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민스크 지하철 폭탄 테러는 2011년 4월 11일 벨라루스 민스크의 카스트리치니츠카야 역에서 발생하여 15명이 사망하고 204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99년 네미가 압사 사고 이후 벨라루스에서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낸 사건으로, 과거에도 벨라루스에서는 여러 차례 폭탄 테러가 발생한 전례가 있었다. 폭탄 테러는 러시아워 시간대에 발생했으며, 조사 결과 원격 조종이 가능한 폭탄이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벨라루스 정부는 용의자들을 체포하고 조사를 진행했으며, 국제 사회는 테러를 규탄하고 수사 협력을 제안했다. 재판을 통해 용의자들에게 유죄가 선고되었고, 2012년 초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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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벨라루스 - 2011년 벨라루스 시위 2011년 벨라루스 시위는 악화된 경제 상황에 대한 항의로 시작되어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정권에 반대하는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혁명', '박수 시위' 등의 형태로 진행되었으나, 경찰의 강경 진압과 정부의 소셜 미디어 제한 및 집회 금지 조치로 이어졌다.
1999년 네미가 역 압사 사고로 53명이 사망한 이후, 2011년 민스크 지하철 폭탄 테러는 벨라루스에서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낳은 사건이었다.
이전의 벨라루스 내 폭탄 테러들은 사망자를 발생시키지 않았다. 2005년 9월, 비쳅스크에서 두 건의 폭탄 테러가 발생했는데,[20] 첫 번째는 범죄 조직 소행, 두 번째는 카페 밖에서 발생하여 46명이 부상당한 사건으로 불량배 소행으로 추정되었다.[20] 2008년 7월 4일 벨라루스 독립 기념일 행사 중 민스크 콘서트에서 폭탄이 터져 54명이 부상당했다.[21] 비쳅스크 카페 폭탄 테러와 마찬가지로, 민스크 콘서트 폭탄 테러 역시 불량배 소행으로 추정되었다.[21]
2010년 벨라루스 대통령 선거는 12월에 치러졌다. 루카셴코는 90.65% 투표율에 79.65%(5,130,557표) 득표율을 얻었다. 최대 4만 명이 루카셴코에 항의했고[22] 약 600명이 체포되었다.[6] 2011년 경제 위기로 루블화 가치가 급락했고, 2010년 12월과 2011년 5월 사이 평균 임금(달러 기준)이 38% 감소했다.[23] 이는 그해 6월 루카셴코 정부에 대한 추가 시위를 촉발했다.
3. 폭탄 테러
2011년 4월 11일 오후 5시 55분(현지 시각), 벨라루스민스크 지하철 카스트리치니츠카야 역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이 역은 아일랜드식 승강장을 갖추고 있었으며, 폭발 당시 양쪽 선로에 열차가 있었다.[24] 폭탄은 인스티투트 문화행 선로 옆 벤치 아래에 설치되어 인바운드 열차의 두 번째 차량 옆에서 폭발했다.[25]
폭발 당시 역에는 약 300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우루치행 열차가 정차하지 않고 통과했다.[25] 목격자들은 열차에서 승객들이 내릴 때 "섬광과 굉음"이 있었다고 증언했다.[35] 폭탄에는 못과 볼 베어링이 채워져 있었고, 원격 조종으로 폭발했을 가능성이 있다.[6] 폭발로 지름 80cm의 구멍이 생겼으며,[25] 인접한 플로샤드 레니나 역과 플로샤드 포베디 역의 열차까지 흔들릴 정도로 강력했다.[26] 폭발 위력은 TNT 5~7kg에 해당했다.[27]
인테르팍스 통신은 폭탄이 부분적으로 금속 파편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도했다.[28] 부상은 대부분 파편에 의한 것이었다.[29] 폭탄은 무선 조종되었고, 고도의 기술적 품질을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30] 아나톨리 쿨레쇼프 내무부 장관은 범인들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죽이려" 했다고 말했다.[2]
3. 1. 피해 상황
부상자들은 민스크의 5개 병원에 입원했다.[25] 부상자 중 22명이 중태였으며,[1][25] 그 중 1명이 병원에서 사망했다.[31] 다른 30명은 중간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29]
2011년 4월 13일은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되었다.[32] 깃발에는 검은 리본이 부착되었고, 모든 오락 행사가 취소되었다.
