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영국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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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5년 영국 총선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치러진 선거로, 노동당이 압승을 거두고 보수당이 참패한 선거이다. 전쟁의 영향으로 10년 만에 실시되었으며, 노동당은 베버리지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복지 정책을 제시하며 참전 군인과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반면, 보수당은 처칠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전후 국가 재건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선거 결과, 노동당은 과반 의석을 확보하여 최초로 단독 정부를 구성했고, 자유당은 정치적 변방으로 밀려났다. 노동당의 승리는 사회 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 전시 노동당의 역할, 보수당의 실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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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영국 총선 | |
---|---|
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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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선거 이름 | 1945년 영국 총선 |
국가 | 영국 |
선거 유형 | 의회 선거 |
이전 선거 | 1935년 영국 총선 |
이전 선거 연도 | 1935년 |
다음 선거 | 1950년 영국 총선 |
다음 선거 연도 | 1950년 |
선출 의석 수 | 640석 |
과반 의석 수 | 321석 |
선거일 | 1945년 7월 5일 |
투표율 | 72.8% (1.7%) |
해산일 | 1945년 6월 15일 |
공시일 | 1945년 6월 15일 |
선거 제도 | 단순 소선거구제: 601석 중선거구제: 30석 단기 이양식 투표: 9석 |
유권자 수 | 33,240,391명 |
선거 결과 | |
총 의석 수 | 640석 |
주요 정당 | 노동당 보수당 자유당 (영국) 국민 자유당 |
노동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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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 | 클레멘트 애틀리 |
리더 취임일 | 1935년 10월 25일 |
소속 정당 | 노동당 |
리더 선거구 | 라임하우스 |
이전 선거 의석 수 | 154석 |
획득 의석 수 | 393석 |
의석 변동 | 239석 |
득표수 | 11,967,746표 |
득표율 | 48.0% |
득표율 변동 | 10.0%p |
보수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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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 | 윈스턴 처칠 |
리더 취임일 | 1940년 10월 9일 |
소속 정당 | 보수당 |
리더 선거구 | 우드포드 |
이전 선거 의석 수 | 386석 |
획득 의석 수 | 197석 |
의석 변동 | 189석 |
득표수 | 8,716,211표 |
득표율 | 39.6% |
득표율 변동 | 8.2%p |
자유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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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 | 아치볼드 싱클레어 |
리더 취임일 | 1935년 11월 26일 |
소속 정당 | 자유당 |
리더 선거구 | 케이스네스 및 서덜랜드 (낙선) |
이전 선거 의석 수 | 21석 |
획득 의석 수 | 12석 |
의석 변동 | 9석 |
득표수 | 2,177,938표 |
득표율 | 9.0% |
득표율 변동 | 2.3%p |
국민 자유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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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 | 어니스트 브라운 |
리더 취임일 | 1940년 |
소속 정당 | 국민 자유당 |
리더 선거구 | 리스 (낙선) |
이전 선거 의석 수 | 35석 |
획득 의석 수 | 11석 |
의석 변동 | 24석 |
득표수 | 686,652표 |
득표율 | 2.9% |
득표율 변동 | 0.8%p |
정부 | |
총리 | 영국 총리 |
선거 전 총리 | 윈스턴 처칠 |
선거 전 총리 소속 정당 | 보수당 |
선거 후 총리 | 클레멘트 애틀리 |
선거 후 총리 소속 정당 | 노동당 |
기타 | |
여론 조사 | 1945년 영국 총선 여론 조사 |
