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클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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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클로스는 5세기에 활동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로, 그의 생애는 제자 마리누스가 쓴 찬사 "프로클로스, 혹은 행복에 관하여"를 통해 알려졌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나 알렉산드리아에서 학문을 연마한 후 아테네로 가서 신 아카데미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시리아누스의 뒤를 이어 아카데미의 수장이 되었다. 프로클로스는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과 체계적인 저술을 남겼으며, 신플라톤주의의 세 가지 위격인 하나, 지성, 영혼을 설명하고, 변증법과 테우르기아를 중시했다.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쳐 중세 철학, 르네상스 시대, 근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논의되었으며, 달의 분화구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
프로클로스의 생애에 대한 주요 정보는 그의 제자이자 후계자인 네아폴리스의 마리누스가 스승 사후에 쓴 찬사, "프로클로스, 혹은 행복에 관하여"(라틴어: ''Vita Procli'')에서 비롯된다. 마리누스는 이 전기를 통해 프로클로스가 덕의 정점에 도달하여 에우다이모니아(행복)를 성취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이 책은 다른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의 전기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묘사나 각색이 많아 사료로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4] 또한, 다음 세기 철학자 다마스키우스가 쓴 "알렉산드리아의 이시도르의 생애"에도 당시 시대상과 프로클로스에 대한 일부 정보가 담겨 있다.
프로클로스는 가장 세련되고 발전된 신플라톤주의 체계 중 하나를 세운 철학자로, 고전 철학 시대의 거의 마지막 시기에 활동했다. 당대의 다른 신플라톤주의자들처럼 자신을 플라톤의 올바른 해석자로 여겼으며, 플라톤의 저술이 신성한 영감을 받았다고 믿었다.[3] 그의 주석서는 이후 중세 사회의 철학 담론 형성에 일정 영향을 주었다.[9]
2. 생애
마리누스에 따르면, 프로클로스는 412년 콘스탄티노폴리스(당시 뷔잔티온)에서 리키아 출신의 사회적 지위가 높은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 시절은 크산토스에서 보냈다. 아버지를 따라 법관이 되기를 기대하며 알렉산드리아에서 문법학, 수사학, 로마법, 철학, 수학 등을 공부했다. 학업을 마치기 전, 스승 레오나스를 따라 잠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 변호사로 활동하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2] 그러나 법률 실무를 경험하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철학임을 깨닫고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올림피오도로스 1세 밑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깊이 공부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에게서는 수학과 종교를 배웠다.
430년 또는 431년, 프로클로스는 당시 철학의 중심지였던 아테네로 이주했다. 마리누스는 프로클로스가 뷔잔티온을 여행할 때 꿈에 학문의 여신 아테나가 나타나 아테네에서 철학을 공부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전한다. 또한 아테네 도착 후 아크로폴리스를 방문했을 때 문지기가 "당신이 오지 않았으면 문을 잠글 뻔했다"고 말했는데, 이는 단절될 뻔했던 플라톤주의의 전통을 프로클로스가 계승할 운명임을 암시하는 일화로 해석된다.
아테네의 아카데메이아에 들어간 프로클로스는 학장 아테네의 플루타르코스(카이로네이아의 플루타르코스와는 다른 인물)와 그의 후계자 시리아누스, 그리고 아스클레피게니아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437년 시리아누스의 뒤를 이어 아카데미의 수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저술과 강의 활동에 매진하는 한편, 다신교 신봉자로서 헤카테 환시 체험이나 기우제와 같은 기적을 행했다고도 전해진다. 마리누스는 그가 매일 700행에 달하는 글을 썼다고 기록했다.
프로클로스는 당시 점증하던 기독교 세력의 압박으로 인해 약 1년간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평생을 아테네에서 보냈다. 그는 평생 채식주의자로 살았으며, 많은 혼담이 있었으나 독신을 유지했다. 과부가 된 아이데시아와의 혼담도 있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부유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관대했다고 전해진다.
