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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서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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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서부군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군이 폴란드 점령 이후 프랑스와 영국에서 재건한 부대를 통칭한다. 프랑스 항복 이후 영국으로 대피한 병력, 소련에서 석방된 병력, 그리고 망명 정부의 지원을 받아 구성되었으며, 육군, 해군, 공군으로 이루어졌다. 폴란드 서부군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서유럽 전역에서 연합군과 함께 참전했으며, 특히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폴란드 공군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전쟁 후 폴란드가 소련의 영향 아래 놓이면서 많은 병사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망명했으며, 서방의 배신으로 인식되었다. 영국 정부는 폴란드 재정착단을 설립하여 이들의 정착을 지원했고, 많은 폴란드인들이 영국, 캐나다, 호주, 미국 등에 정착하여 폴란드계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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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서부군
폴란드 서부군
폴란드 서부군 휘장
휘장
기본 정보
창설1940년
해체1947년
국가폴란드 망명정부
소속폴란드 망명정부
연합국 원정군 최고사령부
종류망명 군대
역할전투 부대
규모약 250,000명
본부영국 런던
참전
주요 참전베저위붕 작전
영국 본토 항공전
디에프 기습
북아프리카 전역
몬테카시노 전투
오버로드 작전
바르샤바 봉기
마켓가든 작전
벌지 전투
서구 연합군의 독일 침공
주요 지휘관
주요 지휘관스타니스와프 마체크
브와디스와프 안더스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2. 역사

1939년 폴란드 패배 이후, 폴란드 망명 정부는 프랑스에서 약 8만 명의 병력으로 새로운 전투 부대를 조직했다.[18] 1940년 초, 폴란드 독립 고지대 여단은 노르웨이 나르비크 전투에 참가했고, 폴란드 독립 카르파티아 여단은 프랑스 시리아 위임 통치령에 편성되었다. 폴란드 공군은 4개 비행 중대에 86대의 항공기를 보유했으며, 프랑스 방어에는 2개의 폴란드 사단(제1 그레나디어 사단, 제2 보병 척탄병 사단)이 참가했다.[1]

프랑스 항복 당시, 블라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장군은 2만 명 이상의 폴란드군을 영국으로 대피시켰다.[18] 폴란드 해군은 영국 해안에서 재편성되었고, 폴란드-영국 해군 협정에 따라 폴란드 선원들은 폴란드 군복을 착용하고 지휘관은 폴란드인이었지만, 함선은 영국 제조였다.[3]

영국 전투에서 폴란드 조종사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0년 6월, 폴란드 망명 정부는 영국 정부와 영국 주둔 폴란드 공군 편성에 대한 협정을 체결했고, RAF는 302 "포즈난" 중대와 303 "코슈슈코" 중대를 편성했다.[6] 휴 다우딩 항공 사령관은 폴란드 조종사들의 용기에 감탄했다.[6][7]

지상군은 폴란드 제1 군단으로 재편성되어 파이프와 앵거스 카운티 방어를 맡았다.[1] 1941년, 폴란드 망명 정부와 요셉 스탈린 간의 협정으로 소련에서 블라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 지휘하에 7만 5천 명의 군대가 편성되었고("Armia Andersa|안데르스 군pl"), 카스피해를 건너 중동(이란)으로 수송되어 폴란드 제2 군단이 편성되었다.[1][8]

1944년 3월, 서방 폴란드군은 16만 5천 명에 달했고, 지중해 및 중동 및 유럽 전역에서 연합군 작전에 참가했다. 북아프리카 전역, 이탈리아 전역(몬테 카시노 전투), 서유럽 전역(디에프 습격, D-Day, 마켓 가든 작전) 등이 주요 참전 전역이다.[2]

독일 항복 문서 이후, 폴란드군은 서부 독일 점령 지역에서 점령 임무에 참여했고, 마츠코프라는 폴란드 마을이 건설되었다. 폴란드군은 소련을 공격할 가능성을 고려한 영국의 언싱커블 작전에 포함되었다.

폴란드 정보 기구는 '제2부'로 알려졌으며, 유럽 국가의 다른 연합국들과 협력하여 나치 독일에서 가장 큰 정보망 중 하나를 운영했다. 영국 첩보기관이 받은 보고서의 43%가 폴란드 정보원으로부터 온 것이었다.[13] 국내군 조직은 망명 정부에 충성했으며, 국내 정부 대표부가 폴란드 지하국가의 최고 권위 기관이었다. 저항군은 서방에 중요한 정보를 전달했고, 서방에서는 저항군을 위한 물자를 모으고 치호치엠니를 훈련시켰다.[25]

서방 폴란드군 전성기 병력[2]
병력 구성비율
독일 베어마흐트 강제 징집에서 탈영한 병사89,30035.8%
1942년 소련 탈출자83,00033.7%
1940년 프랑스 탈출자35,00014.0%
해방된 포로21,7508.7%
점령 지역 유럽 탈출자14,2105.7%
해방된 프랑스 징집병7,0002.8%
아르헨티나, 브라질캐나다의 폴란드 디아스포라2,2900.9%
영국의 폴란드 디아스포라1,7800.7%
총계249,000
참고: 1945년 7월 징집이 중단될 때까지 약 26,830명의 폴란드 병사가 전사 또는 실종되었거나 부상으로 사망했습니다. 그 후 추가로 21,000명의 폴란드 전 포로가 입대했습니다.


