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민중신학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억압 상황에서 발생한 신학으로, 민중을 신학의 중심 개념으로 삼아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을 추구한다. 안병무, 서남동 등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198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한 변혁적 민중신학으로 발전했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여성, 환경 등 다양한 사회 문제로 그 범위를 넓혔다. 민중신학은 민주화 운동에 기여하고 제3세계 신학 발전에 영향을 미쳤으나, 엘리트주의, 이념 편향성, 현실 적합성 문제 등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급진주의 - 로코포코스
    로코포코스는 1830년대 미국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 옹호, 정부 간섭 최소화를 목표로 자유 시장 경제를 지지하고 독점과 특권에 반대하며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민주주의적 이상을 지지했던 급진 민주주의 그룹이다.
  • 급진주의 - 제10대 던도날드 백작 토머스 코크레인
    제10대 던도날드 백작 토머스 코크레인은 영국 해군 제독, 정치인, 발명가로,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하고, 증권 거래소 사기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으며, 칠레, 브라질, 그리스 해군에서 지휘관으로 활동하며 독립 전쟁을 지원했다.
  • 해방 신학 - 국민해방군 (콜롬비아)
    국민해방군(ELN)은 콜롬비아의 좌익 게릴라 조직으로, 쿠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창설되었으며, 자금 조달을 위해 유전 지대 공격, 마약, 납치 등의 활동을 했고, 콜롬비아 정부와 평화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산된 적도 있지만, 2023년 휴전에 합의했으며, 미국과 유럽연합은 ELN을 테러 단체로 지정했다.
  • 해방 신학 - 아시아 여성 신학
    아시아 여성 신학은 1970년대 후반부터 아시아 여성의 경험과 억압에 대한 신학적 탐구로 시작되어 서구 중심 신학 비판과 아시아 문화 가치 반영을 통해 젠더, 인종, 계급, 문화적 요인들이 여성의 신앙과 삶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신을 전체론적, 생태적으로 이해하며 여성 권리 신장과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한 실천적 노력을 강조하는 신학 분야이다.
  • 기독교 신학 -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로서 예수가 인간 아버지 없이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태어났다는 신념이며,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전승을 바탕으로 하지만 역사적 근거에 대한 학계의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며, 기독교 미술, 전례, 마리아 공경, 서구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기독교 신학 - 신정론
    신정론은 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의 존재 하에 세상의 악과 고통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고 신의 선함과 전능함을 정당화하려는 이론으로, 다양한 해석과 비판적 시각, 그리고 대안적 접근 방식들이 제시되고 있다.
민중신학
민중신학
로마자 표기Minjung Sinhak
한자 표기民衆神學
문자적 의미민중의 신학
개요
설명한국기독교 신학적 접근 방식으로, 사회 정의를 추구한다.
관련 항목진보주의
참고 문헌김앤드루 은기, 김종만, 민중신학 (St Andrews Encyclopaedia of Theology, 2023)
서남동 (Seo Nam-dong), 민중신학
제니퍼 윅케리 (Jennifer Wickeri), 중국 교회의 재건: 삼자애국운동의 신학적 문제

2. 역사

민중신학의 역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과 궤를 같이한다. 민중신학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 이어지는 개발독재에서 지속적으로 배제된 민중의 고난 현실,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청년, 학생,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등의 항거에 접한 일단의 기독교 지식인들의 신학적, 신앙적 반성에서 출발했다.[4]

1979년 한국에서 열린 CCA 신학협의회에서 '민중신학'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지만, 민중신학 태동의 계기는 1970년 전태일 열사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4] 민중신학은 한국 사회의 변모 과정 및 민중운동 세력의 한국 사회 인식 발전 과정을 따라 단계적으로 발전했다. 이는 민중신학이 한국 상황이라는 콘텍스트에 대한 신학적 반성임을 의미한다.[4]

민중신학은 Minjung theology이라는 신학 용어가 있을 정도로 세계 교회에서 크게 주목받은 한국 교회 고유의 신학이다. 그러나 군사독재에 반대하고 민중의 편을 드는 민중신학은 군사독재 정권과 기독교 근본주의를 옹호해 온 한국 교회에서 탄압을 받았다.[22]

1950년대1960년대 한국 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처음 시작된 민중신학은, 1970년대 박정희의 독재와 제3공화국 시대에 인기를 얻었다. 안병무서남동은 민중신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며, 전태일의 죽음 이후 민중운동에 합류한 기장(Kijang) 목사였다.[4] 김지하는 민중과 함께 고난을 겪는 한국의 예수를 생생하게 묘사하여 민중 사상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6]

대한민국이 더욱 번영하면서, 후대 민중신학자들은 북한과의 통일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민중을 두 한국 모두에서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로 규정했다.[10]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CPAJ)과 박창신 신부는 한국의 해방신학과 연관되어 있다.

