ~DAYS OF WONDER~』 등 대규모 라이브 공연을 연이어 개최했다.[8] 2012년 3월에는 새로운 체제로 제작한 9번째 앨범 『PANORAMA PORNO』를 발매하고, 37개 도시 42회 공연의 홀 투어 『12th 라이브 서킷 "PANORAMA×42"』를 진행했다.[8]
2013년에는 본격적인 해외 활동을 시작했다.[146]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Anime EXPO 2013』에 참가했으며[147][148], 8월에는 한국과 대만에서 개최된 음악 이벤트에도 출연했다.[149] 또한, 7월 13일과 14일에는 소속사 아뮤즈의 아티스트들이 모이는 야외 페스티벌 『Amuse 35th Anniversary BBQ in 츠마고이 ~우리들의 비트를 먹어라! 코라!~』를 주도적으로 개최했다.[360][150] 9월에는 '''데뷔 15주년'''을 맞이하여 싱글 『청춘 화도』와 『도쿄 데스티니』를 연달아 발매했고, 11월에는 첫 올타임 베스트 앨범 『PORNOGRAFFITTI 15th Anniversary "ALL TIME SINGLES"』를 선보였다. 12월부터는 아레나 투어 『13th 라이브 서킷 "러브 E 메일 from 1999"』를 시작하여 이듬해 2014년 3월까지 이어갔다.
2014년 7월에는 전년도에 이어 『Amuse Fes 2014 BBQ in 츠마고이 ~우리들의 비트를 먹어라! 코라!~』를 개최했으며, 8월에는 『MONSTER baSH 2014』에 처음으로 출연했다. 9월에는 데뷔 15주년 기념 싱글 『우리들의 세레브레이션』을 발매하고, 홋토 못토 필드 고베와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고베・요코하마 로망스 포르노 '14 ~미혹하지 않는 숲~』을 개최했다. 그 해 연말에는 『NHK 홍백가합전』에 11년 연속, 통산 13번째 출연을 기록했으나, 이를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홍백가합전에는 출연하지 않고 있다.
2015년 4월에는 42번째 싱글 『오! 리발』을 발매했다. 이 곡은 영화 『명탐정 코난: 화염의 해바라기』의 주제가로 사용되어 오랫동안 인기를 끌었다. 8월에는 10번째 정규 앨범 『RHINOCEROS』를 발매하여 오리콘 주간 앨범 랭킹 1위를 기록했다. 9월부터는 이 앨범을 내세운 홀 투어 『14th 라이브 서킷 "The dice are cast"』를 개최했다.
2016년에는 43번째 싱글 『THE DAY』가 애니메이션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의 오프닝 테마로 사용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해외에서도 큰 호응을 얻었다.[151][152] 같은 해 7월에는 3년 만에 대만의 음악 이벤트에 다시 참여했으며[153], 9월에는 통산 네 번째로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라이브 공연 『요코하마 로망스 포르노 '16 ~THE WAY~』를 개최했다.
2017년 3월에는 대만에서 첫 단독 라이브 공연인 『PORNOGRAFFITTI 色情塗鴉 Special Live in Taiwan』을 성공적으로 마쳤다.[154] 그 해 여름에는 『MONSTER baSH』에 두 번째로 참가했고, 『ROCK IN JAPAN FESTIVAL』과 『SWEET LOVE SHOWER』에는 처음으로 출연하며 페스티벌 활동도 활발히 이어갔다.[16][17] 10월에는 11번째 정규 앨범 『BUTTERFLY EFFECT』를 발매하고, 11월부터 이 앨범과 연계된 홀 투어 『15th 라이브 서킷 "BUTTERFLY EFFECT"』를 시작했다.
2018년 9월 8일, '''데뷔 20주년'''을 맞이한 포르노그라피티는 이를 기념하여 고향 이노시마 근처에서 야외 라이브 『시마나미 로망스 포르노 '18 ~Deep Breath~』를 개최하는 것을 시작으로, 아레나 투어 『16th 라이브 서킷 "UNFADED"』 개최, 다수의 음악 이벤트 출연, 싱글 3장 발매 등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다. 2019년 9월 7일과 8일에는 20주년 활동의 대미를 장식하는 공연 『20th Anniversary Special LIVE "NIPPON 로망스 포르노 '19 ~신 vs 신~"』을 도쿄돔에서 개최했다.[155] 공연 둘째 날인 9월 8일, 메이저 데뷔 만 20년을 맞이했다.
3. 6. 2020년대
도쿄 돔 라이브를 마친 후 밴드는 공식적인 활동을 자제하고, 멤버 개개인의 솔로 활동을 중심으로 한 충전 기간에 돌입했다.[156][157] 2020년에는 코로나19 범유행의 영향으로 처음으로 신곡 발매가 없었고, 밴드 활동도 12월 4일에 열린 온라인 라이브 'CYBER 로맨스 포르노'20 ~REUNION~' 뿐이었다.
2021년 상반기에도 솔로 활동을 이어갔지만, 8월 2일에 '포르노그래피티 2021년 "새로운 시작"'을 발표하며 활동 재개를 알렸다.[156] 9월 22일에는 51번째 싱글 '테마송'을 발매했으며, 같은 달 25일부터 홀 투어 '17th 라이브 서킷 "속・포르노그래피티"'를 개최했다. 또한 9월 3일에는 유튜브 채널 THE FIRST TAKE에 처음 출연하여 '사우다지'의 특별 편곡을 선보였다. 해당 영상의 총 재생 횟수는 공개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1000만 회를 돌파하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158][159]
2022년 상반기에는 앨범 제작에 몰두하여, 8월 3일에 5년 만의 12번째 앨범 '새벽'을 발매했다.[160] 같은 달 6일·7일에는 영상 작품 'Visual Album "새벽"'을 전국 각지의 영화관에서 상영했으며,[161] 9월부터는 홀 투어 '18th 라이브 서킷 "새벽"'을 연말까지 개최했다.[160][161]
2023년 5월에는 온라인 한정 싱글 '아비가 운다'를 발매했다.[162][163] 'G7 히로시마 서밋'의 응원곡으로 제작된 해당 곡을 계기로 히로시마현과의 콜라보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며,[164] 데뷔 25주년을 맞이한 9월 8일에는 'PORNOGRAFFITTI 25주년 기념 TikTok LIVE at 이쓰쿠시마 신사'라는 제목으로, 이쓰쿠시마 신사에서 어쿠스틱 라이브를 TikTok LIVE로 무료 생중계했다.[165][166]
2024년 1월부터는 아레나 투어 '19th 라이브 서킷 "PG wasn't built in a day"'를 개최했으며, 3월 27일에는 25주년 첫 번째 싱글 '해방구'를 발매했다.[167][168] 여름에는 고향인 이노시마를 배경으로 전시회 '섬 전체 포르노전'과 야외 라이브 '이노시마·요코하마 로맨스 포르노'24 ~해방구~'를 이노시마 운동 공원·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개최했다.
4. 음반 목록
자세한 내용은 포르노그라피티 음반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트리뷰트 앨범'''
'''캄필레이션 앨범'''
- PROJECT 2002 ''The Monsters''
- : 2001년 10월 24일 한일 동시 발매
- : 수록곡 "サウダージ|사우다지일본어"
- 2002 FIFA WORLD CUP OFFICIAL ALBUM ''SONGS OF KOREA / JAPAN''
- : 2002년 5월 29일 한일 동시 발매
- : 수록곡 "Go Steady Go!" (한국 판 미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