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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오로 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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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오로 할라는 12세기 금나라 문헌에 등장하는 '갸구(夾谷, Gia-gu)'에서 유래된 성씨로, 명대 여진족과 청대 만주족의 성씨 중 하나인 교로(Gioro)로 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먼터무의 성씨인 갸온(夾溫)은 갸구에서 기원하며, 조선 시대 문헌에는 '동맹가첩목아' 또는 '협온맹가첩목아'로 기록되었다. 정천정은 《금사》에 협곡씨(夹谷氏)만 주석이 없는 점을 근거로, 건륭제가 협곡씨를 숨겼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호증익은 교로 씨족이 송나라 황실의 후예라고 주장하며, 금계종은 여진인명 '갸루(交魯, Gia-ru)'가 교로 씨로 변화했다고 보았지만, 금대 문헌에는 교로라는 성씨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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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오로 할라
기오로 할라
청나라 팔기
청나라 팔기
정보
만주어(Gioro Hala), (Giyoro Hala)
한자覺羅氏 (각라씨)
다른 표기ᡤᡳᠣᡵᠣ ᡥᠠᠯᠠ (Gioro Hala), ᡤᡳᠶᠣᡵᠣ ᡥᠠᠯᠠ (Giyoro Hala)
어원/gia-gu/
빛나는 씨족
기록Jakūn Gūsai Manjusai Mukūn Hala be Uheri Ejehe Bithe에 기록됨

2. 이름 및 기록

기오로 할라는 《조선왕조실록》에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 또는 '협온맹가첩목아(夾溫猛哥帖木兒)'로, 《용비어천가》에는 한자와 한글로 ‘夾溫猛哥帖木兒 갸온멍거터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갸온(夾溫)이라는 성의 기원은 12세기 금대 한문 문헌에서 보이는 ‘갸구(夾谷, Gia-gu)’로 소급된다. 조선에서 먼터무의 성을 ‘협온(夾溫)’과 ‘동(童)’ 이중으로 적었듯이, 금대에도 ‘협곡(夾谷)’과 동(同)과 그 고자(古字) ‘동(仝)’이 같은 성으로 혼용되어 쓰였다. 이후 ‘갸구’ 혹은 ‘갸온’이 변화하여 명대 여진족과 청대 만주족의 성 가운데 흔히 보이는 교로(Gioro)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10]

정천정(郑天挺)은 《애신각라득성계의(爱新觉罗得姓稽疑)》에서 건륭 연간 《금사》에는 여진 인명과 여진어만주 문자 혹은 한자로 주석을 달았는데, 《팔기만주씨족통보(八旗满洲氏族通谱, ᠵᠠᡴᡡ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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ᠪᡳᡨᡥᡝ|Jakūn Gūsai Manjusai Mukūn Hala be Uheri Ejehe Bithemnc)》에 협곡씨(夹谷氏)만 주석이 달지 않았고, 건륭 연간《금사》의 협곡의 표음(標音)은 객이고(喀爾庫)라 표기한 것을 한어 발음의 각도에서 추론하여 이 두 개 단어가 무관함을 밝혔다.[11]

호증익(胡增益)은 송 황제의 종실 및 그를 끝까지 모셨던 대신 그룹의 후예임을 잊지 않기 위해 자기들의 성에 종족이라는 뜻이 있는 할아인 교로(覺羅, Gioro) 뒤에 송의 황성인 조(趙)를 덧붙여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 새로운 씨족을 만들면서 조(趙)의 반절을 쪼개서 교로(覺羅, Gioro)로 고쳤던 것이라고 주장했다.[12]

금계종은 《연대여진진사제명비》에 등장하는 교로호속로개(交魯胡速魯改, 여진어: Gia-ru xu-sur-gai), 부방(附旁)에 "교로홀통길(交魯忽通吉, 여진어: Gia-ru hutong-gi)'라는 여진 인명에서 갸루(交魯, Gia-ru)를 성씨로 간주하고, 이가 바로 후에 교로(觉罗, Gioro)씨로 변화했다고 주장했다.[13]

2. 1. 한자 표기

조선실록에는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 혹은 '협온맹가첩목아(夾溫猛哥帖木兒)'로 기록되어 있고, 용비어천가에는 한자한글로 ‘夾溫猛哥帖木兒 갸온멍거터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갸온(夾溫)'은 여진 고유의 성(姓)이고, '동(童)'은 중국의 영향으로 인해 만들어진 중국식 성으로 생각된다.[10]