1970년대에 신학자들은 민중 해방이라는 주제를 탐구했고, 많은 사람들이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억압받고 투옥된 사람들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11] 한국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민중운동으로는 동학 농민 운동, 3·1 운동, 4·19 혁명이 있다.[12]

민중신학은 하나님이 한국의 상황을 포함한 모든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 말씀하신다고 주장한다.[13] 민중신학 지지자들은 한국의 맥락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와 여러 면에서 유사하며, 하나님이 성경 전체에서 명백히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편에 서 있다고 믿는다.[14] "민중"은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며,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문화적, 지적 문제에 있어서 무교육 상태에 놓인 사람들"로 정의된다.[15]

탈출기는 모세의 관점에서 이야기된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압제자 람세스 2세의 통치로부터 해방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17] 이는 한국이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가혹한 정부 아래에서 고통받았다는 점에서 한국 역사와 유사하다.[18]

호러스 뉴턴 앨런, 헨리 아펜젤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같은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하층민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1885년에 개신교 선교사들은 민중이 다니는 여학교를 열었지만, 양반들에게 무시당했다. 이 선교사들은 한글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1887년에서 1900년 사이에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다.[19] 1893년 1월, 네비우스 계획이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채택되었다.[19]

한국 해방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개신교 교회는 더 이상 민중의 정치적 억압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영혼 구원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20]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한국이 공식적으로 일본에 병합되자, 한국인들은 교육칙어와 천황의 신성함, 즉 현인신을 인정해야 했다. 일제강점기는 기독교 박해로 이어졌고, 기독교인들은 3·1 운동으로 절정에 달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일본 당국과 협력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1920년에서 1945년 사이에 한국 교회는 근본주의화되었으며 서구 신학에 집중하는 동시에 천황의 신성을 인정하라는 일본의 요구에 굴복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에 한국 민중은 일본으로부터 광복절을 쟁취했다.[20]

2. 1. 태동 (1970년대)

1975년 김찬국, 김동길의 출소를 기념하는 3.1절 예배 강연에서 안병무는 '민중'이라는 용어를 신학 작업의 핵심 틀로 공식 사용했고,[4] 같은 해 4월 서남동은 같은 맥락에서 '민중의 신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4] 1979년 한국에서 열린 CCA 신학협의회에서 이러한 경향의 신학을 총칭하는 용어로 '민중신학'을 처음으로 사용했다.[4] 하지만 민중신학 태동의 계기적 시점은 '민중'이라는 용어의 공식적 사용 이전인 1970년 전태일 열사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건에 접한 일부 기독교 지식인들의 신학적, 신앙적 반성이 민중신학의 시초가 되었다.[4]

1970년대박정희의 독재와 제3공화국 시대였다. 당시 권위주의적 정권에 의해 주도된 급격한 경제 개발은 외형상 성공했지만, 많은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배제하는 왜곡된 발전이었다. 갑작스러운 이농 현상과 도시화, 도시 중심의 급격한 계급/계층 재편 과정이 있었고, 이 피라미드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하게 된 사람들을 첫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이라 불렀다.

민중신학자들은 성서와 교회에서 눈을 돌려 현실의 '민중'을 보았을 때, 성서 속 '고난'의 현실을 발견했다. '한국 민중의 고난'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게 된 것이다.(거듭남의 체험!)[4]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의 고난이 인간 해방을 위한 '사건'이었듯이, 민중신학자들은 한국 민중의 고난을 해방 사건으로 보았다. '그때 거기'의 그리스도 사건이 '지금 여기'에서 재현되는 것이었다.

제1세대 민중신학자들은 한국 민중의 고난과 민중의 항거를 '민중사건'으로 신학화했다.(사건의 신학) 이들은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며, 자신들은 '민중사건'의 '증언자'일 뿐이라고 보았다.(증언의 신학) 당시 민중운동이 지식인 명망가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기층 대중의 역할은 미미했기에, 이는 역설적 실천론일 수 있다. 그러나 첫 민중신학자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인식하고, 기층 대중의 고난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 뿐인 존재로서, 그 사건을 증언할 뿐이라고 고백했다.

안병무, 서남동, 현영학, 김용복은 1세대 민중신학자로 여겨진다.[7][8] 김지하라는 가톨릭 작가이자 예술가는 민중과 함께 고난을 겪는 한국의 예수를 생생하게 묘사하여 민중 사상에 많은 영감을 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6] 1972년 안병무는 "예수와 민중"이라는 제목으로 민중을 신학적 주제로 삼은 첫 번째 논문을 썼다.[5]

2. 2. 발전 (1980년대)

1980년은 대한민국 민중운동사에서 큰 전환점이 된 해였다. 1970년대 민중운동이 지식인 중심의 계몽적 성격이었다면, 1980년대는 중화학 공업에 종사하는 20대 후반~30대 남성 노동자 중심의 민중운동이 급속히 성장했다. 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민, 도시 빈민 등 기층 대중의 운동도 크게 성장했고, 학생, 지식인 등의 대중적 민중운동도 발전했다.[1]

이러한 변화에 따라, 1970년대 민중신학은 점차 실효성을 잃어갔다. 이에 '변혁적 민중신학' 혹은 '제2세대 민중신학'이라 불리는 경향이 등장했다. 제2세대 민중신학은 당시 변혁적 실천이론으로 여겨지던 마르크스주의와의 결합을 시도했다.[1]

