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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아메리카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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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1799년 러시아 제국에 의해 설립된 기업으로, 알래스카를 중심으로 모피 무역, 탐험, 식민 활동을 수행했다. 이르쿠츠크 상인들의 모피 무역 독점에서 시작되어, 알렉산드르 바라노프를 초대 총독으로 알래스카 지역을 확장했다. 1799년에는 러시아 아메리카에서의 무역 독점권을 부여받았으며, 1804년에는 노보-알한겔스크(현재 시트카)를 건설했다. 1820년대부터는 모피 동물 감소, 영국 및 미국 상인과의 경쟁, 식량난 등의 어려움을 겪었고, 1867년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하면서 회사는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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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아메리카 회사 - [회사]에 관한 문서
회사 정보
러시아-아메리카 회사 깃발, 1806년 디자인
러시아-아메리카 회사 깃발, 1806년 디자인
공식 명칭예의황제의 비호 아래 러시아-아메리카 회사
로마자 표기Pod vysochayshim Yego Imperatorskogo Velichestva pokrovitelstvom Rossiyskaya-Amerikanskaya Kompaniya
해산알래스카 매매 (1867년) 이후 운영 중단
계승 회사알래스카 상업 회사
설립일1799년 7월 8일
설립 장소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제국
해체일1881년
형태주식회사
소재지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제국
산업모피 교역
설립자니콜라이 레자노프
그리고리 셸리호프
주요 인물알렉산드르 안드레예비치 바라노프

2. 설립 배경 및 초기 역사

1837년 신 아르한겔스크(현재 알래스카 시트카)에 있는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본부


1799년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업무를 감독하기 위해 '통신원(Correspondent)' 직책을 신설하고 초대 통신원으로 니콜라이 레자노프를 임명했다.[4] 이 역할은 곧 주주 선출 2명과 정부 임명 1명으로 구성된 3인 이사회 체제로 확대되었다.[4][8] 이사들은 회사 활동 보고서를 차르에게 직접 제출해야 했으며,[4][8] 북아메리카 현지의 요새와 무역 기지를 관리할 최고 관리자를 임명했다.

초대 최고 관리자로는 알렉산드르 안드레예비치 바라노프가 임명되었다. 그는 회사의 초기 운영 기반을 닦았으며, 1818년 러시아 제국 해군 장교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후 최고 관리자 직책은 제국 해군 장교들이 계속 맡게 되었다.[8]

1799년 우카제(차르 칙령)는 회사에 러시아령 아메리카(남쪽 경계 북위 55도)에서의 20년간 무역 독점권을 부여했다. 1821년 알렉산더 1세는 1821년 우카제를 통해 회사의 관할 지역을 남쪽으로 확장하려 했으나(초기 북위 45°50′, 이후 북위 51도로 수정), 이는 영국과 미국의 반발을 샀다.[5] 결국 러시아는 1824년 러시아-미국 조약과 1825년 러시아-영국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남쪽 경계를 북위 54°40′로 확정했다.[6]

1821년 우카제를 시행하려는 과정에서 1822년 러시아 슬루프선 '아폴론'호가 보스턴에서 신 아르한겔스크로 향하던 미국 브리그선 '펄'호를 나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정부의 항의로 러시아는 선박을 석방하고 보상금을 지불했다.[7] 또한 1833년 회사 총독인 페르디난트 폰 브란겔 남작이 영국과의 조약을 위반하자, 러시아는 1838년 손해 배상의 일환으로 현재 알래스카 팬핸들 남동부 지역을 허드슨 만 회사에 임대하기도 했다. 이 임대로 허드슨 만 회사는 북위 56° 30′까지의 권한을 인정받았다.

2. 1. 셰리호프와 레자노프의 활동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러미회사) 설립 이전, 알래스카의 모피 무역은 이르쿠츠크의 상인 Григорий Шелихов|그리고리 셰리호프ru와 그의 사위 니콜라이 레자노프의 회사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다. 1784년, 셰리호프는 동료 Иван Ларинович Голиков|이반 라리노비치 골리코프ru와 함께 알래스카 남부의 코디악섬에 진출하여 정착지를 건설했다.

1790년, 셰리호프는 알래스카 식민지화를 목표로 여러 모피 회사를 통합하여 '셰리호프-골리코프 회사'(Шелихов-Голиков|셰리호프-골리코프ru)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이후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모태가 되었다. 셰리호프가 1795년에 사망한 후에는 그의 사위인 레자노프가 회사를 계승했다. 당시 알래스카 현지에서는 셰리호프에게 고용된 상인 '''알렉산드르 바라노프'''(Александр Баранoв|알렉산드르 바라노프ru)가 중심이 되어 정착지를 늘려가고 있었다.

2. 2. 알렉산드르 바라노프와 초기 식민지 경영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러미회사) 설립 이전, 알래스카 지역의 모피 무역은 이르쿠츠크 상인 그리골리 셰리호프와 그의 사위 니콜라이 레자노프가 주도하는 회사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다. 1784년, 셰리호프는 동료 이반 라리노비치 고리코프와 함께 알래스카 남부 코디악 섬에 첫 러시아 정착지를 건설했다. 1790년에는 알래스카 식민지화를 목표로 여러 모피 회사를 통합하여 셰리호프-골리코프 회사(러미회사의 전신)를 설립했다.[4] 셰리호프는 알래스카 현지 경영을 위해 상인 알렉산드르 안드레예비치 바라노프를 고용했고, 바라노프는 이후 정착지를 확장해나갔다. 1795년 셰리호프가 사망하자 레자노프가 회사를 이끌게 되었다.

