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조약 (1915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런던 조약 (1915년)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이 이탈리아의 참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체결한 비밀 조약이다. 이탈리아는 조약을 통해 트렌티노, 남티롤, 달마티아 일부, 블로러, 도데카니사 제도 등을 얻기로 약속받고, 1915년 5월 연합국에 참전했다. 그러나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윌슨 대통령의 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이탈리아는 약속된 영토를 모두 얻지 못했고, 이는 '불완전한 승리'라는 불만을 낳아 파시즘의 대두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15년 4월 - 제2차 이프르 전투
제2차 이프르 전투는 1915년 벨기에 이프르에서 독일군이 염소 가스를 사용하며 시작된 전투로, 가스전의 시작을 알리고 이후 양측이 가스 무기와 방어책을 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 1915년 체결된 조약 - 21개조 요구
21개조 요구는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의 틈을 타 중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 1915년 중화민국에 제시한 요구 사항으로, 산둥성의 이권, 남만주와 동부 내몽골에서의 특수 권익 등을 포함하며 중국 내 반일 감정 고조 및 중일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 몬테네그로 왕국 - 오나모, 오나모!
오나모, 오나모!는 니콜라 1세가 1867년에 발표한 시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저항, 세르비아 민족 통일, 과거 영광 회복, 프리즈렌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으며, 세르비아 민족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쳐 "세르비아의 라 마르세예즈"라고 불렸다. - 몬테네그로 왕국 - 우리의 아름다운 몬테네그로에게서
"우리의 아름다운 몬테네그로에게서"는 몬테네그로의 국가 가사로, 몬테네그로의 아름다움, 독립, 그리고 헌신을 노래한다.
런던 조약 (1915년) | |
---|---|
조약 정보 | |
조약 이름 | 런던 조약 |
정식 명칭 | 프랑스, 러시아, 영국 및 이탈리아 간의 협정. 1915년 4월 26일 런던에서 서명됨. |
다른 이름 | 런던 밀약 런던 비밀 협정 |
유형 | 다자 조약 |
배경 | 이탈리아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
서명일 | 1915년 4월 26일 |
서명 장소 | 런던, 잉글랜드, 영국 |
협상가 | 영국: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영국: 에드워드 그레이 프랑스: 테오필 델카세 러시아 제국: 세르게이 사조노프 이탈리아: 안토니오 살란드라 이탈리아: 시드니 손니노 |
서명국 | 영국: 에드워드 그레이 프랑스: 폴 캉봉 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폰 벤켄도르프 이탈리아: 굴리엘모 임페리알리 |
당사국 |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 이탈리아 왕국 |
위키문헌 | 런던 조약 (1915) |
조약 내용 | |
주요 내용 | 대전 종결 후 미회수 이탈리아 영토 양도 약속 이탈리아의 연합국 측 대독일 참전 약속 |
관련 정보 | |
관련 항목 | 제1차 세계 대전 미수복 이탈리아 연합국 (제1차 세계 대전) |
2. 협상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트리플 안탕트 국가들인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더 많은 동맹국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들은 삼국 동맹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를 끌어들이기 위해 1914년 8월부터 협상을 시작했다.[1]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미수복 지역' 회복을 목표로 했다. 여기에는 남티롤, 트렌티노,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피우메, 달마티아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이탈리아는 아드리아 해 주도권 확보와 식민 제국 확장을 목표로 협상에 임했다.
이탈리아는 초기에는 삼국 동맹에 가입해 있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수복 지역 이양을 약속받고, 1915년 4월 26일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2. 1. 초기 제안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트리플 안탕트 국가들인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트리플 동맹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1914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러시아의 주도로 연합국과 이탈리아 간의 협상이 진행되었다.[1]1914년 8월 4일, 이탈리아가 중립을 선언한 지 하루 만에, 러시아 주재 이탈리아 대사는 이탈리아가 트렌티노-알토 아디제/쥐드티롤, 블레르, 그리고 아드리아 해에서의 주도적 지위를 대가로 연합국에 가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사조노프는 이탈리아의 이러한 움직임이 루마니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항하여 연합국에 가입하도록 할 것이라고 믿었다. 영국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는 이 아이디어를 지지했으며, 트리에스테를 요구 사항에 추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1]
영국 주재 이탈리아 대사 굴리엘모 임페리알리는 그레이에게 이탈리아의 조건을 제시했지만, 그레이는 이러한 논의가 실질적인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가입하기로 약속할 때까지 이 문제를 더 이상 고려하지 않을 것이라고 임페리알리에게 말했다. 그레이의 지시에 따라, 이탈리아 주재 영국 대사 레넬 로드는 이탈리아 총리 안토니오 살란드라에게 이탈리아가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물었다. 살란드라는 로드에게 당시에는 불가능하며, 중립을 포기하려는 시도는 미래 동맹의 가능성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알렸다. 사조노프는 그에 따라 통보받았고, 러시아는 이 문제를 포기했다.
