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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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성임은 1839년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성인이다. 부평에서 시집와 '부평댁'으로 불렸으며, 불우한 환경 속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맹인과 재혼하는 등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1839년 동료 신자들과 함께 자수하여 순교했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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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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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김성임 마르타 |
출생일 | 1787년 |
사망일 | 1839년 7월 20일 |
축일 | 9월 20일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출생지 | 인천 부평 |
사망지 | 서울 서소문 |
직업 | 순교자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시복인 | 교황 비오 11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2. 생애
김성임 마르타는 기해일기에 따르면 부평댁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그녀가 인천 부평에서 시집왔음을 의미한다.[1] 그녀는 불우한 초년을 보냈고, 이후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어 1839년 자수하여 순교하였다.
2. 1. 불우한 초년
김성임은 부평 출신으로, 완고한 성격의 첫 남편과 불화를 겪고 이혼했다. 이후 한양으로 상경하여 점을 봐주며 생계를 이어가는 맹인과 재혼하였다. 50세가 넘도록 천주교를 알지 못했다.[1]2. 2. 천주교 입교와 신앙 생활
김성임은 집안의 한 천주교 신자에게서 하느님과 그의 외아들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다. 맹인 남편과 함께하는 삶은 힘들었지만, 과부가 된 후에는 교우들의 도움을 받으며 신앙 생활을 이어갔다. 교우들의 도움에 보답하고자 그들의 집안일을 거들었고, 그동안 신앙은 더욱 깊어졌다.첫 남편을 견디지 못한 것과 미신에 의지한 재혼 등 과거의 죄를 회개했다. 깊은 슬픔을 느꼈지만 주께 전적으로 의지하여 슬픔을 극복했고, 교우들의 관심과 모범은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고 확신하게 만들었다.
2. 3. 자수와 순교
이영희 막달레나, 이매임 테레사, 김 루치아 등과 함께 박해와 용감한 순교자와 천국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깊이 감동하여 신앙을 공언하기 위해 조정에 자수하기로 결심했다.[1]1839년 3월 말이나 4월 초, 김성임 마르타를 포함한 용감한 여성들은 포도청으로 가서 자신들이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고 묵주를 꺼내 보이며 감옥에 가두라고 말했다. 포졸은 그들을 묶어 감옥에 집어넣었다.[1]
포장은 김성임 마르타를 포함한 여성들을 심문하며 천주교를 진리의 종교로 믿는지, 천주를 부정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들은 천주를 부정할 수 없으며, 천주를 위해 자수했고, 국법에 따라 죽을 것이나 결코 천주를 부정하지 않겠다고 답했다.[1]
몇 번의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으며, 상급 재판소로 이송되어 다시 심문을 받았지만, 하느님을 숭배하며 그분을 위해 죽기로 작정하였다고 답했다. 포장은 그들이 자수한 것을 나무라며 더 심하게 고문했지만, 그들은 굴복하지 않았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1]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839년 7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김성임 마르타를 포함한 여덟 명의 천주교도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김성임 마르타가 순교할 당시 나이는 53세였다.[1]
3. 시복 및 시성
김성임 마르타는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다.[1]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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