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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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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런던 대화재는 1666년 9월 2일부터 5일까지 런던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이다. 푸딩 레인에 있는 제빵소에서 시작된 불은 강한 동풍을 타고 런던 시티로 번져나갔다. 당시 런던은 목조 건물과 좁은 도로, 가뭄으로 인해 화재에 취약한 상태였으며, 17세기 소방 기술의 한계도 화재 확산을 막지 못했다. 찰스 2세의 지휘 아래 군대가 투입되었지만, 화재는 세인트폴 대성당을 포함한 도시의 주요 건물들을 파괴했다. 사망자 수는 공식적으로는 적었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런던은 화재 이후 재건되었으며, 건축 규제 강화와 도시 계획 변화를 통해 더욱 안전하고 현대적인 도시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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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66년 잉글랜드 - 런던 대역병
    런던 대역병은 1665년부터 1666년까지 잉글랜드에서 발생한 마지막 주요 선페스트 유행으로 런던 인구의 상당수가 사망하고 사회 및 경제적으로 큰 혼란을 야기했지만, 런던은 재건을 통해 발전된 도시로 거듭나 감염병 예방과 관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이다.
런던 대화재
위치 정보
주요 정보
사건 이름런던 대화재
발생 시기1666년 9월 2일 ~ 9월 5일
발생 장소잉글랜드 런던 시
주요 원인빵집 화재에서 시작된 우연적 사고
런던 시의 구조적 문제
건조한 날씨와 강한 바람
사망자 수공식적으로 소수 (기록 부족)
피해 규모런던 시의 80% 소실
수만 명의 이재민 발생
경제적 손실 막대
추가 정보
사건 유형대규모 화재
관련 사건런던 재건
크리스토퍼 렌의 건축 활동
배경
당시 런던목조 건물이 밀집된 도시 구조
소방 시설 부족
위생 상태 불량
사회적 배경찰스 2세 시대
종교적 갈등
사회적 불평등
피해 및 영향
건물 피해13,000채 이상의 가옥 소실
87개 교회 소실
세인트 폴 대성당 소실
경제적 영향상업 활동 마비
경제적 혼란
도시 재건 비용 발생
사회적 영향사회적 불안 증가
인구 이동 발생
새로운 도시 계획 수립 요구 증대
정치적 영향소방 시스템 개선 요구 증가
건축 규제 강화 필요성 부각
찰스 2세 정부의 대응 능력 논란
재건 및 이후
도시 재건크리스토퍼 렌을 중심으로 재건 계획 수립
새로운 건축 양식 도입
도시 구조 개선
법률 및 정책 변화소방 규정 강화
건축 규정 강화
도시 계획 수립 의무화
역사적 평가런던의 중요한 전환점
도시 재건의 계기
사회 및 정치 변화 촉진
기타
관련 문화문학 작품, 음악 작품 등에서 다루어짐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로 활용
관련 인물토마스 패리너
새뮤얼 피프스
크리스토퍼 렌
이미지 및 사운드
1666년 런던 대화재
1666년 런던 대화재
런던 대화재 (1666년 9월)
런던 대화재 (1666년 9월)
1666년 런던 대화재 지도
1666년 런던 대화재 지도

2. 1660년대 런던

1660년대 런던은 영국에서 가장 큰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서구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으며, 인구는 30만 명에서 4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3][9] 존 이블린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파리와 런던을 비교하면서 "목조로 지어진, 북쪽에 위치한, 인위적이지 않은 집들의 혼잡"이라고 표현했다.[4] 여기서 "인위적이지 않은"이란 계획되지 않고 임시변통으로 지어진, 유기적인 성장과 무분별한 도시 확장의 결과를 의미한다.[5]

당시 런던은 로마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방어벽 안에서 점점 더 혼잡해졌다. 또한, 쇼어디치, 홀본, 크립게이트, 클러켄웰, 서더크와 법원 숙소와 같은 외곽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서쪽으로는 스트랜드를 따라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왕궁과 수도원까지 이어졌다.[6]

17세기 후반, 도시의 방어벽템스강으로 둘러싸인 지역인 시티 자체는 런던의 일부에 불과했으며, 약 700에이커(약 2.8km²)를 차지했고,[7] 약 8만 명, 즉 런던 주민의 4분의 1이 거주했다. 시티는 대부분의 런던 시민이 살았던 내부 교외 지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9] 당시 시티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수도의 상업 중심지였으며, 영국에서 가장 큰 시장이자 가장 번화한 항구였고, 무역과 제조업 종사자들이 주도했다.[8]

1665년 런던 대역병으로 인해 런던은 큰 피해를 입었다. 초만원이었던 빈민가에서는 위생 상태가 최악이었다. 런던 월 안의 작은 공간에는 위생 시설도 없었고, 거리의 중심을 따라서 열린 배수구가 흘러갔다. 자갈들은 온통 동물의 배설물이나, 쓰레기, 걸레 등으로 미끈거렸고, 여름에는 진흙투성이에 파리떼가 들끓고 겨울에는 하수구가 넘쳐흐르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도로 청소부를 고용했고, 청소부들은 부패한 쓰레기들을 벽 밖으로 옮겼는데, 이때 났던 악취는 압도적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코를 손이나 손수건, 꽃다발 등으로 악취를 막으려했다.[180] 비누 공장이나, 양조장, 제련소 등에서 검은 연기도 질식할 듯이 뿜어져 나왔다.[181]

이러한 이유로 귀족들은 교통체증이 심하고, 오염되어 있으며 건강에 해로운 도시를 버리고 빈민가가 위치한 교외 너머의 시골이나 화이트홀찰스 2세 궁정터였던 현재의 웨스트엔드오브런던 지역에 살았다.

