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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쿠즈네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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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콜라이 쿠즈네초프는 1904년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나 소련 해군 원수로 복무한 인물이다. 1919년 해군에 입대하여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 해군을 이끌어 성공적인 지휘를 보였다. 그는 스탈린의 숙청에 항의하고 해군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나, 전후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불명예 퇴역했다. 이후 사후 소련 해군 원수로 사후 복권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항공모함이 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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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쿠즈네초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본명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 쿠즈네초프
로마자 표기Nikolay Gerasimovich Kuznetsov
러시아어 표기Николай Герасимович Кузнецов
출생1904년 7월 24일
출생지메드베드키, 벨리코우스튜츠키 우예즈드, 볼로그다 현, 러시아 제국 (현재 아르한겔스크 주 코틀라스키 구역, 러시아)
사망1974년 12월 6일
사망지모스크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비에트 연방
묻힌 곳노보데비치 묘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서명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서명
군 경력
소속소비에트 연방
군종소비에트 해군
복무 기간1919년 – 1956년
최종 계급소비에트 연방 함대 제독
지휘소비에트 해군, 소비에트 태평양 함대
주요 전투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겨울 전쟁
흑해 전역
훈장소비에트 연방 영웅
정치 경력
소속 정당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1924년–1956년)
주요 직책
소비에트 연방 해군 인민위원 깃발
소비에트 연방 해군 인민위원 깃발
임기 시작1939년 4월 28일
임기 종료1946년 2월 28일
이전미하일 프리노프스키
이후이오시프 스탈린 (군대 인민위원으로서)
총리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이오시프 스탈린
총서기이오시프 스탈린
소비에트 연방 해군 장관 깃발
소비에트 연방 해군 장관 깃발
임기 시작1951년 7월 20일
임기 종료1953년 3월 15일
이전이반 유마셰프
이후니콜라이 불가닌 (국방부 장관으로서)
총리이오시프 스탈린, 게오르기 말렌코프
총서기이오시프 스탈린, 게오르기 말렌코프
소비에트 해군 총사령관 깃발
소비에트 해군 총사령관 깃발
1차 임기 시작1939년 7월 24일
1차 임기 종료1947년 1월 17일
총리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이오시프 스탈린
총서기이오시프 스탈린
이후이반 유마셰프
2차 임기 시작1951년 7월 20일
2차 임기 종료1956년 1월 5일
총리이오시프 스탈린, 게오르기 말렌코프, 니콜라이 불가닌
총서기이오시프 스탈린, 게오르기 말렌코프
제1 서기니키타 흐루쇼프
가족 관계
배우자베라 니콜라예브나
자녀2명

2. 출생과 성장

1904년 7월 24일, 러시아 제국 볼로그다현 벨리키우스튈주의 메드베트키 마을(현재 러시아 아르한겔스크주 코틀라스구)에 있는 농가에서 세르비아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농민 가정이었다.

2. 1. 초기 군 경력

1919년, 쿠즈네초프는 복무 자격을 얻기 위해 실제 나이보다 두 살 많은 1902년생으로 기재하여 붉은 군대 북드비나 소함대에 입대했다. 1920년부터 페트로그라드 해군사령부에서 근무하였고, 1924년에는 해군 부대의 일원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의 장례식에 참석했다.[6] 1925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26년 프룬제 해군 고등 학교를 졸업한 후, 체르보나 우크라이나에서 초임 장교로 복무를 시작하여 이후 제1 항해사(대위)까지 지냈다. 1932년에는 레닌그라드의 보로실로프 해군 아카데미에서 작전 및 전술 연구 과정을 수료하였다. 졸업 후 참모직과 함선 지휘관 중 후자를 선택하여 순양함 크라스니 카프카스의 행정 장교(부장)로 임명되었다.

불과 1년 만에 능력을 인정받아 1934년에는 이전에 복무했던 체르보나 우크라이나의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뛰어난 리더십으로 함선의 규율과 조직력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함선을 해군의 모범으로 만들며 젊은 함장으로서 빠르게 명성을 얻었다.

1936년 9월 5일부터 1937년 8월 15일까지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공화국 스페인의 소련 해군 무관 겸 해군 수석 고문으로 활동했다.[7] 이 기간 동안 그는 파시즘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8]

1937년 8월 귀국 후 태평양 함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938년 1월 10일에는 2등 함대 사령관(준장 상당)으로 진급하며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이 시기는 스탈린에 의한 군대 숙청이 극심했던 때였는데, 쿠즈네초프는 직접적인 숙청 대상이 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많은 장교들이 숙청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이러한 숙청에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저항하며 많은 소련 장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1939년 4월 28일, 불과 34세의 나이로 해군 인민 위원(장관)으로 임명되어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내내 그 직책을 수행하게 된다.

