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 해전 (19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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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해 해전은 1904년 러일 전쟁 중 일본 연합함대와 러시아 뤼순 함대 간에 벌어진 해전이다. 러시아 뤼순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을 시도하며 시작되었으며,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연합함대가 이를 저지하려 했다. 해전 결과, 뤼순 함대는 지휘부 손실과 함선 피해를 입고 분산되었으며, 일본은 뤼순 항 봉쇄를 강화하고 제해권을 더욱 확고히 했다. 이 전투는 1905년 포츠머스 조약 체결에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의 국권 침탈을 가속화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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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해전 (1904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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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황해 해전 |
관련 전쟁 | 러일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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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04년 8월 10일 |
장소 | 황해, 산둥반도 연안 |
좌표 | 38° 24′ 00″ N 121° 42′ 00″ E |
결과 | 전술적 목표 미달성, 전략적 일본 승리 |
세부 결과 | 일본은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러시아 함대의 진격을 막았으나, 대부분은 뤼순항으로 귀환했다. 일본은 현재 러시아 함대의 봉쇄와 탈출 저지에 성공했다.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일본 제국 |
교전국 2 | 러시아 제국 |
지휘관 | |
일본 | 도고 헤이하치로 데와 시게토 |
러시아 | 빌겔름 비트게프트 파벨 우흐톰스키 |
전력 | |
일본 | 전함 5척 장갑 순양함 6척 방호 순양함 8척 구축함 18척 어뢰정 30척 |
러시아 | 전함 6척 방호 순양함 4척 구축함 14척 |
피해 | |
일본 | 226명 사상 전함 2척 심각한 손상 전함 1척 경미한 손상 방호 순양함 1척 경미한 손상 |
러시아 | 340명 사상 전함 1척 심각한 손상 전함 5척 경미한 손상 다수의 함선이 중립국 항구에 억류됨 |
러시아 태평양 함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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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러시아 제국 해군의 제1태평양 함대는 빌헬름 비트게프트 제독의 지휘 아래 1904년 2월 8일 포트 아서 해전으로 시작된 일본 제국 해군의 해상 봉쇄로 포트 아서에 갇혀 있었다. 일본 제국 육군이 포트 아서를 포위하면서 비트게프트 제독과 러시아 총독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알렉세예프 총독은 제1태평양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와 합류하여 일본 함대에 대항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해군력을 갖추기를 원했고, 적극적인 출격을 선호했다. 반면 비트게프트 제독은 함대를 안전하게 유지하며, 일부 무기를 포트 아서 공방전의 육상전에 투입하는 존재하는 함대[2] 전략을 선호했다. 비트게프트의 선호는 러시아 해군의 교리와 일치했다.[2] 러시아는 전력을 증강하고(제2태평양 함대로 알려진 발트 함대의 도착을 기다리면서), 일본 해군과 결정적인 전투를 할 계획이었다.[3]
알렉세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호소했고, 니콜라이 2세 황제는 총독의 의견에 동의했다. 황제의 칙령과 법적 조치의 위협에 직면한 비트게프트 제독은 즉시 블라디보스토크로 항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4]
일본 육군 제2군이 랴오둥반도에 상륙하여 여순이 고립되자 알렉세예프는 여순 함대에 블라디보스토크로 회항할 것을 강력하게 명령했다. 1904년 6월 23일 여순 함대는 출항했으나, 연합 함대와 조우하여 곧바로 항구로 돌아갔다. 일본 육군 제3군에 의한 여순 요새 공격이 시작되었고, 8월에는 일본 해군 육전 중포대가 다구산에 설치한 관측소를 사용하여 여순항의 함선을 포격했다.
8월 9일, 명중탄에 의해 전함 레트비잔은 수선부에, 전함 체사레비치는 함교에 손상을 입었고, 비트게프트 자신도 부상당했다. 비트게프트는 여순항에 함대를 두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함대 대부분을 블라디보스토크로 회항하기로 결정했다.
연합 함대는 발트 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여순 함대를 격멸하여 일본 측의 불리한 상태를 개선하고, 동해에서의 제해권을 확보하고자 여순 함대가 항구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2. 1. 러시아 제국의 남하 정책과 뤼순 함대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은 부동항 확보와 동아시아 진출을 위해 남하 정책을 추진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과 뤼순 항 조차를 통해 뤼순 함대(러시아 제1태평양 함대)를 주둔시키는 등 군사적 거점을 마련했다.뤼순 함대는 스테판 마카로프 중장과 같은 유능한 지휘관이 있었으나, 일본 제국 해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후 빌헬름 비트게프트 소장이 사령관직을 대행하게 되면서, 요새화된 뤼순 항에 주둔하며 일본 해군 연합함대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함대를 보존하려는 소극적인 전략을 취했다.[2]
그러나 극동 총독 예브게니 알렉세예프는 뤼순 함대를 블라디보스톡으로 회항시키도록 강력하게 명령했다. 1904년 6월 23일 뤼순 함대는 출항했지만, 연합함대와 마주치자 항구로 돌아왔다.
