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나가사와 마쓰다이라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는 마쓰다이라 지카우지의 손자인 마쓰다이라 지카노리를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중첩된 인연을 통해 마쓰다이라 씨족 내에서 유력한 가문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오케하자마 전투에서의 사망, 노부야스 할복 사건으로 인한 세력 쇠퇴, 후계자 단절 등으로 인해 가문의 존속이 위협받았다. 이후 가문 재건을 위한 노력을 통해 막부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며, 막말에는 다다토시가 문무에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에치고 나가오카 번의 마키노 씨 가신인 이마이즈미 씨도 이 가문의 지류로 여겨진다. 또한, 오코치 마쓰다이라가는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문에서 분가되어 다이묘 가문으로 성장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나가사와 마쓰다이라씨 - 이로하히메
    이로하히메는 다테 마사무네와 아이히메 사이에서 태어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계략으로 마쓰다이라 다다테루와 결혼했으나 이혼 후 센다이에서 여생을 보낸 인물로, 미모와 총명함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독교 신앙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고 대중문화 작품에도 등장한다.
  • 나가사와 마쓰다이라씨 - 다카다번
    다카다번은 에치고국에 위치했던 번으로, 마쓰다이라 다다테루가 다카다 성을 건설하며 시작되어 여러 다이묘 가문이 통치하다가 사카키바라 씨를 거쳐 폐번치현되었고, 간분 대지진과 에치고 소동, 보신 전쟁 등의 사건을 겪었다.
  • 마쓰다이라씨 - 마쓰다이라 노부미쓰
    마쓰다이라 노부미쓰는 무로마치 시대 마쓰다이라 씨의 당주로서 사료에서 실존이 확인되는 최초의 인물이며, 가문 기반을 다지고 세력을 확장하여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고, 많은 자녀를 통해 도쿠가와 막부의 기반을 닦았다.
  • 마쓰다이라씨 - 고이 마쓰다이라가
    고이 마쓰다이라가는 미카와국 고이 지역을 발상지로 하는 마쓰다이라 씨의 지류로, 마쓰다이라 타다카게를 시조로 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에도 시대에 요리아이 가문으로 성장했고, 이후 분가에서는 막신과 봉행 등을 배출했다.
나가사와 마쓰다이라가
개요
가명나가사와 마쓰다이라가 (長沢松平家)
가문 문장꽃정자 (花丁字, Hanachoji)
본성자칭 청화 겐지
시조마쓰다이라 친노리
유형무가
신분사족 - 적류
작위화족 (남작) - 마쓰다이라 마사나오 가문
출신지미카와국호이군나가사와
근거지미카와국 호이군 나가사와
주요 인물
지류

2. 비(非) 오코치계 나가사와 마쓰다이라가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는 마쓰다이라 종가의 초대 마쓰다이라 지카우지의 손자인 3대 마쓰다이라 노부미쓰의 아들 지카노리를 시조로 한다.[1] 본거지는 나가사와 성이었는데, 현재의 도요카와 시립 나가사와 초등학교(아이치 현 도요카와 시 나가사와 정) 주변에 위치했지만, 국도 1호선 건설로 인해 성의 언덕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다.[1]

방계인 마쓰다이라 기요나오는 마쓰다이라 다다테루의 가신이었으나, 다다테루가 개역된 후 낭인이 되었다. 그러나 1618년 5월에 쇼군가에 소환되어 미카와국 호이군 가타하라에 5,000석의 영지를 받아 교다이요리아이가 되었지만, 손자인 노부자네 대에 무사히 단절되었다.[1]

기요나오의 동생 마쓰다이라 마사요도 다다테루를 섬겼지만, 다다테루 개역 후 에치젠 마쓰다이라가에 등용되어, 자손은 에치젠국 후쿠이번 중신 마쓰다이라 주마가로 존속했다. 이 분가인 마쓰다이라 마사나오는 아이즈 정벌에서 전공을 세워, 메이지 유신 이후 미야기현 지사, 구마모토현 지사, 내무 차관, 귀족원 칙선 의원 등을 역임한 공적으로 화족(남작)에 서임되었다.[1]

마사요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당주
마쓰다이라 마사요
마사아키
마사쓰네
마사무라(마사카츠)
마사쓰네(재습)
마사아키 (마사반)
마사유이
마사사토
마사요시
마사카타
마사카즈



에치고 나가오카번 마키노가의 가로·이마이즈미가도 나가사와 마쓰다이라가의 서류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1]