3. 경력

1919년 해군에 입대하기 위해 나이를 두 살 속여 소비에트 연방군 북드비나 소함대에 들어갔다. 1926년 프룬제 고등해군학교를, 1932년 보로실로프 명칭 해군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순양함 체르보나 우크라이나 함장 등을 역임하며 실무 경험과 지휘 능력을 쌓았다.

1936년부터 1937년까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해군 주재 무관 및 수석 고문으로 활동하며 파시즘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귀국 후 태평양 함대 부사령관을 거쳐 1938년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스탈린의 붉은 군대 대숙청 시기에도 여러 장교들을 변호하며 보호하려 노력했다.

1939년, 34세의 나이로 해군 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소련 해군을 이끌었다. 특히 1941년 나치 독일의 침공 직전, 독자적인 판단으로 전 함대에 전투 준비 태세를 명령하여 독일의 기습 공격에도 불구하고 소련 해군이 초기 피해를 거의 입지 않도록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쟁 중에는 흑해 방어, 상륙 작전 수행, 연합군 수송선단 보호 등에서 활약했으며, 이러한 공로로 1944년 해군 원수 계급으로 진급하고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5년에는 대일전에도 참전하여 승리에 기여했다.

전후 스탈린과의 의견 충돌 및 1948년 기밀 누설 혐의 재판으로 인해 해임과 강등을 겪었으나, 스탈린 사후인 1951년 해군 장관으로 복귀하고 1953년 군 계급을 회복했다. 1955년 다시 해군 총사령관 및 소련 해군 원수로 임명되었지만, 국방장관 게오르기 주코프와의 오랜 갈등 끝에 전함 노보로시스크 침몰 사건의 책임을 지고 1956년 최종 해임 및 중장으로 강등되어 강제 퇴역당했다.

퇴역 후에는 회고록 등 저술 활동에 몰두했으나, 스탈린 시대 탄압과 군에 대한 당의 간섭을 비판하는 내용 때문에 생전에는 출판되지 못했다. 1988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시대에 이르러 사후 모든 명예와 소련 해군 원수 계급이 복권되었다. 현재 러시아 해군은 그의 공적을 기려 주력 항공모함아드미랄 쿠즈네초프라는 이름을 붙여 운용하고 있다.

3. 1. 스페인 내전 참전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니콜라스'라는 가명으로 스페인 공화국에 파견되었다. 해군 주재 무관 및 해군 주석 지도자로서 활동하며 1937년 8월 귀국할 때까지 군사고문 역할을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파시즘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키우게 되었다.

3. 2.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1904년 7월 24일, 보로그다현 코토라스 지구의 Медведки|메드베트키ru 마을 농가에서 태어났다. 1919년 해군에 입대하기 위해 나이를 두 살 속여 소비에트 연방군 해군 북드비나 소함대에 들어갔으며, 군무 기록에는 1902년생으로 기재되었다. 1920년부터 페트로그라드에서 근무했고, 1924년에는 해군 군인으로서 블라디미르 레닌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1925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26년 프룬제 고등해군학교를 졸업한 후, 순양함 체르보나 우크라이나에 배치되어 당직사관을 거쳐 대위로 복무했다. 1932년에는 레닌그라드의 보로실로프 명칭 해군 아카데미 작전부(Operations Department|오퍼레이션스 디파트먼트영어)에서 작전 및 전술 연구 과정을 마쳤다. 졸업 후 참모부 근무와 함선 지휘관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를 얻었다.

쿠즈네초프는 실전 경험을 중시하여 순양함 크라스니 카프카스의 부장으로 부임했고, 1년 만에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했다. 1934년에는 과거 복무했던 "체르보나 우크라이나"에 함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엄격한 규율을 통해 함선을 해군의 모범으로 만들었고, 젊은 함장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1936년 9월 5일부터 1937년 8월 15일까지는 '돈 니콜라스'라는 가명으로 스페인 공화국에 파견되어 해군 주재 무관 및 수석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 스페인 내전을 겪으며 파시즘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1937년 8월 귀국 후 태평양 함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38년 1월 10일에는 Флагман 2-го ранга|플라그만 드바고 란가ru(플라그만 2급, 준장급)으로 승진하며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이 시기는 스탈린에 의한 붉은 군대 대숙청이 극심했던 때였다. 쿠즈네초프는 숙청의 광풍 속에서도 직접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휘하의 많은 장교들이 희생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부당한 숙청에 맞서 여러 차례 장교들을 변호했으며, 그의 노력 덕분에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939년 4월 28일, 불과 34세의 젊은 나이에 해군 인민위원(해군 장관에 해당)으로 임명되어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내내 그 직책을 수행하게 된다.

