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자 막시모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백자 막시모스는 580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난 기독교 신학자이다. 그는 철학, 수사학 등을 공부하고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비서관을 지냈으나, 단성론에 반대하여 수도사가 되었다. 단의론 논쟁에 참여하여 로마 교황 마르티노 1세와 함께 단의론을 비판했고, 콘스탄스 2세에 의해 체포되어 고문과 유배를 당한 후 662년 사망했다. 그의 양성론은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정통으로 확립되었으며, 동방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에서 교회 교부로 존경받고 있다. 그는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신학적 인간론과 테오시스를 강조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이단죄 기결수 - 찰스 브릭스
찰스 브릭스는 미국의 신학자이자 성경 학자로,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히브리어 교수를 지냈으며 이단 혐의로 면직 후 성공회 사제가 되었고, 히브리어 사전 공동 편찬 및 주석 시리즈 편집에 참여하는 등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 662년 사망 - 정명진 (당나라)
당나라 장군 정명진은 수나라 말 두건덕 휘하 현령으로 있다가 당나라에 귀순하여 유흑달 토벌과 여당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며 사후 우위대장군에 추증되고 시호는 열이다. - 662년 사망 - 임아상
임아상은 당나라의 장수이자 재상으로, 소정방의 돌궐 정벌과 서돌궐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참지정사로 재상직을 수행하며 장손무기의 옥사를 처리하고 고구려 원정에도 참전했으나 원정 중 사망한, 공정한 인사 관리를 중시한 인물이다. - 7세기 기독교 신학자 - 교황 그레고리오 1세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6세기 후반 로마 교황으로,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교황권의 봉사 강조, 교회 개혁, 앵글로색슨족 기독교 전파, 전례 개정 및 그레고리오 성가 발전, 그리고 중세 영성에 큰 영향을 미친 저술 활동을 했다. - 7세기 기독교 신학자 - 베다 베네라빌리스
베다 베네라빌리스는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역사의 중요한 사료인 《잉글랜드 교회 역사》를 저술하고 신학, 천문학, 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잉글랜드의 수도사이자 학자, 역사가이며, 그의 학문적 업적과 가톨릭에 대한 기여로 교회 박사로 추존되었다.
고백자 막시모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고백자와 신학자 |
존경 받는 교파 |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
기념일 | 8월 13일 (서방 기독교) 1월 21일 (비잔틴 기독교) |
출생지 | 히스피야, 시리아 프리마, 비잔티움 제국 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비잔티움 제국 |
사망 장소 | 차게리 |
신학 정보 | |
주요 저서 | 미스타고기아 |
신학 사조 | 아포파시스 |
주요 관심사 | 신학적 인간학 금욕주의 |
주요 사상 | 양의설 |
기타 정보 | |
기타 공헌 | 신학자, 수도사, 학자, 성인 |
2. 생애
580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경건한 크리스찬 가정에서 태어난 막시모스는[44][45] 철학, 문법, 수사학 등 고등 교육을 받고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철학, 수학, 천문학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5]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비서관으로 일했으나, 정부가 단성론에 물든 것을 보고 61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근교 크리소폴리스의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다. 이후 수도원장이 되었고,[6] 겸손과 지혜로 수도사들 사이에서 평판이 높았다.[44][45]
페르시아의 아나톨리아 정복으로 막시모스는 카르타고 근처 수도원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성 소프로니우스의 가르침을 받고,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와 가짜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테의 그리스도론 저작을 연구했다.[7] 카르타고에서 신학 및 영적 저술가로 활동하며[8] 총독 그레고리 등에게 존경받았다.[9]
626년, 페르시아와 슬라브의 침입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알렉산드리아, 크레타 섬을 거쳐 카르타고에 도착, 소프로니오스를 만났다.[45] 이후 예수의 성육신에서 인간성과 신성의 상호 작용에 대한 논쟁, 즉 단의설 논쟁에 휘말렸다.[10]
단의설은 양성론자와 단성론자 간 타협으로, 단성론자들은 양성론이 네스토리우스주의와 비슷하다고 보았다. 단의설 지지자들은 칼케돈의 위격적 연합 정의를 고수했지만, 그리스도에게는 신적 의지만 있다고 주장했다.
