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모 케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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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모 케냐타는 키쿠유족 출신으로, 영국령 동아프리카에서 태어났으며 케냐의 독립 운동을 이끌고 초대 총리 및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1920년대부터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영국 유학 및 소련 유학을 거쳐, 키쿠유족의 토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1963년 케냐 독립 후 초대 총리가 되었고, 1964년 공화국 선포와 함께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친서방 정책과 경제 발전을 추진했다. 그는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로서 널리 존경받았지만, 권위주의적 통치와 부패, 특정 민족 우대 정책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케냐타는 1978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우후루 케냐타는 케냐의 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키쿠유족 출신으로, 본명은 '''카마우 와 응겡기'''(Kamau wa Ngengisw)이다. 영국령 동아프리카 가툰두 인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전통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스코틀랜드 선교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기독교로 개종하고 존스톤 카마우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여러 직업을 거치며 독학으로 교양을 쌓았다.
2. 생애
1924년 키쿠유 중앙 협회(KCA)에 가입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1928년에는 키쿠유족 토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며 협회 신문 편집에도 참여했다. 1929년과 1931년, KCA 대표로 런던에 파견되어 키쿠유족의 권익을 위한 로비 활동을 벌였다. 영국 체류 기간 동안 버밍엄의 우드브룩 퀘이커 칼리지, 잠시 모스크바의 동방 임금노동자 대학교(KUTVU), 이후 런던 대학교와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수학하며 브로니스와프 말리노프스키에게 사회 인류학을 배웠다. 1938년에는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키쿠유족 사회를 분석한 명저 《케냐 산을 향하며》(Facing Mount Kenya영어)를 출판하며 '조모 케냐타'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범아프리카주의 운동가들과 교류하며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1946년 케냐로 귀국하여 교사로 잠시 일하다가, 1947년 케냐 아프리카인 연합(KAU) 회장으로 선출되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1952년 마우마우의 난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7년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수감 및 유배 생활을 했다.[5][6] 마우 마우 폭동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7], 그의 수감은 오히려 케냐 민족주의 운동의 상징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1년 석방된 케냐타는 케냐 아프리카 민족 동맹(KANU)의 총재가 되어 독립 협상을 주도했다. 1963년 5월 총선에서 KANU가 압승하면서 케냐는 자치 정부를 수립했고, 케냐타는 초대 총리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케냐가 완전한 독립을 이루자 그는 초대 총리로서 국가를 이끌었다. 1964년 케냐가 공화국으로 전환되면서 그는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사망할 때까지 집권했다.
대통령으로서 케냐타는 친서방 노선과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유지하며 적극적인 외자 유치를 통해 경제 발전을 이끌었고, 케냐를 동아프리카의 주요 국가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케냐 아프리카 민족 동맹(KANU) 중심의 일당제를 구축하고 권위주의적 통치를 행했으며, 자신의 출신 부족인 키쿠유족을 우대하는 정책으로 민족 갈등의 씨앗을 남겼다는 비판도 받는다.
케냐의 건국의 아버지로서 국민들에게 '므제'(Mzee, 스와힐리어로 '현명한 어르신' 또는 '할아버지'라는 뜻)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존경받았다. 그의 초상은 오랫동안 케냐 실링 지폐에 사용되었으며, 나이로비의 주요 국제공항인 조모 케냐타 국제공항 등 많은 시설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케냐타는 여러 번 결혼하여 다수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부인 자녀 비고 그레이스 와후 (en) 피터 무이가이 케냐타 (1920년생, 부장관 역임)
마거릿 케냐타 (1928년생, 나이로비 시장 역임)첫 번째 부인 (1919년경 결혼, 2007년 사망) 에드나 클라크 (en) 피터 마가나 케냐타 (1943년생) 두 번째 부인 (영국인, 1942년 결혼, 1946년 이혼) 그레이스 완지쿠 (en) 제인 왐부이 (1950년생) 세 번째 부인 (1946년 결혼, 1950년 해산 중 사망) 은기나 케냐타 (en, 마마 은기나) 크리스틴 왐부이 (1952년생)
우후루 케냐타 (1963년생, 케냐 4대 대통령)
애너 니요카비
무호호 케냐타 (1964년생)네 번째 부인 (1951년 결혼), 케냐의 초대 영부인
1978년 8월 22일 몸바사에서 사망하였고, 같은 달 31일 나이로비의 국회의사당 부지 내 영묘에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줄리어스 니에레레 탄자니아 대통령, 케네스 카운다 잠비아 대통령, 이디 아민 우간다 대통령 등 아프리카 주요 국가 정상들이 참석했다.[8] 그의 네 번째 부인 은기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우후루 케냐타는 훗날 케냐의 4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키쿠유족 출신인 조모 케냐타는 원래 '''카마우 와 응겡기'''(Kamau wa Ngengisw)라는 이름으로 영국령 동아프리카 가툰두(Gatundu) 근처 응겐다(Ngenda)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키쿠유족 사이에서는 출생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정확한 출생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 전기 작가는 1890년대 초반으로 추정하지만, 보다 상세한 연구에 따르면 1897년 또는 1898년경일 가능성이 높다. 그의 아버지는 무이가이(Muigai)였고 어머니는 왐부이(Wambui)였으며, 티리리카 강(River Thiririka) 근처 농장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살았다. 아버지는 여러 아내를 둘 만큼 부유했다.
케냐타는 전통적인 키쿠유 관습과 신앙 속에서 자랐으며, 가축 돌보는 법을 배웠다. 10살 무렵에는 어린 시절을 벗어났음을 알리는 의미로 귓불을 뚫었다. 아버지가 사망하기 직전 어머니 왐부이는 남동생 콩고(Kongo)를 낳았다. 키쿠유족 전통에 따라 왐부이는 남편의 남동생인 응겐기(Ngengi)와 재혼했고, 케냐타는 '응겐기의 아들 카마우'라는 뜻의 카마우 와 응겐기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왐부이는 새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무이가이를 낳았으나, 남편과의 갈등으로 막내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케냐타는 이복동생 무이가이를 데려와 할아버지 콩고 와 마가나(Kongo wa Magana)와 함께 살았으며, 주술사이자 전통 치료사인 할아버지를 도왔다.
1909년 11월, 케냐타는 집을 떠나 토고토(Thogoto)에 있는 스코틀랜드 교회(Church of Scotland) 선교부(CSM) 학교에 입학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 전파를 영국의 문명화 사명의 일부로 여겼다. 케냐타는 기숙사에 머물며 성경 이야기를 배우고 영어 읽기와 쓰기를 익혔으며, 설거지나 잡초 제거 같은 잡일도 했다. 그의 형제 콩고도 곧 합류했다. 학생들이 오래 머물수록 많은 영국 선교사들이 그들을 후원하는 방식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케냐타의 학업 성적은 평범했으며, 1912년 7월에는 선교부 목수 견습생이 되었다. 같은 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고 교리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13년에는 키쿠유족의 전통적인 할례 의식을 치렀다. 이는 선교사들이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키쿠유 사회에서 성인으로 인정받기 위한 중요한 통과 의례였다. 세례명을 정할 때 그는 예수의 제자인 피터(Peter)와 존(John)을 모두 골랐으나 하나만 선택하라는 요구에 피터를 가리키는 '-stone'을 붙여 존스톤(Johnstone)으로 정했다. 1914년 8월, 그는 존스톤 카마우(Johnstone Kamau)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 후 선교부 기숙사를 나와 친구들과 지냈다. 목수 견습 과정을 마친 후 석공 견습생이 되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사소한 부정직 혐의로 선교부로부터 취업 추천도 받지 못했다.
