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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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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독립 전쟁은 1640년부터 1668년까지 포르투갈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다. 스페인의 중앙 집권화 정책과 과도한 세금 부과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1640년 12월 1일 리스본에서 혁명이 발발하여 브라간사 공작 주앙 4세가 포르투갈 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포르투갈은 프랑스, 잉글랜드, 네덜란드 등과 동맹을 맺고 스페인과의 전쟁을 이어갔으며, 몬티조 전투, 아메이시알 전투, 몬테스 클라로스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독립을 굳건히 했다. 1668년 리스본 조약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으며, 전쟁의 결과 포르투갈은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상업적 제국주의를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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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독립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1650년대 독일의 판화로 포르투갈 독립 복원 에피소드를 나타낸다. 시계 방향으로 위쪽 왼쪽부터: 미겔 데 바스콘셀루스 암살 및 만토바 공작부인 체포, 쿠데타 소식, 주앙 4세 국왕 옹립, 브라간사 공작 주앙 4세 국왕 선서.
1650년대 독일 판화, 포르투갈 왕정복고 사건 묘사 (시계 방향): 미겔 데 바스콘셀루스 암살 및 만토바 여공작 체포, 쿠데타 소식 전파, 주앙 4세 즉위, 주앙 4세 국왕 선서
분쟁 명칭포르투갈 왕정복고 전쟁
부분앵글로-스페인 전쟁
프랑스-스페인 전쟁
시기1640년 12월 1일 - 1668년 2월 13일 (27년 2개월 1주 6일)
장소포르투갈 및 스페인
결과포르투갈의 승리
주앙 4세의 새로운 포르투갈 국왕 즉위 (1640년)
합스부르크 가문, 포르투갈 왕위에 대한 모든 권리 포기
리스본 조약 (1668년)
이베리아 연합의 종료
영토 변경포르투갈, 세우타를 스페인에 할양
포르투갈, 에르미센데를 스페인에 할양
교전 세력
교전국 1포르투갈
프랑스 (1641년–1659년)
잉글랜드 (1662년–1668년)
네덜란드 (1641년–1648년)
교전국 2스페인
지휘관
포르투갈 지휘관주앙 4세
루이자 데 구스망
아폰수 6세
페드루 2세
마리알바 후작
빌라 플로르 백작
알레그레테 백작
쇼음베르크 공작
스페인 지휘관펠리페 4세
카르피오 후작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
오수나 공작
카라세나 후작

2. 배경

17세기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 지배하에 있었다. 1580년 포르투갈의 엔히크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펠리페 1세로 즉위하여 이베리아 연합이 성립되었다.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의 자치와 포르투갈 제국 유지를 약속했지만, 후대 왕들은 중앙집권 정책을 추진하며 포르투갈의 불만을 야기했다.

펠리페 3세 및 4세 (포르투갈 및 스페인)


펠리페 4세 (포르투갈에서는 펠리페 3세)는 늘어나는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포르투갈에 중과세를 부과하고, 포르투갈 정부 요직에 카스티야인을 임명하는 등 포르투갈 귀족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또한 30년 전쟁과 같은 스페인의 대외 전쟁에 포르투갈 군대를 동원하면서 포르투갈인들의 반감이 커졌다.

1637년 에보라에서 마누엘리뉴 반란Revolta do Manuelinho|마누엘리뉴 반란pt이 일어났지만 곧 진압되었다. 그러나 1640년 카탈루냐에서 수확자 전쟁이 발발하고, 스페인이 포르투갈 군대까지 진압에 동원하려 하자 포르투갈 귀족들은 독립의 기회로 삼았다.

사보이의 마가렛, 포르투갈 부왕비, 만토바 공작부인.


1640년 12월 1일, 안탕 바즈 드 알마다를 비롯한 '40인의 공모자'들은 리스본에서 혁명을 일으켜 포르투갈 부왕 사보이의 마가렛을 폐위시키고, 브라간사 공작을 포르투갈의 주앙 4세로 추대했다.

브라간사 공작 주앙 2세, 복원 전쟁을 벌여 국왕 주앙 4세로 추대되었다.


이는 포르투갈을 지배하는 왕조를 브라간사 가문으로 복고시키고, 포르투갈 헌법에 따라 전제 군주를 추방하며, 국가에 적합한 다른 왕가를 환호로 맞이하거나 선택하는 것을 의미했다.

2. 1. 이베리아 연합의 성립과 포르투갈의 불만

포르투갈의 필리페 2세(스페인의 필리페 3세)가 1621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포르투갈의 필리페 3세(스페인의 필리페 4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필리페 3세는 포르투갈에 대해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는데, 이는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더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포르투갈 귀족들이 스페인 ''코르테스''에서 영향력을 잃게 만들었으며, 포르투갈 정부 요직에 스페인 사람들을 임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포르투갈 및 스페인의 필리페 2세 & 3세


1580년에 펠리페 2세 (포르투갈에서는 필리페 1세)가 이베리아 연합을 성립시켰을 때, 그는 포르투갈 귀족을 스페인 궁정에서 우대하고, 포르투갈의 고유한 법률, 통화, 정부의 유지를 약속했으며, 리스본은 왕국의 수도로 남았다. 그러나 펠리페 3세 (포르투갈에서는 필리페 2세) 시대부터 스페인은 제국을 구성하는 카탈루냐, 아라곤, 나바라, 포르투갈의 자치를 축소시키고 중앙 집권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펠리페 4세 (포르투갈에서는 필리페 3세)는 증대하는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해 포르투갈 상인에게 중과세를 부과하고, 포르투갈 정부의 요직은 마드리드에서 파견된 카스티야인이나 친스페인파 포르투갈인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필리페 3세는 포르투갈 귀족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포르투갈을 스페인 제국을 구성하는 단순한 주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또한, 포르투갈군은 스페인이 전개하는 대외 전쟁에 동원되었다. 스페인에 대한 반감은 포르투갈 국내에 만연해 있었다.

스페인은 80년 전쟁 동안 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을 억압하려는 노력에 포르투갈을 끌어들였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는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으로 알려진 것처럼 포르투갈 식민지와 전초 기지를 약탈하거나 점령하는 조직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특히 30년 전쟁에서 스페인은 자국 제국 방어에 몰두하여 아시아와 브라질에서 포르투갈의 이익을 소홀히 했다.