단의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세르기우스 1세 총대주교와 막시무스의 친구 피루스에 의해 전파되었다.[10] 638년 세르기우스 사후 피루스가 총대주교가 되었으나, 정치적 상황으로 폐위되었다. 막시무스는 피루스와 공개 토론을 벌여 예수는 인간적 의지와 신적 의지가 모두 있다는 입장을 취했고, 피루스는 단의설의 오류를 인정, 645년 막시무스와 함께 로마로 갔다.[11]
동로마 제국은 국가 통합을 위해 단성론과의 타협책으로 그리스도(할리스토스)는 유일한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는 단의론을 이용하려 했다. 638년 헤라클리우스(이라클리오스) 황제는 단의론 찬동을 의무화하는 에크테시스(Ecthesis, 「신앙 선언」)를 발표했다.[44]
헤라클리우스 사후, 단의론 지지자인 콘스탄스 2세가 즉위하자 막시무스는 로마로 가 테오도루스 1세와 회견했다.[44] 645년경부터 신학 논쟁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45]
막시무스는 마르티누스 1세와 함께 에크테시스에 반대하며, 「예수 그리스도(이이스스 할리스토스)는 두 개의 다른 별개의 의지와 활동을 가져야 한다」, 「마리아의 유일한 아들인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은 신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별개로 의지하고 활동한다」고 주장했다.[47]
콘스탄스 2세는 653년 로마 교황 마르티노 1세를 체포, 유배 보냈고, 마르티노 1세는 2년 후 사망했다. 막시모스도 체포되었다.[43][45] 658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황궁으로 소환되어 이단 재판을 받았으나, 이의설 입장을 고수하며 4년간 유배되었다. 이집트의 이집트의 이슬람 정복 등을 지원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중상모략이라 일축했다.[16][17]
황제는 막시모스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고문이 시작되었다. 막시모스와 제자들은 증언을 거부하여 고문받았다.[43] 662년, 막시모스는 재판에서 이단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고문을 당해 혀가 잘리고 오른손이 잘렸다.[18] 제자 아나스타시오스도 형벌을 받았다. 막시모스는 제자와 함께 코카서스로 유배되었고, 아나스타시오스는 도중에 사망했다.[43] 막시모스는 조지아 라지카 또는 콜키스 지역으로 유배, 차게리 근처 무리스-치케로 추정되는 세마룸 요새에 갇혔다.[19] 662년 8월 13일 사망했다.[20][21] 막시모스의 재판 사건들은 아나스타시우스 비블리오테카리우스에 의해 기록되었다.[22] 임종 직전 그리스도(하리스토스)가 나타나거나, 무덤 위에 세 개의 타는 촛불이 나타나는 등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44]
2. 1. 초기 생애 (580년경 - 613년경)
580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경건한 크리스찬 가정에서 태어났다.[44][45] 철학, 문법, 수사학 등 고도의 교육을 받았으며,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막시모스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철학, 수학, 천문학 등에서 비할 데 없는 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막시모스가 수사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인데, 그는 자신의 저서인 《요한에게 보내는 초기 아엠비구아》 서문에서 이를 언급했다.[5]입직 후에는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비서관이 되었으나, 황제를 비롯한 정부가 단성론에 물들어 있는 것을 알고 직을 사임하고, 614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근교 크리소폴리스의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다. 이후 수도원의 수도원장으로 승진했다.[6] 막시모스의 겸손과 지혜는 곧 수도사들 사이에서 평판이 높아졌지만, 막시모스는 일개 수도사의 지위에 머물렀다.[44][45]
페르시아가 아나톨리아를 정복했을 때, 막시모스는 카르타고 근처의 수도원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곳에서 성 소프로니우스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고,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와 가짜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테의 그리스도론 저작들을 자세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I P 셸던 윌리엄스에 따르면, 그의 업적은 이러한 교리를 아리스토텔레스 논리의 틀 안에 집어넣어 시대의 기질에 맞게 하고 오해의 소지를 줄였다는 것이다.[7] 막시모스는 카르타고에 머무는 동안 신학적, 영적 저술가로서의 경력을 이어갔다.[8] 또한 총독 그레고리와 지방 장관 조지에게서 높은 존경을 받았다.[9]
당시 단성론을 둘러싼 논쟁이 격렬해졌으며, 예루살렘 총대주교 소프로니오스는 이미 단성론과 단의론에 대한 반박을 행하고 있었다.