케냐타는 티카(Thika)로 이주하여 영국인 존 쿡(John Cook)이 운영하는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일했다. 약 40km 떨어진 나이로비의 은행에서 회사 임금을 찾아오는 일을 맡았다. 심한 병에 걸려 일을 그만두고 투무투무(Tumutumu) 장로교 선교부의 친구 집에서 요양했다. 당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영국군은 많은 키쿠유족을 징집했지만, 케냐타는 입대하지 않았다. 대신 영국을 위해 싸우기를 거부한 마사이족 친척들이 사는 나록(Narok)으로 갔다. 그는 마사이족 추장과 결혼한 이모 가족과 함께 살면서 마사이족의 관습과 장신구를 받아들였는데, 특히 키쿠유어로 '키냐타(Kinyata)'라고 불리는 구슬 벨트를 착용하기 시작하면서 스스로를 '케냐타'라고 부르게 되었다.
1917년 나록으로 이주하여 가축 운송 일을 하다가, 이후 나이로비로 옮겨 농업 및 엔지니어링 장비를 판매하는 상점에서 일하며 저녁에는 교회 선교 학교 수업을 들었다. 몇 달 후 다시 티카로 돌아갔다가 토고토 선교부에서 주택 건설 일을 했다. 다고레티(Dagoretti)에서 잠시 살며 현지 부족장 키오이(Kioi)의 집사 역할을 했고, 1919년에는 나이로비 법정에서 키오이의 토지 분쟁 소송을 돕기도 했다.
이 무렵 카베테(Kabete)의 CMS 학교를 다녔던 그레이스 와후(Grace Wahu)와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처음 케냐타의 가족 농가로 갔으나, 그의 계부 응겐기에 의해 쫓겨나 다고레티에서 케냐타와 함께 살았다. 1920년 11월 20일, 아들 피터 무이가이(Peter Muigai)가 태어났다. 1920년 10월, 케냐타는 음주와 와후와의 관계로 인해 토고타 교회 회의에 소환되어 성찬 참여가 중지되었다. 교회는 전통 키쿠유식 결혼이 아닌 기독교식 결혼을 요구했고, 1922년 11월 8일 두 사람은 기독교식으로 결혼했다. 케냐타는 처음에는 금주를 거부했으나 1923년 7월 공식적으로 술을 끊고 다시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1922년 4월, 케냐타는 나이로비 시의회의 수도국장으로 임명된 쿡을 위해 창고 직원이자 계량기 검침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동아프리카 실링 250실링(파운드 스털링 12파운드 10실링)의 월급을 받았는데, 이는 아프리카 원주민에게는 특히 높은 급여였으며, 이로 인해 그는 재정적 독립과 자존감을 키울 수 있었다. 케냐타는 나이로비의 킬리마니 지역에 살았지만, 다고레티에 두 번째 집을 짓는 자금을 지원했다. 그는 이 마지막 오두막을 키냐타 상점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가 이웃 사람들을 위해 일반적인 물품을 보관하기 위해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무실의 유럽인 직원들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자금을 가지고 있었고, 영화관, 축구 경기, 수입된 영국식 유행 등 나이로비가 제공하는 생활 방식을 즐길 수 있었다.
2. 2. 초기 정치 활동과 해외 경험
어린 시절 미션 스쿨에서 교육받은 케냐타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영국군 징집을 피해 마사이족 거주지로 이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마사이족 추장과 결혼한 이모 가족과 함께 살며 마사이족 문화를 받아들였고, 구슬 벨트를 착용했는데, 이는 키쿠유어로 "키냐타"라고 불렸다. 이 시기부터 그는 자신을 "케냐타"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전후 그는 티카에서 엔지니어링 회사 직원(나이로비까지 약 40km 거리를 오가며 회사 임금을 운반하는 업무 포함), 나록에서 가축 운송업, 나이로비에서 상점 점원 및 야간 학교 수강 등 다양한 일을 경험했다. 다고레티에서는 부족장 키오이의 집사로 일하며 토지 분쟁 소송을 돕기도 했다. 1919년경 카베테 CMS 학교 출신 그레이스 와후와 관계를 맺어 1920년 아들 피터 무이구이를 낳았다. 그는 키쿠유 전통 방식으로 결혼했으나, 교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기독교식 결혼을 요구하여 1922년 11월에야 정식으로 결혼했다. 음주 문제 등으로 교회와 갈등을 겪기도 했으나, 1923년 금주를 선언하고 성찬 참여를 허락받았다.
1922년 4월, 케냐타는 나이로비 시의회 수도국에서 창고 직원 및 계량기 검침원으로 일하며 당시 아프리카 원주민으로서는 상당히 높은 월급인 250KES(£12 10실링)를 받아 재정적 독립을 이루었다. 그는 나이로비 킬리마니에 거주하며 다고레티에 두 번째 집을 짓고 "키냐타 상점"이라는 이름의 식료품점을 운영했는데, 이곳은 점차 민족 운동가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아일랜드 독립 전쟁과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으로 케냐 내 반제국주의 정서가 고조되던 시기,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kipande|키판데sw 신분증 의무 소지, 커피 재배 금지, 정치적 대표 없는 과세 등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해리 투쿠의 동아프리카 협회 활동과 1922년 시위대 학살 사건 등이 있었으나, 케냐타는 초기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그의 정치적 관심은 키쿠유 중앙 협회(Kikuyu Central Association, KCA)의 제임스 보타와의 교류를 통해 시작되었고, 1926년경 보타의 추천으로 KCA 서기가 되어 본격적인 정치 활동에 뛰어들었다.
KCA 서기로서 케냐타는 오토바이를 타고 키쿠유랜드와 메루족, 엠부족 지역을 순회하며 KCA 지부 설립을 도왔다. 1928년 2월에는 힐튼 영 위원회 앞에서 동아프리카 연방 문제에 대해 증언했고, 6월에는 케냐 입법평의회 선택 위원회에 출석하여 에드워드 그리그 총독이 도입한 토지 위원회(키쿠유 토지를 부족 공동 소유로 규정)에 반대하는 KCA의 입장을 대변했다. 같은 해 5월, 그는 키쿠유족 통합과 KCA 기금 마련을 목적으로 창간된 키쿠유어 잡지 Mũigwithania|무이기타니아kik('화해자' 또는 '통일자'라는 뜻)의 편집자로 이름을 올렸으나, 실제 역할은 주로 번역에 국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잡지에서 교회와 식민 행정을 지지하고 영국 제국을 칭찬하는 등 신중한 태도를 보였지만, 그리그 총독은 잡지 폐간을 시도하기도 했다.
1929년 2월, KCA는 케냐타를 대표로 런던에 파견하여 키쿠유족의 토지 문제를 영국 정부에 직접 호소하도록 했다. 그리그 행정부는 이를 막지 못했지만, 식민청에 케냐타를 만나지 말라고 요청했다. 런던에서 케냐타는 서아프리카 학생 연합 건물에 머물며 라디포 솔란케를 만났고, W. 맥그리거 로스, 페너 브록웨이, 킹즐리 마틴 등 반제국주의 인사들과 교류했다. 4월에는 그리그 총독과 직접 만나 토지 문제와 투쿠 추방 문제를 제기했으나, 이후 그리그는 런던경찰청 특별지부에 케냐타 감시를 요청했다. 케냐타는 영국 노동당 좌파 및 공산주의자들과도 접촉했으며, 1929년 여름에는 베를린을 거쳐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비에트 연방 체제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귀국 후 영국 공산당 신문인 데일리 워커와 선데이 워커에 기고한 글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강하게 영국 제국주의를 비판했다. 이는 그의 자유주의 후원자들을 우려하게 만들었고, 1930년 1월 하원에서 식민지 담당 차관 드럼몬드 쉴즈를 만나 자신은 공산주의와 관련이 없다고 해명해야 했다. 자금이 떨어진 케냐타는 반노예제 국제연합의 도움으로 1930년 9월 케냐로 귀국했다.