1799년, 파벨 1세는 1799년 우카제(차르 칙령)를 통해 셰리호프-골리코프 회사를 기반으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를 공식 설립하고 20년간의 독점권을 부여했다.[5] 이 칙령으로 러미회사는 북위 55도 이북의 러시아령 아메리카(알래스카)와 알류샨 열도, 쿠릴 열도에서의 모피 채취 및 광물 채굴 독점권을 인정받았다. 회사에는 상인뿐 아니라 황족과 귀족들도 출자했으며, 이익의 3분의 1은 황제에게 귀속되도록 규정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회사 업무를 감독하기 위해 초기에는 '통신원' 직책을 두어 니콜라이 레자노프를 임명했으나,[4] 곧 주주 선출 2명과 정부 임명 1명으로 구성된 3인 이사회 체제로 변경되었다.[4][8] 이사회는 회사 활동 보고서를 차르에게 직접 제출해야 했으며,[4][8] 북아메리카 현지에서 요새와 무역 기지를 관리할 최고 관리자를 임명했다.

초대 최고 관리자로는 알렉산드르 안드레예비치 바라노프가 임명되었다. 그는 1790년부터 1818년까지 알래스카 총독을 겸임하며 러미회사의 초기 식민지 경영을 이끌었다.[8] 바라노프는 파블롭스카야(현재 코디악)를 초기 거점으로 삼았고, 1804년에는 틀링깃족과의 시트카 전투를 거쳐 노보-아르한겔스크(신 아르한겔스크, 현재 시트카)를 건설하여 새로운 행정 중심지로 삼았다.[8] 그는 또한 번성하는 해상 무역을 조직했다. 그러나 식민지 경영에는 어려움도 따랐다. 회사는 해달 사냥을 위해 알루티크족과 알류트족 남성들을 코디악과 알류샨 열도에서 3년 동안 강제로 징집했다.[8] 또한 숙련된 러시아인 선원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농노제로 인해 많은 인구가 토지에 묶여 있었고, 해군 기술을 가진 인력은 대부분 러시아 제국 해군에 소속되었기 때문이다.[4]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02년 제국 정부는 해군 장교들을 러미회사에 파견하도록 지시했으며, 급여의 절반은 회사가 부담했다.[4] 바라노프는 1818년 퇴임했고, 이후 최고 관리자 직책은 제국 해군 장교들이 맡게 되었다.[8]

러미회사는 중국 광저우 시장 진출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803년부터 1806년까지 일주 항해를 후원하여 청나라와의 무역 관계를 열고자 했지만,[9] 중국 항구는 여전히 폐쇄적이었고, 모피는 오호츠크 항구를 통해 육로로 캬흐타까지 운송되어 중국 상품(주로 면화, 자기, 차)과 교역되었다.[10][11]

1817년, 바라노프의 임기 말에 러미회사 대리인 게오르크 안톤 셰퍼가 하와이에 엘리자베스 요새를 건설하고 하와이 왕국을 전복하려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셰퍼 사건).

1821년, 알렉산더 1세는 새로운 칙령(1821년 우카제)을 통해 러미회사의 지배 지역을 북위 51도까지 확장했으나,[5] 이는 영국과 미국의 반발을 샀다. 1822년 러시아 슬루프선 '아폴론'호가 미국 브리그선 '펄'호를 나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 정부가 항의했고, 러시아는 선박을 석방하고 보상금을 지불했다.[7] 결국 러시아는 1824년 러시아-미국 조약과 1825년 러시아-영국 조약을 통해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남쪽 경계를 북위 54도 40분으로 확정하게 되었다.[6]

3. 발전과 확장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알래스카를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점차 북아메리카 남부 지역, 특히 스페인 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알타 캘리포니아로 관심을 넓혔다. 반면 바하 캘리포니아나 오레곤 준주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또한 태평양의 하와이 왕국과의 관계 증진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셰퍼 사건처럼 회사 대리인의 독단적인 식민지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는 등[23]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회사의 남방 확장은 주로 해달 모피 확보를 목표로 이루어졌다. 1803년부터 미국인 선장들과 계약을 맺고 알류트족 사냥꾼들을 동원하여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해달을 사냥했으며, 이를 통해 상당한 양의 모피를 확보했다.[20][22][11] 니콜라이 레자노프의 1806년 캘리포니아 방문[21] 이후, 스페인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샌프란시스코 만 북쪽 지역에 주목하여 1812년 포트 로스를 건설했다.[22] 포트 로스는 회사의 최남단 거점이었으나, 지속적인 식량 부족 문제 등으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1820년대에는 데카브리스트의 난과 연관된 장교 드미트리 자발리신이 캘리포니아의 광범위한 식민지화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민들의 독립을 지원하고 러시아와의 동맹을 통해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자는 야심 찬 계획을 제시했으나,[23] 미국, 영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한 카를 네셀로데 외무장관 등의 반대와 알렉산드르 1세 사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1824년 러시아-미국 조약과 182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이 체결되면서 북아메리카에서 러시아의 영토 확장은 더욱 제약을 받게 되었다.

3. 1. 시트카 건설과 남방 진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알래스카 외 북아메리카 지역, 특히 알타 캘리포니아로 관심을 확장했으며, 바하 캘리포니아와 오레곤 준주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다. 또한 하와이 왕국과의 관계 증진 노력도 있었으나, 셰퍼 사건과 같이 회사 대리인의 단독적인 식민지화 시도에 그치기도 했다.