485년 프로클로스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언에 따라 스승 시리아누스가 묻힌 리카비토스 언덕 기슭에 함께 매장되었다. 그의 학문은 후계자인 마리누스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에게 계승되었다.
2. 1. 주요 제자
프로클로스의 수강생으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암모니오스, 네아폴리스의 마리노스, 제노도토스가 있었다.
3. 사상
그의 사상 체계는 일자(一者)로부터 만물이 생성되는 과정(변증법), 다수의 신적 존재인 헤나드, 그리고 신들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테우르기아 등을 포함한다. 이는 플로티노스를 비롯한 이전의 신플라톤주의자들과 기본적인 세 위격(하나, 지성, 영혼) 개념은 공유하면서도, 물질을 악으로 보지 않는 등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준다. 스승 시리아누스의 영향 아래 있었지만, 남아있는 저술 부족으로 시리아누스와의 구체적인 사상적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프로클로스의 사상은 인간의 자력(自力)을 통한 해방 가능성을 내포했기에, 후대 기독교 중심 사회에서는 그의 변증법 등이 금기시되거나 부분적으로만 수용되었다.[9] 그는 다신교를 옹호했으며, 소실된 저서 『세계의 영원성에 관하여』에서는 기독교를 비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학적 사유 외에도 정치철학의 실천으로서 정치가에게 조언하기도 했으며, 『유클리드 원론 제1권 주해』를 통해 수학의 철학에도 기여하는 등[5] 다방면에 영향을 미쳤다. 이 주해에는 에우데모스의 『기하학사』 발췌 등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5]
3. 1. 변증법
프로클로스는 일자(一者)가 가진 부동적인 성격과 동적인 성격이 공존하며 서로 모순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만물이 생성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성의 원리(일자 → 정신 → 영혼 → 물질)를 파악하는 인식 방법으로서 변증법을 발전시켰다. 이를 통해 그는 가장 세련되고 발전된 신플라톤주의 철학 체계 중 하나를 세웠으며, 고대 철학 시대의 거의 마지막 시기에 활동했다. 그의 사상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될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이후 중세 사회에서는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여졌다.[9]
프로클로스의 변증법은 멈춰 있는 것(부동성)과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운동성) 사이의 대립과 운동을 핵심으로 다룬다. 그는 이러한 대립적인 운동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했다. 또한, 꾸준한 실천과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인간이 일자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론적인 앎과 실천적인 앎을 합쳐 인간이 신적인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했기 때문에, 이후 기독교 중심 사회에서는 프로클로스의 변증법이 금기시되기도 했다.
그의 저작 대부분은 플라톤의 대화편들, 예를 들어 '알키비아데스', '크라튈로스', '파르메니데스', '국가', '티마이오스' 등에 대한 주석서 형태를 띤다. 프로클로스는 이 주석들을 통해 자신의 철학 체계가 플라톤의 사상을 충실히 해석한 결과라고 제시했다. 그는 플라톤의 글이 신성한 영감을 받아 쓰였으며(ὁ θεῖος Πλάτων|호 테이오스 플라톤grc), 우주의 구조를 모방하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플라톤의 글은 종종 비유적으로 표현되어 철학적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의미를 숨기고 있다고 보았다.[3] 이러한 관점에서 프로클로스는 플라톤의 텍스트를 면밀하게 분석하여 깊이 있는 해석을 제시했다.