케냐타가 해외에 있는 동안 케냐에서는 여성 성기 절제(FGM) 문제가 격렬한 논쟁거리였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식민 당국은 폐지를 주장했지만, KCA는 키쿠유 전통문화 수호를 내세우며 반대했다. 귀국한 케냐타는 KCA 서기로서 교회 대표들과 만났으나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FGM에 반대했지만, 법적 폐지는 역효과를 낳을 것이며 교육을 통한 근절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교회 수장 존 아서와의 갈등으로 교회에서 제명당했고, 1931년 아들을 KCA가 승인한 독립 학교로 전학시켰다.
1931년, 케냐타는 다시 런던으로 향했다. 그는 마하트마 간디와 면담하고, 버밍엄의 우드브룩 퀘이커 칼리지에 입학했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 공산당원 조지 패드모어의 후원으로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산하 동방 임금노동자 대학교(KUTVU)에서 잠시 경제학을 공부했으나, 패드모어가 스탈린 정권과 갈등을 빚으면서 런던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 불신감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런던으로 돌아온 케냐타는 1934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입학했고, 1935년부터는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SE)에서 저명한 문화인류학자 브로니스와프 말리노프스키에게 사회 인류학을 배웠다. 학업 중에도 키쿠유족 토지 문제 해결을 위한 로비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다. 1938년에는 LSE 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자신의 민족인 키쿠유족의 전통 사회와 문화를 분석한 저서 Facing Mount Kenya|케냐 산을 향하며영어를 출판하며 처음으로 "조모 케냐타"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이 책은 아프리카인이 유럽과 미국에서 출판한 최초의 주요 학술 저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시기 그는 C. L. R. 제임스, 에릭 윌리엄스, W. A. 월리스 존슨, 폴 로브슨, 랠프 번치 등 아프리카, 카리브해, 미국 출신 흑인 지식인 및 운동가들과 활발히 교류했으며, 1934년에는 폴 로브슨이 주연한 영화 《Sanders of the River》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케냐타는 영국 육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 서식스 주의 농장에서 일하며, 근로자 교육 협회에서 아프리카 관련 강의를 했다. 1942년에는 영국 여성 에드나 클라크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1946년 이혼했다. 15년간의 긴 해외 생활을 마치고 1946년 케냐로 귀국했다.
2. 3. 케냐 귀국과 독립운동
1946년 케냐타는 콰메 은크루마와 함께 범아프리카주의 연합을 창립하였다. 같은 해 케냐로 귀국하여 그레이스 와후(en)에 이어 그레이스 완지쿠(en)와 세 번째로 결혼하였고, 케냐 교원대학교(en)의 교장이 되었다. 1947년 6월에는 케냐 아프리카인 연합(Kenya African Union, KAU)의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이후 백인 정착민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 내에서 케냐타의 평판은 마우 마우 폭동과 그가 연루되었다는 의혹(일부에서는 꾸며낸 것으로 보기도 함)으로 인해 손상되었다. 1952년 10월, 그는 마우 마우 폭동을 조직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재판은 수개월간 진행되었으며, 변호인 측은 백인 정착민들이 케냐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며 그를 폭동과 연결할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통역으로 참여한 루이스 리키는 케냐타에게 불리한 편견을 가지고 오역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5] 케냐타의 문서에 포함된 일부 편파적인 진술들을 근거로, 1953년 4월 8일 유죄 판결이 내려졌고, 그는 7년의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고 케냐에서 추방되었다.[6] 당시에는 그가 마우 마우 폭동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으나, 후대의 연구에서는 다른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케냐타는 1959년까지 수감 생활을 했으며, 이후 케냐 북서부 외딴 지역인 로드와(Lodwar)로 이송되어 보호 관찰 하에 놓였다.
당시 케냐 총독이었던 패트릭 레니슨은 케냐가 독립하기 전에 케냐타를 석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케냐타를 미리 대중 앞에 노출시켜, 유권자들이 그를 폭력적인 극단주의자로 인식하고 투표하지 않을 가능성을 줄이려 했다. 1961년 4월, 정부는 케냐타를 마랄랄(Maralal)로 이송했고, 그는 기자회견에서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에 대해 무죄를 주장하면서도 누구에게도 원한을 품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그는 마우 마우 세력이 사용한 폭력이나 불법적인 선서 시스템을 지지한 적이 없으며,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적도 없다고 부인하며 "나는 항상 끝까지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로 남을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1961년 8월, 그는 키쿠유족 거주지인 가툰두(Gatundu)로 이송되었고, 1만 명의 군중이 그를 환영했다. 식민 정부는 과거 철거했던 그의 집 자리에 새 집을 지어주었다. 자유의 몸이 된 케냐타는 나이로비, 몸바사 등 주요 도시를 방문하며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석방 후 케냐타는 자신이 케냐의 미래를 이끌 유일한 지도자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 8월에는 키암부(Kiambu)에서 레니슨 총독과 만났고, BBC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Face to Face''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1961년 10월, 그는 공식적으로 케냐 아프리카 민족 동맹(KANU)에 가입하여 총재직을 수락했다. 1962년 1월에는 기존 의원 카리우키 니지리(en)가 사임한 후, 입법평의회에서 포트홀(Fort Hall, 현재의 무랑가) 선거구의 KANU 대표로 무투표 당선되었다.
케냐타는 아프리카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 구축에도 힘썼다. 1961년 10월에는 탕가니카, 11월에는 에티오피아를 해당 정부의 초청으로 방문했다. 당시 케냐가 직면한 주요 문제 중 하나는 소말리아와의 국경 분쟁이었다. 케냐 북동부 주에는 소말리아계 주민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고, 이 지역이 소말리아 영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냐타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해당 지역이 케냐 영토로 남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케냐 내 소말리아인들에게 "낙타를 싸서 소말리아로 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1962년 6월, 그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가디슈를 방문하여 소말리아 당국과 만났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동시에 케냐타는 백인 정착민 사회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1962년 당시 백인 소수 민족은 케냐 수출의 80%를 담당하며 경제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독립에 대한 불안감으로 1962년에서 1963년 사이 매달 700명 가량이 케냐를 떠나고 있었다. 케냐타는 이러한 백인들의 이탈이 경제에 해로운 두뇌 유출과 숙련 노동력 부족을 초래할 것을 우려했다. 또한 백인 사회의 신뢰가 서방 국가들의 투자를 확보하는 데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집권하더라도 유능한 아프리카인이 대체할 수 없는 한 백인 공무원을 해고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노력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몇몇 저명한 케냐 백인들은 이후 선거에서 KANU를 지지하기도 했다.
1962년, 케냐타는 런던에서 열린 랭커스터 하우스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KANU와 경쟁 정당인 케냐 아프리카 민주 동맹(KADU) 대표단은 영국 관리들과 함께 새로운 헌법 제정을 논의했다. KADU는 6개의 자치적인 지역 정부와 양원제 입법부, 그리고 순환 의장제를 갖춘 중앙 연방 장관회의를 골자로 하는 연방제 국가 모델(그들은 이를 ''마힘보''(sw)라고 불렀다)을 제안했다. 레니슨 총독 정부와 대부분의 백인 정착민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가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이유로 이 시스템을 선호했다. 반면 KANU는 ''마힘보'' 시스템이 기득권층에게 유리하고 케냐 전역의 평등한 기회를 저해한다고 비판하며, 선출된 단일 정부 수반을 주장했다. 케냐타는 KADU의 요구 사항 일부를 수용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집권 후 헌법을 개정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헌법은 케냐를 각각 지역 의회를 가진 6개 지역으로 나누되, 강력한 중앙 정부와 상하 양원을 두는 절충안으로 마련되었다. 또한 독립까지 임시 연립 정부를 구성하여 KANU 정치인들이 일부 장관직을 맡기로 합의했다. 케냐타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은 헌법 문제 및 경제 기획 장관직을 수락했다.
