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10월 5일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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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0년 10월 5일 혁명은 포르투갈에서 군주제를 종식시키고 공화국을 수립한 사건이다. 1890년 영국의 최후통첩과 경제 위기로 인한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면서, 공화당의 성장과 1908년 리스본 국왕 암살 사건을 거치며 군주제의 위기가 심화되었다. 1910년 10월 3일 리스본에서 봉기가 시작되었고, 4일에는 국왕 마누엘 2세가 망명하면서, 5일 테오필루 브라가를 대통령으로 하는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 정부는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했지만, 반교권주의 정책으로 사회적 갈등을 겪었다. 국제 사회는 브라질을 시작으로 공화국을 승인했으며, 혁명은 포르투갈 정치, 사회,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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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0월 5일 혁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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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October 1910 혁명 | |
배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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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배경
1890년 영국의 최후통첩은 포르투갈 국민들에게 큰 굴욕감을 안겨주었고, 이는 국왕과 왕족, 군주제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브라질 이민자들의 송금 감소로 인한 경제 위기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12]
이러한 상황에서 안토니우 조제 드 알메이다 같은 지식인들은 국왕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며 저항했고, 실바 포르투 같은 탐험가는 자살로 항거했다.[15] 게라 훈케이루는 풍자시를 통해 국왕을 비판했다.[18] 1891년에는 포르투에서 군사 반란이 일어나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기도 했으나 진압되었다.[19] 이러한 사건들은 군주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었으며, 이후 혁명의 전조가 되었다.
2. 1. 1890년 영국 최후통첩과 민족주의 고조
1890년 1월 11일, 영국의 솔즈베리 경 정부는 포르투갈 정부에 "각서" 형태의 최후통첩을 보냈다.[9] 이는 세르파 핀투가 이끄는 포르투갈 군대가 앙골라와 모잠비크 식민지 사이의 영토(현재의 짐바브웨와 잠비아)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포르투갈은 분홍 지도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해왔다.[10]영국의 요구에 포르투갈 정부가 빠르게 굴복한 것은 대다수의 국민과 엘리트에게 국가적 굴욕으로 여겨졌다.[11] 이 사건은 새 국왕 포르투갈의 카를루스 1세, 왕족, 그리고 군주제에 대한 깊은 불만을 일으켰고, 이들은 모두 "국가 쇠퇴"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졌다. 1890년과 1891년 사이의 심각한 금융 위기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브라질 이민자들의 송금이 80%나 감소했는데, 이는 브라질에서 공화국이 선포된 후 발생한 엔실하멘투 위기 때문이었다. 공화주의자들은 이러한 불만을 이용하여 사회적 지지 기반을 넓혔다.[12]
1890년 3월 23일, 당시 코임브라 대학교 학생이자 훗날 대통령이 된 안토니우 조제 드 알메이다는 국왕을 비방하는 내용으로 여겨지는 "''브라간사, 마지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표하여 투옥되었다.[14] 1890년 4월 1일, 탐험가 실바 포르투는 쿠이토(앙골라)에서 포르투갈 국기에 싸여 자살했다.[15] 그의 죽음은 국민적 슬픔을 불러일으켰고,[16][17] 게라 훈케이루는 국왕을 비판하는 풍자시 ''피니스 파트리아에''를 출간했다.[18]
1891년 1월 31일, 포르투에서 주로 병장과 병사로 구성된 군사 반란이 일어났다.[19] 반란군은 파수스 두 콘셀류를 점령했고, 아우구스투 마누엘 알베스 다 베이가가 발코니에서 포르투갈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깃발을 게양했다. 하지만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체포된 반란군들은 아프리카로 유형을 떠났다.[20] 비록 실패했지만, 1891년 1월 31일 반란은 군주제 체제가 처음으로 심각하게 위협받은 사건이었으며, 거의 20년 후에 일어날 혁명의 전조였다.[21]
2. 2. 포르투갈 공화당의 성장과 이념
1876년 창당된 포르투갈 공화당(PRP)은 이념적, 정치적 활동을 통해 1910년 10월 5일 혁명을 이끌었다.[23] 공화당은 군주제 종식을 통한 국가 갱신을 주장하며, 노동 계급의 권리를 위해 기존 정권과 협력했던 포르투갈 사회당과 차별화하여 사회 불만 세력의 지지를 얻었다.당 내부의 갈등은 이념적 문제보다는 정치 전략과 관련된 것이었다. 포르투갈 공화주의 이념은 조제 펠릭스 엔리케스 노게이라의 저술로 확립되었고, 이후 테오필루 브라가는 분권화와 연방주의적 사상을 통해 사회주의적 성격을 민주주의적으로 바꾸어 중소 부르주아 계층을 끌어들였다. 1878년 10월 13일, 조제 조아킴 로드리게스 드 프레이타스가 포르투갈에서 첫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24]
공화당은 군주제 타도에 통합, 민족주의, 개별 사회 계급의 특수 이익을 초월하는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25] 이는 민족주의와 식민주의라는 두 가지 경향을 강조하며, 모든 국민의 고질적인 병폐를 치유하고 국가를 영광으로 이끌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결합으로 이베리아 연방주의는 폐기되었고,[26] 군주제는 반애국적이며 외세에 양보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반교권주의는 공화주의 이념의 또 다른 강력한 요소였다.[27] 테오필루 브라가에 따르면, 종교는 진보의 장애물이자 포르투갈의 과학적 낙후의 원인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과학, 진보, 복지와 연결된 공화주의와 대조적이었다.[28]

대부분의 공화당 지지자들에게 이념적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고, 군주제, 교회, 기존 정당의 정치 부패에 반대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럼에도 공화당은 집회, 대중 시위, ''A Voz Pública''(대중의 목소리), ''O Século''(시대, 1880년부터), ''O Mundo''(세계, 1900년부터), ''A Luta''(투쟁, 1906년부터) 등의 간행물을 통해 이념을 전파했다.
