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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지마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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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지마모리는 《고지키》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인물로, 스이닌 천황의 명을 받아 불로장생의 과실인 토키지쿠노카구노코노미(귤)를 구하기 위해 도코요노쿠니(상세의 나라)로 떠났으나, 천황이 죽은 후 돌아와 슬픔에 잠겨 자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귤을 일본에 전래한 인물로 여겨져 과자, 귤의 신으로 숭배받으며, 묘는 나라현에 위치해 있다. 다지마모리는 미야케노 무라지 씨족의 시조로 여겨지며, 그의 이름은 '다지마 국의 국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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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지마모리
기본 정보
다지마모리 (『전현고실』에서)
다지마모리 (『전현고실』에서)
인물 정보
이름다지마모리
한자 표기田道間守
로마자 표기Tajimamori
관련 정보
직업신화 속 인물
등장 작품고사기
기타
참고 자료여록: 「상세의 나라」는 일본의 고대인이… - 마이니치 신문
관련 토막글신화

2. 전설

다지마모리의 가계는 《고지키》와 《일본서기》에서 다르게 묘사된다. 《고지키》는 그를 多遅摩比那良岐|다지마히나라키일본어의 아들이자 多遅麻清日子|다지마키요히코일본어의 형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일본서기》는 但馬日楢杵|다지마히나라키일본어의 아들인 但馬清彦|다지마키요히코일본어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스이닌 천황은 다지마모리에게 非時香菓|토키지쿠노카구노코노미일본어라 불리는 마법의 과일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이를 위해 다지마모리는 영생의 땅인 토코요노쿠니로 건너갔고,[1] 10년 후 잎이 달린 가지와 열매가 달린 가지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때 스이닌 천황은 이미 죽은 뒤였다. 다지마모리는 가지의 절반을 스이닌 천황의 미망인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은 죽은 천황의 무덤에 바친 후 슬픔에 잠겨 울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또한 천황의 죽음을 알게 된 후 슬퍼하며 연설을 읊었다고도 한다.[2]

2. 1. 문헌 기록

다지마모리의 가계에 대한 기록은 《고지키》와 《일본서기》에서 차이를 보인다. 두 문헌 모두 다지마모리가 신라에서 건너온 전승 속 인물인 아메노히보코의 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부친과 형제 관계에 대한 설명은 다르다.

문헌부친형제
《고지키》 (오진 천황 단)多遅摩比那良岐|다지마히나라키일본어동생: 多遅麻清日子|다지마키요히코일본어
일본서기》 (스이닌 천황 3년 조)但馬清彦|다지마키요히코일본어 (但馬日楢杵|다지마히나라키일본어의 아들)기록 없음



일본서기스이닌 천황기에 따르면, 스이닌 천황 90년 2월 1일에 천황은 다지마모리에게 영생의 과일로 알려진 '非時香菓|토키지쿠노카쿠노미일본어'[7] (현대의 귤로 여겨짐)를 구해오도록 명했다. 다지마모리는 이 명을 받고 토코요노쿠니(常世の国, 상세의 나라)로 떠났다.[1] 그러나 다지마모리가 과일을 구해 돌아오기 전인 스이닌 천황 99년 7월 1일에 천황은 세상을 떠났다.[8] 이듬해인 게이코 천황 원년 3월 12일, 다지마모리는 非時香菓|토키지쿠노카쿠노미일본어 여덟 꾸러미(잎을 딴 8가지와 잎이 달린 8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상세의 나라에서 돌아왔다. 천황의 죽음을 알게 된 다지마모리는 크게 슬퍼하며 가져온 과일의 절반을 황후에게 바치고, 나머지 절반을 천황의 능에 바친 뒤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는 죽기 전 슬픔에 찬 연설을 읊었다고도 한다.[2]

《고지키》 스이닌 천황 단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다지마모리는 '非時香菓|토키지쿠노카쿠노코노미일본어'[7] (역시 귤)를 구하기 위해 상세의 나라로 보내졌다. 다지마모리는 상세의 나라에 도착하여 그 열매를 얻어 만 8만・모 8모(많은 양을 의미하는 관용적 표현)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 사이에 천황은 붕어했기 때문에, 만 4만・모 4모를 나누어 황후에게 헌상하고, 나머지 만 4만・모 4모를 천황의 능 입구에 바치고 울부짖다가 결국 죽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만엽집》 권18 4063번에서는 다지마모리의 파견 전승을 전제로 한 노래가, 권18 4111번(반가 4112번)에서는 다지마모리를 소재로 한 노래가 실려 있다.[9][10]