영국 정부는 레니슨 총독이 아프리카 원주민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독립 과정을 원활하게 감독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1963년 1월 맬컴 맥도널드를 새로운 케냐 총독으로 임명했다. 맥도널드와 케냐타는 깊은 우정을 쌓았으며, 맥도널드는 케냐타를 "독립 국가의 가장 현명하고, 아마도 가장 강력하며, 가장 인기 있는 잠재적 총리"라고 평가했다. 맥도널드는 독립이 지연될수록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이 급진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여 케냐의 독립 일정을 앞당겼다. 이에 따라 1963년 5월 총선거, 6월 자치 정부 수립, 그리고 1963년 12월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지도록 계획되었다.
3. 케냐의 지도자
1960년대 초, 케냐 독립 운동이 고조되면서 조모 케냐타의 석방 요구가 거세졌다. 케냐 아프리카 민족 동맹(KANU)과 케냐 아프리카 민주 동맹(KADU) 등 주요 정치 세력의 요구 끝에 1961년 8월 그는 완전히 석방되었고, 곧 KANU의 의장직을 맡으며 케냐 정치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이듬해 입법 회의에 진출했으며, 이때부터 스와힐리어로 '현명한 어르신'을 뜻하는 '음제'(mzeesw)라는 존칭으로 불렸다. 석방 직후 케냐타는 백인 정착민들에게 케냐 잔류를 호소하며 민족 간 화해를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1963년 케냐가 독립하자 초대 총리가 되었고, 1964년 공화국 체제로 전환되면서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국가 건설을 이끌었다. 초기에는 식민지 시대 관료를 유임시키는 등 정책적 연속성을 추구하며 안정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북동부 소말리인 분리주의 운동 진압 등 국내 안정을 위해 노력했으며, 이 과정에서 영국군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1964년에는 주요 야당인 KADU가 자진 해산 후 KANU에 합류하면서 케냐는 사실상의 일당제 국가가 되었다.
케냐타 정부는 백인 소유 토지를 매입하여 아프리카인에게 재분배하는 토지 개혁을 추진했으나, 이 과정에서 케냐타 자신과 측근들이 막대한 토지를 취득하여 부패 논란과 함께 그가 케냐 최대 지주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자신의 출신 부족인 키쿠유족을 다른 부족에 비해 우대한다는 비판도 통치 기간 내내 제기되었다.
외교적으로는 케냐의 유엔 가입을 성사시키고, 이웃 국가들과의 경제 협력을 도모했다. 냉전 구도 속에서 친서방 반공주의 노선을 명확히 하여 서방 국가들의 투자를 유치하는 데 기여했지만, 일각에서는 신식민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는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인정받았으나, 국내에서는 점차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으로 비판에 직면했다.
1966년 재선 이후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며 장기 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통치 아래 케냐는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는 듯 보였으나, 소말리아와의 국경 분쟁이 계속되었고 정치적 반대 의견은 강력히 억압되었다. 비밀경찰을 동원한 반체제 인사 감시와 탄압이 이루어졌으며, 피오 가마 핀토, 톰 음보야, 조시아 망와이 카리우키 등 주요 반대파 정치인들의 의문사 사건 배후로 의심받기도 했다. 1974년 선거에서는 단독 후보로 출마하여 재선되었으나, 이는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선거라는 비판을 받았다.
케냐타는 케냐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동시에, 일당 독재 강화, 정적 탄압, 부패, 부족 갈등 심화 등 민주주의 후퇴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 등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의 통치는 케냐 사회에 깊은 족적을 남겼으며, 특히 키쿠유족 중심의 권력 구조는 후계 구도에도 영향을 미쳐 그의 사후 권력 이양 과정에서 긴장을 유발하기도 했다.
나이로비의 조모 케냐타 국제공항은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나이로비에서 밤을 보내지 않고 항상 가툰두의 자택으로 돌아가는 습관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3. 1. 총리 시절 (1963-1964)
1963년 5월 총선거에서 KANU는 하원 124석 중 83석을 확보하며 승리했고, 다수당 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1963년 6월 1일, 조모 케냐타는 자치 정부의 총리로 취임했다. 당시 케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국가원수로 하는 영연방 왕국이었다. 케냐타 정부는 1963년 11월, 총리를 모욕하는 행위를 유배형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법을 제정했다. 케냐타의 개인적인 위상은 새로운 국가 건설의 핵심 요소가 되었고, 12월에는 나이로비의 델러미어 애비뉴(Delamere Avenue)가 케냐타 애비뉴(Kenyatta Avenue)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그의 동상이 케냐 국회 옆에 세워졌다. 케냐타의 사진은 상점 창문에 널리 걸렸고, 그의 얼굴은 새로 발행된 화폐에도 등장했다. 1964년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는 케냐타의 연설 모음집인 "Harambee!|하람베!sw"를 출판했다.
케냐의 첫 내각에는 케냐타가 속한 키쿠유족뿐만 아니라 루오족, 캄바족, 키시족, 마라고리족 등 다양한 부족 출신 인사들이 포함되었다. 1963년 6월, 케냐타는 나이로비에서 탕가니카의 줄리어스 니에레레 대통령과 우간다의 밀턴 오보테 대통령을 만나 세 나라(잔지바르 포함)를 단일 동아프리카 연방으로 통합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으며, 연말까지 이를 달성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케냐타는 사적으로 이러한 합의에 대해 더욱 주저했고, 1964년이 되어서도 연방은 성사되지 않았다. 케냐의 많은 급진적인 목소리들은 그에게 이 프로젝트를 추진할 것을 촉구했지만, 1964년 5월, 케냐타는 연방을 더욱 신속하게 추진할 것을 요구하는 의원들의 결의안을 거부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연방에 대한 논의는 항상 영국으로부터 케냐의 독립 속도를 높이기 위한 술책이었다고 말했지만, 니에레레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백인 정착민들과의 좋은 관계를 강조하면서, 1963년 8월 케냐타는 나쿠루에서 300명의 백인 농부들을 만났다. 그는 그들에게 독립된 케냐에서 그들이 안전하고 환영받을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었고, 더 광범위하게 과거의 갈등을 용서하고 잊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백인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그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도계 소수민족에게는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케냐타는 많은 토착 아프리카인들처럼 인도계 공동체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이는 많은 인도인들이 케냐의 독립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난 감정이었다. 그는 또한 남아 있는 마우 마우 투사들에게 숲을 떠나 사회에 정착할 것을 촉구했다. 케냐타 통치 내내 이러한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실직 상태에 머물렀고, 실업은 그의 정부가 직면한 가장 지속적인 문제 중 하나였다.
1963년 12월 12일 특별히 건설된 경기장에서 독립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 영국 군주제를 대표하는 에든버러 공작 필립은 공식적으로 케냐의 통치권을 케냐타에게 넘겨주었다. 마우 마우의 주요 인물들도 참석했다. 케냐타는 연설에서 이를 "케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날이자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묘사했다.
북부 국경 지구(NFD)를 둘러싼 소말리아와의 분쟁은 계속되었다. 케냐타 통치의 대부분 기간 동안 소말리아는 그의 정부에 대한 주요 위협으로 남아 있었다. 이 지역에는 소말리아계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 지역이 케냐가 아닌 소말리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말리아 '시프타'(Shifta|시프타so) 게릴라의 산발적인 폭력에 대처하기 위해 케냐타는 1963년 12월 군인들을 이 지역에 파병했고, 1964년 9월 NFD에서 체포와 압수에 대한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영국군은 이 지역에서 케냐군을 지원하도록 배치되었다.