제1세대 민중신학자들이 '역사의 주체'라고 부르던 '민중'의 정체는 이제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그려졌다. 선배 민중신학자들이 막연히 '독재 체제'라고 보았던 지배 체제는 제국주의 세력과 국내 자본가 세력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을 모순의 핵심으로, 그 밖의 기층 대중과 중산층을 주변적 존재로 만들었다. '역사의 주체 민중'은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계급 동맹'으로 인식되었다.[1]

1세대 민중신학자들이 보았던 '(민중) 사건'은 노동자 계급 중심의 계급 투쟁이었다. 이것은 '사건'이라기보다는 목적의식적이고 변혁적인 '운동'이었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자신이 어느 계급에 속하는지를 파악하고 그에 맞게 역할하는 것을 의미했다(운동의 신학).[1]

이러한 흐름은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맞아떨어졌다. 그리스도의 민중 사건이 곧 마르크스주의 운동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통 신학/신앙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다. 기독교의 최종적 해체론과 기독교 갱신론으로 입장이 갈라졌다. 또한, 경직된 역사/사회관의 문제와 실천 이론의 부재라는 또 다른 장애물도 나타났다.[1]

2. 3. 확장과 다변화 (1990년대 이후)

1990년대 한국 사회는 민주화와 세계화가 진전되며 다원화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민중신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제3세대 민중신학자들은 '신사고'의 흐름을 받아들여, 프롤레타리아 중심의 단일한 운동(계급투쟁)에서 벗어나 민중의 범위를 확대하고 여성, 환경, 평화 등 다양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1]

이들은 국제적인 연대망을 활용한 운동들과 지역 운동들까지 다양한 실천들을 '운동'으로 포괄하며, 다층적인 사회 변혁 운동을 지향했다. 이는 민중신학의 실천 주체와 주제를 다양화시켰으며, '주체의 다양화'와 '주제의 다변화'는 90년대 민중신학의 현실을 반영하는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1]

변화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지만, 변화된 상황 인식은 국제적, 국가적, 지역적 맥락과 계급적, 계층적, 계급·계층 복합적 맥락에 대한 인식을 통해 새로운 출구를 제시했다. 예를 들어, 교회는 지역적이면서 계급·계층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며, 기독교 사회운동은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유형으로 분포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나타났다.[1]

이러한 상황에서 신앙의 문제는 사회적 실천과 분리되지 않고, 다양화된 주체와 그들의 사회적 실천을 포괄하는 신학을 통해 해명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는 신앙의 '신비'가 민중신학에 걸맞은 모양을 갖추도록 하기 위함이었다.[1]

민중 억압의 사회적 기제들이 여전히 구조화되어 있다는 인식 하에, 총체적인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인식 전망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앞으로 해명되어 가야 할 '열린 과제'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며, 이러한 과정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자세로 추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1]

3. 주요 특징

민중신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 민중 중심성: 민중을 역사의 주체이자 신학의 주체로 보며,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경험과 고난을 신학적 성찰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안병무예수를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을 위한 메시아로 보았다.
  • 상황 맥락성: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서 만들어진 신학으로, 성서와 기독교 전통을 한국의 상황에 맞게 다시 해석한다. 1970년대 신학자들은 민중 해방을 탐구했고, 많은 이들이 박정희 정권과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억압받는 사람들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11]
  • 실천 지향성: 사회 변혁을 위한 실천을 강조하며, 민중의 해방과 인간다운 삶을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1980년대 변혁적 민중신학은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하여 노동자 계급 중심의 계급 동맹에 참여하는 것을 강조했다.
  • 비판적 성찰: 한국 사회와 민중 운동의 변화 과정을 반영하며 발전해 왔다. 1990년대 '신사고'의 물결 속에서 다양한 실천들이 강조되었고, 민중신학은 국제적, 국가적, 지역적 콘텍스트와 계급적, 계층적, 계급·계층복합적 콘텍스트에 대한 인식을 통해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민중신학은 Minjung theology라는 신학 용어가 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한국 고유의 신학이다.[22] 그러나 군사독재 정권과 기독교 근본주의를 옹호해 온 한국 교회는 군사독재에 반대하고 민중 편을 드는 민중신학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민중신학은 심한 탄압을 받았다.[22]

3. 1. 민중 중심성

민중신학은 민중을 역사의 주체이자 신학의 주체로 본다. 여기서 민중은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며,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의미한다.[15] 민중신학은 민중의 경험과 고난을 신학적 성찰의 출발점으로 삼는다.[15]

민중신학자들은 성서와 교회에서 현실로 눈을 돌렸을 때, 경제 개발의 희생자인 '민중'에게서 성서 속 '고난'의 현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한국 민중의 고난'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았고, 이는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해방 사건으로 여겨졌다.[22]

당시 '권위주의적인 군부 독재정권'은 사회 밑바닥 계층을 소외시켰고, 민중신학자들은 이를 악마적인 '권위주의적인 독재체제'로 보았다. 그들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이며, 민중 속에 그리스도의 영(氣)이 있다고 믿었다. 즉, 민중의 '봉기'는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생각했다.[22]