2. 1. 1939년 폴란드 침공과 망명 정부 수립

1939년 9월부터 10월까지 나치 독일소련침공으로 폴란드가 패배한 후, 폴란드 망명 정부는 프랑스에서 약 8만 명의 병력으로 새로운 전투 부대를 신속하게 조직했다.[18] 이 부대들은 프랑스군의 지휘를 받았다.

1940년 초, 폴란드 독립 고지대 여단이 노르웨이 나르비크 전투에 참가했고, 많은 폴란드군이 폴란드에서 탈출하여 프랑스 시리아 위임 통치령에 폴란드 독립 카르파티아 여단이 편성되었다. 프랑스의 폴란드 공군은 4개 비행 중대에 86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중 1.5개 중대가 완전 작전 가능 상태였고 나머지는 훈련 단계에 있었다.[18] 두 개의 폴란드 사단(제1 그레나디어 사단, 제2 보병 척탄병 사단)이 프랑스 방어에 참가했고, 폴란드 기계화 여단과 두 개의 보병 사단이 편성 중이었다.[1]

프랑스 항복 당시, 블라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장군 (폴란드 최고 사령관 겸 총리)은 2만 명 이상의 폴란드군을 영국으로 대피시킬 수 있었다.[18]

1941년, 폴란드 망명 정부와 요셉 스탈린 간의 협정으로 소련은 폴란드 병사, 민간인, 시민들을 석방했다. 블라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 지휘하에 7만 5천 명의 군대가 소련에 편성되었는데, 이는 비공식적으로 "안데르스 군"으로 알려졌다. 이 군대는 부줄룩, 사마르칸트에 차례로 모였고, 나중에 크라스노보츠크에서 카스피해를 건너 중동(이란)으로 수송되어 1943년 다른 부대들과 함께 폴란드 제2 군단이 편성되었다.[1][8]

2. 2. 프랑스 전역과 영국 본토 항공전

폴란드 공군은 프랑스 전투에 참전하여 독일군에 맞서 싸웠지만, 프랑스는 패배했다.[18] 이후 폴란드군은 영국으로 철수하여 재편성되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 공군(RAF)은 조종사 부족을 겪었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외국인 조종사들을 받아들였다. 1940년 6월 11일, 폴란드 망명 정부는 영국 정부와 협정을 맺고 영국 내 폴란드군과 폴란드 공군을 편성했다.[2]

제300 폭격비행대대 및 제301 폭격비행대대, 제302 전투비행대대 및 제303 전투비행대대를 포함한 4개의 폴란드 비행대대가 영국 본토 항공전에 참여했다. 이들을 포함하여 약 145명의 폴란드 조종사들이 영국을 방어했다.[2] 폴란드 조종사들은 대부분 1939년 폴란드 전역과 1940년 프랑스 전투에서 싸운 경험이 있었고, 전쟁 전 폴란드의 조종사 훈련 수준은 매우 높았다.[2]

제303 폴란드 전투비행대대(No. 303 Polish Fighter Squadron)


250px


특히, 타데우시 코시추슈코 장군의 이름을 딴 제303 전투비행대대는 1940년 8월 30일에 전투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본토 항공전에 참여한 모든 전투 비행대대 중 가장 많은 126대의 적기를 격추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1][2][19][20] 연합군 조종사의 약 5%에 불과했던 폴란드 조종사들은 전투에서 총 승리의 12%를 차지했고, 이는 어떤 연합군 비행대대보다도 많은 격추 수였다.[1][2][19][20]

303비행대대가 영국 본토 항공전 동안 격추한 독일 항공기 126대. 허리케인에 그려져 있다.


영국에 주둔한 폴란드 비행대대는 다음과 같다.

