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비어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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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용비어천가는 1442년 세종의 명에 따라 편찬된 조선 왕조의 창업을 찬양하는 시가집이다. 태조의 업적 조사로 시작되어 1445년 권제, 정인지 등에 의해 본문이 완성되었고, 최항 등이 주석을 더하여 1447년 간행되었다. 이 책은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백성의 복종을 유도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며, 한글 창제 이후 최초의 국문 시가로서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 용비어천가는 12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 왕조의 여섯 조상을 용에 비유하여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천명 사상에 따라 칭송한다. 이 시가집은 1만원 지폐 도안으로 사용되었으며, 다양한 판본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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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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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한글 | 용비어천가 |
한자 | 龍飛御天歌 |
로마자 표기 | Yongbieocheonga |
문화관광부 2000년식 로마자 표기 | Yongbieocheonga, Ryongbieocheonga |
일본어 (히라가나) | りゅうひぎょてんか |
일본어 (가타카나) | ヨンビオチョンガ, リョンビオチョンガ |
유형 문화재 정보 | |
소재 국가 | 대한민국 |
유형 | 보물 |
![]() | |
이름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지정 번호 | 1463 |
소재지 | 서울시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외 3곳 |
제작 시기 | 조선시대 |
비고 | 2권2책(서울역사박물관), 3권3책(계명대), 보물 제1463-1호 권8, 9, 10 계명대 보물 제1463-2호 권3, 4 서울역사박물관 보물 제1463-3호 권1~2 서울대 규장각 보물 제1463-4호 권1~2, 7~8 고려대 |
지정 연월일 | 2006년 4월 28일 |
추가 정보 | |
링크 | 용비어천가 |
2. 역사
13세기 중반 고려는 몽골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으나, 이후 약 100년간 몽골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 놓였다. 이 시기에는 전통적인 불교와 더불어 유교의 중요성이 커졌으며, 몽골의 공식 문자 중 하나였던 파스파 문자가 한자와 함께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한글 창제에 영향을 준 요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
고려 말기는 혼란스러웠다. 원나라 말기인 1362년에는 홍건적이 수도 개성을 함락시키는 사건이 있었고, 남쪽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했다. 1382년에는 고려군과 명나라 연합군이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치기도 했다.
1388년, 요동 정벌을 위해 출정했던 장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면서 정치적 격변이 시작되었고, 이는 결국 1392년 조선 건국으로 이어졌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가 암살되고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폐위되면서 고려 왕조는 막을 내렸다. 새롭게 건국된 조선은 명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조선 건국 이후, 특히 세종 시대(1418년 즉위)에 이르러 조선은 학문과 유교 철학 사상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1420년에는 학문 연구 기관인 집현전이 설치되었는데, 집현전 학자들은 조선 사회에 유교 이념을 확산시키고, 한글 창제를 도왔으며,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여러 중요한 문헌 편찬 사업을 주도하며 조선 초기 문화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용비어천가는 조선 왕조의 정통성과 위업을 기리기 위해 탄생하게 되었다.