제1세대 민중신학자들은 한국 민중의 고난과 항거를 '민중사건'으로 신학화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회개해야 할 자이자, '민중사건'의 '증언자'로 여겼다. 당시 민중운동은 지식인 명망가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기층 대중의 역할은 미미했기에, 이는 역설적인 실천론일 수 있다. 그러나 제1세대 민중신학자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인식하고, 기층 대중의 고난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 뿐인 존재로서 증언자의 역할을 강조했다.[22]

민중신학자들은 이러한 신학을 '민중의 눈으로 신학하기'라고 표현했다. 그들은 '정통신학'을 '지배자의 눈으로 바라본 신학'으로 간주하고 해체하려 했다.[22]

민중신학은 억압받는 민중을 역사의 대상이 아닌 변화의 주체로 본다. 안병무예수를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을 위한 메시아로 오는 집단적인 사건으로 보았다.

3. 2. 상황 맥락성

민중신학은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서 만들어진 신학이다. 한국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보고, 이에 대한 신학적 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성서와 기독교 전통을 한국의 상황에 맞게 다시 해석한다.[13] 민중신학 지지자들은 한국의 상황이 성경 속 이야기와 비슷하며, 하느님이 성경에서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이라고 믿는다.[14]

'민중'이라는 말은 '대중'을 뜻하지만, 더 넓게는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며,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문화적, 지적 문제에 있어서 무교육 상태에 놓인 사람들"을 의미한다. 다른 표현으로는, 민중은 한을 가진 사람들인데, 이는 원망을 뜻하는 한국어 단어이다.[15] 민중은 억압을 받아들이는 백성과 국가 정체성을 의미하는 인민과는 다르다.[16]

민중신학은 1950년대와 1960년대 한국 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소수의 개신교 교회에서 설교되었다. 1970년대에 신학자들은 민중 해방이라는 주제를 탐구하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정권과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억압받고 투옥된 사람들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대학교와 신학교에서 해임되었다.[11]

호러스 뉴턴 앨런, 헨리 아펜젤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같은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하층민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1885년에 개신교 선교사들은 민중이 다니는 여학교를 열었지만, 양반들에게 무시당했다. 이 선교사들은 한글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1887년에서 1900년 사이에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다.[19] 1893년 1월, 네비우스 계획이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한국이 공식적으로 일본에 병합되자, 한국인들은 교육칙어와 천황의 신성함, 즉 현인신을 인정해야 했다. 일제강점기는 기독교 박해로 이어졌고, 기독교인들은 3·1 운동으로 절정에 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에 한국 민중은 일본으로부터 광복절을 쟁취했다.[20]

3. 3. 실천 지향성

민중신학은 이론적인 성찰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변혁을 위한 실천을 강조한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해방과 인간다운 삶을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할 것을 촉구한다.[22]

1970년대 민중신학자들은 한국 민중의 고난과 저항을 '민중사건'으로 신학화했다. 이들은 지식인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고난받는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보았다. 지식인들은 회개해야 할 자이며, '민중사건'을 증언하는 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민중운동은 지식인 명망가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기층대중의 역할은 미미했기에 이는 역설적인 실천론일 수 있다. 그러나 첫 민중신학자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인식하고, 기층대중의 고난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 뿐인 존재로서 자신들을 증언자로 고백했다.[20]

1980년대에는 노동자계급 중심의 계급투쟁이 '사건'의 실체로 여겨졌다. 변혁적 민중신학은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하여, 노동자계급 중심의 계급동맹에 참여하는 것을 강조했다. 이는 총체적인 사회/역사적 인식과 실천 프로그램을 갖는 '운동'으로 여겨졌다.

1990년대에는 '신사고'의 물결 속에서 다양한 실천들이 강조되었다. 민중신학은 국제적, 국가적, 지역적 콘텍스트와 계급적, 계층적, 계급·계층복합적 콘텍스트에 대한 인식을 통해 탈출구를 찾았다. 교회는 지역적이고 계급·계층복합적인 영역을 가지며, 기독교 사회운동은 다양한 유형으로 분포해야 한다. 신앙은 다양화된 주체 및 사회적 실천을 포괄하는 신학을 통해 해명되어야 한다.

3. 4. 비판적 성찰

민중신학은 한국 사회와 민중 운동의 변화 과정을 반영하며 발전해 왔다. 이는 민중신학이 한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대한 신학적 성찰임을 의미한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사회적 맥락에 상응하는 민중신학을 각각 제1세대와 제2세대 민중신학으로 구분하며, 90년대 이후의 새로운 사회적 맥락에 상응하는 민중신학을 제3세대 민중신학으로 규정할 수 있다.[22]

90년대에는 '신사고'라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이는 계급 투쟁이나 국가적 차원의 운동뿐만 아니라, 국제적 연대 운동(예: 평화 운동, 환경 운동)부터 지역 운동까지 다양한 실천들을 포괄한다. 이러한 '주체의 다양화'와 '주제의 다변화'는 90년대 민중신학의 현실을 반영한다.