비행대대비고
제300 "마조비아" 폴란드 폭격비행대대 (Ziemi Mazowieckiej)
제301 "포메라니아" 폴란드 폭격비행대대 (Ziemi Pomorskiej)1940년부터 1943년까지 제300 비행대대와 합병
제301 "포메라니아와 바르샤바 방어자" 폴란드 수송 "특별 임무" 비행대대 (Ziemi Pomorskiej im Obrońców Warszawy)1944년부터 1946년까지
제302 "포즈난 시" 폴란드 전투비행대대 (Poznański)
제303 "코시추슈코" 폴란드 전투비행대대 (Warszawski imienia 타데우시 코시추슈코)
제304 "실레시아" 폴란드 폭격비행대대 (Ziemi Śląskiej imienia Księcia 요제프 포냐토프스키)
제305 "대폴란드" 폴란드 폭격비행대대 (Ziemi Wielkopolskiej imienia Marszałka 요제프 필수츠키)
제306 "토룬 시" 폴란드 전투비행대대 (Toruński)
제307 "리비우 시" 폴란드 전투비행대대 (Lwowskich Puchaczy)
제308 "크라쿠프 시" 폴란드 전투비행대대 (Krakowski)
제309 "체르비에니" 폴란드 전투정찰비행대대 (Ziemi Czerwieńskiej)
제315 "뎬블린 시" 폴란드 전투비행대대 (Dębliński)
제316 "바르샤바 시" 폴란드 전투비행대대 (Warszawski)
제317 "빌뉴스 시" 폴란드 전투비행대대 (Wileński)
제318 "그단스크 시" 폴란드 전투정찰비행대대 (Gdański)
제663 폴란드 포병 관측 비행대대
제145 전투비행대대 폴란드 전투팀(Polish Fighting Team) ('Skalskis Circus'')


2. 3.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전역 및 서유럽 전선

1944년, 네덜란드 브레다 주민들이 환영하는 폴란드 병사들


서방 폴란드군의 유니버설 캐리어 (재현)


프랑스 그랭빌-랑가네리 묘지에 있는 폴란드 군인 묘비(비문: 무명용사)


서방 폴란드군은 지중해 및 중동 및 유럽 전역에서 나치 독일과 벌인 대부분의 연합군 작전에 참가했다. 주요 참전 전역으로는 북아프리카 전역, 이탈리아 전역(특히 몬테 카시노 전투)이 있으며, 서유럽 전역에서는 디에프 습격과 D-Day부터 노르망디 전투와 후속 작전, 특히 마켓 가든 작전에 참여했다.[2]

프랑스 위임 통치령 시리아에서는 약 4,000명의 폴란드 군인이 주로 루마니아를 통해 탈출하여 폴란드 독립 카르파티아 여단을 편성했고, 이 여단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활약했다.[1]

1941년, 망명 폴란드 정부와 요셉 스탈린 사이의 협정에 따라 소련은 폴란드 국민들을 석방했다. 이를 통해 소련에서 블라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 지휘하에 7만 5천 명 규모의 군대(안데르스 군)가 편성되었다. 이 군대는 부줄룩, 사마르칸드에 차례로 집결한 후, 크라스노보츠크에서 카스피해를 통해 중동(이란)으로 수송되었다(1942년 3월과 8월). 이 폴란드 부대는 이후 폴란드 제2군단으로 재편되었으며, 폴란드 제3 카르파티아 보병 사단, 폴란드 제5 크레소바 보병 사단, 폴란드 제2 기갑 여단 및 기타 부대로 구성되었다.[1]

2. 4. 동부 전선과 안데르스 군

1941년 독소전쟁 발발 이후, 소련에 억류되어 있던 폴란드인들이 석방되었다.[1] 블라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 지휘 하에 7만 5천 명 규모의 군대가 소련에서 편성되었는데, 비공식적으로 "안데르스 군"으로 알려졌다.[1][8] 이 군대는 부줄룩, 사마르칸트에 차례로 집결했다가, 이후 크라스노보드스크에서 카스피해를 건너 중동(이란)으로 이동했다.[1][8] 1943년, 이들은 다른 부대들과 함께 폴란드 제2 군단을 편성하였다.[1][8]

2. 5. 종전과 서방의 배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폴란드는 소련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면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에 따라 서방에서 자유 폴란드를 위해 싸웠던 폴란드군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945년 3월, ''타임''는 폴란드의 "잉여 영웅들"에 대해 보도하면서, 얼니스트 베빈 영국 외무장관이 새로운 폴란드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블라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의 병사들에게 영국령에서 망명을 찾을 수 있다고 약속했다고 전했다.[11] 그러나 영국은 그들이 폴란드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했고, 폴란드 정부가 망명 군인들을 공정하게 대우하겠다는 약속을 담은 호소를 폴란드군을 통해 배포하고 있었다.[11]

하지만 안데르스는 폴란드 정부가 선거를 약속하지 않는 한 병사들에게 폴란드로 돌아가라고 조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11] 베빈 또한 즉각적인 폴란드 선거를 원했지만, 두 사람 모두 그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11] 폴란드에서는 공산주의-사회주의 세력과 스타니스와프 미콜라이치크의 폴란드 농민당 사이의 분열이 심화되고 있었고, 농민당 본부에 대한 보안경찰의 급습이 보도되기도 했다.[11]

