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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카 유키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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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나카 유키모리는 1545년에 태어나 1578년에 사망한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다. 그는 아마고 씨족을 섬기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고, 특히 아마고 가문의 재흥을 위해 헌신했다. 고즈키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된 후 암살당했지만, 그의 충성심과 용맹함은 높이 평가받아 '아마고 십용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유키모리의 생애는 소설, 만화, 드라마 등 다양한 작품으로 각색되었으며, 그의 묘소는 여러 곳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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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카 유키모리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야마나카 유키모리
본명야마나카 사치모리
일본어 이름山中 幸盛
출생1545년 9월 20일
사망1578년 8월 20일 (32세)
출생지이즈모국 신구쿠타니 (현대 시마네현 야스기시)
별명야마나카 시카노스케 (山中 鹿の介), 시카스케 (鹿の介)
가문아마고 씨
자녀야마나카 유키모토
친척야마나카 미쓰유키 (아버지), 나미 (어머니)
별칭야마나카 시카노스케 (山中 鹿の介), 시카스케 (鹿の介)
다른 이름야마나카 진지로
가메이 진지로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사치모리
통칭시카스케
시카노스케
시카노스케
시카스케
이명산인의 기린아
계명고모지덴 준린조료코지
고모지덴 준린조료코지
고모인덴 로쿠산추테키다이코지
고모인덴 다이요조다이코지
슈호쿠오쿠유코지 (고노이케 가문 계도)
고모인 로쿠산추테키코지
추코인 신요 소에이코지 (규토쿠지 과거장)
묘소아이노와타시
간센지
고모지
혼만지
교쿠린인
곤카이코묘지
도쿠운지
세이칸지
가문 정보
씨족야마나카 씨 (이즈모 겐지아마고 씨 지류, 또는 다치바나 성 오미 야마나카 씨 서류)
부모아버지: 야마나카 미쓰유키, 어머니: 나미 (다치하라 쓰나시게의 딸), 양부: 가메이 히데쓰나
형제자매야마나카 유키타카, 유키모리, 여자 (이이다 사다마사의 정실)
소속 및 역할
충성아마고 씨
주군아마고 요시히사 → 가쓰히사
군사 경력
전투갓산토다성 공방전 (1569년)
후베야마 전투 (1570년)
고즈키성 공방전 (1578년)
이미지
야마나카 유키모리 초상화
야마나카 유키모리 초상화, 1886년
오치아이 요시쿠의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사치모리 초상화
오치아이 요시쿠 『태평기영웅전 36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사치모리』 (도쿄도립도서관 소장)

2. 생애

야마나카 유키모리는 1545년에 야마나카 미쓰유키와 나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어머니 나미는 홀로 유키모리를 키웠다. 나미는 낡은 옷을 입고 밭에서 삼을 키우며 유키모리를 위한 옷을 만들었고, 가난한 아이들에게 옷, 음식, 거처를 제공하는 등 선행을 베풀었다. 그녀는 유키모리에게 성공과 실패를 따르는 사람들과 나누고, 전투에서 병사들을 희생시키거나 승리의 영광을 독차지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유키모리는 이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아마고 씨족을 섬긴 유키모리는 여덟 살에 적을 죽이는 용맹함을 보였고,[13] 열 살 무렵부터는 기마 궁술과 군사 전술을 익혔다.[14]

아마고 가쓰히사[1]를 도와 모리 씨족에 맞서 싸웠으나, 깃카와 모토하루에게 항복하고 가쓰히사는 자결했다. 이후 유키모리는 모리 씨족의 군인들에게 암살당했다.[1]

2. 1. 출신 및 유년기

야마나카 유키모리는 덴분 14년 8월 15일(1545년 9월 20일) 이즈모국 도다노쇼(현재의 시마네현 야스기시 히로세정)에서 야마나카 미쓰유키의 아들로 태어났다.[12] 야마나카 가문은 우다 겐지의 후손으로, 아마고 씨의 분가였다.[11]

어려서부터 아마고 씨를 섬기며, 8세에 적을 물리치는 등 용맹함을 보였다.[13] 10세 무렵부터는 궁술과 병법을 익혔다.[14]

유키모리의 어머니 나미는 유키모리를 혼자 키웠다. 나미는 유키모리를 위해 옷을 만들기 위해 낡은 옷을 입고 밭에서 삼을 키웠다. 한편, 그녀는 다른 가난한 아이들에게 옷, 음식, 그리고 거처를 제공했다. 이 아이들은 그녀의 친절에 감사했고, 성장한 후 유키모리와 협력했다. 나미는 유키모리에게 성공과 실패를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나누라고 말했고, 전투에서 졌을 때 병사들을 죽게 하거나 승리의 찬사를 혼자 독차지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유키모리는 이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갓산토다 성 기슭에 있는 "야마나카 저택 터". 유키모리가 태어난 곳으로 여겨진다.


유키모리의 저택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오륜탑. 현재는 근처의 조코지 묘지로 이전되었다.