1637년 8월, 에보라에서 징세인의 집에 불이 붙은 것을 계기로 마누엘리뉴 반란Revolta do Manuelinho|마누엘리뉴 반란pt이 일어났다. 각 도시로 확산된 반란은 즉시 진압되었지만, 혁명의 기운은 더욱 고조되었다. 1640년 6월에 발생한 카탈루냐의 수확인 전쟁에서, 스페인 재상 올리바레스 백작이 진압에 포르투갈 군대까지 투입한 것이 포르투갈의 반감을 샀다. 스페인이 카탈루냐 진압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포르투갈 귀족들은 이를 계기로 독립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

2. 2. 스페인의 중앙집권화 정책

포르투갈의 필리페 2세(스페인의 필리페 3세)가 1621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포르투갈의 필리페 3세(스페인의 필리페 4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포르투갈에 대해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는데, 포르투갈 상인들은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했고, 포르투갈 귀족들은 스페인 코르테스에서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으며, 포르투갈 정부의 요직은 점점 더 스페인 사람들이 차지하게 되었다.[1]

펠리페 2세 (포르투갈에서는 필리페 1세)가 이베리아 연합을 성립시켰을 때, 그는 포르투갈 귀족을 스페인 궁정에서 우대하고 포르투갈의 고유한 법률, 통화, 정부 유지를 약속했으며, 리스본은 왕국의 수도로 남았다. 그러나 펠리페 3세 (포르투갈에서는 필리페 2세) 시대부터 스페인은 제국을 구성하는 카탈루냐, 아라곤, 나바라, 포르투갈의 자치를 축소시키고 중앙 집권화를 꾀하기 시작했다.[1]

펠리페 4세 (포르투갈에서는 필리페 3세)는 늘어나는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포르투갈 상인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포르투갈 정부의 요직은 마드리드에서 파견된 카스티야인이나 친스페인파 포르투갈인으로 채웠다. 필리페 3세는 포르투갈 귀족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포르투갈을 스페인 제국의 단순한 주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또한, 포르투갈군은 스페인이 벌이는 대외 전쟁에 동원되었다. 스페인에 대한 반감은 포르투갈 국내에 널리 퍼져 있었다. 1637년 8월, 에보라에서 징세인의 집에 불이 붙은 것을 계기로 마누엘리뉴 반란Revolta do Manuelinhopt이 일어났다. 각 도시로 확산된 반란은 곧 진압되었지만, 혁명의 기운은 더욱 커졌다. 1640년 6월에 발생한 카탈루냐의 수확자 전쟁에서, 스페인 재상 올리바레스 백작이 진압에 포르투갈 군대까지 투입한 것이 포르투갈의 반감을 샀다. 스페인이 카탈루냐 진압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포르투갈 귀족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계획을 세웠다.[1]

2. 3. 카탈루냐 반란과 포르투갈의 동요

포르투갈의 필리페 2세(스페인의 필리페 3세)가 1621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포르투갈의 필리페 3세(스페인의 필리페 4세)가 왕위를 계승했고, 그는 포르투갈의 관심사에 대해 다른 접근 방식을 따랐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더 높은 세금을 내야 했고, 포르투갈 귀족은 스페인 ''코르테스''에서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으며, 스페인 사람들은 점점 더 포르투갈 정부의 요직을 차지했다.

스페인은 80년 전쟁 동안 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을 억압하려는 노력에 포르투갈을 끌어들였다. 이에 네덜란드는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으로 알려진 것처럼 포르투갈 식민지와 전초 기지를 약탈하거나 점령하는 조직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특히 30년 전쟁에서 스페인은 자국 제국 방어에 몰두하여 아시아와 브라질에서 포르투갈의 이익을 소홀히 했다.

이러한 상황은 귀족과 ''부르주아''가 조직하여 1640년 12월 1일에 실행된 혁명으로 절정에 달했으며, 이는 첫 번째 "이중 군주"인 필리페 1세(스페인의 필리페 2세)가 즉위한 지 60년 후였다.

이 음모는 안탕 바즈 드 알마다, 미겔 드 알메이다, 주앙 핀투 리베이루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들은 40인의 공모자로 알려진 여러 동료들과 함께 국무장관 미겔 드 바스콘셀로스를 살해하고 그의 이름으로 포르투갈을 통치하고 있던 왕의 사촌 사보이의 마가렛을 투옥했다. 필리페의 군대는 당시 30년 전쟁에서 싸우고 있었고 카탈루냐 공국에서 수확자 전쟁으로 알려진 혁명에 직면해 있었다.

국민의 지지는 거의 즉시 나타났고, 몇 시간 만에 필리페 3세의 셋째 사촌인 브라간사 공작 주앙 8세가 포르투갈의 주앙 4세로 추대되었다. 그 소식은 전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쿠데타 다음 날인 1640년 12월 2일에 주앙 4세는 국가의 주권자로서 에보라 시 의회에 서한을 보냈다.

1640년 6월, 카탈루냐에서 수확자 전쟁이 발발하자, 스페인 재상 올리바레스 백작은 진압에 포르투갈 군대까지 투입하려 했고, 이는 포르투갈의 반감을 샀다. 스페인이 카탈루냐 진압에 어려움을 겪는 동안, 포르투갈 귀족들은 이를 혁명의 기회로 삼았다.[1]

3. 포르투갈의 독립 선언 (1640)

1640년 12월 1일, 리스본에서 소수의 공모자들이 왕궁을 습격하여 포르투갈 부왕이었던 사보이의 마가렛을 폐위시켰다. 리스본의 주요 광장에서 시위가 일어났지만, 그녀는 포르투갈 사람들을 진정시키는데 실패했다. 포르투갈 귀족 가문의 수장이었던 브라간사 공작은 포르투갈의 주앙 4세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주앙 4세의 통치는 포르투갈의 독립을 위한 투쟁으로 특징지어졌다.

