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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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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개인 숭배는 특정 지도자를 신격화하거나 영웅시하여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데 사용되는 현상이다. 어원은 낭만주의 시대의 "천재에 대한 추종"에서 시작되었으며,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을 통해 정치적 용어로 널리 알려졌다. 역사적으로 군주와 국가 원수들은 숭배 작업을 벌여왔으며, 20세기에는 사진술, 대중 매체의 발달로 새로운 형태의 개인 숭배가 나타났다. 21세기에는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허위 정보가 확산되면서 인물 숭배가 더욱 강화되었다. 개인 숭배는 세속적이고 인민 주권에 기반하며, 대중 매체를 활용하고, 반대 의견을 억제할 수 있는 통제된 환경에서 나타난다. 이는 지도자의 이상화된 이미지를 형성하고, 전체주의 정권의 사회 변혁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한다. 개인 숭배는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북한의 김씨 일가 등 다양한 국가와 지도자들에게서 나타났으며, 비판적인 시각으로 제도나 체제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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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인숭배 - 주체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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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숭배
개요
마오쩌둥 초상화
마오쩌둥 초상화
관련 개념권위주의, 전체주의, 선전, 우상화
반대 개념개인주의, 민주주의
정의 및 특징
정의특정 개인을 숭배 대상으로 삼아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하려는 현상
특징지도자에 대한 과도한 찬양 및 미화
지도자의 업적 부풀리기
지도자의 이미지 조작
대중 동원 및 사상 통제
비판 세력 탄압
역사적 사례
고대파라오, 황제 등 신격화된 통치자
근현대이오시프 스탈린
아돌프 히틀러
마오쩌둥
김일성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비판적 시각
문제점개인의 자유와 권리 침해
사회의 비판 기능 약화
독재 및 권위주의 체제 강화
역사 왜곡 및 진실 은폐
영향사회 전반의 경직성 심화 및 발전 저해
관련 정보
관련 용어주체사상
수령론
영도자
관련 단체조선로동당
전국인민대표대회

2. 어원

"개인 숭배"라는 용어는 1800년에서 1850년경에 영어권, 독일어권, 프랑스어권에서 함께 사용되기 시작했다.[125] 처음에는 낭만주의 시대에 ''"천재에 대한 추종"''이라는 용어로 쓰였고 정치적인 뜻은 포함되지 않았다. 1877년에 카를 마르크스가 최초로 정치적인 용어로 사용했다. 이후 니키타 흐루쇼프스탈린 격하 운동 때 "개인 숭배"라는 말로 유명해졌다.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1956년에 '개인 숭배와 그 결과에 관하여'(О культе личности и его последствиях|번역ru)라는 제목의 비밀 연설에서 전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정치 체제를 정의한 것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21]

3. 배경

역사 속에서 거의 모든 군주와 국가 원수들은 엄청난 규모의 숭배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왕권신수설에 따르면 군주의 정권은 신에 의해 부여받았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 일본, 잉카 제국, 아즈텍 제국, 티베트, 시암, 로마 제국과 같은 제국들은 특히 군주를 신격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서기 1세기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군주와 다른 국가 원수는 엄청난 존경을 받았으며, 초인적인 자질을 부여받았다고 여겨졌다. 중세 유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왕권신수설을 통해 통치자는 신 또는 신들의 뜻에 따라 직위를 수행한다고 여겨졌다. 고대 이집트, 일본 제국, 잉카, 아즈텍, 티베트, 시암(현재의 태국), 로마 제국은 군주를 "신왕"으로 재정의한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또한, 고대 로마의 황제 숭배는 황제와 그 가족의 일부를 고대 로마의 신성한 권위 (아우크토리타스)와 동일시했다.

18세기와 19세기에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민주주의와 세속적 사상이 확산되면서 군주가 이러한 아우라를 유지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나폴레옹 3세[2]와 빅토리아 여왕[3]은 19세기에 널리 유통되고 수집된 자신의 ''carte-de-visite'' 초상화에서 이러한 아우라가 지속되는 것을 높이 평가했다.[4][5][6]

이후 라디오와 같은 대중 매체의 발달은 정치 지도자들이 이전에는 결코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대중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투영할 수 있게 했다. 20세기에 가장 악명 높은 인물 숭배가 나타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종종 이러한 숭배는 정치 종교의 한 형태이다.

21세기에 인터넷월드 와이드 웹의 출현은 인물 숭배 현상을 새롭게 했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통한 허위 정보와 24시간 뉴스 사이클은 기만적인 정보와 선전의 광범위한 유포와 수용을 가능하게 했다.[7] 그 결과 인물 숭배는 성장하여 많은 곳에서 인기를 유지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현저한 민주주의 후퇴와 일치한다.[8]

"인물 숭배"라는 용어는 1800~1850년경에 영어에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프랑스어와 독일어 버전의 용어도 함께 등장했다.[9] 처음에 정치적 의미는 없었지만, 대신 낭만주의 "천재 숭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9] 이 구절의 최초의 알려진 정치적 사용은 카를 마르크스가 1877년 11월 10일에 독일의 정치 활동가 빌헬름 블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타났다.[9]

4. 특징

인류 역사에서 군주와 국가 원수는 대단한 존경을 받았고,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중세 유럽의 왕권신수설은 통치자가 신의 뜻에 따라 직위를 수행한다고 보았다. 고대 이집트, 일본 제국, 잉카, 아즈텍, 티베트, 시암(현재의 태국), 로마 제국은 군주를 "신왕"으로 재정의했다. 고대 로마의 황제 숭배는 황제와 그 가족을 신성한 권위와 동일시했다.

18, 19세기에 민주주의와 세속적 사상이 확산되면서 군주가 이러한 아우라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2]와 빅토리아 여왕[3]은 19세기에 널리 유통되고 수집된 자신의 ''carte-de-visite'' 초상화에서 이러한 아우라가 지속되는 것을 높이 평가했다.[4][5][6]

1859년 앙드레-아돌프-외젠 디에드레가 제작한 나폴레옹 3세의 ''명함 사진''(carte de visite)으로, 명함 사진 형식을 대중화했다.
이후 라디오와 같은 대중 매체의 발달은 정치 지도자들이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대중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투영하게 했다. 20세기에는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인물 숭배가 나타났으며, 종종 정치 종교의 한 형태였다.

21세기에 인터넷월드 와이드 웹의 출현은 인물 숭배 현상을 새롭게 했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통한 허위 정보와 24시간 뉴스 사이클은 기만적인 정보와 선전의 광범위한 유포와 수용을 가능하게 했다.[7] 그 결과 인물 숭배는 성장하여 많은 곳에서 인기를 유지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현저한 민주주의 후퇴와 일치한다.[8]

"인물 숭배"라는 용어는 1800~1850년경에 영어에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프랑스어와 독일어 버전의 용어도 함께 등장했다.[9] 처음에는 정치적 의미가 없었지만, 낭만주의 "천재 숭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9] 이 구절의 최초의 알려진 정치적 사용은 카를 마르크스가 1877년 11월 10일에 독일의 정치 활동가 빌헬름 블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타났다.[9]

지도자의 개인 숭배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역사가 얀 플람퍼는 현대의 개인 숭배가 "그 이전의 것"과 구별되는 다섯 가지 특징을 보인다고 했다. 숭배는 세속적이고 "인민 주권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대상은 모두 남성이고, 부유층이나 지배 계급뿐 아니라 전체 인구를 대상으로 하며, 대중 매체를 사용하고, 대중 매체가 "경쟁 숭배"의 도입을 억제할 수 있을 정도로 통제되는 곳에서 존재한다.