특히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대한 주석에서는 영혼의 역할에 대해 설명한다. 영혼은 지성 안에 있는 순수한 형상(이데아)과 물질세계 사이를 매개하는 원리이다. ''티마이오스''에서 묘사된 것처럼 영혼은 특정한 수학적 비례에 따라 구성되며, 이를 통해 영혼은 자신의 산술적, 기하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물질세계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3. 2. 일자와 다자
프로클로스는 일자(一者)의 부동성과 역동성이 공존하며 상호 모순을 통해 만물이 생성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성 원리는 '일자 → 정신(Nous) → 영혼(Psyche) → 물질'의 순서로 이어지며, 이를 관통하는 인식 방식으로 변증법을 발전시켰다. 그의 철학 체계는 가장 세련되고 발전된 신플라톤주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9] 프로클로스의 변증법은 정지된 것과 무한히 운동하는 것 사이의 대립을 다루며, 이 대립 운동이 우주 만물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했다. 그는 끊임없는 실천과 이성적 사유를 통해 인간이 일자와 합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지혜의 합일을 통해 인간이 신적인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했기에, 후대의 기독교 사회에서는 그의 사상이 금기시되기도 했다.[9]
프로클로스를 비롯한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스스로를 플라톤 철학의 올바른 계승자로 여겼기에, 각 사상가의 독창적인 교리를 구분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프로클로스의 경우, 방대한 저술이 남아 있어 플로티노스와 같은 다른 신플라톤주의자들과의 비교를 통해 그의 독특한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 프로클로스는 플로티노스처럼 신플라톤주의의 세 가지 기본 위격인 '하나'(헨, Hen), '지성'(누스, Nous), '영혼'(프시케, Psyche)을 인정했다. 그러나 물질을 악으로 간주했던 플로티노스와 달리, 프로클로스는 물질을 악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프로클로스 철학 체계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와 개별적 존재의 수준인 '헤나드'(Henads) 사이의 관계를 상세히 설명한 점이다. '하나'는 존재를 넘어서는 근원적인 신성이며, '헤나드'는 '하나'에서 파생된 다수의 신적 존재들이다. 헤나드는 존재를 초월하면서도 인과 관계의 연쇄(세이라, seira)를 주재하며, 각 연쇄에 고유한 성격을 부여한다. 프로클로스는 이 헤나드를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동일시했다. 예를 들어, 어떤 헤나드는 아폴론으로서 아폴론적인 모든 것의 원인이 되고, 다른 헤나드는 헬리오스로서 태양과 관련된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식이다. 각각의 헤나드는 고유한 성격을 가지면서도 다른 모든 헤나드와 상호 연결되어 참여한다. 따라서 헤나드는 단순한 다수가 아니라, 다중심적 체계의 중심으로 이해될 수 있다.
프로클로스에게 철학은 영혼을 육체적 속박에서 해방시키고, 영혼, 지성, 하나로부터 비롯된 본래의 기원을 깨닫게 하는 활동이었다. 그는 이러한 영적 상승을 위해 테우르기(theurgy, 신성 작용)가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이는 이암블리코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테우르기는 헤나드(신들)의 힘이 인과 연쇄를 통해 물질세계까지 미치기 때문에 가능하며, 특정 의례나 상징물을 통해 영혼이 그 힘을 거슬러 올라가 신적인 기원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 프로클로스 자신도 아테네의 여러 종교 의례에 참여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신들의 힘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3. 3. 테우르기아 (강신술)
프로클로스는 영혼이 육체에 깃들어 있는 동안 지적인 세계에서의 기원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에, 영적인 기원을 육체적으로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테우르기아(강신술)에 대한 이암블리코스의 교리에 동의했다. 프로클로스에 따르면, 테우르기아는 신들, 즉 '헤나드'의 힘이 인과 관계의 연쇄를 통해 물질 세계까지 확장되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한, 특정한 힘이 담긴 말, 행위, 대상을 통해 영혼은 이 인과 관계의 연쇄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프로클로스 자신은 아테네의 다양한 종교들을 존중했으며, 이러한 여러 종교적 접근 방식 안에 신들의 힘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암블리코스와 함께 테우르기아를 중시하고 그 이론을 상세화하여 "후기 신플라톤주의"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4. 천문학
프로클로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체계를 비판하였다. 그는 천체의 행성이 이심원과 주전원이라는 정해진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는 전제를 비판하며, 행성의 움직임은 정신에 의한 영혼의 산출 운동이 복잡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행성 운동이 프톨레마이오스가 설정한 궤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는 중력 변수의 변화로 행성 궤도가 변할 수 있다는 현대 천문학의 관점과 유사한 면이 있다.
