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스팅스 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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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이스팅스 반다는 말라위의 독립 운동가이자 초대 총리,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1964년 말라위가 독립한 후 총리, 1966년 공화국 수립과 함께 대통령이 되었으며, 1971년 종신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94년 민주화 운동으로 퇴임할 때까지 일당 독재 체제를 유지했다. 반다는 억압적인 통치와 함께 교육 발전에 기여했으나, 1994년 선거에서 패배한 후 199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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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스팅스 반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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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헤이스팅스 카무주 반다 |
출생 이름 | 아킴 카음크왈라 음툰타마 반다 |
출생 | 기원전 1898년경 |
출생지 | 카숭구, 영국 중앙 아프리카 보호령(현재의 말라위 카숭구) |
사망 | 1997년 11월 25일 |
사망지 | 남아프리카 공화국, 하우텡 주, 요하네스버그 |
안장 장소 | 카무주 영묘 |
종교 | 장로교(스코틀랜드 교회) |
직위 | |
임기 시작 | 1966년 7월 6일 |
임기 종료 | 1994년 5월 24일 |
이전 | 엘리자베스 2세 (말라위의 여왕) |
후임 | 바킬리 물루지 |
임기 시작 | 1964년 7월 6일 |
임기 종료 | 1966년 7월 6일 |
이전 | 직책 신설 |
후임 | 자신 (대통령으로서)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총독 | 글린 스몰우드 존스 경 |
학력 | |
소속 정당 | |
정당 | 말라위 회의당 |
2. 초기 생애 및 교육
헤이스팅스 카무주 반다는 영국령 중앙아프리카(현 말라위) 카숭구 근처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 연도는 불분명하나, 1898년 또는 1906년으로 추정된다.[15] 그는 말라위에서 초기 교육을 받은 후 남부 로디지아(현 짐바브웨)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일했으며, 이후 미국의 도움으로 유학길에 올라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시카고 대학교에서 역사학 학사(1931년), 메해리 의과대학에서 의학 박사(1937년) 학위를 취득했다.[17][18][19][20] 이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추가적인 의학 교육을 받고 1941년 영국 의사 자격을 얻었으며,[18] 영국 내에서 의사로 활동하며 장로교회 신자로도 활동했다.[17] 런던 활동 시기에는 크와메 느크루마, 조모 케냐타 등 다른 아프리카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고국의 정치 문제, 특히 로디지아·니야살란드 연방 결성 반대 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1953년부터 1958년까지는 가나에 머물렀고, 1958년 7월 약 42년 만에 고국 니아살란드로 돌아와 니아살란드 아프리카 의회(NAC)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귀국 당시에는 모국어인 체와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해 통역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2. 1. 어린 시절

카무주 반다는 말라위 (당시 영국령 중앙아프리카) 카숭구 근처에서 음포논고 반다(Mphonongo Banda)와 아쿠핀감니아마 피리(Akupingamnyama Phiri)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은 아킴 카므콰라 므툰타마 반다(Akim Kamnkhwala Mtunthama Banda)였다. 출생 등록이 없던 시기에 태어나 정확한 출생일은 알 수 없다. 그의 전기 작가 필립 쇼트는 1898년 1월을 가장 유력한 시기로 보았고, 반다 자신은 1906년 5월 14일을 공식 생일로 사용했으나, 후에는 부족 관습에 근거하여 1898년 3월 또는 4월에 태어났다는 설명을 받아들였다.[15] 그가 태어날 당시 말라위는 니야살란드로 불렸으며, 영국령 북부 로디지아의 일부였다.
그의 이름 '카므콰라'(Kamnkhwala)는 "작은 약초"라는 뜻이었는데, 어머니가 불임 치료를 위해 약초를 복용한 후 그를 임신했기 때문에 "작은 뿌리"라는 뜻의 '카무주'(Kamuzu)로 바뀌었다.[17] 그는 므툰타마(Mtunthama) 근처 마을 학교와 외조부모 댁 근처 치콘드와(Chikondwa)의 차얌바 초등학교(Chayamba Primary School)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다. 1908년에는 칠랑가 선교부(Chilanga mission station)로 이주했고, 1910년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스코틀랜드 출신 조지 프렌티스(George Prentice) 박사에게 세례를 받으며 '헤이스팅스'(Hastings)라는 기독교식 이름을 얻었다. 이는 인근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헤이스팅스(John Hastings)를 존경하여 따온 이름이다.[16][17]
1915년에서 1916년경, 반다는 리빙스토니아 선교 학교 교사였던 삼촌 하녹크 머소케라 피리(Hanock Msokera Phiri)와 함께 남로디지아(현 짐바브웨)의 하틀리(Hartley, 현 체구투(Chegutu))까지 걸어서 이동했다. 이후 1917년에는 다시 걸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로 갔고, 트란스발(Transvaal) 지역 위트와테르스란드(Witwatersrand)의 깊은 광산에서 여러 해 동안 다양한 일을 하며 노동자로 지냈다.