2. 선거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의회 활동이 정지되면서 1935년 영국 총선 이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실시되는 총선이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노동당 당수 클레멘트 애틀리는 연합군의 일본 패전 때까지 전시 연립 정부를 유지하자는 윈스턴 처칠 총리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따라 1945년 6월 15일, 조지 6세 국왕은 거의 10년간 선거 없이 유지되었던 의회를 해산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2월 여론조사에서 처칠 내각 지지율은 83%에 달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보수당의 압승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처칠 개인의 인기도와 보수당을 별개로 보았다. 전쟁 이전 대공황에 대한 미흡한 대처와 히틀러의 부상을 방치한 네빌 체임벌린 총리 등 보수당 정부의 과거 이미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애틀리가 이끈 노동당은 393석을 확보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노동당 역사상 최초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여 단독 정부를 구성하게 된 역사적인 선거였다.[9] 반면, 처칠이 이끈 보수당과 임시 정부는 197석에 그치며 참패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2월 여론조사에서 처칠 내각의 지지율은 83%에 달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보수당의 압승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영국 국민들은 처칠 개인의 업적과 보수당을 구분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전쟁 이전 대공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점이나, 히틀러의 세력 확장을 사실상 방관했던 네빌 체임벌린 전 수상 시절 보수당 정부의 실책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보수당은 1930년대의 높은 실업률 문제와 연관되어 인식되었고, 이 때문에 전후 경제 재건과 실업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한 유권자들의 신뢰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6][5]
한편, 전후 사회 개혁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가운데,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제시한 베버리지 보고서가 큰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당시 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1%가 주택 문제를, 15%가 일자리 문제를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는 등 복지 문제가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반면 보수당이 전통적으로 강조해 온 치안, 국유화 문제, 국가 안보 등은 각각 7%, 6%, 5%의 낮은 응답률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당은 "Let Us Face the Future|미래를 향한 우리의 각오eng"라는 공약집을 통해 국유화, 경제 계획, 완전 고용, 국민 건강 서비스 창설, 사회 보장 제도 확충 등 구체적인 복지 정책과 전후 국가 재건 비전을 제시했다. 이 공약집은 150만 부 이상 팔릴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으며,[4] 특히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참전 군인들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냈다.
반면, 보수당은 처칠 총리의 높은 개인적 인기에 안주하며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는 데 소홀했다. 보수당의 공약집인 "Mr. Churchill's Declaration to the Voters|투표자들에게 처칠 씨의 선언eng"에는 주요 사회 문제에 대한 진보적인 내용도 일부 담겨 있었지만, 전후 경제 운용 방안 등 핵심적인 내용에서는 상대적으로 모호한 입장을 보였다. 더욱이 처칠 총리는 선거 운동 과정에서 전쟁 시기 연립 정부의 파트너였던 노동당을 향해 게슈타포를 언급하며 급진적인 사회주의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네거티브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오히려 "훌륭한 전시 지도자가 평화 시기에도 좋은 지도자라는 보장은 없다"는 노동당의 비판에 설득력을 더해주며 역효과를 낳았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난 지(VE Day)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선거가 치러졌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현지 축제 주간(Wake week) 때문에 개표가 7월 12일 또는 19일까지 연기되기도 했다.[7] 해외 복무 중인 군인들의 투표용지를 수송할 시간을 고려하여 최종 결과는 7월 26일에 발표되었다. (이후 일본의 패전은 8월 15일에 이루어졌다.) 1943년 이후 여론조사에서는 노동당이 꾸준히 우위를 보였으나, 선거 직전인 1945년 6월 조사에서는 양당 지지율이 45%로 동률을 기록하며 접전을 예고하기도 했다.
이 선거는 전쟁 직후에 치러졌다는 점에서 카키 선거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1900년이나 1918년 총선거와는 달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가 속한 정당이 패배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참고로, 7월에 총선거가 치러진 것은 이 선거 이후 79년이 지난 2024년 총선거까지 없었다.