프로클로스는 유클리드의 주석가이기도 했다. 그는 로도스의 에우데모스가 쓴 '기하학사'를 참고하여, 현재는 소실된 에우데모스의 저술에 기반한 것으로 보이는 초기 기하학 역사 개요를 남겼다. 이 부분은 "에우데미안 요약"이라 불리며, 이를 통해 알려지지 않았던 일부 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로클로스가 남긴 유클리드의 '원론' 제1권에 대한 주석은 고대 수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으며, 수학적 대상의 본질에 대한 그의 플라톤적 설명 역시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주석서에서 프로클로스는 플라톤과 관련된 초기 수학자들을 다음과 같이 세 그룹으로 나누어 언급했다.
| 구분 | 수학자 |
|---|---|
| 성숙한 수학자 | 타소스의 레오다마스, 타렌토의 아르키타스, 테아이테토스 |
| 젊은 수학자 | 네오클리데스,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 |
| 더 젊은 수학자 | 아민타스, 메나이크모스, 디노스트라토스, 마그네시아의 테우디우스, 콜로폰의 헤르모티모스, 오푸스의 필리포스 |
이 수학자들 중 일부는 훗날 유클리드가 '원론'을 집대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5. 저작
프로클로스의 작품 대부분은 플라톤의 대화편('알키비아데스', '크라튈로스', '파르메니데스', '국가', '티마이오스')에 대한 주석이다. 이 주석들에서 그는 자신의 철학 체계를 플라톤에 대한 충실한 해석으로 제시했으며, 이는 다른 신플라톤주의자들과 유사한 접근 방식이었다.
프로클로스는 플라톤의 저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3]
- 플라톤의 작품에는 의도하지 않거나 우연히 존재하는 부분이 없다.
- 플라톤의 저술은 신성한 영감을 받았다. (그는 플라톤을 ὁ θεῖος Πλάτων|호 테이오스 플라톤grc, 즉 '신성한 플라톤' 또는 '신들에게 영감을 받은 플라톤'이라 칭했다.)
- 플라톤 텍스트의 형식적 구조와 내용은 우주의 구조와 내용을 모방한다.
이 때문에 그는 플라톤의 저술들이 종종 비유나 상징 속에 진실을 숨겨, 철학적으로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의미가 가려져 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프로클로스는 플라톤을 매우 면밀하게 읽었으며, 플라톤의 사상에 대해 통찰력 있는 분석을 자주 제시했다.
또한 프로클로스는 신들의 위계 질서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복잡한 체계를 다루는 『플라톤 신학』(Περὶ τῆς κατὰ Πλάτωνα θεολογίας|페리 테스 카타 플라토나 테올로기아스grc)이라는 저작을 남겼다.