공화당은 루이스 드 카몽이스 사후 300주년 기념 행사(1880년)와 1890년 영국의 최후통첩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을 이용하여 대중적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카몽이스 300주년 기념식은 시민 행렬과 바스쿠 다 가마의 유해를 제로니무스 수도원으로 이장하는 등 성대하게 거행되었고,[29] 리스본 지리학회가 기획했지만, 테오필루 브라가 등 공화당 주요 인물들이 실행 위원회를 맡았다.[30]
1884년부터 1894년까지 마누엘 드 아리아가, 조제 엘리아스 가르시아 등 여러 의원이 PRP를 대표하여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00년까지 국회에 대표가 없었으나, 이후 당 조직에 전념한 후 국회 경쟁에 다시 참여하여 아폰수 코스타 등 4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2. 3. 1908년 리스본 국왕 암살 사건
1908년 2월 1일, 포르투갈 국왕 카를루스 1세와 그의 장남이자 왕세자였던 루이스 필리페 왕세자가 리스본의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암살당했다.[31]이 암살은 재생 이후 포르투갈 정치 시스템이 점진적으로 쇠퇴한 후에 발생했다.[32] 진보당과 재생당이 번갈아 가며 정부를 구성하는 정권 교체 시스템으로 인해 정치적 침식이 일어났다. 헌법에 따라 시스템의 중재자 역할을 한 국왕은 주앙 프랑쿠를 장관평의회(정부 수반) 의장으로 임명했다.[33] 재생당의 반체제 인사였던 주앙 프랑쿠는 포르투갈 정치를 개혁하기 위한 조치를 시행하기 위해 의회 해산을 국왕에게 설득했다.[34] 이 결정은 공화주의자뿐만 아니라 왕당파 반대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코의 정치적 라이벌들은 그를 독재자처럼 통치한다고 비난했다. 왕실에 대한 선지급 문제와 이틀 전 실패한 공화주의 쿠데타에 연루된 자들을 재판 없이 식민지로 추방하는 것을 예상한 1908년 1월 30일 법령 서명으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35]
왕실은 빌라비소사 공작궁전에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국왕은 2월 1일 아침 빌라비소사 역에서 기차를 타고 리스본으로 귀환했다. 왕실 호위대는 저녁에 바레이루에 도착했고, 타구스 강을 건너기 위해 오후 5시경 리스본의 테헤이루 두 파수로 가는 증기선을 이용했다.[37] 긴장감이 고조된 분위기였지만, 국왕은 평상시처럼 보이기 위해 호위병을 줄이고 열린 마차를 타기로 했다. 광장에 있는 군중에게 인사를 하던 중 마차는 여러 발의 총격을 받았다. 카빈소총탄 중 하나가 국왕의 목에 맞아 즉사했다. 이어 여러 발의 총격이 이어졌고, 왕세자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왕비는 사람들이 준 꽃다발로 자신을 방어하며 마차 위로 올라탄 공격자 중 한 명을 쳤다. 왕세자 마누엘은 팔에 총상을 입었다. 공격자 중 두 명인 초등학교 교사 마누엘 부이사와 상업직원이자 편집자였던 알프레도 루이스 다 코스타는 현장에서 사망했고, 다른 이들은 도주했다. 마차는 해군 조선소로 들어갔고, 국왕과 왕세자의 사망이 확인되었다.
암살 이후 주앙 프랑코 정부는 해임되었고, 철저한 조사가 시작되어 2년 후 암살이 비밀결사대 ''카르보나리아''의 구성원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38] 조사는 1910년 10월 5일에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직접적인 연루자가 더 발견되었고, 그중 일부는 브라질과 프랑스로 도피했지만, 적어도 두 명은 ''카르보나리아''에 의해 살해되었다.[39]
카를루스 국왕은 다른 유럽 국가의 수장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이 암살은 유럽에 충격을 주었다.[40] 리스본 암살 사건은 젊고 경험 없는 마누엘 2세를 왕위에 올려놓고 왕당파들을 서로 대립하게 만들면서 군주제의 종말을 앞당겼다.
2. 4. 군주제의 위기
포르투갈의 마누엘 2세는 어린 나이(18세)와 비극적이고 잔혹한 방식으로 권력을 잡았기에 대중으로부터 초기의 동정을 얻었다.[42] 젊은 왕은 프란시스쿠 조아킴 페헤이라 두 아마랄이 주재하는 타협 정부를 임명하며 통치를 시작했다. 이른바 '평화 정부'는 일시적인 평온을 가져왔지만, 짧은 기간만 지속되었다.[43] 정치 상황은 다시 급격히 악화되어 2년 만에 7번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왕당파들은 다시 서로 맞서 싸우며 분열되었고, 공화당은 계속 세력을 키워 나갔다. 1908년 4월 5일 군주제 하에서 치러진 마지막 의회 선거에서 에슈테바웅 드 바스콘셀루스, 페이우 테레나스, 마누엘 드 브리투 카마슈를 포함한 7명의 공화당 의원이 선출되었다. 1910년 8월 28일 선거에서 공화당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14명의 의원을 선출했고, 그중 10명은 리스본 출신이었다.[44]공화주의 운동의 선거 성공에도 불구하고, 당의 가장 급진적인 부분은 무장 투쟁을 통해 단기간 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9년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세투발에서 열린 당 대회에서 이 파벌이 승리했다.[45] 테오필루 브라가, 바질리우 텔레스, 우세비우 레아웅, 조제 쿠피티누 리베이루, 조제 렐바스 등 온건파 지도부는 대회로부터 '혁명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음모 준비에 대한 물류 역할은 아폰수 코스타, 주앙 피뉴에이루 샤가스, 앙토니우 조제 드 알메이다로 구성된 시민 위원회와 군사 위원회의 지도자인 카를루스 칸디두 두스 레이스 제독 등 가장 급진적인 인사들에게 할당되었다.[46] 앙토니우 조제 드 알메이다는 해군 감찰관 앙토니우 마샤두 산투스가 포함된 지도부를 가진 '카르보나리아'와 같은 비밀 결사대[47], 프리메이슨, 그리고 미구엘 봄바르다가 이끄는 '훈터 리베랄' 조직을 담당했다. 미구엘 봄바르다는 부르주아 계층 사이에서 공화주의 선전을 널리 퍼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많은 사람들이 공화주의에 동조하게 되었다.[48]
1909년 대회와 혁명 발생 사이의 기간은 큰 불안정과 정치적, 사회적 혼란으로 특징지어졌으며,[49] 해군의 마샤두 산투스가 이끄는 해군의 조급함으로 인해 여러 차례의 봉기 위협이 혁명을 위태롭게 했다.
3. 혁명의 발발
1910년 10월 3일, 오랫동안 정치적 불안을 겪던 중 공화당의 봉기가 일어났다.[50] 많은 공화주의자들이 봉기에 참여하지 않아 실패하는 듯했으나, 정부가 200명 가까운 무장 혁명가들이 저항한 로툰다를 장악할 병력을 모으지 못해 결국 성공했다.[51]
혁명에 앞서 총리 호안 프랑코는 사임하고 망명했다. 새로운 선거가 치러졌지만, 파벌 싸움으로 안정된 정권을 수립하지 못했다. 1910년 10월 1일, 브라질 대통령 에르메스 다 폰세카의 방문을 구실로 공화주의자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10월 3일, 군부는 테주 강 하구에 정박한 군함의 반란 진압을 거부하고 리스본 주변을 점령했다.