1641년, 포르투갈 종교재판에 의한 반혁명이 일어났으나, 프란시스쿠 드 루세나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도자들이 처형되었고, 카미냐 공작은 합스부르크가의 포르투갈 왕위 주장을 지지하다 처형되었다. 같은 해, 포르투갈은 프랑스(1641년 6월 1일) 및 스웨덴(1641년 8월)과 동맹을 맺었다. 또한, 네덜란드 공화국과는 1641년 7월 12일에 헤이그 조약으로 알려진 '공격 및 방어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양측 모두 제대로 존중하지 않아, 브라질앙골라의 포르투갈 식민지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리스도 기사단의 십자가와 부르고뉴 십자가는 각각 포르투갈과 스페인 군대의 전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깃발이었다.[3]

3. 1. 리스본 궁정 쿠데타

1640년 12월 1일, 소수의 공모자들이 리스본의 리베이라 궁전[7]을 습격하여 포르투갈 부왕이었던 사보이의 마가렛을 폐위시켰다.[3] 그녀는 리스본의 주요 광장에서 시위하는 포르투갈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포르투갈 귀족 중 수석 가문의 수장이었던 브라간사 공작은 같은 날 늦게 포르투갈의 주앙 4세로 왕위를 받아들였다.

3. 2. 주앙 4세의 즉위와 국내외 지지 확보

주앙 4세는 즉위 직후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했다. 1640년 12월 11일, 모든 작전을 조직하기 위해 '전쟁 위원회'가 창설되었다. 다음으로, 국왕은 국경 근처의 요새, 리스본의 가상 방어, 주둔지 및 항구를 관리하기 위해 '국경 위원회'를 만들었다.

1641년 12월, 그는 모든 국내 요새의 업그레이드를 보장하고 이 개선 사항에 대한 재정을 지역 세금으로 충당하기 위한 임대차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또한 군대를 조직하고 세바스티앙 1세의 '군사 법령'을 재확립했으며, 잉글랜드와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는 데 중점을 둔 외교적 캠페인을 시작했다.

몇 차례의 소규모 승리를 거둔 후, 주앙은 신속하게 평화를 이루려 했다. 그러나 그는 펠리페 4세포르투갈의 새로운 왕조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는 그의 아들 아폰수 6세의 치세 동안,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아들이자 훗날 포르투갈의 페드루 2세가 된 브라간사의 페드루의 섭정 기간에 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스페인과의 대립은 28년 동안 지속되었다.

아폰수 6세의 통치는 카스텔루 메요르 백작에 의해 관리되었다.


페드루 섭정공, 베자 공작, 훗날 포르투갈의 페드루 2세.

4. 전쟁의 전개

포르투갈 독립 전쟁은 국경 충돌과 기병대의 국경 마을 약탈이 주를 이루었으며, 간헐적인 침공과 반격이 있었으나 대부분 소극적이고 자금 지원이 부족했다. 28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주요 야전 전투는 단 5번에 불과했다.[2]

이 전쟁은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 초기 (1640–1646): 몇 차례의 주요 교전에서 포르투갈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에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었다.
  • 교착 (1646–1660): 소규모 습격이 지속되었으며, 스페인은 유럽의 다른 지역에 군사력을 집중했다.
  • 포르투갈의 승기 (1660–1668): 스페인 왕 펠리페 4세는 전쟁을 종식시킬 결정적인 승리를 추구했지만 실패했다.


루이자 드 구스망, 포르투갈 왕비이자 이전 브라간사 공작 부인


전선은 세 곳이 있었지만, 주요 활동은 갈리시아 인근 북부 전선과 포르투갈 알렌테주와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 사이의 중앙 전선에 집중되었다. 포르투갈 알가르브와 스페인 안달루시아 사이의 남부 전선은 포르투갈의 전략적 목표였지만, 포르투갈 여왕 루이자 드 구스망이 안달루시아 유력 귀족인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에 공격의 초점이 되지 않았다.

17세기부터 18세기의 포르투갈에서는 이 전쟁을 '''환호 전쟁'''(Guerra da Aclamação)이라고 불렀다. 이는 포르투갈을 지배하던 아비스 가문을 대신하여 브라간사 가문을 복고시키고, 전제 군주를 추방하며, 국가에 적합한 왕가를 환호로 맞이하거나 선택하는 것을 의미했다.

펠리페 2세는 1580년 이베리아 연합을 성립시키면서 포르투갈 귀족을 우대하고 포르투갈의 법률, 통화, 정부 유지를 약속했으며, 리스본을 수도로 유지했다. 그러나 펠리페 3세 시대부터 스페인은 카탈루냐, 아라곤, 나바라, 포르투갈의 자치를 축소하고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다.

펠리페 4세는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해 포르투갈 상인에게 중과세를 부과하고, 포르투갈 정부 요직을 카스티야인이나 친스페인파 포르투갈인으로 채웠다. 펠리페 3세는 포르투갈 귀족의 권력을 빼앗아 포르투갈을 스페인 제국의 일개 주로 만들려 했고, 포르투갈군은 스페인의 대외 전쟁에 동원되었다. 스페인에 대한 반감은 포르투갈 내에 만연했다. 1637년 에보라에서 시작된 마누엘리뉴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혁명의 기운은 고조되었다. 1640년 카탈루냐 수확인 전쟁에서 스페인 재상 올리바레스 백작이 포르투갈 군대까지 투입하자 포르투갈의 반감은 더욱 커졌다. 스페인이 카탈루냐 진압에 어려움을 겪자, 포르투갈 귀족들은 이를 기회로 삼았다.

1640년 12월 1일 리스본에서 시작된 혁명은 포르투갈 국내외에서 지지를 얻었다. 1668년, 유럽에서의 28년간의 스페인과의 전쟁, 아시아·아메리카 대륙을 주전장으로 한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종결하고 30년 전쟁을 끝냈다.

루이 13세의 재상 리슐리외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전쟁에서 여러 전선에 군대를 파견해야 했고, 마드리드의 스페인 정부 지원을 받던 프랑스 국내 소요 분자를 통제해야 했다. 펠리페 4세는 플랑드르, 프랑슈콩테, 이탈리아 등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어 제4의 전선을 열 수도 있었다.