케냐타는 또한 국내 반대에 직면했다. 1964년 1월, 군대 일부가 나이로비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케냐타는 영국군에게 반란을 진압할 것을 요청했다. 같은 달 이웃 우간다와 탕가니카에서도 유사한 무장 봉기가 발생했다. 케냐타는 이 반란에 분노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공개적으로 반란자들을 질책하고 케냐의 법과 질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추가적인 군사 불안을 방지하기 위해 그는 군대, 경찰, 교도소 직원의 급여를 검토하여 임금 인상을 이끌어냈다. 케냐타는 또한 의회의 반대를 억제하기를 원했고, 케냐타의 요청으로 1964년 11월 KADU는 공식적으로 해산되었고 그 대표들은 KANU에 합류했다. KADU의 고위 구성원 두 명인 로널드 응갈라와 다니엘 아랍 모이는 그 후 케냐타의 가장 충성스러운 지지자 중 일부가 되었다. 따라서 케냐는 사실상 일당제 국가가 되었다.
3. 2. 대통령 시절 (1964-1978)
1963년 12월 12일 케냐가 독립하면서 초대 총리가 되었고, 1년 뒤인 1964년 12월 12일 케냐가 공화국 체제로 전환하자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5] 그는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의 역할을 겸임했다. 케냐타의 정책은 연속성을 중시하여 많은 식민지 시절 공무원들을 그대로 유지했으며,[5] 법과 질서 유지에 있어서도 기존 식민 질서의 요소를 일부 유지했다. 경찰과 군대 구조도 대체로 그대로 유지되었다. 브루스 맥켄지나 험프리 슬레이드 같은 백인 케냐인들이 고위직에 남아 사법부, 공무원, 의회 등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정부는 유럽계와 아시아계 소수 민족의 이중 국적을 허용하지 않고 케냐에 대한 완전한 충성을 요구했으며,[5] 백인 전용 사교 클럽에 다인종 출입 정책을 채택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1964년에는 이전까지 유럽인 학생만 받던 학교들을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에게 개방했다.[5]
케냐타는 통합된 케냐 국가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선교사와 식민 당국이 폄하했던 토착 아프리카 문화의 존엄성을 주장하며, 토착 작가들의 작품 출판을 지원하기 위해 동아프리카 문학국을 설립하고, 토착 예술과 음악을 장려하기 위해 케냐 문화 센터를 지원했다.[5] 또한, 역사적 및 문화적 기념물 보존을 지원하고 식민 인물을 기리는 거리 이름을 바꾸거나 식민주의 상징물(예: 나이로비 시내 휴 콜몬들리 남작 동상)을 제거했다.[5] 스와힐리어를 국어로 장려했지만, 영어는 여전히 의회 토론, 학교 및 대학 교육의 주요 언어로 남았다.[5]
대통령으로서 케냐타는 일관되게 친서방 자본주의 체제를 고수하며 외국 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했다. 그의 경제 정책은 경제 성장에 초점을 맞추었으며,[5] 외국인 투자를 장려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경제 발전을 위해 외국의 기술 전문가가 필요함을 인정했다.[5] 이로 인해 서구 기업들은 케냐를 안전하고 수익성 있는 투자처로 여겼고,[5] 1964년부터 1970년까지 케냐의 대규모 외국인 투자와 산업 규모는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5]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케냐 경제는 1965년부터 1980년까지 연평균 6.4%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이는 특히 차와 커피 등 상품 작물 중심의 농업 부문 집중 덕분이었다.[1]
한편, 케냐타는 공개적으로는 경제 및 사회 발전의 공정한 분배를 이루는 민주적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표방하기도 했다.[5] 1965년 정부는 "아프리카 사회주의와 케냐 계획에 대한 적용"이라는 문서를 발표하여 소위 '아프리카 사회주의' 경제 모델을 공식화했지만,[5] 실제로는 민간 자본의 중요한 역할을 인정하는 혼합 경제를 제안했으며 국유화는 국가 안보가 위험할 경우에만 고려하겠다고 명시했다.[5] 좌파 비평가들은 이것이 식민지 경제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5]
정부는 경제의 '아프리카화'를 추진하여 토착 케냐인들의 경제 참여를 늘리려 했다.[5] 흑인 소유 기업에 대한 대출을 제공하기 위해 산업 및 상업 개발 공사(ICDC)를 설립했고,[5] 케냐 국가 보험 회사의 지분 51%를 확보했다.[5] 1965년에는 필수 상품 무역에서 토착민 통제를 보장하기 위해 케냐 국가 무역 공사(KNTC)를 설립했으며,[5] 1967년 무역 면허법은 외국인의 쌀, 설탕, 옥수수 무역 참여를 금지했고, 1970년대에는 비누, 시멘트, 섬유 등으로 확대되었다.[5] 이 조치들은 영국 시민권을 유지한 많은 아시아인들에게 영향을 미쳐 1967년 말부터 1968년 초까지 영국으로의 대규모 이주를 촉발했다.[5]
토지 소유권 문제는 케냐에서 민감한 사안이었다. 영국 정부는 독립 협상의 일환으로 백인 농부들의 토지를 매입하여 원주민에게 재분배하기 위해 2700만파운드를 제공했다.[5] 케냐타 정부는 이 과정을 위해 백인 농부인 브루스 맥켄지를 농업부 장관으로 임명하고,[5]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사유 토지 매입 회사를 장려했다.[5] 정부는 이전 백인 소유 고지대 토지를 이 회사들에 매각하거나 임대했고, 회사들은 이를 다시 개별 주주들에게 분배했다.[5] 이 과정에서 토지 재분배는 집권당의 주요 지지층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으며,[5] 케냐타 자신과 그의 가족도 가툰두 주변 토지를 포함하여 막대한 토지를 취득했다.[5][5] 이로 인해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주장하던 케냐인들이 소외되고 다른 지역 출신에게 토지가 돌아가는 경우가 발생했으며,[5] 특히 리프트 밸리 지역에서는 난디족 땅이 비(非)난디족에게 매각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5] 케냐타와 그의 가족은 대통령직을 이용하여 부동산 취득 과정의 법적, 행정적 장애물을 우회했다는 비판을 받았다.[5] 또한 해안 호텔 사업, 루비 채굴, 카지노, 숯 사업, 상아 무역 등 다양한 사업에 관여하며 부를 축적했다.[5] 이러한 부패는 케냐타 시대 정부, 공무원, 사업계 전반에 만연했지만,[5] 케냐 언론은 이 문제를 깊이 다루지 않았다.[5]
케냐타 정부는 교육과 의료 서비스 개선에도 힘썼다. 1963년 오민다 위원회를 통해 교육 수요 충족 방안을 모색했고,[5] 보고서는 보편적 무상 초등 교육을 장기 목표로 설정하면서도, 당장은 공무원 등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해 중등 및 고등 교육에 중점을 둘 것을 권고했다.[5] 1964년부터 1966년 사이 초등학교 수는 11.6%, 중학교 수는 80% 증가했으며,[5] 케냐 최초의 대학인 나이로비 대학교와 케냐타 대학교가 설립되었다.[5] 비록 무상 초등 교육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케냐타 사망 시점에는 케냐 어린이의 85%가 초등 교육을 받았고 공무원을 충원할 충분한 인력이 양성되었다.[5] 의료 분야에서는 무상 보편 의료 시스템을 장기 목표로 삼고, 단기적으로는 의사와 간호사 수를 늘리고 외국인 인력을 줄이는 데 집중했다.[5] 1965년에는 외래 환자와 어린이에 대한 무료 의료 서비스를 도입했다.[5] 그 결과 케냐인의 평균 기대 수명은 독립 전 45세에서 1970년대 말 55세로 증가했다.[5] 그러나 개선된 의료 서비스로 사망률이 감소한 반면 출산율은 높게 유지되어 인구가 급증했고(1962-1979년 연평균 4% 증가), 이는 사회 서비스에 큰 부담을 주었다. 정부는 가족 계획 사업을 추진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5]