도시와 왕실 사이의 관계는 종종 긴장 상태였다. 시티오브런던잉글랜드 내전 (1642–1651) 기간 동안 공화주의의 중심지였으며, 부유하고 경제적으로 역동적인 수도는 여전히 찰스 2세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1660년대 초 런던에서 일어난 여러 차례의 공화주의 봉기가 이를 보여주었다. 시티의 치안판사들은 내전에서 싸웠던 세대였고, 찰스 1세가 절대 권력을 장악하려던 시도가 어떻게 국가적 재앙으로 이어졌는지 기억하고 있었다.[10] 그들은 그의 아들이 그와 같은 성향을 보이는 것을 막기로 결심했고, 런던 대화재가 시티를 위협했을 때 찰스가 제공한 군인과 기타 자원을 거부했다. 비록 긴급 상황이었지만, 인기 없는 왕실 군대가 시티에 투입되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

2. 1. 도시의 화재 위험

1660년대 런던의 건물은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졌고, 제팅이라는 건축 기법으로 인해 위층이 아래층보다 돌출된 형태였다. 이는 좁은 길에서도 공간 활용을 극대화할 수 있었지만, 위층끼리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 화재에 매우 취약했다.[189]
제팅 형식의 건축물.
와틀 앤 더브라는 건축 방식도 사용되었는데, 욋가지를 엮고 진흙 등을 바른 벽은 잘 만들어진 경우 내구성이 좋았지만, 오래되거나 질 낮은 재료로 만들어진 경우에는 불이 쉽게 붙었다.[190] -- 템스강변에는 가연성 물질을 보관하는 창고와 지하실이 많아 화재 위험을 더욱 높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는 타르, 피치(지방유 등을 증류할 때 얻어지는 잔류물.), 송진, 대마, 아마 등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190] 도시 곳곳, 특히 런던탑에는 다량의 화약이 보관되어 있었다.[191]

2. 2. 17세기 소방

17세기 런던에는 경찰이나 소방대에 전화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지만, 훈련받은 런던의 민병대가 비상시 불을 끄는 역할을 했다. 또한 밤에는 야경꾼과 경비원들이 거리를 순찰하며 화재를 감시했다.[192]

1612년에 그려진 그림으로, 파이크폴을 사용하고 긴 사다리로 사람들을 구출하며 양동이로 불을 끄는 당시의 소방 활동을 보여준다.


당시 런던 시민들은 자립적으로 공동체를 만들어 화재에 대처했는데, 이들은 현대의 소방관 역할을 대신했다. 이들은 불이 나면 교회 종을 울려 사람들에게 알리고, 화재 진압을 위한 인력을 모았다.[192]

17세기의 주요 소방 방법은 건물 철거와 물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특히 대규모 화재 시에는 방화벽을 설치하여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았다. 당시 법에 따라 모든 교구 내 교회 탑에는 긴 사다리, 양동이, 도끼, 그리고 파이크폴(갈고리가 달린 무거운 쇠막대) 등의 소방 장비가 비치되어 있었다.[193]

높은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는 화약 폭발을 통해 건물을 철거하여 더 큰 화재를 방지하기도 했다. 이 방법은 런던 대화재 때 불길이 사그라질 때쯤 점점 더 많이 사용되었으며, 현대 역사가들은 이 방법이 화재 진압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194]

런던은 이전 대규모 화재에서 사용되었던 소방차 형태의 고급 소방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형 펌프는 유연성이나 기능성이 부족하여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일부는 바퀴가 있었고 다른 일부는 바퀴 없는 썰매에 장착되었다.[39] 이 소방차들은 장거리 운반이 필요했고, 대개 너무 늦게 도착했으며, 긴 노즐은 있었지만 배달 호스가 없어 도달 거리가 제한적이었다.

