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언 (15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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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순언은 1530년에 태어난 조선 중기의 역관으로,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서자 출신이었으나 한어에 능통하여 역관이 되었으며, 명나라에서 류씨 소녀를 돕고 종계변무를 성사시키는 데 기여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명나라에 구원병 파병을 요청하여 5만 명의 군사를 지원받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공로로 광국공신에 책록되었으며, 그의 일화는 후대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홍순언은 남양 홍씨로, 첨사 홍호의 동생인 예사 홍복의 12대손이다. 아버지는 가선대부에 추증된 홍겸이며, 그는 서자였다. 출생지는 한성부라는 설과 경기도 광주군이라는 설이 있다. 일찍이 한어(漢語)를 익혀 한어역관이 되었으며, 처음 이름은 덕룡이었으나 후에 순언을 본명으로 사용하였다.
허봉은 홍순언이 말을 조리 있게 잘 한다고 평가했다. 그의 말은 기록할 만하고, 들어도 싫증나지 않으며 오래 들으면 피로도 잊었다고 높게 평가했다.[4][5]
2. 생애
명나라 연경(베이징)에 체류 중이던 홍순언은 우연한 기회로 류씨 성을 가진 기녀를 만나게 되었다. 류씨 소녀는 호부시랑 류모의 딸이었으나,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으로 기방에 팔려온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홍순언은 류씨 소녀를 도와 빚을 청산하고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하였다. 류씨 소녀는 후에 예부시랑 석성(石星)의 계비(繼妃)가 되었고, 석성은 예부상서로 승진했다. 류씨 부인은 홍순언의 도움을 잊지 않고 석성에게 이야기했고, 석성은 그의 의로운 행동을 칭찬했다.
종계변무는 조선 건국 때부터 선조 때까지 2백여 년간 명나라의 기록에 태조 이성계의 세계(世系)가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해 달라고 주청하였던 사건이다.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였지만 모두 거절당하였다. 1588년(선조 21년) 홍순언은 역관으로 종계변무사절의 일원으로 북경에 갔다. 이때 예부상서였던 석성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종계변무를 성사시켰다. 류씨 부인은 홍순언에게 감사의 표시로 황금 비단 1백 필을 주었으나, 그는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결국 받아서 돌아왔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홍순언은 청병사신으로 북경에 갔다.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뇌물을 바치려 했으나, 홍순언은 이를 반대하고 진심으로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명나라 관리들은 조선을 의심하며 파병을 반대하였지만, 병부시랑 석성의 도움으로 파병을 성사시켰다.[1]
종계변무와 임진왜란 파병 성사에 큰 공을 세운 홍순언은 광국공신 2등관에 책록되고, 자헌대부 당성군(唐城君)에 책봉되었다.[3] 후에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04년(선조 37년)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1] 그의 이야기는 여러 기록을 통해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다.
2. 1. 생애 초반
홍순언은 남양 홍씨 첨사(詹事) 홍호(洪灝)의 동생인 예사 홍복(洪澓, 일명 홍복(洪復))의 12대손이다. 가선대부에 추증된 홍겸(洪謙)의 서자였다. 출생지는 한성부라는 설과 경기도 광주군이라는 설이 있다. 1899년에 편찬된 경기도 광주군의 향토지인 광주군지 인물편에 그에 대한 소개가 간략하게 실려 있다. 할아버지 홍경창(洪慶昌)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안동부사(安東府使) 등을 역임했고, 큰아버지 홍신(洪愼)은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 양주목사(楊州牧使), 형조참의(刑曹參議), 공조참의(工曹參議) 등을 역임하고 1539년(중종 34년)에는 명나라에 진하사(進賀使)로 다녀오기도 했다. 아버지 홍겸은 1531년 역과에 급제하여 명나라에 두 번 역관으로 다녀왔다.
