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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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스 슘은 독일 출신의 배우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1920년대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상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1933년 영화 《아르헨티나의 노래》로 데뷔하여, 주로 단역 배우로 활동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관련 영화에서 악역을 주로 맡아 '궁극적인 스크린 나치'라는 평을 받았다. 슘은 1941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되었으며, 1970년 배우 활동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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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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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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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한스 요제프 슘 |
출생일 | 1896년 4월 2일 |
출생지 | 슈투트가르트, 독일 |
사망일 | 1990년 2월 2일 |
사망지 | 로스앤젤레스, 미국 |
국적 | 독일 (1896–1941) |
다른 이름 | 안드레 폴라 (1948, 1949, 1954, 1956년 영화 가명) |
직업 | 연극 및 할리우드 영화 배우 |
활동 기간 | 1925–1970 |
신장 | 6 ft 0 in |
에이전트 | 파울 코너 에이전시 |
경력 | |
고용주 | 20th Century Pictures (2) 찰리 채플린 (2) 컬럼비아 (13) 드 그륀발트 (2) MGM (9) 모노그램 (2) 파라마운트 (8) 아놀드 프레스버거 (1) 제1영화제작부대 (미국 육군 AF) (1) 리퍼블릭 (3) RKO (6) 사무엘 골드윈 (2) 테라-필름쿤스트 (1) 20세기 폭스 (8) 유니버설 (6) 리뷰 (유니버설) (3) 워너 브라더스 (13) 지브 텔레비전 (1) |
기타 | |
스타일 | 캐릭터 배우 |
2. 초기 생애 및 경력
슘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육군에서 복무했다. 1924년 1월 1일, 슈투트가르트에 거주하던 슘은 상인 자격으로 뉴욕을 처음 방문했다. 그의 배우 데뷔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1925년 독일 마이센에서, 다른 하나는 1925년경 슈투트가르트에서 슈투트가르트 국립 극장과 함께 ''베니스의 상인''을 공연했다는 것이다. 1926년 11월 30일, 슘은 다시 뉴욕을 방문하여 밀워키와 시카고에서 독일 극단과 함께 공연했다.
2. 1. 독일에서의 삶과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슘은 1896년 4월 2일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육군에서 복무했다.1924년 1월 1일, 슈투트가르트에 거주하던 슘은 상인 자격으로 뉴욕을 처음 방문했다. 그의 배우 데뷔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1925년 독일 마이센에서, 다른 하나는 1925년경 슈투트가르트에서 슈투트가르트 국립 극장과 함께 ''베니스의 상인''을 공연했다는 것이다. 1926년 11월 30일, 슘은 다시 뉴욕을 방문하여 밀워키와 시카고에서 독일 극단과 함께 공연했다.
2. 2. 미국으로의 이주와 배우 데뷔
슘은 1924년 1월 1일에 상인 자격으로 처음 뉴욕을 방문했다. 그의 배우 데뷔에 대해서는 최소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1925년 독일 마이센에서, 다른 하나는 1925년경 슈투트가르트에서 슈투트가르트 국립 극장과 함께 ''베니스의 상인''을 공연한 것이다. 슘은 1926년 11월 30일 다시 뉴욕을 방문하여 밀워키와 시카고에서 독일 극단과 함께 공연했다.[1]2. 3. 뉴욕 정착과 할리우드 진출
슘은 1929년 8월 26일 세 번째로 뉴욕으로 돌아와 미국 영구 거주자 자격으로 독일어 극장에서 일했다.슘이 1929년에 도착한 시점은 히틀러의 권력 장악(1933년) 이전이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심각한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여기에는 1922년경부터 시작된 하이퍼인플레이션이 포함되었다. 그의 도착은 또한 1929년 월가 대폭락 직후였다. 대공황은 1929년 말 독일을 강타했고, 1932년 초에 불황의 바닥에 이르렀다.