미구엘 봄바르다의 살해 사건 이후,[56] 공화당 지도자들은 10월 3일 밤 긴급 회의를 가졌다.[57] 일부는 군사력 때문에 반대했지만, 칸디두 두스 레이스 제독은 "혁명은 연기될 수 없습니다. 원한다면 저를 따르십시오.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저입니다."라고 말하며 회의를 강행했다.[58][59]
마샤두 산투스는 제16보병연대[60]에서 혁명적인 병장의 주도로 반란을 일으켰다. 지휘관과 대위는 진압 중 사망했다. 해군 장교는 100여 명의 병사와 제1포병연대[61]로 가서 아폰수 팔라 대위 등과 함께 반란에 거부한 장교들을 체포했다.[62] 마샤두 산투스가 도착 후 두 부대가 편성되었다. 첫 부대는 제2보병연대, 제2 카사도레스(Caçadores)[62] 연대와 합류하여 알칸타라의 해군 병영을 지원하러 갔다. 두 부대는 로툰다로 진격, 새벽 5시경 제1포병연대 200~300명, 제16보병연대 50~60명, 민간인 약 200명으로 진지를 구축했다.
한편, 라디슬라우 파레이라 중위 등은 새벽 1시에 알칸타라 해군단 병영에서 폭동을 일으켜 지휘관들을 체포하고,[63] 시립 경비대 기병대의 출동을 막았다.[64] 멘데스 카베사다스 중위는 NRP 아다마스토르[65]의 승무원을 지휘하고 있었고, 상 라파엘(São Rafael)의 승무원은 지휘관을 기다렸다.
새벽 7시경, 티토 드 모라이스 소위에게 상 라파엘(São Rafael) 지휘를 명령, 두 척의 함선이 병영 주둔군을 지원했다. 도 카를루스 1세(D. Carlos I)호에서는 승무원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장교들이 진압, 카를루스 다 마이아 중위 등이 상 라파엘(São Rafael)호로 가서 총격전 후 장교들을 제압하고 공화당에 넘겼다.
반군에는 제1포병연대, 제16보병연대, 해군단, 3척의 군함이 합류했다. 해군 요원들이 대거 합류했지만, 많은 군 부대는 합류하지 않았다. 공화당군은 로툰다에 약 400명, 알칸타라에 1000~1500명, 도시 포병과 해군 포병을 장악했다. 그러나 혁명 계획은 미정이었고, 주요 지도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세 발의 대포 소리 신호는 울리지 않았고, 한 발만 들렸다. 칸디두 두스 레이스 제독은 실패로 판단, 은퇴 후 다음 날 아루이우스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었다.
로툰다에서 장교들은 항복을 고려했으나, 마샤두 산투스가 지휘권을 유지하며 혁명 성공에 기여했다.
10월 4일, 왕당파 부대 일부가 공화파에 합류하고 반군이 로툰다와 알칸타라에 진지를 구축하면서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고, 도시 전체에 승패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68]
저녁 무렵, 반군 함선이 테헤이루 두 파수 광장 옆에 정박, 순양함 ''상 라파엘''호가 각료 건물을 포격했다.[71][72] 전함 ''상파울루''호에는 브라질 외교 사절단과 대통령 당선자 에르메스 다 폰세카가 탑승해 있었다.[73] 이 공격은 친정부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10월 4일 밤, 로시오 광장에 주둔한 왕당파 군대는 해군의 폭격 위협으로 사기가 매우 저하되었다.
독일 대표는 외국인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휴전을 요청했고, 고르장 앙리케스 장군은 정부에 알리지 않고 동의했다.[81] 독일 외교관은 로툰다로 가서 혁명가들과 휴전을 논의했지만, 혁명가들은 백기를 보고 왕당파가 항복한 것으로 오해하여 축하 행사에 참여했다. 마샤두 산투스는 처음에는 휴전을 거부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그는 시민, 장교들과 함께 본부로 향했다.
로시오의 상황은 혼란스러웠지만, 대중의 지지로 공화파에게 유리했다. 마샤두 산투스는 고르장 앙리케스 장군과 이야기하고 사단장직 유지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안토니우 카르발랄이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그 직후, 오전 9시에 조제 렐바스(José Relvas)[82]가 리스본 시청 발코니에서 공화국을 선포했다. 포르투갈 공화당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국가를 통치하게 되었다.
3. 1. 혁명 직전의 상황
1890년 1월 11일, 영국United Kingdom영어은 포르투갈 정부에 "각서" 형태의 최후통첩을 보냈다.[9] 앙골라와 모잠비크 식민지 사이의 영토(현재 짐바브웨와 잠비아)에서 세르파 핀투가 이끄는 포르투갈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포르투갈은 분홍 지도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주권을 주장했다.[10]영국의 요구에 포르투갈 정부가 신속하게 응답한 것은 국민과 엘리트층 대다수에게 굴욕으로 여겨졌다.[11] 이것은 새로운 국왕 포르투갈의 카를루스 1세, 왕족, 그리고 군주제에 대한 깊은 불만을 야기했고, 이들은 모두 "국가 쇠퇴" 과정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졌다. 1890년과 1891년 사이에 발생한 심각한 금융 위기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브라질 이민자들이 보낸 돈이 80% 감소했는데, 이는 두 달 전 브라질에서 공화국이 선포된 후 소위 엔실하멘투 위기 때문이었다.[12] 이러한 사건들은 군주제 정부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포르투갈의 공화정 지지자들은 이 불만을 이용하여 사회적 지지 기반을 확대했다.[12]
1890년 3월 23일, 당시 코임브라 대학교 학생이었고 훗날 대통령이 된 안토니우 조제 드 알메이다는 국왕을 비방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브라간사, 마지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표하여[14] 투옥되었다.
1890년 4월 1일, 탐험가 실바 포르투는 쿠이토(앙골라)에서 포르투갈 국기에 싸여 자살했다.[15] 유명한 아프리카 대륙 탐험가의 죽음은 국민 정서를 자극했고,[15] 그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16][17] 4월 11일, 국왕을 비판하는 풍자시인 게라 훈케이루의 작품 ''피니스 파트리아에''가 출시되었다.[18]
1891년 1월 31일, 포르투에서 주로 병장과 병사로 구성된 군사 반란이 일어났다.[19] 반란군은 민족주의 국가 ''포르투갈의 노래''를 행진곡으로 사용하여 파수스 두 콘셀류를 점령했고, 공화주의 언론인이자 정치인인 아우구스투 마누엘 알베스 다 베이가가 발코니에서 포르투갈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연방 민주 중심의 녹색과 붉은색 깃발을 게양했다. 이 운동은 곧 정부에 충성하는 시정 경찰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40명이 부상하고 12명이 사망했다. 체포된 반란군은 재판을 받았고, 250명이 18개월에서 15년의 아프리카 유형 선고를 받았다.[20] ''포르투갈의 노래''는 금지되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1891년 1월 31일 반란은 군주제 체제가 처음으로 심각하게 위협받은 사건이었으며, 거의 20년 후에 일어날 일을 예고하는 것이었다.[21]
혁명 직전, 리스본 주둔군은 이론상 4개의 보병 연대, 2개의 기병 연대, 그리고 2개의 카사도레스(경보병) 대대(총 6982명)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찰 및 일반 치안 임무를 위해 군사 외곽 지역에 배치된 다른 유용한 부대들이 있었는데, 특히 9월부터 지속되던 파업과 노동 조합 활동으로 인해 바헤이루(Barreiro Municipality) 공업 지구에 많았다.[66]
전년도부터 정부군은 리스본 군사 사령관 마누엘 라파엘 고르장앙 엔리케스 장군의 명령에 따라 작전 계획을 세웠다. 반란 소식이 전해지자 제1보병연대, 제2보병연대, 제2카사도레스연대, 제2기병연대와 켈루스(Queluz, Portugal)의 포병 중대는 국왕을 보호하기 위해 네세시다데스 궁전(Palace of Necessidades)으로 이동했고, 제5보병연대와 제5카사도레스연대는 군 사령부를 보호하기 위해 로시오 광장(Rossio Square)으로 이동했다.
