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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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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간주는 1641년 찰스 1세의 외교, 재정, 법률, 종교 정책에 대한 의회의 반대 의견을 담은 문서이다.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며 의회와 대립했고, 의회 승인 없이 과세를 부과하고 반대파를 투옥했다. 1628년 권리 청원 제출 이후에도 전제 정치를 펼치며 의회와 갈등을 빚었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의 탄압으로 상황이 악화되자 찰스 1세는 의회를 소집했지만, 의회는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고, 결국 1641년 대간주를 통해 국왕의 외교, 재정, 법률, 종교 정책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대간주는 의회를 분열시켰고, 찰스 1세가 의회파 의원 5명을 체포하려 하면서 잉글랜드 내전(청교도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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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주

2. 배경

찰스 1세는 아버지 제임스 1세처럼 왕권신수설을 신봉하여 의회와 대립했다.[5]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과세를 국민에게 부과하고 반대파를 투옥했으며, 외교 정책은 측근인 버킹엄 공작조지 빌리어스가 담당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여 비용 낭비가 심해지자 의회의 분노를 증폭시켰고, 버킹엄 공작은 자주 비난받았으며 그를 비호하는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했다. 재정이 궁핍해진 찰스 1세가 과세를 승인받기 위해 의회를 다시 소집하는 일이 반복되었다[5]

1625년부터 잉글랜드 국왕 찰스 1세가 프랑스 로마 가톨릭교도 앙리에타 마리아와 결혼한 이후 국왕과 의회 간의 관계는 불안정했다. 1626년 찰스 1세는 자신의 총신이자 영향력 있는 버킹엄 공작을 탄핵하려는 의회를 해산했다. 30년 전쟁에 개입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스페인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자금이 필요했던 찰스 1세는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법적 근거가 불확실한 수단을 사용했고, 납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기소 없이 투옥했다.

1628년 3월에 소집된 의회에서 "권리 청원"이 제출되었고, 과세에는 의회의 승인을 얻도록 요구했다. 이에 찰스 1세는 6월에 일단 청원 수락 서명을 했지만, 의회 휴회 중에 버킹엄 공작이 암살당하여 측근을 잃고, 재개된 의회가 정부 비난을 멈추지 않자 다음 해 1629년에 의회를 해산, 하원의 지도자 존 엘리엇을 투옥하여 옥사하게 하고, "Eleven-years' Tyranny" (전제 11년)라고 불리는 전제 정치를 펼쳤다[6]

이 기간 동안 찰스 1세는 다시 의회 승인 없이 과세를 강행했고, 버킹엄 공작을 대신할 측근인 캔터베리 대주교윌리엄 로드의 조언으로 잉글랜드 국교회를 통한 국가 통일에 착수하여 청교도를 탄압했다. 로드의 정책으로 스코틀랜드에도 국교를 강제하게 되자 스코틀랜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1638년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국민 서약을 결성하고, 1639년에 서약파와 찰스 1세 사이에 주교 전쟁이 일어났다. 아일랜드에서도 로드와 함께 측근인 스트라포드 백작토머스 웬트워스가 주민에게 탄압 정책을 펼쳐 불만이 축적되었다[7]

1640년에는 상황이 절박해져 찰스 1세는 다시 단기 의회를 소집했다. 스코틀랜드에서 주교 전쟁에 직면한 그는 새로운 왕립 군대를 위한 자금을 모으려 했고, 의회가 동의를 거부하자 5월에 즉시 의회를 해산했다. 그는 어쨌든 군대를 보내려 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인해 장비가 부족하고 지휘가 부실한 잉글랜드 군대는 국가 언약의 스코틀랜드 지지자들에게 쉽게 격파되었다. 이제 스코틀랜드에 배상금을 지불할 자금이 필요했던 찰스 1세는 급히 소집된 대 의회로부터 의회에 복귀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조언을 받았고, 의회는 11월에 다시 소집되었다.