3. 선거 과정
한편, 복지 국가 개념을 제시한 베버리지 보고서가 큰 인기를 끌면서 복지 문제가 주요 사회 이슈로 떠올랐다. 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1%가 주택 문제를, 15%가 일자리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반면 보수당이 강조한 치안, 국유화 반대, 안보 등은 각각 7%, 6%, 5%의 응답률에 그쳤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노동당은 "Let Us Face the Futureeng"라는 공약집을 통해 국유화, 경제 계획, 완전 고용, 국민 건강 서비스(NHS) 창설, 사회 보장 제도 강화 등 구체적인 국가 재건 비전을 제시하며 전쟁 후 복귀한 참전 군인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 공약집은 150만 부나 팔릴 정도로 유권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4]
반면, 보수당은 처칠의 높은 인기에 안주하며 뚜렷한 전후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공약집 "Mr. Churchill's Declaration to the Voterseng"에는 일부 진보적인 내용도 담겼지만, 전후 경제 운용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모호했다. 또한 1930년대 대공황 시기 높은 실업률에 대한 책임론[6] 때문에 전후 실업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것이라는 주장은 유권자들에게 큰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5] 설상가상으로 처칠은 선거 운동 중 라디오 연설에서 노동당이 집권하면 일종의 게슈타포와 같은 비밀경찰 조직이 필요할 것이라고 발언하며, 전시 내각에서 협력했던 노동당을 급진적인 사회주의 세력으로 몰아붙였다. 이는 오히려 전시 지도자로서의 명성에 흠집을 내고, "훌륭한 전시 지도자가 평화 시기에도 좋은 지도자는 아니다"라는 노동당의 비판에 힘을 실어주는 역효과를 낳았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의회 활동이 정지되었기 때문에, 이번 총선은 1935년 이후 10년 만에 치러지는 것이었다. 노동당 당수 클레멘트 애틀리는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난 후, 일본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시 연립 정부를 유지하자는 처칠의 제안을 거절했다. 결국 1945년 6월 15일, 조지 6세 국왕은 의회를 해산했다.[10]
투표는 7월 5일에 실시되었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지역 축제인 웨이크 위크(Wakes Week) 때문에 투표가 7월 12일까지 연기되었고, 넬슨과 콜른 지역에서는 7월 19일까지 미뤄졌다.[7] 또한 해외 복무 중인 군인들의 투표용지가 도착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개표 결과 발표는 7월 26일로 연기되었다.
4. 선거 결과
이번 선거는 자유당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2석 확보에 그치고 도시 지역 의석을 모두 잃었으며, 당수 아치볼드 싱클레어마저 자신의 지역구인 케이쓰니스 앤 서덜랜드에서 낙선하는 등 정치적 변방으로 밀려나는 결과를 맞았다. 자유국민당 역시 11석으로 의석의 3분의 2를 잃었고,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2년 뒤 보수당에 합당되었다.
한편, 이 선거를 통해 훗날 총리가 되는 해롤드 윌슨, 제임스 캘러헌 등 노동당의 주요 인물들과 바바라 캐슬, 마이클 풋, 휴 게이츠켈 등이 대거 의회에 진출했다. 미래의 보수당 총리 해롤드 맥밀런은 낙선했으나, 같은 해 보궐선거를 통해 의회로 복귀했다.
4. 1. 정당별 의석수 및 득표율
정당 | 당수 | 후보자 수 | 득표수 | 득표율 (%) | 획득 의석 | 의석 증감 |
---|---|---|---|---|---|---|
노동당 | 클레멘트 애틀리 | 603 | 11,967,746 | 49.7% | 393 | +239 |
보수당 | 윈스턴 처칠 | 559 | 8,716,211 | 36.2% | 197 | -190 |
자유당 | 아치볼드 싱클레어 | 306 | 2,177,938 | 9.0% | 12 | -9 |
자유국민당 | 어니스트 브라운 | 49 | 686,652 | 2.9% | 11 | -22 |
무소속 | – | 38 | 133,191 | 0.6% | 8 | +6 |
국민당 | – | 10 | 130,513 | 0.5% | 2 | +1 |
코먼웰스당 | C. A. 스미스 | 23 | 110,634 | 0.5% | 1 | +1 |
영국 공산당 | 해리 폴릿 | 21 | 97,945 | 0.4% | 2 | +1 |
북아일랜드 민족주의당 | 제임스 맥스패런 | 3 | 92,819 | 0.4% | 2 | 0 |
무소속 국민당 | – | 13 | 65,171 | 0.3% | 2 | 0 |
무소속 노동당 | – | 7 | 63,135 | 0.3% | 2 | 0 |
무소속 보수당 | – | 6 | 57,823 | 0.2% | 2 | +2 |
독립노동당 | 밥 에드워즈 | 5 | 46,769 | 0.2% | 3 | -1 |
무소속 진보당 | – | 7 | 45,967 | 0.1% | 1 | +1 |
무소속 자유당 | – | 3 | 30,450 | 0.1% | 2 | +2 |
스코틀랜드 국민당 | 더글러스 영 | 8 | 26,707 | 0.1% | 0 | 0 |
플라이드 컴리 | 아비 윌리엄스 | 7 | 16,017 | 0.0% | 0 | 0 |
코먼웰스 노동당 | 해리 미들리 | 1 | 14,096 | 0.0% | 0 | 0 |
무소속 민족주의자 | – | 4 | 5,430 | 0.0% | 0 | 0 |
리버풀 프로테스탄트당 | H. D. 롱보텀 | 1 | 2,601 | 0.0% | 0 | 0 |
기독교 평화주의자 | – | 1 | 2,381 | 0.0% | 0 | 0 |
민주당 (1942년) | 노먼 레이스-헤이-클라크 | 5 | 1,809 | 0.0% | 0 | 0 |
농업당 | – | 1 | 1,068 | 0.0% | 0 | 0 |
영국 사회당 | – | 1 | 472 | 0.0% | 0 | 0 |
연합 사회주의 운동 | 가이 올드레드 | 1 | 300 | 0.0% | 0 | 0 |
총계 | 1,683 | 24,073,025 | 100.0% | 640 | +25 |
- 총 투표수: 24,073,025
- 투표율: 72.8%[9]
- 보수당 총계에는 얼스터 연합당이 포함됨.