일본 제국 육군이 뤼순 요새를 공격하면서, 뤼순항에 있던 함선들이 포격을 받았다. 8월 9일 ‘전함 레트비잔’과 ‘전함 체사레비치’가 피해를 입고, 빌헬름 비트게프트 소장도 부상을 당했다. 비트게프트는 함대 대부분을 블라디보스토크로 회항시키기로 결정했다.
한편, 연합함대는 발트 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뤼순 함대를 격멸하고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고자 뤼순 함대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2. 2. 일본의 부상과 제해권 확보 노력
러시아 제국 해군의 제1태평양 함대는 일본 제국 해군의 해상 봉쇄로 빌헬름 비트게프트 제독 지휘 하에 포트 아서에 갇혀 있었다. 일본 제국 육군이 포트 아서를 포위하면서 비트게프트 제독과 러시아 총독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알렉세예프 총독은 제1태평양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와 합류하여 일본 함대에 대항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해군력을 갖추기를 원했고, 적극적인 출격을 선호했다. 반면 비트게프트 제독은 함대를 안전하게 유지하며, 일부 무기를 포트 아서 공방전의 육상전에 투입하는 존재하는 함대[2] 전략을 선호했다.개전 당시 여순항 외곽에서 기습을 받은 러시아 태평양 함대(이하 '''여순 함대''')는 전력이 약하고 러시아 본국으로부터 증원 가능성도 있었기에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함대를 여순에 보존하는 전략을 취했다. 스테판 마카로프 중장이 함대 사령관이었을 때는 적극적으로 출격했지만, 마카로프 전사 후 극동 총독 예브게니 알렉세예프를 거쳐 빌헬름 비트게프트 소장이 사령관 직을 대행하면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일본 육군 제2군이 랴오둥반도에 상륙하여 여순이 고립되자 알렉세예프는 여순 함대에 블라디보스토크로 회항할 것을 강력하게 명령했다. 1904년 6월 23일에 일단 출항했으나, 연합 함대와 조우하여 곧바로 항내로 되돌아갔다.
한편, 일본은 발트 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여순 함대를 격멸하여 함대 수에 따른 불리한 상태를 최대한 개선하고, 동해에서의 제해권을 확보해야 했다. 따라서 일본 해군은 여순 함대가 항구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2. 3. 뤼순 함대의 탈출 시도와 연합함대의 저지
러시아 태평양 함대(이하 뤼순 함대)는 사령관 스테판 마카로프 중장이 전사한 후, 빌헬름 비트게프트 소장이 사령관직을 대행하면서 뤼순 항에 틀어박혀 연합함대와의 충돌을 피하는 소극적인 전략을 취했다. 그러나 극동 총독 예브게니 알렉세예프는 뤼순 함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회항시키도록 강력하게 명령했다.1904년 6월 23일, 뤼순 함대는 출항했지만, 연합함대와 조우하자 즉시 항구로 귀환했다. 그러나 일본 육군이 뤼순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8월 9일, 일본군의 포격으로 전함 레트비잔과 체사레비치가 손상되고, 빌헬름 비트게프트 소장도 부상을 입었다. 이에 비트게프트는 함대 대부분을 블라디보스토크로 회항시키기로 결정하고, 소형 포함과 수리 중인 장갑순양함 바얀은 뤼순에 남겨두었다.
한편, 연합함대는 발틱 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뤼순 함대를 격멸하여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고자 뤼순 함대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3. 해전의 경과
1904년 8월 10일 18시 40분, 뤼순 함대 기함 체사레비치의 함교에 305mm 포탄 2발이 직격하여 빌헬름 비트게프트 사령관과 조타수가 전사하고 이바노프 함장이 의식을 잃었다. 조타수가 조타 장치를 왼쪽으로 꺾은 채 쓰러져 고장을 일으켰기 때문에 체사레비치는 왼쪽으로 급선회하여 자 함대의 열에 돌입, 전체 함선이 흩어졌다. 연합함대는 흩어져 남하하는 뤼순 함대를 공격했고, 야간에는 어뢰 공격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전함 페레스베트의 차석 지휘관 파벨 우흐톰스키 소장이 임시로 뤼순 함대를 지휘하게 되었고, 5척의 전함(체사레비치 제외)과 1척의 방호순양함, 9척의 구축함이 침몰하지 않고 뤼순항으로 귀환했다.[19] 이때, 레트비잔의 함장 에두아르트 셰스노비치는 함포 사격과 함께 함의 선수가 전투 피해로 낮아진 상태에서도 즉시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일본 함대를 향해 단독 돌격을 감행했다. 도고의 전열은 사거리가 약 4.83km 미만으로 좁혀지자 '레트비잔'에 포격을 집중했다. 그러나 도고의 전함은 305mm 포탄이 부족해지고 주포 중 다수가 작동하지 않게 되자 안전을 위해 러시아 함대가 흩어진 틈을 타 순양함과 구축함에 교전을 넘겼다.[21] 도고의 함선이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면서 마지막 일제 사격을 가해 적 전함에 여러 발의 포탄을 명중시켰고, 그중 한 발이 셰스노비치 함장의 복부에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 '레트비잔'은 연막을 치고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지만,[20] 이 전함은 효과적으로 적대적인 전노급 전함 간의 결투를 끝냈고 기함의 파괴를 막았다.[22]
결국 뤼순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뤼순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이마저도 제대로 조율되지 못하여 많은 함선들이 흩어졌다. 두 시간 후, 러시아 함대의 주력은 뤼순으로 돌아왔다. 전함 5척, 순양함 1척, 구축함 10척이 귀환에 성공했다.
