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오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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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가시오 오사무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해설가, 감독이다. 와카야마현 출신으로, 미노시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8년 니시테쓰 라이온스에 입단하여 투수로 활약했다. 1975년 다승왕, 1983년 퍼시픽 리그 MVP를 수상했으며, 1982년 일본 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1988년 은퇴 후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을 역임했다. 2010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를 맡았다. 통산 251승 247패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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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오 오사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동미수 (東尾修) |
출생일 | 1950년 5월 18일 |
출생지 | 와카야마현 아리다군 아리다가와정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와카야마현립 미노시마 고등학교 |
프로 | 니시테쓰 라이온스/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세이부 라이온스 (1969-1988) |
감독 경력 | |
팀 | 세이부 라이온스 (1995-2001) |
개인 기록 | |
승-패 | 251승 247패 |
평균 자책점 | 3.50 |
완봉승 | 34 |
투구 이닝 | 4,086 |
탈삼진 | 1,684 |
수상 | |
퍼시픽 리그 MVP | 2회 (1983년, 1987년) |
일본 시리즈 우승 | 5회 (1982년, 1983년, 1986년–1988년) |
일본 시리즈 MVP | 1회 (1982년) |
명예의 전당 | |
유형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
헌액 년도 | 2010년 |
방법 | 경기자 표창 |
2. 선수 경력
프로 입단 초기에는 주변의 높은 수준에 적응하지 못해 1년차 여름에는 "이대로는 언제까지고 프로에서 통용되지 못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9][10] 2군에서도 부진하며 자신감을 잃어 코칭스태프에게 야수 전향을 신청하기도 했다.[9][10] 하지만 1969년 검은 안개 사건으로 이케나가 마사아키 등 주력 투수들이 영구 추방되면서 투수가 부족해졌고, 1군 투수로 기용되면서 투수 코치 가와무라 히데후미에게 슈트를 배우고,[11] 가토 하지메와 함께 연일 350~400구에 달하는 투구를 했다. 히가시는 이 사건으로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고 느껴 "나의 야구 인생에서 최대의 찬스이자 터닝 포인트였다"고 회고했다.[12]
검은 안개 사건의 여파로 전력 및 관객 동원 수가 감소하는 등 세이테쓰는 1972년 오프에 구단을 포기하고, 후쿠오카 야구가 운영하는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로 팀명이 바뀌는 등 불안정한 경영 상태가 되었지만, 히가시는 이 침체기를 에이스로 지탱했다. 1975년에는 23승 15패로 최다승을 기록했고, 1977년 오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획득 제안이 있었지만, 구단은 "히가시의 방출은 구단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13]
1978년 오프에 모회사가 후쿠오카 야구에서 국토계획으로 바뀌었고, 1979년부터 세이부 라이온스로서 사이타마현 도코로자와시로 이전했다. 네모토 리쿠오 감독은 선수들을 대폭 교체했고, 세이테쓰 시대부터 살아남은 선수는 히가시와 오타 타쿠지 두 명뿐이었다.
1982년,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은 팀 플레이를 중시하는 수비 야구를 전개했고, 히가시의 1루 베이스 커버가 늦다고 느껴 선발 로테이션에서 제외하는 자세를 보였다.[14] 1983년에는 히로오카가 경기 후 "승부 조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코멘트하여 히가시가 격노하기도 했다.[15]
히로오카 감독 체제에서 세이부는 1982년, 1983년 2년 연속 리그 우승·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고, 1985년에도 리그 우승을 했다. 히가시는 이 3차례의 일본 시리즈에서 구원 투수로 등판하여[16]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1982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1, 5차전에서 롱 릴리프로 승리 투수가 되었으며[16] 일본 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투수가 구원 등판만으로 MVP를 획득한 것은 일본 시리즈 사상 처음이었다. 1983년에는 최다승, 최우수 방어율, 베스트 나인, 퍼시픽 리그 MVP 등 수많은 타이틀을 획득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983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7차전 7회 2사 만루에서 하라 다쓰노리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17]
1984년에는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1985년은 17승 3패의 좋은 성적으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86년 6월 13일 긴테츠전(세이부 구장)에서 리처드 데이비스와 난투극이 벌어졌다. 히가시의 투구가 데이비스의 팔꿈치에 맞았고, 격분한 데이비스가 폭력을 행사했다. 데이비스는 퇴장, 10일 출장 정지, 벌금 10만 엔 처분을 받았고, 히가시는 완투 승리를 거뒀다.[18]
1986년 일본 시리즈 (히로시마전)에서는 1차전 선발 등판하여 9회말 1사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내다가 연속 홈런을 허용하여 무승부를 기록, 5차전에서도 9이닝 무자책점으로 호투했지만 승리 투수가 되지는 못했다. 8차전에는 선발 등판했지만 3회에 강판되었다.