1946년 1월, 베빈은 폴란드 임시 정부의 살인 행위에 항의했고, 폴란드 임시 정부는 안데르스에게 충성하는 테러리스트들과 싸우고 있다고 말하며 자신의 행동을 옹호했다.[10] 같은 해 2월, ''타임''지는 베빈이 하원에서 테러가 새로운 폴란드에서 국가 정책의 수단이 되었다고 말하며, 폴란드 농민당의 많은 구성원들이 살해당했다고 보도했다.[12] 베빈은 얄타 회담에 따라 자유롭고 방해받지 않는 선거가 치러질 수 있도록 이러한 범죄를 즉각 중단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12]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방 폴란드군은 1946년 런던 승전 기념 퍼레이드에 초청받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3][14][15] 영국 정부는 폴란드 공군 참전 용사들을 초청했지만, 이들은 폴란드 육군과 해군에 대한 초청이 없었던 것에 항의하여 참석을 거부했다.[2]

결국 서방 폴란드군은 1947년에 해산되었고, 많은 병사들은 공산주의 지배하의 폴란드로 돌아가는 대신 망명 생활을 선택했다.[14][15] 이들은 폴란드 공산당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어 박해받고 투옥되기도 했다.[14][15]

서방 연합국이 폴란드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하지 못한 것은 "서방의 배신"으로 불리게 되었다.[14][15] 영국 정부는 폴란드 출신 전직 군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폴란드 재정착단을 설립했고,[2][16] 1947년 폴란드 재정착법을 통해 이들이 영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17]

3. 구성

1939년 폴란드 패배 이후, 폴란드 망명 정부는 프랑스영국에서 새로운 전투 부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육군, 해군, 공군, 그리고 정보 부대로 구성되었다.

서방 폴란드군 전성기 병력[2]
독일 베어마흐트 강제 징집에서 탈영한 병사89,300 (35.8%)
1942년 소련 탈출자83,000 (33.7%)
1940년 프랑스 탈출자35,000 (14.0%)
해방된 포로21,750 (8.7%)
점령 지역 유럽 탈출자14,210 (5.7%)
해방된 프랑스 징집병7,000 (2.8%)
아르헨티나, 브라질캐나다의 폴란드 디아스포라2,290 (0.9%)
영국의 폴란드 디아스포라1,780 (0.7%)
총계249,000
참고: 1945년 7월 징집이 중단될 때까지 약 26,830명의 폴란드 병사가 전사 또는 실종되었거나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 후 추가로 21,000명의 폴란드 전 포로가 입대했다.



육군은 프랑스에서 제1 그레나디어 사단, 제2 보병 척탄병 사단 등 4개 사단과 1개 기계화 여단, 1개 보병 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영국에서는 제1 군단과 폴란드 제2 군단 등이 편성되었다.

해군은 영국 해군과 협력하여 부르자, 그롬, 브위스카비차 등 다수의 함선을 운용했다.

영국 해군과 협력하는 폴란드 해군


공군은 영국 전투에서 활약한 제303 "코슈슈코" 전투비행대대를 포함하여 여러 비행대대를 편성했다.

폴란드 정보 기구는 '제2부'로 알려졌으며, 나치 독일에서 가장 큰 정보망 중 하나를 운영하며 연합군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13]

3. 1. 육군

폴란드 패배 이후, 폴란드 망명 정부는 프랑스에서 약 8만 명 규모의 새로운 전투 부대를 조직했다.[18] 1940년 초, 폴란드 독립 고지대 여단은 노르웨이 나르비크 전투에 참전했고, 많은 폴란드군이 프랑스 시리아 위임 통치령에서 폴란드 독립 카르파티아 여단으로 편성되었다.[18] 제1 그레나디어 사단과 제2 보병 척탄병 사단은 프랑스 전투에 참전했고, 폴란드 기계화 여단과 두 개의 보병 사단이 추가로 편성 중이었다.[1]

블라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장군은 2만 명 이상의 폴란드군을 영국으로 대피시켰다.[18] 이들은 스코틀랜드 남부에 재편성되어 폴란드 제1 군단을 구성했다.[1] 이 군단은 제1 독립 저격 여단, 제10 기계화 기병 여단, 간부 여단 등으로 구성되어 1940년 10월 파이프와 앵거스 카운티 방어를 맡았다.[17]

1941년 폴란드 망명 정부와 요셉 스탈린 간의 협정으로 소련에 억류되어 있던 폴란드 병사, 민간인 및 시민들이 석방되었다. 블라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 지휘 하에 7만 5천 명의 군대가 소비에트 연방에 편성되었고, 이들은 "안데르스 군"으로 알려졌다.[1] 이들은 카스피해를 건너 중동(이란)으로 수송되어 1943년 다른 부대들과 함께 폴란드 제2 군단을 편성했다.[8]

1944년 3월, 영국군 지휘 하의 서방 폴란드군은 16만 5천 명에 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19만 5천 명, 1945년 7월에는 22만 8천 명으로 증가했다.