리슐리외는 펠리페 4세의 관심을 자국 내정 문제로 돌리기 위해 주앙 4세의 왕위 요구를 지지했다. 이는 화승총으로 명성을 얻은 스페인 군과의 충돌을 피하고, 포르투갈과의 전쟁으로 스페인이 자원과 병력을 소모할 것이라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포르투갈-프랑스 동맹은 아폰수 6세와 마리 프랑수아즈 드 사부아-네무르의 결혼으로 이어졌지만, 리슐리외의 후계자 마자랭은 1659년 피레네 조약에서 스페인과 단독 강화 조약을 체결하며 포르투갈과의 동맹을 파기했다.[7]

과거 네덜란드는 스페인에 대항하기 위해 포르투갈과 휴전 협정을 맺었었다. 80년 전쟁(1568년 - 1647년) 발발 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1580년 포르투갈 합병을 통해 포르투갈 왕위를 획득하면서, 네덜란드와의 우호 관계는 끝났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는 포르투갈령 식민지를 공격했고, 이는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으로 이어졌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이 유럽 전쟁에 집중하는 틈을 타 포르투갈 식민지를 노렸다. 주앙 4세는 1640년 재독립을 선언했지만, 네덜란드는 소규모 군사 지원만 제공했다. 훗날 명장 데 로이터의 데뷔전이 되는 상 비센테 곶 해전(1640년)에서 스페인 함대에 손해를 입혔다. 이 시점에서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와의 동맹에서 포르투갈로 갈아타기로 결정했다.

1661년, 헤이그 조약으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평화가 성립되었다.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 내전으로 혼란스러웠다. 포르투갈 궁정은 잉글랜드 왕자들을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승인하고 있었는데, 이는 잉글랜드 공화국 시기 동안 문제를 야기했다. 찰스 2세의 왕정 복고 후, 포르투갈은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갱신하고, 카타리나와 찰스 2세의 혼인으로 대 스페인 관계에서 국외 지원을 회복하여 프랑스의 제한적인 지원 손실을 보충했다. 잉글랜드와의 동맹은 스페인과의 평화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다. 스페인은 30년 전쟁으로 쇠약해져 다른 유럽 강대국과 추가적인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다. 카타리나의 지참금으로 탕헤르봄베이가 잉글랜드에 할양되었다.

군사적으로, 환호 전쟁은 매년 반복되는 침공·반격 및 국경에서의 소규모 교전으로 이루어졌다. 스페인의 대규모 포르투갈 침공은 프랑스와의 평화 후 펠리페 4세가 명령하고, 그의 오른팔인 장군

주요 전투는 다음과 같다.

전투명날짜결과
몽티주 전투1644년 5월 26일포르투갈 승리
엘바스 방어선 전투1659년 1월 14일포르투갈 승리
아메이시알 전투1663년 6월 8일포르투갈 승리
카스텔루 호드리구 전투1664년 7월 7일포르투갈 승리
몬테스 클라로스 전투1665년 6월 17일포르투갈 승리



포르투갈군은 이 전투들에서 모두 승리했으며, 영국의 중재로 1668년 리스본 조약이 체결되면서 평화가 이루어졌다.[2]

1884년, 1640년의 왕정 복고를 기념하여 리스본에 레스타우라 도레스 광장(Praça dos Restauradores, 왕정 복고 지사 광장)이 만들어졌다.

4. 1. 초기 전투 (1641-1646)

주앙 4세는 국왕 즉위 직후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1640년 12월 11일, 모든 작전을 조직하기 위해 '전쟁 위원회'를 창설했고, 국경 근처의 요새, 리스본의 가상 방어, 주둔지 및 항구를 관리하기 위해 '국경 위원회'를 만들었다.[1] 1641년 12월에는 국내 요새를 강화하고 지역 세금으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임대차 계약을 체결했다. 또한 군대를 조직하고 세바스티앙 1세의 '군사 법령'을 재확립했으며,[1] 잉글랜드와의 좋은 관계 회복에 중점을 둔 외교 활동을 시작했다.

몇 차례의 소규모 승리 후, 주앙 4세는 평화를 원했다.[2] 그러나 펠리페 4세포르투갈의 새 왕조를 인정해야 한다는 요구는 그의 아들 아폰수 6세와 포르투갈의 페드루 2세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페인과의 대립은 28년 동안 지속되었다.

안토니우 루이스 드 메네제스, 마르키스 오브 마리알바, 엘바스 방어선에서 승리를 이끌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에서 빠른 승리를 기대하며 7개 연대를 국경에 투입했지만, 몬테레이 백작의 지연으로 기회를 잃었다. 1641년 말 포르투갈의 반격은 실패했고, 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1644년 5월 26일, 몬티조 전투에서 마티아스 드 알부케르케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스페인군과 용병 부대를 저지했다.

전쟁은 상호 파괴적인 양상을 보였다. 1641년 12월 초부터 스페인에서는 "에스트레마두라는 끝났다"는 탄식이 나올 정도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양측 모두 밀수, 불법 거래, 폭리, 무질서, 파괴가 만연했다.[3]

과거 네덜란드 공화국스페인에 대항하기 위해 포르투갈과 휴전 협정을 맺었었다. 80년 전쟁(1568년 - 1647년) 발발 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1580년 포르투갈 합병을 통해 포르투갈 왕위를 획득하면서, 네덜란드와의 우호 관계는 끝났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는 포르투갈령 식민지를 공격했고, 이는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으로 이어졌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이 유럽 전쟁에 집중하는 틈을 타 포르투갈 식민지를 노렸다. 주앙 4세는 1640년 재독립을 선언했지만, 네덜란드는 소규모 군사 지원만 제공했다.

1661년, 헤이그 조약으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평화가 성립되었다.

  • 1640년 12월 1일 - 귀족들이 리스본의 리베이라 궁전[7]을 습격하여 만토바 공작부인 마르가리다를 추방하고, 미겔 데 바스콘셀로스를 살해했다. 브라간사 공작이 주앙 4세로 즉위했다.
  • 1644년 - 엘바스는 스페인군의 포위를 견뎌냈다.
  • 1654년 - 주앙 4세와 올리버 크롬웰 사이에 포르투갈-영국 조약이 체결되었다.
  • 1656년 - 주앙 4세 사망 후 아폰수 6세가 즉위하고, 루이자 데 구스망이 섭정을 맡았다.