1986년 12월 29일, 연봉 1억 엔에 사인하며 일본인 선수 두 번째이자 투수 최초로 1억 엔 플레이어가 되었다.[21]
1987년은 구도 기미야스와 최우수 방어율 경쟁을 펼쳤고, 15승 9패, 방어율 2.59(리그 2위)를 기록,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987년 일본 시리즈에서 구와타 마스미에게 승리하며[16] 팀의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 2번째 퍼시픽 리그 MVP로 선정되었다.
1987년 시즌 중 마작도박 가담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고,[23][24] 6개월 근신, 2500만 엔 감봉 처분을 받았다.[28]
1988년 6월 근신에서 복귀, 긴테츠전 완봉승 등 6승을 거두며 통산 251승을 달성했다.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1988년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 구원 등판하여 위기를 넘겼지만,[30] 감독과의 불화로 은퇴를 결심했다.[30] 5차전에도 등판, 3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29]
같은 해 오프, 다이에 호크스 트레이드설, 은퇴 권고설 등[32][33] 여러 설이 있었지만, 결국 스스로 은퇴를 결심하고[37] 11월 22일 은퇴 회견을 가졌다.[38]
2. 1. 프로 입단 전
와카야마현 아리다군 기비 정(현재의 아리다가와정)에서 태어나 기비 중학교를 거쳐 와카야마 현립 미노시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원래 교토의 헤이안 고등학교에 입학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그 평판을 들은 미노시마 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인 비토 다다시가 직접 설득하여 입학시켰다. 가을 긴키 대회에서는 1회전에서 히가시야마 고등학교, 준준결승에서 고카 고등학교를 각각 노히트 노런으로 꺾어 주목을 받았다.[5]고시엔 대회에 첫 출전하여 미노시마 고등학교의 에이스로서 활약해 팀의 4강에 오르는 성적을 남겼다. 나중에 비토 감독은 고시엔 대회에서 춘계 대회 3차례, 하계 대회 1차례에 우승하는 실적을 남겼지만 “그 해(1968년)의 팀이 최강이어서 우승할 수 없었던 것은 자기 자신의 경험 부족 때문에”라고 말했다.
1968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니시테쓰 라이온스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다. 당초 드래프트 직전에는 다른 구단에서 어떠한 접촉이 있었고, 그 중에는 1위 지명을 시사한 구단도 있었다고는 하였지만 니시테쓰로부터의 지명은 사전에 어떠한 접촉도 없는 당돌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히가시오의 부모는 “도쿄(수도권)와 오사카 지역의 팀이라면 입단 시키겠지만 어쨌든(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규슈 지역의 연고지가 있는 팀에 아들을 입단 시킬 수는 없다”라고 니시테쓰의 입단에 반대하여 지명을 거부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원했다.[6] 히가시오 자신도 니시테쓰의 일방적인 지명에 화를 내면서 한때는 호세이 대학에 진학을 결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니시테쓰도 프로의 팀이자 그 프로가 1위 지명을 해 주었다”라고 생각을 고치면서 부모님을 설득해 니시테쓰에 입단했다.[7] 계약금은 1000만엔, 연봉은 180만엔이었다.[8]
히가오는 후일 자신의 저서에서 “2위에도 들어가 있었고, 3위라도 들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2. 2. 니시테쓰·다이헤이요 클럽·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 시절 (1969년 ~ 1978년)
히가시오 오사무는 1968년 고시엔 고등학교 야구 토너먼트에서 스타로 활약하며, 그해 봄 소속팀을 준결승에 진출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해 말 니시테쓰 라이온스(현재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에 1라운드로 지명되었다.[1] 그는 퍼시픽 리그의 높은 투구 수준을 보고 투구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팀에 야수로의 전환을 요청했다.[1] 팀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1969년 오프 시즌에 검은 안개 사건이 터지면서 곧바로 철회했다.[1] 이케나가 마사아키는 이 스캔들로 인해 프로 리그에서 퇴출되었고, 히가시오는 라이온스 선발 로테이션에서 한 해 동안 풀타임 투구를 강요받았다.[1] 그의 경험 부족으로 인해 그 시즌 40경기에서 5.1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1]히가시오는 다음 해에 개선을 보였지만, 1971년과 1972년에 리그 패배 선두를 기록했다.[1] 특히 1972년 시즌 동안 그는 300이닝 이상을 투구하며 패배뿐만 아니라 안타, 실점, 홈런 허용에서도 리그 1위를 기록했다.[1] 그는 또한 1971년부터 3시즌 연속 100개 이상의 볼넷을 허용했다.[1]