5. 1. 현존하는 주요 저작
다음 목록은 호리에 켄이치와 니시무라 요시키(2014)의 저작에 근거하며, 성립 순서는 확실하지 않다.| 구분 | 현존 | 산일 (현존하지 않음) | |
|---|---|---|---|
| 아리스토텔레스 관련 | 『자연학 개요』 (운동 (물리학)론 관련) | 『이사고게 주해』, 『명제론 주해』, 『분석론 전서 주해』, 『분석론 후서 주해』 | |
| 플라톤 관련 | 입문 | 『플라톤 철학 서설』, 『플라톤 철학 개요』 | |
| 주해 | 『알키비아데스 I 주해』, 『크라틸로스 주해』, 『티마이오스 주해』, 『파르메니데스 주해』, 『국가 주해』 | 『고르기아스 주해』, 『파이돈 주해』, 『테아이테토스 주해』, 『소피스트 주해』, 『파이드로스 주해』, 『향연 주해』, 『필레보스 주해』 | |
| 단저 | 『플라톤에 있어서 영혼의 불멸성을 옹호하는 세 개의 논의』, 『세 개의 단자 (필레보스의 진리・미・척도)에 관하여』,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론의 심사』, 『티마이오스와 관련된 수학의 정리 집성』, 『플라톤의 학설을 정화하는 논고』 | ||
| 프로티노스 관련 | 『엔네아데스 주해』 (단편) | ||
| 종교적 저작 | 『일과 날들 주해』 (단편), 『비술에 관하여』 (단편) | 『칼데아 신탁 주해』, 『신화의 상징에 관하여』, 『신들의 어머니 (키벨레)에 관하여』, 『영혼을 부르는 것에 관하여』 | |
| 체계적 저작 | 『신학 강요』, 『플라톤 신학』 | ||
| 개별적 철학 저작 | 『세 개의 소품』 (『섭리 (신학)를 둘러싼 열 개의 아포리아』, 『섭리, 운명, 자유에 관하여』, 『악의 존립론』) | 『세계의 영원성에 관하여』, 『장소에 관하여』, 『아리스토클레스에게 보내는 편지』 | |
| 수학・천문학 관련 | 『원론 제1권 주해』, 『천문학자의 여러 가설 개요』 | ||
| 기타 | 『찬가』 (7편), 『에피그램』 (4편) | 『서간』 | |
5. 2. 소실된 주요 저작
프로클로스가 남긴 방대한 저술 중 상당수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특히 플라톤의 저술에 대한 많은 주석들이 소실되었다. 그는 현존하는 《알키비아데스》, 《크라틸로스》, 《티마이오스》, 《파르메니데스》 주석 외에도, 당시 신플라톤주의 교육 과정에 포함되었던 다른 대화편들에 대한 주석들도 집필했으나 대부분 사라졌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에 대한 주석과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입문서들도 저술했지만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아래는 소실된 것으로 알려진 프로클로스의 주요 저작 목록이다.
| 분류 | 소실된 저작 | |
|---|---|---|
| 아리스토텔레스 관련 | 『이사고게 주해』, 『명제론 주해』, 『분석론 전서 주해』, 『분석론 후서 주해』 | |
| 플라톤 관련 | 입문 | 『플라톤 철학 서설』, 『플라톤 철학 개요』 |
| 주해 | 『고르기아스 주해』, 『파이돈 주해』, 『테아이테토스 주해』, 『소피스트 주해』, 『파이드로스 주해』, 『향연 주해』, 『필레보스 주해』 | |
| 단저 | 『플라톤에 있어서 영혼의 불멸성을 옹호하는 세 개의 논의』, 『세 개의 단자 (필레보스의 진리・미・척도)에 관하여』,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론의 심사』, 『티마이오스와 관련된 수학의 정리 집성』, 『플라톤의 학설을 정화하는 논고』 | |
| 종교적 저작 | 『칼데아 신탁 주해』, 『신화의 상징에 관하여』, 『신들의 어머니 (키벨레)에 관하여』, 『영혼을 부르는 것에 관하여』 | |
| 개별적 철학 저작 | 『세계의 영원성에 관하여』, 『장소에 관하여』, 『아리스토클레스에게 보내는 편지』 | |
| 기타 | 『서간』 | |
- ''위 목록의 저작 성립 순서는 확실하지 않다.''
6. 후대에 끼친 영향
프로클로스의 사상은 신플라톤주의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했을 뿐 아니라, 후대의 기독교 및 이슬람교 사상, 그리고 서양 철학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남겼다.