1931년까지 슘은 뉴욕 맨해튼 최북단에 위치한 워싱턴 하이츠의 160 와즈워스 애비뉴에서 살았다. 같은 해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으며, 1932년 파사데나 커뮤니티 플레이하우스에서 두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1933년 마를레네 디트리히 주연의 영화 ''아르헨티나의 노래''에서 단역 배우로 영화에 데뷔했다.
3. 할리우드 경력
슘은 1931년까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했으며, 1932년 파사데나 커뮤니티 플레이하우스에서 두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1933년 마를레네 디트리히 주연의 영화 ''아르헨티나의 노래''에서 단역으로 영화에 데뷔했다.
3. 1. 나치 역할 전문 배우로의 부상
슘은 1929년 8월 26일 세 번째로 뉴욕으로 돌아와 미국 영구 거주자 자격으로 독일어 극장에서 일했다.슘이 1929년에 도착한 시점은 히틀러의 권력 장악 전이었다. 당시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하이퍼인플레이션을 포함한 심각한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도착은 1929년 월가 대폭락 며칠 후였다. 대공황은 1929년 말 독일을 강타했고, 1932년 초에 불황의 바닥에 이르렀다.
1931년, 슘은 뉴욕 맨해튼 최북단 워싱턴 하이츠의 160 와즈워스 애비뉴에서 살았다. 1933년 독일에서, 요제프 괴벨스의 명령에 따라 새로 설립된 기관인 국가 문화 회의소(DKK)에 의해 유대인 배우는 독일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슘은 망명자는 아니었지만, 할리우드 영화 커뮤니티, 특히 독일 망명자 그룹 내에서 활동하며, 독일 유대인 망명 배우들이 미국 영화에 적응하도록 도왔다. 193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슘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온 유대인 배우들을 지원하기 위해 영화 제작자들이 주도하여 설립한 단명 극단인 컨티넨탈 플레이어스를 결성한 60명 이상의 초기 멤버 중 한 명이 되었다.
3. 2. 《스파이 스매셔》와 대표작
슘의 영화 배역은 대부분 단역이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대부분 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1942년 인기 있었던 12개 에피소드로 구성된 영화 연재물인 스파이 스매셔에서 "마스크"라는 악당 역할을 맡으면서 일부 영화 포스터에서 주연 배우로 이름을 올렸다.2015년 슘이 1942년 연재물 ''스파이 스매셔''에서 "마스크" 역할을 맡은 것에 대한 회고적 리뷰에서, 영화 평론가 보이드 P. 매거스는 "궁극적인 스크린 나치는 한스 슘이었다"고 썼다. IMDb 전기 작가는 슘을 "나치 돼지 par excellence|파 엑셀랑스영어"라고 묘사했다. 매거스는 슘의 경력이 1940년대 초에 독일 출신 배우들이, 특히 국방군과 SS의 일원을 묘사하는 반나치 영화의 역할에 기용되면서 상당한 부스트를 받았다고 지적했다.
슘은 1943년 영화 ''교수형자도 죽는다''에서 배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미국에 거주하는 독일 이민자들이 히틀러 정권에 맞서 영화를 제작하려 한 몇 안 되는 시도 중 하나였다.
3.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활동
슘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52년부터 1953년까지 브로드웨이 연극 ''붉은 무지개''에 출연했다. 1953년경부터 미국 영화 제작자들이 낮은 제작비 때문에 서독에서 촬영하는 추세에 따라 슘은 서독에서 다음과 같은 작품들에 출연했다.- ''트라프 패밀리''
- ''세 번째 성''은 1957년 독일에서 촬영되었으며, 비엔나에서 오리지널 버전으로 개봉되었다.
- ''바이킹 이야기''(39 에피소드)는 뮌헨에서 커크 더글러스가 제작했으며, 슘은 두 에피소드에서 토르발드 역을 맡았다.
- ''질문 7''
- ''수줍은 코끼리''
- ''나와 함께 날아라''
- ''캡틴 신밧드''는 바이에른 영화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다.
- ''왈츠의 왕'' (1963)
- ''겨울이 오기 전에''
- ''비엔나에 오세요, 제가 뭔가를 보여드리겠습니다!(Komm nach Wien, ich zeig dir was!)''