4. 2. 교착 상태 (1646-1660)

루이 13세의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전쟁에서 여러 전선에 군대를 파견해야 하는 동시에, 마드리드의 스페인 정부 지원을 받던 프랑스 국내 소요 분자를 통제해야 했다. 리슐리외는 펠리페 4세의 관심을 자국 내정 문제로 돌리기 위해 포르투갈 주앙 4세의 왕위 요구를 지지했다. 이는 스페인 군과의 충돌을 피하고, 포르투갈과의 전쟁으로 스페인이 자원과 병력을 소모할 것이라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포르투갈-프랑스 동맹은 아폰수 6세와 마리 프랑수아즈 드 사부아-네무르의 결혼으로 이어졌지만, 리슐리외의 후계자 마자랭은 1659년 피레네 조약에서 스페인과 단독 강화 조약을 체결하며 포르투갈과의 동맹을 파기했다.[7]

  • 1640년 12월 1일: 귀족들이 리스본의 리베이라 궁전을 습격, 부왕 만토바 공작부인 마르가리다를 구금·추방하고, 재상 미겔 데 바스콘셀로스를 살해했다. 브라간사 공작이 주앙 4세로 즉위했다.
  • 1644년: 엘바스는 9일간의 스페인군 포위를 견뎌냈다.
  • 1654년: 주앙 4세와 올리버 크롬웰잉글랜드 사이에 포르투갈-영국 조약이 웨스트민스터에서 체결되었다.
  • 1656년: 주앙 4세 사망 후 아폰수 6세가 즉위하고, 왕태후 루이자 데 구스망이 섭정을 맡았다.
  • 1659년: 피레네 조약으로 스페인-프랑스 전쟁이 종결되었다. 스페인군은 포르투갈 진압에 투입되었으나, 안토니오 데 메네세스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에 의해 엘바스에서 격퇴되었다.
  • 1660년: 잉글랜드에서 찰스 2세가 왕정을 복고했다. 포르투갈은 1654년 조약을 재협상하여 잉글랜드에서 병사와 말을 모집하고, 잉글랜드 선박을 빌려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전투원을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 1661년: 포르투갈 재상 루이스 데 바스콘셀로스는 프리드리히 쇤베르크가 지휘하는 국제적 용병군에 힘입어 전쟁을 수행하려 했다.
  • 1665년: 6월 17일, 몬테스 클라로스 전투에서 포르투갈군이 승리했다.
  • 1667년: 카스테로 멜로르 백작의 갈리시아 침공 계획은 궁정 쿠데타로 좌절되고, 페드루 2세가 권력을 장악했다.
  • 1668년: 리스본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독립과 브라간사 왕가의 정당성을 승인했다. 포르투갈은 세우타를 스페인에 할양했지만, 다른 식민지들은 유지했다.

4. 3. 포르투갈의 승기 (1660-1668)

오스트리아의 후안이 합스부르크 군을 지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 1662년의 결정적이지 못한 전투 이후, 스페인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1663년 4월, 펠리페 4세의 사생아인 오스트리아의 후안은 6주 동안 보급을 받은 2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알렌테주를 침공했다.[2] 5월에 그는 성공적으로 에보라를 점령하여 리스본에 감정의 물결을 일으켰고, 리스본으로의 스페인 진격을 막을 주요 방어선이 없었기 때문에 포르투갈 전역에 경고를 보냈다.[2]

프레데리코, 메르톨라 백작, 포르투갈의 영국 원정군을 지휘했다


포르투갈은 마리알바 후작 안토니오 루이스 드 메네세스의 지휘하에 1662년 8월에 도착한 3,000명의 영국 여단에 의해 강화되었다.[2] 그들 중 다수는 잉글랜드 내전과 네덜란드 반란의 베테랑이었다.[2] 잉글랜드의 찰스 2세에게 이것은 크롬웰의 뉴 모델 아미에서 해산된 병사들을 제거하고 영국 영토에서 제거하는 편리한 방법이었다.[2] 그들은 독일인 용병인 메르톨라 백작 프리드리히 폰 쉔베르크의 지휘를 받았다.[2] 쉔베르크의 지휘하에 있는 여단은 포르투갈의 독립을 되찾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2]

1663년 6월 8일 아메이시알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했고,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후안은 에보라를 포기하고 많은 손실을 입으며 국경을 넘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2]

포르투갈은 이제 알렌테주-에스트레마두라 전선에 약 30,000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스페인 사령관인 카라세나 후작 루이스 데 베나비데스 카리요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징집된 병력을 포함하여 약 23,000명의 병력으로 빌라 비소사를 점령할 때까지 1665년 6월까지 스페인군을 다시 대규모 전투로 끌어들일 수 없었다.[2]

안토니오 루이스 드 메네세스와 쉔베르크 휘하의 포르투갈 구원 부대가 1665년 6월 17일 몬테스 클라로스 전투에서 그들을 만났다.[2] 포르투갈 보병과 포병 진지는 스페인 기병대를 붕괴시켰고, 스페인군은 사상자와 포로를 포함하여 10,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2] 그 직후 포르투갈군은 빌라 비소사를 탈환했다.[2] 이것이 전쟁의 마지막 주요 교전이었다.[2]

양측은 모두 소규모 교전으로 돌아갔다. 포르투갈은 잉글랜드 동맹국의 중재로 휴전을 모색했지만, 몬테스 클라로스에서의 결정적인 포르투갈 승리와 1667년 프랑스-포르투갈 조약의 체결 이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마침내 1668년 2월 13일 브라간사 왕가를 포르투갈의 새로운 지배 왕조로 인정하는 데 동의했다.[2]

전쟁의 주요 다섯 전투는 다음과 같다.[2]

전투명날짜결과
몽티주 전투1644년 5월 26일포르투갈 승리
엘바스 방어선 전투1659년 1월 14일포르투갈 승리
아메이시알 전투1663년 6월 8일포르투갈 승리
카스텔루 호드리구 전투1664년 7월 7일포르투갈 승리
몬테스 클라로스 전투1665년 6월 17일포르투갈 승리



포르투갈군은 이 전투들에서 모두 승리했으며, 영국의 중재로 1668년 리스본 조약이 체결되면서 평화가 이루어졌다.[2]

5. 리스본 조약과 포르투갈의 독립 인정 (1668)

1640년 12월 1일, 리스본 왕궁에서 소수의 공모자들이 포르투갈 부왕 마가렛을 폐위시키면서 포르투갈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브라간사 공작은 포르투갈의 주앙 4세로 즉위하였고, 그의 통치 기간 내내 포르투갈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이 계속되었다.[7]

1656년 주앙 4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아폰수 6세가 즉위하였으나,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 카스텔루 메요르 백작이 실질적으로 통치하였다. 1667년, 아폰수 6세는 동생 페드루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아조레스 제도로 추방되었다.