남아프리카 체류 중, 그는 아프리카인 감리교회(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 AME)의 윌리엄 테컴세 번(William Tecumseh Vernon) 주교를 만났다. 번 주교는 반다가 미국까지 갈 여비만 마련한다면 미국 감리교 학교의 학비를 지원해주겠다고 제안했다.[17] 이 제안을 받아들여 반다는 1925년 뉴욕으로 떠나 유학길에 올랐다.
2. 2. 해외 유학 (1925년 ~ 1958년)
1925년, 반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만난 아프리카인 감리교회(AME)의 윌리엄 테컴세 번 주교의 도움으로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17] 그는 오하이오주 윌버포스에 있는 AME 계열 대학인 윌버포스 연구소의 고등학교 과정(현재 센트럴 주립대학교)에서 공부하여 1928년에 졸업했다.[18] 재정 지원이 끊기자, 그는 가나의 교육자 크웨기르 아그레이가 주선한 강연을 통해 학비를 벌었다.
이후 키와니스 클럽 강연에서 만난 헤럴드 박사의 도움으로 인디애나 대학교 의예과에 등록했다. 블루밍턴에서 그는 민속학자 스티스 톰슨을 위해 자신의 부족인 체와족에 대한 글을 썼고, 톰슨의 소개로 시카고 대학교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사피어를 알게 되어 4학기 후 시카고 대학교로 편입했다. 시카고에서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인류학자이자 언어학자인 마크 한나 워킨스와 협력하며 체와어 연구에 기여했고, 이는 체와어 문법 책 출판으로 이어졌다.[19] 그는 역사를 전공하여 1931년 철학 학사(B.Phil.) 학위를 받았다. 이 시기 동안 그는 펩소덴트 치약 등으로 부를 쌓은 더글러스 스미스의 부인과 델타 전기 회사의 월터 B. 스티븐슨 등 여러 후원자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
후원자들의 계속된 도움으로 반다는 테네시주에 있는 메해리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1937년 의학 박사(M.D.) 학위를 취득했다.[20] 이로써 그는 다니엘 샤프 말레케부에 이어 의학 학위를 받은 두 번째 말라위인이 되었다. 메해리 의과대학 재학 중이던 1934년, 그는 로버틴 에드먼즈와 결혼했다.[21]
대영 제국 영토 내에서 의사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영국 의학 자격이 필요했기 때문에, 반다는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941년, 그는 스코틀랜드 삼중 공동 자격증(LRCP(Edin), LRCS(Edin), LRCPSG)을 취득했다.[18] 그의 학업은 니아살란드 정부와 스코틀랜드 교회로부터 각각 연 300GBP의 장학금으로 지원되었으나, 두 후원자는 서로의 지원 사실을 몰랐다고 전해진다. (그가 여전히 스미스 부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는 상반된 이야기도 있다.) 그가 리버풀에서 열대 질환 과정을 등록했을 때 니아살란드 정부는 그의 장학금을 중단시켰다. 그는 또한 양심적 이유로 군의관 징집을 거부하여 리버풀을 떠나야 했다.[17] 그는 스코틀랜드 교회 장로이기도 했다.[17]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반다는 잉글랜드 북동부 뉴캐슬어폰타인 근처 노스쉴즈에서 의사로 일했다. 1944년, 그는 환자 중 한 명의 며느리인 메린 프렌치(Merene French)를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22] 제2차 세계 대전 후, 그는 런던으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킬번 지역에서, 이후 하를스든 지역에서 개인 병원을 열었다. 이 시기 그는 영국 노동당과 파비안 식민지국에 가입하며 정치 활동에 발을 들였다.[23]
1945년, 카숭구의 음와세 족장 등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동포들의 요청으로, 반다는 맨체스터에서 열린 제5차 범아프리카 회의에 니아살란드 아프리카 의회(NAC) 대표로 참석했다. 이 회의에는 조모 케냐타, 크워메 낙루마 등 훗날 아프리카 독립 국가들의 지도자가 될 인물들도 함께했다.[24] 이때부터 반다는 고국의 정치 상황에 더욱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NAC에 자문과 재정 지원을 제공했고, 영국 내 인맥을 통해 런던에서 니아살란드를 위한 로비 활동을 벌였다. 특히 그는 남로디지아(현 짐바브웨)의 총리 로이 웰렌스키 경이 추진하던 북로디지아(현 잠비아), 남로디지아, 니아살란드를 통합하는 로디지아·니야살란드 연방 설립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이 연방이 니아살란드 흑인들의 권리를 더욱 박탈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연방은 결국 1953년에 결성되었다.