정치적으로 케냐타는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하고 일당제를 추구했다. 1964년 11월, 야당인 케냐 아프리카 민주 동맹(KADU) 대표들이 집권당인 케냐 아프리카 민족 동맹(KANU)에 합류하면서 사실상 일당제가 형성되었다. 1965년과 1966년에 걸쳐 여러 차례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했으며,[5] 특히 1966년 5월 개정안은 국가 안보가 위협받는다고 판단될 경우 대통령이 재판 없이 개인을 구금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5] 또한 지방 정부의 자치권을 축소하고 주요 서비스를 중앙 정부로 이관하여(1969년 기능 이전 법), 민족 기반의 권력 형성을 막고 중앙 통제를 강화했다.[5]
집권 초기부터 KANU 내 분열, 특히 부통령 오긴가 오딩가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965년 2월 좌파 정치인 피오 가마 핀토 암살 이후 정부에 대한 반대가 커졌으며,[5] 영국 정보 기관은 케냐타 경호원이 암살을 기획했다고 믿었다.[5] 1966년 3월 당 대회에서 오딩가의 부당수직 권한이 대폭 축소되자,[5] 오딩가는 부통령직에서 사퇴하고 사회주의 정책을 표방하는 케냐 인민 연합(KPU)을 창당했다.[5] 케냐타 정부는 이를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로 간주하고,[5] KANU에서 탈당한 의원들이 재선거를 치르도록 헌법을 개정했다.[5] 1966년 6월 보궐선거에서 KANU는 정부의 지원과 언론 통제 속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KPU는 소수 의석 확보에 그쳤다.[5] 오딩가의 후임 부통령으로는 처음에는 조셉 무룸비가, 이후에는 다니엘 아랍 모이가 임명되었다.[5]
1969년 7월, 또 다른 유력 정치인이자 루오족 출신인 톰 음보야가 키쿠유족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민족 갈등이 극에 달했다.[5] 케냐타 정부가 배후라는 의혹이 퍼졌고 나이로비에서 폭동이 발생했다.[5] 같은 해 10월, 케냐타는 루오족 지역인 키수무 방문 중 반정부 시위에 직면했고, 경호원들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했다.[5] 이에 대응하여 케냐타는 키쿠유족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 맹세(선서 운동)를 강요했으나,[5] 국내외적인 비판 속에 중단되었다.[5] 결국 1969년 10월 정부는 KPU를 불법화하고 오딩가를 포함한 야당 지도자들을 구금했으며,[5] 이로써 케냐는 다시 사실상의 일당제 국가가 되었다.[5] 1969년 12월 총선거는 KANU 후보들만 출마한 가운데 치러졌다.[5] 이후에도 장-마리 세로니, 플로메나 첼라가트, 조지 아뇨나, 마틴 시쿠쿠, 응구기 와 티옹오 등 많은 비판적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구금되거나 투옥되었다.[5] 로널드 응갈라나 조시아 망와이 카리우키(1975년 암살)처럼 정부를 비판하던 정치인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5] 케냐타는 1974년 선거에서도 단독 후보로 출마하여 재선되었으나, 이는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선거라는 비판을 받았다.
외교적으로 케냐타는 공식적으로는 "적극적 비동맹" 정책을 표방했지만,[5] 실제로는 친서방, 특히 친영국적인 노선을 걸었다.[5] 케냐는 영연방 회원국이 되었고,[5] 영국은 케냐의 가장 중요한 무역 파트너이자 최대 원조 공여국 중 하나였다.[5] 1964년 양국 간 군사 동맹에 해당하는 양해각서가 체결되었고,[5] 영국 특수 공수 부대(SAS)가 케냐타의 경호원을 훈련시키기도 했다.[5] 이러한 관계는 신 식민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영국이 케냐를 일방적으로 통제하지는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5] 미국과의 관계도 우호적이었으며,[5] 이스라엘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1976년 엔테베 작전 당시 이스라엘 전투기의 케냐 급유를 허용하기도 했다.[5] 반면, 케냐타 정부는 반공주의 성향이 강해 소련, 중국 등 공산권 국가들과는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5] 1965년 그는 "동방의 제국주의 위험"을 경고하며 공산주의를 거부한다고 밝혔고,[5] 소련의 영향력 확장을 경계하여 루뭄바 연구소를 폐쇄했으며,[5] 1967년에는 중국 대리 대사를 추방했다.[5] 케냐타는 동아프리카 공동체 등 지역 문제에는 비교적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나,[5] 1967년 동아프리카 협력 조약에 서명하고 동아프리카 경제 공동체 설립 회의에 참여했으며,[5] 콩고 위기 당시 아프리카 통일 기구(OAU)의 콩고 화해 위원회를 이끌기도 했다.[5]
케냐타는 1966년과 1968년에 뇌졸중을 겪는 등 말년에 건강 문제를 겪었으며,[5][5] 통풍과 심장 질환으로 고생했다.[5] 1970년대 들어 건강이 악화되면서 1975년경에는 사실상 통치를 중단한 상태였고,[5] 코이나게(Koinange), 제임스 기추루, 뇨로게 뭉가이, 찰스 뇬조 등 키쿠유족 측근 4인방이 실권을 행사했다.[5] 1975년 3월, 정부 비판 세력을 이끌던 조시아 망와이 카리우키가 납치, 고문 후 살해되면서 케냐타 정부에 대한 지지는 크게 약화되었다.[5] 1977년에는 몇 차례 더 뇌졸중이나 심장마비를 겪었다.[5]
1978년 8월 22일, 케냐타는 몸바사의 대통령 관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5] 그의 국장은 영국 윈스턴 처칠의 장례식을 참고하여 성대하게 치러졌으며,[5] 영국의 찰스 왕세자를 비롯하여 줄리어스 니에레레, 이디 아민, 케네스 카운다, 해스팅스 반다 등 아프리카 정상들과 인도, 파키스탄 정상들이 참석했다.[5][8] 그의 시신은 나이로비 케냐 의사당 부지 내 능묘에 안치되었다.[5] 케냐타는 후계자를 명확히 지명하지 않았으나, 키쿠유족 파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헌법에 따라 칼렌진족 출신 부통령 다니엘 아랍 모이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5] 권력 이양은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졌다.[5]
케냐타는 케냐 독립의 아버지이자 아프리카 민족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므제(Mzee, 할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불리지만,[5] 동시에 일당 독재, 정적 탄압, 부패, 키쿠유족 우대 정책 등으로 민주주의 후퇴와 민족 갈등의 씨앗을 남겼다는 비판도 받는다. 그의 이름은 조모 케냐타 국제공항 등에 남아 있으며, 케냐 실링 지폐에도 그의 초상이 사용되고 있다.[5]
4. 유산과 평가
케냐타는 아프리카 민족주의자였으며, 아프리카에서 유럽의 식민 통치가 끝나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다른 반식민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식민주의 하에서 아프리카의 인적, 자연 자원이 아프리카 인구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지 않고 식민 통치자들과 그들의 유럽 본국을 부유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믿었다. 케냐타에게 독립은 단순한 자치가 아니라 색깔 차별과 케냐 백인 소수 민족의 과장된 태도와 인종차별적인 속어의 종식을 의미했다. 머레이-브라운에 따르면, 케냐타의 평생 동안의 "기본 철학"은 "모든 사람은 자신의 희망에 따라 평화롭게 발전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케냐타는 "나는 항상 자유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목적으로, 관용과 평화의 가치를 위해 싸워왔습니다."라는 그의 진술에서 이를 표현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잠비아 대통령 케네스 카운다의 "아프리카 인본주의" 이념과 유사했다.