연합함대는 뤼순 함대를 공격했고, 야간에는 어뢰 공격까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뤼순 함대 주력은 대부분 뤼순으로 귀환했으나, 일부 함선은 자오저우 만, 상하이, 사이공 등지에 억류되었다.[23][24] 방호순양함 노비크는 코르사코프 해전에서 격침되었다.[25] 구축함 레시테리누이는 일본군에 나포되어 일본 해군에 편입되었다.
7시간에 걸친 해전 동안 양측은 약 7,382발의 포탄을 주고받았다.[37]
함선 | 손상 | 사상자 |
---|---|---|
체사레비치 | 305mm 포 13회 피격, 203mm 포 2회 피격 | 12명 전사, 47명 부상. 빌헬름 비트게프트 제독 전사 |
포베다 | 대구경탄 11회 피격 | 4명 전사, 29명 부상 |
페레스베트 | 39회 피격 | 13명 전사, 69명 부상 |
폴타바 | 203mm ~ 305mm 포 12 ~ 14회 피격 | 12명 전사, 43명 부상 |
레트비잔 | 203mm ~ 305mm 포 18회 피격 | 6명 전사, 42명 부상 |
세바스토폴 | 여러 차례 피탄 | 1명 전사, 62명 부상 |
미카사 | 20 차례 피격, 후방 305mm 포탑 동작불능 | 125명 사상 |
아사히 | 305mm 포 1회 피격 (흘수선 근처, 상하 305mm 포열 파열) | 2명 부상 |
시키시마 | 전방 305mm 포열 1문 파열 | |
야쿠모 | 305mm 포 1회 피격 |
3. 1. 초기 기동과 탐색전
1904년 8월 10일 12시 30분, 연합함대는 뤼순 서남쪽 23해리 부근에서 남하해 온 뤼순 함대를 발견하고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뤼순 함대는 교전을 피하고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도주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일본 함대는 뤼순 함대와 7km 거리에서 정자전법을 실행하려 했지만, 뤼순 함대의 후방을 따라잡지 못했다. 15시 20분부터 추격을 시작했지만, 포격을 재개한 것은 17시 30분이었다.18시 40분, 뤼순 함대 기함 체사레비치의 함교에 포탄 2발이 직격하면서 빌헬름 비트게프트 제독과 조타수가 전사하고 이바노프 함장이 의식을 잃었다. 조타수가 조타 장치를 왼쪽으로 꺾은 채 쓰러져 고장을 일으켰기 때문에 체사레비치는 왼쪽으로 급선회하여 자 함대의 대열에 돌입했고, 이로 인해 전체 함선이 흩어졌다.
8월 10일 이른 아침, 뤼순 함대는 순차적으로 출항하여 소해정과 함께 항구 밖에 집결한 후 남쪽으로 향했다. 이 움직임은 일본 측 초계함에 탐지되어 연합함대 본대에 보고되었다. 도중에 뤼순 함대의 소해정과 호위 구축함 5척은 뤼순으로 돌아갔다. 구축함 레시테르니는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대와의 연락을 위해 뤼순 항구 밖에 남아 있었으며, 일본 측 초계함이 본대와 접촉하여 항구 밖에서 사라진 틈을 타 러시아 영사가 있는 옌타이로 향했다.
12시 58분, 뤼순 함대의 진로 방향에서 서남서로 진격하던 연합함대 제1전대는 좌8점 일제 회두(전 함 일제히 90도 좌로 변침)를 실시하여 횡진을 만들어 뤼순 함대를 해상으로 유인하려 했다. 이어서 13시 8분에 좌8점 일제 회두를 다시 한번 실시하여 동북동으로 진격하는 역순 단종진이 되어, 동남쪽으로 진격하려던 뤼순 함대에 포격을 시작했다. 제1전대가 좌로 변침하여 북동쪽으로 향했을 때, 뤼순 함대는 남쪽으로 변침하여 제1전대의 후미를 빠져나가려 했다. 이에 13시 36분 제1전대는 우16점 일제 회두를 실시하여 원래 순서로 돌아가 적 함대에 대해 T자를 그리며 선두로 향하는 체사레비치에 공격을 집중했다. 뤼순 함대는 좌로 변침하여 동남쪽으로 향하며 다시 제1전대의 후미를 빠져나가려 했다. 제1전대는 다시 한번 변침해야 했지만 늦어져서 동쪽으로 향하는 뤼순 함대에 약간 늦게 남쪽에서 병행하게 되었다. 뤼순 함대는 점차 멀어져 거리가 벌어졌기 때문에 15시 20분경 포격이 중지되었다.