유키모리의 전반생은 확실한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아 불명확한 점이 많다. 군기 사료에도 태어난 장소나 연도 등 기재에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출생일은 덴분 14년 8월 15일(1545년 9월 20일)로 여겨진다.[14][13] 그러나 가장 성립이 오래된 『운양군실기』에서는 덴쇼 6년 7월 13일(1578년 8월 16일)에 39세로 사망했다고 기재되어 있어, 이를 역산하면 덴분 9년(1540년)에 태어난 것이 된다.[147]

출생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갓산토다 성의 기슭(현재의 시마네현 야스기시 히로세정)에서 태어났다고 한다.[14] 『운양군실기』, 『후태평기』에서는 와니부치 사의 기슭(현재의 시마네현 이즈모시 벳쇼 정)에서 태어났다고 기재되어 있다.[106][13]

야마나카 유키모리는 용맹한 미남이었다고 전해지지만, 그의 용모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 태합기』(유년기): 보통 아이들과는 용모가 달랐으며, 눈빛이 훌륭하고, 손발도 굵고 씩씩했다. 어린 나이에도 그 행동거지는 매우 씩씩했으며, 불길하기까지 했다.[14]
  • 『운양군실기』(19세, 시나가와 마사카즈와의 일기토 시): 키는 5척 정도로 보이며, 건장한 체격에 피부가 하얗고, 용모가 뛰어난 남자였다.[155]
  • 『명장언행록』(34세, 사망 시): 유키모리가 쓰러졌을 때, 매우 훌륭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 수염은 바늘 끝처럼 날카롭게 뾰족하고 매우 억세서, 창호를 찌르면 쉽게 뚫을 정도였다.[146]

2. 2. 아마고 가문의 멸망과 재흥 운동

에이로쿠 5년 7월 3일(1562년 8월 2일), 모리 씨는 아마고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해 이즈모 국으로 진군했다.[16] 당시 모리 씨는 주고쿠 지방의 거대 세력이었던 반면, 아마고 가문은 당주였던 아마고 하루히사가 급사하고, 뒤를 이은 요시히사의 외교 정책 실패 등으로 세력이 쇠퇴하고 있었다.

모리 모토나리가 이끄는 모리 군은 이즈모에 입국하자, 아마고 측의 유력 국인들을 차례차례 복종시키며 진군해 갔다. 그리고 에이로쿠 5년 12월(1563년 1월)에는 아라쿠마(세아이)에 본진을 설치하고[22], 아마고 가문의 거성인 갓산 토다 성 공략을 본격화했다.

에이로쿠 6년 8월 13일(1563년 8월 31일), 모리 군은 니코 십 기의 제1이라고 하는[23] 하쿠로쿠 성으로 공격을 시작했다.[24] 9월 21일(10월 8일), 아마고 가문은 하쿠로쿠 성을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유키모리도 이에 종군했다.[23] 전투 결과, 모리 군이 승리하여 아마고 군은 갓산 토다 성으로 철수했다(하쿠로쿠 성 전투). 퇴각 시, 유키모리는 약 2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전을 담당하여, 추격하는 깃카와 모토하루·고바야카와 타카카게 양 군을 격퇴했다.[25]

에이로쿠 8년 4월(1565년 5월)[30], 모리 군은 갓산 토다 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4월 17일(5월 16일), 모리 군은 갓산 토다 성에 총공격을 가했다.[31](제2차 갓산 토다 성 전투). 유키모리는 시오타니구치에서 깃카와 모토하루 등의 군대와 싸워 이를 격퇴했다.[33] 9월, 모리 군은 다시 갓산 토다 성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유키모리는 시나가와 마사카즈를 일기토로 쳐 죽였다(야마나카 유키모리·시나가와 마사카즈의 일기토).

에이로쿠 9년 5월 24일(1566년 6월 11일), 모리 군은 세 번째로 갓산 토다 성에 총공격을 가했지만,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36] 11월 21일(1567년 1월 1일), 성 안의 병량이 부족해지고 장병의 도망자가 잇따르자[37], 더 이상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한 아마고 요시히사는 모리 군에게 항복을 신청했다.[38] 그리고 11월 28일(1월 8일), 요시히사는 성을 넘겨주었고, 이로써 전국 다이묘 아마고 가문은 일시적으로 멸망하게 된다.[40] 유키모리는 수행을 자청했지만 허락받지 못하고, 이즈모 대사에서 주군과 헤어졌다.[28][31] 그 후, 유키모리는 아마고 가문을 재흥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아마고 가문이 멸망한 후, 유키모리는 浪人이 되었다. 에이로쿠 11년(1568년), 유키모리는 다치하라 히사쓰나 등 아마고 가문 낭인들과 함께 교토 도후쿠지에서 승려 생활을 하던 니코 마사히사의 유복자 가쓰히사를 환속시키고[44], 각지의 아마고 유신들을 모아 은밀히 아마고 가문 재흥의 기회를 엿보았다.

에이로쿠 12년 4월 (1569년 5월), 모리 모토나리가 오토모 씨를 공격하기 위해 북큐슈로 군대를 파견하자[45], 유키모리는 이즈모국으로 침공을 시작했다.[46] 6월 23일 (8월 6일)[43], 유키모리 등은 단고국 또는 탄바국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시마네 반도에 상륙하여[49] 근처에 있던 충산(츄야마)의 요새를 점령했다.[51] 유키모리 등이 여기서 재흥의 격문을 날리자 국내에 잠복해 있던 구신들이 속속 집결하여 5일 만에 3,000여 명의 군세가 되었다고 한다.[50][43] 그리고 같은 달 하순, 유키모리 등 아마고 재흥군은 신야마성 (마야마성)을 공략하고[52], 이어 스에쓰기 (시마네현마쓰에시 스에쓰기 마을. 현재의 마쓰에성 건설지)에 성을 쌓아[53] 이곳을 거점(스에쓰기성)으로 삼아[54], 산인 지방 각지에서 전투를 벌이며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니코 재흥군의 운슈 침공)。