머레이-브라운은 "케냐타는 항상 자신을 이데올로기적 헌신으로부터 자유롭게 유지해 왔다"고 언급했으며, 역사가 윌리엄 R. 오치엥은 "케냐타는 특정한 사회 철학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아센소는 케냐타가 "사회 철학과 슬로건에 관심이 없었다"고 언급했다. 여러 논평가와 전기 작가들은 그를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라고 묘사했다. 이는 기능주의 인류학 교육을 통해 강화된 이데올로기적 관점이었다. 말로바에 따르면 그는 "제국 세력과 협력하고 급진적인 정치에 분명히 적대적인 보수주의"를 추구했다.
케냐타 전기 작가 가이 아놀드는 케냐 지도자를 "실용주의자이자 온건주의자"라고 묘사하며, 그의 유일한 "급진주의"는 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민족주의적 공격"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언급했다. 아놀드는 또한 케냐타가 "영국식 정치 접근 방식을 많이 받아들였다: 실용주의, 문제가 위기가 될 때만 대처하고, 상대방이 말만 할 때는 관용"이라고 지적했다. 도널드 새비지는 케냐타가 "권위와 전통의 중요성"을 믿었고 "자조와 성실한 노동을 통한 발전에 대한 매우 일관된 견해"를 보였다고 언급했다. 케냐타는 또한 엘리트주의자였으며 케냐에서 엘리트 계급의 출현을 장려했다. 그는 전통 관습의 갱신을 위한 그의 보수적인 열망과 서구의 현대성을 받아들이려는 그의 개혁적인 충동 사이에서, 그리고 키쿠유 윤리에 대한 그의 내부적인 논쟁과 부족 정체성에 대한 신념과 비부족적인 케냐 민족주의를 창출해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영국 체류 당시 케냐타는 마르크스주의와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치적 통합을 주장하는 급진적 범아프리카주의에 헌신한 인물들과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 일부 해설가들은 케냐타를 사후적으로 범아프리카주의자로 묘사하기도 했다. 말로바는 식민지 시대 케냐타가 "급진적 범아프리카주의 활동"을 수용했지만, 케냐 지도자가 된 후에는 "특히 아프리카 해방 문제에 대한 의도적인 보수적 입장"을 취했다고 지적했다. 케냐 지도자로서 케냐타는 자신의 연설을 모은 두 권의 책, 『하람베(Harambee)』와 『쓴맛 없는 고난(Suffering Without Bitterness)』을 출판했다. 이 출판물에 포함된 자료는 1930년대 영국 체류 당시 보였던 급진성을 언급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선별되었다.
케냐타는 패드모어와의 우정과 소련 체류를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에 노출되었지만, 영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정부에도 노출되었다. 그는 1934년 이후 공산주의 운동과는 더 이상 관련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케냐 지도자로서 케냐타는 마르크스주의가 자국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브루스 J. 버먼과 존 M. 론스데일 학자들은 사회 분석을 위한 마르크스주의적 틀이 영국 식민주의를 단순히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해야 한다는 그의 견해와 같은 일부 신념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케냐타는 부족주의가 후퇴하고 퇴행적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태도에 동의하지 않았다. 부족 사회에 대한 그의 긍정적인 태도는 패드모어, 제임스, T. 라스 마코넨 등 영국에 있던 그의 마르크스주의적 범아프리카주의 친구들 중 일부를 좌절시켰는데, 그들은 그것을 편협하고 비진보적인 것으로 여겼다.
아센소는 케냐타가 처음에는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본주의적 상황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제안했다. 반대로 세이비지는 "케냐타의 방향은 급진적인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고, 오치엥은 그를 "아프리카 자본가"라고 불렀다. 집권 당시 케냐타는 사회주의적 집단화와 상반되는 개인과 ''mbari'' 토지 권리에 대한 집착을 보였다. 말로바에 따르면 케냐타 정부는 "자본주의를 아프리카 이데올로기로, 공산주의(또는 사회주의)를 이질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제시하려고 했다"고 한다. 외국 자본 유치와 서방 친화적인 외교 정책을 통해 고도 경제 성장을 달성한 것은 케냐타의 공으로 여겨진다. 독립 직후 케냐는 1차 산업(농업)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여전히 외국 자본 등이 케냐의 주요 기업들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케냐타는 이러한 상황을 인정하면서 투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1964년부터 1970년까지 케냐의 대규모 해외 투자와 산업 규모를 거의 2배로 증가시켰다. 한편, 케냐타는 케냐를 민주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겠다고도 언급하여, 모순된 행보라는 평가도 받는다.
케냐 내에서 케냐타는 "국부(國父)"로 여겨졌으며, 스와힐리어로 "원로"를 뜻하는 ''Mzee''라는 비공식적인 칭호를 얻었다. 1963년부터 그가 사망할 때까지 케냐에서는 그를 둘러싼 인격숭배가 있었으며, 케냐 민족주의와 케냐타 자신의 인격을 의도적으로 연결시켰다. 이처럼 케냐타를 국가 자체의 대중적 상징으로 사용한 것은 그들의 이름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키쿠유족과 케냐인들뿐만 아니라 더 광범위하게 아프리카인들에게도 아버지상으로 여겨졌다. 나이로비에 있는 조모 케냐타 국제공항은 그에게 헌정되어 명명되었다. 1966년부터 현재까지 여러 액면의 케냐 실링 지폐에 초상이 사용되고 있다.
1963년 이후, 말로바는 케냐타가 세계 무대에서 "독립 후 가장 존경받는 아프리카 지도자"가 되었으며, 서구 국가들은 그를 "사랑받는 원로 정치가"라고 칭송했다고 언급했다. 그의 의견은 보수적인 아프리카 정치인들과 서구 지도자들 모두에게 "가장 귀중하게" 여겨졌다. 케냐의 지도자가 된 후, 그의 반공주의적 입장은 서구에서 호평을 받았으며, 일부 친서구 정부들은 그에게 상을 수여했다. 예를 들어, 1965년에는 바오로 6세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1974년 아놀드는 케냐타를 "현존하는 뛰어난 아프리카 지도자 중 한 명"이자 "케냐와 동의어가 된" 인물로 언급했다. 그는 케냐타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영악한 정치가 중 한 명"이었고, "1945년 이후 아프리카 민족주의적 성취의 위대한 설계자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고 덧붙였다. 케네스 오. 냥게나는 그를 "20세기 최고의 인물 중 한 명"으로 묘사하며, "고통받는 케냐인들이 자신의 권리, 정의, 자유를 위해 싸우도록 이끄는 등대이자 결집의 중심"이었고, 그의 "탁월함은 케냐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들에게 힘과 열망을 주었다"고 말했다. 2018년 말로바는 그를 "현대 아프리카 민족주의의 전설적인 개척자 중 한 명"으로 묘사했다. 버먼과 론스데일은 그의 저술을 검토하면서 그를 키쿠유족 중 최초로 저술하고 출판한 "선구자"로 묘사하며, "그의 표현적 업적은 독특했다"고 했다.
