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단야는 1899년 경상북도 김천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 운동가이다. 1910년대 초 계성학교 재학 중 동맹휴학을 주도하며 저항 운동을 시작했고, 3·1 운동 참여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나 사회주의 사상을 확립하고, 고려공산청년회, 조선공산당 등에서 활동하며 6·10 만세운동을 지원했다. 1930년대 소련으로 망명하여 활동하다가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에 일제 밀정 혐의로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삼인당 - 박헌영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에 의해 처형되어 그의 생애와 활동은 논란과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삼인당 - 임원근
임원근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 운동가로, 고려공산당 활동을 하였으며 신간회 해소에 반대하고 조선중앙일보에서 계몽운동을 펼치다 광복 후 민족주의민주전선 등에서 활동했으며 사후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 한국의 무신론자 - 신채호
신채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전개한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 문필가로, 민족주의적 역사관과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으로 한국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한국의 무신론자 - 주세죽
주세죽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조선공산당 활동, 근우회 결성 참여 등 항일 운동을 전개했으며 박헌영과 결혼 후 소련 망명, 김단야와 재혼, 이후 일본 밀정 혐의 체포 및 유배, 소련 거주 중 사망 후 명예 회복 및 건국훈장 추서되었다.
김단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김단야 |
원어명 | 金丹冶 |
출생일 | 1899년 1월 16일 |
출생지 | 대한제국 경상북도 김천 |
본관 | 김녕 김씨 |
사망일 | 1938년 2월 13일 |
사망지 | 소련 모스크바 |
직업 | 정치인, 언론인, 독립운동가 |
배우자 | 이상분 |
자녀 | 1남 1녀 |
정당 | 무소속 |
경력 | |
경력 | 고려공산당 당무위원 |
2. 생애
김단야는 1899년 1월 16일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러시아 측 자료에는 1901년생으로 나온다.[1]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면서 아버지의 한의사 자격이 박탈되어 집안이 어려워졌다.[1] 1915년 개신교(장로교) 계성학교에 입학했으나, 1916년 선교사와 일본인 선생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했다.[2] 이후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다 1917년 귀국하여 배재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고 고향 김천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태형을 받았다.[1] 이후 비밀결사 활동 중 1919년 12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박헌영, 임원근과 함께 활동했다.[1]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청년회 간부, 화요회 등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인민대표자대회에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등과 함께 참석했고, 레닌과 회견했다.[1] 이후 코민테른 지시로 국내외에서 활동하다 1922년 박헌영, 임원근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1]
1925년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여 조선공산당 기관지 <불꽃(火花)> 주필을 맡고,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벌였다.[5] 1926년 6·10 만세운동에 관여하고 노동자 파업 운동을 주도했다.[5]
1929년 국제레닌학교 졸업 후 국내에 들어와 '조선공산당재건조직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나, 1930년 검거령을 피해 모스크바를 거쳐 상하이에서 활동했다.[5] 1932년 상하이에서 박헌영이 체포될 때 주세죽과 함께 탈출하여 소련으로 망명했다.[5] 1934년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일하며 주세죽과 결혼했다.[5]
1937년 소련 정보기관에 체포되어 '일제 밀정'으로 몰려 재판을 받고, 1938년 2월 13일 처형당했다.[6]
2. 1. 유년 시절
김단야는 1899년 1월 16일 경상북도 김천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연대에 대해서는 1899년생 설과 1900년, 1901년생 설이 있는데, 러시아 측 자료에는 1901년생으로 나온다.[1]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아버지는 한때 한의사로 가세를 일으켰다고 한다.[1] 그러나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뒤부터 아버지의 한의사 자격이 박탈되어 농민이 되었다.[1] 김단야는 예닐곱 살에 서당에서 2년 동안 한문을 배웠고, 1914년 보통학교를 마칠 때까지 여느 아이와 다름없는 평범한 생활을 했다.[1]2. 2. 청년 시절