3. 화재의 원인과 결과

1666년 9월 2일 일요일 자정 직후, 푸딩 레인의 토마스 패리너 제과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179] 강한 동풍으로 인해 불길이 빠르게 번져 런던 시티를 덮쳤다. 당시 런던 시장경이었던 토마스 블러드워스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초기 진압이 지연되었다.[179]

당시 영국은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외국인, 특히 프랑스인과 네덜란드인에 대한 방화 의혹이 제기되었다.[179] 이로 인해 집을 잃은 노숙자들은 린치폭력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179]

화재는 세인트폴 대성당을 포함한 도시의 주요 건물들을 파괴했다.[179] 찰스 2세는 런던 시민들에게 다른 곳으로의 정착을 권유하기도 했는데, 이는 런던 내에서의 반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179] 런던은 화재 이전의 도로와 같은 형태로 재건되었다.[179]

1666년 센트럴런던의 지도. 분홍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부분이 대화재로 인해 타버린 면적이다.


1666년 9월 2일 오전 1시경, 푸딩 레인에 있는 빵집의 화덕에서 시작된 화재는 4일 동안 계속 타올라 런던 시내 주택의 약 85%(1만 3200채)가 소실되었다. 놀랍게도 사망자는 기록상 5명으로 적었지만, 시민들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불길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이처럼 화재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진 원인은 대화재 이전 런던 시내의 대부분 주택이 목조였고, 도로 또한 좁았기 때문이다.

4. 화재의 과정

1664년1665년에 두 차례 비가 많이 오는 여름을 보낸 후, 런던은 1665년 11월부터 예외적인 가뭄에 시달렸다. 대화재까지 약 10개월가량 지속되었던 가뭄으로 목조건물의 나무는 바싹 말라 있었다. 결국 1666년 9월 2일 일요일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에 푸딩 레인에 있는 토마스 패리너라는 사람의 제과점에서 화재가 일어나게 된다. 토마스 패리너와 그의 가족들은 위층에 갇혔으나, 런던 대화재의 첫 번째 희생자인 화재로 겁을 먹었던 여직원 한 명을 제외하고는, 간신히 위층 창문으로 하여금 옆집까지 기어올라갔다.[204] 이웃들은 토마스 패리너의 제과점의 불을 끄는데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화재 한 시간 후에 교구의 순경들이 도착해 이웃집들에 더 이상 화재가 번지지 않도록 철거를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고, 토마스 패리너의 가족들은 이에 항의했다. 순경은 당시 시장경이었던 토마스 블러드워스 경을 불렀는데, 오직 시장만이 무력으로 토마스 패리너의 항의를 무효화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존 이블린.


블러드워스가 제과점에 도착했을 때, 불은 이웃들의 집을 이미 집어삼키고 강변에 위치해 있던 종이 창고와 가연성 물품을 저장한 저장고로 가고 있었다. 경험이 많은 소방관들은 집을 철거해 불을 막자고 말하였으나, 블러드워스는 대부분의 시설이 임대한 건물이고, 건물의 소유주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블러드워스는 원래 자신이 시장경의 일을 충실히 해낼 수 있어 시장경이 된 것이 아니라, 아첨꾼으로 고위 간부에게 아첨을 해 시장경 직에 임명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블러드워스는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에 당황했고,[205] "흥! 이 불은 여자 오줌으로도 끌 수 있어"라고 말하고는 떠났다. 불이 점점 커져 도시가 파괴된 후, 새뮤얼 피프스는 1666년 9월 7일 자신의 일기에 "사람들은 전부 바보같은 시장경의 단순함에 큰 소리로 항의했고, 특히 이 화재에 대한 모든 잘못을 그의 책임으로 물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새뮤얼 피프스. 그림은 존 해일스가 그렸으며 1666년 작이다.


새뮤얼 피프스는 런던 대화재 당시에 해군 관련해 고위직에 있었다. 피프스는 화재가 났을 당시에 런던탑에 올라가 첨탑에서 화재를 처음 보았는데, 그는 일기장에 동풍이 화재를 대화재로 바꾸어 놓았다고 기록했다. 당시에 화재는 이미 몇 개의 교회를 불태웠고, 300채 정도의 가옥이 있는 강변에 도달했다고 추정했다. 런던 교의 집들은 이미 불타고 있었다.

그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푸딩 레인 주변의 파괴 정도를 조사하기 위해 보트를 탔고, 사람들에 대해 "모든 사람들은 물건을 치우려 노력하고, 강으로 뛰어들거나, 사공을 부르기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집 앞까지 불이 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의 집에 불이 붙으면 강가로 뛰어들거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라고 묘사했다. 피프스는 불이 동풍을 타고 서쪽으로 오면서 화이트홀까지 갔다고 하며, 그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이에 관한 이야기를 설명했고, 그 설명이 모두를 놀라게 했으며, 이 모든 것들이 왕에게 전해졌다고 일기에 기록했다. 그래서 그는 호출을 받았고, 요크 공작에게 자신이 본 것을 말했고, 찰스가 집들을 철거하라고 말하지 않는 한, 그 어떤 방법도 소방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윽고 그는 피프스에게 명령해 시장경에게 가서, 그에게 집을 아끼지 말고 철거하라고 명령한 것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요크 공작 제임스는 왕실 생활 경비대를 화재 진압에 돕기 위해 사용을 해도 된다고 말했다.[206]