3. 3. 제2차 세계 대전

1941년 나치 독일소련을 침공했을 당시,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휘하의 소련 해군은 소련군 내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대응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전쟁 발발 직전인 6월 21일, 쿠즈네초프는 독일과의 전쟁이 임박했음을 확신했다. 당시 소련 육군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독일의 도발에 응하지 말라는 지침을 받고 있었고, 세묜 티모셴코게오르기 주코프 역시 같은 내용의 지침을 하달했다. 그러나 해군은 육군과 별개의 인민 위원부 소속이었기에, 쿠즈네초프는 이들의 직접적인 지휘 계통 밖에 있었다. 그는 이 점을 활용하여 독자적인 결단을 내렸다.

6월 22일 새벽 0시가 조금 넘은 시각, 쿠즈네초프는 소련의 모든 함대에 최고 수준의 전투 준비 태세를 명령했다. 몇 시간 뒤인 새벽 3시 15분(다른 기록에 따르면 4시 45분), 베르마흐트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며 소련을 침공했다. 쿠즈네초프의 선제적인 조치 덕분에 소련 해군은 독일의 기습 공격에 완벽히 대비된 유일한 군종이었으며, 격렬하게 저항하여 작전 초기 단 한 척의 함선이나 항공기도 잃지 않았다. 처음 스탈린은 자신의 명령을 어긴 쿠즈네초프에게 분노했지만, 해군의 피해가 없다는 보고를 받고는 이내 화를 풀고 그의 결단력을 칭찬했다. 이처럼 전쟁 초기 쿠즈네초프의 결단력과 명령 불복종은 소련 해군을 파멸에서 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쟁 기간 동안 쿠즈네초프의 주요 관심사는 독일의 침공으로부터 카프카스 지역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특히 흑해는 소련 해군의 주요 작전 무대가 되었다. 강력한 소련 흑해 함대 덕분에 독일 해군은 흑해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기 어려웠고, 쿠즈네초프는 확보된 제해권을 바탕으로 상륙 작전 교리를 발전시키고 직접 실행에 옮겼다. 당시 그의 중요한 부하 장교였던 세르게이 고르시코프(훗날 해군 총사령관)는 흑해와 아조프 함대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또한 쿠즈네초프는 무르만스크로 들어오는 연합군 수송선단을 보호하는 데에도 힘썼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쿠즈네초프는 1944년 2월(다른 기록에 따르면 5월) 해군 원수 계급으로 진급했다. 이 계급은 당시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처음에는 육군의 4성 장군과 동등한 지위였다. 같은 해 그는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5년 5월 31일부로 그의 해군 원수 계급은 육군의 소련 원수와 동등한 지위로 격상되었으며, 동일한 휘장이 수여되었다.

1945년 8월, 쿠즈네초프는 극동에서 벌어진 8월의 폭풍 작전(소련의 대일전 참전)에 참여하여, 극동 소련군 총사령관인 소련 원수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 휘하에서 소련 해군 함대가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기여했다.

3. 4. 전후 시련과 복권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도 쿠즈네초프는 1947년까지 소련군 부장관 겸 해군 총사령관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전후 해군 발전 계획을 두고 스탈린과 의견 충돌을 빚기 시작했다. 쿠즈네초프는 스탈린이 제시한 여러 함대 개발 방안에 동의하지 않았고, 특히 1946년 발트 함대 분할에 반대했다.

결국 1947년 1월, 쿠즈네초프는 스탈린의 명령으로 해군 총사령관 직에서 해임되었고, 2월에는 해군 교육 기관 국장으로 좌천되었다. 1948년 1월 12일, 그는 다른 제독들(레프 갈레르, 블라디미르 알라푸조프, 게오르기 스테파노프)과 함께 국방성 명예 법정에 회부되었다. 혐의는 1942년부터 1944년 사이 소련 정부의 허가 없이 기밀 정보를 영국과 미국에 넘겼다는 것이었다. 명예 법정은 유죄를 선고하고 소비에트 연방 최고 재판소 군사 법정 회부를 각료 회의에 요청했다.