''세 번째 성''은 서독에서 제작되었다. 1957년 5월 8일부터 6월 3일까지 촬영되었으며, 1957년 8월 29일 비엔나의 여러 영화관에서 초연되었다. 독일에서는 1957년 10월 31일 슈투트가르트의 글로리아-팔라스트에서 처음 상영되었다. 슘은 소아 심리학자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당시 논란이 되었던 동성애를 다루었다. 기본적인 메시지는 ''전환 치료가 과학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이다.'' 베이트 하를란이 감독했으며, 그 목표는 동성애에 대한 대중의 시각을 자유화하고 특히 이에 대한 서독 법률 개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이 영화, 특히 독일 형법 제175조에 따라 독일 당국에 의해 검열된 버전은 정반대의 효과를 냈다.
4. 개인사
한스 슘은 1940년 11월 13일 귀화를 신청하여 1941년 2월 14일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의 1942년 미국 징병 등록 카드에는 키가 약 약 1.83m, 몸무게는 약 약 89.81kg이며, 갈색 머리와 갈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90년 2월 2일, 슘은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할리우드 요양원에서 쓰러진 후 로스앤젤레스의 카이저 퍼머넌트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었으며 유해는 웨스트우드 빌리지 메모리얼 파크 묘지 배우들의 장미 정원에 묻혔다.
4. 1. 가족 관계와 결혼
슘은 1931년 7월 29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아그네스 멜렌 켄트(1888–1975)와 처음 결혼했다. 아그네스는 이전 결혼을 통해 두 딸, 제시 마르셀리나(엘리자베스) 올리비에리(1918–1947)와 1915년 아베차노 지진에서 구조된 후 입양된 조세핀 타르퀴니(1910–2010)를 두었다. 아그네스 켄트는 뉴욕 건축가 윌리엄 윈throp 켄트(1860–1955)의 딸이었다. 한스와 아그네스는 이혼했다.슘은 이후 1935년 9월 23일, 캘리포니아주 산타아나에서 글로리아 F. 스미스(1916-1989)와 결혼했다. 1943년 9월 말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서 글로리아 슘이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1944년 12월 8일에 이혼이 확정되었다. 1947년 8월 21일, 글로리아와 한스는 재혼했다. 1948년 2월 7일, 글로리아는 요한 리차드 월레스 슘을 낳았다.
글로리아 슘은 1953년 4월 2일, 다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서 한스 슘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1978년 1월 11일, 글로리아는 다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서 한스 슘과 이혼했다.
4. 2. 미국 시민권 취득과 양심적 병역 거부
슘은 1929년 8월 26일 세 번째로 뉴욕으로 돌아와 미국 영구 거주자 자격으로 독일어 극장에서 일했다.슘이 1929년에 도착한 시점은 히틀러의 권력 장악(1933년 1월 30일) 전이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심각한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여기에는 1922년경부터 시작된 하이퍼인플레이션이 포함되었다. 그의 도착은 또한 1929년 월가 대폭락 며칠 후였다. 대공황은 1929년 말 독일을 강타했고, 1932년 초에 불황의 바닥에 이르렀다.
도착 직후인 1931년까지 슘은 뉴욕 맨해튼 최북단에 위치한 워싱턴 하이츠의 160 와즈워스 애비뉴에서 살았다.
슘은 1940년 11월 13일 귀화를 신청하여 1941년 2월 14일 시민권을 취득했다. 슘의 신원과 거주지를 증명한 두 명의 증인은 슈투트가르트 출신 알프레드 테오도어 훔멜(1876–1946)과 영국 출신 미국 정원사이자 목공예 장인인 존 해리슨 로드니 페인(1884–1966)이었다. 슘은 키가 약 약 1.83m이고 몸무게는 약 약 89.81kg이며, 갈색 머리와 갈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고 그의 1942년 미국 징병 등록 카드에 기록되어 있다.