민중신학은 이러한 변화를 수용해야만 '산 것에의 추구'라는 본래의 의미를 유지할 수 있다. '과연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역할을 했는가'라는 회의론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변화된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인식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국제적, 국가적, 지역적 맥락과 계급적, 계층적, 계급·계층 복합적 맥락에 대한 인식을 통해 민중신학은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회는 지역적이면서 계급·계층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다. 기독교 사회 운동은 기존의 국가적, 계급적 유형에서 벗어나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교회협의회와 같은 연합체는 국가적, 국제적이면서 동시에 계급·계층 복합적인 영역을 포괄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앙의 문제는 사회적 실천과 분리될 수 없다. 신앙은 다양화된 주체와 그들의 사회적 실천을 포괄하는 신학을 통해 해명되어야 한다. 민중 억압의 사회적 기제는 여전히 구조화되어 있으므로, 총체적인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인식 전망은 '열린 과제'로서 계속 추구되어야 한다.

민중신학은 Minjung theology라는 신학 용어가 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한국 고유의 신학이다.[22] 그러나 복음주의적인 한국 교회는 신학적 관점과 성경 해석의 차이로 인해 민중신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군사독재 정권과 기독교 근본주의를 옹호해 온 한국 교회는 군사독재에 반대하고 민중 편을 드는 민중신학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민중신학은 심한 탄압을 받았다.[22]

4. 영향과 의의

민중신학은 1950년대와 1960년대 한국 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소수의 개신교 교회에서 설교되었다. 이 신학은 박정희의 독재와 제3공화국 시대인 1970년대에 인기를 얻었다.

안병무서남동은 민중신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개신교 신학자들로, 전태일의 죽음 이후 민중운동에 합류한 기장(Kijang) 목사였다.[4] 김지하는 민중과 함께 고난을 겪는 한국의 예수를 묘사하여 민중 사상에 영감을 준 가톨릭 작가이자 예술가이다.[6] 안병무, 서남동, 현영학, 김용복은 1세대 민중신학자로 여겨진다.[7][8]

대한민국이 번영하면서, 후대 민중신학자들은 한국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이 누구인지 재평가해야 했다.[9] 박순경 등은 북한과의 통일 문제에 초점을 맞춰, 민중을 두 한국에서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로 규정했다.[10]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CPAJ)과 박창신 신부는 한국의 해방신학과 연관되어 있다.

신학은 주어진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하나님이 세상과 상호 작용하는 것에 대한 인간의 분석을 통해 발전하며, 기독교 신학은 주로 서구적 맥락에서 정의되고 표현되어 왔다. 민중신학은 하나님이 한국의 상황을 포함한 모든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 말씀하신다고 주장한다.[13] 민중신학 지지자들은 한국의 맥락이 성경 이야기와 여러 면에서 유사하며, 하나님이 성경 전체에서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편에 서 있다고 믿는다.[14]

호러스 뉴턴 앨런, 헨리 아펜젤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등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하층민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1893년 1월, 네비우스 계획이 채택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상류층보다는 노동 계층의 개종을 목표로 하는 것이 더 낫다.
  • 어머니가 미래 세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여성의 개종과 기독교 소녀의 훈련을 특별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
  •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자원이 없는 곳에서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성경의 명확한 번역본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한국 대중은 자신의 동포에 의해 그리스도께 인도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하기보다는 소수의 사람들을 전도자로 철저히 훈련시킬 것이다.


동학 농민 운동 동안, 민중은 "인간은 하늘이다"라는 믿음을 가졌고, 하층민은 역사의 주체였다. 그러나 1900년대 초 개신교 선교사들은 민중으로부터 멀어졌고,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개신교 교회는 민중의 정치적 억압보다 영혼 구원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한국인들은 교육칙어와 현인신을 인정해야 했다. 일제강점기는 기독교 박해로 이어졌고, 기독교인들은 탈출기를 통해 독립 투쟁의 맥락에서 성경을 해석하여 3·1 운동으로 절정에 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에 한국 민중은 일본으로부터 광복절을 쟁취했다.[20]

4. 1. 민주화 운동 기여

민중신학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는 권위주의적 정권의 주도로 급격한 경제 개발이 이루어졌지만, 사회 구성원 다수가 그 대가 분배 과정에서 배제되는 왜곡된 발전이 진행되었다.[4]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신학은 억압받는 민중의 고난에 대한 신학적, 신앙적 반성에서 출발하였다.

민중신학자들은 성서 속 '고난'의 현실을 '지금 여기'의 한국 민중의 삶에서 발견하고, 한국 민중의 고난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았다. 그들은 '권위주의적인 군부 독재정권'을 악마적인 체제로 규정하고,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민중 해방을 이룰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민중신학의 관점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중신학은 인권, 정의, 평등과 같은 민주주의 가치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특히, 전태일 열사의 죽음 이후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이 민중운동에 합류했다.[4] 안병무, 서남동과 같은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을 신학적 주제로 삼은 논문을 발표하고, 김지하와 같은 가톨릭 작가는 민중과 함께 고난을 겪는 한국의 예수를 묘사하여 민중 사상에 영감을 주었다.[6]