2. 2. 단의론 논쟁과 유랑 (626년 - 645년)
left와 그의 아들이 새겨진 은 헥사그램. 콘스탄스 2세는 단의설을 지지했으며, 막시무스가 단의설에 동의하지 않자 그를 추방했다.]]626년, 막시무스는 페르시아와 슬라브의 침입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크레타 섬을 지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도착하여 반단의론자 소프로니오스를 만났다.[45] 그는 카르타고에 머무는 동안 예수의 성육신에서 인간성과 신성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에 대한 논쟁, 즉 단의설 논쟁에 휘말렸다. 이 논쟁은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시작되어 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후 격화된 불일치의 연장선이었다.[10]
단의설은 양성론자와 단성론자 간의 타협으로 발전했는데, 단성론자들은 양성론이 네스토리우스주의와 개념적으로 구별할 수 없다고 보았다. 단의설 지지자들은 칼케돈의 위격적 연합 정의, 즉 신성과 인간성의 두 본성이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연합되었다는 것을 고수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에게는 신적 의지만 있고 인간적 의지는 없다고 주장했다(단일 의지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단의설이 파생되었다).
단의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세르기우스 1세 총대주교와 막시무스의 친구이자 크리소스폴리스 수도원장 후임자인 피루스에 의해 전파되었다.[10] 638년 세르기우스가 사망한 후, 피루스가 그의 뒤를 이어 총대주교가 되었지만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곧 폐위되었다. 피루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추방된 동안, 막시무스와 폐위된 총대주교는 단의설 문제에 대한 공개 토론을 벌였다. 수많은 북아프리카 주교들이 참석한 이 토론에서 막시무스는 예수에게 인간적 의지와 신적 의지가 모두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토론 결과 피루스는 단의설의 오류를 인정했고, 막시무스는 645년에 그와 함께 로마로 갔다.[11]
당시 동로마 제국은 국가 통합을 위해 단성론자와의 타협책으로 그리스도(할리스토스)는 유일한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는 단의론을 이용하려 했다. 638년에는 단의론 찬동을 신민에게 의무화하는 에크테시스(Ecthesis, 「신앙 선언」)가 헤라클리우스(이라클리오스) 황제로부터 발표되었다.[44] 에크테시스는 로마 교황호노리우스 1세의 답변에 근거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세르기우스 1세가 기초했다.[46]
헤라클리우스 황제 사후, 단의론 지지를 명확히 하는 콘스탄스 2세(재위: 641년 - 668년)가 황제로 즉위하자 막시무스는 로마로 가서 테오도루스 1세(호노리우스 1세 이후 3대 교황, 재위: 642년 - 649년)와 회견했다.[44] 645년경부터 막시무스 자신도 신학 논쟁에 관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45]
막시무스는 마르티누스 1세(재위: 649년 - 653년)와 함께 에크테시스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이스스 할리스토스)는 마치 하나의 위격(페르소나) 안에 두 개의 다른 별개의 본성(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두 개의 다른 별개의 의지와 활동을 가져야 한다」, 「마리아의 유일한 아들인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은 신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별개로 의지하고 활동한다」고 주장했다.[47]
2. 3. 체포, 고문, 유배, 그리고 죽음 (653년 - 662년)
콘스탄스 2세는 자신이 지지하는 단의론과 그 칙령, 그리고 이를 지지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들이 탄핵된 교회 회의의 결론을 알게 되자, 653년 로마 교황 마르티노 1세를 체포하여 크림 지역으로 유배 보냈고, 마르티노 1세는 2년 후에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그 후 막시모스도 체포되었다.[43][45]고백자 막시모스의 단의설 거부는 658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궁으로 소환하여 이단으로 재판받게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단의설이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호의를 얻고 있었다. 막시모스는 이의설의 입장을 고수했고, 4년 동안 더 유배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그는 이집트의 이집트의 이슬람 정복과 마그레브의 이슬람 정복을 지원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이를 중상모략이라고 일축했다.[16][17]