2013년 논문 "성격이란 무엇이며, 왜 정말 중요한가"에서 토마스 A. 라이트는 "개인 숭배 현상은 끊임없는 선전과 미디어 노출을 통해 의식적으로 형성되고 조형된 개인의 이상화된, 심지어 신과 같은 대중 이미지를 의미한다. 그 결과, 공적 인물의 영향력만으로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게 된다... 개인 숭배 관점은 많은 공인들이 이상화되고 영웅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배양하는 얕고 외부적인 이미지에 초점을 맞춘다."라고 말했다.[11]

아드리안 테오도르 포판은 개인 숭배를 "지도자에 대한 칭찬을 양적으로 과장하고 질적으로 사치스럽게 대중에게 과시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는 또한 숭배 형성으로 이어지는 세 가지의 인과적인 "필수적이지만 충분하지 않은 구조적 조건과 일련의 사건"을 확인했다. 즉, 족벌주의와 고객주의의 특정한 조합, 반대 의견의 부재, 그리고 사회의 문화를 뒤덮는 체계적인 날조가 그것이다.[12]

존 피트만이 설명한 개인 숭배의 근본적인 특징 중 하나는 가부장적인 성격이다. 마르크스주의 운동과 일치하는 개인 숭배의 개념은 권력을 가진 남성들 사이에서 그들이 "인민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대중적인 기반을 얻었다. 1920년대 말까지, 숭배의 남성적 특징은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피트만은 이러한 특징이 "정권의 장치의 문화적 초점으로서의 [남성] '위대한 지도자'의 공식적인 역할: 하향식 '행정 조치'에 대한 의존: 그리고 단일 이상에 의해 만들어진 권위의 피라미드 구조"를 포함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90]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1956년에 '개인 숭배와 그 결과에 관하여'(О культе личности и его последствияхru)라는 제목의 비밀 연설에서 전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정치 체제를 정의했다.[121] 일반적으로 혁명을 경험한 체제, 특히 공산주의가 권력을 잡은 국가에서 스탈린을 본보기로 삼은 것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122] 공산주의 창시자인 카를 마르크스는 생전에 자신에 대한 "개인 숭배"를 경계했으며, 정치적인 의미로 처음 이 단어를 사용했다.[123]

소련 밖의 공산주의 국가·공산주의 정당에는 특히 코민테른을 통해 확산되었으며, 중국마오쩌둥, 프랑스 공산당토레즈, 북한김일성·김정일·김정은 (북한의 개인 숭배),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등 스탈린 자신이 건국·창설을 지원한 국가나 단체, 투르크메니스탄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등 구 소련 구성국, 이라크사담 후세인, 시리아의 하페즈 알 아사드, 리비아무아마르 알 카다피아랍 사회주의를 내세운 국가의 지도자, 도미니카 공화국라파엘 트루히요를 비롯한 카리브해 지역의 국가 지도자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124] 제3세계에서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나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영웅 숭배, 파시즘 운동에서의 지도자 원리에도 지도자 숭배의 양식이 나타난다.[122]

1956년 소련의 흐루쇼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 운동은 당과 국가와의 유착, 당내 민주주의와 관료제의 문제 등의 논의를 회피하고, 주로 스탈린 개인의 거친 인격에 책임을 돌린 것이었으며, 대숙청의 원인도 개인 숭배의 만연에만 원인을 구했다.[124] 이처럼 개인 숭배 비판은 제도나 체제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기 쉽다고 여겨진다.[122] 스탈린 사후에도 브레즈네프 체제나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 등 소련·러시아사의 장기 집권에서 스탈린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개인 숭배가 나타난다.[124] 중국에서는 문화 대혁명이라는 비참한 결말을 초래한 반성에서 덩샤오핑은 개인 숭배를 엄격히 금지했고, 중국에서는 개인 숭배가 금지되었지만, 시진핑 체제가 되면서 개인 숭배가 부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스탈린주의를 부정했던 신좌익도 한 바퀴 돌아 개인 숭배에 이르는 경우가 있다.

5. 목적

개인 숭배는 전체주의 정권이 급진적인 사상에 따라 사회를 변혁하려 할 때 만들어진다.[126] 때때로 혁명적인 변혁을 주도한 지도자는 자신이 없으면 국가의 밝은 미래는 오지 않는, 국가의 “자애로운 지도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러한 개인 숭배는 아돌프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 이오시프 스탈린과 같은 전체주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Napoleon Crossing the Alps)''', 낭만주의 시대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가 1805년에 그림


모든 독재 권력이 개인 숭배를 시행하는 것은 아니며, 개인 숭배 현상은 독재 국가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일어난다. 어떤 독재자들은 자신에 대한 과찬을 최소화하기도 한다. 크메르 루주의 독재자 폴 포트는 공식석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그의 정권이 끝날 때까지 해외에서는 그의 정체에 대해 논쟁거리가 되었다.

종종 한 명의 지도자가 혁명적 변화와 연관되어, 더 나은 미래로의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자애로운 "안내자"로 여겨지게 된다. 이는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 소련이오시프 스탈린,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중화인민공화국마오쩌둥, 시리아의 하페즈 알 아사드와 그의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와 같은 전체주의 사회에서 발생한 개인 숭배의 정당화로 여겨졌다.

얀 플램퍼는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 제2 제국에서 몇 가지 혁신을 이루었지만, 히틀러, 스탈린 등이 따라한 독재자를 숭배 대상으로 삼는 모델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1920년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라고 주장하며, 전체주의 국가의 선전력을 활용했다.

피에르 뒤 부아 드 뒤닐락은 스탈린 숭배가 그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정교하게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많은 의도적인 왜곡과 거짓이 사용되었으며,[15] 모스크바 크렘린은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기록 보관소 접근을 거부했고, 주요 문서가 파괴되었다. 사진이 조작되었고 문서가 조작되었다.[16]

역사가 데이비드 L. 호프만은 "스탈린 숭배는 스탈린주의의 핵심 요소였으며, 따라서 소련 통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였다... 많은 스탈린주의 학자들은 숭배를 스탈린의 권력의 필수적인 부분 또는 스탈린의 과대망상증의 증거로 인용한다."라고 언급했다.[18]

라틴 아메리카에서 카스 머드와 크리스토발 로비라 칼트바서는 "지도자 숭배"를 "어떤 직책과도 무관하고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권력을 행사하는" 강력한 지도자인 ''카우디요''의 개념과 연결시킨다. 이러한 포퓰리즘 강력한 지도자들은 "남성적이고 잠재적으로 폭력적인" 것으로 묘사되며 개인 숭배를 통해 권위를 강화한다. 머드와 칼트바서는 이러한 연관성을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

일반적으로 혁명을 경험한 체제 하에서 일어나기 쉽고, 특히 공산주의가 권력을 잡은 국가에서 스탈린을 본보기로 삼은 것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122] 카를 마르크스는 생전에 자신에 대한 "개인 숭배"를 경계했으며, 정치적인 의미로 처음 이 단어를 사용했다.[123] 소련 밖의 공산주의 국가·공산주의 정당에는 특히 코민테른을 통해 확산되었으며, 중국마오쩌둥, 프랑스 공산당토레즈, 북한김일성·김정일·김정은 (북한의 개인 숭배),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등 스탈린 자신이 건국·창설을 지원한 국가나 단체, 투르크메니스탄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등 구 소련 구성국, 이라크사담 후세인, 시리아의 하페즈 알 아사드, 리비아무아마르 알 카다피아랍 사회주의를 내세운 국가의 지도자, 도미니카 공화국라파엘 트루히요를 비롯한 카리브해 지역의 국가 지도자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124]

1956년 소련의 흐루쇼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 운동은 당과 국가와의 유착, 당내 민주주의와 관료제의 문제 등의 논의를 회피하고, 주로 스탈린 개인의 거친 인격에 책임을 돌린 것이었으며, 대숙청의 원인도 개인 숭배의 만연에만 원인을 구했다.[124] 이처럼 개인 숭배 비판은 제도나 체제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기 쉽다고 여겨진다.[122]

6. 대중 매체의 역할

18세기와 19세기에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민주주의와 세속적 사상이 확산되면서, 군주가 대중에게 존경을 받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나폴레옹 3세[2]와 빅토리아 여왕[3]은 19세기에 널리 유통되고 수집된 자신의 ''carte-de-visite'' 초상화를 통해 이러한 대중의 존경심이 지속되는 것을 높이 평가했다.[4][5][6]

이후 라디오와 같은 대중 매체의 발달은 정치 지도자들이 이전에는 결코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대중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투영할 수 있게 했다. 20세기에 가장 악명 높은 인물 숭배가 나타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20세기에는 라디오 방송, 영화 그리고 이후에는 인터넷 콘텐츠 형태로 선전을 포장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 발전이 이루어졌다. 2013년에 토마스 A. 라이트는 "특히 정치 분야에서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는 점점 더 미디어와 자기 노출의 산물이 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지고 있다."[11]라고 언급했다.