하지만, 의회의 개혁이 주교제 폐지 문제(런던 시민의 청원 (근절 청원)에서 시작되어, 찬성한 헨리 베인과 올리버 크롬웰, 아서 헤즐리지 등 의회 급진파가 근절 법안으로 제출, 10월에 부결)에까지 이르자 의회에 균열이 생겼고, 8월에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로 향하여 의회에 대한 반격을 엿보는 가운데, 10월에 스트라포드 백작이 사라진 후 아일랜드에서 가톨릭 주민의 반란 (・)이 발생, 현지 잉글랜드인이 대거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소란 상태가 된 의회에서 파견군이 검토되고 모금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파견군을 포함한 군 통수권을 국왕과 의회 중 어느 쪽에게 위임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고,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의 행정권도 어느 쪽이 확보할 것인지까지 발전하여, 의회는 다시 국왕 대권에 도전하여 대항의문을 심의했다[9]

2. 1. 왕권신수설과 의회 무시

찰스 1세는 아버지 제임스 1세처럼 왕권신수설을 신봉하여 의회와 대립했다.[5]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과세를 국민에게 부과하고 반대파를 투옥했으며, 외교 정책은 측근인 버킹엄 공작조지 빌리어스가 담당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여 비용 낭비가 심해지자 의회의 분노를 증폭시켰고, 버킹엄 공작은 자주 비난받았으며 그를 비호하는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했다. 재정이 궁핍해진 찰스 1세가 과세를 승인받기 위해 의회를 다시 소집하는 일이 반복되었다[5]

1625년부터 잉글랜드 국왕 찰스 1세가 프랑스 로마 가톨릭교도 앙리에타 마리아와 결혼한 이후 국왕과 의회 간의 관계는 불안정했다. 1626년 찰스 1세는 자신의 총신이자 영향력 있는 버킹엄 공작을 탄핵하려는 의회를 해산했다. 30년 전쟁에 개입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스페인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자금이 필요했던 찰스 1세는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법적 근거가 불확실한 수단을 사용했고, 납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기소 없이 투옥했다.

1628년 3월에 소집된 의회에서 "권리 청원"이 제출되었고, 과세에는 의회의 승인을 얻도록 요구했다. 이에 찰스 1세는 6월에 일단 청원 수락 서명을 했지만, 의회 휴회 중에 버킹엄 공작이 암살당하여 측근을 잃고, 재개된 의회가 정부 비난을 멈추지 않자 다음 해 1629년에 의회를 해산, 하원의 지도자 존 엘리엇을 투옥하여 옥사하게 하고, "Eleven-years' Tyranny" (전제 11년)라고 불리는 전제 정치를 펼쳤다[6]

1640년에는 상황이 절박해져 찰스 1세는 다시 단기 의회를 소집했다. 스코틀랜드에서 주교 전쟁에 직면한 그는 새로운 왕립 군대를 위한 자금을 모으려 했고, 의회가 동의를 거부하자 5월에 즉시 의회를 해산했다.

2. 2. 권리 청원과 전제 정치

1625년 잉글랜드 국왕 찰스 1세가 프랑스 로마 가톨릭교도 앙리에타 마리아와 결혼한 이후 국왕과 의회 간의 관계는 불안정했다.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며 의회와 대립했고,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과세를 부과하거나 반대파를 투옥했다.[5] 1626년 찰스 1세는 자신의 총신 버킹엄 공작을 탄핵하려는 의회를 해산했다.

1628년 3월 소집된 의회는 "권리 청원"을 제출하여 과세에 대한 의회 승인을 요구했다. 찰스 1세는 6월에 청원에 서명했지만, 1629년에 의회를 해산하고 하원 지도자 존 엘리엇을 투옥하는 등 "Eleven-years' Tyranny" (전제 11년)라고 불리는 전제 정치를 펼쳤다.[6]

이 기간 동안 찰스 1세는 의회 승인 없이 과세를 강행하고,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의 조언에 따라 잉글랜드 국교회를 통한 국가 통일을 시도하며 청교도를 탄압했다.[7] 로드의 종교 정책은 스코틀랜드에도 국교를 강요하여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1638년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국민 서약을 결성, 1639년에는 서약파와 찰스 1세 사이에 주교 전쟁이 일어났다.[7] 아일랜드에서도 스트라포드 백작 토머스 웬트워스가 주민에게 탄압 정책을 펼쳐 불만이 커졌다.[7]

2. 3. 주교 전쟁과 의회 재소집

1625년부터 잉글랜드 국왕 찰스 1세가 프랑스 로마 가톨릭교도 앙리에타 마리아와 결혼한 이후 국왕과 의회 간의 관계는 불안정했다.[5]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며 의회와 대립했고,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과세를 부과하거나 반대파를 투옥했다.[5] 1628년 권리 청원이 제출되었으나, 찰스 1세는 1629년 의회를 해산하고 존 엘리엇을 투옥하는 등 "Eleven-years' Tyranny" (전제 11년)라 불리는 전제 정치를 펼쳤다.[6]