1668년, 스페인과의 리스본 조약으로 28년간의 전쟁이 종식되었다. 스페인 섭정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는 어린 아들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의 이름으로 포르투갈 군주의 정당성을 마침내 인정했다. 포르투갈은 세우타를 제외한 모든 해외 식민지를 유지했다.

5. 1. 협상 과정

주앙 4세의 통치 기간 내내 포르투갈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었다. 1654년, 주앙 4세와 올리버 크롬웰 간의 앵글로-포르투갈 조약이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체결되었다. 주앙 4세는 포르투갈과 그 영토에서 영국 상인들을 방해하는 것을 막고, 그들이 자신의 성경을 사용하며 가톨릭 국가에서도 프로테스탄트 의식에 따라 사망자를 매장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데 동의했다.[7]

1656년, 주앙 4세가 사망한 후, 그의 왕비 루이자 데 구스망은 아들 아폰수 6세를 대신하여 섭정을 맡았다. 그녀는 스페인과의 타협을 모색하였다. 1659년, 피레네 조약으로 스페인과 프랑스 간의 오랜 전쟁이 종식되면서, 스페인 군대는 포르투갈의 독립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다시 자유롭게 투입될 수 있었다.

잉글랜드의 찰스 2세가 복위되자, 섭정 여왕은 1654년 조약을 재협상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위해 잉글랜드에서 군인과 말을 모집하고,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4천 명의 용병을 징집하며, 24척의 영국 선박을 임대하여 그들을 수송할 수 있었다. 원정군은 포르투갈에 도착하면 영국 무기를 지급받았고, 예배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1661년, 봄베이와 탕헤르는 브라간사의 캐서린에게 결혼 지참금으로 영국에 양도되었으며, 캐서린은 잉글랜드의 찰스 2세와 결혼했다. 이 결혼 부채를 처리하는 것은 다음 반세기 동안 포르투갈 재무부에 부담을 주었다. 친영국파와 친프랑스파가 포르투갈 궁정에 형성되었다. 같은 해, 영국의 중재로 네덜란드는 헤이그 조약 (1661년)을 통해 실론에 대한 분쟁 없는 통제권을 대가로 브라질의 포르투갈 통치를 인정했다.

아폰수 6세가 성년이 된 직후, 루이스 데 바스콘셀로스 이 소사, 카스텔루 메요르 백작은 왕과 친분을 맺어 궁정에서 권력을 얻었다. 그는 왕에게 그의 어머니가 왕위를 훔치고 포르투갈에서 그를 추방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설득했다. 그 결과, 아폰수는 통치할 권리를 주장하고 그의 어머니를 수녀원으로 보냈다. 카스텔루 메요르는 사실상 "포르투갈의 독재자"가 되었다.

1667년, 네무르의 마리 프랑수아는 왕의 무능력을 근거로 아폰수 6세와의 결혼 무효를 청원했고, 교회는 이를 허용했다. 아폰수 6세는 왕의 동생인 베자 공작 페드루에 의해 전복되었다. 페드루는 먼저 자신의 형을 섭정으로 임명한 다음, 아조레스의 테르세이라 섬으로 추방시켰다.

1668년, 스페인과의 리스본 조약으로 28년간의 전쟁이 종식되었다. 스페인 섭정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는 어린 아들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의 이름으로 포르투갈 군주의 정당성을 마침내 인정했다. 포르투갈은 세우타를 제외한 모든 해외 식민지를 유지했다.

5. 2. 조약의 내용

리스본 조약은 1668년 스페인의 섭정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가 어린 아들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를 대신하여 포르투갈 군주의 정당성을 인정한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28년간의 포르투갈 독립 전쟁이 종식되었다.[3] 포르투갈은 브라간사 왕조가 인정하지 않았던 북아프리카 해안의 세우타를 스페인에 할양했지만, 그 외의 모든 해외 식민지는 유지했다.

6. 전쟁의 결과 및 영향

이 전쟁은 막대한 비용을 초래했다. 1650년대에 에스트레마두라에만 2만 명이 넘는 스페인군이 주둔했는데, 이는 플랑드르의 2만 7천 명에 비하면 상당한 숫자였다. 1649년에서 1654년 사이에 스페인의 국방비 지출의 약 29%(6백만 두카트) 이상이 포르투갈과의 전투에 할당되었으며, 이 수치는 1660년대의 주요 작전 동안 증가했다. 포르투갈은 아시아와의 향료 무역과 브라질에서 설탕 무역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쟁 노력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었으며, 스페인의 유럽 적대국, 특히 프랑스와 잉글랜드로부터 어느 정도 지원을 받았다.

1650년대는 군사적으로는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1659년 엘바스 전선 전투를 제외하면 정치적, 외교적 측면에서 중요했다. 1656년 주앙 4세의 사망은 그의 부인 루이자 드 구스망의 섭정 통치의 시작을 알렸고, 이는 왕위 계승 위기와 궁정 쿠데타(1662년)로 이어졌다. 이러한 국내 문제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를 브라질에서 몰아낸 사건(1654년)과 잉글랜드와의 조약 체결(1654년)은 포르투갈의 외교적, 재정적 지위를 일시적으로 향상시켰고, 리스본에 대한 해군 공격으로부터 필요한 보호를 제공했다.

오스트리아의 후안은 합스부르크군을 지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의 공식적인 조약이라는 가장 중요한 목표는 포르투갈을 계속해서 비켜갔다. 포르투갈의 약점과 고립은 유럽 분쟁 해결을 위한 협상, 즉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에서 사실상 배제됨으로써 더욱 뚜렷해졌다.

이 조약과 1652년 카탈루냐에서 적대 행위가 종료되면서 스페인은 다시 포르투갈을 상대로 노력을 기울일 준비가 되었지만, 인력과 자원 부족, 특히 유능한 군사 지휘관의 부족에 직면했다.

1668년 리스본 조약으로 28년간의 전쟁은 종식되었다. 스페인 섭정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는 어린 아들인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의 이름으로 포르투갈 군주의 정당성을 마침내 인정했다. 포르투갈은 전쟁 중 브라간사 왕조를 인정하지 않은 북아프리카 해안의 세우타를 제외하고 남아있는 모든 해외 식민지를 유지했다.