경찰과 시립 경비대는 계획에 따라 도시 전역에 배치되어 전략적 요충지를 보호했다. 재무 경비대(총 1397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로시오의 군대와 함께 있던 몇몇 병사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민 경찰(총 1200명)은 병영에 남아 있었다. 이러한 무대책으로 인해 실질적인 정부군은 약 2600명 감소했다.[67]
3. 2. 봉기의 시작
1891년 1월 31일, 포르투에서 주로 병장과 병사로 구성된 군사 반란이 일어났다.[19] 반란군은 민족주의 국가 ''포르투갈의 노래''를 행진곡으로 사용하여 파수스 두 콘셀류를 점령했고, 공화주의 언론인이자 정치인인 아우구스투 마누엘 알베스 다 베이가가 발코니에서 포르투갈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연방 민주 중심의 녹색과 붉은색 깃발을 게양했다. 이 운동은 곧 정부에 충성하는 시정 경찰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40명이 부상하고 12명이 사망했다. 체포된 반란군은 재판을 받았고, 250명이 18개월에서 15년의 아프리카 유형 선고를 받았다.[20] ''포르투갈의 노래''는 금지되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1891년 1월 31일 반란은 군주제 체제가 처음으로 심각하게 위협받은 사건이었으며, 거의 20년 후에 일어날 일을 예고하는 것이었다.[21]1910년 여름 리스본은 소문으로 가득 차 있었고, 여러 차례 국무총리(총리) 테이셰이라 드 소우사는 임박한 쿠데타에 대한 경고를 받았다.[52] 혁명도 예외는 아니어서, 정부는 쿠데타를 예상하고[53] 10월 3일 도시의 모든 주둔군에게 경계령을 내렸다. 브라질 대통령 에르메스 다 폰세카가 포르투갈을 국빈 방문 중[54] 마누엘 2세를 위한 만찬을 제공한 후, 국왕은 네세시다데스 궁전으로 물러났고 그의 삼촌이자 왕위 계승자인 아폰수 왕자는 카스카이스 요새로 갔다.[55]
미구엘 봄바르다의 살해 사건 이후,[56] 공화당 지도자들은 3일 밤 긴급히 모였다.[57] 일부 관리들은 강력한 군사력 때문에 회의에 반대했지만, 칸디두 두스 레이스 제독은 "혁명은 연기될 수 없습니다. 원한다면 저를 따르십시오.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저입니다."라고 말하며 회의를 주장했다.[58][59]
마샤두 산투스는 이미 행동에 들어갔기에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제16보병연대[60]의 군사 지역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혁명적인 병장이 주둔군 대부분을 포함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지휘관과 대위가 진압하려다 사망했다. 수십 명의 카르보나리아(Carbonária) 회원들과 함께 병영에 들어간 해군 장교는 약 100명의 병사들과 함께 제1포병연대[61]로 갔는데, 그곳에서 아폰수 팔라 대위와 몇몇 상사와 민간인들은 이미 행정 건물을 점령하고 반란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모든 장교들을 체포했다.[62] 마샤두 산투스가 도착하자 사 카르도주와 팔라 대위가 이끄는 두 개의 부대가 형성되었다. 첫 번째 부대는 반란에 동조하는 제2보병연대와 제2 카사도레스(Caçadores)[62] 연대와 합류하여 해군 병영을 지원하기 위해 알칸타라로 갔다. 원래 경로는 시립 경비대 초소와 교차하여 부대가 다른 경로를 따라가게 했다. 경찰과 민간인과의 몇 차례 충돌 후, 마침내 팔라가 이끄는 부대를 발견했다. 두 부대는 함께 로툰다로 진격하여 새벽 5시경에 진지를 구축했다. 주둔군은 제1포병연대 200~300명, 제16보병연대 50~60명, 민간인 약 200명으로 구성되었다. 사 카르도주와 팔라 대위, 마샤두 산투스 해군 감찰관은 지휘관 9명 중 한 명이었다.
한편, 라디슬라우 파레이라 중위와 몇몇 장교와 민간인들은 새벽 1시에 알칸타라 해군단 병영에 들어가 무기를 빼앗고 폭동을 일으켜 지휘관들을 체포했는데, 그중 한 명은 부상을 입었다.[63] 이 행동의 목적은 시립 경비대 기병대의 출동을 막는 것이었고, 그 목표는 달성되었다.[64] 이를 위해 그들은 타구스 강에 정박한 3척의 군함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 멘데스 카베사다스 중위는 이미 반란을 일으킨 NRP 아다마스토르[65]의 승무원을 지휘하고 있었고, 반란을 일으킨 상 라파엘(São Rafael)의 승무원은 지휘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7시경 라디슬라우 파레이라가 민간인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고 티토 드 모라이스 소위에게 상 라파엘(São Rafael)의 지휘를 맡기고 두 척의 함선이 병영 주둔군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도 카를루스 1세(D. Carlos I)호에서 승무원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장교들이 진지를 구축했음이 알려지자, 카를루스 다 마이아 중위와 몇몇 선원들이 상 라파엘(São Rafael)호를 떠났다. 중위와 함장이 부상당한 총격전 후, 장교들은 도 카를루스 1세(D. Carlos I)호의 통제권을 포기하고 공화당에게 넘겼다.
그것은 당시 제1포병연대, 제16보병연대, 해군단, 3척의 군함을 포함한 반군에 합류한 마지막 부대였다. 예상대로 해군 요원들이 대거 합류했지만, 그 원인에 동조하는 많은 군 부대는 합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당군은 로툰다에 약 400명, 알칸타라에 해군 승무원을 포함하여 1000~1500명을 포함했고, 대부분의 탄약과 함께 도시의 포병을 장악했으며, 해군 포병도 추가되었다. 로툰다와 알칸타라가 점령되었지만, 혁명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주요 지도자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사건의 시작은 반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민간인과 군인들이 진격하기로 합의한 신호인 세 발의 대포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한 발의 총성만 들렸고, 군함을 지휘할 신호를 기다리던 칸디두 두스 레이스 제독은 모든 것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여동생 집으로 은퇴했다. 다음 날 그의 시체는 아루이우스에서 발견되었다. 절망한 그는 머리에 총을 쏴 자살했다.