서방 폴란드군은 지중해 및 중동, 유럽 전역에서 연합군 작전에 참가했다. 북아프리카 전역, 이탈리아 전역(몬테 카시노 전투), 서유럽 전역(디에프 습격, 노르망디 상륙 작전, 마켓 가든 작전) 등에서 활약했다.[2]

독일 항복 문서 이후, 폴란드군은 서부 독일 점령 지역에서 점령 임무를 수행했다. 하렌이라는 폴란드 마을이 건설되기도 했다.

언싱커블 작전에서 영국은 폴란드군을 활용하여 소련을 공격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다.

프랑스 폴란드군은 약 8만 5천 명으로 구성되었다.[18] 프랑스 본토에는 4개의 폴란드 사단(제1 그레나디어 사단, 제2 보병 척탄병 사단, 제3, 제4 보병 사단), 1개의 폴란드 기계화 여단(제10 기갑 기병 여단) 및 1개의 보병 여단(폴란드 독립 고지대 여단)이 있었다.[18] 폴란드 독립 고지대 여단은 나르비크 전투에 참전했고, 프랑스 전투 이후 모든 폴란드 부대가 편성되었지만, 프랑스의 비효율적인 군수 및 정책으로 인해 장비와 보급품이 부족했다.[1] 프랑스 위임 통치령 시리아 위임 통치령에서는 폴란드 독립 카르파티아 여단이 편성되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싸웠다.[1]

프랑스 함락 이후 약 1만 3천 명의 폴란드 군인들이 스위스에 수용되었다.[18] 블라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장군은 2만 명에서 3만 5천 명의 폴란드 군인들을 영국으로 탈출시켰다.[2] 이들로부터 폴란드 제1군단이 편성되었다. 여기에는 폴란드 제1 기갑 사단, 폴란드 독립 낙하산 여단,[1] 제4 보병 사단, 제16 독립 기갑 여단 등이 포함되었다. 스타니스와프 마체크 장군과 마리안 쿠키엘 장군이 지휘했다. 1942년 8월, 영국 코만도는 제10 (연합군) 코만도에 배속된 제6 부대를 편성했다.

3. 2. 해군

폴란드 해군은 1939년 폴란드 패전 이후 영국 해안에서 가장 먼저 재편성되었다. 폴란드 함선과 선원들은 1939년 중반 블라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장군에 의해 영국으로 파견되었고, 같은 해 11월 폴란드-영국 해군 협정이 체결되었다.[3] 이 협정에 따라 폴란드 선원들은 폴란드 군복을 착용하고 지휘관은 폴란드인이었지만, 사용된 함선은 영국 제조였다.[3]

전쟁 직전, 페킹 작전에 따라 대부분의 주요 폴란드 해군 함선 3척의 구축함이 안전을 위해 영국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영국 해군과 함께 싸웠다. 전쟁의 여러 단계에서 폴란드 해군은 2척의 순양함과 다수의 소형 함선으로 구성되었는데, 대부분은 영국 해군 함선이었다. 영국 해군이 모든 함선의 승무원을 충원할 만한 인력이 부족했던 시기에 폴란드 승무원을 활용하기 위해 대여된 것이었다. 폴란드 해군은 비스마르크호를 상대로 한 작전을 포함하여 많은 중요하고 성공적인 작전에서 다른 연합군 해군과 함께 탁월한 활약을 펼쳤다.[22]

26척의 함선(순양함 2척, 구축함 9척, 잠수함 5척, 어뢰정 11척)으로 폴란드 해군은 전쟁 중 총 120만 해리를 항해했고, 787척의 호송대를 호위했으며, 1,162회의 순찰 및 전투 작전을 수행했다. 12척의 적 함선(잠수함 5척 포함)과 41척의 상선을 격침시켰으며, 24척(잠수함 8척 포함)을 더 손상시켰고, 20대의 항공기를 격추했다. 전사한 선원 수는 4,000명이 넘는 인원 중 450명이었다.[23][24]

폴란드 해군이 운용한 함선은 다음과 같다.

함종함명비고
순양함ORP 드래곤
순양함ORP 콘라드
구축함ORP 부르자 ("폭풍")
구축함ORP 그롬 ("천둥")1940년 손실
구축함ORP 브위스카비차 ("번개")
구축함ORP 가랜드 (G급)
구축함ORP 오르칸 (M급)1943년 10월 어뢰 공격으로 침몰
구축함ORP 우라강 ("허리케인", 일부 폴란드 자료에서는 후라간으로도 알려짐)1941년 자유 프랑스에 반환
구축함ORP 피오룬 ("번개") (N급)1940년 이후
호위구축함ORP 크라코비악 ("크라코비아인") (헌트급 호위함)1941년 이후
호위구축함ORP 쿠야비악 ("쿠야비아인") (헌트급)1942년 침몰
호위구축함ORP 실롱작 ("실레시아인") (헌트급)1942년 이후
잠수함ORP 오제우 ("독수리")1940년 손실
잠수함ORP 야스트롱브 ("매") (미국 S급)1942년 손실
잠수함ORP 빌크 ("늑대")
잠수함ORP 지크 ("멧돼지") (영국 U급)
잠수함ORP 소쿠우 ("매") (영국 U급)1941년 이후



위 함선 외에도 다수의 소형 함선, 수송선, 상선 보조선 및 초계정이 있었다.