17시 30분 포격이 재개되었다. 격렬한 포격전 속에서 비트게프트는 순양함에 남쪽으로 도주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그것이 마지막 명령이 되었다. 18시 37분, 체사레비치의 사령탑에 포탄이 직격하여 비트게프트와 조타수가 전사하고 이바노프 함장 등이 혼절했다. 조타수가 타륜을 좌로 감아 넘어지고 타기에 고장을 일으킨 때문에 체사레비치가 좌로 급선회하여 후속함의 진로를 막는 사태가 발생하여 뤼순 함대의 전열은 붕괴되었다.
3. 2. 전함 간의 포격전
1904년 8월 10일 12시 30분, 연합함대는 뤼순 서남쪽 23해리 부근에서 남하해 온 뤼순 함대를 확인하고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뤼순 함대는 교전을 피하고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도주에 집중했다. 일본 함대는 뤼순 함대와 7km 거리에서 정자전법을 실행하려 했지만, 뤼순 함대의 후방을 따라잡지 못했다. 15시 20분부터 추격을 시작했지만, 포격을 재개한 것은 17시 30분이었다.18시 40분, 뤼순 함대 기함 체사레비치의 함교에 305mm 포탄 2발이 직격, 빌헬름 비트게프트 사령관과 조타수가 전사하고 이바노프 함장이 의식을 잃었다. 조타수가 조타 장치를 왼쪽으로 꺾은 채 쓰러져 고장을 일으켰기 때문에 체사레비치는 왼쪽으로 급선회, 자 함대의 열에 돌진하여 전체 함선이 흩어졌다. 연합함대는 흩어져 남하하는 뤼순 함대를 공격했고, 야간에는 어뢰 공격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뤼순 함대는 전함 페레스베트의 차석 지휘관 파벨 우흐톰스키 소장이 임시 지휘를 맡게 되었고, 전함 5척(체사레비치 제외)과 순양함 1척, 구축함 9척이 침몰하지 않고 뤼순항으로 돌아왔다.
7시간에 걸친 해전 동안 양측은 약 7,382발의 포탄을 주고받았다.[37]
전함 | 손상 | 사상자 |
---|---|---|
체사레비치 | 305mm 포 13회 피격, 203mm 포 2회 피격 | 12명 전사, 47명 부상. 빌헬름 비트게프트 제독 전사 |
포베다 | 대구경탄 11회 피격 | 4명 전사 / 29명 부상 |
페레스베트 | 39회 피격 | 13명 전사 / 69명 부상 |
폴타바 | 203mm ~ 305mm 포 12 ~ 14회 피격 | 12명 전사 / 43명 부상 |
레트비잔 | 203mm ~ 305mm 포 18회 피격 | 6명 전사 / 42명 부상 |
세바스토폴 | 여러 차례 피탄 | 1명 전사 / 62명 부상 |
미카사 | 20 차례 피격, 후방 305mm 포탑 동작불능 | 125명 사상 |
아사히 | 305mm 포 1회 피격 (흘수선 근처, 상하 305mm 포열 파열) | 2명 부상 |
시키시마 | 전현 305mm 포열 1문 파열 | |
야쿠모 | 305mm 포 1회 피격 |
1890년대 후반 당시 조준경과 거리 측정기의 한계로 전함 교전 거리는 약 에서 로 예상되었다. 이는 당시 전함에 장착된 305mm 주포의 사거리가 훨씬 더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황해 해전에서 러시아 전함은 사거리가 4km인 ''뤼졸'' 거리 측정기를 사용했고, 일본의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은 최신(1903년) Barr and Stroud 일치식 거리 측정기를 사용하여 사거리가 6km였다.[27] 그 결과, 황해 해전의 교전 당사자들이 서로 포격을 시작하고 약 12.87km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명중시키자 해군 관계자들은 매우 놀랐다.[28][29]
오후 1시 직후, 도고는 비트게프트의 ''T''자 대형을 가로지르려 시도했고, 약 12.87km 이상의 먼 거리에서 주포 사격을 시작했다.[8][9] 비트게프트는 전함 ''레트비잔''으로 반격했지만, 사거리가 너무 멀어서 양측 모두 명중탄을 기록하지 못했다. 도고는 적의 ''T''자 대형을 가로지르려 시도할 때 속도를 잘못 계산했고, 비트게프트는 간단히 좌현으로 급선회하여 속도를 유지하며 도고 함대와의 거리를 늘렸다.