1951년, 반다가 니아살란드로 돌아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는 대신 서아프리카의 골드 코스트(현 가나)로 이주했다. 이는 그가 하를스든 병원의 접수원이었던 프렌치 부인과의 스캔들에 연루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추측이 있다. 반다는 프렌치 부부의 이혼 소송에서 간통 상대로 지목되었고, 프렌치 부인은 그를 따라 서아프리카로 갔다. 이후 헨리 치펨베레, 카냐마 치우메, 둔두주 치시자, T.D.T 반다 등 영향력 있는 NAC 지도자들이 그의 귀국을 설득했다. 마침내 1958년 7월 6일, 반다는 약 42년 만에 고향 니아살란드로 돌아왔고, 같은 해 8월 응카타 베이에서 열린 회의에서 NAC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3. 정치 활동 및 독립 운동
헤이스팅스 반다는 영국 식민 정부와 로이 웰렌스키 등이 추진한 중앙아프리카 연방(로디지아 및 냐살란드 연방) 결성에 초기부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이 연방이 니아살란드 흑인들의 권리를 더욱 제약하고 박탈할 것이라고 강하게 우려했으나,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방은 1953년에 결성되었다.
1951년 이후 골드코스트 등 서아프리카에서 개업의로 활동하던[18] 반다는, 니아살란드 아프리카 회의(NAC)의 주요 지도자들로부터 독립 운동을 이끌어 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받았다. 그는 런던 등지에서 활동하며 크와메 느크루마(훗날 가나 대통령), 조모 케냐타(훗날 케냐 대통령) 등 다른 아프리카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독립에 대한 의지를 키워왔다. 결국 그는 지도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해외 생활 약 42년 만인 1958년 7월 6일 고국 니아살란드로 돌아왔다.[20]
귀국 직후인 1958년 8월, 반다는 Nkata Bay에서 열린 회의에서 니아살란드 아프리카 회의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그는 즉시 전국을 순회하며 중앙아프리카 연방에 반대하고 독립을 역설하는 연설을 통해 대중적 지지를 확보해나갔다.[26] 그의 활동은 니아살란드인들의 독립 열망을 크게 고취시켰지만, 동시에 영국 식민 정부의 탄압을 불러왔다. 결국 1959년 3월,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반다를 포함한 수백 명의 아프리카 민족 운동가들이 "새벽 작전"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28]
그러나 탈식민화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반다는 1960년 4월 석방되었고, 곧바로 런던에서 열린 독립 협상에 참여했다. 1961년 선거에서 말라위 의회당(MCP)이 압승하면서 그는 정부의 주요 직책을 맡게 되었고, 1963년 2월 1일에는 니아살란드의 첫 총리로 공식 취임했다. 총리로서 그는 교육 및 행정 시스템 개혁 등을 추진하며 독립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마침내 1964년 7월 6일, 니아살란드는 반다가 직접 정한 '말라위'라는 이름으로 영연방 내 독립 국가가 되었고, 그는 초대 총리로서 새로운 국가의 시작을 이끌었다.[29]
3. 1. 니아살란드 귀환 (1958년)
골드코스트에 머물던 반다에게 헨리 치펨베레, 카냐마 치우메, 둔두주 치시자, T.D.T. 반다 등 니아살란드 아프리카 회의(NAC)의 주요 지도자들은 니아살란드로 돌아와 독립 운동을 이끌어 줄 것을 간청했다. 영국으로 파견된 대표단은 가나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반다를 리버풀 항구에서 만나 설득했고, 그는 개인적인 문제를 정리할 시간을 가진 뒤 귀국하겠다고 약속했다.[20]몇 차례 소동과 연기 끝에[20], 반다는 해외로 떠난 지 약 42년 만인 1958년 7월 6일 니아살란드 땅을 다시 밟았다.[20] 같은 해 8월, 그는 Nkata Bay에서 열린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니아살란드 아프리카 회의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지도자가 된 반다는 즉시 전국 순회에 나서 중앙아프리카 연방에 대한 반대 연설을 이어갔다. 그는 로이 웰렌스키 등이 주도한 이 연방이 니아살란드 흑인들의 권리를 더욱 박탈할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며[18], 시민들에게 니아살란드 아프리카 회의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오랜 해외 생활 탓에 모국어인 치체와어 구사가 유창하지 않아 존 음손티나 이후 그의 최측근이 되는 존 템보 같은 통역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17], 그가 가는 곳마다 군중은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그의 연설은 니아살란드인들 사이에서 독립에 대한 열망과 투쟁 의지를 점차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 2. 체포와 투옥 (1959년)
반다는 니아살랜드 전국을 순회하며 영국이 주도하는 중앙아프리카 연방에 반대하는 연설을 이어갔다. 그의 연설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말라위인들 사이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움직임이 점차 확산되었다. 1959년 2월, 상황이 심각해지자 로디지아 군대가 질서 유지를 위해 투입되었고 영국 식민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1959년 3월 3일, 반다는 "새벽 작전"(Operation Sunrise)이라 불린 작전 과정에서 수백 명의 다른 아프리카 민족 운동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남부 로디지아(현재의 짐바브웨)에 있는 궬로(현재의 그웨루) 감옥에 수감되었다.[28] 반다가 투옥된 동안, 냐살란드 아프리카 의회에서 이름을 변경한 말라위 의회당의 임시 당수는 1959년 8월에 석방된 오턴 치르와가 맡았다.
한편, 영국 내에서는 식민지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반다는 1960년 4월 감옥에서 풀려났으며, 석방 직후 말라위의 독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으로 초청받았다.