1948년 2월 3일, 최고 재판소 군사 법정은 쿠즈네초프에게 유죄를 선고했지만, 과거의 공적을 고려하여 형사 처벌 대신 중장으로 강등할 것을 각료 회의에 건의했다. 다른 제독들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강등된 쿠즈네초프는 1948년 6월부터 극동군 해군 부사령관, 1950년 2월부터는 제5 함대[11] 사령관으로 근무했다.

1951년 1월, 쿠즈네초프는 해군 중장으로 다시 진급했다. 같은 해 7월 20일, 스탈린은 쿠즈네초프를 소련 해군 장관으로 복귀시켰지만 계급은 중장으로 유지되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그의 군 계급은 회복되었고, 같은 해 소련 국방부 제1차관으로 임명되었다. 1955년에는 다시 해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계급은 소련 해군 원수로 승격되어 원수 별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그의 복귀는 당시 국방장관이자 육군 중시론자였던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전시에도 충돌했던 두 사람은 다시 대립했다. 1955년 10월 29일 새벽, 세바스토폴 항구에서 전함 노보로시스크(전 이탈리아 전함 율리오 체사레)가 정체불명의 폭발로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주코프는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1955년 12월 8일 쿠즈네초프를 해임했다. 1956년 2월, 쿠즈네초프는 다시 중장으로 강등되었고, "해군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금지당한 채 강제 퇴역당했다.

퇴역 후 쿠즈네초프는 해군 관련 저술 활동에 몰두하여 회고록과 여러 글을 집필했다. 그의 저술은 직접 쓴 솔직한 내용으로 유명했지만, 스탈린 시기의 탄압과 군 문제에 대한 공산당의 간섭을 비판하고 "국가는 법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출판이 금지되었다. 그의 저작들은 사후에야 빛을 볼 수 있었다.

한편, 쿠즈네초프를 해임했던 주코프 역시 1957년 흐루쇼프에 의해 해임되었다. 1964년 해군 제독들이 쿠즈네초프의 복권을 청원했고 명예직인 국방부 감독관 임명이 거론되었으나,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후임 해군 총사령관 세르게이 고르시코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쿠즈네초프는 197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원수 계급을 회복하지 못했다.

1988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시기에 이르러서야 쿠즈네초프는 사후 소련 해군 원수로 복권되었다. 현재 러시아 해군은 그의 공적을 기려 주력 항공모함쿠즈네초프 제독함이라는 이름을 붙여 운용하고 있다.

3. 5. 은퇴 이후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와의 갈등은 쿠즈네초프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쿠즈네초프는 이전부터 주코프와 충돌해왔는데, 1955년 12월 8일, 소련제2차 세계 대전이탈리아로부터 배상으로 받은 전함 노보로시스크(구 콘테 디 카부르급 율리오 체사레)가 세바스토폴 항구에서 폭발하여 침몰한 사건[1]의 책임을 물어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주코프는 쿠즈네초프를 해군 총사령관 직위에서 해임했다.[2][3] 뱌체슬라프 말리셰프가 이끈 조사 위원회는 이 사건의 책임을 쿠즈네초프에게 돌렸고, 주코프는 이를 근거로 그를 비난했다.[2]

1956년 2월, 그는 다시 중장 계급으로 강등되었고, 강제 퇴역 조치되었고, "해군과 관련된 모든 종류의 업무"가 명시적으로 금지되었다.[2][3]

퇴역 후 쿠즈네초프는 글쓰기에 몰두하여 다수의 에세이와 기사, 회고록 등을 집필하고 출판했다. 특히 대조국전쟁을 다룬 공식 전기 Курсом к победе|쿠르솜 크 포베데ru(승리를 향한 항해)가 있으며, 다른 저명한 지도자들의 회고록과 달리 그가 직접 집필한 것으로 유명하다.[2][3]

또한 전쟁, 스탈린의 탄압, 해군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으나, 이 책들은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2][3] 이 저술들에서 그는 군 내부 문제에 대한 의 간섭을 강하게 비판하고 "국가는 법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3]

3. 6. 사후 복권과 유산

1957년 주코프가, 1964년 흐루쇼프가 실각한 이후, 해군 퇴역 군인들을 중심으로 쿠즈네초프의 소련 해군 원수 계급과 모든 혜택을 복원하고 그를 국방부 감찰총감 중 한 명으로 임명해 달라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당시 해군 지도부, 특히 그의 후임자였던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제독 등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쿠즈네초프가 사망한 지 한참 후인 1988년 7월 26일,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의장으로 있던 소련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는 마침내 쿠즈네초프를 소련 해군 원수 계급으로 사후 복권시켰다.
쿠즈네초프를 기념하는 러시아 해군 300주년 기념 메달
쿠즈네초프는 현재 소련러시아 해군 역사상 가장 저명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를 기리기 위해 러시아 해군의 유일한 항공모함인 아드미랄 쿠즈네초프함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4. 수훈

니콜라이 쿠즈네초프는 소련과 여러 국가로부터 다수의 훈장을 받았다.