2. 1. 편찬 과정
1442년 3월 1일, 세종은 태조 이성계가 1381년 9월 왜구를 물리친 업적에 대하여 조사하라고 경상도와 전라도 관찰사에게 명하면서 편찬 준비가 시작되었다.1443년 훈민정음 창제를 거쳐, 1445년(세종 27년) 4월 5일에는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이 용비어천가 본문 10권을 완성하여 세종에게 바쳤다. 이 사실은 용비어천가에 실린 '진용비어천가전'(進龍飛御天歌箋)과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10]
이후 최항, 박팽년, 강희안, 신숙주, 이현로, 성삼문, 이개, 신용손 등이 세종의 명에 따라 주석을 덧붙였다. 용비어천가 마지막에 실린 최항의 발문에는 1447년(세종 29년) 2월에 썼다는 언급이 있어, 이 시기에 최종 편집이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1447년(세종 29년) 10월, 용비어천가는 10권 5책으로 간행되었으며, 세종은 완성된 550권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11]
3. 배경
한글 창제 이후 첫 시험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한글 문헌이자 악장이다. 총 12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위대함을 노래하고 이것이 하늘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요 내용은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에 이르는 조선 선대 6명의 행적을 기리는 것이다. 대부분의 장은 2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 절에서는 중국 역대 제왕의 유사한 사례를 제시하고, 뒷 절에서는 그에 부합하는 조선 건국의 사적을 노래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8][9]
《용비어천가》는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만들어진 대표적인 송축가(頌祝歌)이다. 이를 위해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이 참여하여 다양한 역사서와 경전을 참고하여 모범적인 사례들을 집대성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왕조 창업자들의 업적을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의 영속을 위해 후대 군주들이 지녀야 할 도덕적 자세와 경계해야 할 점(규계, 刺)을 함께 제시한다. 이는 업적을 찬미함(미, 美)과 동시에 경계와 교훈을 주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유교 정치사상을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학사적으로 《용비어천가》는 한글로 쓰인 최초의 서사시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구려 건국 신화를 노래한 동명왕편(東明王篇)과 같은 영웅 서사시의 전통을 계승하고, 제왕운기나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와 같은 역사 서사시(영사시, 詠史詩)의 맥을 잇는다. 또한, 궁중 음악인 악장(樂章)이라는 독자적인 형식을 개척한 첫 작품으로서 그 가치가 높다.[12]
3. 1. 시대적 배경

13세기 중반, 고려는 몽골 제국과의 오랜 전쟁 끝에 1259년 강화를 맺고 이후 약 100년간 원나라의 정치적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 고려 사회에는 기존의 불교와 더불어 유교의 영향력이 점차 증대되었다. 또한, 몽골 제국의 공식 문자 중 하나였던 파스파 문자가 한자와 함께 사용되었는데, 이는 후일 한글 창제에 영향을 준 요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려는 홍건적의 침입과 빈번한 왜구의 노략질로 큰 혼란을 겪었다. 1362년에는 수도 개성이 홍건적에게 함락되기도 했으며, 1382년에는 이성계 등이 이끄는 고려군이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국내외의 혼란 속에서 신흥 무인 세력으로 성장한 이성계는 1388년 요동 정벌에 반대하며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고려 왕조 유지를 주장하던 정몽주가 1392년 암살되고, 같은 해 공양왕이 폐위되면서 고려 왕조는 막을 내렸다. 이성계는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고 명나라와 긴밀한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조선 건국 이후, 특히 세종(재위 1418~1450) 대에 이르러 국가는 안정기에 접어들고 학문과 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1420년에는 학문 연구 기관인 집현전이 설치되어 유교 정치 이념의 확산과 각종 편찬 사업을 주도했다.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 창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한글로 쓰인 최초의 서사시인 《용비어천가》 편찬에도 깊이 관여했다.
《용비어천가》는 조선 왕조 창업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고 왕조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하는 송축가(頌祝歌)로서, 건국의 위업을 찬양함과 동시에 후대 군왕들에게 경계와 교훈을 제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한글 창제 직후 이루어진 대표적인 문화 사업이었으며,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유교 이념을 확산하려는 시대적 요구 속에서 탄생했다.[12]
3. 2. 사상적 배경
1259년 고려와 몽골 제국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된 후 약 100년간 몽골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면서, 기존의 국교였던 불교와 함께 유교의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이 시기 몽골 제국의 공식 문자 중 하나였던 파스파 문자는 이후 한글 창제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기된다.원나라 말기인 1362년에는 홍건적에 의해 수도 개성이 함락되고, 남쪽에서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해지는 등 고려 사회는 큰 혼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성계와 같은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하였고, 1388년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결국 1392년 조선을 건국하였다.