오후 1시 25분경, 다시 약 12.87km가 넘는 거리에서 도고의 전함은 비트게프트의 기함과 ''레트비잔''에 사격을 가했고, 후자에 12번의 명중탄을 기록했다. 오후 1시 30분경, 러시아 기함이 반격을 가해, 이 먼 거리에서 305mm 포탄 2발의 직격탄으로 도고의 무선 통신을 파괴했다.[10]
함대가 가용한 모든 포로 서로 포격을 계속하는 동안, 도고의 기함은 피격을 받아 피해를 입기 시작했고, 피격으로 인해 함선을 약간 선회시키려 했으며(최종적으로 20번의 피격을 받았다), 그의 순양함에게 러시아 전열을 공격하라고 긴급하게 시도했다.[11]
14시 45분 경, 일본 기함은 엔진 문제로 인해 함대의 14kn 속도를 유지할 수 없었던 꼬리 전함 폴타바에 약 7nmi까지 접근했다. 미카사와 아사히는 곧 폴타바를 포격하기 시작했고, 여러 발의 명중탄을 기록했다. 그러나 전함 페레스베트의 우흐톰스키 제독은 폴타바의 위기를 관찰하고 자신의 부대에 후퇴하여 폴타바를 돕도록 명령했고, 그들은 미카사와 아사히에 포화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17시 35분 경, 도고의 군함들은 다시 뒤처진 전함 폴타바에 3.5nmi까지 접근했고, 그녀에게 포격을 가했다. 데와 제독도 그의 순양함들과 함께 나타났고, 도고는 모든 전함과 순양함에게 폴타바를 포격하여 최소한 한 척의 러시아 전함을 침몰시키기를 희망했다.[14] 그러나 폴타바의 함장 이반 P. 우스펜스키 선장과 그의 승무원들은 도고 제독의 기함에 여러 발의 명중탄을 기록했다. 이 시점에서, 305mm 포에 장전된 ''시모세'' 포탄이 뜨거운 포신 안에서 조기에 폭발하기 시작했다. 17시 45분에 시키시마의 305mm 포 1문을 무력화시키고, 18시 10분에 아사히의 305mm 포신 2문을 무력화시켰다. 18시 30분까지, 도고는 원래 16문의 305mm 포 중에서 11문만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15]
18시 30분까지, 도고는 전함의 사격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시키시마와 아사히는 손상된 폴타바를 공격했고, 후지는 포베다와 페레스베트를 쏘았으며, 기함 미카사는 러시아 기함 체사레비치와 교전 중이었다. 일본 해군 군함 중 어느 것도 러시아 전함 레트비잔과 세바스토폴을 공격하지 않아, 이들은 미카사를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었다.[16]
3. 3. 뤼순 함대의 분산과 연합함대의 추격
1904년 8월 10일 18시 40분, 뤼순함대 기함 체사레비치의 함교에 포탄 두 발이 직격하면서 빌헬름 비트게프트 제독과 조타수가 전사하고 이바노프 함장이 의식을 잃었다. 조타수가 조타 장치를 왼쪽으로 꺾은 채 쓰러져 고장을 일으켰기 때문에 '체사레비치'는 왼쪽으로 급선회하여 자 함대의 열에 돌입했고, 이로 인해 전체 함선은 사방으로 흩어졌다.전함 페레스베트의 차석 지휘관 파벨 우흐톰스키 소장이 임시로 뤼순 함대를 지휘하게 되었고, 전함 5척('체사레비치' 제외)과 순양함 1척, 구축함 9척이 침몰되지 않고 뤼순항으로 귀환했다.[19]
이때, 레트비잔의 함장 에두아르트 셰스노비치는 함포 사격과 함께 함의 선수가 전투 피해로 낮아진 상태에서도 즉시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일본 함대를 향해 단독 돌격을 감행했다. 도고의 전열은 사거리가 3마일 미만으로 좁혀지자 '레트비잔'에 포격을 집중했다. 그러나 도고의 전함은 305mm 포탄이 부족해지고 주포 중 다수가 작동하지 않게 되자 안전을 위해 러시아 함대가 흩어진 틈을 타 순양함과 구축함에 교전을 넘겼다.[21]
도고의 함선이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면서 마지막 일제 사격을 가해 적 전함에 여러 발의 포탄을 명중시켰고, 그중 한 발이 셰스노비치 함장의 복부에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 '레트비잔'은 연막을 치고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지만,[20] 이 전함은 효과적으로 적대적인 전노급 전함 간의 결투를 끝냈고 기함의 파괴를 막았다.[22]
결국 뤼순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뤼순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이마저도 제대로 조율되지 못하여 많은 함선들이 흩어졌다.
두 시간 후, 러시아 함대의 주력은 뤼순으로 돌아왔다. 전함 5척, 순양함 1척, 구축함 10척이 귀환에 성공했다.
연합함대는 뤼순 함대를 공격했고, 야간에는 어뢰 공격까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3. 4. 해전의 결과
뤼순 함대 주력은 대부분 뤼순으로 귀환했으나, 일부 함선은 자오저우 만, 상하이, 사이공 등지에 억류되었다.[23][24] 방호순양함 노비크는 코르사코프 해전에서 격침되었다.[25] 구축함 레시테리누이는 일본군에 나포되어 일본 해군에 편입되었다.전함 페레스베트의 파벨 우흐톰스키는 기함이 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러시아 함대를 지휘하려 했으나, 신호기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세바스토폴에서만 확인되어 다른 함선들은 지시를 따르지 못했다.[19]
레트비잔의 함장 에두아르트 셰스노비치는 함포 사격과 함께 함의 선수가 전투 피해로 낮아진 상태에서도 도고 헤이하치로의 전열을 향해 단독 돌격을 감행했다.[20] 일본 함대는 레트비잔에 포격을 집중했지만, 305mm 포탄 부족과 주포 고장으로 인해 러시아 함대가 흩어진 틈을 타 순양함과 구축함에 교전을 넘겼다.[21]
레트비잔은 연막을 치고 방향을 돌렸지만,[20] 적대적인 전노급 전함 간의 결투를 효과적으로 끝내고 기함의 파괴를 막았다.[22] 결국 러시아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대신 뤼순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으나, 이마저도 조율이 불가능해 많은 함선들이 흩어졌다.