2. 2. 블레르 점령
1914년 9월, 이탈리아는 영국의 승인을 얻어 알바니아의 블레르(발로나)를 점령했다. 이 조치는 이탈리아의 전쟁 개입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으며, 이탈리아 정부에게 약간의 명성을 부여하기 위해 계획되었다. 안토니노 파테르노 카스텔로는 세르게이 사조노프의 반대를 예상하여 에드워드 그레이에게 이탈리아를 협상국에 끌어들이기 위해 필요한 조치로, 이탈리아에 대한 양보 없이 이를 허용하도록 러시아를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다.
2. 3. 소니노 외무장관 취임
1914년 11월, 시드니 소니노가 이탈리아 외무장관으로 취임하면서 협상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1] 소니노는 적절한 시기에 구속력 있는 협정으로 전환될 수 있는 비구속적 협정을 제안했다. 그러나 영국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는 이탈리아의 전쟁 참여 약속이 먼저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이 제안을 거절했다.
2. 4. 불가리아와의 동맹 모색
협상이 이탈리아와 진행되는 동안, 연합국은 불가리아와의 동맹(혹은 최소한 우호적 중립)을 얻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병행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세르비아 간 영토 분쟁, 특히 이탈리아에 달마티아를 할양하는 문제는 불가리아와의 협상에 걸림돌이 되었다. 달마티아 할양은 세르비아에 보상으로 제공될 아드리아 해 연안(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더불어)을 크게 차단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1]연합국은 불가리아를 끌어들이기 위해 세르비아가 불가리아에 바르다르 마케도니아의 대부분을 할양하도록 요청했다. 사조노프는 세르비아에 대한, 그리고 간접적으로 불가리아에 대한 제안을 강화하기 위해 세르비아에 아드리아 해 연안을 보장하고자 했지만, 그레이는 이탈리아와의 동맹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막았다.[1]
1915년 2월 중순, 갈리폴리 전투가 시작된 후, 영국은 불가리아가 몇 주 안에 연합국 편에 참전하여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불가리아와 그리스군이 연합국으로부터 약속받은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여 러시아를 그 지역에서 몰아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다. 소니노는 불가리아와 그리스가 함께 전쟁에 참전하면 발칸 반도에서 연합국의 승리를 확보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3월 4일, 임페리알리는 그레이에게 이탈리아가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고 알리고 슬라브족의 서진을 억제해야 한다는 16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2. 5. 러시아의 콘스탄티노플 요구

사조노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가 입은 손실에 대한 대가로 동맹국들이 약속한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러시아의 통제권을 이탈리아가 위협하는 것에 반대했다.[1] 이에 영국은 제국방위위원회와 프랑스로부터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러시아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사조노프는 이탈리아와의 합의에 동의하게 되었다. 다만, 그는 이탈리아가 스플리트 남쪽의 아드리아해 해안을 점령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고, 이탈리아군이 터키 해협 점령에 참여하지 않는 한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2. 6. 협상 난항과 최종 타결

러시아와 이탈리아는 달마티아에서 이탈리아의 영토 확장 범위를 두고 이견을 보여 협상은 6주 동안 지속되었다. 이탈리아는 자결권이 아닌 미래 전쟁에서의 안보 우려를 근거로 네레트바 강까지의 달마티아, 펠예샤츠 반도, 모든 아드리아 해 섬들의 영유를 주장했다. 이탈리아 협상가들은 이탈리아가 아드리아 해 서쪽 해안에 방어 가능한 항구가 없는 반면, 러시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통제하는 해안을 점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 영국 국방위원회는 지중해에서 러시아 해군력이 강해지는 것에 대해 우려했으며, 이것이 아드리아 해에서 이탈리아의 주장에 대한 영국의 지지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1]
불가리아, 루마니아, 그리스와의 동맹을 위한 외교적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던 영국의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는 소니노의 16개항을 초안 협정으로 바꾸어 유고슬라브 위원회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 전달했다. 러시아 외무장관 사조노프는 초안 협정에 반대했고, 남슬라브인들을 위한 항구로서 이탈리아가 제안한 두브로브니크를 내륙 교통로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사조노프는 더 나은 항구로서 스플리트를 추가로 요구했고, 몬테네그로 왕국에 속한 해안의 군사화 해제 요청에 반대했다. 그레이는 러시아의 반대 의견을 고려한 문서를 작성하여 임페리알리에게 전달했지만, 소니노는 이견을 이유로 협상을 끝낼 것이라고 위협했다.