새 왕조인 조선은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세종은 1420년 집현전을 설치하여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을 모아 학문 연구와 국가 정책 개발을 추진했다. 집현전 학자들은 조선 사회의 유교 이념 확산, 한글 창제, 그리고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다양한 문헌 편찬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용비어천가》는 한글 창제 이후 처음으로 간행된 문헌이자 악장(樂章)으로, 조선 건국이 하늘의 명에 따라 이루어진 위대한 업적임을 강조하며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내용은 목조부터 태종에 이르는 조선 선대 6대 임금의 사적을 중국 고대 제왕들의 사례와 비교하며 노래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다.[8][9]
이 작품은 단순히 왕조의 업적을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라를 영원히 이어가기 위해 군주가 갖추어야 할 도덕적 자세와 경계해야 할 점(규계, 刺)을 함께 제시하였다. 이는 왕조 창업자의 공덕을 찬미함(미, 美)과 동시에 후대 군주에게 경계와 교훈을 주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유교 정치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백성들의 자발적인 복속을 유도하고 왕조의 영속을 기원하는 목적을 담고 있다.[12]
4. 구성 및 내용
한글 창제 이후 간행된 최초의 한글 문헌이자 악장이다. 총 12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목조부터 태종에 이르는 조선 선대 6명의 사적을 중심으로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과정에서의 시련, 그리고 이것이 하늘의 명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노래한다.[8][9]
세종은 1442년(세종 24년) 3월 1일, 용비어천가 편찬을 위해 태조 이성계가 1381년(우왕 7년) 9월 왜구를 물리친 사적에 대한 조사를 경상도와 전라도 관찰사에게 명하였다. 이후 1445년(세종 27년) 4월 5일,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이 편찬한 용비어천가 10권을 세종에게 올렸다는 기록이 용비어천가에 실린 진용비어천가전(進龍飛御天歌箋)과 세종실록에 남아있다.[10] 용비어천가 마지막 부분에 실린 최항의 발문에 1447년(세종 29년) 2월에 작성되었다는 내용이 있어, 책의 간행은 그해 2월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해 10월에는 완성된 용비어천가 550질이 신하들에게 하사되었다.[11]
용비어천가는 왕조 창업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고 왕권 강화를 통해 백성들의 복속을 유도하려는 목적을 지닌 대표적인 송축가(頌祝歌)였다. 편찬에는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이 참여하여 여러 역사서와 경전을 참고하여 모범적인 사례들을 집대성했다. 이 작품은 조선 건국 주역들의 업적을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라의 영속을 위해 군주가 갖추어야 할 도덕적 수양의 중요성을 함께 강조함으로써 찬미(美)와 경계(刺)를 아우르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정치 사상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용비어천가는 한글 창제를 통해 탄생한 조선 문학사상 최초의 국문 시가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고구려 건국 신화를 노래한 동명왕편의 서사적 전통과 제왕운기, <역대세년가> 등 역사적 사실을 노래한 영사시(詠史詩)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악장이라는 독자적인 형식을 개척한 첫 작품으로 평가받는다.[12]
4. 1. 주요 내용 (예시)
한글 창제 후 첫 시험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한글 문헌이자 악장이다. 총 12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과정에서 겪은 시련을 노래하고,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뜻(천명)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8][9]내용은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까지 조선 왕조를 세운 선대 6명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제1장과 제125장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장은 2절로 구성되어 있다. 앞 절에서는 중국 역사 속 인물들의 사례를 들고, 뒷 절에서는 그와 유사한 조선 건국 과정의 사적을 연결하여 노래하는 방식이다.[8][9]
다음은 용비어천가의 유명한 구절들이다.
海해東동六육龍룡이ᄂᆞᄅᆞ샤일마다 天천福복이시니古고聖성이同동符부ᄒᆞ시니
해동(우리나라)의 여섯 용이 나시어 일마다 하늘이 내려주신 복이시니, 옛 성인과 꼭 같으시니
불휘기픈남ᄀᆞᆫᄇᆞᄅᆞ매아니뮐ᄊᆡ。곶됴코여름하ᄂᆞ니
ᄉᆡ미기픈므른ᄀᆞᄆᆞ래아니그츨ᄊᆡ。내히이러바ᄅᆞ래가ᄂᆞ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이니 꽃 좋고 열매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아니하니 내(川)를 이뤄 바다에 가나니
千천世세우희미리定정ᄒᆞ샨漢한水수北북에。累누仁인開개國국ᄒᆞ샤卜복年년이ᄀᆞᇫ업스시니。
천세(千世) 전에 미리 정하신 한강 북쪽에 여러 대에 걸쳐 어진 덕을 쌓아 나라를 여시어 왕조가 끝없으시니
제목에 나오는 '용(龍)'은 조선 왕조의 여섯 조상(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을 상징한다. '용비어천(龍飛御天)' 즉 용이 하늘을 나는 모습은 중국의 천명 사상에 따라 조선 왕조가 하늘의 뜻으로 건국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조선 선조들의 도덕적, 정치적 정당성을 강조하며, 앞으로 조선을 이끌어갈 왕들이 따라야 할 모범을 제시하는 이념적 기반이 된다.