한편, 로툰다에서 도시의 명백한 고요함은 반군에게 너무나 낙담을 주어 장교들은 항복하는 것을 선호했다. 사 카르도주, 팔라, 다른 장교들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마샤두 산투스는 남아 지휘권을 맡았다. 이 결정은 혁명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 3. 정부군의 대응과 전투
1910년 여름 리스본은 쿠데타 임박설로 가득 찼고, 총리 테이셰이라 드 소우사는 여러 차례 경고를 받았다.[52] 정부는 10월 3일 도시의 모든 주둔군에게 경계령을 내렸다.[53] 브라질 대통령 에르메스 다 폰세카가 포르투갈을 국빈 방문 중[54] 마누엘 2세를 위한 만찬 후, 국왕은 네세시다데스 궁전으로, 왕위 계승자인 아폰수 왕자는 카스카이스 요새로 갔다.[55]미구엘 봄바르다의 피살 사건 이후,[56] 공화당 지도자들은 10월 3일 밤 긴급 회의를 가졌다.[57] 일부는 군사력 때문에 반대했지만, 칸디두 두스 레이스 제독은 회의를 강행했다.[58][59]
마샤두 산투스는 제16보병연대[60]에서 혁명적인 병장의 주도로 반란을 일으켰다. 지휘관과 대위는 진압 중 사망했다. 해군 장교는 100여 명의 병사와 제1포병연대[61]로 가서 아폰수 팔라 대위 등과 함께 반란에 거부한 장교들을 체포했다.[62] 마샤두 산투스가 도착 후 두 부대가 편성되었다. 첫 부대는 제2보병연대, 제2 카사도레스(Caçadores)[62] 연대와 합류하여 알칸타라의 해군 병영을 지원하러 갔다. 두 부대는 로툰다로 진격, 새벽 5시경 제1포병연대 200~300명, 제16보병연대 50~60명, 민간인 약 200명으로 진지를 구축했다.
한편, 라디슬라우 파레이라 중위 등은 새벽 1시에 알칸타라 해군단 병영에서 폭동을 일으켜 지휘관들을 체포하고,[63] 시립 경비대 기병대의 출동을 막았다.[64] 멘데스 카베사다스 중위는 NRP 아다마스토르[65]의 승무원을 지휘하고 있었고, 상 라파엘(São Rafael)의 승무원은 지휘관을 기다렸다.
새벽 7시경, 티토 드 모라이스 소위에게 상 라파엘(São Rafael) 지휘를 명령, 두 척의 함선이 병영 주둔군을 지원했다. 도 카를루스 1세(D. Carlos I)호에서는 승무원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장교들이 진압, 카를루스 다 마이아 중위 등이 상 라파엘(São Rafael)호로 가서 총격전 후 장교들을 제압하고 공화당에 넘겼다.
반군에는 제1포병연대, 제16보병연대, 해군단, 3척의 군함이 합류했다. 해군 요원들이 대거 합류했지만, 많은 군 부대는 합류하지 않았다. 공화당군은 로툰다에 약 400명, 알칸타라에 1000~1500명, 도시 포병과 해군 포병을 장악했다. 그러나 혁명 계획은 미정이었고, 주요 지도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세 발의 대포 소리 신호는 울리지 않았고, 한 발만 들렸다. 칸디두 두스 레이스 제독은 실패로 판단, 은퇴 후 다음 날 아루이우스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었다.
로툰다에서 장교들은 항복을 고려했으나, 마샤두 산투스가 지휘권을 유지하며 혁명 성공에 기여했다.
리스본 주둔군은 보병 4개 연대, 기병 2개 연대, 카사도레스(경보병) 2개 대대(총 6982명)였다. 그러나 정찰 및 치안 임무로 외곽에 배치된 부대들이 있었고,[66] 특히 파업과 노동 조합 활동으로 바헤이루(Barreiro Municipality) 공업 지구에 많았다.
정부군은 마누엘 라파엘 고르장앙 엔리케스 장군의 작전 계획에 따라, 10월 3일 저녁 반란 임박을 알리자 예방 명령을 내렸다. 포병 3연대와 경보병 6연대는 산타렝(Santarém, Portugal)에서, 보병 15연대는 토마르(Tomar)에서 소집되었다.
반란 소식에 제1, 2보병연대, 제2카사도레스연대, 제2기병연대와 켈루스(Queluz, Portugal)의 포병 중대는 국왕 보호를 위해 네세시다데스 궁전(Palace of Necessidades)으로, 제5보병연대와 제5카사도레스연대는 군 사령부 보호를 위해 로시오 광장(Rossio Square)으로 이동했다.
경찰과 시립 경비대는 도시 전역에 배치되어 전략적 요충지를 보호했다. 재무 경비대(총 1397명)는 로시오에 일부 병력이 있었다. 시민 경찰(총 1200명)은 병영에 남아 있었다. 이로 인해 실질적인 정부군은 약 2600명 감소했다.[67]
10월 4일 내내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고, 왕당파 부대 일부가 공화파에 동조, 반군이 로툰다와 알칸타라에 진지를 구축했다.
알프레도 알부케르케 대령의 분견대는 반군 공격을 받았으나 격퇴했다. 앙리케 미첼 드 파이바 쿠세이루는 포병과 보병으로 응수, 공격을 명령했지만 패배했다. 증원을 요청했으나 후퇴 명령을 받았다.[68]
로툰다의 반군을 공격할 부대가 편성되었지만, 안토니우 카르발랄 장군의 무능함(후에 공화정부 군사 사령관으로 임명)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정부가 기대했던 다른 지역의 증원은 도착하지 않았다. 반군은 전신선을 끊고 철로를 차단했으며,[69] 세투발 반도에서의 증원은 반군 함선이 타구스 강을 장악하여 불가능했다.[70]
저녁 무렵, 반군 함선이 테헤이루 두 파수 광장 옆에 정박, 순양함 ''상 라파엘''호가 각료 건물을 포격했다.[71][72] 전함 ''상파울루''호에 탑승한 브라질 외교 사절단(에르메스 다 폰세카 포함)이 목격했다.[73] 이 공격은 로시오에 있는 친정부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3. 4. 국왕의 망명
마누엘 2세 국왕은 에르메스 다 폰세카와의 만찬 후 네세시다데스 궁전으로 돌아와 장교들과 브리지 게임을 하고 있었다.[74] 이때 반란군이 궁전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국왕은 전화를 시도했지만 전화선이 끊긴 것을 알았다.[75] 왕대비에게만 상황을 알릴 수 있었고, 얼마 후 국왕에게 충성하는 부대들이 도착하여 혁명가들의 공격을 물리쳤다.9시에 국왕은 의회 의장으로부터 마프라나 신트라(Sintra)로 피신할 것을 권고하는 전화를 받았다. 마누엘 2세는 "가고 싶으면 가세요. 저는 남겠습니다. 헌법은 저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역할도 부여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따르겠습니다."라며[76] 떠나기를 거부했다.