회사는 남쪽으로의 확장을 모색하며 컬럼비아 강 지역에 정착촌 건설을 계획하기도 했다. 니콜라이 레자노프는 신 아르한겔스크(노보-아르한겔스크)를 컬럼비아 강으로 이전하고 조선소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으며, 이는 캘리포니아 해안까지 러시아 영토를 확장하려는 회사 이사회의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13][14] 그러나 1806년, 존 드울프로부터 구입한 미국 선박 ''주노(Juno)''호가 컬럼비아 강 하구 진입을 시도했으나 악천후로 인해 실패했다.[13]

회사가 알타 캘리포니아나 바하 캘리포니아에서 모피(주로 해달)를 얻기 위해 처음 선박을 파견한 것은 1803년이었다. 미국인 제임스 오케인이 소유한 ''오케인(O'Cain)''호는 바하 캘리포니아 반도에서 해달을 잡기로 계약했으며, 포획한 해달 가죽의 절반을 회사에 넘기는 조건이었다.[20] 이 배에는 미국 선원 외에 러시아-아메리카 회사 직원 2명과 알류트족 40명,[20] 그리고 코디악 섬의 알루티크족 원주민 사냥꾼들이 탑승했다.[22] 이들은 알류트 카약(iqyax|이크야크ale)과 같은 전통적인 사냥 도구를 사용했다. 산킨틴을 기점으로,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엘 로사리오 선교부에서 현재의 코몬두 시 지역인 산토 도밍고까지 해달을 사냥했다.[22] 1804년 6월 코디악 섬으로 돌아온 ''오케인''호는 해달 가죽 1,800장을 싣고 있었는데, 이는 원주민들이 직접 잡거나 스페인인들로부터 구매한 것이었다.[22] 이후 몇 년간 유사한 계약이 다른 미국 선장들과 체결되었고, 알류트족 사냥꾼들은 계속해서 캘리포니아 해달 포획에 동원되었으며, 때로는 300명 이상이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11] 1805년부터 1812년 사이, 알렉산드르 바라노프는 캘리포니아로 파견된 10척의 미국 선박에 알류트족 노동자를 제공했고, 이를 통해 22,000장이 넘는 해달 가죽을 확보했다.[20]

1805년 8월, 니콜라이 레자노프는 회사 소유지를 시찰하기 위해 신 아르한겔스크에 도착했다. 당시 기지는 심각한 식량 부족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는 수십 년간 회사를 괴롭힌 고질적인 문제였다. 레자노프는 미국 선박 ''주노(Juno)''호를 구입하여 1806년 2월, 식량 확보를 위해 알타 캘리포니아로 남하했다.[21]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레자노프는 자신을 차르의 전권대사로 소개하며 스페인 당국과 협상을 시도했다.[22] 그는 식량 공급 계약을 위해 프레시디오 사령관 호세 다리오 아르궤요와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고, 그의 딸 콘셉시온 아르궤요와 로맨스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스페인 관리들은 외국과의 무역을 금지하는 제국 법령을 어기기를 꺼려 멕시코시티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결국 레자노프는 식량 확보에 실패한 채 몇 달 후 신 아르한겔스크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방문을 통해 레자노프는 샌프란시스코 만 북쪽 지역에는 스페인의 군사 기지나 정착지가 거의 없다는 귀중한 정찰 정보를 얻었다. ''주노''호가 돌아온 직후, 몇몇 미국 선박들이 알타 캘리포니아에서 조업 계약을 맺었다. 한 척은 보데가 만에 기지를 두었고, 알래스카 원주민 노동자들은 현재의 멘도시노 군 해안부터 파랄론 제도까지 활동했다.[22] 샌프란시스코 만 북쪽 해안에서 해달을 잡던 중, 스페인 사령관 루이스 안토니오 아르궤요가 원주민 사냥꾼들의 알류트 카약(baidarkas|바이다르카스ale)에 포격을 가해 만에서 쫓아내는 사건도 발생했다.[22] 미국 선장들의 보고와 레자노프의 캘리포니아 정찰 결과는 최고 관리자 바라노프가 해당 지역에 해안 정착지 건설 계획을 세우도록 자극했다. 풍부한 해달 개체 수, 샌프란시스코 만 북쪽의 스페인 군사력 부재, 스페인 선교부와의 잠재적 교역 가능성 등이 주요 요인이었다.[22]

결국 1812년, 현재 소노마군 해안에 포트 로스가 건설되었다. 이곳은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최남단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회사는 보데가 만의 루먄체프 항(Port Rumyantsev)과 러시아 강 계곡 남쪽의 여러 목장을 포함한 추가 기지들도 운영했다. 이 지역은 당시 스페인(이후 멕시코) 영토였으나, 러시아 측은 영국의 뉴 알비온 발견 주장을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하며 1841년 매각 시점까지 이를 유지하려 했다.[23] 포트 로스는 현재 일부 복원되어 야외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로체프 가옥(Rotchev House)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원래 건물이다.

1824년 말, 데카브리스트 반란과 연관된 젊은 장교 드미트리 자발리신은 러시아 황실에 캘리포니아의 광범위한 식민지화 계획을 제안했다. 그는 1823-1824년 북아메리카 러시아 영토 탐사대의 일원이었다. 그의 제안은 캘리포니아인들이 멕시코로부터 독립하여 러시아와 정치적 동맹을 맺도록 유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자발리신은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북쪽으로는 오레곤 준주 국경, 남쪽으로는 샌프란시스코 만, 동쪽으로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 또는 새크라멘토 강까지 이르는 광대한 토지를 부여받기를 원했다. 그 대가로 러시아는 샌프란시스코 만에 해군력을 주둔시키고, 캘리포니아 선교부의 노동력 유지 권리를 보호하며, 캘리포니아인들의 정착과 스페인어 학교 설립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정부 고위층에서는 자발리신의 계획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외무장관 카를 네셀로데 백작은 미국 및 영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반대했다. 반면,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궁정 대표였던 니콜라이 모르드비노프 백작은 이 계획을 옹호하며 자발리신의 적극적인 자세를 지지했다. 모르드비노프는 더 나아가 러시아 지주들로부터 농노를 사들여 캘리포니아로 보내는 계획을 구상했다. 해방된 농노들은 회사의 지원을 받아 7년간 정착민으로 봉사한 후, 제공받은 농기구와 경작지를 소유하게 되는 조건이었다.