'갸온(夾溫)'이라는 성의 기원은 12세기 나라 때의 한문 문헌에서 보이는 '갸구(夾谷, Gia-gu)'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에서 먼터무의 성을 '협온(夾溫)'과 '동(童)'으로 이중으로 적었듯이, 금나라 때에도 '협곡(夾谷)'과 동(同)과 그 고자(古字)인 '동(仝)'이 같은 성으로 혼용되어 쓰였다. 이후 '갸구' 혹은 '갸온'이 변화하여 나라 때 여진족과 나라 때 만주족의 성 가운데 흔히 보이는 교로(Gioro)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10]

3. 성씨 기원 및 변천

먼터무의 성 '갸온(夾溫)'은 12세기 금나라 문헌에 등장하는 '갸구(夾谷, Gia-gu)'로 거슬러 올라가며, 명대 여진족과 청대 만주족의 성 가운데 흔히 보이는 교로(Gioro)는 ‘갸구’ 혹은 ‘갸온’이 변화하여 된 것으로 추정된다.[10]

정천정(郑天挺)은 《애신각라득성계의(爱新觉罗得姓稽疑)》에서 건륭 연간 《금사》에는 여진 인명과 여진어만주 문자 혹은 한자로 주석을 달았는데, 《팔기만주씨족통보(八旗满洲氏族通谱)》에는 협곡씨(夹谷氏)만 주석이 없었고, 건륭 연간《금사》의 협곡의 표음(標音)은 객이고(喀爾庫)라 표기한 것을 한어 발음의 각도에서 추론하여 이 두 개 단어가 무관함을 밝혔으며, 건륭제가 《금국어해(金國語解)》를 정할 때 만주 울라에 거주했던 카르쿠씨(喀爾庫氏)를 협곡씨라고 하여 스스로 숨긴 것으로 의심했다.[11]

호증익(胡增益)은 이른바 종망한인(宗望韓人)들은 황제의 종실 및 그를 끝까지 모셨던 대신 그룹의 후예임을 잊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성에는 종족이라는 뜻이 있는 할아(Hala)인 교로(覺羅, Gioro) 뒤에 송의 황성인 조(趙)를 덧붙여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 새로운 씨족을 만들면서 조(趙)의 반절을 쪼개서 교로(覺羅, Gioro)로 고쳤던 것인데, 이를 환원하면 바로 조씨(趙氏)가 된다고 하였다. 《강희자전(康熙字典)》에 조(趙) 자의 반절은 《광운(廣韻)》에서는 치소절(治小切), 《집운(集韻)》·《운회(韻會)》·《정운(正韻)》에서는 직소절(直紹切)이요, 발음은 모두 조(肇)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조 자의 반절은 治나 直은 초음이 zh, 종성은 ao이니 현대 중국어로는 zhao가 된다. 이 발음은 자신들을 감시하는 여진족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jiao lao'''로 발음하였다는 이론으로 아이신 교로 일족이 송 휘종의 후예라고 추측했다.[12]

금계종은 《연대여진진사제명비》에 등장하는 교로호속로개(交魯胡速魯改, Gia-ru xu-sur-gaijvc)와 부방(附旁)에 "교로홀통길(交魯忽通吉, Gia-ru hutong-gijvc)"이라는 여진인명에서 갸루(交魯, Gia-ru)를 성씨로 간주하고, 이가 바로 후에 교로(觉罗, Gioro)씨로 변화했다고 주장했다.[13] 그런데, 금대의 《여진성씨보》에는 교로(交魯)라는 성씨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3. 1. 갸구(夾谷)

금나라 시기에 '협곡(夾谷)'과 '동(仝)'은 같은 성씨로 혼용되었다.[10]

3. 2. 교로(Gioro)

먼터무는 《조선실록》에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 혹은 '협온맹가첩목아(夾溫猛哥帖木兒)'라고 기록되어 있고, 《용비어천가》에는 한자한글로 ‘夾溫猛哥帖木兒 갸온멍거터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갸온(夾溫)은 여진인 고유의 성(姓)이고, 동(童)은 중국의 영향으로 인해 만들어진 중국식 성으로 생각된다.