로버트 N. 벨라는 미국 미디어에 초점을 맞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디어가 미국 정치에서 인격 숭배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또 어느 정도 만들어냈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물론 미디어가 혼자서 다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기여했다. 어쨌든, 미국 정치는 현대 세계에서는 드물 정도로 정치 지도자들의 개성에 지배되고 있다. 최근 몇 년간의 개인화된 정치에서 지도자의 '카리스마'는 거의 전적으로 미디어 노출의 산물일 수 있다."[13]

7. 예시



새로운 위대한 아르헨티나의 대장장이 (1947년 포스터)


헤이다르 알리예프 국제공항


호찌민 시에 위치한 호찌민 동상


이스탄불에서 아타튀르크를 기리는 초상화


트루히요를 찬양하는 어록


일반적으로 한 명의 지도자는 혁명적 변화와 연관되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필수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이러한 현상은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 소련이오시프 스탈린, 북한김일성과 그의 후손들, 중화인민공화국마오쩌둥전체주의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얀 플램퍼는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 제2 제국에서 몇 가지 혁신을 이루었지만, 1920년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독재자를 숭배 대상으로 삼는 모델을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피에르 뒤 부아 드 뒤닐락은 스탈린 숭배가 그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의도적인 왜곡과 거짓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15]

라틴 아메리카에서 카스 머드와 크리스토발 로비라 칼트바서는 "지도자 숭배"를 ''카우디요''의 개념과 연결시키며,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을 그 예시로 든다.[1]

  • '''아시아'''
  • 중화인민공화국마오쩌둥에 대한 존경심은 그의 행동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일반적인 지식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널리 퍼져 있다.[14]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마오의 개인숭배는 전례 없는 수준으로 치솟았다.
  • 북한의 김씨 일가를 둘러싼 개인 숭배는[80] 수십 년 동안 존재해 왔으며, 북한 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81]
  • 아제르바이잔에서는 헤이다르 알리예프 대통령이 1993년 취임 이후 ''“아제르바이잔의 아버지”''로 칭송되며 개인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128][129][130]
  • 베트남에서는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개인 숭배가 1950년대부터 시작되어 통일 이후 남쪽으로 확대되었다. 베트남 공산당은 호찌민을 ''“불변의 성인”''으로 칭송하며 종교적인 지위를 부여했다.[157]
  • 터키에서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기리는 건축물이 전국에 세워졌으며, ''“위대한 지도자”'', ''“영원한 사령관”'' 등으로 불리며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148]
  • 이라크사담 후세인은 자신의 그림, 포스터, 동상 등을 전국에 설치하고, 자신의 얼굴을 화폐에 새기는 등 개인 숭배를 통해 이라크 사회를 결속시키려 했다.[124]
  • 시리아하페즈 알아사드는 국가 주도의 개인 숭배를 통해 권력을 유지했으며, 그의 영웅적인 모습을 담은 그림을 공공 기관에 배치하고, 학교에서는 그를 찬양하는 노래를 가르쳤다.[141]
  • 투르크메니스탄의 대통령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는 1985년부터 2006년까지 정권을 장악하며 이례적인 개인 숭배를 벌였다.[152][153]
  • 말레이시아에서는 1957년 독립 이후 장기 집권 중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이 역대 총리들에게 '독립의 아버지', '개발의 아버지' 등과 같은 호칭을 부여하며 우상화 논란을 빚고 있다.[1]
  • 필리핀에서는 지역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름과 사진을 정부 프로젝트 게시판에 게시하는 등 개인 숭배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 한다.[138][139][140]

7. 1. 아시아

아프가니스탄의 첫 공산주의 지도자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는 혁명 성공 이후 ''“위대한 지도자”'', ''“동쪽의 별”'', ''“위대한 사상가"''와 같은 칭호를 받았다. 알바니아의 장기 집권 독재자 엔베르 호자는 스탈린 및 마오쩌둥과 유사한 방식의 개인 숭배를 시행했다. 호자는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천재로 묘사되었고, 도시마다 동상이 세워졌으며, 교과서에는 그의 어록이 포함되었다. 알바니아 노동당은 호자를 ''“자애로운 동무”'', ''“유일한 지도자”'', ''“위대한 교사”''와 같은 칭호로 찬양했다.

천안문의 장제스 사진


중화민국에서는 쑨원과 장제스를 중심으로 개인 숭배가 이루어졌다. 장제스는 ''“장공(蔣公)”''으로 불렸으며, 그를 찬양하는 교과서와 노래는 1987년 계엄령 해제 전까지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헤이다르 알리예프 대통령이 1993년 취임 이후 ''“아제르바이잔의 아버지”''로 칭송되며 개인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128][129][130]

베트남에서는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개인 숭배가 1950년대부터 시작되어 통일 이후 남쪽으로 확대되었다. 베트남 공산당은 호찌민을 ''“불변의 성인”''으로 칭송하며 종교적인 지위를 부여했다.[157]

터키에서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기리는 건축물이 전국에 세워졌으며, ''“위대한 지도자”'', ''“영원한 사령관”'' 등으로 불리며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148]

이라크사담 후세인은 자신의 그림, 포스터, 동상 등을 전국에 설치하고, 자신의 얼굴을 화폐에 새기는 등 개인 숭배를 통해 이라크 사회를 결속시키려 했다.[124]

시리아하페즈 알아사드는 국가 주도의 개인 숭배를 통해 권력을 유지했으며, 그의 영웅적인 모습을 담은 그림을 공공 기관에 배치하고, 학교에서는 그를 찬양하는 노래를 가르쳤다.[141]

말레이시아에서는 1957년 독립 이후 장기 집권 중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이 역대 총리들에게 '독립의 아버지', '개발의 아버지' 등과 같은 호칭을 부여하며 우상화 논란을 빚고 있다.[1]

필리핀에서는 지역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름과 사진을 정부 프로젝트 게시판에 게시하는 등 개인 숭배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 한다.[138][139][140]

7. 1.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 주민들이 2012년 평양 만수 언덕에 있는 김일성김정일의 동상에 헌화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개인 숭배 현상의 일환인 아리랑 축제의 모습.


북한 지배 가문인 김씨 일가를 둘러싼 개인 숭배는[80] 수십 년 동안 존재해 왔으며, 북한 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8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인정하지 않지만, 많은 탈북자와 서방 방문객들은 정권을 비판하거나 "적절한" 존경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엄격한 처벌이 가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진술한다.[82][83] 개인 숭배는 김일성이 1948년 권력을 잡은 직후 시작되었으며, 1994년 그의 사망 이후 크게 확장되었다.

북한 개인 숭배의 만연함과 극단적인 성격은 요제프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개인 숭배를 능가한다.[84] 이 숭배는 또한 지도자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과 헌신의 강렬함,[85] 그리고 숭배를 유지하고 그로 인해 정권 자체를 유지하는 데 있어 가족주의의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수행하는 핵심적인 역할로 특징지어진다. 북한의 개인 숭배는 주체사상전체주의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저널리스트 브래들리 마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일성김정일이 행한 개인 숭배를 보도했다. 1979년 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취재 당시에 거의 대부분 음악, 미술, 조각에서 김일성을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했으며, 개인 숭배 현상은 그의 아들인 김정일에까지 확장되어, 그를 ''“친애하는 지도자”''로 추앙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자기 자신이 개인 숭배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미국 종교의 자유 수사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학생들이 개인 숭배의 일환으로 김일성을 감사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을 찾아냈다.[136] 김일성에 대한 추앙은 그가 죽은 1994년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김일성이 영원히 살기를 기념하는 ''“영생”''기념비가 전국적으로 건립되었고, 각 기념비마다 그의 생일이나 그가 죽은 일자에 모금활동을 하도록 되어있다.[137] 2011년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에게도 숭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1946년 5월 1일 김일성의 생명을 구한 소련 군 장교 야코프 노비첸코도 1984년경 개인 숭배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그곳에서 개인 숭배를 형성한 유일한 비한국인으로 여겨진다.

7. 1. 2.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마오쩌둥 동상


마오쩌둥의 개인숭배는 1949년 집권 이후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중화인민공화국 통치 기간 동안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대중 매체, 선전 및 기타 기술을 사용하여 마오쩌둥의 지위를 서방 세력에 맞서고 중국을 공산주의의 등불로 이끌 수 있는 영웅 지도자로 격상시켰다. 그러나 마오 자신은 개인숭배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40]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마오의 개인숭배는 전례 없는 수준으로 치솟았다. 마오의 얼굴은 인민일보의 머리 기사에 굳건히 자리 잡았고, 그의 초상화(12억 개) 수는 중국 인구보다 많았다. 마오 주석 배지는 총 48억 개가 제조되었다.[41] 모든 중국 시민에게는 ''마오 주석 어록''이 주어졌으며, 모든 공공 행사에서 전시하고 매일 책의 내용을 인용해야 했다.[42] 마오쩌둥은 대체로 ''“위대한 지도자 마오 주석”''으로 불렸고, 문화 대혁명 시기에는 ''“위대한 지도자이며 최고 군 사령관이며 위대한 선생님이며 위대한 조타수”''라는 칭호가 붙여졌다.[131] 마오는 1970년 에드가 스노우와의 대화에서 이러한 칭호를 비난하고 "선생님"이라고 불릴 것을 고집했다.[43]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 사후에도 계속되었다. 그의 권력 계승자인 화궈펑 또한 자신을 ''“뛰어난 지도자 화 주석”''이란 말로 숭배했다. 그러나 1990년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이후 개인 숭배 동상은 파괴되었고, 현재 중국 공산당은 개인 숭배를 문화 대혁명 기간의 혼돈 때문에 좋지 않게 본다.[44][45][46]