1970년대에 신학자들은 민중 해방이라는 주제를 탐구했고, 많은 이들이 박정희 정권과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억압받고 투옥된 사람들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대학교와 신학교에서 해임되었다.[11] 동학 농민 운동, 3·1 운동, 4·19 혁명과 같은 민중운동은 한국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여겨졌다.[12]

4. 2. 사회 변혁 운동 촉진

민중신학은 노동 운동, 농민 운동, 빈민 운동 등 다양한 사회 변혁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민중신학은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11] 1970년대 신학자들은 민중 해방이라는 주제를 탐구하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정권과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억압받고 투옥된 사람들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대학교와 신학교에서 해임되었다.[11]

민중신학자들은 한국 민중의 고난과 저항을 '민중사건'으로 신학화했다. 이들은 권위주의적인 군부 독재정권이 사회 밑바닥 계층을 생산/재생산하여 사회 전 영역에서 배제한다고 보았고, 민중 해방이 곧 악마적인 독재체제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생각했다. 제1세대 민중신학자들은 지식인이 아닌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보았으며, 자신들은 회개해야 할 자이자 '민중사건'의 '증언자'일 뿐이라고 여겼다.[4]

198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에 종사하는 20대 후반~30대 남성 노동자들에 의한 민중운동이 급속히 성장했으며, 농민, 도시 빈민 등 기층 대중의 운동도 크게 성장했다. 학생, 지식 노동자 등의 대중적 민중운동도 여전히 혹은 새롭게 발전했다. 이러한 변화된 상황에서 1970년대적 민중신학은 그 실효성을 점차 상실하고, '변혁적 민중신학' 혹은 '제2세대 민중신학'이라 불리는 경향이 등장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와의 결합을 통해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계급투쟁을 '사건'의 실체로 보았다.

1990년대에는 '신사고'의 물결 속에서 국제적 연대 운동, 지역 운동 등 다양한 실천들이 등장하고, 계층적, 계급·계층복합적 실천들이 '운동'이라는 세례명을 받게 되었다. 민중신학은 이러한 주체의 다양화와 주제의 다변화를 수용해야만 했다.

4. 3. 제3세계 신학 발전 기여

민중신학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 함께 제3세계 신학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민중신학은 제3세계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국제적인 연대를 강화했다.[13][14]

4. 4. 한국적 신학 정립

민중신학은 한국의 현실에 뿌리내린 한국적 신학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민중신학은 한국인의 삶과 문화, 종교적 전통을 반영한 독창적인 신학을 발전시켰다.[13] 민중신학 지지자들은 한국의 맥락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와 여러 면에서 유사하며, 하나님이 성경 전체에서 명백히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편에 서 있다고 믿는다.[14]

1975년 김찬국, 김동길의 출소를 기념하는 3.1절 예배의 강연에서 안병무는 '민중'이라는 용어를 신학 작업의 핵심 틀로서 공식적으로 활용하였고, 같은 해 4월 서남동은 동일한 맥락에서 '민중의 신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그리고 1979년 한국에서 열린 CCA 신학협의회에서 이러한 경향의 신학을 총칭하는 용어로서 '민중신학'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호러스 뉴턴 앨런, 헨리 아펜젤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같은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하층민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1893년 1월, 네비우스 계획이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채택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상류층보다는 노동 계층의 개종을 목표로 하는 것이 더 낫다.
  • 어머니가 미래 세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여성의 개종과 기독교 소녀의 훈련을 특별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
  •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자원이 없는 곳에서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성경의 명확한 번역본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한국 대중은 자신의 동포에 의해 그리스도께 인도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하기보다는 소수의 사람들을 전도자로 철저히 훈련시킬 것이다.


동학 농민 운동 동안, 민중은 "인간은 하늘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하층민은 단순히 행동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였다. 그러나 1900년대 초에 개신교 선교사들은 민중으로부터 멀어졌고,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개신교 교회는 더 이상 민중의 정치적 억압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영혼 구원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한국이 공식적으로 일본에 병합되자, 한국인들은 교육칙어와 천황의 신성함, 즉 현인신을 인정해야 했다. 일제강점기는 기독교 박해로 이어졌고, 기독교인들은 탈출기 이야기를 통해 독립 투쟁의 맥락에서 성경을 해석하기 시작하여 3·1 운동으로 절정에 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에 한국 민중은 일본으로부터 광복절을 쟁취했다.[20]

5. 비판과 과제

민중신학은 신학 용어(Minjung theology)가 있을 정도로 세계 교회에서 주목받은 한국 교회 고유의 신학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적인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신학적 관점과 성경 해석의 차이로 인해 민중신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군사독재에 반대하고 민중의 편을 드는 민중신학은 군사독재정권과 기독교 근본주의를 옹호해온 한국 교회에서 탄압받았으며, 소수 신학자들에 의해 겨우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22]

민중신학은 다음과 같은 비판과 과제를 안고 있다.