2. 2. 귤 전래 설화

스이닌 천황은 다지마모리에게 常世の国|토코요노쿠니일본어라는 영생의 땅[1]에 가서 非時香菓|토키지쿠노카쿠노코노미일본어라 불리는 불로장생의 열매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이 열매는 오늘날의 귤로 여겨진다.[7]

일본서기》 스이닌 천황 기록에 따르면, 다지마모리는 스이닌 천황 90년에 명을 받고 토코요노쿠니로 떠났다. 1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인 게이코 천황 원년에 여덟 개의 잎 없는 가지와 여덟 개의 잎 달린 가지(八竿八縵)를 가지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스이닌 천황이 세상을 떠난 뒤였다 (스이닌 천황 99년 붕어[8]). 천황의 죽음을 알게 된 다지마모리는 가져온 귤나무 가지의 절반을 황후에게 바치고, 나머지 절반은 천황의 능 앞에 바친 뒤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또한 천황의 죽음을 슬퍼하며 연설을 읊었다고도 한다.[2]

《고지키》 스이닌 천황 기록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다지마모리는 非時香菓|토키지쿠노카쿠노코노미일본어[7]를 구하러 토코요노쿠니로 갔다가 많은 귤나무 가지(縵八縵·矛八矛)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천황이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는 가져온 가지의 절반을 황후에게 바치고, 나머지 절반을 천황의 능 앞에 바친 뒤 크게 울부짖다가 결국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다지마모리가 귤을 가져온 이야기는 고대 일본의 중요한 문헌들에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에서 귤 재배의 기원과 관련된 설화로 알려져 있다. 또한, 《만엽집》에도 다지마모리의 파견 전승을 바탕으로 한 노래(권18 4063번)와 다지마모리를 소재로 한 노래(권18 4111번, 반가 4112번)가 실려 있다.[9][10]

3. 묘

다지마모리의 묘(田道間守墓) (나라현 나라시). 스이닌 천황릉(호라이산 고분)의 주호 내에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는 다지마모리의 묘에 관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석일본기』 권10(술의6)에 인용된 『천서』에 따르면, 게이코 천황이 다지마모리의 충성을 기려 스이닌 천황릉 근처에 장사지냈다고 한다[11].

현재 스이닌 천황릉(스가와라후시미히가시 릉)으로 지정된 호라이산 고분(나라현 나라시)의 분구 남동쪽 주호(주변 해자) 안에는 작은 섬이 있다. 이 섬이 다지마모리의 묘로 여겨지며, 호 내의 배총(딸린 무덤)으로서 "전 다지마모리 묘(伝田道間守墓)"로 지정되어 있다[12][11][13].

이 작은 섬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에도 시대의 산릉 그림이나 메이지 시대의 『어릉도』에는 섬이 그려져 있지 않아, 메이지 시대에 주호를 확장하면서 바깥 제방을 깎아낼 때 남겨진 일부일 것으로 추정된다[14]. 다만, 『묘릉기』 등에서 주호 남쪽에 "다치바나노모로에 공의 묘(橘諸兄公ノ塚)"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 묘를 전제로 작은 섬이 남겨졌다는 설도 있다[14].

다지마모리가 과자의 시조신으로 모셔지면서, 현재는 작은 섬 맞은편에 배소(참배 장소)도 설치되어 있다[13].

4. 후손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따르면, 다지마모리는 미야케노 무라지(三宅連, 미야케 씨)의 시조로 여겨진다.

또한, 이 미야케노 무라지에 관해서 『신찬성씨록』 우쿄 제번 미야케노 무라지 조와 셋쓰국 제번 미야케노 무라지 조에서는 모두 아마노히보코(天日桙命, 천일창)의 후예라고 기록되어 있다.