개인숭배는 2012년 집권 중국 공산당의 중앙서기이자 최고 지도자가 된 이후 시진핑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37][38][39] 덩샤오핑은 문화 대혁명의 비참한 결말에 대한 반성으로 개인 숭배를 엄격히 금지했지만, 시진핑 체제가 되면서 개인 숭배가 부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7. 1. 3. 아제르바이잔

헤이다르 알리예프의 개인 숭배는 1993년 대통령 취임부터 2003년 사망할 때까지 아제르바이잔의 정치와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아들 일함 알리예프가 권력을 승계했다.[128][129] 알리예프는 구 소련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회원이자 1967년부터 1987년까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지도자였고, 1993년에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되었다. 취임 후 가족, 정당 회원, 석유 수입, 후원을 기반으로 독재 권력을 구축했으며,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알리예프를 '''“아제르바이잔의 아버지”'''라고 찬양했다.[130]

7. 1. 4. 투르크메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의 대통령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는 1985년부터 2006년까지 정권을 장악하며 이례적인 개인 숭배를 벌였다.[152][153] 니야조프는 루흐나마라는 책을 통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자신을 찬양하도록 주입시켰는데,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일성과 유사하게 창조 신화도 포함되어 있었다.[154] 니야조프 정권 시기에는 표현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가 극도로 억압되었고, 반대 세력은 수용소에 끌려가거나 해외로 추방 또는 망명당했다. 남겨진 유가족들은 그의 어용 정권에게 핍박받았다. 투르크메니스탄 전역에는 그를 기리는 초상화와 동상이 건립되었으며, 텔레비전 방송에서도 그의 실루엣이 담긴 로고가 사용되었다. 그의 사망 이후, 미국 정부는 니야조프 숭배 현상을 "국가 주도의 종교"라고 평가했다.[155]

투르크메니스탄의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의 회전하는 동상


니야조프의 사후 숭배 현상은 막을 내린 듯했으나, 국제 인권 감시회의 “2012년 세계 현황”에 따르면,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함메도프가 그의 뒤를 이어 숭배를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156] 프랑스 통신사와 국경 없는 기자회는 이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투르크메니스탄 전역에 그를 기리는 동상과 초상화가 이전 대통령을 대신해서 베르디무함메도프를 기린다고 보도했다.[102][103]

7. 1. 5. 터키

터키에서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기념하는 건축물이 터키 전역에 분포해 있다. 그를 기리는 건축물로는 아타튀르크 국제공항, 금각만 위에 설치된 아타튀르크 다리, 아타튀르크 댐, 아타튀르크 올림픽 스타디움이 있다. 터키에서 아타튀르크는 주로 ''“위대한 지도자”'', ''“영원한 사령관”'', ''“최고의 교사”'', ''“터키의 영원한 지도자”'' 등으로 불린다.[148] 터키의 모든 도시에는 터키 정부에 의해 건립된 아타튀르크 동상이 있으며, 대부분의 도시에서 그의 얼굴이나 이름을 볼 수 있다. 그의 초상화는 터키의 모든 공공 기관, 학교, 교실, 교과서, 터키 화폐에서 볼 수 있으며, 일반 가정집에도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148] 그의 사망 시기인 11월 10일 오전 9시 5분경에는 모든 일이나 운전을 중단하고 그를 기리는 추모식을 한다. 1951년, 터키 의회는 아타튀르크를 모욕하거나 그를 기리는 기념비를 파괴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처벌하기 시작했고, 이 법은 현재에도 유효하다.[149] 터키 정부는 이 법안을 위반한 홈페이지를 처벌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아타튀르크를 모욕하는 발언이 담긴 홈페이지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아타튀르크 숭배는 1920년 그를 새긴 동상이 건립되면서 시작되었다.[150] “아타튀르크”라는 말 자체가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이며, 이후 “아타튀르크”라는 말은 터키 정치와 사회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151] 이러한 아타튀르크의 개인 숭배 현상은 학계에서 흥미를 끌기도 했다. 한편 아타튀르크 숭배 현상은 “현재까지 가장 긴 숭배 현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7. 1. 6. 이라크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독재 권력을 구축하면서 후세인 숭배 현상을 일으켜 이라크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라크 전역에 그의 그림, 포스터, 두상, 벽화가 건립되고 그려졌으며, 학교, 공공 장소, 공항, 백화점 벽면, 그리고 이라크 화폐에 그의 얼굴이 새겨졌다. 후세인의 개인 숭배는 이라크 사회에 있는 다양한 집단을 결속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 후세인은 베두인 복장이나 쿠르드족 전통 의상, 서구식 양복 등 다양한 복장을 착용했는데, 이는 베두인족과 쿠르드족의 통합, 현대적인 지도자로 보이기 위한 장치였다. 또한 그는 예복을 갖추고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독실한 무슬림으로 묘사되기도 했다.[124] 국제 공항, 대학, 다리, 댐, 경기장, 문화 센터, 거리, 도시 구획지, 로켓과 같은 물체들에 사담의 이름이 새겨졌다. 후세인은 개인용 궁전에 황금 수세식 변기도 사용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으며, 국가 지도자들이 그에게 선물한 물품들은 그의 궁전에 전시되었다. 또한 네부카드네자르 궁전과 같이 현대에 재건축된 고대 유품들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지도록 명령했다. 그가 쓴 전기와 문학은 지식을 측정하기 위해서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배워야 했다. 수많은 문학, 음악, 과학적 지식과 찬양 문구들은 그에게 바쳐졌으며, 국영 방송사는 화면 구석에 모스크와 함께 그의 얼굴을 넣었다. 하지만 몰락 이후 그의 동상들과 기념비는 모두 파괴되었고 우상 숭배들도 모두 해제되었다.

7. 1. 7. 시리아

시리아에서 하페즈 알아사드는 권력 유지 전략으로 국가 주도의 개인 숭배를 시행했다.[141] 그의 영웅적인 모습을 담은 그림이 시리아 전역의 공공 기관에 배치되었다. 그는 유명 장소의 이름을 자신이나 가족 구성원의 이름으로 바꾸었고, 학교에서는 하페즈 알아사드를 찬양하는 노래를 가르쳤다. 수업 시작 전에는 항상 "우리의 영원한 지도자, 아사드여"라는 찬양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의 조각상은 무함마드 옆에 제작되었고, 사후에는 그의 어머니가 후광이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시리아 정부는 그를 "성인"으로 간주했다.[142] 이러한 우상화는 시리아 국민들이 그를 지적이고 우월하며 겸손한 지도자로 인식하게 했고, 그의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에게까지 이어졌다.[143]

시리아 은 파운드화에는 하페즈 알 아사드의 이미지가 새겨져 있다.




1970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바트주의자 하페즈 알 아사드는 자신의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개인 숭배를 확립했다. 바트당 충성파들은 그를 "''알-아바드''"로 칭했는데, 이는 종교적 의미를 가진 아랍어 용어이다. ''알-아바드''는 "영원, 무한, 불멸"을 의미하며, 종교 지도자들은 이 용어를 신의 속성과 관련하여 사용한다. 아사드를 ''알-아바드''로 칭함으로써, 시리아 바트 운동은 하페즈 알 아사드를 시리아 국가와 시리아 국가를 대표하는 "불멸의", "신과 같은 존재"로 격상시켰다. ''알-아바드''의 또 다른 의미는 "영구적인" 것으로, 아사드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계속 살아있는 하페즈 알 아사드가 창조한 영원한 정치 질서의 영구적인 현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국가 선전에 사용된다. 이 용어의 동사 형태인 ''아바다''는 "폭력의 상징적이고 수행적인 측면"을 포함하여 "대량 학살을 저지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차원은 아사드 정권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한 폭력을 독점하고 국가 테러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하마 학살, 카미실리 학살, 시리아 내전의 학살과 같은 대량 학살 행위가 포함된다.[94]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은 소련 국가 선전가와 협력하여 하페즈 알 아사드의 아랍 사회주의 영웅 숭배를 만들었다. 이는 루마니아북한과 같은 소련 블록 독재 정권에서 만연했던 개인 숭배를 모방한 것이다. 1970년대 아사드에 대한 영원한 충성(''바이아'')의 의무로 모든 시리아 시민을 묶는 도구로 시작된 이 선전은 1980년대에 더욱 강화되었다. 국가는 시리아의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고, 바트당은 하페즈 알 아사드를 "영원의 지도자"(''qa'iduna ila l-abad'')로 신격화하고 그를 살라딘보다 "두 번째"로 묘사하여 아랍인에게 시온주의자 십자군에 대한 승리를 보장했다. 유치원, 교과서, 교육 기관 및 바트주의 미디어를 통해 아사드주의 선전은 "살라딘 숭배" 아래에서 번영하는 아버지 같은 지도자에 의해 보호받는 동질적인 아랍 국가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아사드 정권은 기념물, 이미지, 벽화, 포스터, 조각상, 우표, 바트주의 상징, 지폐, 사진, 배너, 국영 TV 등을 통해 일상적인 시리아 생활에서 하페즈 알 아사드의 개인 숭배 도상학을 영구적으로 존경한다.[95][96]