켈루스에서 이동식 포대가 도착하여 궁전 정원에 배치되었지만, 포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포대 사령관은 명령을 받고 궁전을 떠났다. 정오 무렵, 순양함 아다마스토르 호와 상 라파엘 호가 네세시다데스 궁전을 포격하기 시작하여 왕당파 세력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국왕은 테이셰이라 드 수사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켈루스의 포대를 궁전으로 보내 해상 상륙을 막으라고 명령했지만, 총리는 주요 작전이 로툰다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그곳에 모든 병력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총리는 국왕에게 신트라 또는 마프라로 철수하여 궁전 주둔 병력이 로툰다의 부대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편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2시에 마누엘 2세와 고문들은 마프라로 출발했다. 벤피카에 접근하면서 국왕은 자신을 호위하던 시 경찰대를 해산시켜 반군과의 싸움에 참여하게 했다. 오후 4시경 마프라에 도착했지만, 보병학교에는 예상보다 적은 100명의 병사만 있었고, 담당자인 핀투 다 로샤 대령은 국왕을 보호할 수 없다고 인정했다.[77] 아제베두 쿠티뉴 고문은 국왕에게 왕비와 대비를 마프라로 부르고, 포르투(Porto)로 이동하여 저항을 조직할 준비를 하라고 조언했다.
3. 5. 혁명의 승리와 공화국 선포
10월 4일, 왕당파 부대 일부가 공화파에 합류하고 반군이 로툰다와 알칸타라에 진지를 구축하면서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고, 도시 전체에 승패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68] 로툰다에 반군이 집결하자, 이들을 해산시키기 위한 분견대가 조직되었다. 이 부대는 앙리케 미첼 드 파이바 쿠세이루가 포함된 켈루스의 기동 포병대 등으로 구성되어 진격했지만, 반군의 공격을 받고 격퇴되었다. 파이바 쿠세이루는 남은 병력으로 응사하며 공격을 시도했지만, 패배하고 증원을 요청했으나 후퇴 명령을 받았다.[68]
한편, 로툰다의 반군을 공격할 부대가 편성되었지만 후퇴 명령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이 부대의 지휘관 안토니우 카르발랄 장군은 무능함을 보였고, 다음 날 공화정부의 군사 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편을 바꾼 것이 명백해졌다.
정부가 기대했던 증원은 도착하지 않았다. 카르보나리아 회원들이 전신선을 끊고 철로를 차단했기 때문이다.[69] 세투발 반도에서의 증원도 타구스 강이 반군 함선에 장악되어 도착이 어려웠다.[70]
왕당파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반군 함선이 테헤이루 두 파수 광장 옆에 정박했고, 순양함 ''상 라파엘''호가 각료 건물을 포격했다.[71][72] 전함 ''상파울루''호에는 브라질 외교 사절단과 대통령 당선자 에르메스 다 폰세카가 탑승해 있었다.[73] 이 공격은 친정부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10월 4일 밤, 로시오 광장에 주둔한 왕당파 군대는 해군의 폭격 위협으로 사기가 매우 저하되었다. 파이바 쿠세이루는 포대를 이끌고 토렐의 카스트루 기마랑이스 정원에 자리를 잡고 새벽을 기다렸다. 로툰다의 병력이 사격을 개시하자, 파이바 쿠세이루는 반격하여 반란군에게 피해를 입혔다. 오전 8시, 파이바 쿠세이루는 휴전 명령을 받고 전투를 중단했다.[78]
한편, 로시오에서는 왕당파 군대의 사기가 더욱 악화되었다.[79] 일부 부대는 해군 상륙 저지를 거부하며 본부로 향했고, 휴전 소식에 놀랐다.
독일 대표는 외국인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휴전을 요청했고, 고르장 앙리케스 장군은 정부에 알리지 않고 동의했다.[81] 독일 외교관은 로툰다로 가서 혁명가들과 휴전을 논의했지만, 혁명가들은 백기를 보고 왕당파가 항복한 것으로 오해하여 축하 행사에 참여했다. 마샤두 산투스는 처음에는 휴전을 거부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그는 시민, 장교들과 함께 본부로 향했다.
로시오의 상황은 혼란스러웠지만, 대중의 지지로 공화파에게 유리했다. 마샤두 산투스는 고르장 앙리케스 장군과 이야기하고 사단장직 유지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안토니우 카르발랄이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그 직후, 오전 9시에 조제 렐바스(José Relvas)[82]가 리스본 시청 발코니에서 공화국을 선포했다. 포르투갈 공화당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국가를 통치하게 되었다.
혁명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10월 6일까지 37명이 사망했고, 여러 부상자가 병원으로 이송되어 일부는 사망했다.[83]
10월 5일 아침, 국왕은 포르투로 가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마프라 시의회 의장은 공화국 깃발 교체 메시지를 받았고, 보병학교 사령관도 새로운 상관으로부터 현재 상황을 알리는 전보를 받았다. 왕실의 입지는 불안해졌다.
왕실 요트 ''아멜리아(Amélia)''가 에리세이라에 정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해결책이 나타났다. 마누엘 2세는 투옥될 것을 알고 포르투로 가기로 결정했다. 왕실 가족과 일행은 에리세이라로 향했고, 어선을 이용하여 왕실 요트에 탑승했다.[84]
국왕은 총리에게 편지를 썼다.
