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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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단군기원은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한 해를 기원으로 하는 연호이다.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 여러 문헌에 단군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며, 이를 토대로 기원전 2333년을 단군 즉위 원년으로 삼아 단기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대한민국에서는 1944년 공용 연호로 채택되었으나, 1962년 서력기원으로 변경되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지만, 일부에서 단기 부활을 주장하며, 북한에서는 서력과 주체 연호를 사용하며 단기는 사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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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신화는 환웅과 웅녀의 결합으로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홍익인간의 이념과 고조선 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한국의 건국 신화이다.
단군기원 | |
---|---|
지도 | |
기본 정보 | |
명칭 | 단군기원 (단기) |
한글 | 단군기원 (단기) |
한자 | 檀君紀元 (檀紀) |
히라가나 | だんくんきげん (だんき) |
가타카나 | タングンキウォン (タンキ) |
로마자 표기 | Dangun-giwon (Dan-gi) |
현재 연도 | |
단군 기원 | 4357년 |
서기 | 2024년 |
2. 역사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는 단군왕검이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연은 “요임금 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니 즉위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라는 주석을 달았다.[3] 이에 따르면 단군기원은 기원전 2284년이다.[4]
1944년 대한민국 국회는 '대한민국의 공용 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는 내용의 「연호에 관한 법률」을 의결하여 9월 25일부터 단기 연호를 시행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부는 1961년 12월 2일 「연호에 관한 법률」을 다시 제정하여 1962년 1월 1일부터 단군기원을 폐지하고 서력기원을 채택했다.[5]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제석천의 손자 단군이 제고와 같은 무진년에 즉위하여 은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고, 그동안 나라를 다스린 기간이 1028년이라 했다. 그러나 이는 전근대 역사학 기준으로도 오류가 있다. 기묘년(기원전 1122년)을 중심으로 계산하면 단군 즉위년은 기원전 2313년이며, 이 해는 무진년이 아니다. 학계에서는 1028년을 1048년의 오기로 보고, 이를 보정하면 무진년(기원전 2400년)이 된다.
고려사 열전 '백문보'조에는 공민왕에게 올린 상소에서 단군을 언급한 내용이 있다. 백문보가 단군이 치세를 시작했다고 여긴 연도는 현재의 단기 원년(기원전 2333년, 무진년)과 다르다. 백문보의 문집 《담암일집》에 따르면, 이 상소는 1363년에 올려졌다. 따라서 백문보가 생각한 단군 치세 원년은 기원전 2238년(계묘), 또는 기원전 2237년(갑진)이다.
조선 세종 때 서거정이 만든 《동국통감》은 기원전 2400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확정적으로 서술한 최초의 책이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중국 요의 즉위 후 50년")과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탕요 즉위 25년 무진", 요의 즉위 후 25년) 등을 근거로 단군의 즉위 연도를 기원전 2333년으로 하고 이를 단기 원년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단군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단군신화는 조선의 독립을 보여주기 위한 창작 설화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고, 국가로서의 단군조선의 실존성도 인정되지 않는다. 요의 즉위 25년이라는 것은 명 태조 주원장의 즉위년(1368년)과 이씨조선 이성계의 즉위(1392년)를 본뜬 것으로 여겨진다.
대한민국의 경제사학자 이영훈은 대한민국의 민족주의와 단군 기원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1]
3. 대한민국에서의 사용과 폐지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단군 즉위 기록("중국 요의 즉위 후 50년")과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탕요 즉위 25년 무진", 요의 즉위 후 25년) 등을 근거로 단군 즉위 연도를 기원전 2333년으로 하고 이를 단기 원년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단군 기록이 없으며, 단군 신화는 조선의 오랜 독립을 보여주기 위한 창작 설화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고, 국가로서의 단군조선 실존성도 인정되지 않는다. 요의 즉위 25년은 명 태조 주원장의 즉위년(1368년)과 이씨조선 이성계의 즉위(1392년)를 본뜬 것으로 여겨진다.