바트주의 선전은 하페즈 알 아사드를 "국민"과 동일시했으며, 그를 "국부"이자 의사, 군인, 변호사, 교육자, 정치가, 장군 등 다중 역할을 맡은 특별한 인간으로 선언했다. 모든 시민 사회 단체, 노동 조합 및 모든 형태의 문화 또는 종교 단체는 "하페즈 알 아사드에 대한 구속력 있는 서약"을 선언하고 그의 도상학을 표시해야 합법화된다. 그의 아버지의 개인 숭배는 바샤르 알 아사드에 의해 그의 정권의 정당성의 기둥이자 그의 개인 숭배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바샤르의 숭배는 기술 관료적인 아랍 사회주의 테마를 위해 종교적 요소를 축소하고, "이스라엘과의 휴면 상태의 전쟁"으로 인한 시온주의 세력의 음모론적인 위협에 대한 군국주의적 강조를 했다.[95]

개인 숭배는 아사드 왕조가 그들 가족의 농촌 알라위파 기원을 대중의 눈에서 축소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아사드 가문 구성원의 이미지는 시리아의 유적지와 기념물에 설치되어 왕조를 바트주의 시리아의 역사와 결합시켰다. 하페즈 알 아사드와 바샤르 알 아사드의 벽화와 조각상은 중세 베두인의 의상을 입거나 하룬 알 라시드와 같은 술탄으로 묘사되어 시리아의 도시, 마을 등에 건설되었다.[95] 아사드주의 개인 숭배는 심리적 도구로 작용하여, 바트주의 체제가 영원히 통치할 것이라고 시리아 사회에 주장하려 했다.[94]

7. 1. 8. 베트남



베트남 공산당 정권은 1950년대 북베트남 시절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개인숭배를 벌였고, 이후 베트남 통일 이후 남쪽으로 확대되었다.[157][120] 호찌민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자주 영웅시 되었고, 출판물이나 방송에서 호찌민이나 그의 결함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은 "인민 혁명에 반한다"는 구실로 체포되거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157] 호찌민은 베트남 공산당으로부터 ''“불변의 성인”''으로 종교적인 지위를 받았다.[157]

호찌민 동상, 호찌민 시 시청 앞


남베트남의 옛 수도였던 사이공은 1975년 5월 1일, 사이공 함락 하루 뒤에 공식적으로 호찌민 시로 개명되었으며, 이는 공식적으로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켰다.[120]

7. 1. 9.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는 개인 우상화를 직접적으로 시행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우상화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처럼 강제적인 편은 아니지만, 반대 의견을 표출할 경우 처벌이 따르는 경우가 있어 종종 문제가 된다. 1957년 독립 이후 장기 집권 중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은 역대 지도자들에게 호칭을 부여하며 사실상 일당 독재를 강행하고 있다. 여기서 호칭이 붙는 지도자들은 국왕이 아닌 실권자인 총리이다. 독립 이후 현재까지 집권한 6명의 총리 모두 UMNO 출신이며, 성향은 조금씩 다르지만 총리가 바뀔 때마다 우상화 논란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초대 총리인 툰쿠 압둘 라만은 '독립의 아버지', 2대 총리 압둘 라자크 후세인은 '개발의 아버지', 3대 총리 후세인 온은 '단결의 아버지', 4대 총리 마하티르 빈 모하맛는 '현대화의 아버지', 5대 총리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는 '인적 자원개발의 아버지'로 불린다. 지도자를 찬양하거나 지지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반대할 경우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안전을 보장받기 어렵다. 현재 나집 라작 정권 또한 부분적인 우상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반대자들이 탄압받는 현실은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선거 때마다 부정을 저질러 정권을 연장한다는 비판이 있으며, '지도자는 바뀔지 몰라도 정권은 영원하다'는 식의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1]

7. 1. 10. 필리핀

필리핀에서는 국가 지도자가 아닌 지역 정치인들이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개인 숭배를 벌이기도 한다. 이들은 대중 매체에서 주로 ''“에팔 정치인”''으로 불리는데, ''“에팔”''은 필리핀 속어로 ''“관심을 끄는 사람”''을 의미한다. 지역 정치인들은 정부 프로젝트 게시판에 자신의 이름과 사진을 걸어 이미지 향상을 꾀한다.[138][139][140] 이러한 정치인 홍보가 심해지자 2011년 11월 상원 미리암 산티아고는 정치인들의 에팔 행위를 근절하고자 상원 법안 제1967호(반(反)에팔 법안)를 제출했으며, 2013년에 다시 제출하였다.



오늘날 보수 단체와 진보 단체 모두 정치 지도자를 중심으로 개인 숭배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레니 로브레도 지지자들은 '''kakampinks''' 또는 ''pinklawan''으로 불리는데, 이는 그녀가 자유당과 연관되어 있고 분홍색/자홍색을 브랜드화한 것에 대한 말장난이다. 봉봉 마르코스와 그의 가족은 주로 그의 아버지의 유산을 중심으로 뭉쳤으며, 로베르토 두테르테와 그의 가족은 ''독실한 두테르테 지지자''로 불리는데, 이는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다바오 죽음의 부대의 약자에 대한 말장난이다.

7. 2. 유럽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였던 캄보디아의 학생들은 1940년대 초반 필리프 페탱 제독을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지도자, 영광스러운 그의 이름... 악마로부터의 수호자”''라는 문구로 시작하며 기도를 드려야 했다.[132]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 파시스트 이탈리아베니토 무솔리니, 스페인프란시스코 프랑코 등 유럽의 독재자들은 개인 숭배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하려 했다. 이들은 자신을 신격화하거나 특별한 존재로 묘사하며 대중을 선동했다.

이탈리아가 민주주의를 회복한 후에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같은 사람들은 2000년대에 들어서 자신이 장악한 언론을 통해 우상화 작업을 벌인다는 비판을 받았다.[133]

폴란드에서는 군 사령관이자 정치인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에 대한 개인 숭배가 1,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시작되어 그의 사후에도 지속되었고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냉전 기간 동안,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동구권 내에서 가장 개인 숭배를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일성 정권을 많이 차용했다.

소련블라디미르 레닌은 최초로 개인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나, 생전에 이를 비난했다. 레닌 사후 요시프 스탈린은 레닌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자신의 개인 숭배를 구축했다.

7. 2. 1. 나치 독일

나치 독일의 총통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는 대중 선전에서 스스로를 "독일인의 최고 심판, 독일 제국의 일등 병사, 신독일의 일등 노동꾼, 영원한 최고 군 사령관, 유럽의 최고 군 지도자, 신성한 산의 신성한 수호자"로 칭했다.[132] 당시 대중 문화는 히틀러를 독일인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신과 같은 존재로 묘사했다.

1936년 뉘른베르크 집회에서 아돌프 히틀러


1920년대 초 나치당 초기부터 나치 선전은 나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의 전능한 수호자이자 구원자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과 베르사유 조약 이후 독일 국민은 바이마르 공화국 아래 혼란에 빠졌고, 나치 선전에 따르면 오직 히틀러만이 그들을 구원하고 독일의 위대함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 이는 곧 "지도자 숭배"를 낳았다.[79] 1932년 5번의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나치 신문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히틀러를 그를 따르는 대중 운동을 거느린 사람, 독일을 구원해야 한다는 하나의 사명을 가진 '다가오는 독일의 지도자'로 묘사했다. 1934년 장검의 밤 사건 이후 히틀러는 스스로를 "독일 국민의 운명에 대한 책임"을 혼자 짊어진 사람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히틀러가 독일 국민의 민족 공동체인 ''민족 공동체''의 유일한 보호자라는 신화를 더욱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나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히틀러를 "영웅적인 천재"로 묘사하는 이미지를 만들었다.[79] 이 신화는 "만약 지도자께서 아셨더라면"이라는 말과 개념을 낳았다. 독일인들은 나치 권력층에 책임을 돌리는 문제들이 히틀러가 상황을 알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나치 고위 간부들이 비난을 받았고 히틀러는 비판을 면했다.