몇 차례 막시모스의 감금 장소를 바꾸면서, 황제는 사자를 보내 막시모스에게 단의론에 찬성하도록 설득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때로는 황제의 사자마저 오히려 막시모스에게 설득당해 단의론을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거듭된 설득에도 성공하지 못하자, 황제는 분노하여 설득을 단념했다. 고문이 시작되었고, 반역죄로 몰린 막시모스에 대한 유죄를 증명하기 위한 증언을 요구받아 소환된 막시모스의 제자들도 증언을 거부했기 때문에 고문을 받았다.[43]
662년, 막시모스는 다시 재판에 회부되어 이단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 후 막시모스는 고문을 당해 반역을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혀가 잘렸고, 편지를 더 이상 쓸 수 없도록 오른손이 잘렸다.[18] 막시모스는 더욱 심한 고문을 받았고, 다시는 연설과 저술을 할 수 없도록 혀가 잘리고 오른손이 잘렸다. 제자 중 한 명인 아나스타시오스도 비슷한 형벌에 처해졌다. 그 후 막시모스는 제자 아나스타시오스와 함께 코카서스로 유배되었다. 두 사람은 고문의 고통 때문에 걸을 수 없어, 마차에 실려 보내졌지만, 아나스타시오스는 도중에 사망했다.[43] 막시모스는 이후 오늘날 조지아의 라지카 또는 콜키스 지역으로 유배되었고, 현대 도시 차게리 근처의 무리스-치케로 추정되는 세마룸 요새에 갇혔다.[19] 그는 그 직후인 662년 8월 13일에 사망했다.[20][21] 막시모스의 재판 사건들은 아나스타시우스 비블리오테카리우스에 의해 기록되었다.[22]
막시모스는 유배지에서 사망(662년 8월 13일)했다. 임종 직전에는 그리스도(하리스토스)가 막시모스에게 나타나거나, 무덤 위에는 세 개의 타는 촛불이 나타나거나, 무덤에서 병자의 치유가 일어나는 등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44]
3. 신학 사상
막시모스는 위(僞) 디오니시오스의 제자로서, 플로티노스와 프로클로스 등 초기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보존하고 해석했다. 대머리 샤를의 요청으로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가 막시모스의 위(僞)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테 연구를 이어나갔다.[1]
막시모스는 출애굽-귀환(exitus-reditus)이라는 플라톤적 모델을 바탕으로 신학적 인간론을 펼쳤다. 그는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신성화(''테오시스'') 강조는 동방 기독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1]
그는 그리스도론에서 엄격한 양성론을 주장했는데, 이는 ''테오시스'' 강조와 연결된다. 인간은 하느님과 완전히 연합하도록 예정되어 있으며, 이는 하느님이 먼저 성육신을 통해 인간과 완전히 연합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다면(예: 신적 의지만 있고 인간적 의지는 없는 경우) 인간은 완전히 신적이 될 수 없고, 구원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막시모스는 신적 성육신의 무조건성을 주장했다.[1]
막시모스는 오리게네스, 니사의 성 그레고리처럼 모든 이성적 영혼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아포카타스타시스''(보편적 화해)를 지지했다.[4] 이 주장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막시모스가 영적으로 성숙한 제자들과 함께 보편적 화해를 믿었다고 주장한다.[4]
3. 1. 양성론과 단의론 논쟁
막시무스가 카르타고에 머무는 동안, 예수의 성육신에서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에 대한 기독론적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시작되어 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후 격화되었다. 단의설은 양성론과 단성론 사이의 타협으로 발전했는데, 단성론자들은 양성론이 네스토리우스주의와 구별할 수 없다고 믿었다. 단의설 지지자들은 칼케돈의 위격적 연합 정의, 즉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연합되었다는 것을 고수하면서도, 그리스도에게는 신적 의지만 있고 인간적 의지는 없다고 주장했다.[10]단의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세르기우스 1세 총대주교와 막시무스의 친구이자 크리소스폴리스 수도원장 후임자인 피루스에 의해 전파되었다.[10] 세르기우스 1세가 638년에 사망한 후, 피루스가 총대주교가 되었지만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곧 폐위되었다. 피루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추방된 동안, 막시무스와 피루스는 단의설 문제에 대한 공개 토론을 벌였다. 많은 북아프리카 주교들이 참석한 이 토론에서 막시무스는 예수에게 인간적 의지와 신적 의지가 모두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토론 결과 피루스는 단의설의 오류를 인정했고, 막시무스는 645년에 그와 함께 로마로 갔다.[11]