자발리신의 계획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연회가 열렸고, 미하일 스페란스키(전 시베리아 총독)와 같은 고위 관리들이 참석했다. 스페란스키는 캘리포니아를 알래스카, 사할린 등 러시아 태평양 영토의 미래 곡물 공급원으로 보았다. 처음에는 반대했던 외무차관 폴레티카도 연회 후에는 지지 입장으로 돌아섰고, 교육부 장관 시슈코프 역시 계획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자발리신은 1824년 러시아-미국 조약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 (1825)이 북아메리카에서 러시아의 적극적인 정책을 제약할 것을 우려했다. 그는 알렉산드르 1세 황제를 직접 만나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황제는 결국 네셀로데의 신중론을 받아들여 자발리신의 캘리포니아 파견을 거부했다. 알렉산드르 1세의 사망과 이어진 데카브리스트 반란으로 인해 캘리포니아에 대한 광범위한 상업적 식민지화 계획은 최종적으로 무산되었다. 훗날 1853년, 무라비요프 총독은 알렉산드르 2세 황제에게 1820년대 캘리포니아가 사실상 무주지였음을 언급하면서도, "캘리포니아의 교두보"는 결국 진출하는 미국인들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3. 2. 하와이 진출 시도

(내용 없음)

3. 3. 영토 확장과 국제 조약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영향력을 확장하려 했으며, 특히 알타 캘리포니아 지역에 관심을 집중했다. 반면 바하 캘리포니아나 오레곤 준주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하와이 왕국과의 관계 증진 노력도 일부 있었으나, 셰퍼 사건처럼 회사 대리인이 독자적으로 섬을 식민지화하려다 실패한 사례도 있었다.

1824년 말, 젊은 장교이자 데카브리스트 반란에 연루되었던 드미트리 자발리신은 캘리포니아의 광범위한 식민지화 계획을 러시아 황실에 제안했다. 그는 1823년부터 1824년까지 북아메리카의 러시아 영토를 탐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멕시코로부터 독립하여 러시아와 동맹을 맺도록 유도하자고 주장했다. 자발리신은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오레곤 준주 경계에서 샌프란시스코 만까지, 그리고 동쪽으로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 또는 새크라멘토 강까지 이르는 넓은 땅을 확보하기를 원했다. 그 대가로 러시아는 샌프란시스코 만에 해군력을 주둔시키고, 캘리포니아 선교부 신도 노동력의 권리를 보호하며, 부여받은 토지에 캘리포니아인들이 정착하도록 허용하고 캘리포니아 전역에 스페인어 학교 설립을 허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자발리신의 계획은 러시아 정부 고위층 사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외무장관 카를 네셀로데는 이 계획이 미국영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반면,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궁정 대표였던 니콜라이 모르드비노프는 자발리신의 계획을 적극 지지하며, "과도한 관용과 갈등 회피가 오히려 갈등을 부추길 수 있다"는 자발리신의 주장에 동조했다. 모르드비노프는 더 나아가 러시아 지주들로부터 농노를 사들여 해방시킨 뒤 캘리포니아로 보내 정착시키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구상했다. 이들은 7년간 회사에 봉사한 후 자유민으로서 경작지와 농기구를 소유하게 될 예정이었다. 전 시베리아 총독이었던 미하일 스페란스키는 캘리포니아를 알래스카, 사할린, 시베리아 연안 영토를 위한 미래 곡물 공급원으로 보며 계획을 지지했고, 처음에는 계획에 반대했던 외무차관 폴레티카는 연회 후 이를 전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교육부 장관 시슈코프 역시 건의서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발리신은 1824년 러시아-미국 조약과 182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서 러시아 아메리카의 국경을 규정한 것이 제국이 북아메리카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는 것을 제한할까 봐 우려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관철하기 위해 알렉산드르 1세 황제와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알렉산드르 1세는 네셀로데의 신중론을 받아들여 자발리신의 캘리포니아 파견을 거부했다. 알렉산드르 1세의 죽음과 그 뒤를 이은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캘리포니아 광범위 상업 식민지화에 대한 고려는 중단되었다. 훗날 1853년 무라비요프 총독은 알렉산드르 2세 황제에게 1820년대 캘리포니아는 "아무도 점유하지 않았고 사실상 개척되지 않았다"고 전했지만, "캘리포니아의 교두보"는 결국 진출하는 미국인들에게 "조만간" 넘겨줘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4. 경영과 도전

시토카에 남아 있는 정교회 성당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경영은 초기부터 식량난과 같은 어려움에 직면하여 큰 손실을 보았다. 레자노프(Резанов)는 이를 타개하고자 일본스페인령 알타 캘리포니아와의 교역을 시도했으나, 쇄국 정책과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모두 무산되었다.

초대 총책임자 바라노프(Баранов)가 1818년 퇴임한 후, 해군 장교들이 경영을 맡았으나 모피 무역 경험 부족으로 어려움은 지속되었다. 이 시기 탐험가이자 해군 장교였던 '''페르디난트 폰 우란겔'''(Ferdinand von Wrangel)은 알래스카 총독(1830-1835)과 본사 지배인(1840-1849)을 역임하며 정착지 재건과 경쟁사 대응에 힘썼다.

회사는 알래스카 해안 지역 지배에 그쳤고, 1830년대 이후 영국의 허드슨 만 회사와 미국 사냥꾼들의 내륙 진출로 경쟁이 심화되었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모피 운송 비용 문제와 만성적인 식량 부족은 해결되지 않았으며, 1821년 외국과의 접촉을 금지한 칙허는 오히려 미국 선박을 통한 보급과 판매를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회사는 허드슨 만 회사에 일부 항로 이용권을 내주는 협정을 맺기도 했다.