영국의 역사가 이언 커쇼는 1987년에 그의 저서 ''"히틀러 신화": 제3제국의 이미지와 현실''에서 히틀러는 적어도 독일 국민들이 존경하는 몇 가지를 대변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제3제국이 여러 면에서 성취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국가 부흥의 상징이자 구현이 되었다고 썼다.

1938년 독일 바트 고데스베르크에 있는 아돌프 히틀러


1930년대 초 히틀러가 대공황 기간 동안 독일 경제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인식 때문에 이 신화는 신빙성을 얻었다. 그러나 알베르트 슈페어는 1939년까지 이 신화가 위협받았고 나치는 행사에 환호하는 군중을 조직해야 했다고 썼다.

이 신화는 특히 소련과 서방 연합국에 대항하여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 국민을 통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히틀러가 폴란드 침공서유럽에서 초기에 승리했을 때 이 신화는 절정에 달했지만, 대부분의 독일인에게 전쟁에서 졌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신화는 드러났고 히틀러의 인기는 하락했다.

1945년 3월 11일 바이에른의 작은 마을 마르크트셸렌베르크에서 연설이 끝날 때 국방군 부대장이 지도자를 위한 지크 하일을 외쳤을 때, 참석한 국방군도, 국민돌격대도, 그리고 나타난 민간인 구경꾼들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7. 2. 2. 파시스트 이탈리아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통치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그의 통치 아래에서 많은 우상화 작업을 벌였다. 우상화 작업은 "무솔리니의 말은 언제나 옳다"는 말로 시작했다. 비록 그가 르네상스인, 군인, 가족적인 모습으로도 그려졌지만, 대개 그는 마초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모든 것에 능통한 만능인으로도 묘사되었다.[133]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죽음을 이겨낸 것과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은 신화는 독재자인 그를 신비롭고 불멸의 존재로 그려냈다. 게다가 매체들은 무솔리니를 신에게 선택받은 것으로 묘사했고, 그를 전능하고 신과 같은 초인처럼 묘사했다. 매체에서 그는 이탈리아인을 지적으로,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한층 끌어올렸다고 주장했다. 권력을 잡기 전부터 그를 찬양하는 노래가 존재했으며, 에티오피아 침공은 무솔리니의 야망인 로마 제국 부활이 그 목적이었다.

"얘들아, 너희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사랑해야 해. 그는 항상 조국과 이탈리아 국민의 이익을 위해 일하거든. 너희는 아빠, 엄마, 선생님에게서 이 말을 여러 번 들었을 거야. 만약 이탈리아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면, 우리는 그분 덕분이야." (1936년 초등학교 교과서)


베니토 무솔리니이탈리아 파시즘의 화신으로 묘사되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보이기를 원했다. 다른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무솔리니를 일 두체("지도자")로 불렀다. 무솔리니는 거의 전지전능한 지도자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무솔리니 통치 시대의 이탈리아에서 흔히 사용되던 말은 "두체는 항상 옳다"(이탈리아어: ''Il Duce ha sempre ragione'')였다. 무솔리니는 일반 이탈리아인들이 지역 관리들과의 차이를 제쳐두고 하나로 뭉칠 수 있도록 이탈리아의 통합 세력이 되었다. 무솔리니를 둘러싼 인격 숭배는 그가 자신의 개인적인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고, 사회적, 정치적 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 작용했다.

무솔리니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것과 암살 시도의 실패에서 살아남은 것은 그에 대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사용되었다. 파시스트 선전은 무솔리니의 몸이 성 세바스찬이 화살에 꿰뚫린 것처럼 파편에 꿰뚫렸다고 주장했는데, 차이점은 무솔리니가 이 시련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무솔리니는 또한 무솔리니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고통받고 희생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와 비교되었다.

언론은 무솔리니에 대해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받았다. 무솔리니는 자신이 어떤 사진을 게시할 수 있는지 직접 허가했고, 특정 그룹에서 자신이 묘사되기를 원하는 것보다 약하거나 덜 두드러지게 보이는 사진은 모두 거부했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전쟁(1935~37년)은 선전에서 로마 제국의 부활로 묘사되었으며, 무솔리니는 최초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로 묘사되었다. 1937년 리비아 공식 방문 중 자신의 이미지와 아랍 세계에서의 파시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무솔리니는 스스로를 "이슬람의 보호자"라고 선언했다.

7. 2. 3. 소련

소련에서 처음으로 형성된 개인 숭배는 블라디미르 레닌이었다. 소련의 해체까지 레닌의 초상화와 어록은 문화의 보편적인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생전에 레닌은 개인 숭배를 구축하려는 모든 노력을 맹렬히 비난했는데, 그의 눈에는 개인 숭배가 마르크스주의와 상반되었기 때문이다.[89]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공산당의 당원들은 레닌의 이미지를 프롤레타리아트를 해방할 모든 것을 아는 혁명가로 더욱 사용했다. 레닌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조치를 취하려 했지만, 1918년 8월에 암살될 뻔하면서 중단되었다. 그의 건강은 1922년 5월과 1923년 3월에 가장 심각한 뇌졸중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이 상태에서 레닌은 걷고 말하는 능력을 잃었다. 이 시기에 공산당은 레닌의 개인 숭배의 근거로 레닌의 업적을 홍보하기 시작했고, 그를 도덕성과 혁명적 사상의 이미지로 사용했다.[90]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하고 레프 트로츠키가 추방된 후, 요시프 스탈린은 소련을 구현하게 되었다. 레닌의 개인 숭배가 세력을 얻고 충분한 영향력을 창출하자 스탈린은 자신의 이상을 자신의 숭배에 통합했다.[89] 다른 개인 숭배와는 달리 레닌과 스탈린의 숭배는 지도자에게 권력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공산당에 권력과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숭배와 자신을 중심으로 한 다른 터무니없고 거짓된 주장들에 대해 비판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태도는 1930년대에 숭배를 옹호하는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대숙청 이후 이를 장려하기 시작했다.[91] 스탈린은 자신의 개인 숭배를 더욱 발전시키는 국가의 행동에 거의 반대하지 않았지만, 소련 선전가들의 일부 계획에는 반대했다. 니콜라이 예조프모스크바의 이름을 "스탈리노다르"로 개명할 것을 제안했을 때, 이는 "스탈린의 선물"을 의미하는데, 스탈린은 반대했다.[92] 레닌과 스탈린 숭배의 아이디어를 통합하기 위해 스탈린은 대중의 시각에서 레닌의 삶의 측면을 변경하여 자신을 권력에 앉혔다. 이를 통해 두 숭배가 일치하여 레닌과 스탈린 모두 동일한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스탈린이 레닌의 정당한 계승자이며 레닌이 그랬을 방식으로 소련을 이끌고 있음을 보여주었다.[89]

1929년 12월, 스탈린은 50세 생일을 기념했는데, 이로 인해 스탈린은 소련 언론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소련의 인쇄 매체는 그를 묘사하기 위해 "위대한", "사랑받는", "담대한", "현명한", "영감을 주는", "천재"와 같은 긍정적인 형용사를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농민들에게 행해진 연설은 스탈린을 "우리의 최고의 집단 농장 노동자", "우리의 충격 노동자, 우리의 최고 중의 최고", "우리의 사랑, 우리의 지도 별"로 묘사했다. 1934년까지 스탈린이 국가를 완전히 통제하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예술과 문학의 승인된 방법이 되었다.[91]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도 스탈린 개인 숭배는 스탈린의 리더십을 흐루쇼프의 연설에서 제시된 특징에 따라 가부장제로 묘사했다.[90] 1936년 이후 소련 언론은 스탈린을 "국가의 아버지"로 묘사했다.[93]