5. 역사적 고찰

다지마모리의 출생에 관해, 『일본서기스이닌 천황 3년 조에서는 아메노히보코(신라에서 건너온 전승상의 도래인)의 현손이자, 키요히코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고지키』 오진 천황 단에서는 아메노히보코의 현손이라는 점은 같지만 다지마히나라키(但馬日楢杵)의 아들이라고 하며, 키요히코는 동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 스이닌 천황기에 따르면, 스이닌 천황 90년 2월 1일에 다지마모리는 천황의 명에 따라 "토키지쿠노카쿠노미"[7] 즉 귤을 구하기 위해 상세(常世)의 나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스이닌 천황 99년 7월 1일[8]에 천황은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게이코 천황 원년) 3월 12일, 다지마모리는 비시카노카 팔간 팔만(八竿八縵, 잎을 딴 8가지와 잎이 달린 8가지)을 가지고 상세의 나라에서 돌아왔지만, 천황이 이미 세상을 떠났음을 듣고 슬퍼하며 천황의 능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고지키』 스이닌 천황 단에 따르면, 다지마모리는 "토키지쿠노카쿠노코노미"[7] (역시 귤)를 구하기 위해 상세의 나라로 보내졌다. 다지마모리는 상세의 나라에 도착하여 그 열매를 얻어 만 팔만(縵八縵)・모 팔모(矛八矛)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 사이에 천황은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만 사만(縵四縵)・모 사모(矛四矛)를 나누어 황후에게 바치고, 나머지 만 사만(縵四縵)・모 사모(矛四矛)를 천황의 능 입구에 바치고 울부짖다가 결국 죽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만엽집』 권18 4063번에서는 다지마모리의 파견 전승을 전제로 한 노래가, 권18 4111번(반가 4112번)에서는 다지마모리를 소재로 한 노래가 실려 있다[9][10]

'다지마모리(田道間守)'라는 이름은 '다지마국(但馬國)의 국수(国守)'를 의미한다는 설이 있다[15]。 이 이름의 유사한 발음에서 귤(タチバナ) 전래 이야기가 유래했다고 여겨지며[16], '타치바나(タチバナ)'라는 이름 자체가 '다지마바나(田道間花)'가 변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귤(タチバナ)은 식물 이름인 동시에 야마토국(大和國) 고이치군(高市郡)에 있던 대왕가의 궁궐 이름(橘)과도 관련이 있다. 다지마모리 설화는 이 귤(橘)의 궁궐에 출사했던 다지마(但馬) 지역의 미야케노무라지(三宅連) 가문 조상의 이야기로 보는 설도 있다. 특히 잉교 천황의 황녀인 다지마노 타치바나노 오토메노미야(但馬橘大娘皇女)는 미야케노무라지(三宅連)가 섬기던 대상이었다고 한다. 더불어 야마토(大和)에서 다지마(但馬)로 가는 길목의 교통 요충지인 셋츠국(摂津國) 이나(猪名) 지역에 '타치바나(タチバナ)'(중세의 귤 어원(橘御園)을 거쳐 현재의 효고현 아마가사키시(尼崎市) 타치바나정(立花町))라는 지명이 있는 것도, 이 지역이 야마토(大和)의 귤(橘) 궁궐 및 다지마(但馬)의 미야케노무라지(三宅連)와 관련된 땅이었음을 보여준다는 견해가 있다[17]

위 설화처럼 과일이나 약초를 구하기 위해 다른 세계로 가는 이야기는 세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다지마모리 설화에는 특히 중국의 신선 사상의 영향이 지적된다 (예: 진(秦)의 서복봉래산에서 불로불사의 약을 구하는 전설). 나이토 고난은 『비미호고(卑彌呼考)』에서, 『위지(魏志)왜인전(倭人傳)히미코위(魏)나라로 보냈다고 기록된 대부(大夫) 난승미를 다지마모리와 동일 인물로 보았다. 하지만 『일본서기』에서는 히미코를 진구 황후 시대 인물로 보고 있으며, 다지마모리가 상세의 나라로 파견된 스이닌 천황 90년을 서기로 환산하면 61년이 된다. 이는 왜(倭) 노국(奴國) 왕이 후한의 광무제로부터 금인(金印)을 받은 57년과 가까운 시기이므로, 『일본서기』 편찬자는 다지마모리를 왜노국(倭奴國)의 대부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추측된다. 한편, 위지 왜인전에서 도마국(投馬國)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수로 10일 거리에 있는 곳이 현재의 효고현 도요오카시(豊岡市), 이즈시 신사(出石神社) 주변이라면, 후대의 다지마국(但馬國)을 경유지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히미코의 다음 사자인 도시고리(都市牛利, 츠시고리)와 다지마국(但馬國) 이즈시(出石)의 관련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덧붙여, 『일본서기』에서는 아버지 키요히코(清彦)가 이즈시(出石)의 신보(神寶)를 바친 설화 이후에 다지마모리 설화가 실려 있는데, 전자는 레갈리아 헌상을 통해 이즈시(出石)가 야마토 왕권(大和王權)에 복속되었음을 상징하고, 후자는 그 이후 이즈시(出石) 씨족이 왕권에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상징한다고 여겨진다[18]