7월 중순[55], 유키모리는 과거 아마고 가문의 거성인 겟산토다 성 공략에 들어갔다(아마고 재흥군에 의한 겟산토다 성 전투)。 그러나, 이와미국에서 활동하던 아마고 재흥군이 모리 군에게 공격받아 위험한 상태가 되자, 유키모리는 성 공격을 일단 중지하고 구원에 나섰다.[57] 이와미로 달려간 유키모리는 모리 군을 하라테 군 (현재의 시마네현이즈모시 히카와 지역의 평야)에서 격파하고 (하라테 전투), 그 후 이즈모 국내에서 16개의 성을 공략하고[58] 그 세력을 6,000여 명까지 확대했다.[58]

에이로쿠 13년 1월 6일 (1570년 2월 10일), 모리 테루모토,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은 아마고 재흥군을 진압하기 위해 요시다 고리야마성에서 대군을 이끌고 출진했다.[76] 2월 14일 (3월 20일)[78], 아마고 재흥군은 누노베에서 모리 군과 싸워 패배했다 (누노베 산 전투)。 유키모리는 아군이 패주하는 가운데 마지막까지 대장으로 남아 군의 붕괴를 막은 후 거성인 스에쓰기성으로 귀환했다.[79] 전투에서 승리한 모리 군은 다음 날 2월 15일에 겟산토다 성으로 입성하여[44], 아마고 재흥군의 포위에서 성을 해방했다.

세이수이지 (시마네현야스기시 시미즈정) 참배길에 있는 야마나카 시카노스케의 창숫돌. 이 돌로 유키모리가 창을 갈았다고 전해진다.


유키모리 등 아마고 재흥군은, 세이수이산 요새를 공략하여[84] 다시 겟산토다성에 육박했다. 또한, 다카세성에 농성하고 있는 요네하라 쓰나히로와의 연계를 도모하기 위해 시시도 호수 북쪽에 만간지성을 빼앗아[85] 증축했다.[86]

겐키 원년 10월 6일 (1570년 11월 3일), 이즈모국에서의 모리 군 열세 소식을 접한 모토나리는, 모리 군을 지원하기 위해 직속 수군 부대 고다마 나리히데를 파견한다.[89] 10월 하순경에는 토가미야마성이[90], 12월에는 만간지성이 함락[91]되는 등, 아마고 재흥군의 세력은 차츰 축소되었다.

겐키 2년 8월 20일 (1571년 9월 8일)경에는, 마지막 거점이었던 신야마성이 함락[94]되었다. 농성하고 있던 아마고 가쓰히사는 함락 전에 탈출하여 오키로 도망쳤다.[96] 같은 무렵, 스에요시성에 틀어박혀 싸우던 유키모리도 패배하여[97], 깃카와 모토하루에게 포로로 잡혔다.[98] 포로로 잡힌 유키모리는 오다카성에 유폐되었지만, 시시도 다카이에와 구치와 도시요시의 구명 탄원에 의해 스오국사바군도쿠치와 호키국간뉴군다이센에 각각 1000관의 영지를 주는 약속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키모리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후에 틈을 타 탈출했다.[98]

2. 3. 최후

山中 幸盛일본어는 아마고 가쓰히사를 주군으로 섬기며 모리 씨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1578년 빗추 국 아이(현재의 오카야마현 다카하시시)에서 모리 가문의 가신 후쿠마 모토아키에게 살해당했다.[1] 향년 34세(혹은 39세)였다.

가장 오래된 사료인 『운양군실기』에서는 덴쇼 6년 7월 13일(1578년 8월 16일)에 39세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어,[147] 출생년은 1540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통설에 따르면 1545년 9월 20일에 태어났다고 하며, 사망일은 덴쇼 6년 7월 17일(1578년 8월 20일)로 알려져 있다.[149]

3. 평가

야마나카 유키모리는 아마고 십용사 중 한 명으로, 특히 지략과 용맹, 충의가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다.


  • 킷카와 모토나가: "시카스케(鹿介)는 명실상부 천하무쌍의 무장이다."[151]
  • 라이 산요: "깎아지른 듯한 맹명(驍名), 누가 사슴이라 부르랴, 호랑이와 이리의 세계에서 기린을 보네."[152]
  • 번역: 용맹을 떨친 유키모리(시카스케)는 사슴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누가 사슴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유키모리는 전국 시대(먹고 먹히는 세계)의 기린이다.
  • 가쓰 가이슈: "지난 수백 년의 역사로 볼 때, 진정한 역경에 임하여 침착하게 일을 처리한 자는 거의 없다. 만약 있다면 야마나카 시카스케와 오이시 요시오일 것이다."[153]
  • 번역: 지난 수백 년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진정한 역경에 도전하여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처리한 자는 거의 없다. 만약 있다면, 야마나카 시카스케와 오이시 요시오일 것이다.
  • 이타가키 다이스케: "나는 항상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를 사랑한다. 그는 아코의 충신이었으며, 아코의 쇠퇴를 회복할 수 없을 때, 몸을 바쳐 돌보지 않았던 남자이다."
  • 『음덕태평기』: "아마고 부흥군의 대장은 아마고 가쓰히사였지만, 군사 계략은 모두 유키모리의 머리에서 나왔다. 수년간 산인, 산요에 무위를 떨치며, 적은 병력으로 대군을 이기는 일이 많았다. 그의 명성은 천하에 울려 퍼져, 나무꾼이나 사냥꾼 노인까지 일상 대화에 쓸 정도였다. 그러나 천운을 다 써서 주살된 것은 비참했다."[12]
  • 『중국병란기』: "무용의 달인으로서 천하에 이름을 알렸지만,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39세에 멸망하여, 이름을 후세에 남겼다."[148]
  • 『의잔후각』: "유키모리의 용력은 발군이었고, 재치에도 뛰어났다. 당시 사람들은 유키모리를 '''쿠스노키 마사시게보다 낫다'''고 칭찬했다. 유키모리의 모습을 보면 적들이 모두 퇴각했고, 유키모리가 성에 갇히면 적은 화담하여 싸움을 피했다."[154]
  • 『명장언행록』: "주군 가문의 재흥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각지를 헤매면서도 여러 번 고난을 극복하고 군사를 일으켜 싸움을 계속했다. 100번 넘어지고 1,000번 좌절을 맛보았지만, 앞으로 나아갈 뿐 물러서는 일은 없었다. 마지막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졌지만, 그의 의용은 한때 천하에 울려 퍼졌다."[146]