2. 1. 초기 역사와 쇠퇴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는 마쓰다이라 지카우지의 손자이자 마쓰다이라 노부미쓰의 아들인 지카노리를 시조로 한다. 본거지는 나가사와 성이었으며, 이 성은 현재의 도요카와 시립 나가사와 초등학교(아이치 현 도요카와 시 나가사와 정) 주변에 위치했지만, 국도 1호선 건설로 인해 성의 언덕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다.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는 기요야스, 히로타다, 이에야스 3대에 걸쳐 중연(重縁)을 맺어 마쓰다이라 지류 중에서도 유력한 가문으로 주목받았다. 7대 마사타다의 처는 기요야스의 딸 우스이히메(薄井姫)였고, 8대 야스타다의 처는 히로타다의 딸 야다히메(矢田姫)였다.

그러나 마사타다는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전사하고, 야스타다는 노부야스의 가로가 되었으나 노부야스의 할복 사건으로 이에야스의 책망을 받아 은거, 이후 교토에서 생을 마쳤다. 야스나오는 이에야스의 조카로서 무사시 후카야 1만 석을 받았지만, 25세에 후계자 없이 요절하여 가문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이에야스는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의 명맥을 잇기 위해 자신의 아들인 마쓰치요와 다다테루에게 가문을 계승하게 했다. 하지만 마쓰치요는 요절하고, 다다테루는 아버지 이에야스의 노여움을 사 1616년(겐나 2년)에 히데타다에 의해 가이에키(改易)되어 절가(絶家)되었다.

이후 야스타다의 딸과 지족인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사이에서 태어난 나오노부를 양자로 들여 가문을 유지했다. 그 후 친척 다이묘와 하타모토들의 신세를 지면서 에도와 미카와의 재지를 왕복하며 쇼군 가에 가문 재흥을 요청했지만 쉽게 허락받지 못했다.

1719년(교호 4년), 마사오키의 아들 지카타카가 신상서(申上書)를 성문 앞에 버리는 목숨을 건 수단을 통해 막부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인지된 후에는 5년에 한 번 참부(参府)하여 헌상품을 바치고 데이칸노마(帝鑑間)에서 알현을 거듭했지만, 가록(家禄)은 얻을 수 없었다. 막부로부터 나카네 촌(中根村)에 11정보의 잔디밭(후에 선조의 땅인 나가사와 촌과 토지를 교환함)을 받고, 전답의 개발과 저택의 건축 비용으로 백은 백매를 받았지만, 불안정한 상태였다.

1834년(덴포 5년), 다다미치 때에 겨우 열 명분의 녹미를 받았고, 1859년(안세이 6년)에는 기리마이(切米) 3백 섬으로 가증되어 정식으로 막신이 되어 고타이요리아이(交代寄合)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1866년(게이오 2년)에는 3백 석의 영지로 옮겨 유신을 맞이했다.

막말의 당주 다다미치의 동생 다다토시는 문무에 뛰어난 인물로, 고부쇼(講武所)의 검술사범에 임명되고, 와카에도 뛰어나 가쓰 가이슈도 다다토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다다토시는 로시구미(浪士組)·신초구미(新徴組) 등에서 중역을 맡았으며, 나가사와 마쓰다이라의 종가인 것과 마쓰다이라 다다테루의 후예라는 것을 꽤 의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다토시는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의 부흥을 위해 죠슈 정벌군에 몸을 맡겼지만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유신 후에는 궁내성에 출사했다. 다다토시의 뒤는 형 다다미치의 아들 다다노리가 계승해 그의 자손은 나가사와 현지에 지금도 거주하고 있다.

2. 2.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계

이에야스의 3대 시대는 마쓰다이라 지류 가운데서도 유력한 가문으로 주목받으며 중연(重縁)을 맺었다. 7대 마사타다의 처는 기요야스의 딸 우스이히메(薄井姫, 마사타다 전사 후는 사카이 다다쓰구와 재혼)이며, 8대 야스타다의 처는 히로타다의 딸 야다히메(矢田姫)였다. 이를 보아 다른 지류에 비해 중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사타다는 오케하자마에서 전사하고, 야스타다는 이에야스의 장남 오카자키사부로 노부야스의 가로가 되었지만 노부야스의 할복으로 이에야스의 책망을 받아 은거, 이후 교토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생을 마쳤다. 또 야스나오는 이에야스의 조카로 간토 입국 후 무사시 후카야 1만 석을 받았지만, 25세에 후계자 없이 요절하여 가명이 끊겼다.

