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폰 에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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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콜라이 폰 에센은 186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발트 독일인 출신 해군 제독이다. 그는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흑해 함대와 극동 함대에서 복무했으며,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세바스토폴 함을 지휘했다. 전쟁 후 해군 개혁을 주도하며 발트 함대 사령관을 역임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중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의 업적은 러시아 해군 현대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이름을 딴 함선이 건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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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폰 에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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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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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니콜라이 오토비치 폰 에센 |
출생 | 1860년 12월 11일 (구 11월 29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사망 | 1915년 5월 7일 (구 4월 25일) (54세), 러시아 제국 에스토니아 관구 레발 |
안장 장소 |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보데비치 묘지 |
경력 | |
소속 | 러시아 제국 해군 |
복무 기간 | 1880년 – 1915년 |
최종 계급 | 제독 |
지휘 | 순양함 노비크 전함 세바스토폴 순양함 류리크 제국 발트 함대 |
참전 |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
지휘 경력 | |
임기 시작 | 1909년 12월 3일 (구 11월 21일) |
임기 종료 | 1915년 5월 7일 (구 4월 25일) |
군주 | 니콜라이 2세 |
총리 | 표트르 스톨리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 이반 고레미킨 |
전임 | 보직 신설 |
후임 | 바실리 카닌 |
2. 생애
니콜라이 오토비치 폰 에센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러시아 제국 해군 제독으로, 러일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했다.
러일 전쟁 당시 에센은 스테판 마카로프 제독의 명에 따라 전함 세바스토폴 지휘를 맡았다. 포트 아서 포위전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뤼순 함락 후 배를 자침시키고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어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고 함장으로 진급했다.
전쟁 이후 에센은 해군 개혁을 주도, 발트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잠수함과 항공기의 중요성을 미리 파악하고 젊은 장교들을 등용했으며, 크론시타트에 해군 훈련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에센은 발트 함대를 이끌고 통상 파괴 작전을 수행했으나, 상관의 방어 전략으로 인해 핀란드만에 제한적인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915년 5월 폐렴으로 사망했다.[5]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니콜라이 오토비치 폰 에센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부유한 귀족 에센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200년 이상 이어진 발트 독일인 해군 가문으로, 선조 중 7명이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여받았다.[2]
어린 시절 가정 교육을 통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에 능통했다.[2] 1880년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2년간의 해외 항해를 마친 후 1883년부터 1886년까지 니콜라예프 해군 아카데미 공학부에서 공부했다. 1891년 중위로 임관하여 1892년부터 1896년까지 러시아 태평양 함대에서, 1897년부터는 러시아 지중해 전대에서 복무했다.[3]
2. 2. 초기 경력
니콜라이 오토비치 폰 에센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제국 귀족 에센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200년 이상 발트 독일인 해군 가문으로, 선조 중 7명이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았다.[2] 에센은 어린 시절 가정 교육을 통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에 능통했다.[2] 1880년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2년간의 해외 항해를 거쳐 1883년부터 1886년까지 니콜라예프 해군 아카데미 공학부에서 공부했다. 1891년 중위로 임관하여 1892년부터 1896년까지 러시아 태평양 함대에서, 1897년부터는 러시아 지중해 전대에서 복무했다.[3]그는 초기 경력으로 흑해에서 소해정 제120호(1897–1898), 포함 그로자치(1898–1900), 증기선 슬라뱐카(1901–1902)를 지휘했다. 해군 사관학교 강사로 잠시 근무한 후,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순양함 노비크(1902–1904)의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2. 3. 러일 전쟁 (1904-1905)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니콜라이 폰 에센은 뤼순에 있는 방호순양함 노비크의 함장이었다. 그는 이 전쟁에서 뛰어난 능력과 용기를 보여주었다.극동 함대 사령관 스테판 마카로프의 지시로, 에센은 전함 세바스토폴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황해 해전에 참가했지만, 패배 후 뤼순 항으로 돌아왔고, 일본군에 의해 항구가 포위되었다. 203 고지가 함락된 후, 뤼순 항에 있던 러시아 함대는 일본군 포격으로 대부분 침몰했다. 세바스토폴도 5발을 맞았지만, 에센은 포격이 닿지 않는 항구 밖으로 배를 이동시켰다. 일본 함대는 어뢰정으로 공격을 가했고, 총 124발의 어뢰가 발사되었다. 세바스토폴은 손상되어 좌초되었지만, 어뢰정 2척을 격침시키고 6척에 손상을 입혔다.