1840년대에도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원주민들은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고, 특히 알류트족은 강제 이주와 전염병, 과도한 노동으로 인구가 감소했다. 틀링깃족은 회사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다만, 이후 부임한 해군 장교들이 학교와 병원을 건설하는 등 생활 개선 노력을 기울이면서 원주민 인구는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들 역시 원주민 보호와 문화 존중을 바탕으로 선교 활동을 펼쳐 정교회 신자 증가에 기여했다.

4. 1. 경영 구조와 방식

1799년 러시아 정부는 회사 업무 감독을 위해 '통신원(Correspondent)' 직책을 신설하고 초대 통신원으로 니콜라이 레자노프를 임명했다.[4] 이 역할은 곧 주주 선출 2명과 정부 임명 1명으로 구성된 3인 이사회로 확대되었다.[4][8] 이사들은 회사 활동을 차르에게 직접 보고했으며, 북아메리카 현지 시설을 관리할 최고 관리자(Chief Manager) 임명권도 가졌다.[4][8]

초대 최고 관리자로는 알렉산드르 안드레예비치 바라노프가 임명되었다. 그는 재임 기간(1790년~1818년) 동안 회사의 운영 기지인 파블롭스카야(오늘날의 코디악)와 1804년 신 아르한겔스크(오늘날의 시트카)를 건설하고 해상 무역을 조직했다. 바라노프는 1818년 러시아 제국 해군 장교에게 최고 관리자직을 인계하고 러시아로 귀환하던 중 사망했다. 이후 최고 관리자 직책은 제국 해군 장교들에게만 배정되었다.[8]

회사는 초기 운영에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숙련된 선원 확보가 문제였는데, 제국 내 해군 기술을 가진 인력은 대부분 러시아 제국 해군 복무를 선호했고, 당시 농노제로 인해 일반 농민들은 이동이 자유롭지 않아 해군 훈련을 위한 인력 모집이 어려웠다.[4] 이에 1802년 제국 정부는 해군 장교들을 회사에 파견하도록 했고, 급여의 절반은 회사가 부담했다.[4] 식량난 역시 고질적인 문제였다. 레자노프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스페인령 알타 캘리포니아와의 무역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818년, 러시아 정부는 기존 상인 주주들로부터 회사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사실상 국영화했다. 그러나 경영을 맡은 해군 장교 대부분은 모피 무역 경험이 부족했다. 1820년대부터 모피 동물의 개체 수가 줄면서 회사의 수익성은 급격히 악화되었다.[4] 이미 1808년에도 연간 수입이 지출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등 재정 상태는 좋지 않았다.[4]

이 시기에는 탐험가이자 해군 장교인 남작 페르디난트 폰 랑겔 같은 인물도 있었다. 그는 1830년부터 1835년까지 알래스카 총독을 역임했으며, 이후 1840년부터 1849년까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본사에서 지배인(Director)으로 활동하며 정착지를 재건하고 경쟁 상대인 영국 허드슨 만 회사 및 미국 상인들과 경쟁했다. 하지만 랑겔이 총독이던 1833년, 영국과의 조약을 위반한 대가로 러시아는 1838년 현재 알래스카 팬핸들 남동부 지역을 허드슨 만 회사에 임대해야 했다.

1840년대 회사 이사회는 5명의 제국 해군 장교로 구성된 행정부(Administration)로 대체되었다.[4] 회사는 "부적합하고 능력 없는 직원들"과 "과도하게 확장된 조직 운영에 대한 경영진의 경험 부족"으로 인해 지속적인 어려움을 겪었다는 평가를 받는다.[4] 회사는 알래스카 내륙까지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해안 지역 통제에 그쳤으며, 높은 운송 비용과 만성적인 식량 부족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경쟁 세력과의 접촉을 금지한 1821년 칙령은 오히려 식량 보급과 모피 판매를 어렵게 만들었다.

4. 2. 경제적 어려움과 경쟁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설립 초기부터 여러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고질적인 식량난이었다. 초대 통신원이었던 니콜라이 레자노프는 식량 확보를 위해 일본과의 무역을 시도했으나 쇄국 정책으로 실패했고, 이후 알타 캘리포니아에서 식량을 조달하려 했으나 그의 사망으로 무산되었다. 결국 러시아 정착지는 태평양을 항해하는 미국 선박의 보급에 크게 의존했다.[12] 하지만 1821년, 경쟁 세력과의 접촉을 금지하는 새로운 칙허가 내려지면서 식량 공급과 모피 판매를 담당하던 미국 선박과의 교류가 끊겨 식량난은 더욱 심화되었다.

회사의 주 수입원이었던 모피 무역 역시 난관에 부딪혔다. 1820년대부터 해달과 같은 모피 동물의 개체 수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회사의 수익성은 크게 악화되었다.[4] 이미 1808년에도 연간 수입이 229.99999999999997만러시아 루블에 달하는 비용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등 재정 상태는 불안정했다.[4] 여기에 더해, 청나라가 광저우 항구를 러시아 상인에게 개방하지 않아[9], 모피를 오호츠크를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캬흐타에서 중국 상품과 교역해야 했는데, 이는 막대한 운송 비용을 발생시키는 비효율적인 방식이었다.[10][11] 숙련된 선원 확보의 어려움 역시 문제였다. 러시아 제국 내 해군 기술을 가진 인력은 대부분 러시아 제국 해군에 소속되었고, 농노제로 인해 일반 농민을 해군 인력으로 양성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4]