두 시간 후, 러시아 함대의 주력은 뤼순항으로 돌아왔다. 전함 5척, 순양함 1척, 구축함 10척이 귀환에 성공했다. 피해를 입은 체사레비치와 호위 구축함 3척은 자오저우로 항해하여 독일 당국에 의해 억류되었다.[23][24] 순양함 아스콜드와 다른 구축함 1척은 상하이로 항해하여 중국 당국에 의해 억류되었다. 순양함 디아나는 사이공으로 탈출하여 프랑스에 의해 억류되었다. 노비크만이 일본 열도 동쪽으로 항해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도달하려 했으나, 코르사코프 해전에서 일본 순양함에 의해 격침되었다.[25]
약 7시간에 걸친 해상 전투와 약 7,382발의 포탄 발사로 1.7%의 명중률을 기록했다.[17]
에두아르트 셰스노비치 선장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전열로 돌진하여 전함 함대 결투를 종식시키고 러시아 기함을 파괴에서 구출했으며, 1911년 1월 부상으로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1]
피해와 사상자는 다음과 같다:[32]
전함 | 주 무장 | 수선 장갑 | 진수 연도 | 건조사 | 피해 | 사상자 |
---|---|---|---|---|---|---|
Цесаревич|체사레비치ru (기함) | 12인치포 4문, 6인치포 12문 | 9 3/4인치 | 1901 | 툴롱, 프랑스 | 305 mm 포탄 13발 명중, 203 mm 포탄 2발 명중 | 승무원 12명 사망, 47명 부상. 제1 태평양 함대 제독 빌헬름 비트게프트 전사. |
Победа|포베다ru | 10인치포 4문, 6인치포 11문 | 9인치 | 1900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 대구경 포탄 11발 명중 | 승무원 4명 사망, 29명 부상 |
Пересвет|페레스베트ru | 10인치포 4문, 6인치포 11문 | 9인치 | 1898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 39발 명중 | 승무원 13명 사망/69명 부상 |
Полтава|폴타바ru | 12인치포 4문, 6인치포 12문 | 14 1/2인치 | 1894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 12~14발 명중, 203~305 mm 포탄 | 승무원 12명 사망, 43명 부상 |
Ретвизан|레트비잔ru | 12인치포 4문, 6인치포 12문 | 9인치 | 1900 | 필라델피아, 미국 | 203~305 mm 포탄 18발 명중 | 승무원 6명 사망, 42명 부상 |
Севастополь|세바스토폴ru | 12인치포 4문, 6인치포 12문 | 14 1/2인치 | 1895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 여러 발의 포탄 명중 | 승무원 1명 사망, 62명 부상 |
三笠|미카사일본어 (기함) | 12인치포 4문, 6인치포 14문 | 9인치 | 1900 | 배로우, 영국 | 20발 명중, 후방 305 mm 포탑 파괴 | 125명 사상 |
朝日|아사히일본어 | 12인치포 4문, 6인치포 14문 | 9인치 | 1899 | 클라이드뱅크, 영국 | 수선 부근 305 mm 포탄 1발 명중, 후방 305 mm 포신 2문 파열 | 승무원 2명 부상 |
敷島|시키시마일본어 | 12인치포 4문, 6인치포 14문 | 9인치 | 1898 | 템스 철공소, 영국 | 전방 305 mm 포신 1문 파열 | |
八雲|야쿠모일본어 장갑 순양함 | 8인치포 4문, 6인치포 12문 | 7인치 | 1899 | 슈테틴, 독일 | 305 mm 포탄 1발 명중 |
일본은 러시아 함대를 파괴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나, 함대의 대부분이 뤼순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일본은 봉쇄 돌파를 막는 데 성공했고, 귀환하는 러시아 함선은 해안 포대를 강화하기 위해 대포를 제거당했다. 이후 뤼순항 포위전 과정에서 제거되어 일본은 해당 지역에 대한 확실한 해상 지배권을 갖게 되었다.[34]
이 전투의 여파는 1905년 포츠머스 조약으로 이어진 협상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재했다. 러시아는 이 손실로 인해 분쟁 해결을 모색하여 영토 양보와 외교적 타협을 가져왔다.[35]
4. 해전의 영향
이 해전 이후, 뤼순 함대의 주력함 중 세바스토폴만이 지상 공격을 위해 몇 차례 출격했으나, 이마저도 어뢰 공격을 받아 제대로 된 출동을 할 수 없었다.[33] 뤼순 함대는 함포를 육상 요새에 사용하고, 승무원을 육전 부대로 배치하여 전투 기능을 상실했다.[34]
일본 연합함대는 뤼순 함대를 괴멸시킨다는 목적을 달성했지만, 당시 일본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뤼순 함대의 작전 능력이 건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육군에 뤼순 요새 공략을 서둘러 달라고 요청했다.[34] 또한, 정자작전이 사실상 실패했고, 적함을 침몰시키지 못한 것이 과제로 남았다. 이 해전의 교훈은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4. 1. 뤼순 함대의 무력화와 일본의 제해권 장악
이 해전 후 뤼순 함대의 주력함 중에서는 전함 ‘세바스토폴’이 지상 공격을 위해 몇 차례 출격했을 뿐, 그나마도 어뢰 공격을 받아 제대로 된 출동을 할 수 없었다.[33] 이후 뤼순 함대는 함포를 분리하여 육상 요새에 사용하고, 승무원을 육전 부대로 배치하여 함대로서의 전투 기능을 상실했다.[34]일본 연합함대는 뤼순 함대를 괴멸시킨다는 목적을 달성했지만, 당시 일본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뤼순 함대의 작전 능력이 건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육군에 뤼순 요새 공략을 서둘러 달라고 요청했다.[34] 또한, 정자작전이 사실상 실패했고, 적함을 침몰시키지 못한 것이 과제로 남았다. 이 해전의 교훈은 쓰시마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는 데 활용되었다.