경제사학자 이영훈은 저서에서 대한민국의 민족주의와 단군 기원의 관계를 언급하며, 이승만 정권이 민족이라는 기치를 높이 들고 단군을 숭배하며 단기 연호를 사용하고 개천절을 국경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1]
3. 1. 단기 폐지 논란과 현대적 의의
1944년 7월 11일 국회에서 "대한민국의 공용 연호는 '''단군기원'''(檀君紀元)으로 한다."는 내용의 「연호에 관한 법률」이 의결되었고, 9월 25일부터 단기연호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정부가 1961년 12월 2일 「연호에 관한 법률」을 다시 제정함으로써 1962년 1월 1일부터 단군기원이 폐지되고 서력기원이 채택되었다.[5]
이후에도 사회 일각과 국회의원들 일부에서는 국제적으로 많이 쓰고 있는 서기와 함께 우리의 주체성을 함께 살리는 단기를 병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단기병용론자들은 분단된 남북의 동질성 회복과 민족 통일을 위해서도 개천절의 의의와 가치를 재조명해야 하므로, 단기 연호는 부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법제처는 2012년 7월 8일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서기이며, 단기를 함께 쓸 경우 불기(佛紀)도 문제될 수 있으므로 혼란이 커질 것"이라는 이유로 단기연호를 공용연호로 쓸 수 없음을 발표하였다.[5]
경제사학자 이영훈은 대한민국의 민족주의와 단군 기원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1]
박정희는 1961년 12월 2일에 연호 폐지 법령을 제정하여 1962년 1월 1일부터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단기 사용이 금지되었고, 공문서에는 서력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단기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용되지 않지만, 일부 신문사는 날짜 표기란에 서력과 함께 병기하는 형식으로 표시를 계속하고 있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서는 1997년부터 독자적인 기년법인 주체 연호가 제정되어 서력과 병용되고 있지만, 단기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4. 북한에서의 단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서는 1948년 9월 9일 건국 이후 서력을 공용 연호로 사용하고 있으며, 1997년에 독자적인 기년법인 주체 연호가 제정되어 서력과 병용되고 있지만, 단기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5. 비판적 시각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단군 즉위 기록("중국 요의 즉위 후 50년")과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탕요 즉위 25년 무진", 요의 즉위 후 25년) 등을 근거로 단군의 즉위 연도를 기원전 2333년으로 하고 이를 단기 원년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단군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으며, 단군신화는 조선의 오랜 독립을 보여주기 위한 창작설화라는 추측이 있고, 국가로서의 단군조선의 실존성도 인정되지 않는다. 요의 즉위 25년이라는 기록은 명 태조 주원장의 즉위년(1368년)과 조선 이성계의 즉위(1392년)를 본뜬 것으로 여겨진다.
5. 1. 역사적 근거 부족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는 단군왕검이 요임금 즉위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책에는 요임금 즉위 원년이 무진년이므로 즉위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라는 주석이 달려있다.[3] 이에 따르면 단군기원은 기원전 2284년이 된다.[4]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제석천의 손자 단군이 제고와 같은 무진년에 즉위하여 은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고, 나라를 다스린 기간이 1028년이라 했다. 그러나 이승휴의 기록은 오류가 있는데, 기묘년(기원전 1122년)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단군 즉위년은 기원전 2313년으로 무진년이 아니다. 학계에서는 1028년을 1048년의 오기로 보고, 이를 보정하면 무진년(기원전 2400년)이 된다.
단군기원을 직접 언급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사》 열전 '백문보'조로, 공민왕에게 올린 상소에서 단군을 언급했다. 백문보가 단군 치세 시작 연도로 여긴 해는 현재 단기 원년(기원전 2333년, 무진년)과 다르다. 백문보의 글을 모은 《담암일집》 부록의 편년에 따르면, 이 상소를 올린 해는 공민왕 12년(1363, 계묘)이다. 따라서 백문보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36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단군 치세 원년은 기원전 2238년(계묘) 또는 기원전 2237년(갑진)이 된다.
기원전 2400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확정적으로 서술한 최초의 책은 조선 세종 때 서거정이 만든 《동국통감》이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단군 즉위 기록("중국 요의 즉위 후 50년")과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탕요 즉위 25년 무진", 요의 즉위 후 25년)을 근거로 단군 즉위 연도를 기원전 2333년으로 정하고 단기 원년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단군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으며, 단군신화는 조선의 오랜 독립을 보여주기 위한 창작설화라는 추측이 있고, 국가로서의 단군조선의 실존성도 인정되지 않는다. 요의 즉위 25년이라는 기록은 명 태조 주원장의 즉위년(1368년)과 이씨조선 이성계의 즉위(1392년)를 본뜬 것으로 여겨진다.
대한민국의 경제사학자 이영훈은 대한민국의 민족주의와 단군 기원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1]
5. 2. 민족주의적 이용
대한민국의 경제사학자 이영훈은 대한민국의 민족주의와 단군 기원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1]참조
[1]
서적
大韓民国の物語
文藝春秋
2009-02
[2]
논문
국사 교과서의 단군기원 서술에 대한 일고찰
인하대학교
2002
[3]
간행물 # 또는 다른 적절한 type
삼국유사
1281 # 추정 날짜, 더 정확한 정보 필요
[4]
서적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책과함께
2007-11-24
[5]
뉴스
정치권, 개천절 맞아 "홍익인간 정신 받들어 대선승리"
http://view.asiae.co[...]
아시아경제
2012-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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