막시무스는 로마의 산 사바에 머물렀을 수 있는데,[12] 교황 마르티노 1세가 로마의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649년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했을 때 참석했기 때문이다.[13] 105명의 주교들은 시노드의 공식 회의에서 단의설을 정죄했는데, 일부에서는 이 회의록이 막시무스에 의해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14] 653년, 단의설 교리를 지지했던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스 2세의 명령에 따라 교황 마르티노 1세와 막시무스는 로마에서 체포되었다. 교황 마르티노 1세는 재판 없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제국의 수도로 보내지기 전에 사망했다.[15]
동방이 단성론과 단의론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에 위기감을 느낀 막시모스는 626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알렉산드리아, 크레타 섬,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거치는 유랑을 떠났고, 카르타고에서 반단의론자 소프로니오스를 만났다.[45] 막시모스는 단성론과 단의론에 대한 반박을 알리는 데 힘썼고, 성직자뿐만 아니라 일반 신도들에게도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동로마 제국은 국가 통합을 위해 단성론자와의 타협책으로 그리스도가 유일한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는 단의론을 이용하려 했다. 638년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단의론에 대한 찬동을 의무화하는 「에크테시스」(신앙 선언)를 발표했다.[44] 에크테시스는 로마 교황호노리우스 1세의 답변에 근거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세르기우스 1세가 기초했다.[46]
헤라클리우스 황제 사후, 단의론 지지를 명확히 하는 콘스탄스 2세가 황제로 즉위하자 막시모스는 로마로 가서 테오도루스 1세와 회견했다.[44] 그리고 645년경부터 막시모스 자신도 신학 논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45]
막시모스는 에크테시스에 대해 마르티누스 1세와 함께 정면으로 반대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위격 안에 두 개의 다른 별개의 본성(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두 개의 다른 별개의 의지와 활동을 가져야 한다」, 「성모 마리아의 유일한 아들인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은 신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별개로 의지하고 활동한다」고 주장했다.[47] 새로운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구원은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자유롭게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의지를 신으로서의 의지에 따르게 한 데에 있으며, 의지를 갖춘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행위에 따른다고 했다.[48]
막시모스는 단의론을 탄핵한 649년 로마의 Lateran Council of 649|라테란 공의회|영어에 150명의 서방교회 대표와 37명의 동방교회 대표 중 동방 측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했다.[44] 이 교회 회의에서 단의설 비판이 마르티누스 1세에 의해 포고되었다.[45]
3. 2. 신플라톤주의의 영향과 테오시스
막시모스는 위(僞) 디오니시오스의 제자로서, 플로티노스와 프로클로스 등의 사상을 포함하여 초기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보존하고 해석한 많은 기독교 신학자 중 한 명이었다. 막시모스의 위(僞)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테에 대한 연구는 대머리 샤를의 요청에 따라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에 의해 이어졌다.[1]막시모스의 사상에 나타난 플라톤주의의 영향은 그의 신학적 인간론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막시모스는 출애굽-귀환(exitus-reditus)의 플라톤적 모델을 채택하여,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구원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일치로 회복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 신성화 또는 ''테오시스''에 대한 강조는 막시모스가 동방 신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는데, 이러한 개념들은 동방 기독교에서 항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기 때문이다.[1]