6. 신앙

나카시마 신사(효고현 도요오카시)


다지마모리가 가져온 비시향과(非時香菓, 토키지쿠노카쿠노코노미)는 기록상 다치바나 귤로 추정된다. 다지마모리가 과자의 신으로 여겨지는 것은 이 이야기에서 유래하는데, 당시 '과(菓)' 자는 과일을 의미했지만 시간이 흘러 과자를 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와 『고지키』의 설화에 기초하여 다지마모리는 과자신(菓子神) 또는 과조(菓祖)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당시 과자가 귤(감귤류의 원종)을 가리켰기 때문에[19] 귤과 감귤의 조상신으로도 알려져 있다.

효고현 도요오카시에 위치한 나카시마 신사(中嶋神社)에서는 다지마모리를 "다지마모리노미코토(田道間守命)"라는 신명으로 모시며 과자의 신으로 숭배한다.[6] 이 나카시마 신사의 분령은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의 다자이후 텐만구(太宰府天満宮), 교토부 교토시의 요시다 신사(吉田神社) 등 일본 전국 각지에 모셔져 제과업 종사자들의 신앙을 받고 있다. 1978년에는 만두의 신사로 알려진 칸고쿠 신사의 하야시 신사(林神社)에도 과자의 신으로 합사되었다.

다지마모리와 관련된 전승이 남은 지역에서도 그를 숭배한다. 사가현 이마리시는 전통적으로 다지마모리가 일본에 상륙한 곳으로 여겨지며, 이마리 신사(伊萬里神社) 내 나카시마 신사(中嶋神社)에서도 다지마모리노미코토를 모신다. 와카야마현 카이난시의 키츠모토 신사(橘本神社)가 원래 자리했던 '롯폰기(六本樹) 언덕'은 다지마모리가 가져온 귤나무 가지가 처음 옮겨 심어진 땅이라고 전해진다. 또한, 나라현 다카이치군 아스카촌에 있는 킷시지(橘寺)의 이름도 다지마모리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덧붙여, 문부성 창가 중에는 "다지마모리"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7. 대중문화

다지마모리는 린: 므네모시네의 딸들에 등장하는 캐릭터이며, 다나카 마사히코가 성우를 맡았다.[3]

참조

[1] 웹사이트 Encyclopedia of Shinto詳細 https://d-museum.kok[...] 2023-03-10
[2] 웹사이트 Tajima Mori • . A History . . of Japan . 日本歴史 https://historyofjap[...] 2023-08-21
[3] 웹사이트 Tajimamori https://www.behindth[...]
[4] 서적 東京美術選書23続神々の系図 東京美術 1980
[5] 웹사이트 余録:「常世の国」は日本の古代人が… https://mainichi.jp/[...] 2021-11-25
[6] 뉴스 菓子祭前日祭:新庁舎に「甘〜く」花添え−−豊岡 毎日新聞 2014-04-20
[7] 문서 「ときじくのかくのみ」とは、「時期を定めずいつも(トキジク)輝く(カク)実」の意味で、いつも黄金色に輝く橘の実を表す(『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 2 日本書紀 (1)』小学館、2002年(ジャパンナレッジ版)、p. 335)。
[8] 문서 『日本書紀』景行天皇即位前紀では、垂仁天皇崩御年を99年2月とする。
[9] 웹사이트 "18/4063, 18/4111, 18/4112" 山口大学「万葉集検索システム」
[10] 서적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 9 萬葉集 (4)』 小学館 2004
[11] 서적 菅原伏見東陵 平凡社 1981
[12] 서적 宮内庁書陵部陵墓地形図集成 学生社 1999
[13] 문서 菅原伏見東陵(垂仁天皇項目内) 吉川弘文館
[14] 서적 ヤマト政権の一大勢力 佐紀古墳群(シリーズ「遺跡を学ぶ」093) 新泉社 2014
[15] 서적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 2 日本書紀 (1)』 小学館 2002
[16] 서적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 1 古事記』 小学館 2004
[17] 문서 記紀・風土記にみる交通 吉川弘文館 2016
[18] 서적 角川日本地名大辞典 28 兵庫県 角川書店 1988
[19] 웹사이트 菓祖 田道間守ものがたり https://toyooka-cci.[...] 202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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