- 출처: [https://web.archive.org/web/20120130011015/http://www.ukpolitical.info/Turnout45.htm UK Political Info (2012년 1월 30일 보존)]
5. 선거의 영향 및 분석
제2차 세계 대전 유럽 전선 종전 직후이자 1935년 총선 이후 10년 만에 치러진 이 선거는 전쟁으로 인해 연장되었던 의회 임기가 끝나고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의 보수당 중심 임시 정부는 예상을 깨고 참패했다. 반면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은 146석의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애틀리는 노동당 최초의 단독 내각을 구성하게 되었다.[4]
한편, 자유당과 국민자유당에게 이 선거는 몰락의 계기가 되었다. 자유당은 도시 지역 의석을 모두 잃었으며, 국민자유당 역시 의석의 3분의 2를 잃고 2년 후 보수당에 합당되었다.
해외 파병 군인들의 투표용지 도착을 고려하여 최종 결과는 7월 26일에 발표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현지 휴가 기간(웨이크 위크) 때문에 개표가 7월 12일 또는 19일까지 지연되기도 했다.[7] 선거 결과 발표 이후인 8월 15일에는 일본의 패전이 이어졌다.
5. 1. 노동당 승리 요인
전쟁이 끝나갈 무렵 처칠 내각의 지지율은 높았으나[6], 유권자들은 전쟁 영웅 처칠과 보수당을 동일시하지 않았다. 이는 전쟁 이전 대공황 대처 실패와 히틀러의 부상을 방치한 네빌 체임벌린 등 보수당 정부의 유화 정책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었다.[5]베버리지 보고서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전후 사회 개혁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여론조사에서 응답자들은 주택 문제(41%)와 완전 고용(15%)을 가장 중요한 국가 과제로 꼽았으며, 사회 보장(7%)과 국유화(6%)가 뒤를 이었다. 반면 보수당이 강조한 국제 안보 문제는 5%의 응답률에 그쳤다. 이는 유권자들이 전쟁 승리 이후의 국내 문제 해결과 복지 확충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보여주었다.
노동당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Let Us Face the Future|미래를 향한 우리의 각오eng"라는 공약집을 통해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주요 산업의 국유화, 경제 계획, 완전 고용 보장, 국민 건강 서비스(NHS) 창설, 포괄적인 사회 보장 제도 도입 등 급진적인 사회 개혁 방안이 담겨 있었다.[4] 특히 베버리지 보고서의 핵심 내용인 국가 의료 서비스, 국가 지원 교육 확대, 국민 보험, 새로운 주택 정책 등을 적극 수용하여[2] 사회 변화를 갈망하던 유권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반면, 보수당은 "Mr. Churchill's Declaration to the Voters|투표자들에게 처칠 씨의 선언eng"이라는 공약집을 통해 일부 진보적인 사회 정책을 언급했지만, 전후 경제 운용이나 구체적인 복지 계획에 대해서는 모호한 입장을 보였다. 또한 1930년대 대공황 시기 높은 실업률과[6] 유화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이는 유권자들이 보수당의 경제 운영 능력과 미래 비전을 신뢰하지 못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5] 보수당은 처칠의 개인적인 인기에 과도하게 의존하며 구체적인 정책 제시보다는 과거의 영광을 강조하는 데 집중했으나, 유권자들은 처칠 개인과 보수당을 분리해서 평가했다.