3. 3. 공군



폴란드 공군은 프랑스 전투에 제1/145 전투비행대대(GC 1/145) 1개와 프랑스 비행대대에 배속된 소규모 부대 여러 개, 그리고 산업 방위 임무를 수행한 다수의 비행 편대(약 130명의 조종사, 15명의 손실 대비 55회의 승리 달성)로 참전했다.[18]

전쟁 초기부터 영국 공군(RAF)은 줄어드는 영국 조종사들을 보충하기 위해 외국 조종사들을 받아들였다. 1940년 6월 11일, 폴란드 망명 정부는 영국 정부와 영국 내 폴란드군과 폴란드 공군을 편성하는 데 동의했다. 최종적으로 10개가 된 폴란드 전투비행대대 중 처음 두 개가 1940년 8월 작전에 투입되었다. 영국 전투에는 300 및 301 폭격비행대대와 302 및 303 전투비행대대를 포함한 네 개의 폴란드 비행대대가 89명의 폴란드 조종사들과 함께 참전했다. 영국 비행대대에서 싸운 50명 이상의 폴란드인들을 포함하면 약 145명의 폴란드 조종사들이 영국의 하늘을 방어했다.[2] 폴란드 조종사들은 대부분 1939년 9월 폴란드 전역과 1940년 프랑스 전투에서 싸운 경험이 있었기에 전투 경험이 많은 조종사들이었다. 게다가 전쟁 전 폴란드는 매우 높은 수준의 조종사 훈련 기준을 세웠다. 타데우시 코시추슈코 장군의 이름을 딴 제303 비행대대는 1940년 8월 30일에 전투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전투에 참여한 모든 전투 비행대대 중 가장 많은 격추 수(126)를 기록했다. 연합군 조종사 총수의 약 5%를 차지하는 이 폴란드 조종사들은 전투에서 총 승리(203회)의 12%를 차지했고, 어떤 연합군 비행대대보다도 가장 많은 격추 수를 기록했다.[1][2][19][20]

폴란드 공군은 1943년 튀니지("스칼스키 서커스"로 알려진 폴란드 전투팀(Polish Fighting Team))와 독일 공습(1940-45)에도 참전했다.[2][19] 1941년 후반과 1942년 초, 폴란드 폭격기 비행대대는 RAF 폭격사령부에서 사용할 수 있는 병력의 6분의 1을 차지했지만(이후 보충이 거의 불가능하여 큰 손실을 입었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폭격사령부에서 복무한 폴란드 항공 승무원의 사망자는 929명이었고, 폴란드 항공 승무원 총 사망자는 1,803명이었다.[2] 최종적으로 RAF 내에서 8개의 폴란드 전투비행대대가 편성되었고, 1945년 5월까지 621대의 추축군 항공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20] 전쟁이 끝날 무렵, 약 19,400명의 폴란드인이 RAF에서 복무하고 있었다.[21]

영국에 주둔한 폴란드 비행대대:

  • 제300 "마조비아" 폴란드 폭격비행대대 (''Ziemi Mazowieckiej'')
  • 제301 "포메라니아" 폴란드 폭격비행대대 (''Ziemi Pomorskiej'')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제301 폭격비행대대는 제300 비행대대와 합병되었다.
  • 제301 "포메라니아와 바르샤바 방어자" 폴란드 수송 "특별 임무" 비행대대 (''Ziemi Pomorskiej im Obrońców Warszawy'') 1944년부터 1946년까지.
  • 제302 "포즈난 시" 폴란드 전투비행대대 (''Poznański'')
  • 제303 "코시추슈코" 폴란드 전투비행대대 (''Warszawski imienia 타데우시 코시추슈코'')
  • 제304 "실레시아" 폴란드 폭격비행대대 (''Ziemi Śląskiej imienia Księcia 요제프 포냐토프스키'')
  • 제305 "대폴란드" 폴란드 폭격비행대대 (''Ziemi Wielkopolskiej imienia Marszałka 요제프 필수츠키'')
  • 제306 "토룬 시" 폴란드 전투비행대대 (''Toruński'')
  • 제307 "리비우 시" 폴란드 전투비행대대 (''Lwowskich Puchaczy'')
  • 제308 "크라쿠프 시" 폴란드 전투비행대대 (''Krakowski'')
  • 제309 "체르비에니" 폴란드 전투정찰비행대대 (''Ziemi Czerwieńskiej'')
  • 제315 "뎬블린 시" 폴란드 전투비행대대 (''Dębliński'')
  • 제316 "바르샤바 시" 폴란드 전투비행대대 (''Warszawski'')
  • 제317 "빌뉴스 시" 폴란드 전투비행대대 (''Wileński'')
  • 제318 "그단스크 시" 폴란드 전투정찰비행대대 (''Gdański'')
  • 제663 폴란드 포병 관측 비행대대
  • 제145 전투비행대대 폴란드 전투팀(Polish Fighting Team) (''Skalski's Circus'')