4. 수사 및 체포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은 폭발이 "평화와 안정을" 훼손하려는 의도라고 언급하며 외국 개입 가능성을 시사하는 한편, 국내 무기 저장 시설에 대한 긴급 조사를 명령했다.[35] 그는 폭발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지시하며 벨라루스 보안 당국에 "매일 결과가 나와야 한다. 밤낮으로 일하라"고 강조했다.[33] 또한 모스크바 지하철 테러 공격 경험을 바탕으로 조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 러시아 보안 당국과 연락할 것을 촉구했다.[33]
루카셴코 대통령은 벨라루스 국민에게 범인 체포에 협조해 줄 것을 호소하며, "국민들에게 솔직하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없이는 이 괴물들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했다.[33] 또한 조사의 완전한 투명성과 시민들에게 정보의 완전한 제공을 명령했다.[36]
벨라루스 국가보안위원회는 공격에 대한 사진이나 비디오를 가진 사람에게 사례하겠다고 발표했다.[37] 한편, 민스크 주민 3명이 "선동적인 소문을 퍼뜨리고 공포를 조장한 혐의"로 구금되었는데, 이들은 인터넷 포럼과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에서 폭탄 테러에 대한 허위 정보를 퍼뜨린 혐의를 받았다.[39]
4월 12일, 여러 명이 체포되었고 폭탄 테러범의 몽타주가 공개되었다.[40] 테러 공격의 동기는 불안정화 시도, 극단적인 무정부주의 단체의 행위, 정신 이상자의 행위 등 세 가지로 조사되었으나,[41] 체포 이후, 정신 이상자의 소행이라는 세 번째 동기가 정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43] 인터폴과의 협력을 통해, 벨라루스 내무부에서 제공한 지문 증거는 지하철 공격 범인의 지문과 2008년 독립 기념일 폭탄 테러범의 지문과 일치했다.[42]
루카셴코 대통령은 체포된 용의자들이 "공격을 지시한" 사람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선언했다.[44] 또한 용의자들이 유죄를 인정했으며 경찰과 벨라루스 국가보안위원회의 조사를 "훌륭한 작전"이라고 묘사했고, 비쳅스크와 독립 기념일 공격에도 유죄라고 인정했다고 주장했다.[45] 그러나 그들의 동기는 여전히 불분명하다고 말했다.[46]
체포된 용의자 중 두 명은 울라지슬라우 카발료우()와 드미트리 카나발라우()였다. 카발료우는 비쳅스크에서 태어나 2010년 민스크로 이주했고, 카나발라우는 비쳅스크의 트랙터 공장에서 일했다. 카나발라우는 2011년 4월 10일부터 13일 사이에 민스크에서 아파트를 임대했으며, 카발료우는 그와 함께 살았다.[13]
5. 논란
벨라루스 내에서는 민족이나 종교 갈등, 폭력적인 정치적 반대 세력이 없다는 점에서 공식 발표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20] 특히,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의 반대 세력이 대부분 수감되거나 감시받는 상황에서, 독립적인 테러 조직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 2005년 9월 비쳅스크에서 두 건의 폭탄 테러가 발생했는데, 첫 번째는 범죄 조직, 두 번째는 불량배 소행으로 추정되었다.[20] 2008년 7월 4일 벨라루스 독립 기념일 행사 중 민스크 콘서트에서 폭탄이 터져 54명이 부상당했는데, 이 역시 불량배 소행으로 추정되었다.[21]
6. 재판 및 처형
2011년 9월, 재판이 시작되었고, 11월에 코발료우와 카나발라우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14]
2011년 민스크 지하철 폭탄 테러의 가해자였던 울라지슬라우 코발료우의 어머니에게 아들의 처형을 알리기 위해 보낸 공식 서한
2012년 3월 초, 코발료우와 카나발라우는 총살로 처형되었다. 사형수의 정확한 처형 시점과 장소는 비밀에 부쳐졌다. 2012년 3월 15일, 유럽 의회는 벨라루스 정부의 사형 집행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50] 벨라루스 외무부는 이 결의안이 국가 내정에 대한 심각한 간섭이라고 반발했다. 2012년 3월 17일, 울라지슬라우 코발료우의 어머니는 아들의 처형이 집행되었다는 통지를 받았다.
7. 국제 사회의 반응
국제 사회는 2011년 민스크 지하철 폭탄 테러에 대해 즉각적이고 광범위하게 반응했다.
; 초국가적 기구
'''유엔''': 반기문 사무총장은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규탄했다.[51]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이 사건을 "명백한 테러 공격"으로 규정하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는 벨라루스 정부의 개입 가능성에 대한 국제적 의혹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52][17]
'''유럽 연합''': 캐서린 애슈턴 외교·안보 정책 고위 대표와 예르지 부제크 유럽 의회 의장은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촉구했다.[53][54]
30px '''유럽 안보 협력 기구''': 아우드루니우스 아주발리스 의장이 애도를 표했다.[55]
25px '''집단 안보 조약 기구''': 니콜라이 보르디우자 사무총장이 애도를 표했다.[56]
; 국가
아르메니아: 세르지 사르키샨 대통령은 애도를 표하고 예레반 병원에서 피해자 치료를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57]
아제르바이잔: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은 테러를 강력히 규탄하고 희생자 가족들에게 애도를 표했다.[58]
중국: 훙레이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이 이번 공격을 강력히 규탄하며 벨라루스 정부의 테러 대응 노력을 지지한다고 밝혔다.[59]
벨라루스 대통령 공보실은 이스라엘, 러시아, 영국이 수사에 도움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87]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또한 사건 수사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25] 조지아와 이란도 벨라루스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82]
2011년 4월 12일, 이스라엘 방위군 의무대 의사 3명으로 구성된 팀이 지원을 위해 벨라루스로 출발했다. 이 팀은 현지 당국에 외상 및 외상 후 절차에 대한 자문을 제공했다.[89] 이스라엘은 또한 신 베트 전문가 팀과 경찰 과학 수사 팀, 테러 방지 분야의 전문가를 파견했다.[63]
; 정치적 반응
벨라루스 외부의 정치 세력은 사건의 공식적인 설명뿐만 아니라 수사 및 재판 절차에 의문을 제기하며, 벨라루스에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을 사면하고 사형제를 폐지할 것을 반복적으로 요구했다.[85] EU에 따르면,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그 결과 재판이 법적 근거 없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독일 의회는 국제 조사의 객관성에 공식적으로 의문을 제기했으며, 인터폴이 벨라루스 수사관이 제공한 "결함 있는" 증거에 고의적으로 동의했다고 비난했다.[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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