소련의 선전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스탈린과 소련 어린이들 간의 상호 작용이었다. 그는 종종 소련의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진 어린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모습으로 자주 촬영되었다. 1935년에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위해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 감사합니다!"라는 문구가 보육원, 고아원 및 학교의 출입구 위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축제에서 이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소련 선전의 또 다른 핵심 요소는 스탈린과 레닌의 이미지였다. 많은 포스터에서 스탈린과 레닌은 함께 배치되어 그들의 우정과 이상이 하나임을 보여주었다. 1930년대 내내, 두 이미지가 있는 포스터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공산당의 정책 아래 국가와 군대를 결집시키는 방법으로 사용되었으며, 레닌은 혁명적 사상의 아버지로, 스탈린은 공산주의 이상을 실현할 제자로 간주되었다.[91] 스탈린은 또한 모스필름이 제작한 수많은 영화에 묘사되었으며, 모스필름은 소련의 붕괴까지 소련 주도 회사로 남아 있었다.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1956년에 '개인 숭배와 그 결과에 관하여'(О культе личности и его последствиях|개인 숭배와 그 결과에 관하여ru)라는 제목의 비밀 연설에서 전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정치 체제를 정의하면서 개인숭배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21]

1956년 소련의 흐루쇼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 운동은 당과 국가와의 유착, 당내 민주주의와 관료제의 문제 등의 논의를 회피하고, 주로 스탈린 개인의 거친 인격에 책임을 돌린 것이었으며, 대숙청의 원인도 개인 숭배의 만연에만 원인을 구했다.[124] 스탈린 사후에도 브레즈네프 체제나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 등 소련·러시아사의 장기 집권에서 스탈린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개인 숭배가 나타난다.[124]

7. 2. 4. 알바니아

알바니아의 장기 집권한 엔베르 호자스탈린마오쩌둥과 유사한 방식의 개인 숭배를 벌였다. 호자는 사실상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천재로 묘사되었다. 각 도시마다 동상이 세워지고 교과서에는 그가 말한 어록이 포함되었다. 알바니아 노동당 집권 시기에는 호자를 ''“자애로운 동무”'', ''“유일한 지도자”'', ''“위대한 교사”''라는 이름으로 극찬했다.

7. 2. 5. 루마니아

냉전 기간 동안,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동구권 내에서 가장 개인 숭배를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의 개인 숭배 현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일성 정권을 많이 차용했다. 본디 차우셰스쿠 자신에게만 개인 숭배를 행했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 그의 아내인 엘레나 차우셰스쿠도 1989년 정권이 붕괴되기 전에 숭배 대상이 되었다.[124]

7. 2. 6. 폴란드

폴란드의 개인 숭배 현상은 폴란드의 군 사령관이자 정치인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1,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시작하여 그의 사후인 1935년에도 계속되었고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피우스트스키의 숭배 현상은 대중 매체에 의해 그를 정치적 선지자와 능숙한 전략가로 포장했다. 숭배 현상은 그의 업적인 1차 대전 후유증 기간의 폴란드 독립과 소련-폴란드 전쟁, 수십 년의 불경기 회복과 연관을 지었으며 특히 폴란드의 공산 정권 때 그를 많이 찬양하였다. 현재에도 피우스트스키는 폴란드 역사에서 많은 긍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고 폴란드의 독립기념일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그의 권력 기반을 다진 11월 11일에 맞춰졌다.[1]

7. 2. 7. 스페인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 기간의 스페인스페인 내전이 끝난 1939년부터 카우디요라고 불리는 군사 독재 기간에 들어갔다.[144] 군사 독재 기간 초기 1년 동안에만 20만 명의 스페인인이 정치적 숙청과 기근, 내전으로 인한 질병으로 사망하였다.[145] 그는 최고 사령관 직책을 상징하는 제복을 입었고, 파르도 궁전에서 집무했으며, 그의 모습은 동전에서도 볼 수 있는 등 스페인의 왕과 같은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 그의 공식적인 지위는 '국가 원수'나 '스페인군 총사령관'이었으나, '신의 축복이 깃든 스페인의 지도자'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신의 축복이 깃든'이라는 칭호는 국왕에게 붙여지는 것이나 국왕이 아닌 사람에게 붙여진 사례는 프랑코가 유일했다. 프랑코는 스페인의 단일 체제를 추구하고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여 투우나 플라멩고와 같은 스페인 고유의 전통을 지켰으나,[146] 바스크카탈루냐와 같은 지방 문화나 그 외의 문화들은 “스페인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탄압받았다. 탄압받은 대표적인 예로는 카탈루냐의 사르다나 전통 춤이 있다. 1960년대부터 문화 검열이나 탄압은 약해지기 시작했다.

7. 3. 아메리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후안 도밍고 페론과 그의 두 번째 부인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으며, 현재에도 정의당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페론은 페론주의자들을 규합하고 정권을 잡기 위해 그와 그의 아내에 대한 숭배 작업을 벌였다.[127]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는 30년간 장기 독재를 하면서 개인 숭배를 강요했다. 트루히요 찬양 기념비가 전국에 설치되었고, 수도와 주의 이름, 높은 산의 이름까지 그의 이름을 따서 바꾸었다. “엘 헤페”로 불린 트루히요의 동상이 전국에 세워졌고, 다리와 공공기관에는 그의 명예를 기리는 문구가 새겨졌다. 국영 신문, 자동차 번호판, 전광판, 심지어 교회에까지 그를 찬양하는 문구가 사용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독재자들과는 달리 국가 자체를 개인 소유의 땅처럼 취급했으며, 그의 가족들도 개인 숭배 대상이었다.

아이티의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스스로를 우상화하고 자신을 국가의 화신으로 비유했다. 아이티 전통 부두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굳혔고, 자신을 부두교의 죽음의 화신인 “바론 사메디”에 비유했다. 뒤발리에 정권은 그를 ''“국가의 아버지”''라고 선전했고, “파파 독(Papa Doc)”이라고 부르며 신격화시켰다.

7. 3. 1.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후안 도밍고 페론과 그의 두 번째 부인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았고 현재에도 아르헨티나 정의당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페론의 추종자들은 페론이 가난을 척결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장했다고 추앙했지만, 반대파들은 그를 선동가라고 주장하며 독재자로 인식한다. 페론은 그들의 지지자인 페론주의자들을 규합하고 정권을 잡기 위해 그와 그의 아내에 대한 숭배 작업을 벌였다.[127]

후안 페론은 세 번이나 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에바 "에비타" 페론과 함께 많은 아르헨티나 국민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으며, 오늘날까지도 정의당의 아이콘으로 여겨지고 있다. 반면에, 학자들과 비판가들은 그를 종종 선동가이자 독재자로 여겼다. 페론은 육군 대령이자 전쟁 장관이었을 때 추축국에 동조했고[19], 심지어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외교 사절로도 활동했다. 그는 집권 기간 동안 프랑코 정권 스페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반대자들과 잠재적인 정치적 경쟁자들을 맹렬하게 박해했는데, 그의 첫 두 임기 동안 정치적 체포가 흔했다. 그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의 공화주의 원칙을 훼손했고 대부분의 언론에 대한 전면적인 검열을 강요했다.[20] 그의 선출 이후, 그는 자신과 그의 아내를 중심으로 한 인물 숭배를 구축했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아르헨티나의 정치 생활의 일부가 될 정도로 널리 퍼져 있다.[21]

페론 정권 동안 학교는 에비타의 자서전인 ''내 삶의 이유''를 읽도록 강요받았고, 노동조합 및 정부 직책은 열렬한 페론주의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졌으며, 신문은 검열되었고 텔레비전 및 라디오 네트워크는 국유화되었으며, 국영 언론만 허용되었다. 그는 종종 반대자들을 경멸하며, 그들을 반역자이자 외세의 대리인으로 묘사했다. 페론의 정치 권력에 순종하지 않거나 위협으로 인식되는 사람들은 직장을 잃고, 협박, 폭력, 괴롭힘을 당했다. 페론은 모든 주요 공교육 기관에서 20,000명 이상의 대학 교수와 교직원을 해고했다.[22] 이후 대학은 개입되었고, 교직원은 순응하도록 압력을 받았으며, 저항하는 사람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랐거나 해고되거나 추방되었다. 수많은 저명한 문화 및 지식인들이 투옥되었다.[23] 수천 명의 예술가, 과학자, 작가, 학자들이 나라를 떠나 북미나 유럽으로 이주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정치적 경쟁자들은 체포되어 수년간 고문을 받았으며[24][25] 페론이 축출된 후에야 석방되었다.[26]

7. 3. 2. 도미니카 공화국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는 30년간 장기 독재를 하면서 개인 숭배를 강요했다. 트루히요 찬양 기념비가 전국에 설치되었고, 그의 친위 내각은 수도 산토도밍고를 ''“트루히요 시(Ciudad Trujillo)"''로, 산크리스토발 주를 ''”트루히요 주“'', 가장 높은 봉우리인 두아르테 산을 ''”트루히요 산(Pico Trujillo)"''으로 이름을 바꾸는 것에 압도적인 찬성표를 던졌다. “엘 헤페”로 불린 트루히요의 동상이 전국에 세워졌고, 다리와 공공기관에는 그의 명예를 기리는 문구가 새겨졌다. 국영 신문은 앞면에 그를 찬양하는 문구를 실었으며, 자동차 번호판에는 ''“트루히요 만세!”''나 ''“국가의 후원자(트루히요)의 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산토도밍고에는 ''“신과 트루히요(Dios y Trujillo)"''라는 문구를 밤낮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전광판이 설치되었다. 심지어 교회에도 ''”천당에는 하느님, 지상에는 트루히요(Dios en cielo, Trujillo en tierra)“''라는 찬양구를 걸어야 했다.[124] 트루히요는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독재자들과는 달리 국가 자체를 개인 소유의 땅처럼 취급했으며, 그의 가족들도 개인 숭배 대상이었다.