4. 인물 및 일화

야마나카 유키모리는 1545년 야마나카 미쓰유키와 나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어머니 슬하에서 홀로 성장했다. 나미는 밭에서 삼을 키워 직접 옷을 지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다른 어려운 아이들에게도 옷, 음식, 잠자리를 제공하며 나눔을 실천했다. 유키모리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성공과 실패를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전투에서 공을 독차지하지 않았다.[14]

어린 시절부터 아마고 씨족을 섬긴 유키모리는 8세에 적을 죽이고, 10세 무렵부터 기마 궁술과 군사 전술을 익혔으며, 13세에 적병의 목을 베는 등 뛰어난 무재를 보였다.[13] 16세에는 호키 오타카성 공격에 종군하여 일기토로 적장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14]

갓산토다성 포위전(1569)과 후베야마 전투(1570) 등에서 아마고 가쓰히사를 도와 모리 씨족에 맞서 싸웠다.[1] 코즈키성 포위전(1578)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결국 항복하여 주군 가쓰히사는 자결했다.[131] 이후 깃카와 모토하루에게 작은 성을 받았으나, 성으로 가는 길에 모리 씨족 군인들에게 암살당했다.[1]

유키모리는 아마고 가문 멸망 후에도 가문 재흥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아마고 가쓰히사를 옹립하여 재흥 운동을 펼쳤고,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44] 고즈키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암살되기 전까지, 굴하지 않는 충성심과 용맹으로 이름을 떨쳤다. 깃카와 모토나가는 유키모리를 "명실상부 천하무쌍의 무장"이라고 평가했다.[151]

"나에게 칠난팔고(七難八苦)를 달라"고 초승달에 맹세한 일화는 그의 굳은 충절을 상징한다.[14]

라이 산요는 유키모리를 "사슴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누가 사슴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유키모리는 전국 시대의 기린이다."라고 칭송했다.[152] 가츠 가이슈는 "진정한 역경에 도전하여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처리한 자는 거의 없다. 만약 있다면, 야마나카 시카스케와 오이시 요시오일 것이다."라고 평가했다.[153]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유키모리의 충절을 기리며, "나는 항상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를 사랑한다."라고 말했다.[149]

; 사용한 무구


  • 총 길이 약 264cm(칼날 길이 172cm, 휨 3cm, 칼자루 길이 92cm)의 오오타치(大太刀)를 사용했으며, 오야마즈미 신사에 봉납했다.
  • 고즈키 성 함락 후 깃카와 모토하루에게 항복했을 때 소지했던 투구 "철부식 12칸 스지 투구"가 깃카와 사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 "아라미 쿠니유키의 칼[157]"을 소지했고[44], 모리 데루모토에게 헌상되었다.[158]
  • 『교호 메이부츠 쵸』에 따르면, 천하 오검 중 하나인 "미카즈키 무네치카"를 일시적으로 소지했다.[160]
  • "후도 쿠니유키의 칼"을 소지했다.[154]

츠키오카 요시토시의 그림 "요시토시 무사 무류"


; 기타

  • 아마고 십 용사의 으뜸이자, 지혜, 용맹, 충의가 뛰어난 "아마고 삼걸"("아마고 삼용") 중 한 명이다.[155]
  • 유키모리의 화압이 새겨진 덴쇼 6년 7월 8일 엔도 칸스케 앞으로의 서장이 남아있다. 갓츠키 성에서의 싸움을 "평생 잊지 않겠다"고 칭찬하며, 자신과의 주종 관계를 해제한다는 내용이다.

야마나카 유키모리의 화압.