6세기 기독교 신학에서는 위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테스가 프로클로스의 사상을 수용하여 교부 철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반대로 요한네스 필로포노스는 그의 사상을 비판하기도 했다. 9세기 이슬람 세계에서는 프로클로스의 『신학 요강』이 아랍어로 번안되어 『순수 선에 관하여』(Kitāb al–ḫayr al–maḥḍara)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이는 이후 『원인론』(Liber de Causislat)으로 라틴어 번역되어 중세 서유럽 스콜라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6] 11세기 비잔틴 제국에서도 그의 저작은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13세기에는 메르베케의 기욤이 『신학 요강』을 직접 라틴어로 번역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통해 『원인론』의 진정한 출처를 파악하고 주해서를 저술했다. 이후 14세기 독일 신비주의와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쿠자누스 등을 통해서도 프로클로스의 사상은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재해석되었다. 19세기 독일 관념론 철학자 헤겔은 플로티노스보다 프로클로스를 더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현대에 와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달의 크레이터 중 하나에 프로클루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6. 1. 중세 시대
6세기 기독교 신학자 위(僞)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테스는 프로클로스의 사상을 기독교에 적용하여 이후 교부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면, 기독교도 요한네스 필로포노스는 프로클로스를 비판하며 『세계의 영원성에 관하여, 프로클로스 반박』을 저술했다.9세기경 이슬람 세계에서는 바그다드의 킨디 학파가 프로클로스의 『신학 요강』(Στοιχείωσις θεολογική|스토이케이오시스 테올로기케grc)을 아랍어로 번안하여 『순수 선에 관하여』(Kitāb al–ḫayr al–maḥḍ|키탑 알 카이르 알 마흐드ara)를 저술했다.
11세기 비잔틴 제국에서는 철학자 미하엘 푸셀로스와 요안네스 이탈로스가 『신학 요강』을 중요한 고전으로 수용했으며, 그들의 제자인 이오아네 페트리치는 이 책을 그루지야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추가했다.
12세기 스페인의 톨레도 번역 학파 소속 크레모나의 제라르도는 아랍어 문헌 『순수 선에 관하여』를 라틴어로 번역했다. 이 라틴어 번역본은 『원인론』(Liber de Causis|리베르 데 카우시스lat)으로 불리며, 오랫동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으로 잘못 알려져 중세 서유럽 사상계에 널리 수용되었다.[6] 『원인론』은 프로클로스 본인의 저작이 아니라, 그의 『신학 요강』을 아랍어로 요약하고 일부 내용을 수정한 것이다.
13세기에는 라틴 제국에서 활동한 메르베케의 기욤이 프로클로스의 『신학 요강』 원전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했다. 그의 친구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욤의 번역본을 통해 『원인론』이 실제로는 프로클로스 사상에 기반한 것임을 확인하고, 두 문헌을 비교하며 『원인론 주해』를 저술하여 프로클로스 사상을 스콜라 철학에 통합하고자 했다.
14세기 독일 신비주의의 선구자 중 한 명인 모스부르크의 베르톨트(Berthold von Moosburg)는 서유럽 최초로 『신학 요강』에 대한 라틴어 주석서를 저술했다.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 쿠자누스는 프로클로스의 『신학 요강』과 『플라톤 신학』을 직접 라틴어로 번역하며 프로클로스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6. 2. 르네상스 시대
13세기 라틴 제국에서 활동한 메르베케의 기욤은 프로클로스의 『신학 강요』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다. 기욤의 친구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번역본을 통해 『원인론』이 프로클로스의 저작에 기반했음을 인지하고, 두 저작을 토대로 『원인론 주해』를 저술했다. 이는 프로클로스 사상이 서유럽에 다시 알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4세기에는 독일 신비주의의 선구자 Berthold von Moosburg|모스부르크의 베르톨트de가 서유럽 최초로 『신학 강요』에 대한 주석을 라틴어로 저술했다. 이어서 15세기에는 쿠자누스가 프로클로스의 『신학 강요』와 『플라톤 신학』을 라틴어로 번역하며 르네상스 시기 프로클로스 사상의 부활에 기여했다.