이러한 내부적 어려움과 더불어 외부 세력과의 경쟁도 치열했다. 특히 미국 상인들은 러시아의 독점권을 침해하며 알래스카 연안에서 활동했고, 틀링깃족 등 원주민에게 총기를 판매하여 러시아 정착촌의 안보를 위협했다. 러시아 정부는 미국 정부에 수차례 항의했으나 별다른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12] 미국의 모피 상인 존 제이콥 애스터는 자신의 미국 모피 회사를 통해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에 물자를 독점 공급하고 모피 운송권을 얻는 대가로 원주민에 대한 총기 판매를 중단하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양측은 1812년 협정을 맺었지만, 1812년 전쟁 발발로 애스터의 사업이 타격을 입으면서 이 협력은 무산되었다.[11][21]

영국의 허드슨 만 회사 역시 강력한 경쟁자였다. 1830년대 이후 허드슨 만 회사 소속 사냥꾼들이 캐나다 방면에서 내륙으로 진출하여 모피 무역에 뛰어들었다.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1833년 영국과의 조약을 위반한 대가로 1838년 현재의 알래스카 팬핸들 남동부 지역을 허드슨 만 회사에 임대해야 했다. 또한 식량난 해결과 미국 선박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알래스카 해안을 따라 북극해로 나가는 항로 이용권을 허드슨 만 회사에 인정하는 대신 협정을 맺기도 했다.

크림 전쟁(1853-1856) 중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면서 알래스카 침공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허드슨 만 회사와 중립 협정을 맺어 직접적인 충돌은 피했지만,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은 1855년 쿠릴 열도 우루프 섬의 러시아 기지를 공격하기도 했다.[29][30]

결국 회사는 경영진의 경험 부족과 무리한 확장 정책, 지속적인 경제적 어려움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점차 쇠퇴했다.[4]

4. 3. 원주민과의 관계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알래스카 해안 지역의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강압적인 정책을 펼쳤다. 특히 알류트족은 알류산 열도에서 알래스카 본토로 강제로 이주되어 해달 사냥과 군 복무 등에 동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염병과 과도한 노동으로 인해 알류트족의 인구는 크게 감소하였다.

한편, 트링깃족은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에 쉽게 복종하지 않았으며, 여러 차례 러시아인들의 정착지를 공격하는 등 갈등 관계를 유지했다.

1840년대 이후, 회사를 경영하게 된 해군 장교들은 원주민의 생활 개선을 위해 학교와 병원을 건설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감소하던 알류트족의 인구가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들도 알래스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알래스카의 성 게르만, 알래스카의 성 인노켄티, 성 티혼 등은 모피 상인들의 원주민 학대를 막으려 했으며, 원주민의 고유한 문화와 공동체를 존중하며 선교 활동을 펼쳤다. 그 결과 많은 원주민이 정교회 신자가 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알류산 열도 등지에는 오늘날에도 미국 정교회에 속한 성당이 많이 남아 있으며, 다수의 정교회 신자가 거주하고 있다.

5. 쇠퇴와 알래스카 매각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 Российско-американская компанияru )의 경영은 모피 동물의 지속적인 남획과 영국, 미국 상인들과의 경쟁 심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보급과 방어가 어려운 알래스카( Аляскаru )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결국 1867년, 알래스카 매입 조약을 통해 알래스카는 미국에 매각되었다.

5. 1. 경영 악화와 매각 결정

1818년 러시아 정부는 기존 상인들로부터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통제권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1820년대부터 주요 수입원이었던 모피 동물의 개체 수가 급감하면서 회사의 수익성은 크게 악화되었다. 이미 1808년에 회사의 연간 수입은 비용 229.99999999999997만러시아 루블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등 경영난의 조짐을 보였다.[4] 회사는 1797년부터 1821년까지 총 1600만러시아 루블 상당의 모피를 확보했는데, 여기에는 여우 130만 마리, 바다 수달 72,894마리, 북미 강 수달 59,530마리, 북미 비버 34,546마리, 검은담비 30,950마리, 울버린 17,298마리, 북부 물개 14,969마리 등이 포함되었다.[27] 이는 당시 무분별한 남획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1840년대에는 회사의 이사회가 5명의 제국 해군 장교로 구성된 행정부로 대체되었으나[4], 경영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크림 전쟁(1853년~1856년) 중에는 영국의 알래스카 침공 우려가 제기되자,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1854년허드슨 베이 회사와 상호 불가침 협정을 맺기도 했다.[29] 영국과 러시아 정부는 이 협정을 승인했지만, 해상 봉쇄나 선박 압수는 허용했다.[29] 실제로 1855년 영국과 프랑스 함대가 쿠릴 열도의 우룹 섬에 있는 회사 전초 기지를 공격하는 사건도 발생했다.[30]

회사의 경영 부실은 "잘못 선택되고 능력이 부족한 직원들"과 "태평양 전역과 미국 해안까지 무리하게 확장된 조직을 관리할 경영진의 경험 부족"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4] 1860년대에 이르러 모피 동물의 지속적인 남획과 영국, 미국 상인들과의 경쟁 심화로 회사의 경영난은 더욱 심각해졌다. 결국 러시아 정부는 본토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보급과 방어가 어려운 알래스카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1867년 알래스카 매입 조약이 체결되면서 알래스카는 미국 영토가 되었다.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알래스카의 통제권을 상실했으며, 1881년 상업 활동을 완전히 중단했다. 회사의 상업적 자산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허친슨, 콜 & 컴퍼니(Hutchinson, Kohl & Company)에 매각되었고, 이 회사는 나중에 알래스카 상업 회사(Alaska Commercial Company)로 이름을 바꾸었다.[4]

5. 2. 알래스카 매각과 회사 청산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 Российско-американская компанияru )는 모피 동물의 남획과 영국, 미국 상인들과의 경쟁 심화로 인해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보급과 방어가 어려운 알래스카( Аляскаru )를 관리하는 데 부담을 느꼈고, 결국 1867년 알래스카 매입을 통해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했다.