1640년 찰스 1세는 주교 전쟁에서 패배하고 재정난에 빠져 11년 만에 의회를 다시 소집했다. (단기 의회・장기 의회)[8] 그러나 존 핌, 존 햄든 등이 이끄는 의회는 국왕 비판의 장으로 변모했고, 전제 정치에 대한 비난이 재개되었다.[8] 찰스 1세의 측근인 스트라포드 백작토머스 웬트워스와 캔터베리 대주교윌리엄 로드는 투옥되었고, 스트래퍼드 백작은 1641년 처형되었다.[8] 의회는 3년에 한 번 의회 소집 의무화, 국왕 대권 제한, 톤세, 파운드세, 선박세 폐지, 성실청・고등 종무관 재판소 등 대권 재판소 폐지 등 전제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했다.[8] 찰스 1세는 이를 승인하여 의회와 국왕 간의 갈등은 해결되는 듯 보였다.[8]

하지만, 의회의 개혁이 주교제 폐지 문제( 근절 청원) 에까지 미치자 의회 내에 균열이 발생하였다.[9]

3. 대간의(Grand Remonstrance)

존 핌이 처음 제안하고 헨리 베인, 올리버 크롬웰 등이 초안 작성에 참여한 대간의는 찰스 1세의 외교, 재정, 법률, 종교 정책에 대한 의회의 반대 의견을 요약한 문서이다.[3] 204개 조항에 걸쳐 악정의 구체적인 사례와 장기 의회의 성과를 나열했다.

대간의는 가톨릭교도, 주교, 타락한 성직자, 부패한 중신과 조정 신하를 악정의 주모자로 지목하고, 그들의 악정을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요약했다.[10]


  • 국왕과 국민 사이의 불신과 다툼 증가
  • 순수한 종교의 억압
  • 가톨릭·알미니우스주의자·이단자의 육성
  • 의회에 의하지 않은 국왕 재정의 확보


이어서 악정의 구체적인 예시로 스페인과의 강화책(제5조), 병사의 민박(제6조), 소비세, 선박세, 기사 강제금을 비롯한 불법적인 과세(제10조, 제17조, 제18조, 제19조, 제20조), 의원의 불법적인 투옥에 의한 의회의 특권 침해(제12조), 일반 거래의 제한, 금지, 독점(제27조), 성실청의 압정(제39조), 위법한 재판(제40조), 코먼 로의 포기(제47조), 관직 매매(제48조), 주교의 전제와 억압(제51조), 윌리엄 로드의 전제화, 고등 종무관 재판소의 권한 확대(제52조), 국왕 권력의 절대화(제62조), 스코틀랜드에 대한 국교 강제(제65조), 아일랜드에서의 탄압(제75조), 하원을 비난하는 선언(제82조), 런던 시에 대한 강제금(제83조), 로마화에 대한 책략(제87조), 가톨릭적 음모(제90조) 등을 나열했다.

또한, 스트래퍼드 백작을 비롯한 중신, 조정 신하의 탄핵(제122조, 제124조, 제133조), 3년 임기법 제정(제125조), 성실청 및 고등 종무관 재판소의 폐지(제127조, 제128조), 교회 및 주교 권력의 억제(제131조, 제132조), 산림 경계의 복원(제134조), 기사 강제금의 시정(제136조), 왕실 수입의 건전화(제139조) 등 의회 개혁의 성과를 나열했다.

대간의는 악정 방지를 위해 국왕의 외교 및 관료 임명권에 의회 동의를 요구하고, 가톨릭 감시를 위한 상임 위원회 설치를 제안했으며, 종교 회의 개최를 제안했다.[11][12] 이는 의회 동의를 통해 국왕 대권을 제한하고 의회 주권을 지향하려는 시도였다.[4]

3. 1. 대간의의 내용

존 핌이 처음 제안하고 헨리 베인, 올리버 크롬웰 등이 초안 작성에 참여한 대간의는 찰스 1세의 외교, 재정, 법률, 종교 정책에 대한 의회의 반대 의견을 요약한 문서이다.[3] 204개 조항에 걸쳐 악정의 구체적인 사례와 장기 의회의 성과를 나열했다.