4. 3. 사망
슘은 1990년 2월 2일에 사망했다. 1896년 4월 2일에 태어나 향년 93세였다. 그는 할리우드 요양원에서 쓰러진 후 로스앤젤레스의 카이저 퍼머넌트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었으며 유해는 웨스트우드 빌리지 메모리얼 파크 묘지 배우들의 장미 정원에 묻혔다.5. 사회 활동 및 정치적 입장
한스 슘은 할리우드 영화 커뮤니티, 특히 독일 망명자 그룹 내에서 활동하며, 독일 유대인 망명 배우들이 미국 영화에 적응하도록 도왔다. 193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슘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온 유대인 배우들을 지원하기 위해 영화 제작자들이 주도하여 설립한 단명 극단인 컨티넨탈 플레이어스를 결성한 60명 이상의 초기 멤버 중 한 명이었다.
1941년 미국 귀화 시민이 된 슘은, 미국 선택적 징병 제도에 따라 징집되었을 때,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되었다.
2015년 슘이 스파이 스매셔에서 "마스크" 역할을 맡은 것에 대한 회고적 리뷰에서, 영화 평론가 보이드 P. 매거스는 "궁극적인 스크린 나치는 한스 슘이었다"고 썼다. IMDb 전기 작가는 슘을 "나치 돼지 par excellence|파 엑셀랑스영어"라고 묘사했다. 매거스는 슘의 경력이 1940년대 초에 독일 출신 배우들이 반나치 영화, 특히 국방군과 SS의 일원을 묘사하는 역할에 기용되면서 상당한 부스트를 받았다고 지적했다.
슘은 1943년 영화 ''교수형자도 죽는다''에서 배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미국에 거주하는 독일 이민자들이 히틀러 정권에 맞서 영화를 제작하려 한 몇 안 되는 시도 중 하나였다.
5. 1. 배우 조합 활동
슘은 영화에서 대부분 단역을 맡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1942년, 12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인기 영화 연재물 스파이 스매셔에서 "마스크"라는 악당 역할을 맡아 일부 영화 포스터에 주연 배우로 이름을 올렸다. 영화의 경우 영화 배우 조합(Screen Actors Guild), TV와 라디오의 경우 AFTRA가 크레딧 관련 지침을 정한다.1933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 특히 나치 관련 영화에서 독일 출신 망명자나 독일계 미국인 배우들이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이유는 나치 점령 국가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에게 위험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미국의 연줄이 있어 SS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사람도 대상이었다. 슘의 부계와 모계 친척들은 독일 시민이었고 그곳에 거주했다.
슘은 폴 코너에게 소속되어 있었다. 그는 다음 조합의 회원이었다.
- 미국 배우 조합(Screen Actors Guild)
- 스크린 엑스트라 길드(Screen Extras Guild)
- 에드윈 포레스트 협회(Edwin Forrest Society), 배우 기금(The Actors Fund) (유산 기부자)
5. 2. 독일 망명 배우 지원
1933년 독일에서 요제프 괴벨스의 명령에 따라 새로 설립된 기관인 국가 문화 회의소(DKK)에 의해 유대인 배우들은, 다른 여러 조치와 함께, 독일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슘은 망명자는 아니었으나, 할리우드 영화 커뮤니티, 특히 독일 망명자 그룹 내에서 활동하며, 독일 유대인 망명 배우들이 미국 영화에 적응하도록 도왔다. 193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슘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온 유대인 배우들을 지원하기 위해 영화 제작자들이 주도하여 설립한 단명 극단인 컨티넨탈 플레이어스를 결성한 60명 이상의 초기 멤버 중 한 명이었다.5. 3. 정치적 성향과 논란
슘은 1942년 영화 연재물인 스파이 스매셔에서 "마스크"라는 악당 역할을 맡아 영화 포스터에 주연 배우로 이름을 올렸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특히 나치 관련 영화에서 독일 출신 망명자 및 독일계 미국인 배우들의 크레딧은 나치 점령 국가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에게 위험했기 때문에, 많은 배우들이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슘의 친척들은 독일 시민이었고, 슘은 1941년 미국 귀화 시민이 되었다. 슘은 미국 선택적 징병 제도에 따라 징집되었을 때,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되었다.2015년 슘이 스파이 스매셔에서 "마스크" 역할을 맡은 것에 대한 회고적 리뷰에서, 영화 평론가 보이드 P. 매거스는 "궁극적인 스크린 나치는 한스 슘이었다"고 썼다. IMDb 전기 작가는 슘을 "나치 돼지 par excellence영어"라고 묘사했다. 매거스는 슘의 경력이 1940년대 초에 독일 출신 배우들이 반나치 영화, 특히 국방군과 SS의 일원을 묘사하는 역할에 기용되면서 상당한 부스트를 받았다고 지적했다.