화재가 났을 때 어린 학생이었던 윌리엄 태즈웰은 웨스터민스터 대수도원에서 아침 예배를 마치고 나왔을 때, 일부 난민이 푸딩 레인에서 서쪽으로 1마일 정도 떨어진 웨스터민스터 계단 근처에서 아무것도 입지 않고 담요만 걸치고 있는 난민들을 보았다.[207] 거룻배의 사공은 갑자기 뱃삯을 비싸게 받기 시작했고, 운이 좋은 몇몇 난민들만이 보트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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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강풍에 빠르게 번졌고, 일요일 아침나절이 되자 사람들은 불을 끄려고 하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자리를 버리고 달아났다. 보행자와 그들의 보따리, 수레 등은 소방관들이 화재 현장으로 들어갈 수 없게 만들었다. 피프스는 화이트홀에서 다시 시내로 마차를 타고 들어갔지만, 더 이상 마차로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세인트폴 대성당 앞부터는 걷기 시작했다. 수레와 물건을 가지고 사람들은 여전히 물건을 지고 불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화재와 그리 가까이 있지 않는 교구의 교회들은 사람들이 넘쳐났고, 내부에도 가구와 온갖 귀중품들로 가득 차 있었으나, 그것마저도 얼마 있지 않아서 자리를 옮겨야 했다.

피프스는 제임스의 병사 제의를 거절한 뒤에 잠자리에 들었다.[209] 찰스 2세는 현상을 시찰하기 위하여 바지선으로 화이트홀에서 푸딩 레인까지 갔다. 푸딩 레인에 도착한 찰스 2세는, 블러드워스가 피프스에게 집을 철거하라는 명령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들을 철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블러드워스의 권한을 남용하며 화재 구역 서쪽의 대량 철거를 명령했다.[210] 화재는 이미 통제 불능의 상태까지 갔기 때문에 이런 조치는 크게 쓸모가 없었다.

푸딩 레인에서 경보가 발령된 지 18시간이 되자, 불길은 아예 자체적인 날씨를 만들어낸 듯이 그 열기가 매우 뜨거웠다. 굴뚝 효과 때문에 바람이 안으로 불게 됐고, 이 바람 때문에 불이 쉽게 꺼지지 않았다.[211] 대신에 바람은 화염에 신선한 산소를 공급했고, 난기류의 상승으로 바람의 방향이 남쪽과 북쪽 두 갈래 모두로 갈라지는 등 불규칙하게 만들었다.

피프스는 초저녁에 아내와 몇몇 친구와 함께 강으로 갔다. 그는 불이 여전히 거셌다고 일기에 기록했다. 그는, 뱃사공에게 연기를 피울 수 있을 만큼 불에 가까이 가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너무 열기가 뜨거웠던 탓에 피프스와 일행은 사우스뱅크에 있는 한 주택에 가서 어둠이 찾아올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고, 런던 교와 강을 건너는 불을 볼 수 있었다고 일기에 기록하였다.

화재는 9월 3일 월요일 새벽까지 서쪽과 북쪽으로 확대되었고, 전날보다 남쪽과 북쪽 모두 더 멀리 거세게 치솟았다.[212] 남쪽으로 번지는 것은 대부분 강에 의해 중단됐지만, 런던 교의 집들을 몽땅 불태우고는 다리를 건너서 사우스뱅크서더크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서더크는 다행히도 1632년 화재로 템스강의 다리 위에 있던 방화벽 덕분에 불이 번지지는 않았다.[213] 타고 남은 불들이 조금 타긴 했으나, 재빨리 제압했다.

9월 3일 월요일 저녁까지의 피해 면적.


불이 북쪽으로 번진 것은 시의 재정적인 부분을 맡고 있는 곳에 다다랐다. 롬바르드가에 있는 은행가들은 월요일 오후에 불에 타기 시작했고, 도시와 국가에 중요한 금화 더미들이 녹기 전에 사람들은 안전한 곳으로 보내도록 했다. 몇몇 신문사들은 이틀째 런던 시민들을 사로잡는 것 같은 절망, 무력감, 그리고 현재 왕립 거래소와 쇼핑 센터같이 위협을 받고 있는 부유하고 인기있는 지역들, 그리고 치프사이드에 있는 건물들을 구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함을 강조했다. 왕립 거래소는 늦은 오후가 되자, 불에 타기 시작했고 몇 시간만에 불타 사라져버렸다.

존 이블린은 시 외곽에서 약 6.44km 정도 떨어져 있는 뎁트포드에 살아서 화재의 초기 과정을 보지 못했다. 그는 마차를 타고 다른 상류층 사람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서더크로 가서 그 경치를 구경했다. 그 혼란은 훨씬 커졌다. 존 이블린은 일기에 그 광경을 이렇게 언급하였다. "도시 전체가 무서운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템즈가와 런던 교 위의 모든 집들, 치프사이드가 불에 잡아먹혔다".[214]

월요일 저녁에, 이블린은 강물이 배와 보트로 뒤덮여 탈출구가 갖가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고 기록했다. 또한 그는 병목현상처럼 성의 문을 통해 수레와 보행자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몇 마일 동안 온갖 종류의 이동 수단과 텐트가 설치되어 있었고, 텐트는 사람과 그들의 물건까지 보호했다고 언급했다.[214]

런던 가제트는 9월 3일부터 9월 10일까지, 런던 대화재에 관한 설명이 신문의 1면을 차지했다.