4. 1. 용모

야마나카 시카노스케일본어는 용맹한 미남이었다고 전해진다. 키는 5척(약 150cm) 정도로, 건장한 체격에 피부가 하얗고 용모가 뛰어났다고 한다.[155]

4. 2. 갑주

유키모리는 초승달 모양의 앞 장식과 사슴 뿔 모양의 옆 장식이 있는 투구를 쓴 모습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갓산토다 성터에 세워진 유키모리의 동상도 이 모습으로 제작되었다. 통설에 따르면, 이 투구는 야마나카 가문에 대대로 전해 내려온 것이다.[14]

4. 3. 가스케라는 이름

유키모리의 통칭(자)인 '''가스케(鹿介)'''는 그가 형 진타로에게서 물려받은 투구에 초승달 모양의 앞장식과 '''사슴 뿔 모양의 곁장식'''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146] 이 투구를 쓰고 전장에 나가면 사람들이 그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압도되었다고 한다.[146]

다른 설로는, 유키모리가 산 속에서 사슴처럼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가스케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편, 『태합기』에는 유키모리가 동료들과 함께 성씨에 맞춰 이름을 바꾸기로 하고, 야마나카 가스케(鹿介), 아키야쿠 안노스케, 테라모토 쇼지노스케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14]

4. 4. 무용담

아마고 가문을 섬기면서, 키쿠치 온파치, 고노 칸모츠, 시나가와 마사카즈 등 유명한 무장들과의 일기토에서 승리했다.[14] 하쿠로쿠 성 전투에서는 퇴각하는 아군을 지키며, 깃카와 모토하루·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모리 군을 7차례 격퇴하고 7개의 수급을 얻었다.[25]

  • 야마나 군에서 맹장으로 알려진 키쿠치 온파치, 코노 칸모츠, 시나가와 마사카즈와의 싸움에서 모두 일기토로 물리쳤다.
  • 수급 공양을 두 번 했다.[161][146] 수급 공양은 33개의 수급을 거두면 한 번 한다. 즉, 생애 동안 66개 이상의 수급을 거둔 셈이다.
  • 16세 때, 유키모리는 "30일 이내에 무용의 명예(전공)를 세우고 싶다"고 초승달에게 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군 아마고 요시히사가 야마나 씨의 호키 오다카 성을 공격했고, 유키모리도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유키모리는 돗토리현에 알려진 호걸 키쿠치 온파치를 일기토로 물리치고 공을 세웠다. 이후 유키모리는 평생 초승달을 숭배했다고 한다.[14][146]
  • 에이로쿠 5년 (1562년), 모리 군이 이즈모로 쳐들어가 아마고 군 거점인 겟산 토다 성을 포위했을 때, 유키모리는 혼자 성 아랫마을 민가에서 휴식 중이었다. 이때 모리 군 병사 30~40여 기가 쳐들어왔다. 유키모리는 민가에서 나오자마자 달려온 두 명의 병사를 베어 넘기고, 뒤이어 온 병사들과 난전 끝에 16~17명을 베었다. 남은 병사도 유키모리 혼자서 베어 물리쳤다. 그 후 유키모리는 민가의 늙은 비구니에게 "밥은 없소?"라고 묻고, 나온 시이노 잎에 담긴 밥을 먹고 겟산 토다 성으로 돌아갔다.[14][146]
  • 아마고 씨 멸망 후, 여러 나라를 방랑하던 유키모리가 절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는데, 도적 14명이 절을 습격했다. 유키모리는 혼자 계략을 써서 도적 모두를 생포했다. 도적들은 "지금까지 도둑질을 약 100번, 싸움도 70번 정도 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다.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지만, 유키모리는 "무슨 소리, 어서 꺼져라"하고 이름을 알리지 않고 떠났다.[146]
  • 시나가와 다이젠과의 일기토는 사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아마고 측 기록인 『운양군실기』, 『태합기』에서는 시나가와가 활로 유키모리를 공격하려 했지만, 아마고 씨 무장이 활로 방해하여 실패했고, 유키모리와 시나가와는 접근전을 벌여 일진일퇴 끝에 유키모리가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모리 측 자료인 『음덕태평기』에서는 시나가와가 우세하게 싸웠고, 유키모리는 궁지에 몰렸지만 동료 아키가미 무네노부의 도움으로 이겼다고 한다. 사실 관계는 불분명하나, 『운양군실기』가 『음덕태평기』보다 100년 전후, 『태합기』는 수십 년 먼저 집필되었다. 각 사서는 성립 경위 상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으므로, 1차 사료로서의 신빙성은 각 항목을 참조해야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야마나카 유키모리 · 시나가와 마사카즈의 일기토" 참조)
  • 아케치 미쓰히데의 가신 노노구치 단바가 유키모리에게 "저는 일기토를 세 번 하여 수급을 올렸지만, 당시 모습은 잘 알 수 없고 몽롱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전투에서 자세히 기억하는 사람도 있는데, 타고난 용기가 있는 걸까요?"라고 물었다. 유키모리는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다. 말을 꾸미고 거짓말하며 이름을 떨치는 사람이 많은 세상에 드문 사람이다. 나도 4~5개 수급을 올렸을 때는 당신과 같았다. 7~8개째가 되니 밤이 밝아오는 듯했고, 10개 수급을 취할 때는 적의 내투구를 찌른 곳까지 잘 보였으며, 아이 놀이처럼 지팡이로 쳐서 쓰러뜨릴 수 있었다. 경험을 쌓으면 내 말이 이해될 것이다"라고 답했다.[161][146]
  • 아케치 미쓰히데의 가신 노노구치 히코스케(노노구치 단바와 동일 인물?)가 유키모리에게 공명(功名)을 올리는 방법을 묻자, 유키모리는 "전투 전에는 반드시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 명심하라"고 했다. 히코스케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아침 안개가 흩날려 사물 색깔도 구별할 수 없는 전장에서 유키모리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여기서 눈이 안 보이는 것은 기가 죽었기 때문이다"라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눈을 감았다 뜨자, 마음이 상쾌해지고 눈도 뚜렷하게 보여 적의 수급을 취해 공명을 올렸다고 한다.[162]
  • 어느 날, 첫 출진을 끝낸 두 젊은이가 유키모리에게 각각 말을 걸었다. 한 명은 "적을 향하면 떨림이 생겨 제대로 적을 볼 수 없고, 쳐 죽인 적이 어떤 갑옷을 입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한 명은 "저는 그렇지 않다. 적이 어떤 갑옷을 입고, 어떤 말을 탔는지, 얽힌 장소 등을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두 사람이 돌아간 후, 유키모리는 곁에 있던 사람에게 "처음에 말한 젊은 무사는 훌륭하고 용감한 무사가 될 것이다. 나중에 말한 젊은 무사는 미덥지 않다. 다른 사람이 올린 적의 수급을 주워 자신의 공으로 삼은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다음 싸움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훗날 그 말대로 되었다.[163]