3. 3. 독립과 총리 취임 (1964년)
한편, 탈식민화의 흐름 속에서 영국의 분위기는 식민지를 포기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반다는 1960년 4월 감옥에서 석방되었고, 거의 즉시 말라위의 독립을 논의하기 위한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으로 초청받았다. 1961년 8월 선거가 치러졌고, 반다는 니아살란드의 토지, 천연자원 및 지방 정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실상 정부 수반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963년 2월 1일 공식적으로 니아살란드의 총리로 취임했다.총리 취임 후 반다와 말라위 의회당(MCP) 소속 각료들은 중등 교육 확대, 토착 법정 개혁, 식민지 시대의 농업 관련 규제 철폐 등 여러 개혁 조치를 신속하게 추진했다. 1962년 12월, 아프리카 문제 담당 영국 국무장관 R. A. 버틀러는 중앙아프리카 연방의 해체에 최종적으로 동의했다.
반다는 옛 프랑스 지도에 표기된 '마라비 호'(Lake Maravi)라는 이름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국가의 이름으로 '말라위'를 직접 선택했다.[29] 1964년 7월 6일, 반다가 니아살란드로 귀국한 지 정확히 6년 만에 니아살란드는 영연방 내 독립 국가인 말라위로 국명을 변경하고 독립을 선언했으며, 반다는 초대 총리가 되었다.
4. 말라위 대통령 (1966년 ~ 1994년)
말라위는 1966년 7월 6일 공화국을 선포하고 새로운 헌법을 채택했으며, 헤이스팅스 반다는 단독 후보로 출마하여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새 헌법은 반다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말라위 의회당(MCP)을 유일 합법 정당으로 규정하여 사실상의 일당 독재 체제를 법적으로 공고히 했다. 1971년, 의회는 반다를 종신 대통령으로 공식 선언했다.[26] 그의 공식 칭호는 "말라위 공화국 종신 대통령 폐하, 응와지(Ngwazi) 박사 H. 카마주 반다"였으며, '응와지'는 체와어로 "구원자" 또는 "정복자"를 의미한다.
반다는 영국식 쓰리피스 수트와 손수건, 지팡이, 파리채 등을 사용하는 독특한 모습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매우 엄격한 권위주의 통치를 시행했다. 그는 "내가 말하는 것은 법이다... 문자 그대로 법이다."[11]라고 공언하며 절대 권력을 행사했고,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을 자행했다. 1983년에는 다당제를 지지했던 각료들이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므완자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30]
외교적으로는 확고한 반공주의 노선을 걸으며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지지했고,[34] 초기에는 공산권 국가와의 수교를 거부했다.[31] (1980년대 들어 북한,[32] 루마니아, 알바니아[33]와 수교했다.) 특히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유지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유일하게 공식 외교 관계를 맺어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의 비판을 받았다.[35] 또한 모잠비크 내전에서는 모잠비크 해방전선(FRELIMO) 정부와 반군 모잠비크 내셔널 저항군(RENAMO) 양측을 지원하는 복잡한 외교를 펼쳤다.[39][40]
냉전 종식 이후 서방 국가들과 국제기구의 민주화 압력이 거세지고 국내에서도 민주화 요구가 높아지자,[39] 반다는 결국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1993년 6월 투표 결과, 압도적인 표차로 다당제 도입이 결정되었다.[39][41] 이후 1994년 실시된 최초의 다당제 대통령 선거에서 반다는 바킬리 물루지[26]에게 패배했다. 그는 즉시 패배를 인정하고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며, 30년간 이어진 그의 통치 시대는 막을 내렸다.[42] 그가 이끌었던 말라위 의회당은 이후에도 주요 정당으로 활동하고 있다.[43]
4. 1. 일당 독재 체제 구축
1964년 내각 위기에서 나타났듯이 헤이스팅스 반다는 독립 초기부터 독재적 성향을 보였다. 자신에게 권력 제한을 제안한 장관들을 해임했으며, 이에 동조한 다른 장관들도 사임하고 반대파들은 국외로 망명해야 했다.[26]1966년 말라위가 공화국이 되면서 반다는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어 1970년 말라위 의회당(MCP) 전당대회에서 종신 대통령으로 추대되었고, 1971년 의회는 이를 공식화하여 일당 독재 체제를 확립했다.
반다의 통치 하에서 말라위는 권위주의적인 국가가 되었다. 그는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며, 최소 3.2억달러에 달하는 개인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재판 없이 투옥하는 등 인권을 탄압했다.
국제적으로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유지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국교를 맺고 지원을 받은 소수의 아프리카 지도자 중 하나였다. 당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과의 외교 관계는 다른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불명예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서구권에서는 반다 정권을 모잠비크나 탄자니아 같은 사회주의 성향의 주변국에 대한 방파제로 간주하여 그의 독재를 암묵적으로 용인했다는 평가가 있다.
사회적으로는 극히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다. 1990년대 초까지 텔레비전 방송을 금지했으며, 1968년부터 1993년까지는 국민들의 복장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여성은 바지를 입을 수 없었고, 남성이 머리를 기르는 것은 반체제적인 행위로 간주되어 강제로 머리를 깎였다. 이러한 복장 규정은 외국인에게도 적용되었다.
