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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흐르바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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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흐르바라즈는 "제국의 멧돼지"를 뜻하는 칭호로, 사산 제국의 장군이자 군사 지휘관이었다. 그는 비잔틴-사산 전쟁에서 활약하며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나, 호스로 2세와의 갈등으로 비잔틴 편에 섰다. 이후 사산 제국의 왕위를 찬탈하여 잠시 통치했으나, 암살당했다. 그의 죽음은 사산 제국 내전의 원인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들은 비잔틴 제국과 사산 제국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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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흐르바라즈
기본 정보
샤흐르바라즈의 주화
칭호이란과 비이란의 왕중왕
팔라비어(샤흐르바라즈)
통치
계승샤한샤
왕조사산 제국
통치 기간630년 4월 27일 – 630년 6월 9일
이전 통치자아르다시르 3세
개인 정보
사망일630년 6월 9일
사망 장소크테시폰
왕가미흐란 가문
아버지아르다시르
배우자미흐란
종교조로아스터교

2. 이름

'''샤흐르바라즈'''는 문자 그대로 "제국의 멧돼지"를 의미하는 칭호이다.[1] 이는 멧돼지가 조로아스터교이즈드 바흐람과 관련된 동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군사 지휘 능력과 호전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샤흐르와라즈'(고대 페르시아어: 𐭱𐭲𐭫𐭥𐭫𐭠𐭰|štlwlʾcpal)는 "국가"를 의미하는 '샤흐르'와 "멧돼지"를 의미하는 '와라즈'로 구성된 중세 페르시아어 단어이다.[1] 이 단어는 신 페르시아어에서는 '샤흐르바라즈'(شهربراز|샤흐르바라즈fa)로, 비잔틴 자료에서는 '사르바로스'(그리스어: Σαρβάρος|사르바로스grc; 라틴어: Sarbarus|사르바루스la)로 표기된다.[2] 페르도우시는 중세 페르시아어 '와라즈'에서 유래한 축약형 '구라즈'(گراز|구라즈fa, 문자 그대로 "멧돼지")를 사용했다.[3]

알타바리에 따르면, 그의 본명은 '파루칸'(فرخان|파루칸ar)이었다.[3] 이 이름은 아르메니아어 자료에서는 '코렘'으로,[5] 페르도우시의 ''샤나메''에서는 '파라야인'(فرایین|파라야인fa)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페르도우시는 샤흐르바라즈의 인물을 파라야인(찬탈자)과 바흐람 초빈의 반란을 지지한 샤흐란-구라즈 두 명으로 나누었다.[3]

아르메니아 자료에서는 또한 '라즈미오잔'('라즈미오잔', '에라즈미오잔', '라즈마유잔'으로도 표기)이라는 칭호를 사용한다.[5][4] 이 칭호는 '라스미오즈단', '라스미오잔'(고대 조지아어), '르스미사'(, 판독 불확실), '로메잔', '루미잔', '룸부잔'(알타바리, ''타리크'')으로도 언급된다.[5]

3. 생애

샤흐르바라즈는 비잔티움과 사산 왕조의 전쟁()에서 호스로 2세 치세에 페르시아의 장군으로 활약했다. 613년에서 614년 사이 다마스쿠스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십자가를 탈취했다. 그러나 헤라클리우스가 비잔티움의 새 황제가 되자, 호스로 2세와 샤흐르바라즈 사이에 의심이 생겼다. 헤라클리우스는 샤흐르바라즈에게 호스로 2세가 그의 처형을 계획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샤흐르바라즈는 비잔티움과의 전쟁을 중단했다.[33][34]

페르시아의 패배 후, 샤흐르바라즈는 모반에 연루되었다. 630년 아르다시르 3세를 살해하고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다. 헤라클리우스와 평화 조약을 맺고 성십자가를 돌려주었다.[38][39]

그러나 그해 4월 하자르족과 돌궐아르메니아 침략을 막지 못하고, 두 달 뒤 파루크 호르미즈드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뒤를 이어 호스로 3세가 집권했다.[46]

