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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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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보력은 후한 말의 인물로, 188년 동탁을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년에는 헌제의 명으로 이각과 곽사의 다툼을 중재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이각의 미움을 샀다. 이각에게 암살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호분 왕창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기록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각과의 대립, 서량으로의 귀향 등의 행적이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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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력
인물 정보
이름황보력
원어 이름皇甫酈
로마자 표기Huángfŭ Lì
(미상)
출생생년 미상
사망미상
출신지양주 안정군 조나현
주요 활동알자복야
소속 세력황보숭 → 헌제

2. 생애

188년(중평 5년), 병주동탁황보숭에게 군사를 넘기라는 조칙을 거부하자, 황보력은 황보숭에게 조칙을 어긴 동탁을 쳐야 한다고 건의했다.[1] 그러나 황보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조정에 보고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2] 이 일로 동탁은 황보숭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195년(흥평 2년), 알자복야가 된 황보력은 사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헌제의 명으로 이각곽사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게 되었다. 황보력은 곽사를 설득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각을 설득하는 데는 실패하고 오히려 그의 분노를 샀다.

황보력은 헌제에게 돌아와 이각의 불손한 태도를 보고했고, 이 과정에서 이각에게 아첨하던 시중 호막과 언쟁을 벌였다. 헌제는 황보력이 이각에게 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그를 즉시 도피시켰다. 예상대로 이각은 호분(근위병) 왕창에게 황보력의 암살을 명했으나, 황보력이 올바른 사람임을 알고 있던 왕창은 고의로 그를 놓아주었다.

이 사건 이후 황보력의 이름은 사서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2. 1. 황보숭과의 관계

황보숭의 조카뻘이다. 189년 (중평 6년), 좌장군 황보숭의 군중에 있었다. 당시 전장군 동탁병주목으로 임명되어 부임하면서 기존에 이끌던 군사를 황보숭에게 넘기라는 조서를 받았으나 이를 따르지 않았다. 황보숭과 동탁의 관계는 이미 좋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 황보력은 황보숭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우리 왕조가 실정하여 천하가 어지럽습니다. 이 위기를 해결하고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인물은 장군님과 동탁뿐입니다. 하지만 이미 서로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 함께 서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동탁은 군대를 넘겨야 했음에도 명령을 어겼고, 수도 낙양이 혼란한데도 머뭇거리며 오지 않으니 이는 다른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그는 흉악하고 난폭하여 병사들도 따르지 않습니다. 원수(元帥)이신 장군께서 나라의 권위로 그를 치신다면, 위로는 충의를 드러내고 아래로는 해악을 제거하는 것이니, 이는 춘추 시대 환공문공의 위업과 같은 일입니다.[1]

그러나 황보숭은 이는 조정에서 판단할 문제라며 황보력의 제안을 거절하고, 동탁의 행동을 알리는 상소만 올렸다.[2] 이 일로 인해 동탁은 황보숭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고, 훗날 그를 죽이려 했다.

2. 2. 이각과의 대립

195년(흥평 2년), 수도 장안에서 이각곽사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당시 알자복야(謁者僕射)로 있던 황보력은 양주 출신의 명망 있는 가문 사람인 데다 사자로서 뛰어난 언변[전대지재, 專對之才]을 갖추고 있었기에, 헌제는 그에게 이각과 곽사의 화해를 주선하도록 명했다.

황보력은 먼저 곽사를 찾아가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다음으로 찾아간 이각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이각은 자신이 여포를 토벌한 공을 세우고 4년간 천자를 보필하며 삼보를 안정시킨 공로를 내세우며, 곽사와는 격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는 곽사가 공경(公卿)을 인질로 삼은 것을 비난하며 반드시 처단하겠다고 말하고, 황보력에게 자신의 군사력으로 곽사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지 않겠냐며 반문했다.

이에 황보력은 옛날 유궁후예가 자신의 궁술만 믿다가 몰락한 고사와 근래에 강성했던 동탁왕윤, 여포 등에 의해 순식간에 몰락한 사례를 들며 이각의 오만함을 지적했다. 그는 이각이 높은 지위에 있지만 천자를 핍박하고 있으며, 장제, 곽사, 양정 등도 만만치 않고 백파적 출신의 양봉 같은 인물조차 이각의 잘못을 알고 있어 진심으로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각은 황보력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쫓아냈다.

황보력은 헌제에게 돌아와 이각이 불순한 태도를 보였다고 보고했다. 이때 이각에게 아첨하던 시중 호막(胡邈)이 나서서 "이각 장군이 힘써준 덕분에 부친(황보숭)께서 태위에 오르지 않았소?"라며 황보력을 회유하려 했다. 황보력은 이를 꾸짖으며 "나는 국가의 신하로서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군욕신사, 君辱臣死]. 국가를 위해 이각에게 죽임을 당한다 해도 그것은 천명이다"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헌제는 이 대화가 이각의 귀에 들어가 황보력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그를 즉시 궁궐 밖으로 내보내 피신시켰다. 이각은 과연 호분 왕창(王昌)에게 황보력을 잡아오라고(혹은 암살하라고) 명했으나, 평소 황보력의 충직함을 알고 있던 왕창은 일부러 그를 놓아주고는 '쫓았으나 놓쳤다'고 보고했다.