대간의는 가톨릭교도, 주교, 타락한 성직자, 부패한 중신과 조정 신하를 악정의 주모자로 지목하고, 그들의 악정을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요약했다.[10]

  • 국왕과 국민 사이의 불신과 다툼 증가
  • 순수한 종교의 억압
  • 가톨릭·알미니우스주의자·이단자의 육성
  • 의회에 의하지 않은 국왕 재정의 확보


이어서 악정의 구체적인 예시로 스페인과의 강화책(제5조), 병사의 민박(제6조), 소비세, 선박세, 기사 강제금을 비롯한 불법적인 과세(제10조, 제17조, 제18조, 제19조, 제20조), 의원의 불법적인 투옥에 의한 의회의 특권 침해(제12조), 일반 거래의 제한, 금지, 독점(제27조), 성실청의 압정(제39조), 위법한 재판(제40조), 코먼 로의 포기(제47조), 관직 매매(제48조), 주교의 전제와 억압(제51조), 윌리엄 로드의 전제화, 고등 종무관 재판소의 권한 확대(제52조), 국왕 권력의 절대화(제62조), 스코틀랜드에 대한 국교 강제(제65조), 아일랜드에서의 탄압(제75조), 하원을 비난하는 선언(제82조), 런던 시에 대한 강제금(제83조), 로마화에 대한 책략(제87조), 가톨릭적 음모(제90조) 등을 나열했다.

또한, 스트래퍼드 백작을 비롯한 중신, 조정 신하의 탄핵(제122조, 제124조, 제133조), 3년 임기법 제정(제125조), 성실청 및 고등 종무관 재판소의 폐지(제127조, 제128조), 교회 및 주교 권력의 억제(제131조, 제132조), 산림 경계의 복원(제134조), 기사 강제금의 시정(제136조), 왕실 수입의 건전화(제139조) 등 의회 개혁의 성과를 나열했다.

대간의는 악정 방지를 위해 국왕의 외교 및 관료 임명권에 의회 동의를 요구하고, 가톨릭 감시를 위한 상임 위원회 설치를 제안했으며, 종교 회의 개최를 제안했다.[11][12] 이는 의회 동의를 통해 국왕 대권을 제한하고 의회 주권을 지향하려는 시도였다.[4]

3. 2. 대간의의 통과와 의회 분열

대간의는 1641년 11월 22일 하원에서 159 대 148의 근소한 표 차이로 가결되었다.[3][13] 이는 존 핌이 처음 제안하고 조지 디그비, 존 햄든 등이 받아들인 것으로, 찰스 1세의 외교, 재정, 법률, 종교 정책에 대한 의회의 모든 반대 의견을 204개 조항으로 요약한 문서였다. 대간의는 의회에서 모든 주교의 축출, 관리의 숙청, 의회가 왕실 임명에 대한 거부권을 가질 권리, 그리고 아일랜드 반군에게서 몰수된 토지 판매 중단을 요구했다.

대간의의 통과는 의회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전에 국왕을 비판했던 에드워드 하이드와 루시우스 캐리 등은 대간의에 반대하며 왕당파로 전향했다.[3][13] 반면, 올리버 크롬웰은 대간의가 부결되었다면 잉글랜드를 떠났을 것이라고 언급하며, 의회파의 결의를 보여주었다.[3]

대간의는 로마 가톨릭 음모를 비난하고, 윌리엄 로드에 반대하는 청교도의 입장을 지지했다.[3] 교회 통치와 관련하여 대간주는 "이 섬의 가장 심각하고, 경건하고, 학식 있고, 사려 깊은 신학자들의 일반 시노드"와 외국 신학자들의 협력을 통해 교회의 평화와 통치를 위한 방안을 모색할 것을 요구했다.[4]

11월 25일, 의회는 대간의를 찰스 1세에게 제출했지만, 국왕은 이를 거부했다.[13] 이후 의회가 군 통수권을 국왕으로부터 이동시키려 한 민병 조례를 심의하자, 찰스 1세는 의회파 주요 인물 5인에 대한 체포를 명하며 의회에 대한 무력 간섭을 시작했다. 1642년 3월, 의회는 국왕의 재가 없이 민병 조례를 가결했고, 6월에는 19개 조항 제안을 찰스 1세에게 제출했지만 거부당했다. 결국 8월, 잉글랜드는 국왕군과 의회군으로 나뉘어 내전(청교도 혁명·First English Civil War영어)에 돌입했다.[14]

4. 찰스 1세의 대응과 잉글랜드 내전 발발

1641년 12월 1일 찰스 1세에게 전달된 대간주에 대해, 왕은 오랫동안 답변을 미루었다.[13] 의회는 문서를 공개 배포하여 국왕의 결정을 압박했다. 11월 22일 하원에서 대간주가 가결되었지만, 전문을 인쇄·공포하자는 동의안으로 인해 분규가 일어났고, 표 차이는 159 대 148로 근소했다. 이로 인해 의원은 "왕당파"와 "의회파"로 분열되었으며, 에드워드 하이드 등 저명한 의회파 의원들이 왕당파로 전향했다.[13]

1641년 12월 23일, 찰스 1세는 주교 해임을 거부하고, 종교 문제에 대해 로마 가톨릭에 대한 반대 입장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많은 분열주의자들과 분리주의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답변은 하이드와 협의하여 작성된 것으로, 의회의 온건파 의원들의 지지를 다시 얻기 위한 시도였다.