3. 4. 정보 및 저항 운동

폴란드 정보 기구는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에도 대부분 온전하게 유지되었으며, 폴란드 망명 정부에 계속 보고했다. '제2부'로 알려진 이 기구는 모든 유럽 국가의 다른 연합국들과 협력했으며, 나치 독일에서 가장 큰 정보망 중 하나를 운영했다. 많은 폴란드인들이 영국의 특수작전본부에서 활동한 크리스티나 스카르벡("크리스틴 그랜빌")을 비롯한 다른 연합국 정보기관에서도 근무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영국 첩보기관이 받은 대륙 유럽발 보고서의 43%가 폴란드 정보원으로부터 온 것이었다.[13]

폴란드 저항군의 대다수(특히 지배적인 국내군 조직)도 망명 정부에 충성했으며, 국내 정부 대표부가 폴란드 지하국가의 최고 권위 기관이었다. 폴란드에서 활동하는 폴란드 저항군과 서부에서 활동하는 폴란드군의 군사 행동은 일반적으로 함께 분류되지 않지만, 공통된 지휘 계통 외에도 이들 사이에는 여러 중요한 연관성이 존재했다. 저항군은 서방에 중요한 정보(예: 나치 강제 수용소와 V-1 비행 폭탄과 V-2 로켓에 대한 정보[25])를 수집하여 전달했고, 서방에서는 저항군을 위한 물자를 모았으며, 엘리트 특수부대인 치호치엠니가 훈련을 받았다. 폴란드 정부는 특히 폭풍 작전 중에 폴란드 제1 독립 공수여단을 폴란드에 투입하고자 했지만, 연합군에 의해 거절되었다.

4. 주요 인물

1939년 폴란드 패전 이후, 폴란드 망명 정부는 프랑스에서 약 8만 명 규모의 새로운 폴란드군을 조직했다.[18] 이들은 프랑스군의 지휘를 받았다. 블라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장군은 폴란드 최고 사령관 겸 총리로서, 프랑스 항복 당시 많은 폴란드군을 영국으로 대피시켰다.[18]

소련에 억류되었던 폴란드인들을 통해 블라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 지휘 하에 7만 5천 명 규모의 군대가 편성되었는데, 이는 비공식적으로 "안데르스 군"으로 알려졌다.[1][8]

영국 전투에서 폴란드 조종사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0년 6월 11일, 폴란드 망명 정부는 영국 정부와 영국 주둔 폴란드 공군 편성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5] 1940년 7월 영국 공군은 302 "포즈난" 중대와 303 "코슈슈코" 중대를 편성했다.[5]

4. 1. 블라디스와프 시코르스키

1939년 폴란드 패전 이후, 블라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장군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총리 겸 최고 사령관으로서 프랑스에서 약 8만 명 규모의 새로운 폴란드군을 조직하고 이끌었다.[18] 프랑스 항복 당시, 시코르스키 장군은 2만 명 이상의 폴란드군을 영국으로 대피시켰다.[18]

폴란드 해군은 영국 해안에서 가장 먼저 재편성되었다. 1939년 중반 시코르스키 장군에 의해 폴란드 함선과 선원들이 영국으로 파견되었고, 같은 해 11월 폴란드-영국 해군 협정이 체결되었다.[3]

4. 2. 블라디스와프 안데르스

소련에 억류되어 있던 폴란드인들을 통해 블라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 지휘 하에 7만 5천 명 규모의 군대가 편성되었는데, 이는 비공식적으로 "안데르스 군"으로 알려졌다. 이 군대는 부줄룩, 사마르칸트에 집결했고, 이후 크라스노보드스크에서 카스피해를 건너 중동(이란)으로 수송되어 1943년 다른 부대들과 함께 폴란드 제2 군단을 편성했다.[1][8]

4. 3. 스타니스와프 마체크



스타니스와프 마체크는 폴란드 제1기갑사단을 지휘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서유럽 전선에서 활약한 장군이다.

4. 4. 마리안 쿠키엘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마리안 쿠키엘'에 대한 정보가 없으므로, 이 섹션에 작성할 내용이 없다. 따라서 빈 문자열을 반환한다.

4. 5. 스타니스와프 스칼스키

Stanisław Skalskipl는 뛰어난 격추 기록을 가진 폴란드 공군 에이스였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폴란드 공군에서 복무하며 연합군 측에서 활약했다.