1973년 라이온스 팀은 니시닛폰 철도에 의해 매각되어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가 되었고, 1978년에는 팀이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가 되면서 다시 매각되었다.[1] 이 격동의 시기에 히가시오는 라이온스 투수진의 에이스로 부상했다.[1] 1975년 시즌에 그는 2.38의 매우 훌륭한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23승으로 리그를 이끌었다.[1] 그는 1978년에도 23승을 거두며 통산 세 번째로 300이닝 이상을 투구했다.[1]
2. 3.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 (1979년 ~ 1988년)
에 현역 시절 친정팀인 세이부 라이온스의 감독으로 정식 부임했다. 드래프트에서 니시구치 후미야, 다카기 히로유키, 오제키 다쓰야 등을 영입했고, 세이부 황금기의 주축 선수였던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를 복귀시키는 등 전력을 보강했지만,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상대 전적에서 5승 21패로 부진하며 감독 부임 첫 해는 3위로 마감했다.[43] 이듬해인 1996년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가와다 유스케를 영입하고,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시미즈 마사지와 마에하라 히로유키를 트레이드로 획득, 드래프트에서도 다카기 다이세이, 오토모 스스무 등을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했지만, 8월까지 승률이 5할을 밑돌며 3위에 그쳤다.1997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기요하라 가즈히로의 후임으로 도밍고 마르티네스를 영입했고, 드래프트에서 와다 가즈히로, 다마노 히로마사 등을 획득했다. 스즈키 겐과 마쓰이 가즈오를 중심으로 3년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스에게 패하며 우승에는 실패했다. 이듬해인 1998년에는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니시자키 유키히로를 트레이드로, 오릭스에서 나카지마 사토시를 FA로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 리그 2연패를 달성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에게 패하며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에 실패했다.
1999년에는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활약으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 리그 우승 경쟁을 펼쳤으나 2위에 그쳤다. 2000년에도 다이에 호크스와의 경쟁에서 밀려 2위로 마감했고, 2001년에도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와 다이에와의 우승 경쟁에서 밀리며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히가시오는 감독 부임 당시 황금기 주력 선수들이 이적하거나 전력이 저하된 세이부에서 마쓰자카 다이스케, 니시구치 후미야, 이시이 다카시, 도요다 기요시 등의 선발 투수진과 모리 신지 등의 중간 계투진을 육성하여 세대교체에 성공했다. 또한, 세이부 황금시대에 중간 계투였던 시오자키 데쓰야를 선발로 전향시키고, 닛폰햄에서 이적해 온 니시자키 유키히로를 구원 투수로 기용하는 등 베테랑 선수 활용에도 능숙함을 보였다.
야수진에서는 장타력이 부족했지만, 마쓰이 가즈오를 클린업 트리오나 4번 타자로 기용했고,[80] 스즈키 겐, 다카기 다이세이, 오제키 다쓰야, 오토모 스스무, 다카기 히로유키 등 주력 선수들이 좌타자에 치우쳐 있어 상대 좌완 투수에 약한 면모를 보였다.[81] 히가시오는 황금기가 끝나고 과도기에 있던 세이부에서 세대교체를 진행하며 항상 A클래스(1~3위)를 유지했고, 스도 유타카, 이하라 하루키 등의 코치진이 이러한 약점을 보완했다.
3. 감독 경력
히가시오 오사무는 1995년 라이온스 감독으로 복귀하기 전, 여러 방송사에서 스포츠 해설가로 활동했다. 감독 부임 후 대린 잭슨,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등 메이저 리그 선수들을 영입했지만, 첫 두 시즌은 3위에 그쳤다. 그러나 마쓰이 가즈오를 비롯한 젊은 선수들의 활약으로 세 번째 해에 리그 정상에 올랐고, 1997년과 1998년에는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다만, 두 해 모두 일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패했다. 모리 신지, 마쓰자카 다이스케, 니시구치 후미야, 데니 토모리 등은 히가시오 감독 재임 기간 동안 두각을 나타낸 투수들이다.[1] 1999년과 2000년에는 2위, 2001년에는 3위를 기록한 뒤, 2001년 말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스포츠 해설가로 복귀했으며, 2006년 9월에는 일본 프로 농구팀 도쿄 아파치의 수장을 맡기도 했다.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투수 코치를 맡았다.