런던 대화재가 사고가 아니라 고의라는 의혹이 런던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의혹의 용의자는 외국인이었는데, 특히 영국과 전쟁중이었던 네덜란드와 프랑스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위장을 한 외국인들이 집에 불덩이를 던지거나 수류탄 같은 걸 던지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소리가 나옴에 따라 의심과 공포는 월요일이 되자 확실시 되었다.[215] 거리는 외국인들의 폭력이 일었다.[216] 윌리엄 태즈웰은 한 폭도들이 프랑스 화가의 가게를 약탈하게 하고, 대장장이가 거리의 프랑스인에게 다가가서 쇠막대기로 그의 머리를 때리는 것을 공포에 질린 채 지켜보았다고 말했다.

테러에 대한 두려움은 신문사가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신문이 더 이상 나오지 못하게 되자 증폭되었다. 전국에 걸쳐 게시물이 전달되었던 트레드네들가의 편지 사무소는 월요일 아침 일찍 불탔다. 런던 가제트는 프린트된 종이들에 불이 붙기 전에 겨우 월요일 분을 내놓게 되었다. 전국이 이 신문에만 의존했고, 이 신문이 사라지게 되면서, 온갖 루머로 가득차게 된다.

또한 월요일의 의혹은 집단적인 공황과 편집증으로까지 번졌고, 민병단과 런던의 근위 보병 제2연대는 화재 진압에 덜 집중하게 되고, 외국인과 가톨릭교도, 그리고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을 검거하거나 사람들로부터 구출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된다.

주민들은 상류층의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소지품을 훔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상류층 사람의 짐꾼으로 고용이 되어, 물건을 훔치기도 했다. 이는 신체가 건강한 사람들에게 수입원을 제공했고, 외에도 수레와 배를 모는 사람들에게 큰 돈이 되었다. 화재가 일어나기 전에 배를 끄는 뱃삯은 몇 실링 밖에 들지 않았으나, 월요일에는 이 뱃삯이 40파운드까지 올랐는데, 이는 2005년 기준으로 4000GBP가 넘는 재산이다.[217]

런던의 손이 닿는 곳마다 수레꾼과 배를 소유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갔듯이, 사람들은 성문에서 서성거렸다. 성문에서의 혼란은 치안판사들에 의해 월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성문을 닫으라는 명령으로 그나마 진정되는 줄 알았으나, 이는 주민들의 관심을 화재 진압으로 바꾸려는 것이었다.[218] 이 명령은 다음날 철회됐다.

월요일은 거리, 특히 문에서의 질서가 무너지게 되고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게 되면서 민병 소방관들의 활동의 시작을 알렸다. 시장경이었던 블러드워스는 소방서를 조정해야 했으나, 월요일 전에 그는 분명히 런던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블러드워스란 이름은 월요일에 있었던 어떤 사건에 대한 신문이나 설명에서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219] 화재로 위급해진 상황에서 찰스 2세요크 공작 제임스에게 소방 활동에 대한 권력을 맡기게 된다.

제임스는 화재가 난 곳 주위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거리에서 발견되는 난민이나 하층민이라면 누구든지 돈을 받을 수 있고 음식도 배급받을 수 있도록 해주고, 소방대원에 추가하게 된다. 또한 찰스는 자신이 직접 철거를 명령하였다. 이는 왕가가 화재에 대한 재발을 막기 위해 직접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며 시민들로부터 불안감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제임스와 구명대원들이 월요일 내내 거리를 돌아다니며 외국인들을 시민들로부터 구출하고, 거리 내의 질서를 지키려 노력했다. 9월 8일 제임스를 본 목격자는 "요크 공작은 밤낮으로 끊임없이 불길을 잡으려 노력하고, 사람들을 구하려 하는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라고 언급했다.[220]

월요일 저녁에, 베이나드 성의 석벽이 화염을 저지할 것이라는 희망이 무너졌다. 이 역사적인 왕국은 월요일 밤새 불타고 완전히 소진되어 버렸다.[221]

무명의 화가가 1670년에 그린 불에 타는 루드게이트. 세인트폴 대성당은 오른쪽의 사각 모양의 탑이다.


9월 4일 화요일은 가장 파괴가 큰 날이었다.[222] 제임스는 화이트홀궁을 향해 서쪽으로 오고 있는 불기를 막기로 되어있었다. 그는 플릿강이 플릿 브리지에서 템스강까지 자연적인 방화벽이 불길을 막기를 바랐다. 하지만 화요일 아침 일찍 불길이 플릿강을 넘어 사그라들지 않는 동풍으로 서진해, 사람들을 달아나게 했다.