그리스도론적으로 막시모스는 엄격한 양성론을 주장했는데, 이는 ''테오시스''에 대한 강조의 귀결로 볼 수 있다. 구원의 관점에서 인류는 하나님과 완전히 연합되도록 예정되어 있다. 막시모스에게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이 먼저 성육신을 통해 인류와 완전히 연합하셨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스도가 완전히 인간이 되지 않았다면 (예를 들어, 그가 신적 의지만 가지고 인간적 의지는 갖지 않았다면), 인류가 완전히 신적이 될 수 없으므로 구원은 더 이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막시모스 고백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신적 성육신의 무조건성을 주장했다.[1]
구원에 관하여 막시모스는 오리게네스와 니사의 성 그레고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이성적 영혼이 결국 구원받을 것이라는 생각인 ''아포카타스타시스'' 또는 보편적 화해의 지지자로 묘사되어 왔다. 이 주장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다른 학자들은 막시모스가 그의 가장 영적으로 성숙한 제자들과 함께 보편적 화해에 대한 이러한 믿음을 공유했다고 주장해왔다.[1]
3. 3. 보편 구원론 논쟁
막시모스는 위(僞) 디오니시오스의 제자로서, 플로티노스와 프로클로스 등 초기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보존하고 해석한 기독교 신학자 중 한 명이었다. 대머리 샤를의 요청으로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가 막시모스의 위(僞)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테에 대한 연구를 이어나갔다.[1]막시모스는 오리게네스, 니사의 성 그레고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이성적 영혼이 결국 구원받을 것이라는 ''아포카타스타시스''(혹은 보편적 화해)의 지지자로 묘사되었다.[4] 이 주장은 논쟁의 대상이었으나, 다른 학자들은 막시모스가 그의 가장 영적으로 성숙한 제자들과 함께 보편적 화해에 대한 믿음을 공유했다고 주장한다.[4]
4. 저작
막시모스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단의론을 반박하는 교리 관련 저작, 각종 서간, 그리고 주님의 기도(천주경)와 시편 59편에 대한 주석을 포함하여 난해한 부분에 대한 성경 주석이 많이 남아 있다.[44]
'''저작'''
- ''요한에게 보낸 난해 구절''(Ambigua ad Iohannem)
- ''토마스에게 보낸 난해 구절''(Ambigua ad Thomam)
- ''15장''(Capita XV)
- ''애덕에 관한 장''(Capita de caritate)
- ''신학과 경제에 관한 장''(Capita theologica et oeconomica)
- ''교회력''(Computus ecclesiasticus)
- ''피르스와의 논쟁''(Disputatio cum Pyrrho)
- ''서간집 1–45''(Epistulae I–XLV, 서간)
- ''주님의 기도 해설''(Expositio orationis dominicae)
- ''시편 59편 해설''(Expositio in psalmum LIX)
- ''수덕 생활''(Liber Asceticus)
- ''신비 교육''(Mystagogia)
- ''막시모스의 제자이자 수도자인 아나스타시우스에게 보낸 편지''(Maximi Epistola ad Anastasium monachum discipulum)
- ''신학 및 논쟁 소품집''(Opuscula theologica et polemica)
- ''질의와 의문''(Quaestiones et dubia)
- ''탈라시우스에게 보낸 질의''(Quaestiones ad Thalassium)
- ''테오펨푸스에게 보낸 질의''(Questiones ad Theopemptum)
- ''증언과 삼단 논법''(Testimonia et syllogismi)
- ''수도자의 삶에 대하여''
- ''사랑에 관한 400개의 단장'' - 처음 200개의 단장이 『중세 사상 원전 총서 3 후기 그리스 교부·비잔틴 사상』에 수록되어 있다. 번역, 해설은 타니 류이치로.
- ''여러 문제와 의문''
- ''지혜에 관한 200개의 단장''
- ''신비로의 입문(비의 담화)''
- ''신학과 경륜에 관한 500개의 단장''
'''귀속 저작'''
- ''주해'' – 가짜 디오니시우스의 이전 저술에 대한 주석. 발타사르 코르데리우스(Antwerp 1634)의 라틴어 초판은 모든 주석을 막시무스에게 귀속시켰지만, 저자 문제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1940, 1961)가 일부 주석을 스퀴토폴리스의 요한에게 귀속시키면서 제기되었다.
- ''성모 마리아의 생애'' –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가장 오래된 완전한 전기. 이 작품은 귀속된 작품이며 현재 막시무스 신학자의 저작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얀코비악과 부스는 "막시무스의 특징적인 관심사는 ''생애''에 나타나지 않으며, 반대로 ''생애''의 중심 주제는 그의 진정한 저작에 포함된 마리아에 대한 짧은 성찰에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또한 텍스트를 증언하는 그리스어 필사본이 없고, 막시무스를 참고하는 주요 사상가들이 ''생애''의 존재를 알았다는 증거도 없으며, 10세기 후반 이전에 작품으로서의 ''생애''의 기록이 없다고 적었다.