6. 3. 근대 이후
서구 근세 이후 프로클로스의 변증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대항하는 성격으로서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일부 과학자와 개혁적 신학자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파라켈수스, 쿠자누스, 브루노, 헤겔은 프로클로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학자로 알려져 있다.15세기에 쿠자누스는 프로클로스의 『신학 강요』와 『플라톤 신학』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19세기의 헤겔은 그의 『철학사 강의』에서 플로티노스보다 프로클로스의 사상을 높이 평가했다. 프로클로스는 대립의 근원을 부동과 운동 사이의 관계로 보았고, 헤겔은 존재와 무 사이의 관계로 보았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절대정신의 타자로서 현실, 변증법적 사유 과정으로서 정신으로 나아가는 헤겔의 부정철학은 프로클로스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이었다.[10]
현대에 와서는 달의 크레이터 이름 중 하나로 그의 이름인 「프로클루스」가 사용되고 있다.
6. 4. 현대
6세기, 기독교 신학자 위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테스는 프로클로스의 사상을 기독교에 적용하여 이후 교부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6]. 또한 기독교도 요한네스 필로포노스는 프로클로스를 반박하는 『세계의 영원성에 관하여, 프로클로스 반박』을 저술했다.9세기경, 바그다드의 킨디를 중심으로 한 학자 그룹은 프로클로스의 『신학 강요』(Elements of Theologyeng)를 번안하여 아랍어로 『순수 선에 관하여』(Kitāb al–ḫayr al–maḥḍara)를 저술했다[6].
11세기, 비잔틴 철학자 미하엘 푸셀로스나 요안네스 이탈로스(John Italuseng)는 『신학 강요』를 그리스 고전 중 하나로 받아들였다[6]. 그들의 제자인 이오아네 페트리치(Ioane Petritsieng)는 『신학 강요』의 그루지야어 번역과 주석을 만들었다[6].
『순수 선에 관하여』는 12세기경 톨레도 번역 학파의 크레모나의 제라르도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 번역서는 『원인론』(Liber de Causislat)으로 불리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으로 잘못 알려져(가짜 아리스토텔레스) 중세 서유럽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6].
13세기, 라틴 제국에서 활동한 메르베케의 기욤은 『신학 강요』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했다[6]. 기욤의 친구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번역본을 읽고 『원인론』과의 연관성을 깨달았으며, 두 책을 바탕으로 『원인론 주해』를 저술했다[6].
14세기, 독일 신비주의의 선구자인 모스부르크의 베르톨트(Berthold von Moosburgdeu)는 서유럽 최초로 『신학 강요』에 대한 라틴어 주석을 저술했다[6].
15세기, 쿠자누스는 『신학 강요』와 『플라톤 신학』을 라틴어로 번역했다[6].
19세기, 헤겔은 『철학사 강의』에서 플로티노스보다 프로클로스의 사상을 더 높이 평가했다[6].
달의 크레이터 중 하나가 그의 이름을 따 「프로클루스」로 명명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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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Proclus' commentary on Plato's Parmenides
Princeton Univ. Pr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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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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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ertullia[...]
1925
[3]
간행물
"Clarifications" of Obscurity: Conditions for Proclus's Allegorical Reading of Plato's Parmenides
https://memo.imareal[...]
2013
[4]
서적
古代ギリシア・ローマの哲学 ケンブリッジ・コンパニオン
京都大学学術出版会
[5]
서적
ユークリッド『原論』とは何か 二千年読みつがれた数学の古典
岩波書店
2008
[6]
웹사이트
研究会について - 原因論 原因論研究会
https://sites.google[...]
2022-11-02
[7]
웹사이트
新プラトン主義協会 » 『新プラトン主義研究』
https://jsns.jp/wp/?[...]
2022-11-02
[8]
NDL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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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Neoplatonism and Indian Thought (Editor: R Baine Harris)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0]
서적
Proclus
New Haven/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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