서출이었던 홍순언은 일찍이 한어(漢語)를 익혀 한어역관이 되었다. 처음 이름은 덕룡(德龍)이고 자는 순언이었는데, 뒤에 순언을 본명으로 쓰게 되었다. 동생인 수언과 이복 동생인 덕린이 있었는데, 동생 수언은 1549년 역과에 급제한 인물로 한어역관으로 활동하였다.
2. 2. 류씨 소녀와의 인연
홍순언은 명나라 연경(베이징)에 체류 중 명나라 예부 관원의 초대로 홍등가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가장 비싼 몸값인 금 3천 냥을 제시한 기생의 방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기녀는 류씨 성을 가진 소녀였다.[1]
류씨 소녀는 남경의 호부시랑 류모의 딸이었으나, 아버지 류모가 공금 횡령 누명을 쓰고 옥사하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장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기방에 팔려온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홍순언은 류씨 소녀의 딱한 사연을 듣고 자신이 가져온 돈 2천 냥과 인삼을 주어 빚을 청산하고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류씨 소녀는 감사하며 이름을 물었으나, 홍순언은 자신을 그냥 조선의 역관이라고만 밝혔다.[2]
동료 역관들은 홍순언을 바보라고 놀렸고, 심지어 그가 류씨 소녀에게 준 돈이 공금이라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옥에 갇히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뒤 석방되었다.
기방에서 풀려난 류씨 소녀는 홍순언이 준 돈으로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의 친구였던 예부시랑 석성(石星)의 집에 인사차 들렀다. 당시 석성의 본부인이 병을 앓고 있었는데, 류씨 소녀는 석성 부인을 정성껏 간호했다. 그러나 석부인은 세상을 떠났고, 류씨 소녀의 간호에 감동한 석성은 그녀를 자신의 계비(繼妃)로 맞이하였다.
석성은 예부시랑에서 병부시랑을 거쳐 예부상서로 승진했다. 류씨 부인은 밤마다 직접 비단을 짜면서 '보(報)'와 '은(恩)'이라는 글자를 새겼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긴 석성에게 자신의 사연과 홍순언의 도움을 이야기했다. 석성은 홍순언의 의로운 행동을 칭찬했다.
이후 조선에서 종계변무사신이 파견될 때마다 석성은 사신을 만나주지 않고 홍역관이 왔는지 계속 물었다고 한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사신들은 귀국 후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2. 3. 종계변무 성사
종계변무란 조선 건국 때부터 선조 때까지 2백여 년간 명(明)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의 세계(世系)를 시정해 달라고 주청하였던 사건이다. 태조 때부터 시정을 위해 사신을 15회나 파견하였지만 전부 거절당하였다. 지속적으로 거부당하자 조선 14대 임금인 선조는 “종계변무를 이번에 성사시키지 못하면 목을 쳐버릴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역관들은 겁에 질려 선뜻 나서지 못했다.
1588년(선조 21년) 대제학(大提學) 황정욱을 종계변무사로, 홍성민(洪聖民)을 부사로 파견했다. 이때 홍순언은 역관으로 파견되었다.
변무사절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명나라 예부상서 석성이 요동의 국경까지 영접 나와 홍 역관이 왔느냐고 물었다. 그가 자신임을 밝히자 석성은 장인어른 큰절을 받으라며 그를 친히 모셔갔다. 이상하게 여기던 중 장안의 관사에 도착하자 귀부인이 나와 그에게 큰절을 올렸는데, 이는 그가 명종 때 구해준, 이제는 석성의 계비가 된 류씨 소녀였다.
석성은 동방에도 그대와 같은 의인이 있었다며 후히 대접하였고, 황정욱과 그가 《대명회통》과 명나라 《태조실록》에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로 기록된 내용이 잘못이고, 이성계는 이자춘의 아들임을 황제에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대소 관리들은 당대에 수정하지 않고 이제 와서 계속 번거롭게 구느냐며 의혹을 제기한다. 그러나 당시 예부상서였던 석성의 적극 건의로 개정되었다. 종계변무를 성사시킨 사절단은 귀국하였는데, 류씨 부인은 손수 짠, 보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황금 비단 1백 필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이익을 취하기 위한 일은 장사치나 하는 것이라며 비단을 거절하고 귀국했다.