4. 2. 내각 위기 (1964년)
말라위는 독립 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1964년 내각 위기를 겪었다. 이는 헤이스팅스 반다가 이미 보여주던 독재적 성향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반다 내각의 여러 장관들은 그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제안을 제출하며 견제를 시도했다.[26]그러나 반다는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제안에 참여한 장관 네 명을 해임하는 강경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에 다른 장관들도 동조하며 항의의 표시로 사임했다.[26] 결국 반다에게 반대했던 세력들은 국내에서 입지를 잃고 나라를 떠나야 했다. 이 사건을 통해 반다는 초기부터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세력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이는 이후 이어질 장기 집권과 권위주의 통치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4. 3. 므완자 사건 (1983년)
1983년, 반다는 말라위 내에서 다당제 도입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제안했다. 그러나 각료회의에서 딕 마텐제(Dick Matenje), 트와이부 상갈라(Twaibu Sangala), 아론 가다마(Aaron Gadama) 세 명의 장관이 공개적으로 다당제를 지지하며 반다의 종신 대통령직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격분한 반다는 즉시 내각을 해산하고 국회를 소집했다. 국회 회의가 끝난 후, 회의에 참석했던 모든 이들은 사실상 정치적 지위를 박탈당했다.이후 세 장관은 조사를 명목으로 좀바의 국회 의사당으로 연행되었다. 데이비드 치왕가(David Chiwanga) 국회의원 역시 그들이 고문당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면서 함께 입막음을 당했다. 결국 네 사람은 마텐제 장관의 푸조 604 차량에 실려 블랜타이어 서쪽 므완자 지구의 탐바니 지역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교통사고로 위장된 살해를 당했다.
정부는 이들이 인접한 모잠비크로 탈출하려다 차가 전복되어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나중에 이들의 머리에 텐트 핀이 박혀 살해된 사실이 드러났다.[30] 반다는 시신을 야간에 매장하도록 지시했으며, 유족들이 관을 열어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 사건은 반다 정권의 억압적인 통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4. 4. 외교 정책



반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말라위는 냉전 시기 확고한 반공주의 노선을 견지하며 서방 세계를 지지했다. 초기에는 동유럽이나 아시아의 어떤 공산주의 국가와도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다.[31]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정책 변화가 나타나, 1982년에는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과 수교했고,[32] 1985년에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루마니아, 엔베르 호자의 알바니아와도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33] 반다는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지지한 몇 안 되는 아프리카 지도자 중 한 명이었는데, 이는 그의 강력한 반공 성향 때문이었다.[34]
반다의 외교 정책 중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하던 남아공과의 관계였다. 당시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경제적 필요 때문에 남아공과 교역했지만, 말라위는 남아공을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완전한 외교 관계를 수립한 유일한 아프리카 국가였다. 여기에는 다른 아프리카 지도자들을 격분시킨 무역 조약도 포함되었다.[35] 이로 인해 아프리카 통일 기구(OAU) 회원국들은 반다가 물러날 때까지 말라위를 기구에서 추방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35] 이에 반다는 의회 연설에서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을 위선적이라고 비판하며, 그들이 아파르트헤이트의 불필요성을 남아공 정부에 설득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아프리카의 해방자로서 위장하면서 단결이 아닌 분열을 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35]
말라위가 남아공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 배경에는 영국과의 관계 악화와 반다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반다는 영국 정부가 카리바 댐보다 큰 규모의 바눌라 수력 발전 댐 건설 제안을 거부하고, 그의 고향 지역인 릴롱궤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려는 계획에 대한 자금 지원을 거부하자 남아공으로 눈을 돌렸다.[36] 남아공은 지역 내 영향력 확대를 위해 반다에게 3억남아프리카 공화국 랜드의 저리 대출을 제공했다. 그 대가로 반다는 다른 아프리카 지도자들 사이에서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옹호해야 했다. 그는 남아공을 국빈 방문하여 스텔렌보쉬에서 관리들과 회담하기도 했으며, "남아공과 말라위 사이의 이러한 접촉만이 백인 외에도 문명화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당신의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37] 그의 확고한 반공주의 역시 남아공과의 우호 관계를 추구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38]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되고 1990년대 아프리카 민족회의 (ANC)가 남아공 정치를 주도하게 되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퍼시 카치판데를 포함한 말라위 외교 사절단의 노력으로 양국 정부 간 회의가 성사되었고, 1990년대 초 넬슨 만델라가 ANC 대표 자격으로 말라위를 처음 공식 방문하여 존 템보와 반다 대통령을 만났다. 이 과정에서 반다가 아파르트헤이트 시기 동안 비밀리에 ANC를 지원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양국 관계는 우호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37]