알래스카 매각 이후,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1881년 상업 활동을 공식적으로 중단했다.[4] 알래스카에서의 상업적 권리와 자산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허친슨, 콜 & 컴퍼니(Hutchinson, Kohl & Company)에 매각되었다. 이 회사는 이후 알래스카 상업 회사(Alaska Commercial Company)로 이름을 바꾸었다. 알래스카 상업 회사는 백화점 운영, 알래스카 내 기계 판매, 오지 소매점 운영 등의 사업을 진행했으며, 일부 사업 부문을 매각한 후 현재까지도 알래스카의 여러 작은 마을에서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

6. 유산과 영향

알래스카가 미국알래스카 준주가 된 후,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소유했던 알래스카 내 권리는 샌프란시스코의 허친슨, 콜 & 컴퍼니(Hutchinson, Kohl & Company)가 인수했다. 이 회사는 후에 알래스카 상업회사(Alaska Commercial Company)로 이름을 바꾸었다. 알래스카 상업회사는 백화점 운영, 알래스카에서의 기계 판매, 오지 소매점 운영 등의 사업을 진행했으며, 일부 사업을 매각한 현재에도 21개의 작은 마을에서 상점을 운영하며 그 명맥을 잇고 있다.

6. 1. 알래스카에 남긴 유산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알래스카 초기 탐험과 학술 조사도 수행했다. 알래스카 남동부에는 지금도 알렉산드르 바라노프나 페르디난트 폰 우랭겔 등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관리자나 총독들의 이름을 딴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바라노프의 이름을 딴 바라노프섬, 바라노프 웜 스프링스(Baranof Warm Springs), 바라노프 호수(Baranof Lake), 바라노프 강(Baranof River) 등이 있으며, 우랭겔의 이름을 딴 우랭겔도 있다.

6. 2. 역사적 영향과 평가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러시아 제국의 북태평양 진출과 식민지 경영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회사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알래스카, 알류샨 열도, 쿠릴 열도 일부 지역에서 모피 무역을 독점하고 행정권을 행사하며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첨병 역할을 했다.[1][2]

회사의 활동은 해당 지역의 원주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초기에는 일부 원주민 집단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도 했으나, 점차 자원 개발과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원주민에 대한 착취와 강제 노동, 폭력적인 통제가 이루어졌다. 이는 원주민 인구 감소와 전통 사회 붕괴를 초래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3] 또한, 무분별한 해달물개 사냥은 해당 지역의 생태계에 심각한 불균형을 가져왔다.

국제 관계 측면에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활동은 영국, 미국, 스페인 등 다른 열강과의 경쟁 및 긴장을 유발했다. 특히 캘리포니아에 건설된 로스 요새는 농업 기지 확보 및 남진 정책의 거점 역할을 했으며, 이는 당시 캘리포니아를 지배하던 스페인(이후 멕시코) 및 미국의 경계심을 자극했다.[4] 또한, 1810년대 하와이 왕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했던 샤퍼 박사의 활동은[5] 국제적인 분쟁으로 비화될 뻔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무리한 확장 시도는 회사의 재정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러시아의 영토 확장과 경제적 이익 창출, 북태평양 지역에 대한 지리적 탐험과 연구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6] 그러나 제국주의적 식민지 경영 과정에서 자행된 원주민에 대한 착취와 인권 침해, 환경 파괴, 그리고 결국 경영난으로 인해 알래스카 매각이라는 결과로 이어진 점 등 비판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회사의 역사는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경영의 복합적인 양상과 그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연구되고 있다.

7. 주요 관리자 (총독)

(생년-사년)재임 기간1

알렉산드르 바라노프
알렉산드르 바라노프(Alexander Andreyevich Baranov)
(1747–1819)1799년 7월 9일 – 1818년 1월 11일[35]2
루트비히 하게마이스터
함장 루트비히 하게마이스터(Ludwig von Hagemeister)
(1780–1833)1818년 1월 11일 – 1818년 10월 24일[35]3
러시아 제국 국장 (1801-1825)
소령 세묜 야놉스키(Semyon Ivanovich Yanovsky)
(1788–1876)1818년 10월 24일 – 1820년 9월 15일[35]4
마트베이 무라비요프
소령 마트베이 무라비요프(Matvey Ivanovich Muravyev)
(1784–1826)1820년 9월 15일 – 1825년 10월 14일[35]5
러시아 제국 국장 (1825-1855)
표트르 예고로비치 치스티야코프(Pyotr Yegorovich Chistyakov)
(1790–1862)1825년 10월 14일 – 1830년 6월 1일[35]6
페르디난트 폰 랑겔
남작 페르디난트 폰 랑겔(Ferdinand Petrovich von Wrangel)
(1797–1870)1830년 6월 1일 – 1835년 10월 29일[35]7
이반 쿠프레야노프
이반 쿠프레야노프(Ivan Antonovich Kupreyanov)
(1800–1857)1835년 10월 29일 – 1840년 5월 25일[35]8
아르비드 아돌프 에톨렌
아르비드 아돌프 에톨렌(Arvid Adolf Etholén)
(1799–1876)1840년 5월 25일 – 1845년 7월 9일[35]9
러시아 제국 국장 (1825-1855)
소장 미하일 테벤코프(Mikhail Dmitrievich Tebenkov)
(1802–1872)1845년 7월 9일 – 1850년 10월 14일[35]10--함장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 로젠베르크(Nikolay Yakovlevich Rosenberg)
(1807–1857)1850년 10월 14일 – 1853년 3월 31일[35]11--알렉산드르 루다코프(Aleksandr Ilich Rudakov)
(1817–1875)1853년 3월 31일 – 1854년 4월 22일[35]12
스테판 바실리예비치 보예보츠키
함장 스테판 바실리예비치 보예보츠키(Stepan Vasiliyevich Voyevodsky)
(1805–1884)1854년 4월 22일 – 1859년 6월 22일[35]13
요한 함푸스 후루헬름
함장 요한 함푸스 후루헬름(Johan Hampus Furuhjelm)
(1821–1909)1859년 6월 22일 – 1863년 12월 2일[35]14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막수토프
공작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막수토프(Dmitri Petrovich Maksutov)
(1832–1889)1863년 12월 2일 – 1867년 10월 18일[35]


