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다 사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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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라다 사노스케는 1840년 이요 마쓰야마에서 태어난 인물로, 에도에서 하인으로 일하다가 신선조에 합류하여 10번대 대장을 맡았다. 그는 세리자와 카모 암살, 이케다야 사건 등 신선조의 주요 임무에 참여했으며, 보신 전쟁에서 쇼기타이에 합류하여 우에노 전투에서 전사했다. 사카모토 료마 암살 연루설이 제기되기도 했으며, 다혈질적인 성격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하라다는 소설,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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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하라다 사노스케는 이요마쓰야마 번(현재의 마쓰야마시) 출신의 낮은 계급 무사(츄겐)였다.[1] 호조인류 창술의 달인으로, 검 대신 창을 주무기로 사용했다.[2] 마쓰야마에서 할복하는 법을 모른다고 놀림받자 실제로 할복을 시도하여 살아남았고, 훗날 신센구미 동료들에게 이 흉터를 자랑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
1863년, 곤도 이사미와 함께 로시구미에 참가하여 교토로 상경했다. 로시구미 해산 후 미부 로시구미(후의 신센구미)를 결성하고 10번대 대장을 맡았다.[2] 타니 산주로를 신센구미에 소개하기도 했다. 교토에서는 스가와라 마사와 결혼하여 아들 시게루(茂)를 얻었다.[2] 히지카타 도시조의 신임을 받아 세리자와 카모 암살, 이케다야 사건 등 주요 임무에 참여했다.
1867년 하타모토가 되었으나,[4] 1868년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곤도 이사미와의 의견 차이로 나가쿠라 신파치와 함께 신센구미를 탈퇴, 세이헤이타이를 결성했다.[7][9] 이후 쇼기타이에 합류하여 우에노 전투에 참전했다가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10]
2. 1. 출생과 성장
하라다 사노스케는 1840년(덴포 11년) 이요 마쓰야마번(현재의 마쓰야마시)에서 낮은 계급의 무사인 츄겐 신분으로 태어났다.[1] 아버지의 이름은 나가쓰구였으며, 어머니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성장 후, 하라다는 중간이 되었지만, 안세이 시대에 에도로 가서 마쓰야마 번사 나이토 후사노스케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했다. 하인은 중간 중에서도 어느 정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맡았으며, 훗날 영리하다고 평가받는 하라다는 그에 걸맞은 교양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라다는 호조인류 창술을 연마했으며, 마쓰야마에 머무는 동안 마쓰야마 번사로부터 할복하는 방법을 제대로 모르는 농민 취급을 받기도 했다.[2] 이에 하라다는 즉시 칼을 뽑아 할복을 시도했지만, 상처는 얕아 목숨을 건졌다.[2] 훗날 하라다는 신센구미 동료들에게 자신의 흉터를 자랑했으며, 이 사건은 그가 선택한 가문의 문장(원 안에 가로선, 즉 '1'의 한자를 묘사한)의 기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2]
어린 시절 하라다는 하이쿠 시인 나이토 소코와 친하게 지냈다. 소코는 훗날 사담회에서 하라다가 중간 동료들에게 제재를 받는 모습을 목격한 일화를 이야기했다. 하라다는 술에 취해 돌아와 거친 행동을 보였고, 이를 윗사람이 제지했지만 오히려 맞받아쳤기 때문에 벌을 받게 된 것이었다.[15]
얼마 후, 하라다는 마쓰야마로 돌아가 번교 메이쿄칸의 조교를 맡고 있던 나카지마 하야타의 와카토로서 시중을 들게 되었다. 그 후, 소코는 마쓰야마 성 아래에서 하라다가 란식 총대에 사용하는 북을 울리며 알몸으로 다니는 기행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후 하라다는 가출하여 마쓰야마를 떠나 오사카로 향했다. 그는 타니 산쥬로, 만타로 형제의 도장에 입문하여 종전류 창술 면허를 받았다. 그 후 에도로 가서 곤도 이사미의 시위장에서 수련했다.[3] 다만, 나가쿠라 신파치의 회고록이나 코지마 시카노스케의 기록에는 하라다의 이름이 없어, 시위장과의 접촉 기간은 짧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6]
2. 2. 신센구미 입대
1863년, 하라다는 곤도 이사미 및 시에이칸 관련 인물들과 함께 기요카와 하치로의 로시구미에 합류하여 교토로 갔다. 교토에 도착한 직후 로시구미는 해산되었고, 대부분의 구성원은 에도로 돌아갔다. 그러나 하라다, 곤도, 세리자와 카모 등 몇몇은 교토에 남아 미부 로시구미를 결성했고, 이는 후에 신센구미가 되었다.[2]이후 하라다는 신센구미 10번대 대장이 되었다. 그는 타니 산주로 도장에서 잠시 훈련받았고, 타니를 신센구미에 소개했다. 1865년, 타니는 7번대 대장이 되었다. 교토에서 하라다는 스가와라 마사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니시혼간지 근처에 가정을 꾸렸다.[2] 부부는 아들 茂|시게루일본어를 낳았는데, 하라다는 쇼군 이에모치|이에모치일본어의 이름에서 따왔다.[2] 하라다는 부장 히지카타 도시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세리자와 카모 암살, 우치야마 히코지로 암살, 이케다야 사건, 산조 세이사츠 사건 등 신센구미의 주요 임무에 참여했다.
1867년 6월, 하라다는 다른 신센구미 대원들과 함께 하타모토가 되었다.[4]
2. 3. 주요 활동
하라다는 1863년 곤도 이사미를 비롯한 시에이칸(試衛館) 동료들과 함께 로시구미에 합류하여 교토로 갔다. 로시구미 해산 후에는 교토에 남아 미부 로시구미를 결성했고, 이는 나중에 신선조가 되었다. 하라다는 신선조에서 제10번대 대장을 맡았다.[2] 타니 산주로의 도장에서 훈련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타니를 신선조에 소개하기도 했다.[2]교토에서 하라다는 스가와라 마사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고, 아들 시게루(茂)를 얻었다.[2] 신선조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의 신임을 얻어 세리자와 카모 암살,[2] 우치야마 히코지로 암살, 이케다야 사건, 산조 세이사츠 사건 등 주요 임무에 참여했다.
1867년 6월, 하라다는 신선조와 함께 하타모토가 되었다.[4] 사카모토 료마 암살 용의자로 지목되기도 했으나, 미마와리구미의 사사키 타다사부로 등이 암살했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불분명해졌다.[5][6] 아부라노코지 사건에도 참여하여 고료에지 잔당을 제거하는데 가담했다.
1868년 도바-후시미 전투에 참전한 후, 甲陽鎮撫隊|고요 친부타이|일본어에 소속되어 고슈-카츠누마 전투에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이후 곤도와의 의견 차이로 나가쿠라 신파치와 함께 신선조를 탈퇴하여 세이헤이타이를 결성했다.[7][8][9]
하라다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