5. 유산과 영향
교황 마르티노 1세와 함께 고백자 막시모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3차 회의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 680–681)에서 무죄가 선언되었는데, 이 회의는 그리스도가 인간적인 의지와 신성한 의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여 단의설을 이단으로 판명했다.[23] 막시모스는 사후에 무죄로 선언되었다.[23]
막시모스는 죽은 직후 성인으로 존경받았으며, 그의 신학적 입장이 정당화되면서 사후 한 세대 안에 매우 유명해졌다. 그의 무덤에서 일어난 기적에 대한 기록들이 그의 명성을 더했다.[24]
막시모스는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 모두에서 교회 교부로 인정받는 마지막 인물 중 한 명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7년 회칙 ''희망으로 구원받았다''(Spe Salvi)에서 막시모스를 '교회의 위대한 그리스 출신 박사'라고 불렀는데, 교황이 막시모스를 '교회의 박사'로 임명하려 했는지, 아니면 이미 그 지위에 있었음을 말하려 했는지는 불분명하다.[25] 동방 기독교에서 막시모스는 항상 영향력이 있었으며,[34] 그의 작품들 중 다수가 가장 영향력 있는 동방 정교회 작가들의 모음집인 그리스어 ''필로칼리아''에 포함되어 있다.[34]
5. 1. 동방 정교회
교황 마르티노 1세와 함께 막시모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3차 회의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 680–681)에서 무죄가 선언되었는데, 이 회의는 그리스도가 인간적인 의지와 신성한 의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으로 단의설은 이단으로 판명되었고, 막시모스는 사후에 무죄로 선언되었다.[23]막시모스는 죽은 직후 성인으로 존경받은 기독교인들 중 한 명이다. 막시모스의 신학적 입장이 정당화되면서 그는 사후 한 세대 안에 매우 유명해졌으며, 그의 무덤에서 일어난 기적에 대한 기록들이 그의 명성을 더했다.[24]
막시모스는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 모두에서 교회 교부로 인정받는 마지막 인물 중 한 명이다. 동방 기독교에서 막시모스는 항상 영향력이 있었다.[34] 그의 작품들 중 다수가 가장 영향력 있는 동방 정교회 작가들의 모음집인 그리스어 ''필로칼리아''에 포함되어 있다.[34]
정교회에서의 기념일은 율리우스력 사용 교회에서 2월 3일 (수정 율리우스력 사용 교회에서는 1월 21일)이다. 불후체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의 이전 기념일은 율리우스력 사용 교회에서 8월 26일 (수정 율리우스력 사용 교회에서는 8월 13일)이다.[50]
5. 2. 서방 교회
교황 마르티노 1세와 함께 막시모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3차 회의(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 680–681)에서 무죄가 선언되었다. 이 회의는 그리스도가 인간적인 의지와 신성한 의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여 단의설을 이단으로 판명했고, 막시모스는 사후에 무죄로 선언되었다.[23]
가톨릭교회에서 막시모스의 기념일은 8월 13일이다.
6. 기념
정교회에서의 기념일은 율리우스력 사용 교회에서 2월 3일(수정 율리우스력 사용 교회에서는 1월 21일)이다. 불후체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의 이전 기념일은 율리우스력 사용 교회에서 8월 26일(수정 율리우스력 사용 교회에서는 8월 13일)이다.[50]
가톨릭교회에서의 기념일은 8월 13일이다.
참조
[1]
서적
The Oxford Handbook of Maximus the Confessor
Ox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The Philokalia Volume II
Faber and Faber
[3]
웹사이트
St. Maximus the Confessor
https://www.britanni[...]