시가는 총 12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은 먼저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쓴 본문 시가가 나오고, 이어서 본문에 대한 한문 주석이 분주(分註, 내용을 나누어 설명하는 주석) 형태로 달려 있다. 마지막으로 본문을 한문으로 번역한 사언시(四言詩) 또는 오언시(五言詩)가 덧붙여지는 형식이다. 제1장과 제125장을 제외하고, 본문인 한국어 시가 부분은 대구(對句) 형식을 이루는데, 첫 구절에서는 중국 역대 황제의 업적을 언급하고, 두 번째 구절에서는 이와 비교되는 조선 왕족의 업적을 노래한다.
아래는 제2장의 내용과 번역 예시이다.
원문(중세 한국어) | 예일 표기 | 현대 한국어 | 제임스 호이트 번역 |
---|---|---|---|
뎨〯ᅀᅵ〯쟈ᇰ | Tyěyzǐcyàng | 제2장 | Canto II |
불휘〮 기픈〮 남ᄀᆞᆫ〮 | Pwùlhwúy kìphún nàmkón | 뿌리 깊은 나무는 | A tree with deep roots, |
ᄇᆞᄅᆞ매〮 아니〮 뮐〯ᄊᆡ〮 | Pòlòmáy àní mwǔylssǒy |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므로 | Because the wind sways it not, |
곶 됴〯코〮 | Kwóc tyǒkwó | 꽃 좋고 | Blossoms Abundantly |
여름〮 하〮ᄂᆞ니〮. | Yèlúm hánòní. | 열매 많나니. | And bears fruit. |
ᄉᆡ〯미〮 기픈〮 므〮른〮 | Sǒymí kìphún múlún | 샘이 깊은 물은 | The water from a deep spring, |
ᄀᆞ〮ᄆᆞ래〮 아니〮 그츨〮ᄊᆡ〮 | Kómòláy àní gùchúlssóy | 가뭄에도 그치지 아니하므로 | Because a drought dries it not, |
내〯히〮 이러〮 | Nǎyhí ìlé | 내를 이루어 | Becomes a stream |
바ᄅᆞ〮래〮 가〮ᄂᆞ니〮. | Pàlóláy kánòní. | 바다에 가나니. | And flows to the sea. |
5. 언어적 특징
용비어천가는 한글 창제 직후에 만들어진 초기 문헌 중 하나이며, 중세 국어 문헌 가운데서도 특징적인 표기가 보인다.
원문(중세 한국어) | 예일 표기 | 현대 한국어 | 제임스 호이트 번역 |
---|---|---|---|
뎨〯ᅀᅵ〯쟈ᇰ | Tyěyzǐcyàng | 제2장 | Canto II |
불휘〮 기픈〮 남ᄀᆞᆫ〮 | Pwùlhwúy kìphún nàmkón | 뿌리 깊은 나무는 | A tree with deep roots, |
ᄇᆞᄅᆞ매〮 아니〮 뮐〯ᄊᆡ〮 | Pòlòmáy àní mwǔylssǒy |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므로 | Because the wind sways it not, |
곶 됴〯코〮 | Kwóc tyǒkwó | 꽃 좋고 | Blossoms Abundantly |
여름〮 하〮ᄂᆞ니〮. | Yèlúm hánòní. | 열매 많나니. | And bears fruit. |
ᄉᆡ〯미〮 기픈〮 므〮른〮 | Sǒymí kìphún múlún | 샘이 깊은 물은 | The water from a deep spring, |
ᄀᆞ〮ᄆᆞ래〮 아니〮 그츨〮ᄊᆡ〮 | Kómòláy àní gùchúlssóy | 가뭄에도 그치지 아니하므로 | Because a drought dries it not, |
내〯히〮 이러〮 | Nǎyhí ìlé | 내를 이루어 | Becomes a stream |
바ᄅᆞ〮래〮 가〮ᄂᆞ니〮. | Pàlóláy kánòní. | 바다에 가나니. | And flows to the sea. |
- 많은 중세 국어 문헌은 이른바 “8종성법”에 따라 종성 자모로 “ㄱ, ㆁ, ㄷ, ㄴ, ㅂ, ㅁ, ㅅ, ㄹ”만을 사용하지만, 용비어천가에서는 현대어의 형태론적 표기법과 유사하게 8종성 이외의 종성 자모가 사용되고 있다.