일본은 황해 해전 승리로 제해권을 장악했고, 귀환하는 러시아 함선은 해안 포대를 강화하기 위해 대포를 제거당했다. 이후 뤼순항 포위전 과정에서 제거되어 일본은 해당 지역에 대한 확실한 해상 지배권을 갖게 되었다.[34]
이 전투의 여파는 1905년 포츠머스 조약으로 이어진 협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재했다. 러시아는 이 손실로 인해 분쟁 해결을 모색하여 영토 양보와 외교적 타협을 가져왔다.[35]
후에 마오쩌둥은 러일 전쟁의 노래 "황해의 싸움"의 가사를 소개하며, 일본의 긍지를 칭찬했다고 한다.
4. 2. 쓰시마 해전의 교훈
황해 해전은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데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2]1890년대 후반, 당시 기술로는 전함 간 교전 거리가 약 3km에서 4km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황해 해전에서 러시아와 일본 함대는 약 12.87km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포격을 시작하고 명중시켜 해군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28][29] 러시아 전함은 사거리가 4km인 ''뤼졸'' 거리 측정기를 사용했고, 일본 전함은 최신(1903년) Barr and Stroud 일치식 거리 측정기를 사용하여 사거리가 6km였다.[27]
약 4시간의 전투 동안 양측에서 155mm에서 305mm에 이르는 7,382발의 포탄이 발사되었다. 이 중 305mm 주포탄은 862발(러시아 259발, 일본 603발)이었다.[30]
이 해전으로 뤼순 함대는 함포를 육상 요새에 배치하고 승무원을 육전 부대로 전환하여 전투 기능을 상실했다. 당시 일본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뤼순 요새 공략을 서둘렀다. 또한, 정자(丁字) 전법이 실패하고 적함을 침몰시키지 못한 것이 과제로 남았다. 이러한 교훈은 쓰시마 해전 승리에 활용되었다.
4. 3. 한국에 대한 영향
황해 해전은 한반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승리로 한국은 더욱 고립되었고, 을사늑약 체결과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 국권 침탈이 가속화되는 배경이 되었다.[35]5. 참여 병력
황해 해전에는 일본 제국 해군의 연합함대와 러시아 제국 해군의 제1태평양 함대가 참전했다.
일본 연합함대는 도고 헤이하치로 대장의 지휘 아래, 제1함대와 제3함대로 구성되었다. 제1함대는 리하 토키오 소장의 제1전대와 데와 시게토 중장의 제3전대로, 제3함대는 카타오카 시치로 중장의 제5전대와 토고 마사미치 소장의 제6전대로 나뉘었다. 이들은 전함, 장갑순양함, 방호순양함, 구축함, 어뢰정 등 다양한 함선을 보유했다.
러시아 제1태평양 함대는 빌헬름 비트게프트 소장이 지휘했으며, 기함 체사레비치를 비롯하여 전함, 순양함, 구축함, 병원선 등으로 구성되었다.
5. 1. 일본 연합함대
도고 헤이하치로 대장이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는 러일 전쟁 당시 황해 해전에 참전한 주력 함대였다. 연합함대는 제1함대와 제3함대로 구성되었으며, 다양한 종류의 함선들을 포함하고 있었다.제1함대는 연합함대 사령부 직속으로, 리하 토키오 소장이 지휘하는 제1전대와 데와 시게토 중장이 지휘하는 제3전대로 나뉘었다.
- 제1전대:
- 주력함: 미카사 (함대 기함), 아사히, 후지, 시키시마 (전대 기함)
- 장갑순양함: 카스가, 닛신 (제3함대 기함에서 임시 편입)
- 제3전대:
- 장갑순양함: 야쿠모 (전대 기함, 제2함대에서 임시 편입), 아사마 (제2함대에서 임시 편입, 탄약 보충 후 합류)
- 순양함: 카사기, 치토세, 타카사고
제1함대는 구축함대와 어뢰정대도 포함했다.
- 제1구축대: 아사시오, 카스미, 하쿠운
- 제2구축대: 이카즈치, 이나즈마, 오보로, 아케보노
- 제3구축대: 우스구모, 시노노메, 사자나미
- 제4구축대: 아사기리, 하루사메, 무라사메, 하야토리
- 제5구축대: 무라쿠모, 유우기리, 시라누이, 카게로우
- 제1정대: 제육칠호, 제육팔호, 제육구호, 제칠십호
- 제14정대: 치도리, 카사사기, 하야부사, 마나즈루
제3함대는 카타오카 시치로 중장이 지휘했으며, 제5전대와 제6전대로 구성되었다.