영국 전투에서 폴란드 조종사들은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특히, 제303 "코슈슈코" 폴란드 전투비행대대는 1940년 8월 30일에 전투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전투에 참여한 모든 전투 비행대대 중 가장 많은 격추 수(126)를 기록했다.[1][2][19][20] 연합군 조종사 총수의 약 5%를 차지하는 이 폴란드 조종사들은 전투에서 총 승리(203회)의 12%를 차지했고, 어떤 연합군 비행대대보다도 가장 많은 격추 수를 기록했다.[1][2][19][20]

1943년 튀니지에서는 폴란드 전투팀(Polish Fighting Team)이 활약했는데, 이 팀은 "스칼스키 서커스"로 알려졌다.[2][19]

4. 6. 주요 인물에 대한 추가 정보

얼니스트 베빈은 영국의 노동조합원이자 외무장관으로, 폴란드 이민자들의 일자리 경쟁을 우려하여 폴란드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9] 영국과 미국은 폴란드에 경찰 국가가 건설되고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10] 베빈은 폴란드 임시 정부의 살인 행위에 항의했고, 폴란드 임시 정부는 이에 대해 안데르스에게 충성하는 테러리스트들과 싸우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옹호했다.[10] 타임는 폴란드의 "잉여 영웅들"에 대해 보도하면서, 베빈이 안데르스에게 새로운 폴란드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그의 병사들은 영국령에서 망명을 찾을 수 있다고 약속했다고 전했다.[11] 그러나 베빈은 선거든 아니든 안데르스 군대의 폴란드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11]

스타니스와프 미콜라지크는 폴란드 농민당의 지도자로, 공산주의-사회주의 세력과의 분열이 심화되고 있었다. 보안경찰의 농민당 본부 급습이 보도되기도 했다.[11]

요제프 쿠로피에스카 대령은 바르샤바의 공산주의 정권의 무관으로, 런던 승전 기념 퍼레이드에 외교적 예의로 참석한 유일한 폴란드 대표였다.[2]

참조

[1] 서적 Dirty Little Secrets of World War II: Military Information No One Told You About the Greatest, Most Terrible War in History https://books.google[...] HarperCollins
[2] 웹사이트 To Return To Poland Or Not To Return - The Dilemma Facing The Polish Armed Forces At The End Of The Second World War. https://www.angelfir[...] 2007-07-31
[3] 논문 The British-Polish Agreement of August 1940 2011
[4] 서적 For Your Freedom and Ours Heinemann
[5] 서적 Skalski Against All Odds: The First Allied Ace of the Second World War Fonthill Media
[6] 서적 History of the Polish Air Force Osprey Publishing
[7] 서적 Last Hope Island
[8] 서적 Mémoires 1939–1946 La Jeune Parque
[9] 서적 The Poles in Britain, 1940-2000: From Betrayal to Assimilation https://books.google[...] Psychology Press 2012-05-30
[10] 뉴스 The Milwaukee Journal - Google News Archive Search https://news.google.[...] 2015-06-25
[11] 잡지 POLANb: Surplus Heroes http://www.time.com/[...] 1946-03-25
[12] 잡지 POLAND: Behind the Curtain http://www.time.com/[...] 1946-02-04
[13] 뉴스 Polish veterans to take pride of place in victory parade http://www.ft.com/cm[...] Financial Times 2006-03-31
[14] 웹사이트 THE VICTORY PARADE https://web.archive.[...] 2007-03-31
[15] 서적 A Question of Honor: The Kosciuszko Squadron: Forgotten Heroes of World War II http://www.questiono[...] Knopf
[16] 웹사이트 Poland in Exile - Polish Resettlement Corps http://www.polandine[...] 2015-06-25
[17] 서적 The Lion and the Eagle: Polish Second World War Veterans in Scotland Cualann Press
[18] 웹사이트 Wojsko Polskie we Francji http://www.wspolnota[...]
[19] 웹사이트 The Poles in the Battle of Britain http://www.ww2.pl/Ba[...]
[20] 웹사이트 Polish contribution to the Allied victory in World War 2 (1939-1945) http://www.polishemb[...]
[21] 웹사이트 WWII Behind Closed Doors https://www.pbs.org/[...] 2015-06-25
[22] 서적 Poland's Navy, 1918–1945 Hippocrene Books 1999-02
[23] 웹사이트 86 years of the Polish Navy http://navy.mw.mil.p[...] 2007-07-31
[24] 웹사이트 The Battle of the Atlantic and the Polish Navy http://www.ww2.pl/Th[...] 2007-07-31
[25] 웹사이트 Eastern Europe in World War II: October 1939-May 1945 http://web.ku.edu/~e[...] 2006-12-21
[26] 뉴스 Polish veterans to take pride of place in victory parade http://www.ft.com/cm[...] 파이낸스 타임스 2006-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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