  • 엘리트주의 비판: 사이먼 찬은 민중신학이 민중의 실제 신념을 무시하는 엘리트적 해석이라고 비판했다.[21]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엘리트주의 비판' 참조)
  • 이념 편향성 비판: 민중신학은 마르크스주의와의 연관성 때문에 보수적인 시각에서 이념 편향성 비판을 받는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변혁적 민중신학'은 마르크스주의와의 결합을 시도하며, '민중'을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해석하여 좌편향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22]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이념 편향성 비판' 참조)
  • 현실 적합성 문제: 1990년대 '신사고' 물결과 함께 민중신학은 '주체의 다양화'와 '주제의 다변화'라는 현실을 맞이하게 되었다.[22]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면 민중신학은 실체를 잃고 명목만 남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현실 적합성 문제' 참조)

5. 1. 엘리트주의 비판

사이먼 찬은 저서 《풀뿌리 아시아 신학》에서 민중신학이 민중의 실제 신념을 무시하는 엘리트적 해석이라고 비판했다.[21]

5. 2. 이념 편향성 비판

민중신학은 마르크스주의와의 연관성 때문에 보수적인 시각에서 이념 편향성 비판을 받는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변혁적 민중신학' 혹은 '제2세대 민중신학'이라 불리는 경향은 마르크스주의와의 결합을 시도하며, '민중'을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해석하고, 지배체제를 제국주의 세력과 국내 자본가 세력의 결합으로 보았다.[22] 이러한 관점은 민중신학이 지나치게 좌편향적이며,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어 있다는 비판을 낳았다.

보수 기독교 언론인 《Christian Today》는 민중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기사를 게재했다.

  • 박현숙은 민중신학을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개인의 죄보다는 집단적 죄와 구조적 폭력에 더 관심을 가지며, 영원한 내세보다는 물질 세계에 더 관심을 가지며, 다른 집단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더 선호하고, LGBT+ 사람들을 옹호하는 점을 비판했다.
  • 김진영은 민중신학의 주창자들이 하나님보다 김일성, 해방, 노동을 우선시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한 민중신학을 주체사상과 비교했다.
  • 이영진은 민중신학이 하나님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5. 3. 현실 적합성 문제

1990년대 '신사고' 물결과 함께 민중신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전까지 프롤레타리아 중심의 단일한 운동(계급투쟁)이 국가적 범위에서 주로 논의되었지만(예: 민주화, 민족 해방), 신사고는 평화 운동, 환경 운동과 같은 국제적 연대 운동부터 지역 운동까지 다양한 실천을 포괄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민중신학에 '주체의 다양화'와 '주제의 다변화'라는 현실을 안겨주었다.[22]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지 않으면 민중신학은 그 실체를 잃고 명목만 남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지금까지 민중이라던, 역사 구원의 주체라던 그들이 언제 그런 역할을 했으며, 그럴 가능성이라도 있는가'라는 회의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변화된 콘텍스트 인식, 즉 국제적, 국가적, 지역적 콘텍스트와 계급적, 계층적, 계급·계층복합적 콘텍스트에 대한 인식이 탈출구로 제시되었다.

예를 들어, 교회는 지역적이면서 계급·계층복합적인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기독교 사회운동은 기존의 국가적, 계급적 유형에서 벗어나 다양한 영역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또한, 연합체로서의 '교회'(예: 교회협의회)는 국가적, 국제적이면서 동시에 계급·계층복합적인 영역을 포괄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실천과 분리되지 않는 신앙 담론이 중요하며, 다양화된 주체와 그들의 사회적 실천을 포괄하는 신학을 통해 신앙의 문제가 해명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민중 억압의 사회적 기제들이 여전히 구조화되어 있기에, 총체적인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인식 전망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이는 앞으로 계속 해명되어야 할 '열린 과제'로 남게 되었다.

5. 4. 과제

90년대에는 '신사고'라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이는 기존의 계급투쟁 중심, 국가적 범위의 운동(예: 민주화 운동, 민족 해방)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단 하나'나 '만'과 같은 배타적인 용어를 해체한다. 대신 국제적인 연대 운동(예: 평화 운동, 환경 운동)부터 지역 운동까지, 그리고 다양한 계층의 복합적인 실천들에 '운동'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즉, 90년대는 국가적, 계급적 영역뿐 아니라 국제적, 지역적, 계층적 영역으로 지평이 확대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민중신학은 실천 주체와 주제가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신사고'의 시대는 새로운 과제를 부여했다. '주체의 다양화'와 '주제의 다변화'는 90년대 민중신학의 현실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민중신학은 그 실체를 잃게 된다. '과거 민중이라 불리던 이들이 역사 구원의 주체 역할을 했는가, 그럴 가능성은 있는가'라는 회의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주장이 역사 속에서 검증되지 않으면 실천 이론으로서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다행히 변화된 상황 인식은 국제적, 국가적, 지역적, 그리고 계급적, 계층적, 계급·계층 복합적 상황에 대한 인식을 통해 탈출구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교회는 지역적이면서 계급·계층 복합적이다. 기독교 사회운동은 기존의 국가적, 계급적 유형에서 다양화하여, 국제적, 국가적, 지역적 영역과 계급적, 계층적, 계급·계층 복합적인 영역이 교차하는 다양한 유형에 분포해야 한다. 또한 연합체로서의 '교회'(예: 교회협의회)는 국가적이거나 국제적이면서 동시에 계급·계층 복합적인 영역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신앙의 문제는 사회적 실천과 분리된 담론으로 발전해서는 안 된다. 신앙은 다양화된 주체 및 그러한 주체의 사회적 실천을 포괄하는 신학을 통해 해명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신앙의 '신비'는 민중신학에 걸맞은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비록 당장은 전망이 불투명하더라도, 총체적인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인식 전망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민중 억압의 사회적 기제들은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인식은 이미 확정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해명되어 가야 할 '열린 과제'이다. 그리고 그것이 해명되어 가는 과정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자세로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6. 주요 인물