제3함대 역시 어뢰정대를 포함했다.
- 제2정대: 제삼칠호, 제삼팔호, 제사십오호
- 제6정대: 제오십육호, 제오십팔호
- 제10정대: 제사십호, 제사십일호, 제사십이호, 제사십삼호
- 제16정대: 시라타카, 제삼구호, 제육육호
- 제20정대: 제육이호, 제육삼호, 제육사호, 제육오호
- 제21정대: 제사십사호, 제사십칠호, 제사십구호
해전 당시 일본 함대는 주력함의 포격전에서 러시아 함대에 비해 열세를 보였다. 특히, 시모세 화약을 사용한 포탄이 포신 내에서 조기 폭발하는 문제가 발생하여, 시키시마와 아사히의 주포가 파손되기도 했다.[15]
다음은 해전에 참가한 일본 군함들의 피해 및 사상자 현황이다.[32]
전함 | 주 무장 | 수선 장갑 | 진수 연도 | 건조사 | 피해 | 사상자 |
---|---|---|---|---|---|---|
미카사 (기함) | 12인치포 4문, 6인치포 14문 | 9인치 | 1900 | 배로우, 영국 | 20발 명중, 후방 305 mm 포탑 파괴 | 125명 사상 |
아사히 | 12인치포 4문, 6인치포 14문 | 9인치 | 1899 | 클라이드뱅크, 영국 | 수선 부근 305 mm 포탄 1발 명중, 후방 305 mm 포신 2문 파열 | 승무원 2명 부상 |
시키시마 | 12인치포 4문, 6인치포 14문 | 9인치 | 1898 | 템스 철공소, 영국 | 전방 305 mm 포신 1문 파열 | |
야쿠모 장갑 순양함 | 8인치포 4문, 6인치포 12문 | 7인치 | 1899 | 슈테틴, 독일 | 305 mm 포탄 1발 명중 |
5. 2. 러시아 제1태평양 함대 (뤼순 함대)
러시아 제국 해군의 제1태평양 함대는 빌헬름 비트게프트 제독의 지휘 아래 포트 아서에 갇혀 있었다. 1904년 8월 10일, 비트게프트 제독은 기함 체사레비치를 필두로 블라디보스토크로의 탈출을 시도했다.[4]사령장관 대리는 빌헬름 비트게프트 소장이었으며, 그는 체사레비치를 기함으로 삼았다. 그가 이끌던 함선들은 다음과 같다.
함종 | 함명 | 주 무장 | 수선 장갑 | 진수 연도 | 건조사 | 피해 | 사상자 |
---|---|---|---|---|---|---|---|
전함 | 체사레비치 (기함) | 12인치포 4문, 6인치포 12문 | 9 3/4인치 | 1901 | 툴롱, 프랑스 | 305 mm 포탄 13발 명중, 203 mm 포탄 2발 명중 | 승무원 12명 사망, 47명 부상. 제1 태평양 함대 제독 빌헬름 비트게프트 전사. |
전함 | 레트비잔 | 12인치포 4문, 6인치포 12문 | 9인치 | 1900 | 필라델피아, 미국 | 203~305 mm 포탄 18발 명중 | 승무원 6명 사망, 42명 부상 |
전함 | 포베다 | 10인치포 4문, 6인치포 11문 | 9인치 | 1900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 대구경 포탄 11발 명중 | 승무원 4명 사망, 29명 부상 |
전함 | 페레스베트 | 10인치포 4문, 6인치포 11문 | 9인치 | 1898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 39발 명중 | 승무원 13명 사망/69명 부상 |
전함 | 세바스토폴 | 12인치포 4문, 6인치포 12문 | 14 1/2인치 | 1895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 여러 발의 포탄 명중 | 승무원 1명 사망, 62명 부상 |
전함 | 폴타바 | 12인치포 4문, 6인치포 12문 | 14 1/2인치 | 1894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 12~14발 명중, 203~305 mm 포탄 | 승무원 12명 사망, 43명 부상 |
순양함 | 노비크 | - | - | - | - | - | - |
순양함 | 아스콜드 | - | - | - | - | - | - |
순양함 | 팔라다 | - | - | - | - | - | - |
순양함 | 디아나 | - | - | - | - | - | - |
구축함 | 우이노스리위, 울라스츠누이, 그로조보이, 보이키, 베즈스트라시누이, 베즈심누이, 베스포시차즈누이, 부르누이 | - | - | - | - | - | - |
병원선 | 몽골리아 | - | - | - | - | - | -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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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u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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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서적
[32]
서적
[33]
서적
[3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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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The Treaty of Portsmouth and the Russo-Japanese War, 1904–1905
https://history.stat[...]
Office of the Historian, Foreign Service Institute,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2024-09-15
[36]
웹사이트
帝国海軍と鎮海
https://www.mod.go.j[...]
2012-05-25
[3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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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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