3. 1. 초기 생애

샤흐르바라즈는 미흐란 가문 출신으로[6] 파르티아 7대 가문 중 하나였으며, 아르다시르라는 인물의 아들이었다. 훗날 사산 제국 군대에 입대하여 고위직에 올랐으며, 네므로즈의 스파흐베드(군 사령관)로 임명되었다. 그는 사산 왕 호스로 2세의 누이인 미르한과 결혼하여 샤푸르-이 샤흐르바라즈라는 아들을 두었다.[7] 샤흐르바라즈는 또한 페르시아의 니케타스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그가 같은 여성에게서 태어났거나 다른 여성에게서 태어났을 수 있다.

3. 2.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 (602-628)

호스로 2세는 26년 동안 이어진 마지막이자 가장 파괴적인 비잔틴-사산 전쟁을 시작했을 때 샤흐르바라즈를 처음 언급했다. 호스로 2세는 샤흐르바라즈 및 다른 장군들과 함께 604년에 다라와 에데사를 정복했으며, 북쪽에서는 비잔틴 군대가 호스로 2세가 사산 아르메니아의 대부분, 메소포타미아 일부 및 이베리아 왕국 서반부를 넘겨주기 전의 옛 591년 이전 국경으로 밀려났다. 호스로 2세는 잃어버린 영토를 재정복한 후 전장에서 물러나 군사 작전을 장군들에게 맡겼고, 샤흐르바라즈도 그중 한 명이었다. 610년, 아르메니아인[8]이자 아르사케스 출신[9]인 헤라클리우스는 비잔틴 황제 포카스에게 반란을 일으켜 그를 죽이고 스스로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10] 비잔틴 황제가 된 후, 그는 613년 안티오크 외곽에서 사산 왕조에 대한 대규모 반격을 준비했지만, 비잔틴 군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그 도시를 점령한 샤흐르바라즈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11] 이로 인해 사산 왕조는 지중해로의 해상 접근권을 얻게 되었다.

611년부터 624년까지 시리아, 아나톨리아,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를 거친 캠페인 지도.


안티오크 외곽에서 비잔틴 군대가 패배한 후, 헤라클리우스와 그의 형제 테오도르, 장군 니케타스는 시리아에서 군대를 합쳤지만, 샤흐르바라즈와 그의 군대에 패배하여 다마스쿠스를 포위하고 점령했으며, 많은 비잔틴 군인들을 포로로 잡았다. 더욱이 샤흐르바라즈는 아드리아트 근처에서 비잔틴 군대를 격파했다. 그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그가 사산 군대를 팔레스타이나로 이끌고 피비린내 나는 포위 공격 끝에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이었는데, 이는 기독교인들에게 신성한 도시였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성 십자가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618년, 샤흐르바라즈는 호스로 2세의 명령을 받아 이집트를 침공했고, 619년까지 알렉산드리아, 비잔틴 이집트의 수도가 사산 왕조의 손에 들어갔다.[12][13]

알렉산드리아가 함락된 후, 샤흐르바라즈와 그의 군대는 나일강을 따라 사산 왕조의 지배를 남쪽으로 확장했다.[14] 621년까지 이 지역은 사산 왕조의 손에 안전하게 들어갔고, 사흐랄라뇨잔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622년, 헤라클리우스는 아나톨리아에서 사산 제국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샤흐르바라즈는 그를 상대하기 위해 그곳으로 보내졌지만, 결국 그에게 패배했다.[15]