8. 관련 시설 (정착지)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북아메리카 태평양 연안, 특히 알래스카를 중심으로 다수의 정착지와 요새, 교역소를 건설하여 활동 영역을 확장했다. 주요 정착지는 다음과 같다.

알래스카 지역 정착지
정착지 이름위치건설 연도
우날라스카우날라스카1774
쓰리 세인츠 베이코디액 섬1784
카실로프의 세인트 조지 요새카실로프1786
니콜라예프스카야 요새케나이1787
세인트폴프리빌로프 제도1788
파블로프스카야코디악1791
누체크 섬의 세인트 콘스탄틴과 헬렌 요새누체크 섬1793
힌친브룩 섬 요새힌친브룩 섬1793
뉴 러시아오늘날의 야쿠타트 근처1795
성 미카엘 요새오늘날의 시트카 근처1799
뉴 아르한겔스크시트카1804
알렉산드로프스크 요새(신)브리스틀 만1819
성 미카엘 요새세인트 마이클1833
눌라토눌라토1834
성 디오니시우스 요새오늘날의 랭겔1834
포크로프스카야 선교부러시안 미션1837
콜마코프 요새쿠스코큄 강 유역1844



캘리포니아 지역 정착지
정착지 이름위치건설 연도
포트로스 Fort Ross영어오늘날의 힐즈버그 근처1812



하와이 지역 정착지
정착지 이름위치건설 연도
포트 엘리자베스 Fort Elizabeth영어와이메아 근처1817
포트 알렉산더 Fort Alexander영어하나레이 근처1817
포트 바클레이-드-톨리 Fort Barclay-de-Tolly영어하나레이 근처1817


참조

[1] 웹사이트 Records of the Russian-American Company https://www.archives[...]
[2] 문서 Под высочайшим Его Императорского Величества покровительством Российская-Американская Компания
[3] 서적 The Russian-American Company: Correspondence of the Governors; Communications Sent: 1818
[4] 간행물 The Russian-American Company: Private or Government Enterprise? 1944
[5] 웹사이트 Review of the Alaska Boundary Question http://nosracines.ca[...] Unknown 2014-12-12
[6] 서적 Alaska: An American Colon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7] 서적 Macmillan's magazine - Google Boeken https://books.google[...] 2012-07-25
[8] 간행물 Russian Colonization: The Implications of Mercantile Colonial Practices in the North Pacific 2003
[9] 서적 History of Economic Relations between Russia and China https://books.google[...] Transaction Publishers
[10] 간행물 The Baltic Connection in Russian America 1994
[11] 간행물 Empires in Conflict and Cooperation: The "Bostonians" and the Russian-American Company 1971
[12] 간행물 The Oregon Question. I. https://www.jstor.or[...] 1900
[13] 서적 Langsdorff's Narrative of the Rezanov voyage to Nueva California in 1806 https://archive.org/[...] The Private Press of Thomas C. Russell
[14] 간행물 Notes to the 1817 Treaty between the Russian American Company and Kashaya Pomo Indians 1980
[15] 서적 The Wreck of the Sv. Nikolai The Press of the Oregon Historical Society
[16] 서적 The Wreck of the Sv. Nikolai
[17] 서적 The Wreck of the Sv. Nikolai
[18] 서적 The Wreck of the Sv. Nikolai
[19] 서적 The Wreck of the Sv. Nikolai
[20] 서적 The story of Alaska The Caxton Printers
[21] 서적 Baranov, Chief Manager of the Russian Colonies in America The Limestone Press
[22] 간행물 Frontiersman for the Tsar: Timofei Tarakanov and the Expansion of Russian America 2006
[23] 문서 Notes on ports and Ross and Franchesko 1825-10-04
[24] 간행물 An American View of the Decembrist Revolt 1953
[25] 웹사이트 The Decembrists http://www.fortross.[...]
[26] 간행물 Dimitry Zavalishin: Dreamer of a Russian-American Empire 1936
[27] 서적 (Unspecified)
[28] 서적 (Unspecified)
[29] 간행물 The Crimean War and the Emergence of Proposals for the Sale of Russian America, 1853-1861 1990
[30] 서적 (Unspecified)
[31] 서적 Beyond the frontiers of imperial Russia: From the memoirs of Otto W. Lindholm A. de Haes OWL Publishing
[32] 서적 The Ruble: A Political History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24-05-17
[33] 뉴스 Бытъ По Сему “So Be It.” 200 Years of the History and Interpretation of“The flag granted by His Imperial Highness. https://www.scribd.c[...] 2014-10-14
[34] 웹사이트 The Flag of the Russian-American Company http://www.fortross.[...] 2014-10-14
[35] 서적 (Unspecified)
[36] 논문 Foreign ships in the fleet of the Russian-American company (1799-1867) https://snr.org.uk/f[...] 2014-11-01 #추정 날짜. 더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으므로 월 정보만 사용.
[37] 웹사이트 Records of Former Russian Agencies https://www.archives[...]
[38] 웹사이트 Records of the Russian-American Company https://www.arch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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