4. 5. 충의

山中 幸盛|야마나카 유키모리일본어는 아마고 가문 멸망 후에도 주군 가문의 재흥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특히 "나에게 칠난팔고(七難八苦)를 달라"고 초승달에 맹세한 일화는 그의 충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야기다.[14]

유키모리는 아마고 요시히사가 모리 씨에게 항복한 후에도, 아마고 가쓰히사를 옹립하여 가문 재흥 운동을 펼쳤다.[44] 비록 여러 차례 실패했지만, 끈질기게 저항하며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130] 고즈키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후쿠마 모토아키에게 암살되기 전까지,[145] 유키모리는 굴하지 않는 충성심과 용맹함으로 이름을 떨쳤다. 깃카와 모토나가는 유키모리를 "명실상부 천하무쌍의 무장"이라고 평가했다.[151]

5. 유산

야마나카 유키모리는 아마고 씨족 부흥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모리 씨족과의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으나, 고즈키성 포위전에서 패배 후 오다 노부나가에게 의탁했다. 그러나 결국 모리 씨족에게 암살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1] 그의 충절과 용기는 후대에 널리 알려져, 소설, 만화, 드라마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월산토미타성터 타이코단 공원에 세워진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유키모리 동상 (1978년 건립)

5. 1. 묘소



야마나카 유키모리의 묘소는 여러 곳에 있다.

  • 간텐사 경내의 묘 (오카야마현 다카하시시 오치아이초 아베): 유키모리의 유해는 간텐사 주지 스님에 의해 수습되어 매장되었다고 전해진다. 절 안에는 유키모리의 위패도 안치되어 있다.

  • 다이토쿠지 교린인 내의 묘 (교토부교토시기타구 무라사키노다이토쿠지초): 1743년, 유키모리의 자손인 고노이케 가문 등 18명이 건립하였다.

  • 혼만지 지센인 내의 묘(교토부 교토시 가미교구 데라마치도리): 1764년, 유키모리의 자손들이 건립하였다.

  • 긴카이코묘지 긴코인 내의 묘(교토부 교토시 사쿄구 구로다니초): 유키모리의 오륜탑이 있으며, 가메이 고레노리 부부의 오륜탑도 함께 있다.

  • 고모리 사원 내의 묘(돗토리현돗토리시 가노초 가노): 1592년, 가메이 고레노리가 유키모리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을 옮기고 이름을 고쳐 지었다. 1608년에는 유키모리의 유골 조각을 모아 묘를 건설했다.

5. 2. 작품

종류제목출판사출판년도ISBN
소설이케나미 쇼타로 『영웅 닛폰 소설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분게이슌주]・슈에이샤 문고・카도카와 문고1971년, 2002년, 1974년
소설난조 노리오 『이즈모의 매』 상하권분게이슌주・분슌 문고1980년, 1984년
소설나카야마 요시히데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도쿠마 문고1988년
소설오타 타다히사 『초승달의 그림자』하베스트 출판1991년ISBN 4-938184-02-8
소설도몬 후유지 『소설 야마나카 시카스케』닛칸 공업 신문사・가쿠요 쇼보1997년, 2009년ISBN 978-4-313-75249-8
소설다카하시 나오키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분게이슌주・분슌 문고1997년, 2000년ISBN 4-16-317310-2
소설호시 료이치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모리에 도전한 불굴의 무장』PHP 문고1997년
소설토고 다카시 『전국 명도전』분슌 문고2003년ISBN 4-16-746110-2
소설미나미하라 미키오 『명장 야마나카 시카노스케』카도카와 쇼텐2007년ISBN 978-4-04-163355-7
소설고토 류지 『아마고 10용사전-붉은 선풍 편』신일본출판사2010년ISBN 978-4-406-05379-2
소설이누이 료쿠로 『귀신과 초승달 -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출진!』아사히 신문 출판2013년ISBN 978-4-02-251086-0
소설츠루미 켄마루 『역전 격주 우주인 그 이름은 야마나카 시카스케!』미디어 웍스 문고2014년ISBN 978-4-04-866869-9
소설마츠모토 세이초 『야마나카 시카노스케』쇼가쿠칸2015년ISBN 978-4-09-352201-4
그림책글: 시카스케를 아이들에게 전하는 모임 그림: 타마이 시 『야마나카 시카스케』하베스트 출판1998년ISBN 4-938184-17-6
만화이와타 렌타로 『야마나카 시카스케 유키모리』히로세 정 관광 협회2003년
만화오야마다 미무 『야마나카 시카스케 이야기 - 아마고 부흥기』주식회사 스퀘어 에닉스2010년ISBN 978-4-7575-3097-3
텔레비전 드라마견실강건 살아가는 방식marble2017년
연극운난시 창작 시민 연극 『KIRINJI 신설・야마나카 시카스케』2019년