이에 이에야스는 나가사와 마쓰다이라의 가명을 아까워하여 자식인 마쓰치요·가즈사노스케 다다테루에게 그 가명을 계승하게 했다. 하지만 마쓰치요는 요절하고, 다다테루는 아버지 이에야스의 노여움을 사 1616년(겐나 2년)에 다다테루의 배다른 형인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 의해 가이에키(改易) 후 절가(絶家) 되었다. 그리하여 나가사와 마쓰다이라의 가명은 단절되고 하찮은 하타모토로 남게 되었다.

2. 3. 가문 재건 노력과 막신(幕臣) 지위 회복

마쓰다이라 마사타다가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전사하고, 8대 야스타다가 오카자키사부로 노부야스 할복 사건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책망을 받아 은거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야스나오는 이에야스의 조카로서 무사시 후카야 1만 석을 받았으나 후계자 없이 요절하여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야스는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문을 아껴 자식인 마쓰치요와 가즈사노스케 다다테루에게 가문을 계승하게 했다. 그러나 마쓰치요는 요절하고, 다다테루는 1616년(겐나 2년)에 아버지 이에야스의 노여움을 사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 의해 가이에키(改易)되어 절가(絶家)되었다.

야스나오 사후, 야스타다는 교토에서 은거 생활을 하며, 딸과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 이치로우에몬 나오노부를 양자로 들여 가문을 유지했다. 나오노부는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 종가로부터 받은 문서와 하사품, 은거 영지를 양도받았다.

이후 나오노부의 후손들은 친척 다이묘와 하타모토들의 신세를 지면서 에도와 미카와의 재지를 왕복하며 쇼군 가에 가문 재흥을 요청했다. 1719년(교호 4년), 마사오키의 아들 지카타카가 신상서를 성문 앞에 버리는 목숨을 건 행동을 통해 막부의 인정을 받았다.

인지 후 5년에 한 번 참부(参府)하여 헌상품을 바치고 데이칸노마(帝鑑間)에서 알현했지만, 가록(家禄)은 얻지 못했다. 막부로부터 나카네 촌(中根村)에 11정보의 잔디밭(후에 선조의 땅인 나가사와 촌과 교환)과 전답 개발 및 저택 건축 비용으로 백은 백매를 받았으나 불안정한 상태였다.

1834년(덴포 5년), 다다미치 때 열 명분의 녹미를 받았고, 1859년(안세이 6년)에는 기리마이(切米) 3백 섬으로 가증되어 정식 막신이 되어 고타이요리아이(交代寄合)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1866년(게이오 2년)에는 3백 석의 영지로 옮겨 유신을 맞이했다.

막말의 당주 다다미치의 동생 다다토시는 고부쇼 검술사범, 로시구미(浪士組)·신초구미(新徴組) 중역을 맡는 등 문무에 뛰어났으며, 와카에도 능해 가쓰 가이슈에게 가르침을 주기도 했다. 다다토시는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문의 부흥을 위해 죠슈 정벌군에 참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유신 후 궁내성에 출사했다.

다다토시의 뒤는 형 다다미치의 아들 다다노리가 계승했고, 그의 자손은 나가사와 현지에 현재도 거주하고 있다.

2. 4. 막말(幕末)의 활약

1834년(덴포 5년), 다다미치 때에는 겨우 열 명분의 녹미를 받았고, 아우 다다토시가 고부쇼(講武所)에서 임시로 근무했다. 1859년(안세이 6년)에는 기리마이(切米) 3백 섬으로 가증되고, 정식으로 막신이 되어 고타이요리아이(交代寄合)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1866년(게이오 2년)에는 3백 석의 영지로 옮겨, 유신을 맞이했다.[1]

막말의 당주 다다미치의 동생 다다토시는 문무에 뛰어난 준재로, 고부쇼의 검술사범에 임명되었고, 와카에도 뛰어나 가쓰 가이슈도 다다토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에는 로시구미(浪士組)·신초구미(新徴組) 등에서 중역을 맡았지만, 통칭을 지카노스케(主税助)에서 선조 다다테루와 같은 가즈사노스케로 고치는 등, 나가사와 마쓰다이라의 종가인 것과 마쓰다이라 다다테루의 후예라는 것을 꽤 의식하고 있었다.[1]

다다토시는 그 후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의 부흥을 바라여 고부쇼에서의 자리를 내팽개치고, 오와리도노(尾張殿)의 막하로 들어가 죠슈 정벌군에 몸을 맡겼지만, 소망을 완수하지 못했다. 유신 후는 와카에 밝은 사람으로서 궁내성에 출사했다.[1]

다다토시의 뒤는 형 다다미치의 아들 다다노리가 계승해 그의 자손은 나가사와 현지에 지금도 거주하고 있다.[1]

2. 5. 메이지 유신 이후

1866년(게이오 2년) 3백 석의 영지로 옮겨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다.