갸온(夾溫)이라는 성의 기원은 12세기 금대의 한문 문헌에서 보이는 ‘갸구(夾谷, Gia-gu)’로 소급된다. 조선에서 먼터무의 성을 ‘협온(夾溫)’과 ‘동(童)’ 이중으로 적었듯이, 금대에도 ‘협곡(夾谷)’과 동(同)과 그 고자(古字) ‘동(仝)’이 같은 성으로 혼용되어 쓰였다. 이후 ‘갸구’ 혹은 ‘갸온’이 변화하여 명대 여진족과 청대 만주족의 성 가운데 흔히 보이는 교로(Gioro)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10]

4. 아이신 교로 씨족과의 연관성

먼터무는 《조선실록》에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 혹은 '협온맹가첩목아(夾溫猛哥帖木兒)'로, 《용비어천가》에는 한자한글로 ‘夾溫猛哥帖木兒 갸온멍거터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갸온(夾溫)은 여진인 고유의 성(姓)이고, 동(童)은 중국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중국식 성으로 생각된다.

갸온(夾溫)이라는 성의 기원은 12세기 금대의 한문문헌에서 보이는 ‘갸구(夾谷, Gia-gu)’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에서 먼터무의 성을 ‘협온(夾溫)’과 ‘동(童)’ 이중으로 적었듯이, 금대에도 ‘협곡(夾谷)’과 동(同)과 그 고자(古字) ‘동(仝)’이 같은 성으로 혼용되어 쓰였다. 이후 ‘갸구’ 혹은 ‘갸온’이 변화하여 명대 여진족과 청대 만주족의 성 가운데 흔히 보이는 교로(Gioro)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10]

아이신기오로 씨족과 갸온(夾溫)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존재한다.

4. 1. 정천정(郑天挺)의 견해

ᡥᠠᠯᠠ|Karku Hala}})를 협곡씨라고 하여 스스로 숨긴 것으로 의심했다.[11]

4. 2. 호증익(胡增益)의 견해

호증익(胡增益)은 아이신 교로 일족송나라 휘종의 후예라고 추측했다. 그는 종망한인(宗望漢人)들이 송 황제의 종실 및 그를 끝까지 모셨던 대신 그룹의 후예임을 잊지 않기 위해 자기들의 성에 종족이라는 뜻이 있는 할아인 ‘교로(覺羅, Gioro)’ 뒤에 송의 황성인 ‘조(趙)’를 덧붙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 새로운 씨족을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조(趙)의 반절(反切)을 쪼개서 교로(覺羅, Gioro)로 고쳤던 것인데, 이를 환원하면 바로 조씨(趙氏)가 된다고 주장했다.[12]

강희자전(康熙字典)》에 따르면 조(趙)자의 반절은 《광운(廣韻)》에서는 치소절(治小切), 《집운(集韻)》·《운회(韻會)》·《정운(正韻)》에서는 직소절(直紹切)이며, 발음은 모두 조(肇)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조(趙)자의 반절은 治나 直은 초음이 zh, 종성은 ao이니 현대 중국어로는 zhao가 된다. 이 발음은 자신들을 감시하는 여진족들이 알아 듣지 못하도록 '''jiao lao'''로 발음하였다는 것이다.[12]

4. 3. 금계종(金启孮)의 견해

금계종(金启孮)은 《금사(金史)》 이전의 《연대여진진사제명비》에 등장하는 '교로호속로개(交魯胡速魯改, Gia-ru xu-sur-gaijvc)', '교로홀통길(交魯忽通吉, Gia-ru hutong-gijvc)' 등의 여진 인명을 근거로, '갸루(交魯, Gia-ru)'가 '교로(觉罗, Gioro)'씨로 변화했다고 주장했다.[13] 그러나 금대의 《여진성씨보》에는 교로(交魯)라는 성씨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참조

[1] 서적 簷曝杂记 竹叶亭杂记 中华书局
[2] 문서 《夾谷氏考略》 "협고(夾古, 夹谷) 그리고 가고(加古)는 모두 중국어로 읽으면 'jiagu'가 된다. 따라서 이는 여진족의 갸구(Gia-gu)씨를 한자로 음차하면서 약간의 다른 표기가 생겼을 뿐 결국은 같은 성씨로 보인다."
[3] 서적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4] 서적 누르하치 돌베게
[5] 서적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6] 서적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7] 서적 满族姓氏寻根词典 辽宁民族出版社
[8] 문서 金啓孮,《滿族歷史與文化簡編》, 327쪽
[9] 서적 爱新觉罗氏三代满学论集 远方出版社
[10] 서적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1] 문서 郑天挺, 《探微集》,中华书局, 1980, 44~46쪽
[12] 문서 胡增益, 《新滿漢大詞典》, 新疆人民出版社出版, 1994, 338쪽
[13] 서적 爱新觉罗氏三代满学论集 远方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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