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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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처선은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7명의 왕을 보필한 환관이다. 여러 차례 관직 삭탈과 유배를 겪었으나 복직되었으며, 성종 때 대비의 병을 치료한 공으로 정2품 자헌대부가 되었다. 연산군이 음란한 행위를 하자 직언하다가 처형당했으며, 사후에는 부관참시를 당하고 이름 사용이 금지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연산군 폐위 후 충신의 정문이 내려져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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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처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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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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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안동 김씨 |
자 | 입지(立之) |
최종 관직 | 상선(尙膳) |
생애 | |
출생 | 1433년 |
사망 | 1505년 (72세) |
가족 관계 | 슬하 2남 |
주요 활동 | 조선의 환관 |
관직 | |
주요 보직 | 내시(內侍) 상선(尙膳) |
2. 생애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일곱 명의 왕을 섬긴 내시이다. 관직 생활 동안 몇 차례 관직 삭탈과 유배를 겪기도 했으나, 1460년(세조 6년) 원종공신 3등에 기록되고 성종 때에는 대비의 병을 간호한 공으로 정2품 자헌대부에 오르는 등 공적을 인정받았다.
1505년(연산군 11년), 연산군의 부적절한 행동을 보고 직간하다가 왕의 분노를 사 처형당했다. 사후 그의 가족과 관련된 모든 것이 극심한 탄압을 받았으며, 그의 이름에 쓰인 글자 사용이 금지되는 등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1751년(영조 27년)에 이르러서야 충신으로 공식 인정받아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복권되었다.
2. 1. 관직 생활과 파란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일곱 명의 왕을 섬겼다. 관직 생활 중 몇 차례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1460년(세조 6년)에는 원종공신 3등에 이름을 올렸으며, 성종 때에는 대비의 병을 치료하는 데 공을 세워 정2품 자헌대부에 올랐다.1505년(연산군 11년), 연산군이 궁중에서 자신이 창안한 처용희를 열고 음란한 행동을 벌이자, 김처선은 이를 강하게 비판하며 직간했다. 그는 "이 늙은 신이 일곱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지만 고금에 상감과 같은 행동을 하는 이는 없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연산군의 잘못을 지적했다. 이에 격분한 연산군은 직접 김처선의 다리와 혀를 자르고 잔인하게 살해했다.
김처선 사후에도 연산군의 탄압은 이어졌다. 그의 부모 묘는 파헤쳐졌으며, 그의 이름에 쓰인 '처'(處)와 '선'(善) 두 글자의 사용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이 때문에 전국의 '김처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개명을 강요당했고, 절기인 처서는 '조서'(徂暑)로, 처용무는 '풍두무'(豊頭舞)로 이름이 바뀌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큰 혼란이 있었다. 또한 공식 문서에서도 그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쓸 수 없게 되었고, 본관인 전의(全義)마저 폐지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의 양아들 이공신 역시 처형당했으며, 부인 서씨와 며느리는 노비로 전락했다.
연산군이 폐위된 후인 1512년(중종 7년), 김처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의 행적을 《속삼강행실》에 수록하려 했으나, 당시 환관 세력의 강화를 우려한 중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1751년(영조 27년) 2월 3일에 이르러서야 나라에서 충신에게 내리는 정문(旌門)이 내려져 그의 공적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2. 2. 연산군과의 갈등과 최후
1505년(연산군 11년), 연산군은 궁중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처용희(處容戱)라는 연회를 열고 음란한 행동을 벌였다. 이를 본 김처선은 연산군에게 "이 늙은 신이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지만 고금에 상감과 같은 짓을 하는 이는 없었습니다."라고 직언하며 강하게 비판했다.이에 격분한 연산군은 직접 김처선의 다리와 혀를 자르고 잔인하게 죽였다. 연산군의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처선이 죽은 뒤 그의 부모 묘를 파헤치고, 그의 이름에 쓰인 '처'(處)와 '선'(善) 두 글자의 사용을 엄격히 금지했다. 이 때문에 전국의 모든 관리와 백성들은 이 글자를 쓸 수 없게 되었고, '김처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강제로 개명해야 했다. 또한 절기인 처서(處暑)는 '조서'(徂暑)로, 처용무(處容舞)는 '풍두무'(豊頭舞)로 이름이 바뀌었다. 심지어 문서에서도 그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그의 본관인 전의(全義) 지역까지 폐지되는 등 극심한 수난을 겪었다. 그의 양아들 이공신(李公信) 역시 죽임을 당했고, 부인 서씨와 며느리는 노비로 전락했다.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후, 1512년(중종 7년)에 김처선의 충절을 기려 그의 행적을 《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에 수록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환관 세력의 강화를 우려했던 중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그의 충심을 기리겠다고 하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인 1751년(영조 27년) 2월 3일에 이르러서야 나라에서 충신의 정문(旌門)을 내려 그의 공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복권시켰다.
2. 3. 사후 탄압과 복권
1505년(연산군 11)에 연산군이 궁중에서 자신이 창안한 처용희(處容戱)를 베풀고 음란한 행동을 벌이자, 김처선은 "이 늙은 신이 일곱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지만 고금에 상감과 같은 짓을 하는 이는 없었다"고 직언하였다가 연산군에게 직접 다리와 혀를 잘리고 활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김처선 사후 연산군의 탄압은 가혹했다. 그의 부모 묘는 파헤쳐졌으며, 이름에 쓰인 '처(處)'와 '선(善)' 두 글자의 사용이 엄격히 금지되어 모든 관리와 백성이 쓸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전국의 '김처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개명을 강요당했고, 절기인 처서(處暑)는 '조서'(徂暑)로, 춤인 처용무(處容舞)는 '풍두무'(豊頭舞)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한 공문서 등에서도 그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쓰지 못하게 했으며, 그의 본관인 전의(全義) 역시 폐지되는 등 극심한 수난을 겪었다. 그의 양아들 이공신(李公信)도 처형당했으며, 부인 서씨와 며느리는 노비로 전락했다.
연산군이 폐위된 후, 1512년(중종 7) 김처선의 충절을 기려 그의 행적을 ''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에 수록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환관 세력의 강화를 우려한 중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인 1751년(영조 27) 2월 3일에 이르러서야 나라에서 충신의 정려(旌閭)를 내려 그의 공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3. 가족 관계
- 부인 : 정부인 서씨(徐氏)
- 양아들 : 이공신(李公信)
4. 김처선을 다룬 작품
김처선의 삶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다루어졌다. 특히 연산군과의 관계 및 그의 충언은 극적인 소재로 자주 활용되었다.
4. 1. 드라마
- 설중매 (MBC, 1984년~1985년) - 박규채 분
- 한명회 (KBS, 1994년) - 이계영 분
- 장녹수 (KBS, 1995년) - 이낙훈 분
- 임꺽정 (SBS, 1996년~1997년) - 장인한 분
- 왕과 비 (KBS, 1998년~2000년) - 김성환 분
- 왕과 나 (SBS, 2007년~2008년) - 오만석, 주민수 분
- 인수대비 (JTBC, 2011년~2012년) - 맹상훈 분
4. 2. 시사교양
4. 3.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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