프랑스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는 이탈리아와의 동맹을 통해 불가리아, 그리스, 루마니아와의 동맹도 이끌어낼 것이라고 믿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탈리아와의 동맹을 얻으려 했다. 델카세는 세르비아를 우대하기 위해 달마티아에서 이탈리아의 주장을 축소하는 대신 도데카니사 제도를 무제한으로 소유할 것을 제안했다. 러시아 제국군이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주도권을 잃고 총사령관인 니콜라이 대공이 사조노프에게 이탈리아와 루마니아의 지원이 주도권을 되찾는 데 긴급히 필요하다고 알리면서 델카세의 중재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따라 사조노프는 델카세가 제안한 제안을 수락하고, 이탈리아가 4월 말까지 전쟁에 참전할 것을 주장했으며, 모든 조약 관련 군사화 해제 문제는 영국 총리 H. H. 애스퀴스가 결정하도록 남겼다. 애스퀴스는 4월 9일에 초안 협정을 작성했고, 5일 후 소니노가 사소한 수정을 가하여 수락했다. 이 협정은 4월 26일에 그레이와 폴 캉봉, 임페리알리, 알렉산더 폰 벤켄도르프 대사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를 대표하여 서명했다.
3. 조약 내용
이탈리아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오스트리아로부터 되찾지 못했던 남티롤, 트렌티노,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피우메, 달마티아 등의 지역(이탈리아의 미수복 지역)을 되찾기를 원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삼국 동맹에 가입해 있었다.[1]
대전 종전 후 미수복 지역의 이양을 약속받고, 1915년 4월 26일 이탈리아 외무장관 시드니 소니노(Sidney Sonnino)가 영국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와 프랑스 외무차관 쥘 캉봉(Jules Cambon)(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의 대리)과 이 조약을 체결하여 연합국 편에서 독일과의 전쟁에 참전할 것을 약속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항 | 내용 |
---|---|
제1조 | 러시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군사력 증강을 막기 위해 투입하는 병력 수를 보장하기 위한 군사 협정을 체결해야 함을 규정. |
제2조 | 이탈리아가 영국, 러시아, 프랑스의 모든 적국에 대해 전쟁에 참여해야 함을 요구. |
제3조 | 프랑스와 영국 해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이탈리아의 전쟁 노력을 지원해야 함을 명시. |
제4조 | 이탈리아가 트렌티노(Trentino)와 남티롤(South Tyrol)을 받도록 규정. |
제5조 | 이탈리아에 달마티아 – 구체적으로는 플랑카 곶(Cape Planka)에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선의 북쪽 지역 – 를 할양. 이는 자다르(Zadar)와 시베니크(Šibenik) 도시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영토 내의 크르카 강 유역과 그 지류를 포함. 또한 이 조항은 브라치 섬(Brač), 숄타 섬(Šolta), 치오보 섬(Čiovo), 드르베니크 말리 섬(Drvenik Mali), 드르베니크 벨리 섬(Drvenik Veli), 크르크 섬, 랍 섬, 프르비치 섬, 스베티 그르구르 섬(Sveti Grgur), 골리 오토크 섬(Goli Otok), 야클얀 섬(Jakljan), 콜로체프 섬(Koločep)을 제외한 모든 오스트리아-헝가리 아드리아 해 섬들을 이탈리아에 할양. 플랑카 곶과 아오스 강(Aoös) 사이의 해안은 비무장화 (펠예샤츠(Pelješac)와 두브로브니크 남동쪽 지점과 전쟁 전 합의에 따라 군사 기지가 허용된 몬테네그로 영토는 예외). |
제6조와 제7조 | 이탈리아에 블레르(Vlorë), 사잔 섬(Sazan Island), 그리고 방어에 필요한 주변 지역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부여. |