이 사건 이후 황보력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사서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2. 3. 이각 암살 시도 (설)

흥평 2년(195년), 알자복야였던 황보력은 헌제의 명으로 이각곽사의 분쟁을 중재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황보력은 곽사를 설득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각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그의 분노를 샀다. 황보력은 헌제에게 돌아와 이각의 불손한 태도를 보고했고, 이로 인해 이각에게 아첨하던 시중 호막과 언쟁을 벌였다. 헌제는 황보력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그를 도피시켰다. 예상대로 이각은 호분 왕창에게 황보력의 암살을 명했으나, 왕창은 황보력이 올바른 사람임을 알고 의도적으로 그를 놓아주었다. 이 사건 이후 황보력의 행적은 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다.

2. 3. 1. 암살 시도 배경

중평 5년(188년), 병주의 목(牧)으로 임명된 동탁황보숭에게 군사를 넘기라는 조정의 명령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다. 이때 황보력은 아버지 황보숭에게 조칙을 어긴 동탁을 공격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황보숭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는 데 그쳤고, 이로 인해 동탁은 황보숭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어 훗날 그를 해치려 했다.

흥평 2년(195년), 알자복야(謁者僕射)가 된 황보력은 사신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헌제의 명으로 이각곽사 사이의 다툼을 중재하게 되었다. 황보력은 곽사를 설득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각을 설득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분노를 샀다.

황보력은 헌제에게 돌아와 이각이 불손한 태도를 보였다고 보고했다. 이 과정에서 이각에게 아첨하던 시중(侍中) 호막(胡邈)과 언쟁을 벌이게 되었다. 헌제는 호막의 참소로 황보력이 이각에게 해를 입을 것을 염려하여 그를 즉시 도망치게 했다. 예상대로 이각은 근위병인 왕창(王昌)에게 황보력을 암살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왕창은 황보력이 올바른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그 명령을 따르지 않고 황보력을 놓아주었다.

이 사건 이후 황보력의 행적은 역사 기록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2. 3. 2. 암살 시도 정황

중평 5년(188년), 병주동탁이 황보숭에게 군사를 넘기라는 조칙을 거부했을 때, 황보력은 아버지 황보숭에게 조칙을 거스르는 동탁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황보숭은 이를 조정에 보고하는 선에서 그쳤고, 이 일로 동탁은 황보숭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는 훗날 동탁이 황보숭을 해치려 하는 빌미가 되었다.

흥평 2년(195년), 알자복야로서 사신으로 파견된 황보력은 헌제의 명을 받아 이각곽사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려 했다. 황보력은 곽사를 설득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각은 황보력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분노를 드러냈다.

황보력은 궁으로 돌아와 헌제에게 이각의 불손한 태도를 그대로 보고했다. 이 과정에서 이각에게 아첨하던 시중 호막과 언쟁을 벌이게 되었다. 헌제는 호막이 이각에게 황보력을 모함하여 해를 입힐 것을 우려하여 황보력을 즉시 도피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이각은 호분(근위병) 왕창에게 황보력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왕창은 황보력이 올곧은 인물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각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의도적으로 황보력을 놓아주었다.

이 사건 이후 황보력의 이름은 역사 기록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2. 3. 3. 실패와 이후

중평 5년(188년), 병주 목으로 임명된 동탁에게 황보숭의 군사를 넘기라는 조칙이 내려졌으나, 동탁은 이를 거부했다. 이때 황보력은 조칙을 거스른 동탁을 처벌해야 한다고 아버지 황보숭에게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황보숭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는 데 그쳤다. 이 일로 인해 동탁은 황보숭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고, 훗날 그를 해치려는 빌미가 되었다.

흥평 2년(195년), 황보력은 사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알자복야에 임명되었다. 당시 헌제는 이각곽사 사이의 심각한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황보력에게 조정을 명했다. 황보력은 곽사를 설득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각을 설득하는 데는 실패하였고 오히려 그의 분노를 샀다.

황보력은 헌제에게 돌아와 이각의 불손하고 불경한 태도를 그대로 보고했다. 이 과정에서 이각에게 아첨하던 시중 호막과 언쟁을 벌이게 되었다. 헌제는 호막의 참언으로 인해 황보력이 이각에게 해를 입을 것을 크게 염려하여 그를 즉시 도망치도록 조치했다. 예상대로 이각은 호분(황제의 근위병) 왕창에게 황보력의 암살을 지시했다. 하지만 왕창은 황보력이 올바른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고의로 그를 놓아주었다.

이 사건 이후, 황보력의 이름은 역사 기록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2. 4.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삼국지연의》에서는 제13회에 등장하여 장안 조정에서의 행적이 사서와 비슷하게 묘사된다. 이각과의 회견에서 강직한 발언으로 인해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기도위 양봉가후가 이각을 필사적으로 만류하여 목숨을 건지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는 사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연의의 추가 내용이다.

이후 호막에게 자신의 절개를 보이자, 헌제는 황보력을 고향인 서량으로 돌려보낸다. 연의에서는 황보력이 귀향하는 길에 "이각은 모반을 일으킨 자이니, 그를 따르는 자는 후환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외치고 다녔다고 묘사한다. 이 때문에 서량 출신 병사가 많았던 이각 군대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고 서술되는데, 이 역시 연의의 창작이다. 왕창과의 일화도 간략하게 언급되며, 이후 이야기에서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참조

[1] 문서 제 환공과 진 문공
[2] 서적 《후한서》71권 열전 제61 황보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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