예: 곶 “꽃”(보통은 “곳”), 높고** “높고”(보통은 “놉고”)
- 이른바 “사잇소리(間音)”라고 불리는 소유격 어미는, 음운 환경에 따라 “ㅅ” 이외에 “ㄱ, ㄷ, ㅂ, ㆆ, ㅿ”의 자모로도 표기된다.
예: 형ㄱ ᄠᅳ디 “형의 뜻이”, 하ᄂᆞᇙ ᄠᅳ들** “하늘의 뜻을”
- 겹받침 “ㅸ”이 잘 보존되어 있다.
예: 글ᄫᅡᆯ “글잘”, 셔ᄫᅳᆯ** “서울”
그 외에, 조선의 고유어 지명, 여진어, 몽골어가 한글로 표기된 예가 있어 주목된다.
6. 판본
용비어천가는 1447년(세종 29년)에 처음 간행된 이후 여러 차례 다시 간행되면서 다양한 판본이 존재한다. 크게 최초 간행본인 원간본(초간본), 이후 시대에 다시 새겨 찍어낸 중간본, 그리고 내용이나 형태가 다른 이본(異本)으로 나눌 수 있다.[14][15]
원간본은 1447년에 간행된 목판본으로,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글로 기록된 최초의 문헌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현재 총 10권 중 8권(권1, 2, 3, 4, 7, 8, 9, 10)이 남아 전해지며, 모두 보물 제1463호로 지정되어 여러 기관에 나뉘어 소장되어 있다.[13][14][15] 또한 원간본 판목을 사용하여 후대에 인쇄한 것으로 보이는 고판본(古版本)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전한다.
중간본으로는 1612년에 간행된 만력본, 1659년에 간행된 순치본, 1765년에 간행된 건륭본 등이 알려져 있다. 이들은 원간본을 바탕으로 복각(覆刻)하거나 내용을 수정하여 간행한 것으로, 각각의 판본마다 서체나 판의 형태, 내용상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이 외에도 가사와 한시 일부가 『세종실록』 악보에 실려 전하는 실록본이나, 1612년 함경도 관찰사 한준겸이 간행한 용비어천가 약본과 같은 이본(異本)도 존재한다.
6. 1. 원간본 (초간본)
훈민정음 창제 이후 정음(正音, 한글)으로 기록된 최초의 문헌이자 《월인천강지곡》과 함께 조선 시대 악장(樂章)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조선 왕조 목조부터 태종까지 6대 선조의 사적과 그에 대응하는 중국 역대 제왕의 사적을 대구(對句)로 하여 읊은 노래(125장)와 그 주석을 실었다. 본문은 조선 개국의 천명(天命)에 의한 정당성과 후대 임금에 대한 경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세종조 국어학 및 서지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13][14][15]편찬 경위는 책에 실린 정인지의 서문(1445년), 권제 등의 전문, 최항의 발문(1447년)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1445년(세종 27년)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이 본문(한글 가사 및 한시)을 지었고, 이후 세종의 명으로 최항, 박팽년, 강희안, 신숙주, 이현로, 성삼문, 신영손 등이 각 장에 주해(註解)와 음훈(音訓)을 덧붙여 1447년에 전 10권을 완성하고 간행하였다.[14][15] 《세종실록》 권118, 세종 29년 10월 갑술(甲戌) 조에는 완성된 용비어천가 550본을 여러 신하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15]
원간본(초간본)은 총 10권 중 1, 2, 3, 4, 7, 8, 9, 10권, 총 8권이 현존하며, 모두 대한민국의 보물 제1463호로 지정되어 있다. 각 권의 소장처 및 지정 현황은 다음과 같다.