슘은 1943년 영화 ''교수형자도 죽는다''에서 배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미국에 거주하는 독일 이민자들이 히틀러 정권에 맞서 영화를 제작하려 한 몇 안 되는 시도 중 하나였다.
6. 출연 작품
한스 슘은 영화, 텔레비전,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영화1956년 보리수에 출연했고, 1939년 나치 스파이의 고백을 비롯해 딕 트레이시 - 1950년 시리즈(1950년), 골든 이어링(1947년), 디자이어 미(1947년), 크로크 앤 대거(1946년), 래시의 아들(1945년), 업 인 암스(1944년), 데이 갓 위 컨버드(1943년), 독수리는 다시 난다(1941년), 이스케이프(1940년)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다.
1953년경부터 미국 영화 제작자들이 낮은 제작비 때문에 서독에서 촬영하는 추세에 따라 슘은 서독에서 트라프 패밀리, 세 번째 성, 바이킹 이야기, 질문 7, 수줍은 코끼리, 나와 함께 날아라, 캡틴 신밧드, 왈츠의 왕(1963), 겨울이 오기 전에, 비엔나에 오세요, 제가 뭔가를 보여드리겠습니다!(Komm nach Wien, ich zeig dir was!) 등의 작품에 출연했다.
텔레비전우주 순찰대, 딕 트레이시, 뜻밖의 일, 셰브론 극장, 미국 육군 비프 베이커, 레이 밀랜드 쇼, 크라프트 텔레비전 극장, 웹, 필 실버스 쇼, 라인골드 극장, 바이킹 이야기, 월트 디즈니의 멋진 세상 등 다양한 텔레비전 시리즈에 출연했다.
연극1925년경 슈투트가르트 국립 극단에서 베니스의 상인을 공연했고, 1926년에는 파브스트 극장과 시카고에서 (독일 주식회사)를 공연했다. 1930년 버트 스프로트 연출의 ''닥터 클라우스''에 출연했고, 1932년에는 패서디나 커뮤니티 플레이하우스에서 ''버클리 스퀘어''와 ''일생에 한 번''에 출연했다. 1939년 레오폴트 예스너 연출의 ''윌리엄 텔''에 출연했으며, 1949년에는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발터 빅클레어 연출의 ''파우스트''에서 조감독을 맡았다. 같은 해 코로넷 극장에서 ''인티미타텐''과 ''Raub der Sabinerinnen'' (사비니 여인의 강간)에 출연했다. 1951년 패서디나 커뮤니티 플레이하우스에서 ''제비 둥지''에 출연했고, 1952년과 1953년에는 ''붉은 무지개''에 출연했다. 1953년에는 프레스턴 스터지스가 각색한 ''로마로 가는 길''에 출연했다.
6. 1. 영화
(별칭 메이든 보야지)제임스 앤더슨 (보조)
(독일 U-78 잠수함에서 활동하는 나치 스파이 조직의 수장)
(별칭 히틀러의 교수형 집행인)
(게슈타포 장교: 하이드리히의 총잡이)
(크레딧 없음)
프로듀서 릴리징 코퍼레이션
(B급 영화)
해럴드 D. 슈스터
오손 웰스 (크레딧 없음)
(알베르트를 밀치는 자)
RKO 라디오 픽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