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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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재준은 1901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한국의 개신교 목사이자 신학자이다. 유학자 집안에서 성장하여 동양 고전을 배우고, 일본과 미국의 신학 교육을 통해 성서비평학을 접했다. 1940년 조선신학교 설립에 참여했으나, 성서비평학 수용 여부로 보수적인 교단과 갈등을 겪었고, 1953년 목사직이 파면되었다. 이후 한국기독교장로회 설립을 주도하며 진보 신학 전통을 확립했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 반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으며, 그의 제자들은 민중신학을 계승했다. 그는 성서비평학 도입, 한국기독교장로회 설립, 민주화 운동 참여 등을 통해 한국 신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200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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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김재준 |
| 원어 이름 | 金在俊 |
| 직함 | 목사 |
| 출생일 | 1901년 9월 26일 |
| 출생지 | 대한제국 함경북도 경흥 |
| 사망 장소 | 대한민국 서울 |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 |
| 사망일 | 1987년 1월 27일 |
![]() | |
| 학력 | 미국 웨스턴 신학대학원 |
| 종교 | 개신교(한국기독교장로회) |
| 기타 |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
| 소속 교회 | 한신대학교 교목 |
| 재직 |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
| 전직 | 신민당 당무위원 겸 대표전임고문 |
2. 생애
2. 1. 개신교 입교와 신학 수업
1901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났으며, 유학자 집안에서 성장하였다.[1] 청년기에 부흥사 김익두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성령의 불길에 사로잡혔다"고 고백하며 개신교에 입교하였다.[1] 유학자 아버지에게 사서삼경과 동양고전을 배웠으며, 일본 도쿄 아오야마(靑山) 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하였고, 카가와 토요히코의 영향을 받았다.[1] 이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웨스턴신학교(현재 피츠버그신학대학원)에서 구약성서학으로 학위(S.T.M.)를 받았다.[1]2. 2. 조선신학교 설립 참여와 갈등
김재준은 1933년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교목 겸 교사로서 성서를 가르쳤다.[1] 1940년 조선신학교(현재 한신대학교)를 세우는 실무책임을 맡았는데,[1] 이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로 평양에 있던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가 폐쇄되자, 조선 사람이 교육하고 교육받는 장을 세우려 한 김대현 장로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1] 하지만 성서비평학 수용 여부로 조선예수교장로회와 갈등을 겪었다.[1] 1935년 '어빙던(Abingdon) 단권성경주석(單券聖經註釋)사건' 때 송창근, 한경직 목사와 함께 성서의 문자적 무오설(축자영감설)을 부정한다며 비판받았다.[1]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8회 총회에서 목사직이 파면되었으나,[1] 박형룡 목사를 중심으로 한 교권파에 대항하여 대구에서 호헌총회를 개최,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대한기독교장로회를 출범시켰다.[1] 이후 대한기독교장로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김재준의 신학을 기반으로 세상의 화살촉으로 살고자 고백하며 한국의 민주화 통일운동에 매진하게 된다.[1]2. 3. 민주화 운동 참여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삼선개헌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2] 보수적인 교계 원로들은 목사가 정치에 관여한다며 비난했지만,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2] 당시 보수적인 개신교계는 5.16 군사정변을 하나님의 뜻으로 미화하며 군사반란을 지지하는 설교를 할 정도로 반공주의 성향을 보이며 군사정권을 지지했고, 민주화운동을 하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나 진보인사들을 정치목사나 공산주의자로 취급했다.[2][3] 한국대학생선교회(KCCC) 총재 김준곤 목사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을 '한국과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지지해야 할 반공주의적인 정권'이라고 찬양하기도 했다.[2]하지만 김재준은 성직자의 의무인 예언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양심에 따라, 기독교 단체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군사정권 연장을 위한 삼선개헌 반대 민주화운동 참여를 권유했다. 1969년 9월 14일 새벽, 개헌안이 기습 통과되어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지만, 김재준은 예언자적 양심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제자인 문익환 목사, 서남동, 안병무 등의 민중신학자들이 이를 계승했다. 김재준은 1966년 찬송가 '어둔 밤 마음에 잠겨'의 1절과 2절을 작사했다.
3. 신학 사상과 업적
3. 1. 성서비평학 도입과 한국 신학 발전 기여
3. 2. 한국기독교장로회 설립과 진보 신학 전통 확립
3. 3. 민주화 운동과 사회 정의 실현
4. 평가와 영향
4. 1. 긍정적 평가
4. 2. 비판적 평가
5. 사후
장공 김재준은 민주화운동과 성서비평학을 통한 한국교회 신학발전에 기여한 업적이 인정되어 2002년 12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4]
참조
[1]
간행물
대한장로회 총회 제38회 총회록
[2]
서적
한국교회의 과거사 고백,군사정권하의 한국교회
대한기독교서회
[3]
설교문
죽재 서남동 목사 기념사업회 발족 기념설교문
[4]
뉴스
역사를 바꾼 크리스천 장공 김재준 목사… 교회개혁 비전 제시한 선각자
국민일보
200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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