국왕은 포르투로 가겠다고 선언했지만, ''아멜리아''의 함장과 1등 항해사는 연료 부족을 이유로 반대했다. 결국 선택된 항구는 지브롤터였다. 도착 후, 국왕은 포르투도 공화당에 합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폐위된 국왕 마누엘 2세는 ''아멜리아''를 리스본으로 돌려보내고, 남은 생애를 망명 생활로 보냈다.[86]
4. 공화국 초기
1910년 10월 5일 혁명으로 탄생한 포르투갈 제1공화국 초기에는 여러 개혁과 사회적 갈등, 그리고 국제 사회의 승인 과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임시 정부는 국가 안보 및 종교 관련 범죄에 대한 광범위한 사면을 선포하고,[92] 가톨릭 교회와 관련된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여기에는 예수회 및 기타 수도회 추방, 수도원 폐쇄, 학교 내 종교 교육 금지, 민사 의식에서 종교 선서 폐지, 교회와 국가 분리에 따른 국가 세속화 등이 포함되었다.[93] 또한 이혼 제도화,[93] 민법상 결혼 합법성, 남녀 결혼권 평등, 사생아 법적 규제,[94] 아동 및 노년 보호, 언론법 개정, 왕족 및 귀족 계급과 칭호 폐지, 파업 행위 권리 인정 등도 이루어졌다.[95]
리스본과 포르투의 시 경비대는 해산되고, 국민경비대가 창설되었다. 식민지에는 자치권을 부여하는 새로운 법안이 제정되었고, 국기와 국가 등 국가 상징이 변경되었다. 새로운 통화 단위인 에스쿠도가 채택되었으며(1,000 레알 = 1 에스쿠도),[96] 포르투갈 철자법도 1911년 철자법 개혁을 통해 단순화되었다.[97]
공화정 지도자들은 급진적이고 논란이 많은 반교권주의 정책을 채택하여[121] 사회를 양극화시키고 공화정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켰다. 또한,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반발을 사면서 국제적인 부정적 여론을 증폭시켰다.[122] 혁명과 공화정은 프랑스 혁명과 유사하게 "적대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124]
세속화는 19세기 후반부터 포르투갈에서 논의되었으며, 공화주의 운동은 가톨릭 교회를 군주제와 연관시키고 그 영향력에 반대했다. 공화국의 세속화는 포르투갈 공화당과 프리메이슨의 주요 정치 의제 중 하나였다.[122]
1910년 10월 8일, 아폰수 코스타는 예수회에 대한 폼발 후작의 법률과 종교 수도회 관련 법률을 부활시켰다.[125][126] 교회 재산은 몰수되었고, 코임브라 대학교의 종교 선서 등 종교적 요소는 폐지되었으며, 신학부 입학 및 교회법 강좌가 폐지되어 기독교 교리 교육이 중단되었다. 종교 공휴일은 근무일이 되었지만, 일요일은 휴일로 유지되었다. 군대의 종교 의식 참여도 금지되었다. 이혼 및 가족법이 승인되어 결혼은 "순전히 민사 계약"으로 간주되었다.[127][128]
주교들은 박해, 추방, 활동 중단 등의 탄압을 받았고,[129] 성직자 재산 압수, 수단 착용 금지, 소신학교 및 대신학교 폐쇄(일부 제외) 조치가 이루어졌다.[129] 1918년 법률에 따라 전국에 두 개의 신학교만 허용되었지만, 재산은 돌려받지 못했다.[129] 수도회는 추방되었고(1917년 일부 복귀 허용),[129] 초·중등학교에서 종교 교육이 금지되었다.[129] 포르투갈 주교들은 공동 사목 서한을 발표했지만, 정부에 의해 읽는 것이 금지되었다. 일부 고위 성직자들은 이를 공개했다가 성직자 직무에서 해임되기도 했다.
세속화는 1911년 4월 20일 "국가와 교회의 분리 법"으로 정점을 찍었으며,[130] 이 법은 1914년에 공포되었지만, 발표 후 즉시 시행되었다. 아폰수 코스타는 가톨릭교가 3세대 안에 근절될 것이라고 예측했다.[131] 1911년 7월 1일 "중앙위원회" 설립과 함께 법 적용이 시작되었다.[132] 비오 10세는 1911년 5월 24일 회칙 ''Iamdudum''을 발표하여 반교권주의자들을 비난했다.[134]
새로운 공화정 정부는 국제 사회의 승인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군주국이었기 때문에 임시 정부의 외무부 장관 베르나르디누 마샤두(Bernardino Machado)는 신중한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135] 1910년 10월 9일, 그는 포르투갈 주재 외교 대표들에게 임시 정부가 이전 정권의 모든 국제적 약속을 존중할 것이라고 통보했다.[136]
에르메스 다 폰세카(Hermes da Fonseca) 원수의 포르투갈 방문을 계기로,[137] 브라질이 1910년 10월 22일 최초로 포르투갈의 새로운 정치 체제를 승인했다.[138] 이후 아르헨티나(1910년 10월 23일), 니카라과(1910년 10월 29일), 우루과이(1910년 10월 31일), 과테말라(1910년 11월 16일), 코스타리카·페루·칠레(1910년 11월 19일), 베네수엘라(1911년 2월 23일), 파나마(1911년 3월 17일), 미국(1911년 6월) 등이 포르투갈 공화국을 승인했다.[140]
영국 정부는 1910년 11월 10일 포르투갈 공화국을 사실상 승인했다.[141]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정부도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법적인 승인은 헌법 승인 및 대통령 선출 후에 이루어졌다. 프랑스는 1911년 8월 24일, 포르투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선출일에 처음으로 법적 승인을 했다.[142]
이후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143] 덴마크, 스페인, 이탈리아, 스웨덴(1911년 9월 11일), 벨기에·네덜란드(1911년 9월 12일), 중국·일본(1911년 9월 13일), 그리스(1911년 9월 15일), 러시아(1911년 9월 30일),[144] 루마니아(1911년 10월 23일), 터키(1911년 11월 23일), 모나코(1911년 12월 21일), 샴(1912년 2월 28일) 등이 포르투갈 공화국을 법적으로 승인했다.
교황청과의 교류는 중단되었으며, 1919년 6월 29일까지 포르투갈 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았다.
4. 1. 임시 정부의 개혁
임시 정부는 집권 기간 동안 장기적인 영향을 미친 여러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여론을 진정시키고 왕정 피해자들과 화해하기 위해 국가 안보, 종교에 대한 범죄 등에 대한 광범위한 사면을 선포했다.[92] 가톨릭 교회는 예수회와 기타 수도회 추방, 수도원 폐쇄, 학교에서의 종교 교육 금지, 민사 의식에서의 종교 선서 폐지, 교회와 국가 분리에 따른 국가 세속화 등 임시 정부의 조치에 반발했다.[93]또한 이혼을 제도화했고,[93] 민법상 결혼의 합법성, 남녀 결혼권 평등, "사생아"의 법적 규제,[94] 아동과 노년 보호, 언론법 개정, 왕족과 귀족 계급 및 칭호 폐지, 파업 행위 권리 인정 등이 이루어졌다.[95]
임시 정부는 당시 리스본과 포르투의 시 경비대를 해산하고, 새로운 공공 방위 기관인 국민경비대를 창설했다. 식민지에 대해서는 해외 영토의 자치권을 부여하는 새로운 법안을 제정했는데, 이는 그들의 발전에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국가 상징 (국기와 국가)이 변경되었으며, 새로운 통화 단위인 "에스쿠도"가 채택되었는데, 이는 1,000 "레알"에 해당한다.[96] 그리고 포르투갈 철자법도 1911년 철자법 개혁을 통해 단순화되고 적절하게 규정되었다.[97]
4. 2. 반교권주의 정책과 사회 갈등
공화당 지도자들은 극단적이고 논란이 많은 반교권주의 정책을 채택했다.[121] 이 정책은 국내적으로 사회를 양극화시켜 공화정에 대한 잠재적 지지자들을 잃게 만들었다. 또한, 해외에서는 포르투갈에서 종교 활동을 하는 시민들을 둔 미국과 유럽 국가들을 불쾌하게 하여 공화정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크게 증폭시켰다.[122] 교회에 대한 박해가 너무나 노골적이고 심각하여 비종교인과 명목상의 종교인들까지 새로운 종교성을 갖게 하였고, 영국과 같은 개신교 외교관들은 자국 시민들의 종교 기관이 권리와 재산 문제로 심각한 분쟁에 휘말린 것을 보고 젊은 공화정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123]혁명과 그로 인해 생겨난 공화정은 본질적으로 반교권적이었으며, 프랑스 혁명, 1931년 스페인 헌법, 1917년 멕시코 헌법과 같이 "적대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124]