모잠비크와의 관계에서도 반다는 복잡한 행보를 보였다. 포르투갈 식민 통치 시기에는 포르투갈 식민 정부와 그들을 위해 활동하는 게릴라 부대를 지원했다.[39] 말라위 독립 후에는 1964년 조르제 자르딤을 말라위의 모잠비크 명예 영사로 임명하며 포르투갈과의 관계를 강화했고, 말라위 내 모잠비크 해방전선(FRELIMO) 부대에 대항하여 포르투갈 식민군을 계속 지원했다.[39] 이는 OAU가 말라위를 모잠비크 독립 운동 지원 전선 국가 중 하나로 지정한 것과는 상반되는 행보였다.[39]
1980년대 모잠비크 내전 중에는 더욱 이중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1975년 독립한 FRELIMO 정부를 지원하여 말라위의 이익(특히 나칼라 항구 접근권)을 보호하기 위해 1987년부터 말라위 군대를 파견하는 한편(1984년 사모라 마셸 대통령과 합의),[39] 동시에 말라위 청년 개척단(MYP)을 이용하여 FRELIMO 정부와 싸우는 모잠비크 내셔널 저항군(RENAMO)을 비밀리에 지원하고 남아공의 원조를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39][40] 이러한 이중 지원은 주변국 지도자들(마셸, 로버트 무가베, 케네스 카운다, 조아킴 치사누)의 항의를 받았지만, 반다는 나칼라 항구에 대한 접근권을 유지하기 위해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다.[39] 이 과정에서 RENAMO와 연루된 MYP 구성원들과 말라위 정규군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39]
4. 5. 국내 정책
헤이스팅스 반다 정권 하에서 모든 성인 시민은 말라위 의회당(MCP) 당원이 되어야 했으며, 당원증을 항상 소지하고 경찰의 불시 검문에 제시해야 했다. 이 당원증은 종종 반다의 악명 높은 준군사 조직인 말라위 젊은 개척자들(Malawi Young Pioneers, MYP)에 의해 판매되었는데, 심지어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당원증까지 판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MYP는 무기를 소지하고 대중을 위협하고 괴롭혔으며, 스파이 활동과 정보 작전을 수행하고 반다의 경호원 역할을 했다.[46] 이들은 반다 통치 기간 동안 만연했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46]반다는 강력한 개인숭배의 대상이었다.[20] 모든 사업장 건물에는 그의 공식 사진을 걸어야 했고, 어떤 포스터나 그림도 그의 초상화보다 높이 걸 수 없었다. 영화 상영 전에는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반다가 손을 흔드는 영상이 의무적으로 상영되었다. 반다가 특정 도시를 방문할 때는 여성 대표단이 공항에서 전통 춤으로 그를 맞이해야 했으며, 이때 대통령의 사진이 인쇄된 특별한 천으로 만든 의상을 입어야 했다. 종교 활동도 통제되어, 예배당 운영 허가를 정부로부터 받아야 했고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일부 종교는 활동이 전면 금지되었다.
언론과 문화에 대한 통제 역시 매우 엄격했다. 모든 영화는 상영 전 말라위 검열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노출 장면이나 사회적,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이 삭제되었으며, 심지어 키스 장면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비디오테이프와 서적 또한 검열 대상이었고, ''뉴스위크(Newsweek)''나 ''타임'' 같은 외국 잡지는 일부 내용이 잘려나간 채 판매되었다. 공산주의 문헌, 에로틱 잡지,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의 여행 안내서 등은 금서로 지정되었다.[47] 단 하나의 라디오 방송국, 일간 신문, 주간 신문만 존재했으며 이마저도 정부의 엄격한 통제 하에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다. 반다는 텔레비전 방송 도입을 거부했으나,[48] 부유층은 VCR 모니터로 TV 수상기를 구입하기도 했다.[49] 반다 집권 이전의 역사에 대한 지식은 억압되었고 관련 서적 다수가 소각되었다. 또한, 북부의 특정 부족(특히 툼부카족)을 박해하여 그들의 언어와 서적을 금지하고 해당 부족 출신 교사를 추방하는 등 차별 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규정을 위반한 외국인은 추방 조치되었다.[50]
반다 정부는 국민의 일상생활까지 세세하게 통제했다. 집권 초기에 그는 자신의 사회적 보수주의에 기반한 복장 규정을 도입했다. 여성은 속이 비치거나 노출이 심한 옷, 바지를 입을 수 없었으며, 치마나 드레스는 반드시 무릎을 덮어야 했다.[20] 다만 휴양지나 컨트리클럽 등 일반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는 장소에서는 예외가 허용되었다. 반다는 이것이 여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과 존엄성을 심어주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남성의 머리카락은 옷깃 아래로 내려올 수 없었으며, 공공장소에서 긴 머리를 한 남성은 경찰에 체포되어 강제로 이발을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복장 규정은 말라위에 입국하는 외국인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1970년대 비자 발급 안내에는 여성 승객의 짧은 드레스나 바지 정장 착용 금지, 남성의 긴 머리와 나팔바지 금지 등의 규정이 명시되어 있었다.[51]
한편, 반다는 말라위 여성들의 권익 향상과 사회 참여 증진을 목적으로 '치투쿠코 차 아마이(Chitukuko Cha Amai m'Malawinya, CCAM)'라는 기구를 설립했다. 이 기구는 여성의 교육 기회 확대와 정부 내 역할 증진, 지역사회 및 가정에서의 적극적인 활동을 장려했다. 국가 고문은 반다의 공식 여주인(official hostess)이었던 세실리아 타만다 카자미라가 맡았다.