1905년 1월 2일, 뤼순이 함락되자 에센은 세바스토폴을 앞바다로 이동시켜 자침시킨 후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전쟁 포로로 일본에 보내졌지만, 2개월도 채 되지 않아 석방되어 영웅적인 환영을 받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그는 성 게오르기 훈장 (3급)을 수여받았고 함장으로 진급했다. 또한 니콜라이 네보가토프에게 포트 아서 전투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4]
2. 4. 해군 개혁 (1906-1914)
러일 전쟁의 패배와 흑해 함대 수병 반란을 겪은 에센 등 러시아 해군 젊은 장교들은 해군 개혁에 착수했다. 1906년 에센은 영국에서 건조된 장갑순양함 류리크 함장으로 부임했고, 1908년 소장으로 진급, 1909년 발트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13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에센은 1907년에 수립된 건함 계획이 더디게 진행되자, 1912년부터 1916년까지 새로운 건함 및 개혁 법안을 작성하여 의회에 제출했고, 이는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는 잠수함과 항공모함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지하고, 신기술과 전술을 익힌 장교들을 등용했다. 또한, 크론시타트에 해군사관학교를 설립하여 기술, 전술뿐만 아니라 사기 유지를 위한 수병 처우 개선을 강조했다.
에센은 외해 공세를 중시하며 함대를 핀란드 만에 가두지 않는 전략을 지향했고, 발트 함대의 작전 자율성을 추진했다.
2. 5. 제1차 세계 대전 (1914-1915)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에센이 이끄는 발트 함대는 러시아 해군에서 가장 전쟁 준비가 잘 되어 있었고, 공세가 가능한 상태였다. 헬싱키에 사령부를 둔 그의 함대는 전함 4척, 장갑 순양함 5척, 경순양함 6척, 어뢰정 62척, 잠수함 12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2] 그러나 그의 상관이었던 페트로그라드 방위를 담당하는 제6군 사령관 콘스탄틴 판데르플리트 장군은 공세를 허용하지 않고 방어적인 전략을 취했다. 이 때문에 에센의 함대는 리바우 군항에서 철수하고, 주력을 핀란드만에 가두었으며, 노후한 함정만을 리가 만에 배치해야 했다.전쟁 초기 에센은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1914년 8월 9일 고틀란드섬에 있는 스웨덴 함대를 선제공격하려고 출격했다. 그러나 스웨덴의 참전과 독일 제국의 동부 전선 대공세를 우려한 상관으로부터 귀환 명령을 받았다. 1914년 8월 29일 에센은 장갑순양함 류리크와 팔라다를 출격시켜 통상파괴전을 실행했다. 비록 큰 성과는 없었지만, 러시아 해군의 사기를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 6. 죽음
1915년 5월 20일 폐렴으로 탈린에서 급사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5] 아내 마리아와의 사이에 아들 안톤과 두 딸을 두었다. 아들 안톤은 602형 잠수함 AG-14 승무원으로, 1917년 10월 24일 전사했다.[5] 두 딸은 해군 장교와 결혼했다.러시아 내전 동안 백군은 페테르부르크 전선에서 활동하는 장갑 열차 중 하나를 ‘에센 제독’으로 명명했다.
3. 유산 및 평가
니콜라이 폰 에센은 러일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뛰어난 용맹함과 지휘 능력을 보여준 인물로, 러시아 해군에서는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특히 러일 전쟁 당시 뤼순 항 봉쇄 작전에서 보여준 그의 활약은 성 게오르기 훈장 수여로 이어졌다.
에센은 단순히 용맹한 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해군의 현대화에 크게 기여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는 러일 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군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잠수함과 항공기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간파하여 이를 해군력 강화에 반영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젊고 유능한 장교들을 발탁하고, 크론시타트에 해군 훈련 학교를 설립하여 현대적인 전략과 전술을 교육하는 데 힘썼다.[4]
이러한 그의 업적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해군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대한민국 해군은 에센 제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드미랄 그리고로비치급 프리깃함 2번함의 이름을 '아드미랄 에센'으로 명명했다.
4. 수상 내역
- 용기 금검 (1904년 3월 14일)
-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 1905년 4월 17일)
- 백색 독수리 훈장 (검 포함, 1914년 12월 12일)
참조
[1]
서적
Kosiarz, ch.1-3
[2]
웹사이트
Essen, Nikolai Ottovich
https://web.archive.[...]
2018-08-30
[3]
서적
Kowner, pp. 113–114
[4]
서적
The Tsar's Last Armada
Basic Books
2002
[5]
웹사이트
Essen, Anthony Nikolayevich
https://web.archive.[...]
2018-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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