;소련

훈장 이미지훈장 이름수여 횟수 및 시기
소비에트 연방 영웅 메달
소비에트 연방 영웅1회 (1945년 9월 14일)
레닌 훈장 리본 바
레닌 훈장4회 (1937년, 1945년 2월, 1945년 9월, 1952년)
적기 훈장 리본 바
적기 훈장3회 (1937년, 1944년, 1950년)
우샤코프 훈장 1급 리본
우샤코프 훈장 1급2회 (1944년, 1945년)
적성 훈장 리본
적성 훈장1회 (1935년)
전투 공훈 훈장 리본
전투 공훈 훈장정보 없음
명예 훈장 리본
명예 훈장정보 없음
모스크바 방어 훈장 리본 바
모스크바 방어 훈장1회 (1944년 5월 1일)
코카서스 방어 훈장 리본
코카서스 방어 훈장1회 (1944년 5월 1일)
대조국 전쟁 승리 훈장 리본 바
1941-1945년 대조국 전쟁에서 독일을 상대로 거둔 승리 훈장1회 (1945년)
대일 승리 훈장 리본
대일 승리 훈장1회 (1945년 9월 30일)
대조국 전쟁 승리 20주년 기념 훈장 리본
1941-1945년 대조국 전쟁 승리 20주년 기념 훈장1회 (1965년 5월 7일)
레닌 탄생 100주년 기념 훈장 리본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탄생 100주년 기념 훈장1회 (1969년)
노농 적군 20주년 기념 훈장 리본
노동자-농민 적군 20주년 기념 훈장1회 (1938년 1월 24일)
소련 육해군 30주년 기념 훈장 리본
소련 육군 및 해군 30주년 기념 훈장1회 (1948년 2월 22일)
소련군 40주년 기념 훈장 리본
소련군 40주년 기념 훈장1회 (1958년 2월 17일)
소련군 50주년 기념 훈장 리본
소련군 50주년 기념 훈장1회 (1968년)


  • 원수 별 (1955년)
  • 명예 무기 - 소련 국장이 새겨진 칼 (1932년)


;외국

훈장 이미지훈장 이름수여 국가 및 시기
군사 훈장 리본
군사 훈장몽골 인민 공화국 (1972년)
조국 해방 훈장 리본
조국 해방 훈장북한 (1945년)
그룬발트 십자 훈장 1급 리본 바
그룬발트 십자 훈장 1급폴란드 인민 공화국 (1945년)
폴로니아 레스티투타 훈장 기사 십자장 리본 바
폴로니아 레스티투타 훈장 기사 십자장폴란드 (1945년)
승리와 자유 훈장 리본 바
1945년 승리와 자유 훈장폴란드 (1945년)
민족 해방 훈장 리본
민족 해방 훈장유고슬라비아 (1946년)
파르티잔 훈장 1급 리본
파르티잔 훈장 1급유고슬라비아 (1946년)



소련 해군항공순양함인 아드미랄 플로타 소베츠코고 소유자 쿠즈네초프는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5. 평가



1957년 주코프1964년 흐루쇼프가 실각한 후, 퇴역 군인회는 쿠즈네초프의 계급 복권과 연금 혜택 회복, 그리고 그를 국방부 감찰총감 중 한 명으로 임명하려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그의 후임자인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제독에 의해 계속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쿠즈네초프가 사망한 지 한참 후인 1988년 7월 26일, 소련 최고 회의 간부회는 마침내 쿠즈네초프를 원래 계급인 소련 해군 원수로 복권시켰다. 현재 쿠즈네초프는 소련 역사 및 소련 해군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생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 "내 인생은 모두 소련 해군이었다. 젊은 시절에 결심했고,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참조

[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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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Stalin: Waiting for Hitler, 1929-1941 https://books.google[...] Penguin 2017-10-31
[7] 간행물 Soviet Intervention in the Spanish Civil War, 1936–39: A Reexamination 1995
[8] 서적 Memoirs of wartime Minister of the Navy Progress Publishers 1990
[9] 웹사이트 Текст приказа Н. Г. Кузнецова http://www.sovinform[...]
[10] 웹사이트 http://www.online812[...] 2009-03-24
[1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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