헤라클리우스의 승리 후, 그는 코카서스 알바니아로 진격하여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16] 샤흐르바라즈는 샤힌 및 샤흐라플라칸과 함께 호스로 2세의 명령에 따라 헤라클리우스의 군대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파견되었다.[17] 샤힌은 비잔틴 군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사산 지휘관들 사이의 질투심 때문에 샤흐르바라즈는 군대를 이끌고 승리의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서둘러 갔다. 헤라클리우스는 티그라나케르트에서 그들을 만나 샤흐라플라칸과 샤힌의 군대를 차례로 격파했다. 이 승리 후, 헤라클리우스는 아락세스 강을 건너 다른 쪽 평원에 진을 쳤다. 샤힌은 자신의 군대와 샤흐라플라칸의 군대의 잔여 병력과 함께 헤라클리우스를 추격하는 샤흐르바라즈에 합류했지만, 늪 때문에 속도가 늦춰졌다.[2][18] 알리오비트에서 샤흐르바라즈는 군대를 분할하여 약 6,000명의 병력을 헤라클리우스를 매복시키기 위해 보냈고, 나머지 병력은 알리오비트에 머물렀다. 헤라클리우스는 625년 2월에 사산 군대의 본진에 기습 야간 공격을 감행하여 파괴했다. 샤흐르바라즈는 그의 후궁, 짐, 그리고 병사들을 잃고 옷을 벗은 채 겨우 혼자 도망쳤다.[19]

헤라클리우스는 반 호 북쪽에서 겨울을 보냈다. 625년, 그의 군대는 유프라테스 강으로 밀고 들어가려 했다. 불과 7일 만에 그는 아라라트 산과 아르사니아스 강을 따라 약 321.87km를 우회하여 아미다와 마르티로폴리스를 점령했는데, 이들은 상부 티그리스 강의 중요한 요새였다.[20][21] 그런 다음 헤라클리우스는 유프라테스 강으로 향했고 샤흐르바라즈가 그를 추격했다. 아랍 자료에 따르면, 그는 사티다마 또는 바트만 수 강에서 저지되어 패배했지만, 비잔틴 자료에는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다.[2] 헤라클리우스와 샤흐르바라즈 사이의 또 다른 작은 교전이 사루스 강 근처 아다나에서 일어났다.[22] 샤흐르바라즈는 비잔틴 군대의 맞은편 강둑에 그의 군대를 배치했다.[23] 다리가 강을 가로질렀고, 비잔틴 군대는 즉시 건너갔다. 샤흐르바라즈는 비잔틴 군대를 매복으로 유도하기 위해 후퇴하는 척했고, 헤라클리우스 군대의 선봉대는 수분 안에 파괴되었다. 그러나 사산인들은 다리를 덮는 것을 소홀히 했고, 헤라클리우스는 후위 부대와 함께 두려움 없이 사산인들이 쏜 화살을 맞으며 건너가 사산인들에게 불리한 전세를 뒤집었다.[24] 샤흐르바라즈는 헤라클리우스에게 변절한 그리스인에게 그의 존경심을 표했다. "당신의 황제를 보시오! 그는 이 화살과 창을 모루보다 더 두려워하지 않소!" 사루스 전투는 찬양 연설가들이 과장한 비잔틴인들의 성공적인 퇴각이었다.[22] 전투 이후, 비잔틴 군대는 트레비존드에서 겨울을 보냈다.

3. 3.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626)

샤흐르바라즈는 소규모 군대와 함께 헤라클리우스의 측면을 뚫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건너편 보스포루스 해협에 있는 사산 제국의 기지인 칼케돈으로 향했다. 호스로 2세는 판노니아 아바르의 카간과 협력하여 유럽과 아시아 양쪽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로 했다.[2] 샤흐르바라즈의 군대는 칼케돈에 주둔했고, 아바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유럽 쪽에 자리 잡고 발렌스 수도교를 파괴했다.[25] 그러나 비잔틴 해군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제했기 때문에 사산 제국은 동맹을 돕기 위해 유럽 쪽으로 군대를 보낼 수 없었다.[26][27] 이는 사산 제국이 공성전에 능숙했기 때문에 공성전의 효과를 감소시켰다.[28] 또한, 사산 제국과 아바르는 경비가 삼엄한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의사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두 세력 간에 어느 정도 소통이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2][27][29]

비잔틴 시대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 지도.