세속화는 19세기 후반, 안테로 드 켄탈이 주도한 1871년 카지노 회의 기간 동안 포르투갈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공화주의 운동은 가톨릭 교회를 군주제와 연관시키고 포르투갈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에 반대했다. 공화국의 세속화는 포르투갈 공화당과 프리메이슨의 정치적 의제에서 취해야 할 주요 조치 중 하나였다. 군주제 지지자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공화주의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스스로 반교권주의 조치를 취하려고 시도했고, 혁명 전날 예수회에 대한 엄격한 제한까지 시행했다.[122]
1910년 10월 8일 공화국 수립 직후, 사법부 장관 아폰수 코스타는 예수회에 대한 폼발 후작의 법률과 종교 수도회와 관련된 조아킴 안토니우 드 아귀아르의 법률을 부활시켰다.[125][126] 교회의 재산과 자산은 국가에 의해 몰수되었다. 코임브라 대학교 규정에 있는 종교 선서 및 기타 종교적 요소는 폐지되었고, 신학부 1학년 입학은 취소되었으며, 교회법 강좌도 폐지되어 기독교 교리의 가르침이 중단되었다. 종교 공휴일은 근무일이 되었지만, 노동 문제로 일요일은 휴일로 유지되었다. 또한, 군대는 종교 의식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혼 및 가족법이 승인되었는데, 결혼을 "순전히 민사 계약"으로 간주했다.[127][128]
세속화 과정에서 주교들이 박해를 받거나 추방되거나 활동이 중단되었다.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주교들이 자신들의 교구에서 쫓겨났다.[129] 성직자들의 재산은 국가에 의해 압수되었고, 수단 착용이 금지되었으며, 모든 소신학교와 5개를 제외한 모든 대신학교가 폐쇄되었다.[129] 1918년 2월 22일 법률에 따라 전국에 두 개의 신학교만 허용되었지만, 그들은 재산을 돌려받지 못했다.[129] 수도회들은 164개의 수도원에 있는 회원들을 포함하여 31개 수도회가 추방되었으며(1917년 일부 수도회는 다시 설립이 허용됨),[129]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서 종교 교육이 금지되었다.[129]
여러 반교권주의 법령에 대한 대응으로 포르투갈 주교들은 교회 교리를 옹호하는 공동의 사목 서한을 발표했지만, 정부에 의해 읽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고위 성직자들은, 포르투 주교인 안토니오 바로소를 포함하여, 그 글을 계속 공개했다. 이로 인해 그는 아폰수 코스타에 의해 리스본으로 소환되어 성직자 직무에서 해임되었다.
세속화는 1911년 4월 20일 "국가와 교회의 분리 법"으로 정점을 찍었으며,[130] 혁명가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 법은 1914년에야 의회에서 공포되었지만, 법령 발표 후 즉시 시행되었다. 포르투갈 교회는 이 법을 "불의, 억압, 약탈, 조롱"으로 규정하며 대응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아폰수 코스타는 3세대 안에 가톨릭교가 근절될 것이라고 예측하기까지 했다.[131] 이 법의 적용은 1911년 7월 1일 "중앙위원회"의 설립과 함께 시작되었다.[132] 한 해설가의 말처럼, "결국 교회는 조직된 종교에 대한 공식적인 보복에서 살아남았다".[133]
1911년 5월 24일, 비오 10세는 회칙 ''Iamdudum''을 발표하여 반교권주의자들이 종교적 시민적 자유를 박탈하고 "포르투갈에서 교회를 억압하기 위해 자행된 엄청난 일련의 과잉과 범죄"를 비난했다.[134]
4. 3. 국제 사회의 승인
새로운 공화정 정부는 다른 국가들의 승인을 받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10년 당시 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군주국이었고, 프랑스, 스위스, 산마리노만이 공화국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시 정부의 외무부 장관 베르나르디누 마샤두(Bernardino Machado)는 신중하게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135] 1910년 10월 9일, 그는 포르투갈 주재 외교 대표들에게 임시 정부가 이전 정권의 모든 국제적 약속을 존중할 것이라고 통보했다.[136]
에르메스 다 폰세카(Hermes da Fonseca) 원수가 포르투갈을 방문했을 때 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바뀌는 과정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137] 브라질이 새로운 포르투갈 정치 체제를 최초로 승인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10년 10월 22일 브라질 정부는 "브라질은 포르투갈과 그 정부의 행복, 그리고 새로운 공화국의 번영을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138]
이후 여러 국가들이 포르투갈 공화국을 승인했다.
국가 | 승인 날짜 |
---|---|
아르헨티나 | 1910년 10월 23일 |
니카라과 | 1910년 10월 29일 |
우루과이 | 1910년 10월 31일 |
과테말라 | 1910년 11월 16일 |
코스타리카 | 1910년 11월 19일 |
페루 | 1910년 11월 5일 |
칠레 | 1910년 11월 19일 |
베네수엘라 | 1911년 2월 23일 |
파나마 | 1911년 3월 17일 |
미국 | 1911년 6월[140] |
영국 정부는 혁명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910년 11월 10일에 포르투갈 공화국을 사실상 승인하고, 영국 국왕이 포르투갈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141]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정부도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새로운 정권에 대한 법적인 승인은 헌법이 승인되고 대통령이 선출된 후에야 이루어졌다. 프랑스는 1911년 8월 24일, 포르투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선출일에 처음으로 법적 승인을 했다.[142]
이후 여러 국가들이 포르투갈 공화국을 법적으로 승인했다.
국가 | 승인 날짜 |
---|---|
영국 | 1911년 9월 11일 |
독일 | 1911년 9월 11일 |
오스트리아-헝가리[143] | 1911년 9월 11일 |
덴마크 | 1911년 9월 11일 |
스페인 | 1911년 9월 11일 |
이탈리아 | 1911년 9월 11일 |
스웨덴 | 1911년 9월 11일 |
벨기에 | 1911년 9월 12일 |
네덜란드 | 1911년 9월 12일 |
노르웨이 | 1911년 9월 12일 |
중국 | 1911년 9월 13일 |
일본 | 1911년 9월 13일 |
그리스 | 1911년 9월 15일 |
러시아[144] | 1911년 9월 30일 |
루마니아 | 1911년 10월 23일 |
터키 | 1911년 11월 23일 |
모나코 | 1911년 12월 21일 |
샴 | 1912년 2월 28일 |
젊은 공화국과 가톨릭 교회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교황청과의 교류는 중단되었고, 교황청은 1919년 6월 29일까지 포르투갈 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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