6. 1. 포르투갈의 독립과 민족주의 고취

포르투갈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확고히 하고,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했다. 전장에서의 승리는 포르투갈 민족주의를 다시 일깨웠다.[4]

경제적으로 포르투갈은 독립 회복을 통해 상업적 제국주의 선구자들이 구상한 길을 따를 수 있게 되었다. 17세기 동안 포르투갈 경제는 담배와 설탕의 중계 무역과 소금 수출에 크게 의존했다. 18세기에는 필수품이 버려지지 않았음에도, 포르투갈 경제는 노예, 금, 가죽, 와인을 기반으로 하게 되었다. 번잡한 리스본 항구를 중심으로 한 포르투갈 무역은 앵글로-네덜란드 자본주의와 브라질의 식민지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에리세이라 백작 루이스 드 메네세스는 섭정인 '왕자'의 경제 고문으로서 플랑드르 모델을 기반으로 한 토착 섬유 산업의 개발을 옹호했다. 코빌량에 공장이 설립되었는데, 이곳은 양떼와 깨끗한 산의 물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포르투갈 중부 지역이었지만, 지역 소비자들과 전통적인 직조공 모두에게 매우 인기가 없었다. 한편, 포르투갈의 견직 산업 개발 시도는 그 시장을 독점하려는 프랑스에 의해 훼손되었다.

1668년 이후 포르투갈은 서유럽, 특히 프랑스와 잉글랜드와 지적 관계를 점점 더 강화하면서 이베리아 반도 뿌리에서 벗어나 스페인으로부터의 문화적, 정치적 독립을 향해 나아갔다. 스페인 침공에 대한 두려움은 포르투갈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독립이 카스티야의 영향에 대한 저항과 동일시되면서 스페인과 스페인으로 인식되는 모든 것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도구로 남아 있었다.[4]

극동의 포르투갈 식민지 마카오는 점령 기간 내내 포르투갈 군주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그리하여 1654년 포르투갈의 주앙 4세 국왕은 "''Cidade do Nome de Deus, Macau, Não Há Outra Mais Leal''"(신의 이름의 도시, 마카오, 그보다 더 충실한 도시는 없다)라는 칭호를 수여했다.[4]

마카오 성실한 원로원 건물 내부의 계단, 도시의 이름, 칭호 및 명예가 새겨진 명판이 있다.

6. 2. 국제 관계 변화와 영국의 부상

추기경 리슐리외는 프랑스 루이 13세의 수석 고문으로, 프랑스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루이 13세는 당시 스페인과 전쟁 중이었고, 프랑스 왕국 내부 반란을 진압해야 했으며,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에 맞서기 위해 세 전선에 군대를 파견해야 했다. 스페인 펠리페 4세는 이전의 포르투갈 펠리페 3세이기도 했으며, 플랑드르와 프랑슈콩테를 통치하여 프랑스를 포위하고 있었다. 또한 펠리페 4세는 이탈리아 영토를 통제하여 사보이를 공격, 네 번째 전선을 만들 수 있었다.

리슐리외는 펠리페 4세가 내부 문제에 집중하도록, 포르투갈 전쟁이 스페인의 자원과 병력을 고갈시킬 것이라 판단하여 포르투갈의 주앙 4세를 지지했다. 1641년 6월 1일, 포르투갈과 프랑스는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마자랭 추기경은 1659년 피레네 조약을 통해 스페인과 별도 평화 조약을 체결, 포르투갈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펠리페 4세를 포르투갈 국왕으로 인정했다. 7년 후, 아폰수 6세는 프랑스 공주 마리 프랑수아즈 드 사부아와 결혼했다.

리스본 혁명 당시, 포르투갈은 네덜란드와 40년 가까이 전쟁 중이었다. 이는 스페인과 네덜란드 공화국 간 80년 전쟁의 영향으로, 포르투갈은 스페인 군주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은 해외에서 벌어졌으며, 네덜란드는 포르투갈 식민지를 반복적으로 공격했다. 주앙 4세 즉위 후, 포르투갈은 포르투갈령 앙골라, 상투메, 브라질 식민지에서 네덜란드를 축출했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과 유럽 휴전을 맺고, 세투발 염전에서 소금 구매를 재개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공격은 1663년까지 지속되었다.

잉글랜드 내전 당시, 잉글랜드 의회는 왕당파에 맞서 승리했지만, 포르투갈 왕실은 잉글랜드 왕자와 귀족들을 인정했다. 찰스 1세를 폐위시킨 잉글랜드 연방 시대에도 긴장 관계는 지속되었다. 찰스 2세의 스튜어트 왕조 복고 후, 포르투갈은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통해 스페인과의 평화를 돕는 데 기여했다. 브라간사 여왕 카타리나와 찰스 2세의 결혼으로 동맹은 강화되었고, 포르투갈은 탕헤르뭄바이를 잉글랜드에 할양했다.

포르투갈은 독립을 확립하고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경제적으로 포르투갈은 중계 무역과 소금 수출에 의존했으며, 이후 노예, 금, 가죽, 와인을 기반으로 경제를 발전시켰다. 에리세이라 백작은 섬유 산업 발전을 옹호했으나, 프랑스에 의해 훼손되었다. 포르투갈은 서유럽과의 지적 관계를 강화하며 스페인으로부터 문화적, 정치적 독립을 추구했다. 스페인 침공에 대한 두려움은 포르투갈 민족주의를 강화했다.

극동의 포르투갈 식민지 마카오는 포르투갈 군주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1654년, 포르투갈의 주앙 4세는 마카오에 "''Cidade do Nome de Deus, Macau, Não Há Outra Mais Leal''" (신의 이름의 도시, 마카오, 그보다 더 충실한 도시는 없다)라는 칭호를 수여했다.[4]

6. 3. 포르투갈 경제의 재편

경제적으로 포르투갈의 독립 회복은 상업적 제국주의의 선구자들이 구상한 길을 따를 수 있게 했다. 17세기 동안 포르투갈 경제는 담배와 설탕의 중계 무역과 소금 수출에 크게 의존했다. 18세기에는 필수품이 버려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경제는 노예, 금, 가죽, 와인을 기반으로 하게 되었다. 번잡한 리스본 항구를 중심으로 한 포르투갈 무역은 앵글로-네덜란드 자본주의와 브라질의 식민지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에리세이라 백작 루이스 드 메네세스는 섭정인 ''왕자''의 경제 고문으로서 플랑드르 모델을 기반으로 한 토착 섬유 산업의 개발을 옹호했다. 코빌량에 공장이 설립되었는데, 이곳은 양떼와 깨끗한 산의 물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포르투갈 중부 지역이었지만, 지역 소비자들과 전통적인 직조공 모두에게 매우 인기가 없었다. 한편, 포르투갈의 견직 산업 개발 시도는 그 시장을 독점하려는 프랑스에 의해 훼손되었다.