전시 연립 내각에서 클레멘트 애틀리가 부총리로, 허버트 모리슨이 내무장관으로, 어니스트 베빈이 노동장관으로 활동하며 보여준 행정 능력 또한 노동당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처칠의 선거 운동 방식도 역효과를 낳았다. 그는 6월 4일 라디오 연설에서 노동당이 집권하면 사회주의 정책을 강행하기 위해 "어떤 형태의 게슈타포"와 같은 비밀경찰 조직이 필요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전시 내각의 파트너였던 노동당을 비난했다. 이는 전쟁 영웅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과도한 발언으로 여겨졌고, 오히려 애틀리에게 처칠이 전시 지도자로는 훌륭했지만 평화 시기의 지도자로는 부적합하다는 점을 부각할 기회를 주었다.
영국군 내에서도 노동당 지지세가 강하게 나타났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많은 참전 군인들이 겪었던 실업과 노숙의 악몽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불안감, 그리고 1920년대 보수당 정부가 약속했던 'Homes for Heroes|영웅들을 위한 땅eng'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실망감이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5. 2. 선거 결과의 의미
처칠이 이끈 임시 정부는 예상과 달리 참패를 당했다. 반면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146석의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이는 노동당 역사상 처음으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선거였으며, 득표율에서도 처음으로 1위를 기록한 선거였다. 이 결과로 애틀리는 영국 최초의 노동당 단독 내각을 구성하게 되었다.이번 선거는 자유당에게는 재앙과 같았다. 도시 지역의 의석을 모두 잃었으며, 과거 정부 여당이었던 위상에서 정치적 변방으로 밀려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자유당 당수였던 아치볼드 싱클레어마저 자신의 지역구인 케이쓰니스 앤 서덜랜드에서 낙선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는 주요 정당 당수가 총선에서 의석을 잃은 드문 사례였다. 국민자유당 역시 의석의 3분의 2를 잃는 등 더욱 참담한 결과를 맞았고, 1931년 분당 이후 처음으로 자유당보다 적은 의석을 얻게 되었다. 국민자유당은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독자적인 정당 활동을 사실상 마감했으며, 2년 뒤 보수당과 합당하여 1968년까지 보수당 내 하위 그룹으로 존재했다.
선거 결과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변화를 갈망하는 영국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했다. 1945년 7월 선거 시점에서 일본 제국은 아직 항복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엄밀히는 전시 중이었으나, 유럽 전선에서는 이미 5월 8일 나치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여 실질적인 종전 상태였다. 1935년 총선 이후 10년 만에 치러진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처칠의 보수당 대신, 복지 국가 건설과 사회 개혁을 약속한 노동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는 전쟁의 영웅주의보다는 안정적인 미래와 복지 확충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더 컸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 선거를 통해 미래의 영국 정계를 이끌 여러 인물들이 의회에 입성했다. 노동당에서는 훗날 총리가 되는 해롤드 윌슨과 제임스 캘러헌을 비롯해 바바라 캐슬, 마이클 풋, 휴 게이츠켈 등이 당선되었다. 반면, 보수당 소속으로 훗날 총리가 되는 해롤드 맥밀런은 이 선거에서 의석을 잃었으나, 같은 해 보궐선거를 통해 의회로 복귀했다.
이 선거는 전쟁 직후에 치러졌다는 점에서 1900년 총선거, 1918년 총선거와 함께 소위 '카키 선거(Khaki election)'로 분류되기도 한다. 하지만 앞선 두 선거와 달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가 속한 정당이 패배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사례로 남았다.
6. 한국에 대한 시사점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치러진 1945년 영국 총선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 총리의 보수당이 압도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패배하고, 복지 국가 건설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노동당이 역사상 처음으로 단독 과반수를 확보하며 승리한 중요한 선거였다. 이는 단순히 정권 교체를 넘어, 전쟁 이후 안정적인 삶과 사회 개혁을 바라는 영국 국민들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로 평가된다.
이러한 영국의 변화는 당시 일제강점기에서 막 벗어나 새로운 국가 건설의 방향을 모색하던 한국 사회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강력한 리더십만큼이나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사회 안전망 구축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노동당의 승리는 전후 복지 국가 건설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대한민국 역시 이후 복지 제도를 설계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클레멘트 애틀리 정부를 중심으로 한 영국의 경험을 참고하게 된다. 1945년 영국 총선에서 나타난 복지 확대와 사회 개혁에 대한 요구는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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