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우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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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리우스 3세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즉위 전에는 아르타샤타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코도마누스로도 알려졌다. 그는 기원전 336년에 왕위에 올랐으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공으로 인해 이수스 전투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했다. 결국 베소스에게 살해당하면서 아케메네스 왕조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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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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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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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아케메네스 제국의 만왕의 왕 |
통치 기간 | 기원전 336년 – 기원전 330년 |
이전 통치자 | 아르세스 |
이후 통치자 | 알렉산드로스 대왕 (마케도니아 제국)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 (자칭) |
배우자 | 스타테이라 1세 |
자녀 | 스타테이라 2세 드뤼페티스 오쿠스 |
왕조 | 아케메네스 왕조 |
아버지 | 아르사메스 |
어머니 | 시시감비스 |
출생 | 기원전 380년경 |
사망 | 기원전 330년 7월 (약 50세) |
사망 장소 | 파르티아 |
매장지 | 페르세폴리스 |
종교 | 조로아스터교 |
파라오 (이집트) | |
통치 기간 | 기원전 336년 – 기원전 332년 |
이전 통치자 | 아르세스 |
이후 통치자 | 알렉산드로스 대왕 |
2. 이름
그가 즉위하기 전, 다리우스는 아르타샤타(*Artašiyāta|아샤에서 행복함peo)라는 이름을 사용했다.[1] 2세기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는 다리우스를 코도마누스(Codomannus)라고 언급한 유일한 역사가인데, 이는 그가 두각을 나타내기 전에 사용했던 이름이라고 한다. 이는 그의 별명일 수도 있고, 세 번째 이름일 수도 있다. 그 어원은 불확실하다.[1] 바디안은 이 이름이 서부 셈어 기원일 가능성이 높으며, 아마도 아람어 ''qdmwn''("동쪽에서 온 사람, 동방인")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4] 두 개의 이름을 갖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바빌론의 인물들이 두 개의 이름을 가졌다는 기록이 여러 건 있는데, 종종 바빌론식 이름과 아람어 이름을 함께 사용했다. 한 페르시아의 유력자도 바빌론식 이름과 이란식 이름을 모두 가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은 다리우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바디안은 그의 본명이 아람어 코도마누스였으며, 그가 계급이 상승하면서 나중에 아르타샤타로 바꾸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5] 그는 기원전 336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위에 오르면서 다리우스(Daraya-vahauš|선을 굳건히 지키는 자peo)라는 통치명을 처음 사용했다.[6]
기원전 338년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환관이자 재상인 바고아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를 처형하고, 2년 후에는 그의 아들 아르세스마저 처형했다. 바고아스는 자신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코도만누스를 왕에 앉혔는데 그가 바로 다리우스 3세이다.[1] 다리우스 3세는 즉위하자마자 바고아스의 영향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했고, 이에 바고아스는 독배를 주어 그를 죽이려 했으나 다리우스 3세는 그 잔을 도리어 바고아스에게 주어 죽였다.[1]
3. 생애
기원전 337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는 페르시아 지배 아래에 있는 그리스 도시들의 해방을 위해 코린토스 동맹을 결성하고, 이듬해 소아시아에 선발대를 보냈다. 그러나 그해 7월에 필리포스 2세는 암살당했고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뒤를 이었다.
기원전 334년 봄, 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이끌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넜다. 페르시아 군대는 그라니코스강 전투에서 패배했다. 다음 해 알렉산드로스는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점령한 후, 킬리키아까지 진격했다. 다리우스 3세는 그라니코스강 전투에는 직접 나서지 않고, 페르세폴리스에 머물면서 자신의 속주 총독들에게 알렉산드로스를 막도록 하였다.
다리우스 3세는 그라니코스강 전투 후 1년 반이 지나서야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에 맞서 전장에 나섰다. 그의 군대는 알렉산드로스 군보다 수가 많았지만, 다리우스 3세는 패배하여 도망쳤다.[3] 그의 어머니인 시시감비스와 처자식들은 알렉산드로스의 포로가 되었다. 그 후 알렉산드로스에게 강화하자는 편지를 2번이나 보냈고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가 동맹을 맺는 조건으로 막대한 재물을 주고, 유프라테스강 서쪽에 있는 페르시아 영토를 마케도니아에게 모두 넘겨주며, 자기 딸과 결혼하라고 제의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러한 강화 제의를 다 거절하고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했다.[9]
다리우스 3세는 마케도니아 군이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건너게 하고 기원전 331년 10월 1일에 지금의 이라크 모술의 동쪽에 있는 가우가멜라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했다.[6]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는 야습을 경계하여 군대에 무장한 채 야경을 시켰고, 오히려 사기를 떨어뜨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다리우스 3세는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공격에 낫 전차와 전투 코끼리등을 준비했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자신이 먼저 도망쳤다고 한다.[7]
다리우스 3세는 엑바타나로 피난하였고 알렉산드로스가 추격하자 다시 동쪽으로 박트리아까지 피난하였지만, 자신의 부하이자 바고아스의 친척이었던 베소스 일파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3. 1. 초기 생애
다리우스 3세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먼 친족이었다. 그는 아르사메스의 아들이자, 다리우스 2세가 기원전 424년부터 405년까지 아케메네스 제국을 통치했던 오스타네스의 손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시시감비스였다. 다리우스에게는 옥시아트레스, 스타테이라 1세라는 형제와 누이가 있었다.