1915년 개신교(장로교) 계성학교에 입학하면서 새로운 의식에 눈뜨며 ‘식민지 아들’로서 ‘이유 있는 저항’을 시작했다. 장로교 선교사였던 미국인 교장과 조선 학생을 때리던 일본인 선생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주도했다가 1916년 12월 퇴학당했다.[2] 개신교 신자였던 가족들은 개신교 선교사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으로 김단야가 제적되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가족들은 학비 지원을 중단했고, 김단야는 1917년 1월 어머니에게만 알리고 일본 도쿄로 떠났다. 도쿄에서 세이고쿠(正則) 영어학교를 다니며 우유배달, 신문팔이, 사탕팔이 등으로 학비를 벌었다. 1917년 8월 아버지로부터 학비 지원 약속 편지를 받고 귀국하여, 9월 경성부 배재학교에 입학했다.2. 3. 독립운동
김단야는 일찍부터 학생 운동에 뜻을 두어 배재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참가했다. 1919년 3월 말 고향 경북 김천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 김천지회에서 태형 90대를 언도받았다.[1] 이후 비밀결사 ‘적성단(赤星團)’ 활동을 하다 경찰의 추적을 피해 1919년 12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1] 상하이에서 박헌영, 임원근을 만나 '''삼인당'''(三人黨)이라 불리며 함께 활동했다.[1]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로 활동했으며, '화요파 트로이카', '화요 3인조'로 불리던 박헌영, 임원근과는 고려공산청년회와 화요회, 신흥청년동맹에서 함께 활동한 가까운 동지였다.[1]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인민대표자대회에 이정 박헌영, 몽양 여운형, 김규식, 이동휘 등과 함께 참석했다.[1]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등과 몽골까지 자동차로, 몽골에서는 마차와 열차로 소비에트 연방의 모스크바에 도착했다.[1] 대회가 끝나고 2월 20일 레닌과 회견했는데, ‘극동청년대회’에 참석한 각국 대표 17명과 함께 레닌을 만난 이 짧은 만남은 그가 사회주의 사상을 확고히 한 계기가 되었다.[1]
이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모스크바와 상하이, 국내를 오가면서 활동했다. 1922년 4월,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국내로 옮기려다 박헌영, 임원근과 함께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신의주지법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1]
1925년 10월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뒤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을 피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동양비서부와 연락하기 위해 1925년 12월 두 번째로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6년 1월부터 7월까지 조선공산당 기관지 <불꽃(火花)> 주필을 맡았다. 또한 조선공산당 '해외부' 설립에 참여했으며 국내 공산당의 재정을 조달하면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벌였다. 상하이에서 기관지 《콤뮤니스트》를 발행했고, 1926년 4월 순종 사망 소식을 듣고 격문을 만들어 국내로 보내면서 6·10 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하였고 노동자 파업 운동을 주동했다.[5]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두원 등과 함께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근거하여 당 재건 운동을 전개할 것을 협의하고 국내로 들어왔다. 11월 박민영, 권오직 등과 '조선공산당재건조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직부를 담당했다. 그러나 1930년 2월 일제 경찰의 검거령이 내려지자, 검거망을 피해 국내를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가 9월에 중국 상하이로 활동 무대를 옮겨 잡지 《콤뮤니스트》를 발간하면서 반제국주의 운동 활동을 하였다. 1932년 일제 밀정으로부터 밀고받은 일제 경찰에 검거령이 내려졌다. 상하이에서 같이 활동하던 동료 박헌영은 끝내 일제 경찰에 잡혔고 그가 시간을 끄는 사이에 김단야와 주세죽은 도망쳤다.[5]

그 후 김단야는 주세죽과 소련으로 망명하였고, 1934년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한국인 유학생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았다. 그해 김단야는 동지인 박헌영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박헌영이 죽은 줄로만 알던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에게 박헌영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주세죽과 세 번째로 결혼했다. 김단야에게는 고향에 본처가 있었고 두 번째 부인은 같은 운동가였던 고명자였다.[5]
2. 3. 1. 1920년대 활동