마침내 제임스와 소방관들이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화재가 일어난 곳의 북쪽에 방화벽을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불은 늦게까지 타고 있었고, 불길이 방화벽을 뛰어넘어 치프사이드의 넓고 부유한 쇼핑가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세인트폴 대성당의 두터운 석벽과 빈 광장의 형태가 방화벽의 역할을 해 불길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라고 생각을 했었다. 화요일에 세인트폴 대성당 내에는 사람들이 끌고온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고, 성당의 지하실에는 세인트폴 대성당에 인접한 거리에 있는 인쇄 종이들과 서점들의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이 건물은 크리스토퍼 렌이 세인트폴 대성당을 설계할 때 나무 판자를 사용했고, 그것이 화재 당시까지 남아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화요일 밤이 되었을 때, 성당에 불이 붙었다.

학교가 끝난 윌리엄 테즈웰은 1마일 정도 떨어진 웨스터민스터 계단에 서서 불길이 성당 주위를 기어오르고 나무 판자들로 덮인 지붕이 타는 것을 지켜보았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지붕은 녹기 시작했고, 지하실의 책과 서류들이 굉음과 함께 불에 타기 시작했다. 존 이블린의 일기에는 "성당의 돌들은 수류탄처럼 날아다녔다"고 언급했다. 녹고 있는 납은 시냇물 속으로 흘러들어갔고, 성당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세인트폴 대성당의 지하실에 돌덩어리가 떨어져, 인쇄지와 책들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낮 동안 불길은 푸딩 레인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동풍을 정면으로 거스르면서 화약 상점과 함께 새뮤얼 피프스가 있는 런던탑을 향했다. 탑의 수비대들은 서쪽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제임스와 소방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하루종일 기다렸으나, 답이 없던 나머지 스스로 그 근처의 집들을 부셔서 방화벽을 만들었고, 불이 더 이상 동쪽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피프스가 윌리엄 코번트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늘 전체가 불에 타는 느낌이라고 언급했다.[223]

9월 4일 수요일까지 피해를 본 면적. 이 중 대부분의 피해가 화요일에 일어났으며, 수요일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화요일 저녁에 바람이 잦아들었고, 수비대가 만든 방화벽이 9월 5일인 수요일부터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224] 불길을 막은 것은 템플이었다. 피프스는 연기가 자욱한 도시의 전역을 걸어다녔고, 파괴된 도시를 보기 위해 바킹 교회의 첨탑에 올랐다. 그리고 "내가 본 것 중 가장 슬프고 황량한 광경"이었다고 언급했다. 아직도 작은 불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으나, 대화재는 끝났다. 일요일이 되자 비가 도시 위로 내려 불이 꺼졌다.[225]

피프스는 도시의 바로 북쪽에 있던 공공 공원인 무어필드에 방문하여 집이 없는 난민들과 물건을 혼자 보관하고 있는 형편없는 노숙자들을 보았다. 그는 공원 주변의 빵 가격이 두 배로 뛰었다고 말했다. 존 이블린 역시 노숙자들이 집회를 열고 있는 주요 지점이었던 무어필드에 나가 그 안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226]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단 한 명도 돈을 구걸하지 않는 런던 사람들의 자존심에 감명을 받았다."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화재의 희생자들 사이에서 공포는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고, 외국인 방화범에 대한 공포와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침략에 대한 공포도 사람들 사이에서 두려움으로 자리잡았다. 수요일 밤, 무어필드와 이즐링턴 등에서 공황 상태가 발생했다. 플릿가에서는 5만 명의 프랑스와 네덜란드 이민자들이 오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사람들은 불을 끄기 위해 무어필드 쪽으로 행군했다. 행군을 하면서 본 남자는 목을 베고, 여자들을 강간하였는데, 이는 그들의 조금 밖에 되지 않는 소유물들을 훔치기 위해서였다. 이 단체는 민병대들에 의해 다시 밀려났다고 한다.[227]

당시의 분위기는 너무나 변덕스러웠던 까닭에 찰스는 군주제에 대한 런던 사람들의 반란이 두려웠다. 그래서 존재했나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중단되었던 음식 생산과 유통을 시작했다. 찰스는 매일 빵이 공급되어 도시에 들어올 것이고, 그 둘레에 안전한 시장들이 설치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 시장들은 사고 파는 시장을 의미한다.[228] 이는 긴급 지원금을 분배하는 데 사용되었다.