권차 | 소장처 | 보물 지정 번호 | 지정일 | 비고 |
---|---|---|---|---|
권1, 2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제1463-3호 | 2009년 10월 20일 | 선사지기(宣賜之記) 인장 확인, 초쇄본 추정[15] |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만송문고) | 제1463-4호 | 2009년 10월 20일 | [15] | |
권3, 4 | 서울역사박물관 | 제1463-2호 | 2009년 2월 23일 | [14] |
권7, 8 |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만송문고) | 제1463-4호 | 2009년 10월 20일 | 권7은 유일본[15] |
권8, 9, 10 |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 제1463-1호 | 2006년 4월 28일 | [13] |
각 소장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계명대학교 소장본 (권8, 9, 10): 글자체는 조선 초기에 유행한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로 판각되었다. 판심(版心)은 조선 초기 형식인 흑구(黑口)에 내향흑어미(內向黑魚尾)를 가지고 있어 초간본으로 추정된다. 다만, 장차(章次)에 몇 군데 오각(誤刻)과 수정한 흔적이 있어 초판본 책판을 수정한 후 인출했을 가능성이 있다.[13]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 (권3, 4): 권3의 첫 부분과 권4의 말미에 결락이 있지만, 다른 부분의 보존 상태와 인쇄 상태는 매우 뛰어나다. 한글 창제 이후 간행된 최초의 한글 문헌으로서, 125장의 한글 가사는 가장 오래된 한글 사용 모습을 보여주며, 주해 속 고유명사, 관직명의 한글 표기는 국어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가 된다.[14]
-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권1, 2): 권수(卷首)에 '선사지기(宣賜之記)' 인장이 찍혀 있어 1447년 간행된 초간본의 초쇄본으로 보인다. 종이의 질과 인쇄 상태가 뛰어나다. 본문 머리의 진전문(進箋文) 3장, 권1의 1장 후면, 권2의 끝부분 44, 45, 46장이 떨어져 나갔고, 권2의 41, 42장은 일부 훼손되어 배접되었다. 표지는 개장되었다.[15]
- 고려대학교 소장본 (권1, 2, 7, 8): 만송문고(晩松文庫) 소장본이다. 권1의 서문 1~3장과 권2의 44~46장이 일부 훼손되었다. 권7은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본이며, 권8은 계명대 소장본보다 보존 상태가 좋다. 지질이나 인쇄 상태가 양호하며, 각 책의 전체 내용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15]
또한, 초간본과 동일한 판목을 사용하여 후대에 인출한 것으로 보이는 판본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10권 완질본으로 남아 있으며, 일반적으로 고판본(古版本)이라고 불린다. 이 판본은 글자의 결손이나 보각(補刻)이 심하고 판면의 상태가 좋지 않다.
원간본의 판의 체재는 다음과 같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 기준).
- 판본: 목판본
- 판곽: 세로 25.9cm × 가로 17.6cm, 사주쌍변(四周雙邊), 유계(有界)
- 판심: 상하 대흑구(大黑口), 상하 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
- 행수·자수: 반엽(半葉) 9행, 1행 20자
6. 2. 중간본

중간본은 다음과 같은 여러 판본이 전해지고 있다.
- 만력본: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10권 5책의 완질본이다. 사고(史庫)에 보관되어 있던 내사본(內賜本,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한 책)으로, 1612년(광해군 4년)의 내사기(內賜記, 하사 기록)가 있다. 원간본을 기반으로 다시 새긴 복각본(覆刻本)이며, 판의 모습은 원간본을 비교적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지만, 잘못 새긴 글자(오각, 誤刻)가 보인다.
- 순치본: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으로, 1659년(효종 10년)의 내사기가 있다. 한글 서체가 원간본과 상당히 다르며, 판심(版心)의 검은 테두리인 흑구(黑口)의 유무나 어미(魚尾, 판심의 물고기 꼬리 모양 장식)의 형태 등 판의 체재도 원간본과 다르다. 만력본에서 보였던 오류는 수정되었지만, 만력본과는 다른 오각이 나타난다.
- 건륭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으로, 1765년(영조 41년)의 내사기가 있다. 순치본에서 빠진 부분을 보충한 보완본이기 때문에, 체재나 오각 등은 기본적으로 순치본과 동일하다.
이러한 판본들과는 별도로, 다음과 같은 이본(異本, 내용이나 형태가 다른 판본)이 존재한다.
- 실록본: 한국어 가사와 한시의 일부가 《세종실록》의 악보에 수록되어 있다.
- 용비어천가 약본: 1612년에 함경도 관찰사였던 한준겸이 간행한 책이다. 구결이 있는 한문 가사와 그 독음, 그리고 쉬운 한국어 번역이 붙어 있다. 1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6. 3. 기타 판본
초간본 외에 중간본으로 여러 판본이 전해지고 있다.