일찍부터 학생 운동에 뜻을 두면서 배재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참가하였고, 3월 말 고향 경북 김천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 김천지회에서 태형 90대를 언도받았다.[1] 그 뒤 비밀결사 ‘적성단(赤星團)’ 활동을 했으며, 경찰의 추적을 피해 12월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1] 상하이 망명하면서 박헌영과 임원근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은 '''삼인당'''(三人黨)이라 불리면서 같이 활동하게 된다.[1]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로 활동했으며, '화요파 트로이카', '화요 3인조'로 불리던 박헌영, 임원근과는 고려공산청년회와 화요회, 신흥청년동맹에서 함께 활동한 가까운 동지 사이였다.[1]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원동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을 때, 이정 박헌영, 몽양 여운형, 김규식, 이동휘 등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였다.[1]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등과 몽골까지 자동차로, 몽골에서는 마차와 열차로 소비에트 연방의 모스크바에 도착했다.[1] 이 대회가 끝나고 2월 20일 그의 삶에 가장 감명을 준 레닌과 회견하게 된다.[1] 그는‘극동청년대회’에 참석한 각국 대표 17명과 함께 레닌을 만났고, 이 짧은 만남은 그가 사회주의 사상을 확고히 한 계기가 되었다.[1]
이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모스크바와 상하이, 국내를 오가면서 활동했는데, 1922년 4월에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국내로 옮기려고 입국하다가 박헌영, 임원근과 함께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신의주지법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는다.[1]
2. 3. 2. 6.10 만세운동 활동과 1930년대 활동
1925년 10월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뒤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을 피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동양비서부와 연락하기 위해 1925년 12월에 두 번째로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6년 1월부터 7월까지 조선공산당 기관지 <불꽃(火花)> 주필이 되었다. 또한 조선공산당 '해외부' 설립에 참여했으며 국내 공산당의 재정을 조달하면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벌였다. 상하이에서 기관지 《콤뮤니스트》를 발행했고 국내에서 1926년 4월, 순종 사망 소식을 듣고 격문을 만들어 국내로 보내면서 6·10 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하였고 노동자 파업 운동을 주동했다.[5]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두원 등과 함께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근거하여 당 재건 운동을 전개할 것을 협의하고, 같이 국내로 들어왔다. 11월 박민영, 권오직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조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직부를 담당했다. 그러나 1930년 2월 일제 경찰의 검거령이 내려지자, 검거망을 피해 국내를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가 9월에 중국 상하이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 잡지 《콤뮤니스트》를 발간하면서 반제국주의 운동 활동을 하였다. 1932년 일제 밀정으로부터 밀고받은 일제 경찰에 검거령이 내려졌다. 상하이에서 같이 활동하던 동료 박헌영은 끝내 일제 경찰에 잡혔고 그가 시간을 끄는 사이에 김단야와 주세죽은 도망쳤다.[5]
그 후 김단야는 주세죽과 소련으로 망명하였고, 1934년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한국인 유학생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았다. 그해 김단야는 동지인 박헌영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박헌영이 죽은 줄로만 알던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에게 박헌영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주세죽과 세 번째로 결혼했다. 김단야에게는 고향에 본처가 있었고 두 번째 부인은 같은 운동가였던 고명자이다.[5]
2. 4. 최후
1937년 코민테른은 김단야를 조선에 파견하여 '당사업'을 맡길 계획이었다. 그러나 소련 정보기관은 "정보자료에 따르면 당사업을 위해 그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은 권고할 만한 일이 아니다"라고 김단야에게 통보했다. 1937년 11월 5일 소련 내무인민부는 김단야를 체포했다.[6]'김춘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조선인이 김단야를 '간첩'이라고 소련 정보기관에 투서했다. 김춘성은 김철수가 만든 조선공산당 제3차 집행부의 일원이었던 제주도 출신 이성태로 추정된다. 투서에는 김단야뿐만 아니라 박헌영, 조봉암, 김찬, 김한 등 당대 공산주의 최고 지도자들이 일제의 간첩으로 매도되어 있었다.[6]
소련 정보기관에 체포된 김단야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가'에서 '일제의 밀정'으로 몰렸다. 변호사와 반론권 없이 소련 최고 인민 재판소 군사법정에서 재판이 진행되었고, "일제 첩보기관의 밀정이며 반혁명폭동과 반혁명테러활동을 목적으로 한 조직의 지도자로서 1급 범죄자"라는 판결을 받았다. 김단야는 1938년 2월 13일, 아무런 변호도 받지 못한 채 처형당했다.[6]
3. 사후
4. 기타
참조
[1]
설명
[2]
뉴스
붉은 광장에 떨어진 붉은 꽃, 김단야
http://newsmaker.kha[...]
[3]
서적
박헌영 평전
실천문학사
[4]
서적
박헌영 평전
[5]
웹인용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https://search.i815.[...]
2011-05-27
[6]
서적
박헌영 평전
실천문학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