5. 죽음과 혼란

화재로 인한 사망자는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극소수에 불과하며, 적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포터는 8명[229]이라고 언급했고, 티니스우드는 한 자릿수라고 제시하였다. 하지만 일부 사망자는 기록되지 않은 것이 틀림없고, 화재와 연기 흡입으로 인한 직접적인 사망 외에도, 난민들이 임시 수용소나 겨울철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30]

핸슨은 런던 대화재 당시 극작가였던 제임스 설리와 아내가 추운 겨울에 한때 자신의 집이었던 폐허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는 점을 들어 사망자가 몇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주장에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핸슨은 린치를 당한 가톨릭교 신자나 외국인들이 요크 공작 제임스에 의해 구출되었다는 것은 왜곡된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의 사망자 수는 기록되지 않았으며, 시체가 완전히 타버려 유해가 거의 남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화재가 나무, 직물, 초가지붕뿐만 아니라 강가에 있던 기름, 피치, 타르, 석탄, 지방, 설탕, 알코올, 화약, 테레빈유 등 수많은 물건을 집어삼켰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부두에 있던 녹은 강철(용융점 1250~1480℃)과 거대한 쇠사슬(용융점 1100~1650℃)이 녹았고, 이름 모를 사람의 뼛조각들은 화재 후 수만 톤의 잔해에 묻혀 발견되지 못했거나, 귀중품을 찾거나 재건을 위해 잔해를 치우는 일꾼들이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231]

핸슨은 이 화재가 수 세기 동안 발생하지 않았던 큰 도시 화재이며, 불이 가난한 사람들을 빠른 속도로 잡아먹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노인, 영유아, 장애인, 절름발이 등은 탈출하지 못한 채 지하실 잔해 밑에 묻혔을 가능성이 크다며, 이 화재로 수백 명, 어쩌면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231]

빌스 오브 모탈리티(주간 사망자 통계)는 화재로 인한 혼란 때문에 화재 기간 동안에는 편찬되지 않았다.

물질적인 피해는 집 13,200채, 교구 교회 87채, 회사 건물 44채, 왕립 거래소, 세관, 브라이드웰 구빈원과 교도소 몇 곳, 우체국, 러드게이트, 뉴게이트, 올더스게이트 등 세 개의 성문이 소실된 것으로 집계되었다.[232] 처음에는 손실된 화폐 가치가 1억 파운드로 계산되었으나, 이후 불확실하지만 천만 파운드(1000만파운드)로 줄어들었다.

6. 화재의 영향

화재가 끝난 이후 혼란과 불안 속에서 찰스 2세는 런던의 반란을 두려워했다. 그는 노숙자들에게 런던을 떠나 다른 곳으로 정착할 것을 권하면서 "영국의 모든 도시들은 반대 없이 곤궁에 처해있는 사람을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179] 또한 임대인과 임차인 간의 분쟁을 처리하고, 재정 능력에 따라 누가 건물을 재건축해야 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특별 소방법원이 설치되었다. 이 법정은 1667년 2월부터 1672년 9월까지 운영되었고, 사건들은 보통 하루 안에 결정이 내려졌다. 역사가들은 이 소방법원이 없었다면, 런던 시민들의 분쟁은 훨씬 오래가고, 런던의 회복도 매우 지연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파괴된 런던을 재건하기 위해 효율적인 재건 계획이 쏟아졌다. 만약 이 재건 계획들 중 일부만이라도 계획대로 재건되었더라면 런던은 바로크의 성지인 파리와 비슷하게 장엄한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세워졌을 것이다. (가령 존 이블린의 재건 계획) 왕가와 런던은 이러한 계획들이 어느 정도 수용되어 있는 대규모 리모델링을 하려고 했으나, 그 땅의 소유주들이 정확히 찾아지지 않았으며, 찰스가 런던을 떠나라고 장려했던 까닭에 사람들이 떠나가 노동력이 부족해졌다. 이로 인해 존 이블린 외에도 로버트 훅, 발렌타인 나이트, 리처드 뉴코트 등이 세운 재건 계획들은 실행되지 못했다.

존 이블린의 재건 계획.


크리스토퍼 렌의 런던 재건 계획.


땅 소유에 대한 복잡함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크식의 어떤 건물도 실현될 수 없었다. 대신에 낡은 도로의 부분과 화재로부터의 안전, 위생 등 여러 가지가 개선되어 재건되는 런던에 적용되었다. 더 넓은 거리와, 템스강을 따라 만든 개방적인 부두, 강에 가는 길을 막는 집들도 사라지게 되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목조 건물이 사라지고 석조 건물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새로운 공공 건물들은 화재 이전의 부지에 새로 지어졌고, 런던의 재건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새로운 세인트폴 대성당을 포함한 크리스토퍼 렌의 50개의 새 교회였다.

크리스토퍼 렌.


푸딩 레인 근처에는 찰스의 계획과 크리스토퍼 렌, 로버트 훅의 설계로 61m 정도 되는 런던 대화재 기념탑이 들어서게 된다. 이 이후에 런던 대화재 기념탑의 이름을 딴 지하철역도 생기게 된다. 1668년에 기념탑에는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비난이 쓰여졌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 바로 천국에 허락을 받아 지옥이 이 개신교 도시에 부서졌다. 가톨릭교의 믿을 수 없고, 악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가톨릭의 광란은 공포를 만들었고, 이 공포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이 문구는 1829년 로마 가톨릭 구제법이 통과된 후에 찰스 피어슨에 의해 1830년에 사라졌다.[239] 런던에는 또 다른 기념비가 있는데, 이 기념비는 불이 멈춘 지점을 표시한다. 이 기념비는 스미스필드에 있는 황금 소년인데, 비문에 따르면 불이 푸딩 레인에서 시작되어 이곳 스미스필드의 파이 코너에서 멈춘 것은 시티오브런던에 대한 신의 분노의 증거라고 하였다.