1975년 김찬국, 김동길의 출소를 기념하는 3.1절 예배 강연에서 안병무는 '민중'이라는 용어를 신학 작업의 핵심 틀로 공식적으로 활용하였고, 같은 해 4월 서남동은 동일한 맥락에서 '민중의 신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22] 1979년 한국에서 열린 CCA 신학협의회에서는 이러한 경향의 신학을 총칭하는 용어로 '민중신학'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안병무, 서남동, 현영학, 김용복은 1세대 민중신학자로 여겨진다.[7][8] 김지하는 가톨릭 작가이자 예술가로, 민중과 함께 고난을 겪는 한국의 예수를 생생하게 묘사하여 민중 사상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6]

대한민국이 더욱 번영하면서, 후대 민중신학자들은 한국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이 누구인지 재평가해야 했다.[9] 박순경 등 많은 민중신학자들은 북한과의 통일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민중을 두 한국 모두에서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로 규정했다.[10]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CPAJ)과 박창신 신부는 한국의 해방신학과 연관되어 있다.

6. 1. 안병무

안병무는 민중신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민중'이라는 용어를 신학적으로 정립하고 민중신학의 기초를 닦았다.[4] 1972년 "예수와 민중"이라는 제목으로 민중을 신학적 주제로 삼은 첫 번째 논문을 썼으며,[5] 1975년 김찬국, 김동길의 출소를 기념하는 3.1절 예배 강연에서 '민중'이라는 용어를 신학 작업의 핵심 틀로 공식적으로 사용했다.[22]

안병무는 예수를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의 편에 선 메시아로 해석하고, 민중의 관점에서 성서를 재해석했다. 그는 민중신학의 가장 큰 옹호자로 여겨진다.

6. 2. 서남동

서남동안병무와 함께 민중신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1975년 4월, 서남동은 '민중의 신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며, 민중의 고난과 한을 신학적으로 성찰하고 민중 해방을 위한 실천을 강조했다.[4] 그는 한국 민중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결 지어, 민중의 고난이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해방 사건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제1세대 민중신학자들은 권위주의적인 군부 독재정권이 사회 밑바닥 계층을 억압하고 배제한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민중 해방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보았고, 지식인은 민중 사건을 증언하는 역할만 할 뿐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생각은 '민중의 눈으로 신학하기'라는 표현으로 나타났다.

6. 3. 김용복

김용복은 민중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 중 한 명으로, 민중신학을 체계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민중신학을 제3세계 신학과 연결하여 국제적인 연대를 강화하는 데에도 힘썼다.[7][8]

6. 4. 현영학

현영학은 안병무, 서남동, 김용복과 함께 민중신학 1세대 신학자로 꼽힌다.[7][8] 이들은 1970년대 박정희의 독재와 제3공화국 시대에 민중신학을 발전시키며, 전태일의 죽음 이후 민중운동에 참여했다.[4]

1세대 민중신학자들은 한국 민중의 고난과 저항을 '민중사건'으로 신학화하고, 자신들은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그리스도 사건'의 '증언자'라고 보았다. 이들은 민중의 눈으로 신학을 바라보며, 지배자의 시각으로 쓰인 '정통신학'을 해체하고자 했다.

현영학을 비롯한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을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며,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로 정의했다.[15] 이들은 민중의 한에 주목하며, 성경 속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과 한국 민중을 연결시켰다.[15][14]

6. 5. 김지하

김지하는 가톨릭 작가이자 예술가로, 민중과 함께 고난받는 한국의 예수를 묘사하여 민중 사상에 큰 영감을 주었다.[6] 그는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한국의 현실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여, 민중의 고난과 해방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했다.

참조

[1] 간행물 Minjung Theology https://www.saet.ac.[...] 2023-01-01
[2] 서적 1983-01-01
[3] 서적 1985-01-01
[4] 서적 2014-01-01
[5] 서적 2013-01-01
[6] 서적 2014-01-01
[7] 서적 2010-01-01
[8] 간행물 Minjung Theology https://www.saet.ac.[...] 2023-01-01
[9] 간행물 Minjung Theology https://www.saet.ac.[...] 2023-01-01
[10] 서적 2014-01-01
[11] 서적 1985-01-01
[12] 서적 1985-01-01
[13] 서적 1985-01-01
[14] 서적 1985-01-01
[15] 서적 1985-01-01
[16] 서적 1985-01-01
[17] 서적 1985-01-01
[18] 서적 1985-01-01
[19] 서적 1985-01-01
[20] 서적 1985-01-01
[21] 서적 2014-01-01
[22] 서적 깨어지는 한국교회 인물과 사상사 2013-07-0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