  •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는 무쌍 오로치 5(전국 무쌍 프랜차이즈의 다섯 번째 게임)의 주요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이다. 무쌍 오로치 5에서 시카노스케(아자카미 요헤이 분)는 아마고 가문의 충성스러운 장군으로 묘사되며, 뛰어난 용기와 잘생긴 외모로 유명하다.
  • 시카노스케는 전국 바사라 4의 플레이어블 캐릭터이며, 뛰어난 무술가이자 아마고 하루히사의 충실한 부하로 등장한다. 아마고 하루히사는 이전에는 전국 바사라 3에서 플레이 불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했다.
  • 시카노스케는 가부키 연극 "'''신의 새'''"(일본어: 神の鳥, ''The Birds of the Gods'')의 주인공이며, 강력한 아라고토 영웅으로 묘사되고 외모는 가마쿠라 곤고로 카게마사(시바라쿠의 주인공)와 매우 유사하다. 이 연극에서 시카노스케는 악당 무장 아카마츠 마뉴(이 연극의 주요 적)로부터 일본 황새(또는 코노토리) 가족을 구해야 한다. 이 연극이 공연될 때마다(일본 도쿄의 가부키자에서든, 이 연극이 처음 공연되기 시작한 일본 효고현 도요오카의 에이라쿠칸에서든) 시카노스케는 인기 있는 가부키 배우 가타오카 아이노스케 6세가 연기한다. (현재 주요 타치야쿠 배우 중 한 명으로 간주되며 유명한 ''아라고토시''로 알려져 있다.)[5][6][7]

6. 한국과의 관계

야마나카 유키모리는 비록 일본 센고쿠 시대의 인물이지만, 그의 충절과 용기는 한국 사회에서도 충분히 귀감이 될 만하다. 특히 주군을 향한 변함없는 충성심과 불굴의 의지는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다.

라이 산요는 유키모리를 "호랑이와 이리의 세계에서 기린을 보네"라고 칭송하며, 그의 용맹함이 전국시대의 혼란 속에서도 빛났음을 강조했다.[152] 가츠 가이슈는 유키모리를 오이시 요시오와 함께 "진정한 역경에 임하여 침착하게 일을 처리한 자"로 평가하며, 그의 뛰어난 위기 대처 능력을 높이 샀다.[153]

이러한 유키모리에 대한 평가는 한국의 역사적 인물들과 비교해 볼 때 더욱 흥미롭다. 예를 들어, 고려 말기의 충신 정몽주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키다 죽음을 맞이했는데, 유키모리의 모습에서 정몽주와 같은 충절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왜적에 맞서 싸워 나라를 지켰는데, 유키모리의 불굴의 의지 역시 이순신 장군과 비견될 만하다.

다만, 유키모리가 센고쿠 시대 일본의 인물이라는 점은 한국 독자들에게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따라서 유키모리의 생애와 업적을 소개할 때, 한국 역사와의 연관성이나 비교점을 제시하는 것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데 유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과 같은 한일 관계사의 주요 사건들을 언급하거나, 유키모리의 충절과 용기를 한국의 역사적 인물들과 비교하는 방식이 효과적일 수 있다.

6. 1.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서술 (예시)

야마나카 유키모리는 불의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킨 인물로, 더불어민주당의 핵심 가치인 정의와 평등을 실현하고자 했던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유키모리의 아마고 재흥 운동은 기득권 세력에 맞서 싸운 정의로운 투쟁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더불어민주당의 역사적 지향점과 일맥상통한다. 당시 일본의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유키모리는 외세(모리 가문)에 맞서 싸웠으며, 이는 자주적인 외교 노선을 추구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입장과도 연결될 수 있다.

유키모리가 사용했던 물품은 다음과 같다.