맥슨은 케냐타 집권하의 케냐가 보건 및 교육 분야에서 "식민지 시대 60년간의 성과보다 15년 만에 더 많은 것을 달성했다"고 지적했다. 케냐타 사망 당시 케냐는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대부분 지역보다 더 높은 기대 수명을 기록했다. 초등, 중등, 고등 교육이 확대되었고, 케냐 어린이를 위한 보편적 초등 교육 목표 달성을 향해 맥슨이 "엄청난 발걸음"이라고 표현한 진전을 이루었다. 또 다른 중요한 성공은 학교, 공공시설 및 사교 클럽에서 식민지 시대의 인종 차별 시스템을 평화적으로 최소한의 혼란으로 해체한 것이다.
케냐의 백인 정착민들은 케냐타의 생애 대부분 동안 그를 불만 분자이자 선동가로 여겼다. 그들에게 케냐타는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놀드가 지적했듯이, "[크루마]를 제외하고는 영국령 아프리카 전역에서 정착민과 식민 당국 모두에게 케냐타만큼 많은 분노, 폄하 및 격분을 불러일으킨 인물은 없었다." 역사가 키스 카일의 말에 따르면, 많은 백인들에게 케냐타는 "화신된 사탄"이었다. 이러한 백인들의 적대감은 1950년에서 1952년 사이에 절정에 달했다. 1964년까지 이러한 이미지는 크게 바뀌었고, 많은 백인 정착민들은 그를 "착한 늙은 므제(Mzee)"라고 불렀다. 머레이-브라운은 많은 사람들에게 케냐타의 "화해의 메시지, '용서하고 잊자'는 것이 아마도 그의 조국과 역사에 대한 가장 큰 공헌일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케냐타의 통치에는 어두운 면도 존재했다. 오치엥에게 케냐타는 케냐의 "보수적인 사회적 세력과 경향의 의인화"였다. 그의 대통령직 말년에 많은 젊은 케냐인들은 케냐타의 독립 획득에 대한 역할을 존중하면서도 그를 반동으로 여겼다. 케냐 사회의 급진적인 변혁을 원하는 사람들은 종종 케냐타의 케냐를 남쪽 이웃인 줄리어스 니에레레의 탄자니아와 불리하게 비교했다. 오딩가와 같은 좌파들이 케냐타의 지도력에 대해 제기한 비판은 지식인 프란츠 파농이 아프리카 전역의 포스트 식민 지도자들에게 한 비판과 유사했다. 예를 들어 제이 오브라이언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케냐타가 "예비 부르주아 계급의 대표"로서 권력을 잡았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영국 식민주의자와 "아시아 상업 부르주아 계급"을 자신들로 대체하기를 원하는 "비교적 특권을 가진 소부르주아 아프리카 요소들"의 연합이었다. 그는 영국이 노동자와 농민의 성장하는 투쟁에 대한 보루로 그를 보고 신 식민지 지배를 보장할 케냐타를 지지했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좌파적인 비판을 제시한 마르크스주의 작가 응구기 와 티옹오는 "여기에는 역사에 의해 그의 백성을 착취와 억압이 없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도록 부름받았지만 그 기회에 부응하지 못한 흑인 모세가 있었다"고 말했다. 응구기는 케냐타를 "20세기 비극적 인물: 그는 레닌, 마오쩌둥, 또는 호찌민이 될 수 있었지만, 결국에는 장제스, 박정희, 또는 피노체트가 되었다"고 보았다. 응구기는 케냐타가 마우마우 참전 용사들을 무시하고 많은 이들을 빈곤하고 토지 없는 상태로 남겨두면서 그들을 국가 정치의 중심 무대에서 제거하려 했다고 주장하는 케냐 비판가들 중 한 명이었다. 다른 분야에서도 케냐타 정부는 비판에 직면했는데, 예를 들어 케냐 여성의 권리 신장에 거의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사이먼 기칸디는 케냐타가 가나의 크와메 느크루마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자유의 서사를 계획한 담론과 과정을 시작했지만, 동시에 대통령 통치, 일당 독재, 민족주의 및 측근주의를 경솔하게 제도화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들은 아프리카 독립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고 포스트 식민지 권위주의를 고안한 것으로 기억된다"고 언급했다. 1991년 케냐의 변호사이자 인권 운동가인 깁슨 카마우 쿠리아는 연방제를 폐지하고, 독립 후보의 선거 출마를 금지하고, 일원제 입법부를 설치하고, 비상 사태 권한 사용에 대한 제한을 완화함으로써 케냐타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모이가 케냐에서 독재 권력을 더욱 신장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지적했다. 국내에서는 독재 정치를 행하여 1969년에는 완전히 여당 케냐 아프리카 민족 동맹 (KANU)에 의한 일당 체제를 수립하게 되었다. 또한 자신의 출신 민족이자 케냐 최대 민족인 키쿠유족을 우대하여, 후일의 민족 갈등의 발단이 되었다.
케냐 진실, 정의 및 화해 위원회는 2013년 보고서에서 케냐타가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이용하여 케냐 전역에 걸쳐 자신과 가족에게 광대한 토지를 할당했다고 비난했다.[3] 케냐타 가족은 케냐 최대 토지 소유주 중 하나이다.[4] 1990년대에는 특히 난디, 나쿠루, 우아신기슈, 트랜스-엔조이아 지구에서 부족 집단들 사이에 많은 불만이 있었는데, 이 지역에서는 케냐타 정부 하에서 유럽 정착민들에게 빼앗긴 토지를 되찾지 못했고, 더 많은 토지가 "외국인"—다른 부족 출신 케냐인들—에게 매각되었다. 이러한 집단들 사이에서는 배상 요구가 널리 퍼졌고, 1991년과 1992년에는 이 지역에서 케냐타의 후원으로 토지를 얻은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폭력적인 공격이 발생했다. 이 폭력은 1996년까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고, 리프트 밸리에서 약 1500명이 사망하고 30만 명이 이재민이 된 것으로 추산된다. 또한, 외국 자본에 의한 기업 독점 현상은 나이로비에 거주하는 흑인들을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고, 치안 악화와 부패 증가를 심화시켰다.
5. 저서
발행연도 | 제목 | 출판사 |
---|---|---|
1938 | 케냐 산을 향하여 (Facing Mount Kenyaeng) | 세커 앤 워버그(Secker and Warburg) |
1944 | 나의 키쿠유 사람들과 왕곰베 추장의 삶 (My People of Kikuyu and the Life of Chief Wangombeeng) | 기독교 문헌 연합회(United Society for Christian Literature) |
1944? | 케냐: 갈등의 땅 (Kenya: The Land of Conflicteng) | 파나프 서비스(Panaf Service) |
1968 | 고통 속의 괴로움 없이 (Suffering Without Bitternesseng) | 동아프리카 출판사(East African Publishing House) |
1971 | 우후루의 도전: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케냐의 발전 (The Challenge of Uhuru: The Progress of Kenya, 1968 to 1970eng) | 동아프리카 출판사(East African Publishing House) |
6. 역대 선거 결과
wikitext
참조
[1]
논문
Kenya
http://dx.doi.org/10[...]
1990-05-01
[2]
뉴스
Wahu Kenyatta Mourned
http://www.eastandar[...]
2007-04-06
[3]
뉴스
Kenyatta Led Elite in Land Grabbing
http://www.nation.co[...]
2013-05-11
[4]
뉴스
Kenyatta Family Seeks Approval To For Its Dream City Outside Nairobi
http://www.businessd[...]
2016-01-20
[5]
서적
Histories of the Hanged: Britain’s Dirty War in Kenya and the End of Empire
Weidenfeld & Nicolson
2005
[6]
간행물
The Modern Review
2006
[7]
논문
Mau Maus of the Mind: Making Mau Mau and Remaking Kenya
1990
[8]
뉴스
케니야타 대통령의 국장
朝日新聞
1978-09-01
[9]
서적
Dukier World History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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