막말의 당주 다다미치의 동생 다다토시는 문무에 뛰어난 인재로, 고부쇼의 검술사범으로 임명되었고, 와카에도 능하여 가쓰 가이슈도 다다토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로시구미, 신초구미 등에서 중책을 맡았지만, 통칭을 지카노스케(主税助)에서 선조 다다테루와 같은 가즈사노스케로 고치는 등,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종가 및 마쓰다이라 다다테루의 후예임을 강하게 의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다토시는 이후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문의 부흥을 위해 고부쇼의 직책을 버리고 오와리도노의 막하로 들어가 조슈 번 정벌군에 참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유신 이후에는 와카에 능통한 점을 인정받아 궁내성에 출사했다.

다다토시의 뒤는 형 다다미치의 아들 다다노리가 이었으며, 그의 자손들은 나가사와 현지에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2. 6. 역대 당주 (비 오코치계)


  • 마쓰다이라 노부미쓰
  • 마쓰다이라 지카노리
  • 마쓰다이라 지카마스
  • 마쓰다이라 지카키요
  • 마쓰다이라 가쓰무네
  • 마쓰다이라 가즈타다
  • 마쓰다이라 지카히로
  • 마쓰다이라 마사타다
  • 마쓰다이라 야스타다
  • 마쓰다이라 야스나오
  • 마쓰다이라 마쓰치요
  •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2. 6. 1. 본가 (비 오코치계)

마쓰다이라 종가 3대 마쓰다이라 노부미쓰의 11남(이설 있음) 지카노리를 시조로 한다. 본거지는 나가사와성이었다. 이 나가사와성은 현재 도요카와 시립 나가사와 초등학교(아이치현 도요카와시 나가사와초 글자 고신) 주변이다. 현재는 구 도카이도 확장을 위한 국도 1호선 건설로 인해 성의 언덕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다.

저명한 인물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촌 마쓰다이라 야스다다가 있다. 야스다다는 많은 전공을 세워 도쿠가와 16신장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분로쿠 2년(1593년), 야스다다의 아들 마쓰다이라 야스나오가 후사 없이 병사했기 때문에, 이에야스의 일곱째 아들 쇼치요를 양자로 맞아 가문을 유지하려 했다. 그 쇼치요가 요절하자, 이번에는 이에야스의 여섯째 아들(쇼치요의 동복 형)을 새로운 양자로 삼았다. 이가 바로 마쓰다이라 다다테루이다. 단, 쇼치요를 거치지 않고 다다테루가 직접 계승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다테루를 양자로 맞아 번영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짧은 기간에 불과했고, 겐나 2년(1616년), 다다테루는 이복 형인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 의해 개역되었다. 나가사와 마쓰다이라가의 가문은 단절되고 말았다.

다만, 다다테루의 개역 후에도 나가사와 마쓰다이라가의 혈통은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도 막부는 좀처럼 이 가문을 인정하지 않았고, 교호 4년(1719년)에야 비로소 나가사와 마쓰다이라가로 인지했다. 덴포 5년(1834년)에 십인 부치가 되어 겨우 막신으로서 녹봉을 받았다. 막말 시대의 당주 마쓰다이라 다다토시(주세스케)는 로시구미의 이사가 되었다.

2. 6. 2. 절가 이후 야스타다의 양자 나오노부계

마쓰다이라 야스타다의 양자인 마쓰다이라 나오노부 계보는 다음과 같다.

마쓰다이라 노부시게는 간세이 중수 제보 및 가전의 계보와 계도에 따르면 마쓰다이라 지카키요의 차남으로 여겨지지만, 나카시마 지타로 저 『마쓰다이라 다다테루와 가신단』에서는 마쓰다이라 야스다다의 근친자일 가능성도 지적하고 있다. 마사노부 이후 성은 나가사와가 된다. 사카이 다다야스 대에 구마가야(마에바시) 번히메지로 전봉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계도는 히메지 시 성곽 연구실 소장 자료 및 젠도지(히메지시)의 과거장에 따랐다. 또한, 메이지 이후에는 호적부에 따른다.