- 만력본: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10권 5책의 완질본이다. 사고(史庫)에 보관되어 있던 내사본(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한 책)으로, 1612년의 내사기(內賜記, 하사 기록)가 있다. 원간본을 바탕으로 다시 새긴 복각본(復刻本)이며, 판의 모습은 원간본을 비교적 충실하게 재현했지만 잘못 새긴 글자(오각, 誤刻)가 보인다.
- 순치본: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으로, 1659년의 내사기가 있다. 이 판본은 한글 서체가 원간본과 상당히 다르며, 책 판심(版心, 책장의 접힌 가운데 부분)의 검은 줄(흑구, 黑口) 유무나 어미(魚尾, 물고기 꼬리 모양 기호)의 형태 등 판의 체재도 원간본과 차이가 있다. 만력본에서 보였던 오류는 수정되었지만, 만력본과는 다른 오각이 나타난다.
- 건륭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으로, 1765년의 내사기가 있다. 순치본에서 빠진 부분을 보충한 보완본이기 때문에, 책의 체재나 오각 등은 기본적으로 순치본과 동일하다.
이러한 중간본들과는 별도로 다음과 같은 이본(異本, 내용이나 형태가 다른 판본)도 존재한다.
7. 비판
- 이영훈은 국가의 역사를 신성시하는 국가주의는 위험하다고 보며, "국가의 역사를 '용비어천가'를 쓰는 방식으로 날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였다.[4]
- 나가시마 히로키(永島広紀|나가시마 히로키일본어)는 "그 내용은 윤필과 허식으로 가득 차 있다"고 평가하였다.[5]
8. 현대적 의의
용비어천가는 조선 왕조의 여섯 조상(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을 상징하는 '용'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통해, 중국의 천명 사상에 따라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왕조의 번영을 노래한 서사시이다. 이는 조선 조상들의 덕망이 높았음을 강조하며, 후대 왕들이 따라야 할 통치 이념의 기반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제2장은 그 문학성과 상징성으로 인해 현대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원문(중세 한국어) | 예일 표기 | 현대 한국어 | 제임스 호이트 번역 |
---|---|---|---|
뎨〯ᅀᅵ〯쟈ᇰ | Tyěyzǐcyàng | 제2장 | Canto II |
불휘〮 기픈〮 남ᄀᆞᆫ〮 | Pwùlhwúy kìphún nàmkón | 뿌리 깊은 나무는 | A tree with deep roots, |
ᄇᆞᄅᆞ매〮 아니〮 뮐〯ᄊᆡ〮 | Pòlòmáy àní mwǔylssǒy |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므로 | Because the wind sways it not, |
곶 됴〯코〮 | Kwóc tyǒkwó | 꽃 좋고 | Blossoms Abundantly |
여름〮 하〮ᄂᆞ니〮. | Yèlúm hánòní. | 열매 많나니. | And bears fruit. |
ᄉᆡ〯미〮 기픈〮 므〮른〮 | Sǒymí kìphún múlún | 샘이 깊은 물은 | The water from a deep spring, |
ᄀᆞ〮ᄆᆞ래〮 아니〮 그츨〮ᄊᆡ〮 | Kómòláy àní gùchúlssóy | 가뭄에도 그치지 아니하므로 | Because a drought dries it not, |
내〯히〮 이러〮 | Nǎyhí ìlé | 내를 이루어 | Becomes a stream |
바ᄅᆞ〮래〮 가〮ᄂᆞ니〮. | Pàlóláy kánòní. | 바다에 가나니. | And flows to the sea. |
참조
[1]
웹사이트
龍飛御天歌
https://zh.wikisourc[...]
[2]
웹사이트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
http://mtcha.com.ne.[...]
2007-11-28
[3]
웹사이트
용비어천가
https://terms.naver.[...]
2021-06-08
[4]
서적
大韓民国の物語
文藝春秋
2009-02
[5]
서적
大韓民国の物語
文藝春秋
2009-02
[6]
간행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간행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
간행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
서울역사박물관
2001-12-31
[9]
간행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지정
서울특별시장
2001-12-31
[10]
사료
세종실록
1445-04-05
[11]
사료
세종실록
1447-10-16
[12]
서적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한국학중앙연구원
1998
[13]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문화재청장
2006-04-28
[14]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문화재청
2009-02-23
[15]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문화재청
2009-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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