Encyclopaedia Britannica
2023
[4]
문서
[5]
서적
On Difficulties in the Church Fathers: The Ambigua, Volume 1
Harvard University Press, Dumbarton Oaks Medieval Library Series, Volume 28
[6]
문서
St. Maximus of Constantinople
[7]
문서
[8]
서적
Encyclopedia of Early Christianity
Garland Publishing
[9]
서적
The Defence of Byzantine Africa from Justinian to the Arab Conquest: An Account of the Military History and Archaeology of the African Provinces in the Sixth and Sev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British Archaeological Reports
[10]
문서
[11]
문서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http://www.ccel.org/[...]
[12]
논문
An Early Syriac Life of Maximus the Confessor
[13]
간행물
Maximus the Confessor
Westminster Press
[14]
간행물
Maximus Confessor
Garland
[15]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Saints
Oxford University Press
[16]
서적
Muslim Expansion and Byzantine Collapse in North Afric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17]
서적
Cosmic Liturgy: The Universe According to Maximus the Confessor
Ignatius Press
2003
[18]
간행물
Maximus Confessor
Garland
[19]
서적
Maximus Confessor: Selected Writings
Paulist Press
1985
[20]
웹사이트
Catholic Forum
http://www.catholic-[...]
2007-06-25
[21]
서적
Maximus the Confessor and his Companions: Documents from Exile
https://books.google[...]
OUP Oxford
2003-01-16
[22]
서적
Maximus the Confessor: Jesus Christ and the Transfiguration of the World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6-02-04
[23]
서적
Great Events in Religion: An Encyclopedia of Pivotal Events in Religious History [3 volumes]
ABC-CLIO
2016-11-28
[24]
웹사이트
Orthodox Church in America
http://ocafs.oca.org[...]
[25]
문서
[26]
문서
[27]
문서
Maximos, St., Confessor
Oxford Press
[28]
간행물
Maximus the Confessor
Michael Glazier, Inc
[29]
문서
Maximos, St., Confessor
Oxford Press
[30]
문서
Τὸ Μυστήριον τῆς Σωτηρίας κατὰ τὸν Ἅγιον Μάξιμον τὸν Ὁμολογητήν
http://www.synodinre[...]
[31]
웹사이트
Apokatastasis
http://www.theandros[...]
2006-06-20
[32]
서적
Cosmic Liturgy: The Universe According to Maximus the Confessor
Ignatius Press
2003
[33]
웹사이트
The Daring Hope of Hans Urs Von Balthasar
http://www.medaille.[...]
2017-06-15
[34]
서적
The Philokalia: Exploring the Classic Text of Orthodox Spirituality
https://books.google[...]
OUP USA
2012-08-23
[35]
서적
Maximus the Confessor as a European Philosopher
https://books.google[...]
Wipf and Stock Publishers
2017-09-18
[36]
서적
The Oxford Handbook of Maximus the Confessor
https://books.google[...]
OUP Oxford
2015-03-26
[37]
서적
The Oxford Handbook of Maximus the Confessor
https://books.google[...]
OUP Oxford
2015-03-26
[38]
서적
Cosmic liturgy: the universe according to Maximus the Confessor
2003
[39]
웹사이트
Maximus the Confessor, The Life of the Virgin: Translated, with an Introduction and Notes
http://yalepress.yal[...]
Yale University Press
2012
[40]
서적
"A New Date-List of the Works of Maximus the Confessor" in The Oxford Handbook of Maximus the Confessor
Oxford University Press
[41]
간행물
曙光 長司祭牛丸康夫遺稿集
牛丸忍発行、及川信編集
1995
[42]
웹사이트
教皇ベネディクト十六世の143回目の一般謁見演説 証聖者聖マクシモス
https://www.cbcj.cat[...]
[43]
간행물
諸聖略伝 二月
日本ハリストス正教会府主教庁
1989-05-22
[44]
웹사이트
St Maximus the Confessor
http://ocafs.oca.org[...]
미국정교회
[45]
서적
中世思想原典集成3 後期ギリシャ教父・ビザンティン思想
[46]
서적
キリスト教大辞典
教文館
1973
[47]
웹사이트
◆第6世紀◆
http://www.orthodox-[...]
[48]
웹사이트
◆第6世紀◆
http://www.orthodox-[...]
[49]
서적
中世思想原典集成3 後期ギリシャ教父・ビザンティン思想
[50]
문서
[51]
웹사이트
Ambebi.ge
http://www.ambebi.g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