사신이 탄 말이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류씨 부인과 하인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짐승도 은혜를 아는 법인데 사람이 되어 은혜를 모른다면 그것은 금수만도 못한 것이라며 비단을 받기를 거듭 부탁하며 하소연하니 비단을 받아서 되돌아왔다. 종계변무를 성사시킨 공으로 홍순언은 광국공신 2등관에 책록되고, 면천 허통하여 자헌대부 당성군(唐城君)에 책봉되었다.[3] 후에 우림위장이 되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2. 4. 임진왜란 파병 성사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했다. 홍순언은 청병사신으로 북경에 갔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바칠 뇌물을 마련하여 홍순언에게 주었으나, 홍순언은 진심으로 설득해도 될까 말까 한데 어찌 뇌물로 매수할 생각을 하느냐며 대신들을 호통쳤다.
그가 장안에 도착하여 조선이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조국 정벌 음모를 접했음에도 이를 거절하다가 침략을 당했다며 사정을 설명하였으나, 명나라의 관리들은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나라를 치려는 것이 아니냐며 조선 지원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당시 병부시랑으로 있던 석성의 도움으로 홍순언은 명나라 군사 파병을 성사시켰다.[1] 석성을 통해 그의 의기를 접하게 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그를 믿고 선뜻 가겠다고 자청했고, 선조가 이여송을 만날 때에도 그가 통역했다고 한다.[1]
2. 5. 말년과 사후
1604년(선조 37년)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1]
그의 이야기는 효종의 부마인 동평위 정재륜의 동평위공사견문록과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옥갑야화 편, 이익의 성호사설 17권 임진재조 편 등에 기록되어 후대에 전하게 되었다.[1] 첫째 아들 홍건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당상관을 지냈고, 넷째 아들 홍운(洪運)은 광해군 때인 161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홍건의 아들인 손자 홍효손은 숙천부사를 지냈다.[1]
홍순언의 일화는 조선 후기 소설 《이장백전》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1] 그의 행적은 정재숭과 박지원, 이익의 저서를 통해 일부 알려졌으나,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다.[1] 그의 일화가 일반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20년대였다.[1]
조선 멸망 후 1928년 위당 정인보는 그의 방계후손 홍정구의 부탁을 받고 당릉군유사징(唐陵君遺事徵)을 찬하였다.[1] 정인보는 당릉군유사징의 '唐陵君遺事徵引文'에서 홍순언 동생 홍덕린의 후손인 홍정구(洪正求)가 자신(정인보)을 찾아와 선조 당릉군의 행적이 너무 미약하니 선조의 행적을 기술한 유사(遺事) 편찬을 부탁하였다고 밝혔다.[1] 홍정구는 여러 번 정인보를 찾아와 거듭 부탁하였고, 정인보는 시대가 바뀌어 가족도 몰라보는 시대에 홍정구의 조상을 추모하는 의리에 감동하여 결국 이를 수락했는데, 정인보는 자료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동평위공견사문록, 열하일기의 옥갑야화편 외에도 직접 여러 가지 사적을 조사하여 1928년 당릉군유사징 제1권《당릉군유사 (唐陵君遺事)》를 집필하였다.[1]
3. 가족 관계
관계 이름 할아버지 홍경창(洪慶昌) 백부 홍신(洪愼) 아버지 홍겸 어머니(적모) 미상 이복 동생 홍덕린 생모 미상 (홍겸의 소실) 동생 홍수언(洪秀彦, 후사 없음) 부인 미상 아들 홍건(洪建) 또는 홍달(洪達) 손자 홍효손(洪孝孫) 아들 홍구(洪逑) 아들 홍준(洪遵) 또는 홍변(洪邊) 손자 홍효승(洪孝承) 아들 홍운(洪運, 1574년~?) 손자 홍효선(洪孝善) 아들 홍찬(洪選) 또는 홍조(洪造) 손자 홍효증(洪孝烝)
4. 평가와 의의
정재륜은 동평위공견사문록에서 홍순언이 서자라는 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마음씨를 바르게 써서 출세하고 나라도 위기에서 구했다고 평가했다.