의회가 군 통수권을 국왕으로부터 가져오려는 민병 조례를 심의하자, 찰스 1세 측근은 이를 "의회에 의한 절대주의"라고 비난했다.[14] 1642년 1월, 찰스 1세는 존 핌, 존 햄든, 헤즐리지와 덴질 홀리스, 윌리엄 스트로드 등 의회파 중심 인물 5명의 체포를 명령하며 의회에 대한 무력 간섭을 시작했다. 런던 시민이 의회파에 가담했으므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찰스 1세는 런던을 떠났고, 3월에 의회는 민병 조례를 왕의 재가 없이 가결했다. 6월에는 19개 조항 제안을 요크에 있던 찰스 1세에게 제출했으나 거부당했고, 8월에 잉글랜드는 국왕군과 의회군으로 나뉘어 내전(청교도 혁명·)이 발발했다.[14]

4. 1. 찰스 1세의 의회 탄압

1641년 12월 1일 찰스 1세에게 전달된 대간주에 대해, 왕은 오랫동안 답변을 미루었다.[13] 의회는 문서를 공개 배포하여 국왕의 결정을 압박했다. 11월 22일 하원에서 대간주가 가결되었지만, 전문을 인쇄·공포하자는 동의안으로 인해 분규가 일어났고, 표 차이는 159 대 148로 근소했다. 이로 인해 의원은 "왕당파"와 "의회파"로 분열되었으며, 에드워드 하이드 등 저명한 의회파 의원들이 왕당파로 전향했다.[13]

1641년 12월 23일, 찰스 1세는 주교 해임을 거부하고, 종교 문제에 대해 로마 가톨릭에 대한 반대 입장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많은 분열주의자들과 분리주의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답변은 하이드와 협의하여 작성된 것으로, 의회의 온건파 의원들의 지지를 다시 얻기 위한 시도였다.

의회가 군 통수권을 국왕으로부터 가져오려는 민병 조례를 심의하자, 찰스 1세 측근은 이를 "의회에 의한 절대주의"라고 비난했다.[14] 1642년 1월, 찰스 1세는 의회파 중심 인물 5명의 체포를 명령하며 의회에 대한 무력 간섭을 시작했다. 런던 시민이 의회파에 가담했으므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찰스 1세는 런던을 떠났고, 3월에 의회는 민병 조례를 왕의 재가 없이 가결했다. 6월에는 19개 조항 제안을 찰스 1세에게 제출했으나 거부당했고, 8월에 잉글랜드는 국왕군과 의회군으로 나뉘어 내전(청교도 혁명)이 발발했다.[14]

4. 2. 5명의 의원 체포 시도와 내전 발발

1642년 1월, 찰스 1세는 존 핌, 존 햄든 등 5명의 의회 지도자 체포를 명령하며 의회에 대한 무력 탄압을 시도했다.[14] 런던 시민들이 의회파를 지지하자 찰스 1세는 런던을 떠났고, 의회는 3월에 민병 조례를 국왕 재가 없이 가결했다.[14]

6월, 의회는 제한 군주제와 의회 주권을 명시한 "19개 조항 제안"을 요크에 있던 찰스 1세에게 제출했지만, 국왕은 이를 거부했다.[14]

1642년 8월, 잉글랜드는 국왕군과 의회군으로 나뉘어 내전(청교도 혁명)이 발발했다.[14]

5. 결론 및 한국적 의의

5. 1. 잉글랜드 내전의 역사적 의의

5. 2. 한국적 관점에서의 재해석

참조

[1] 논문 The Grand Remonstrance https://www.jstor.or[...] 1960
[2] 논문 Some Observations on "The Grand Remonstrance" https://www.jstor.or[...] 1932
[3] 서적 Oliver Cromwell and the Rule of the Puritans in England 1900
[4] 간행물 Historical Collections 1692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웹사이트 大抗議文|世界史の窓 http://www.y-history[...]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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