물품설명
오오타치(大太刀)총 길이 264cm(칼날 길이 172cm, 휨 3cm, 칼자루 길이 92cm)의 이시슈(石州) 오오타치(大太刀)(이시슈 와사다(石州和貞) 제작)를 사용했으며, 이 칼을 오야마즈미 신사에 봉납했다.
투구고즈키 성 함락 후 깃카와 모토하루에게 항복했을 때 소지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철부식 12칸 스지 투구(鉄錆十二間筋兜)"
"아라미 쿠니유키의 칼"[157][44]을 소지했다. 모리 데루모토가 소지했으며[158], 이후 데루모토로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헌상되었다고 전해진다.
미카즈키 무네치카미카즈키 무네치카를 일시적으로 소지했다.[160]
"후도 쿠니유키의 칼"을 소지했다.[15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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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Symbols of Japan: Thematic Motifs in Art and Design https://books.google[...]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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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웹사이트 Tsuki hyakushi http://art.thewalter[...] Walters Art Museum 201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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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서적 山名徳寿丸・宗詮連署書状 譜録 1563-12-14
[103] 서적 尼子勝久感状写 閥閲録120 1573-08-21
[104] 서적 因幡民談記
[105] 서적 吉川元春・元長連署覚書 藩中諸家古文書纂 null
[105] 서적 吉川元春書状写 閥閲録117 1573-09-27
[106] 서적 雲陽軍実記
[107] 서적 陰徳太平記
[108] 문서 毛利輝元書状写/(天正元年)9月22日/野村信濃入道宛
[109] 문서 毛利輝元書状写/(天正元年か)11月12日/井原小四郎宛
[110] 문서 吉川元春書状写/(天正2年)3月26日/田公次郎左衛門尉宛 1574-03-26
[111] 문서 吉川元春感状写/(天正2年)10月5日/牛尾大蔵左衛門尉(春信)宛 1574-10-05
[112] 문서 大友宗麟書状/(天正2年カ)8月2日/牧兵庫助宛
[113] 문서 安国寺恵瓊自筆書状/(天正元年)12月12日/井上又右衛門尉宛 1573-12-12
[114] 문서 大友宗麟書状/(天正2年か)11月19日/亀井鹿介宛
[115] 문서 山名韶熈(祐豊)・山名氏政連署書状/天正3年5月28日/吉川駿河守(元春)宛 1575-05-28
[116] 문서 山名韶熈書状/(天正3年)正月26日/吉川駿河守(元春)宛 1575-01-26
[117] 서적 中務大輔家久公御上京日記 1575-06-17
[118] 서적 陰徳太平記
[119] 문서 垣屋豊続書状/天正3年6月7日/吉川駿河守(元春)宛 1575-06-07
[120] 문서 草刈氏軍忠状写/(天正3年)9月18日 1575-09-18
[121] 문서 山名韶熈(祐豊)書状/(天正3年)10月13日/吉川駿河守(元春)宛 1575-10-13
[122] 문서 毛利輝元書状写/(天正3年)10月15日/国対(国司就信)・黒三(黒川蒼保)宛 1575-10-15
[123] 문서 吉川元春書状/(天正3年)10月21日/大坪甚兵衛尉宛 1575-10-21
[124] 문서 垣屋豊続書状/(天正3年)6月7日/吉川駿河守(元春)宛て 1575-06-07
[125] 서적 備中兵乱記
[126] 서적 備中兵乱記
[127] 문서 毛利輝元書状写/(天正3年)9月14日/吉見正頼宛 1575-09-14
[128] 문서 八木豊信書状/(天正4年)5月7日/吉川駿河守(元春)宛 1576-05-07
[129] 서적 陰徳太平記
[130] 문서 渡辺助允覚書 1611-03-13
[131] 문서 羽柴秀吉書状/(天正5年)12月5日/下村玄蕃助宛 1577-12-05
[132] 문서 尼子勝久安堵状写/天正5年12月8日 1577-12-08
[133] 문서 羽柴秀吉書状写/(天正6年)正月18日/江見九郎次郎宛 1578-01-18
[134] 서적 備前軍記
[135] 문서 織田信長朱印状/(天正6年)3月22日/黒田孝高|小寺官兵衛尉宛て 1578-03-22
[136] 문서 吉川元長自筆書状/(天正6年)5月晦日/以徹尊老宛 1578-05-31
[137] 서적 家忠日記 1578-05
[138] 문서 吉川元春書状写/(天正6年)4月22日/湯原弾正忠宛 1578-04-22
[139] 문서 吉川元春書状写/(天正6年)5月6日/内藤小七郎宛 1578-05-06
[140] 서적 信長公記
[141] 문서 毛利輝元書状写/(天正6年)6月28日/児玉元良宛 『閥閲録17』 1578-06-28
[142] 문서 吉川元春外三名連署起請文写/(天正6年)7月5日/日野五郎・立原源太兵衛・山中鹿助宛 『天野毛利譜録』 1578-07-05
[143] 문서 吉川元春自筆書状/(天正6年)7月12日/一色式部少輔宛 『吉川家文書』 1578-07-12
[144] 문서 小早川隆景書状/(天正6年)7月10日/楢崎三河守宛 『楢崎家文書』 1578-07-10
[145] 문서 福間元明覚書写/天正14年 『閥閲録83』 1586
[146] 서적 名将言行録
[147] 서적 雲陽軍実記
[148] 서적 中国兵乱記
[149] 논문 米原
[150] 문서 島根県口碑伝説集
[151] 문서 吉川元長自筆書状/年月日未詳(天正6年5月ヵ6月)/周伯恵雍宛 『西禅永興両寺旧蔵文書』 1578-05
[152] 문서 山中幸盛
[153] 문서 氷川清話
[154] 문서 義残後覚
[155] 문서 雲陽軍実記
[156] 문서 陰徳太平記
[157] 문서 鎌倉時代中期の京の刀工「来国行」作の太刀
[158] 문서 老翁物語
[159] 문서 後太平記
[160] 문서 享保名物帳
[161] 문서 武将感状記
[162] 문서 常山紀談
[163] 문서 耳嚢
[164] 문서 陰徳太平記
[165] 문서 雲陽軍実記
[166] 문서 陰徳太平記
[167] 문서 雲陽軍実記
[168] 문서 陰徳太平記
[169] 문서 豊鑑
[170] 문서 陰徳太平記
[171] 문서 武者物語
[172] 문서 武者物語之抄
[173] 문서 毛利輝元書状写/(天正6年)7月23日/あは彦右宛 『吉川家中并寺社文書』 1578-07-23
[174] 뉴스 ラピスラズリ、戦国武将・山中鹿介の子孫 英国人の祖父を持つ歌姫 http://www.sanspo.co[...] 2017-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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