8월 7일, 군대를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수송하던 사산 제국의 뗏목 함대가 비잔틴 선박에 포위되어 파괴되었다. 아바르 휘하의 슬라브족은 골든 혼을 건너 해벽을 공격하려 했고, 주 아바르군은 육상 성벽을 공격했다. 파트리키안 보누스의 갤리선이 슬라브족 보트를 들이받아 파괴했고, 8월 6일부터 7일까지 이어진 아바르의 육상 공격도 실패했다.[30] 테오도르가 샤힌을 결정적으로 이겼다는 소식(샤힌이 우울증으로 죽었다고 한다)에 아바르는 이틀 만에 발칸 내륙으로 후퇴했고, 다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심각하게 위협하지 않았다. 샤흐르바라즈의 군대가 여전히 칼케돈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위협은 끝났다.[31][32]

샤흐르바라즈의 실패에 실망한 호스로 2세는 사산 제국군의 부사령관인 카르다리간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카르다리간이 샤흐르바라즈를 죽이고 군대를 이끌고 크테시폰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지만, 이 편지를 전달하던 사람들이 갈라티아에서 비잔틴 군인에게 붙잡혔고, 이들은 이 편지를 미래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3세에게 넘겼고, 그는 다시 헤라클리우스에게 넘겼다. 헤라클리우스는 이 편지를 읽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회의에서 샤흐르바라즈에게 이 편지를 보여주겠다고 제안했다. 샤흐르바라즈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헤라클리우스를 만났고, 거기서 편지를 읽고 헤라클리우스 편으로 돌아섰다.[33] 샤흐르바라즈는 그 후 편지의 내용을 바꿔 호스로 2세가 장교 400명을 죽이기를 원한다고 명시하여 카르다리간과 나머지 군대가 그에게 충성하도록 했다.[34]

그 후 샤흐르바라즈는 군대를 북부 시리아로 이동시켜 호스로 또는 헤라클리우스를 언제든지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여전히, 호스로의 가장 유능한 장군이 무력화되면서 헤라클리우스는 이란 침공 전에 적의 가장 훌륭하고 경험이 풍부한 병력을 일부 빼앗고 측면을 확보했다.[35]

3. 4. 호스로 2세 폐위와 왕위 찬탈

사산 제국 메소포타미아와 그 주변 지도


627년, 호스로 2세는 샤흐르바라즈에게 크테시폰으로 군대를 보내라고 지시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샤흐르바라즈는 이에 불복하고 아수리스탄으로 이동하여 아르다시르 쿠라에 야영지를 설치했다. 호스로 2세는 파루흐자드를 보내 협상을 시도했으나, 파루흐자드는 오히려 샤흐르바라즈와 함께 호스로 2세에 대항하는 비밀 음모를 꾸몄다.[86]

1년 후,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과 호스로 2세의 압제에 지친 사산 제국의 봉건 가문들은 호스로 2세의 아들 카바드 2세를 옹립했다. 이들은 호스로 2세를 감금하고 있던 아버지로부터 그를 구출했다. 봉건 가문에는 미흐란 가문을 대표하는 샤흐르바라즈, 스파흐베드 파루흐 호르미즈드와 그의 두 아들, 아스파흐바드 가문의 파루흐자드, 바라즈티로츠 2세 바그라투니가 이끄는 아르메니아 파벌, 카나랑 카나드바크 등이 참여했다.[87]

628년 2월, 카바드 2세는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호스로 2세를 투옥했다. 그는 2월 25일에 사산 제국의 왕으로 즉위하며, 의 도움을 받아 호스로 2세의 총애를 받던 아들 마르단샤를 포함한 모든 형제와 이복형제를 처형했다. 3일 후, 카바드 2세는 에게 아버지 호스로 2세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카바드 2세는 사산 제국 귀족들의 동의를 얻어 헤라클리우스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따라 비잔틴 제국은 잃어버린 영토, 포로, 전쟁 배상금, 614년 예루살렘에서 탈취당한 성십자가와 기타 유물을 모두 되찾았다.[88][89]

평화 조약으로 영토를 상실한 후, 분노한 귀족들은 사산 제국 내에서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는 국가 자원을 분열시켰고, 댐과 운하는 황폐해졌으며, 파괴적인 역병이 이란 서부 지역을 휩쓸어 인구의 절반이 사망했다. 카바드 2세 역시 역병으로 사망하고, 아르다시르 3세가 그 뒤를 이었다.[90]