4. 1. 긍정적 평가
허봉은 홍순언이 말을 잘 한다고 평가하였다. '홍순언의 말은 조리가 있어서 기록할 만하고, 들어도 싫증나지 않으며 오래 들으면 피로도 잊었다[4]'고 높게 평가하였다.[5]
동평위 정재륜은 동평위공견사문록에서 홍순언이 천한 위치(서자)였음에도 마음씨를 바르게 써서 본인도 출세하고 나라도 위기에서 구했다고 평하였다.
5. 기타
1604년(선조 37년)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효종의 부마인 동평위 정재륜의 동평위공사견문록과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옥갑야화 편, 이익의 성호사설 17권 임진재조 편 등에 기록되어 후대에 전하게 되었다. 첫째 아들 홍건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당상관을 지냈고, 넷째 아들 홍운(洪運)은 광해군 때인 161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홍건의 아들인 손자 홍효손은 숙천부사를 지냈다.
홍순언의 일화는 조선 후기 소설 《이장백전》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그의 행적은 정재숭과 박지원, 이익의 저서를 통해 일부 알려졌으나, 조선 멸망 때까지 자세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의 일화가 일반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20년대였다.
조선 멸망 후 1928년 위당 정인보는 그의 방계후손 홍정구의 부탁을 받고 당릉군유사징(唐陵君遺事徵)을 썼다. 정인보는 당릉군유사징의 '唐陵君遺事徵引文'에서 홍순언의 동생 홍덕린의 후손인 홍정구(洪正求)가 자신(정인보)을 찾아와 선조 당릉군의 행적이 미약하니 선조의 행적을 기술한 유사(遺事) 편찬을 부탁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홍정구는 여러 번 정인보를 찾아와 거듭 부탁하였고, 정인보는 시대가 바뀌어 가족도 몰라보는 시대에 홍정구의 조상을 추모하는 의리에 감동하여 결국 이를 수락했는데, 정인보는 자료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동평위공견사문록, 열하일기의 옥갑야화편 외에도 직접 여러 사적을 조사하여 1928년 당릉군유사징 제1권《당릉군유사 (唐陵君遺事)》를 집필하였다.
그가 1588년 류씨 부인에게서 선물로 받은 비단 1백 필 덕분에 그가 살던 동네는 고운담동, 미동(美洞), 미장동(美墻洞), 미담동, 미단동 등으로 불리게 되었고, 그의 집 담벼락에는 효, 제, 충, 신이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훗날 서울특별시 청담동의 지명 유래가 되었다.
성호사설 17권 임진재조에는 이후 명나라가 청나라의 침략을 받아 멸망할 때 임진왜란 당시 5만 명의 병력을 파견하게 했던 석성이 투옥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익은 '1640년대 석성이 투옥된 후 이항복이 명나라 베이징에 갔을 때 석성의 문하생인 양씨가 와서 "귀국에서 말 한마디라도 올려 스승을 구해주기를 청한다"고 간청하였지만, 이항복 등 조선 사절단들은 이를 웃으면서 방관하였고, 한 사람도 사신을 보내 석성의 억울한 옥살이를 변명해주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석성의 문인은 조선에 와서도 스승 석성을 구해줄 것을 청했으나, 조선 조정은 입으로만 소중화, 재조지은을 외칠 뿐 양씨의 청을 거절하였다. 이익은 이를 언급하며 당시 관료들의 배은망덕함을 질타하였다.
참조
[1]
문서
기생의 몸값
[2]
문서
혹은 성을 밝히지 않고 그냥 조선의 역관이라 했다.
[3]
문서
홍순언은 서자의 신분이었다.
[4]
서적
조천기
경인문화사
1976
[5]
논문
역관 홍순언과 조명외교
중국사학회
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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