기원전 350년대 카두시 원정에서 아르타샤타(다리우스 3세)는 단독으로 전사를 쓰러뜨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눈에 띄었고, 그 결과 아르메니아의 사트라프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승진 이후에 첫 번째 결혼을 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후 아람어 이름인 코도마누스를 버렸다. 그리스 작가들은 아르타샤타가 왕의 "전령"이자 "노예"가 되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고대 페르시아어 '반다카'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으로, "심복, (충성스러운) 하인, 가신"을 의미했다.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우스 1세는 이 용어를 사용하여 고위 관료를 지칭한다. 아르타샤타는 왕실 "우편 서비스"를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기원전 340년경에 여동생 스타테이라 1세와 두 번째 결혼을 했고, 기원전 339년에 아들 오쿠스를 낳았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아르타샤타가 자신이나 아들 아르세스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38년, 킬리아르크('하자라파티쉬') 바고아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와 그의 아들들 대부분을 독살했다. 바고아스는 어린 아르세스(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를 왕위에 앉혔으나, 아르세스는 바고아스를 독살하려다 실패하고 가족과 함께 독살당했다. 이후 바고아스는 기원전 336년에 아르타샤타를 왕위에 앉혔는데, 그가 바로 다리우스 3세이다. 다리우스 3세는 용감함으로 명성이 높았고, 왕족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았다.
3. 2. 왕위 계승
기원전 338년,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환관이자 재상인 바고아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를 처형하고, 2년 후에는 그의 아들 아르세스마저 처형했다. 바고아스는 자신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왕족인 코도만누스를 다리우스 3세로 왕위에 앉혔다. 다리우스 3세의 아버지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조카였고, 어머니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딸인 시시감비스였다.
다리우스 3세는 즉위 후 바고아스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했고, 바고아스는 독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다리우스 3세에게 독살당했다. 즉위 당시 제국은 불안정했고, 많은 속주 태수들은 믿을 수 없는 상태였다.
최근 바빌론에서 발굴된 천문 일지에 따르면, 다리우스 3세의 즉위 전 이름은 아르타샤타였다.[1]
3. 3. 알렉산드로스와의 전쟁
기원전 338년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환관이자 재상인 바고아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를 처형하고, 2년 후에는 그의 아들 아르세스마저 처형했다. 바고아스는 자신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코도만누스를 왕에 앉혔는데 그가 바로 다리우스 3세이다.[1] 다리우스 3세는 즉위하자마자 바고아스의 영향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했고, 바고아스는 독배를 왕에게 주어 죽이려 했으나 다리우스 3세는 그 잔을 도리어 바고아스에게 주어 죽였다.[1]
기원전 337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는 페르시아 지배 아래에 있는 그리스 도시들의 해방을 위해 코린토스 동맹을 결성하고, 이듬해 소아시아에 선발대를 보냈다. 그러나 그해 7월에 필리포스 2세는 암살당했고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뒤를 이었다.
기원전 334년 봄, 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이끌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넜다. 페르시아 군대는 그라니코스강 전투에서 패배했다. 다음 해 알렉산드로스는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점령한 후, 킬리키아까지 진격했다.[2] 다리우스 3세는 그라니코스강 전투에는 직접 나서지 않고, 페르세폴리스에 머물면서 자신의 속주 총독들에게 알렉산드로스를 막도록 하였다.