크리스토퍼 렌로버트 훅이 설계한 런던 대화재 기념탑.


1665년에 발생한 런던 대역병은 런던 주민의 6분의 1인 8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240] 항간에서는 런던 대화재 덕분에 대역병이 재발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도 있다. 화재가 페스트를 전염시키는 쥐와 벼룩을 다 없애서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는 것이다.[241] 하지만 역사가들은 런던 대화재가 대역병의 재발을 막은 것에 대해는 동의하지 않는다. 예로 런던 박물관 웹사이트에서는 서로 이들이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역사가인 로이 포터는 가장 더러운 슬럼들이 모여있는 곳은 피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한다.[242]

7. 복구

화재 이후 혼란 속에서 찰스 2세는 런던의 반란을 두려워하여 노숙자들에게 런던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할 것을 권했다. 임대인과 임차인 간의 분쟁을 해결하고 재정 능력에 따라 누가 재건축을 할지 결정하기 위해 특별 소방법원이 설치되어 1667년 2월부터 1672년 9월까지 운영되었다. 이 법정 덕분에 런던 시민들의 분쟁이 빠르게 해결되어 런던의 회복이 지연되지 않았다.[132][133]

크리스토퍼 렌, 존 이블린은 웅장한 도시 계획을 구상했으나, 지주 등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173]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가 없었고, 애초에 검토조차 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174]) 로버트 훅, 발렌타인 나이트, 리처드 뉴코트 등도 재건 계획을 제안했지만 실행되지 못했다.[135] 이들은 모두 격자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계획으로, 실현되었다면 런던은 바로크 양식의 파리와 비슷한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1667년 "재건법"이 제정되어 목조 건축이 금지되고 벽돌조 또는 석조 건축이 의무화되었다.[138] 낡은 거리 계획의 상당 부분이 새로운 도시에서 재현되었지만, 위생과 화재 안전은 개선되었다. 더 넓은 거리와 템스강을 따라 만들어진 개방적인 부두, 강에 가는 길을 막는 집들이 사라진 것이 그 예이다. 새로운 공공 건물들은 화재 이전의 부지에 새로 지어졌는데, 크리스토퍼 렌이 설계한 51개의 새 교회와 새로운 세인트폴 대성당이 대표적이다.[164] 런던 복구에는 노르웨이산 목재가 수입되어 사용되었다.

푸딩 레인 근처에는 찰스 2세의 계획과 크리스토퍼 렌, 로버트 훅의 설계로 61m 높이의 런던 대화재 기념탑이 세워졌다. 이 기념탑의 이름을 딴 모뉴먼트 역도 생겼다.

8. 문화

윌리엄 해리슨 에인즈워스의 소설 "Old St Paul's"는 런던 대화재를 배경으로 한다.[244] 2014년 ITV에서 방영한 미니 시리즈 "더 그레이트 파이어"는 런던 대화재를 다룬다.[171] "London's Burning"은 런던 대화재를 노래하는 돌림노래이다.[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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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서적 Tinniswood
[227] 서적 Evelyn 1854
[228] 서적 Hanson (2002)
[229] 서적 Porter
[230] 서적 Tinniswood
[231] 서적 Hanson (2001)
[232] 서적 Porter
[233] 서적 화재의 영향
[234] 문서 그는 화재가 났을 때 근처에 있지도 않았으며, 무엇을 던질 만큼 몸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제과점에는 창문이 없었다. 2006
[235] 서적 Tinniswood
[236] 웹사이트 England and the Netherlands https://www.geheugen[...] 2019-04-24
[237] 웹사이트 Calendar of State Papers Relating To English Affairs in the Archives of Venice Volume 35, 1666-1668 https://www.british-[...] 1935
[238] 서적 The Anglo-Dutch Wars of the Seventeenth Century Modern Wars in Perspective 2013
[239] 서적 Underground Overground: A Passenger's History of the Tube 프로파일 북스 출간 2013
[240] 서적 Porter
[241] 서적 Hanson (2001)
[242] 서적 가장 누추한 슬럼가에 있는 홀본, 쇼어디치, 핀즈베리, 와이트채플과 서더크 등은 화재에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243] 서적 London: The Biography 2000
[244] 서적 Pompeii in Australia https://books.google[...] 멜버른 대학 출판부 출판 2002
[245] 뉴스 The Great fire review, ITV: 'historical hokum' https://www.telegrap[...] 데일리 텔레그래프 2014-10-16
[246] 서적 The Round Book: Rounds Kids Love to Sing (출판사 정보 없음) 2006
[247] 간행물 Scotland, It Burneth http://www.pbm.com/~[...]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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