7. 3. 3. 아이티

아이티의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스스로를 우상화하고 자신을 국가의 화신으로 비유했다. 아이티 전통 부두교를 부활시키고 나중에 그 스스로를 부두교의 성직자로 주장하여 자신의 권력을 굳혔다. 자신의 우상화를 더욱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부두교의 죽음의 화신인 “바론 사메디”에 비유했다. 화신의 형태를 하기 위해서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를 사용한 것이 유명하다. 뒤발리에 정권은 그를 ''“국가의 아버지”''라고 선전했고 심지어는 그를 “파파 독(Papa Doc)”이라고 부르며 신격화시켰다.

프랑수아 뒤발리에(''파파 독'')는 1957년부터 1971년 사망할 때까지 아이티 대통령으로 재임한 아이티 정치인이었다. 그는 1957년 총선에서 포퓰리즘과 흑인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58년 군사 쿠데타를 저지한 후, 그의 정권은 급속히 더 독재적이고 전제적으로 변모했다. 정부 비밀 암살단인 통통 마쿠트(Tonton Makout|통통 마쿠트ht)는 뒤발리에의 반대자들을 무차별적으로 고문하거나 살해했다. 통통 마쿠트는 매우 광범위하게 활동하여 아이티인들은 사적으로라도 어떤 형태의 반대 의견을 표출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게 되었다. 뒤발리에는 나아가 아이티 신화의 요소를 인격 숭배에 통합하여 통치를 공고히 하려 했다.[1]

7. 4. 아프리카

리비아무아마르 알 카다피, 말라위헤이스팅스 반다, 토고냐싱베 에야데마, 자이르모부투 세세 세코 등 아프리카의 독재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개인 숭배를 활용했다. 이들은 자신의 초상화를 곳곳에 걸고, 자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개인 숭배를 강요했다.

7. 4. 1. 리비아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시절 독재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는 개인 숭배를 시행했다.[134] 그의 얼굴은 여러 가지 물건, 포스터, 시계, 학생의 책가방에까지 그려졌다. 그의 어록들이 담긴 녹색서는 전국적으로 배포되었고, 그의 어록들은 공항, 거리, 심지어 펜에까지 새겨졌다. 그는 자신은 우상화를 원하지 않으나 리비아 국민들은 우상화를 원한다는 말까지도 했다. 리비아 전역에서 그의 지지자 무리들은 그에 대한 행사가 시행될 때마다 그를 찬양하거나 관심을 끌기 위해 나타났다. 카다피는 특유의 길고 강렬한 연설을 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주로 미국이나 이스라엘을 비판했던 것이 주 내용이었다.[135]

7. 4. 2. 말라위

헤이스팅스 반다말라위를 통치했던 독재자로, 말라위 전역에 걸쳐 광범위한 개인 숭배를 시도했다. 모든 사무용 건물 외벽에는 그의 초상화가 반드시 걸려있어야 했으며, 시계나 그림, 포스터와 같은 다른 물건들이 그의 초상화 위에 걸리는 것은 금지되었다. 영화 상영 시작 전에는 찬송가가 울리기 전에 항상 반다에 관한 영상이 나왔다. 반다가 어떤 도시를 순방하면, 항상 도시의 대표 여성이 공항에서 그를 접대하고 그를 위해 공연을 벌였다. 대통령을 접대하기 위해 특별한 옷을 입고 공연해야 했다. 이전 정부에 세워졌던 교회 건물들은 모두 폐쇄되었다.

7. 4. 3. 토고

2004년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토고의 독재자 냐싱베 에야데마는 토고 전역의 학교에서 그를 섬기는 노래를 부르도록 요구했다.[147]

7. 4. 4. 자이르

모부투 세세 세코자이르(현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신과 같은 대중적인 이미지를 만들었다. 모부투는 국가를 중앙 집권화했고, 막대한 부를 쌓았으나 경제는 후퇴했고 인권 탄압을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1]

8. 비판

일반적으로 개인숭배는 혁명을 경험한 체제 하에서 일어나기 쉽고, 특히 공산주의 국가에서 스탈린을 본보기로 삼은 것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122] 공산주의의 창시자인 카를 마르크스는 생전에 자신에 대한 "개인 숭배"를 경계했으며, 정치적인 의미로 처음 이 단어를 사용했다.[123] 소련 밖의 공산주의 국가·공산주의 정당에는 특히 코민테른을 통해 확산되었으며, 중국마오쩌둥, 프랑스 공산당토레즈, 북한김일성·김정일·김정은 (북한의 개인 숭배),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등 스탈린 자신이 건국·창설을 지원한 국가나 단체, 투르크메니스탄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등 구 소련 구성국, 이라크사담 후세인, 시리아의 하페즈 알 아사드, 리비아무아마르 알 카다피아랍 사회주의를 내세운 국가의 지도자, 도미니카 공화국라파엘 트루히요를 비롯한 카리브해 지역의 국가 지도자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124] 제3세계에서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나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영웅 숭배, 파시즘 운동에서의 지도자 원리에도 지도자 숭배의 양식이 나타난다.[122]

1956년 소련의 흐루쇼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 운동은 당과 국가와의 유착, 당내 민주주의와 관료제의 문제 등의 논의를 회피하고, 주로 스탈린 개인의 거친 인격에 책임을 돌린 것이었으며, 대숙청의 원인도 개인 숭배의 만연에만 원인을 구했다.[124] 이처럼 개인 숭배 비판은 제도나 체제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기 쉽다고 여겨진다.[122] 스탈린 사후에도 브레즈네프 체제나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 등 소련·러시아사의 장기 집권에서 스탈린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개인 숭배가 나타난다.[124] 중국에서는 문화 대혁명이라는 비참한 결말을 초래한 반성에서 덩샤오핑은 개인 숭배를 엄격히 금지했고, 중국에서는 개인 숭배가 금지되었지만, 시진핑 체제가 되면서 개인 숭배가 부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스탈린주의를 부정했던 신좌익도 한 바퀴 돌아 개인 숭배에 이르는 경우가 있다.

참조

[1] 서적 Populism: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Encyclopedia of Nineteenth-Century Photography http://dx.doi.org/10[...] Routledge 2013
[3] 뉴스 Fine Arts: Mr Mayall's Photographic Exhibition 1860-08-16
[4] 서적 Cartes de Visite in Nineteenth Century Photography. W. C. Darrah Publishing
[5] 웹사이트 Carte-de-visite: the photographic portrait as ʻsocial mediaʼ http://www.britishpo[...] 2013-03-19
[6] 학술지 Victorians Living in Public: Cartes de Visite as 19th-Century Social Media 2016
[7] 학술지 Disinformation: analysis and identification United States National Library of Medicine
[8] 웹사이트 Not all polarization is bad, but the US could be in trouble https://theconversat[...] 2022-01-03
[9] 서적 Personality Cults in Stalinism/Personenkulte im Stalinismus https://books.google[...] V&R Unipress
[10] 웹사이트 Brief von Karl Marx an Wilhelm Blos http://www.zeno.org/[...] 2013-02-22
[11] 학술지 What is character and why it really does matter https://fordham.bepr[...] Fordham University 2013
[12] 학위논문 The ABC of Sycophancy: Structural Conditions for the Emergence of Dictators' Cults of Personality https://repositories[...]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2015-08
[13] 학술지 The Meaning of Reputation in American Society https://scholarship.[...] 1986
[14] 뉴스 Mao's achievements 'outweigh' mistakes: poll https://www.aljazeer[...] 2013-12-23
[15] 학술지 Stalin – Genesis of a Myth 1984
[16] 학술지 Stalin the Charismatic Leader?: Explaining the 'Cult of Personality' as a legitimation technique 2011
[17] 학술지 Short Course of the History of the All-Russian Communist Party (Bolshevik) – An Encyclopedia of Stalin's Personality Cult 1989
[18] 학술지 The Stalin Cult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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