3. 1.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 시절 (1995년 ~ 2001년)
東尾 修|ひがしお おさむ|히가시오 오사무일본어는 1995년 라이온스 감독으로 복귀하기 전, 여러 방송사에서 스포츠 해설가로 활동했다. 메이저 리그에서 Darrin Jackson|대린 잭슨영어과 Orestes Destrade|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영어를 영입했지만, 감독으로서의 첫 두 시즌은 3위에 그쳤다.[1] 마쓰이 가즈오를 비롯한 여러 젊은 선수들의 활약으로 히가시오의 세 번째 해에 라이온스는 리그 정상에 올랐고, 1997년과 1998년에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두 해 모두 일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패했다).[1] 모리 신지, 마쓰자카 다이스케, 니시구치 후미야, 데니 토모리 등도 히가시오 감독 재임 기간 동안 두각을 나타낸 투수들이다.[1] 라이온스는 1999년과 2000년에 2위를 차지했고, 2001년에는 3위로 떨어졌으며, 東尾 修|ひがしお おさむ|히가시오 오사무일본어는 2001년 말에 감독직에서 사임했다.[1]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1995년 | 세이부 | 3위 | 130 | 67 | 57 | 6 | .540 | 12.5 | 117 | .246 | 2.98 | 45세 |
1996년 | 3위 | 130 | 62 | 64 | 4 | .492 | 13.0 | 141 | .258 | 3.58 | 46세 | |
1997년 | 1위 | 135 | 76 | 56 | 3 | .576 | - | 110 | .281 | 3.63 | 47세 | |
1998년 | 1위 | 135 | 70 | 61 | 4 | .534 | - | 115 | .270 | 3.66 | 48세 | |
1999년 | 2위 | 135 | 75 | 59 | 1 | .560 | 4.0 | 89 | .258 | 3.58 | 49세 | |
2000년 | 2위 | 135 | 69 | 61 | 5 | .531 | 2.5 | 97 | .255 | 3.68 | 50세 | |
2001년 | 3위 | 140 | 73 | 67 | 0 | .521 | 6.0 | 184 | .256 | 3.88 | 51세 | |
통산: 7년 | 937 | 489 | 425 | 23 | .535 | A클래스: 7회 |
# 1995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였다.[1]
# 1997년부터 2000년까지는 135경기제였다.[1]
# 2001년부터 2003년까지는 140경기제였다.[1]
# 통산 성적은 1997년에 출장 정지 처분을 받은 3경기를 포함하지 않는다.[1]
4. 투구 스타일
히가시오 오사무는 현역 시절 슬라이더, 커브, 슈트를 주무기로 삼았으며, 특히 몸쪽을 파고드는 슬라이더를 활용하여 타자를 제압하는 투구 스타일을 보였다. 東尾|히가시오일본어는 "투수는 80~90%의 힘으로 던져야 한다. 전력투구는 안 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뛰어난 제구력과 완급 조절 능력을 발휘했다.[70]
5. 논란
히가시오는 감독 시절, 선수 기용과 관련하여 몇 가지 논란을 일으켰다. 1997년 7월 10일 긴테츠전에서는 9회 초 무사 1, 2루 상황에서 나라하라 히로시가 견제 아웃된 것에 대해 항의하다가 심판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퇴장당하고, 3경기 출장 정지와 벌금 10만엔의 처분을 받았다.[46]
1999년 오프 시즌에는 수비에 약점이 있었지만 2년 연속 30홈런을 기록한 도밍고 마르티네스를 "일본 시리즈에서 이기는 팀을 목표로 하기 위해" 해고했다. 이는 일본 시리즈에서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센트럴 리그 홈경기에서는 마르티네스를 기용할 수 없었던 점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1999년에 새로 영입한 외국인 선수들이 부진하면서 리그 우승에 실패했고, 4번 타자로 기용했던 스즈키 겐도 성적이 하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49]
2000년에는 영입한 메이저 리거 레지 제퍼슨이 실책 직후 교체된 것에 대해 항의하자, 선수 기용 비판으로 간주하고 2군으로 강등시켰다. 제퍼슨은 곧바로 귀국했다.