카바드 2세가 사망하자, 헤라클리우스는 샤흐르바라즈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 "이제 이란의 왕은 죽었고, 그의 왕위와 왕국은 그대에게 돌아갔다. 나는 그대와 그대의 자손에게 그것을 수여하리라. 만약 군대가 필요하다면, 나는 그대를 돕기 위해 그대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많은 군대를 보낼 것이다."[91]

630년 4월 27일,[92] 샤흐르바라즈는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크테시폰을 포위했다.[93] 그러나 도시를 점령하지 못하고, 파르시그(페르시아) 파벌의 지도자이자 아르다시르 3세의 아버지 카바드 2세 치세 동안 제국의 재상을 지낸 피루즈 호스로와 동맹을 맺었다. 또한 626년에 샤흐르바라즈의 뒤를 이어 네므르즈의 ''spahbed''가 된 남다르 구쉬나스프와도 동맹을 맺었다.[93] 샤흐르바라즈는 이 두 유력자의 도움으로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아르다시르 3세와 그의 재상 마흐-아두르 구쉬나스프를 포함한 많은 사산 귀족들을 처형했다. 이후 샤흐르바라즈는 사산 제국의 새로운 가 되었으며,[94] 그의 즉위에 반대했던 장군 카르다리간을 살해했다.[95]

헤라클리우스는 샤흐르바라즈의 기독교인 아들 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했다. 이는 사산 제국의 후계자가 이란계 기독교인이라는 점에서 이란의 기독교화 가능성을 열어주는 사건이었다.[96] 얼마 후, 샤흐르바라즈는 전 재무 장관 야즈딘의 아들 샴타를 마르가의 교회에서 십자가형에 처했다. 이 처형은 샴타가 호스로 2세 재위 기간 동안 샤흐르바라즈를 모욕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630년 6월 9일, 즉위 40일 만에 샤흐르바라즈는 파루크 호르미즈드가 던진 창에 맞아 의식 중에 사망했다. 파루크 호르미즈드는 이후 호스로 2세의 딸 보란을 왕위에 올렸다.[97]

4. 유산

샤흐르바라즈는 602-628년 비잔틴-사산 전쟁과 그 이후의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가 호스로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사산 제국이 내전에 빠지는 원인이 되었다.[47] 샤흐르바라즈 사후, 그의 아들 샤푸르-이 샤흐르바라즈는 보란을 폐위시키고 사산 제국의 왕이 되었으나, 통치는 오래가지 못하고 곧 사산 귀족들에게 폐위되었다.[47] 같은 시기에 샤흐르바라즈의 아들 니케타스는 비잔틴 군에 들어갔고, 나중에는 아랍-비잔틴 전쟁 중 야르무크 전투에서 비잔틴 장군 중 한 명으로 등장했다.[48]

샤흐르바라즈를 둘러싼 영웅담과 로맨스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이후에 발전했다. 이슬람 시대에는 천일야화에 포함된 우마르 이븐 알-누만과 그의 아들들의 전설로 옮겨졌고, 이는 결국 디게네스 아크리타스의 후기 비잔틴 서사시에 영향을 미쳤다.

참조

[1] 논문 Lorsque l'archéologie rencontre la tradition littéraire. Les titres des chefs d'armée de l'Iran sassanide 2001
[2] 서적 Short History Dumbarton Oaks 1990
[3] 서적 The Shahnama Of Firdausi VI https://archive.org/[...] London : Kegan Paul Trench Trubner And Co.Ltd 2019-08-16
[4] 논문 Destruction of the ādur gušnasp temple in ādurbādagān as a revenge for abduction of the Holy Cross from Jerusalem in the context of the letters of Heraclius https://cyberleninka[...] 2017-04-26
[5] 서적 Documents and the History of the Early Islamic World https://books.google[...] BRILL 2014
[6] harvnb 2008
[7] harvnb 2008
[8] harvnb 1997
[9] harvnb "Sasanian Dynasty" 2005
[10] refOlster1993 Olster 1993
[11] harvnb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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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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