6. 4. 포르투갈의 정치 발전

포르투갈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확고히 하고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전장에서의 승리는 포르투갈 민족주의를 다시 일깨웠다.[4]

경제적으로 포르투갈의 독립은 상업적 제국주의의 선구자들이 구상한 길을 따를 수 있게 했다. 17세기 동안 포르투갈 경제는 담배와 설탕의 중계 무역과 소금 수출에 크게 의존했다. 18세기에는 필수품이 버려지지 않았음에도, 포르투갈 경제는 노예, 금, 가죽, 와인을 기반으로 하게 되었다. 리스본 항구를 중심으로 한 포르투갈 무역은 앵글로-네덜란드 자본주의와 브라질의 식민지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에리세이라 백작 루이스 드 메네세스는 섭정인 ''왕자''의 경제 고문으로서 플랑드르 모델을 기반으로 한 토착 섬유 산업의 개발을 옹호했다. 코빌량에 공장이 설립되었는데, 이곳은 양떼와 깨끗한 산의 물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포르투갈 중부 지역이었지만, 지역 소비자들과 전통적인 직조공 모두에게 매우 인기가 없었다. 한편, 포르투갈의 견직 산업 개발 시도는 그 시장을 독점하려는 프랑스에 의해 훼손되었다.

1668년 이후 포르투갈은 서유럽, 특히 프랑스와 잉글랜드와 지적 관계를 점점 더 강화하면서 이베리아 반도 뿌리에서 벗어나 스페인으로부터의 문화적, 정치적 독립을 향해 나아갔다. 스페인 침공에 대한 두려움은 포르투갈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독립이 카스티야의 영향에 대한 저항과 동일시되면서 스페인과 스페인으로 인식되는 모든 것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도구로 남아 있었다.

극동의 포르투갈 식민지 마카오는 점령 기간 내내 포르투갈 군주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그리하여 1654년 주앙 4세 국왕은 "''Cidade do Nome de Deus, Macau, Não Há Outra Mais Leal''", 즉 "신의 이름의 도시, 마카오, 그보다 더 충실한 도시는 없다"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17세기부터 18세기의 포르투갈에서는 '''환호 전쟁'''(Guerra da Aclamação)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는 단순히 포르투갈을 지배하는 왕조, 단절된 아비스 가문을 대신하여 (그 서류 분가에 해당하는) 브라간사 가문을 복고시키는 것으로, 포르투갈 헌법 아래에서 전제 군주를 추방하고, 국가에 어울리는 다른 적합한 왕가를 환호로 맞이하거나 선택한 것이다. 이는 이미 포르투갈 역사에서 여러 번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1580년에 펠리페 2세 (포르투갈에서는 필리페 1세)가 이베리아 연합을 성립시켰을 때, 그는 포르투갈 귀족을 스페인 궁정에서 우대하고, 포르투갈의 고유한 법률, 통화, 정부의 유지를 약속했으며, 리스본은 왕국의 수도로 남았다. 그러나 펠리페 3세 (포르투갈에서는 필리페 2세) 시대부터 스페인은 제국을 구성하는 카탈루냐, 아라곤, 나바라, 포르투갈의 자치를 축소시키고 중앙 집권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펠리페 4세 (포르투갈에서는 필리페 3세)는 증대하는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해 포르투갈 상인에게 중과세를 부과하고, 포르투갈 정부의 요직은 마드리드에서 파견된 카스티야인이나 친스페인파 포르투갈인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필리페 3세는 포르투갈 귀족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포르투갈을 스페인 제국을 구성하는 단순한 주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또한, 포르투갈군은 스페인이 전개하는 대외 전쟁에 동원되었다. 스페인에 대한 반감은 확실하게 포르투갈 국내에 만연해 있었다. 1637년 8월, 에보라에서 징세인의 집에 불이 붙은 것을 계기로 마누엘리뉴 반란이 일어났다. 각 도시로 확산된 반란은 즉시 진압되었지만, 혁명의 기운은 더욱 고조되었다. 1640년 6월에 발생한 카탈루냐의 수확인 전쟁에서, 스페인 재상 올리바레스 백작이 진압에 포르투갈 군대까지 투입한 것이 포르투갈의 반감을 샀다. 스페인이 카탈루냐 진압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포르투갈 귀족들은 이를 계기로 계획을 세웠다.

환호 혁명은 1640년 12월 1일에 리스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혁명은 순식간에 포르투갈 국내, 식민지에서 지지를 얻었다.

참조

[1] 서적
[2] 웹사이트 Guerra da Aclamação https://www.infopedi[...] 2024-04-22
[3] 웹사이트 Bandeiras, estandartes, e guiões – exército português (3) https://guerradarest[...] 2008-04-20
[4] 뉴스 Step onto Senado Square and into the past: Walking tours bring Macau's Chinese, Portuguese history in focus https://www.scmp.com[...] South China Morning Post
[5] 뉴스 1640年、カタルーニャの反乱をきっかけとしたポルトガル王政復古戦争が起こり、ポルトガルがスペインから独立した。12月1日はそれを記念した日である。 また、12月1日はカレー南蛮の日やワッフルの日でもある。 https://news.nissyok[...] 2020-11-30
[6] 문서 ブラジルからオランダを永久に排除した代わりに、[[セイロン島]]と[[モルッカ諸島]]をオランダへ割譲した。
[7] 문서 当時のスペイン[[副王]]府。1755年の[[リスボン地震 (1755年)|リスボン地震]]で崩壊し、現在は[[コメルシオ広場]]となっている。
[8] 문서 Anderson, pg 131
[9] 서적 Treaty of alliance between France and Portugal concluded at Paris, June 1, 1641 The Lawbook Exchange, Ltd.
[10] 웹인용 John IV (king of Portugal) http://www.britannic[...]
[11] 서적 The army of Flanders and the Spanish road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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