또한, 1997년 일본 시리즈에서 맞붙었던 야쿠르트 스왈로스 감독 노무라 가쓰야는 히가시오 감독 시절 세이부 라이온즈 선수단의 경기 전 국가 제창 때 정렬 문제, 벤치에서의 야유, 선수들의 외모 등을 지적하며 "옛날의 세이부는 이런 팀이 아니었다"라고 비판했다.[74]
히가시오의 해설은 독특한 말투와 발음 때문에 "선술집 중계" 같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75]
5. 1. 리처드 데이비스와의 난투극 사건
히가시오 오사무는 프로 선수 시절, 상대 타자를 위협하기 위해 몸쪽으로 공을 던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 통산 최다 사구(165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타자에게 가까운 공을 던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타자를 맞힌 후에도 거의 개의치 않았다.[1] 1986년, 킨테츠 버팔로스의 딕 데이비스를 맞힌 후 마운드에서 구타를 당하기도 했지만, 히가시오는 이 사건 이후에도 투구를 계속하여 승리를 기록했다.[1]많은 팬들은 데이비스에게 동정심을 보냈고, 히가시오가 많은 타자를 맞힌 것에 대해 처벌을 요구했다. 라이벌 팀 감독들은 히가시오가 뛰어난 제구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렇게 자주 타자를 우연히 맞힐 리가 없다며 고의로 타자를 맞힌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히가시오는 타자를 맞힐 의도로 공을 던진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1]
6. 수상 및 타이틀 경력
히가시오 오사무는 선수 시절 다승왕 2회(1975년, 1983년), 최고 평균자책점 1회(1983년)를 기록했다. 최다 탈삼진 1회(1975년)를 기록했지만, 당시에는 타이틀이 아니었다.[1] MVP는 2회(1983년, 1987년), 베스트 나인은 2회(1983년, 1985년) 선정되었다. 골든 글러브상은 5회(1983년 ~ 1987년) 수상했고, 1982년 일본 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또한, 월간 MVP 2회(1980년 8월, 1982년 4월), 최다 선발승 3회(1972년, 1980년, 1983년)를 기록했다. 2010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6. 1. 타이틀
연도 | 소속팀 | 주요 타이틀 |
---|---|---|
1975년 | 니시테쓰·태평양·크라운·세이부 | 다승왕, 최다 탈삼진[1] |
1983년 | 다승왕, 최고 평균자책점, MVP, 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상 | |
1985년 | 베스트 나인 | |
1987년 | MVP, 골든 글러브상 | |
1982년 | 일본 시리즈 MVP |
- 최다 선발승: 3회(1972년(17선발승), 1980년(17선발승), 1983년(18선발승))
- 골든 글러브상 : 3회(1984년, 1985년, 1986년)
- 월간 MVP : 2회(1980년 8월, 1982년 4월)
- 통산 165개 사구(일본 기록)
- 올스타전 출장 : 10회(1972년, 1973년, 1975년, 1976년, 1978년, 1982년, 1984년 ~ 1987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2010년)
6. 2.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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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尾投手がとばく 書類送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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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尾、処分待ち謹慎 西武『事実関係確認し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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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ったのは22回 とばくの東尾投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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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どんな処分も受ける』東尾会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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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暴力団と接触なし』東尾 西武、調査の末"判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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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尾"セーフ!"キャンプ・自主トレOK 西武『マージャンとばく』温情処分 年明けにも山ごもり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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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を「離れたくない」 予感通りに“恩人”から直電…勃発した西武との争奪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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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番近くで見た 西武ライオンズ40年】鋼の精神力!東尾修、若手に慕われた「男っぷり」と「飲みっぷ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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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尾修伝説を中尾ミエが暴露 銀座でハシゴ酒「何軒回ったか」から六本木…翌日登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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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尾修【前編】栄光にあっても波風が立ち続ける右腕の宿命/プロ野球1980年代の名選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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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18 落球から始まった危険な関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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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野村克也 ―みんなノムさんが好きだ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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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라쿠 노무라 케이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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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해설자들의 캐치프레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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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쿠멘 오브 더 이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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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ロンティアインターナショナ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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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우완」장명부에...조취서고3년 교포 스카우트전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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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오를 지도한 가와무라 히데후미의 몸쪽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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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 히로부미의 트리플 쓰리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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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크리스 헤이니 영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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