2. 6. 3. 기타 분가

방계인 마쓰다이라 기요나오는 마쓰다이라 타다테루의 부가로를 맡았으나, 타다테루가 개역된 후 낭인이 되었다. 그러나 1618년 5월에 쇼군가에 소환되어 미카와국 호이군 가타하라에 5,000석의 영지를 받아 교다이요리아이가 되었지만, 손자인 노부자네 대에 무사히 단절되었다.

기요나오의 동생 마쓰다이라 마사요도 타다테루를 섬겼지만, 타다테루 개역 후 에치젠 마쓰다이라가에 등용되어, 자손은 에치젠국 후쿠이번 중신 마쓰다이라 주마가로 존속했다. 이 분가인 마쓰다이라 마사나오는 아이즈 정벌에서 전공을 세워, 메이지 유신 이후 미야기현 지사, 구마모토현 지사, 내무 차관, 귀족원 칙선 의원 등을 역임한 공적으로 화족(남작)에 서임되었다.[1]

마사요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당주
마쓰다이라 마사요
마사아키
마사쓰네
마사무라(마사카츠)
마사쓰네(재습)
마사아키 (마사반)
마사유이
마사사토
마사요시
마사카타
마사카즈



에치고 나가오카번 마키노가의 가로·이마이즈미가도 나가사와 마쓰다이라가의 서류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3. 오코치 마쓰다이라가 (오코치계 나가사와 마쓰다이라가)

마쓰다이라 야스나오가 병사하기 전인 1587년(덴쇼 1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셋쓰 겐지의 후예인 오코치 마사쓰나가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문 분가인 마쓰다이라 마사쓰구의 양자가 되었다.[36] 이 분가는 이후 오코치 마쓰다이라 가문이라고도 불린다. 마쓰다이라 마사쓰나의 조카가 마사쓰나의 양자가 되어, 지혜 이즈라고 불린 로주·마쓰다이라 이즈노카미 노부쓰나(무사시국오시 번, 그리고 가와고에 번 번주)가 되었다. 또한 그 후손에서 소 지혜 이즈라고 불리는 로주·마쓰다이라 이즈노카미 노부아키 (미카와 요시다 번주)도 배출했다. 오코치 계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에서 다이묘를 3가문 배출했으며, 하타모토 가문도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오코치 마쓰다이라 가문은 모든 가문이 오코치 성을 회복했다.

3. 1. 개요

1587년(덴쇼 15년), 마쓰다이라 야스나오가 병사하기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셋쓰 겐지의 후예인 오코치 마사쓰나가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분가 출신 마쓰다이라 마사쓰구[36]의 양자가 되었다. 이 분가는 후에 '''오코치 마쓰다이라가'''라고 불린다. 마쓰다이라 마사쓰나의 조카가 마사쓰나의 양자가 되어 지혜로운 이즈(伊豆)로 명성을 떨친 노중 이즈노카미 노부쓰나(무사시 오시 번과 가와고에번의 번주)가 되었다. 그의 후예로 작은 지혜 이즈라 일컬어지는 노중 이즈노카미 노부아키라(미카와 요시다 번주)도 나온다. 오코치 계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에서 다이묘가 3가문이 나오고, 하타모토 가문도 있었다. 메이지 유신 후, 오코치 계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는 모든 가문이 오코치 성(姓)으로 돌아갔다.

3. 2. 오코치 마쓰다이라가의 다이묘

1587년(덴쇼 1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셋쓰 겐지의 후예 오코치씨 출신 마사쓰나가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분가 출신 마사쓰구[36]의 양자가 되었다. 이후 이 분가는 '''오코치 마쓰다이라가'''라고 불렸다. 오코치 계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에서는 다이묘가 3가문이 나왔고, 하타모토 가문도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오코치 계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는 모든 가문이 오코치 성(姓)으로 돌아갔다.

오코치 마쓰다이라 가문 출신 다이묘 가문은 다음과 같다.

영지비고
미카와 요시다 번(미카와 국)오코치 계
오타키번(가즈사국)오코치 계
다카사키번(고즈케국)오코치 계


4. 나가사와 마쓰다이라가의 다이묘 (영지)

참조

[1] 문서
[2] 문서
[3] 문서
[4] 문서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17] 문서
[18] 문서
[19] 문서
[20] 문서
[21] 문서
[22] 문서
[23] 문서
[24] 문서
[25] 문서
[26] 문서
[27] 문서
[28] 문서
[29] 문서
[30] 문서
[31] 문서
[32] 문서
[33] 문서
[34] 문서
[35] 문서
[36] 문서 나가사와 종가 제4대 당주 마쓰다이라 가쓰무네의 5대손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