경제적으로 반다는 1964년부터 로스토우의 발전 단계 모델에 기반한 수입 대체 산업화(ISI)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말라위의 자급자족 달성과 식민 모국에 대한 의존도 감소, 자체 상품 생산 능력 확보를 목표로 했다. 개발 정책(DEVPOLs) 문서를 통해 인프라 개발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으며, 주요 자금원은 농산물 수출 증대와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해 설립된 정부 소유 기업인 농업개발 및 마케팅 공사(ADMARC)였다. ADMARC는 공공 및 민간 부문의 경제 개발 자금 조달 권한을 가졌으나, 실제로는 소규모 농가로부터 얻은 자원을 지배 엘리트 소유의 대규모 농장으로 전용하는 데 관여하며 부패와 비효율 문제를 드러냈다.
대규모 도로 건설 사업이 진행되었고, 수도를 좀바에서 릴롱궤로 이전하는 결정(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에 따라 새로운 도로망이 구축되었다. 수도 이전 및 개발은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자금 지원과 계획 하에 수도 개발 공사(CCDC)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 외에도 말라위 호텔 유한회사, 말라위 개발 공사(MDC), 반다 개인 소유의 프레스 코퍼레이션 유한회사, MYP 산하의 스피어헤드 코퍼레이션 등이 1970년대 중후반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이후 시작된 세계 경제 위기와 함께 1979-1980년경 한계에 부딪혔다. 유가 급등과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은 고립된 내륙국 말라위의 취약한 ISI 기반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경제 정책은 점차 신흥 중산층의 소비 욕구를 충족시켜 잠재적 불만을 완화하려는 정치적 도구로 변질되었다.
교육 분야에서 반다는 영국 이튼 스쿨을 모델로 한 엘리트 기숙학교인 카무주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이 학교에서는 외국인 교사들이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쳤으며, 학생들은 모국어인 치체와어 사용 시 처벌을 받았다.[52] 졸업생 다수가 국내외 의학, 학계, 재계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반다는 이 학교에 대해 "내 아들딸들이 나처럼 교육을 받기 위해 해외로 갈 필요가 없기를 바랐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 학교 설립에 국가 교육 예산의 상당 부분을 투입했다는 비판[53]과 함께, 대다수 국민(약 80%)이 거주하는 농촌 지역의 교육 및 복지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는 지적이 있다. 국가 농촌 개발 프로그램과 농촌 성장 센터 같은 정책은 도시로의 인구 유출을 막기 위한 시도였으나, 이미 심화된 도농 격차를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냉전 종식과 함께 외부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이 개입하여 1987년부터 일련의 구조 조정 프로그램[54]을 시행하게 되었다.
4. 6. 민주화와 퇴진 (1994년)
냉전 종식은 반다의 노골적인 독재 정권에 종말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방 국가들과 국제 원조 기관들은 더 이상 제3세계의 권위주의적 반공 정권에 가치를 두지 않았고, 모든 정권에 민주화를 요구하는 압력을 가했다. 특히 원조 기관들은 반다에게 정부 투명성 확보와 책임성 강화를 위한 개혁을 요구하며 이를 추가 원조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영국 정부 역시 재정 지원을 중단했다.[39] 1992년 3월, 말라위의 가톨릭 주교들은 사순절 목양 서한을 통해 반다와 그의 정부를 비판했다. 이에 말라위 대학교 학생들은 주교들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고, 당국은 결국 캠퍼스를 폐쇄했다.