다리우스 3세는 그라니코스강 전투 후 1년 반이 지나서야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에 맞서 전장에 나섰다. 그의 군대는 알렉산드로스 군보다 수가 많았지만, 다리우스 3세는 패배하여 도망쳤다.[3] 이때 그의 어머니인 시시감비스와 처자식들이 알렉산드로스의 포로가 되었다. 그 후 알렉산드로스에게 강화하자는 편지를 2번이나 보냈고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가 동맹을 맺는 조건으로 막대한 재물을 주고, 유프라테스강 서쪽에 있는 페르시아 영토를 마케도니아에게 모두 넘겨주며, 자기 딸과 결혼하라고 제의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러한 강화 제의를 다 거절하고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했다.[9]
다리우스 3세는 마케도니아 군이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건너게 하고 기원전 331년 10월 1일에 지금의 이라크 모술의 동쪽에 있는 가우가멜라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했다.[6]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는 야습을 경계하여 군대에 무장한 채 야경을 시켰고, 오히려 사기를 떨어뜨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다리우스 3세는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공격에 낫 전차와 전투 코끼리등을 준비했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자신이 먼저 도망쳤다고 한다.[7]
다리우스 3세는 엑바타나로 피난하였고 알렉산드로스가 추격하자 다시 동쪽으로 박트리아까지 피난하였지만, 자신의 부하이자 바고아스의 친척이었던 베소스 일파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4. 최후
다리우스 3세는 마케도니아 군이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건너게 하고 기원전 331년 10월 1일에 지금의 이라크 모술 동쪽에 있는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8] 엑바타나로 피난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가 추격하자 다시 동쪽으로 박트리아까지 피난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부하이자 바고아스의 친척이었던 베소스 일파에게 잡혀 처형되었다.[8]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더에게 패배한 후 한때 위대했던 군대를 재건하려 했지만, 권위가 훼손되었고, 알렉산더가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스에서 보여준 관대한 정책이 페르시아 정책에 대한 수용 가능한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에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싸웠던 군대에 필적하는 병력을 모으는 데 실패했다.[8]
다리우스는 엑바타나에서 알렉산더 군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박트리아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산맥을 통과하는 주요 도로인 카스피 해 관문을 통해 군대를 이끌어 뒤따르는 군대의 속도를 늦추려 했다.[10] 페르시아군은 알렉산더의 기습 공격 위협에 점차 사기가 저하되어 많은 탈영병이 발생했고, 결국 사트라프였던 베소스와 왕궁 경비대를 책임졌던 나바르자네스가 주도하는 쿠데타가 일어났다.[11] 다리우스는 이들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공모자들은 알렉산더와 그의 군대에 대한 잇따른 실패로 인해 그를 제거하려는 열망이 커졌다. 그리스 용병인 파트론은 다리우스에게 베소스와 나바르자네스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그리스 용병으로 구성된 경호대를 받아들일 것을 권했지만, 국왕은 정치적인 이유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12] 베소스와 나바르자네스는 결국 다리우스를 묶어 소달구에 던져 넣었다. 쿠르티우스의 "알렉산더의 역사"에 따르면, 이때 알렉산더와 소규모 기동 부대가 도착하여 페르시아군을 공황 상태에 빠뜨렸고, 베소스와 다른 두 명의 공모자, 사티바르자네스와 바르사엔테스는 창으로 왕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를 죽도록 내버려두었다.[13]
마케도니아 병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소달구 안에서 다리우스를 죽었거나 죽어가는 상태로 발견했다. 알렉산더는 소달구 안에서 다리우스의 시신을 보고 죽은 왕의 손가락에서 인장 반지를 빼냈다. 이후 그는 다리우스의 시신을 페르세폴리스로 돌려보내 성대한 장례를 치르고 왕실 무덤에 묻히도록 명령했다.[14] 다리우스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15] 알렉산더는 결국 기원전 324년 수사에서 다리우스의 딸 스타테이라와 결혼했다.
늙은 왕이 패배하고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자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통치가 공식화되었다. 베소스는 다리우스를 죽인 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라는 왕호를 칭하고 스스로를 아시아의 왕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8] 그는 이후 알렉산더에게 붙잡혀 고문을 받고 처형되었다.
5. 출신에 관한 이설
과거에는 다리우스 1세를 선조로 여겼고, 그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방계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왕조의 창시자인 키루스 2세의 직계에서 아케메네스 왕조 4대 왕으로 여겨지는 다리우스 1세가 제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초대부터 직계로 이어지는 왕조가 아니었다는 것이 연구자들 사이의 논쟁 속에서 거의 밝혀졌다.[1] 다리우스 3세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형제 오스타네스의 손자이자, 오스타네스의 아들 아르사메스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누이 시시감비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여겨진다.[1] 그러나 원래는 이전의 아케메네스 왕조와 관련이 없는 지방의 총독에 불과했으며, 아케메네스 왕조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옹립되었다고도 한다.[1]
6. 역사적 평가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마지막 세기는 자료 부족으로 두드러지는데, 특히 다리우스 3세의 통치 기간이 그러하다. 그는 페르시아 자료에서는 언급되지 않으며, 성공적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경력과 대조되는 인물로 묘사하는 그리스 역사가들의 기록을 통해서만 거의 알려져 있다.[1]
참조
[1]
서적
Book XVII, Chapter 5
https://penelope.uch[...]
[2]
서적
The Greek Wars: The Failure of Persia
[3]
서적
The Campaigns of Alexander
[4]
서적
Envy of the Gods: Alexander's Ill-fated Journey across Asia
Da Capo Press
2004
[5]
서적
[6]
서적
[7]
서적
Alexander the Great
[8]
서적
The Genius of Alexander the Great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Alexander der Große
Dtv, Munich
1993
[16]
서적
Alexander the Great
[17]
서적
Homosexuality & Civilization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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