1992년 4월, 노동조합 지도자 차쿠프와 치하나는 공개적으로 정치 개혁을 위한 국민투표를 요구했으나,[39] 연설 직후 체포되었다.[39] 그러나 국내외의 거센 압력으로 반다는 결국 1992년 10월, 일당제 유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실시에 동의했다. 1993년 6월 14일에 실시된 국민투표 결과,[46] 64%의 압도적인 지지로 다당제 민주주의 도입이 결정되었다.[39][41]
국민투표 이후, 말라위 의회당(MCP) 외의 정당들이 합법적으로 결성되었고 총선 준비가 시작되었다. 반다는 새롭게 등장한 정당 및 교회와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특별 의회에서 그의 종신 대통령 칭호와 대부분의 권력을 박탈했을 때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39] 아프리카에서 가장 억압적인 정권 중 하나로 평가받던 말라위의 민주주의 전환은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되었다.[46]
정치적 전환기인 1993년 12월에는 브웨자니 작전이 실행되었다. 이는 말라위군이 반다의 사병 조직이자 개인 경호대 역할을 했던 말라위 청년 선구자단(MYP)을 무장 해제시킨 작전이었다. '브웨자니'는 "돌려주다"라는 의미를 지닌다.[46] MYP는 전국적인 정보망을 갖추고 있었으며, 모든 단원이 카무주주의와 군사 훈련을 받았다.[39] 군대는 국민들의 시위와 지지에 힘입어 MYP 해체 작전을 실행할 수 있었다.[39]
건강 악화설에도 불구하고 반다는 1994년 말라위 최초의 다당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그는 남부 지역 와야오족 출신인 바킬리 물루지[26]에게 큰 표 차이로 패배했다. 반다는 국영 라디오를 통해 패배를 신속하게 인정하며 물루지에게 전적인 지지와 협력을 약속했고, 이로써 말라위의 30년간 이어진 일당 독재 시대는 막을 내렸다.[42]
반다가 1960년 오턴 치르와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아 이끌었던 말라위 의회당은 그의 퇴진 이후에도 말라위 정치에서 주요 정당으로 계속 활동하고 있다.[43]
5. 퇴임 이후와 죽음
1995년, 헤이스팅스 반다는 10년 전 내각 동료들을 살해한 혐의(므완자 사건)로 체포되어 기소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26] 그는 퇴임 후에도 말라위 국민들을 "정치에 있어서는 아이들"이라고 칭하며 자신의 강권 통치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등, 과거 자신의 통치 방식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44]
므완자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직후인 1996년 1월 4일, 반다 명의로 말라위 국민들에게 사과 성명이 발표되었다.[45] 그러나 이 성명은 진정성에 대한 논란과 의혹을 낳았으며, 반다가 직접 작성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45] 성명서의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부 시스템은 역동적이며, 국민의 희망과 열망에 따라 변화하게 마련입니다… 제 임기 동안 저는 빈곤, 무지, 질병과 같은 많은 문제들과의 싸움에서 모국 말라위의 훌륭한 대의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제 정부에서 일했거나, 제 이름을 사칭하거나, 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이 나라의 누군가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또한 우리 모두에게 화해와 용서의 정신을 호소합니다… 우리 아름다운 나라는 '아프리카의 따뜻한 심장'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우리는 따뜻함과 성실한 근면 정신으로 존경받았습니다. 이러한 존경심은 우리가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교훈을 얻어야 할 필요성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재건과 화해를 위해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더 큰 필요성이 있습니다.[45]
반다는 수년간 심부전으로 고통받았다. 1997년 블랜타이어의 퀸 엘리자베스 병원에 입원했다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이송되었고, 1997년 11월 25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12월 3일 국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여러 아프리카 국가 정상들이 참석했다.[58][59] 그의 유해는 말라위로 돌아와 수도 릴롱궤에 있는 묘소에 안장되었다.

6. 유산과 평가
헤이스팅스 반다의 통치는 억압적인 독재와 일부 사회 기반 시설 구축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1970년부터 시작된 말라위 의회당(MCP)의 일당제 독재 하에서 그는 최소 3.2억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재산을 개인적으로 축적했으며[1][2], 20만 명이 넘는 국민을 재판 없이 투옥하는 등 심각한 인권 탄압을 자행했다.[3]
외교적으로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시행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은 몇 안 되는 아프리카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이 관계를 통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았으나[4], 이는 당시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비판받는 행보였다. 일부에서는 서구 국가들이 모잠비크나 탄자니아 같은 사회주의 성향의 주변국들에 대한 견제 역할 때문에 반다의 독재 정권을 암묵적으로 용인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5]
반다는 사회 전반에 걸쳐 강력한 통제를 가했다. 1968년부터 1993년까지 국민의 복장을 엄격하게 규제했다. 여성에게는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치마 착용을 강제하고 바지 착용을 금지했으며, 이러한 복장 규제는 외국인에게도 적용되었다.[6] 긴 머리카락을 한 남성은 반체제 인사로 간주되어 강제로 머리를 잘렸다.[7] 또한, 1990년대 초까지 텔레비전 방송을 허용하지 않았으며[8], 개인적인 이유로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엘리노어 리그비"를 라디오에서 금지하기도 했다.[9]
이러한 권위주의적 통치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부분도 있다. 영국의 명문 이튼 칼리지를 본떠 카숭구 지역에 중등 교육 기관인 캄즈 아카데미를 설립한 것을 들 수 있다. 이 학교에서는 외국인 교사들이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 등을 가르쳤다.[10]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반다의 통치는 국내외적으로 큰 도전에 직면했다. 1991년 영국 정부는 더 이상 그의 압제를 용인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며[11], 1992년에는 말라위 가톨릭 교회가 공개적으로 비판에 나섰고[12]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하는 등 정당 결성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13] 결국 1993년 다당제 도입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고[14], 1994년 치러진 최초의 민주적인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말라위 통합 민주 전선(UDF)의 바키리 무루지에게 큰 표 차이로 패배하며 30년간의 집권을 마감했다.[15][16]
반다는 1997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17] 그가 설립한 말라위 의회당(MCP)은 그의 실각과 사망 이후에도 말라위 정치에서 주요 정당으로서 계속 활동하고 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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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말라위의 옛 이름, 당시 영국령 니아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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