제8조 | 이탈리아에 도데카니사 제도(Dodecanese Islands)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부여. |
제9조 | 잠재적인 오스만 제국의 분할(Partition of the Ottoman Empire)에서 안탈리아(Antalya) 지역의 영토를 이탈리아에 약속. |
제10조 | 오치 조약(Treaty of Ouchy)에 따라 리비아에서 술탄의 권리를 이탈리아에 부여. |
제13조 | 프랑스 또는 영국 식민 제국이 아프리카에서 독일 식민 제국(German colonial empire)에 대해 영토를 확보할 경우 이탈리아에 보상을 약속. |
제11조와 제14조 | 전쟁 배상금과 5천만 파운드 스털링(pounds sterling)의 대출을 각각 이탈리아에 약속. |
제16조 | 이 조약이 비밀로 유지되어야 함을 규정. |
4. 조약의 여파
런던 조약은 비밀 조약이었지만, 1915년 4월 말 유고슬라비아 위원회와 런던의 지지자들은 조약 내용의 개요를 알게 되었다.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위원회는 니슈 선언의 기반이었던 자결 원칙을 무시하고 세르비아와 사전 협의하지 않은 점을 비난하며 강력하게 반발했다.[1] 그들은 협상국 수도에 항의했고, 파시치는 협상국이 크로아티아의 이익과 관련된 국경 문제에 대해 헝가리나 루마니아와 조약을 체결하기 전에 먼저 세르비아와 협의할 것을 요구했으며,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의 미래 정치적 통합에 대한 보장을 요청했다. 파시치는 당시 전시 임시 수도였던 니시에서 영국 대사 찰스 루이 데 그라즈를 통해 그레이에게 그의 제안을 전보로 보냈지만, 그레이는 두 가지 요청 모두를 거절했다. 유고슬라비아 위원회 위원장 안테 트룸비치는 영국 내각의 고위 인사인 크루 경을 만나 크로아티아, 이스트리아, 달마티아의 통합과 세르비아와의 정치적 통합에 대한 지지를 요구했다. 이 조약에 대한 소식은 남슬라브인들의 정치적 통합 방식에 대한 세르비아의 요구에 대해 유고슬라비아 위원회가 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만들었다.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에 의해 조약 전문이 공개되면서, 1917년 파시치와 트룸비치는 런던 조약에 명시된 이탈리아의 영토 요구에 맞서 남슬라브인들의 전후 통합 계획을 세운 코르푸 선언을 협상하고 합의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에 가입해 있었으나, 1915년 4월 26일 연합국 측 참전 대가로 종전 후 이탈리아의 미수복 지역을 이양받기로 약속받고, 영국 및 프랑스와 런던 조약을 체결했다. 1915년 5월 22일,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만 선전포고하여 알프스 전선을 개설했다. 이는 중앙 연합국 전체에 대한 전쟁을 요구한 런던 조약 2조를 무시한 것으로,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비난했고 러시아는 이탈리아와 독일 간 불가침 협정 가능성을 제기했다.[1] 이탈리아는 군대 준비 부족을 이유로 들었으나, 다른 중앙 연합국, 특히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 지연은 협상국 사이에서 이탈리아의 고립을 초래했다. 이후 협상국의 압력과 내부 갈등으로 8월 20일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했으나, 1916년 8월 27일까지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중앙 연합국에 대패했지만, 1년 후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반격에 성공했다. 그러나 60만 명의 사망자와 사회 불안, 경제 훼손이라는 대가를 치렀다.
1917년 1월과 2월 런던, 그리고 4월 생장드모리엔에서 연합국들은 오스만 제국의 분할(Partition of the Ottoman Empire)을 논의했다. 이탈리아는 1915년 런던 조약에 따라 안탈리아(Antalya) 지역에서 약속된 영토를 요구했고, 코냐와 아다나 주도 추가로 요구했다. 이 요구는 생장드모리엔 협정에서 대부분 받아들여졌으나,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의 협정 확인은 불가능해졌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런던 조약 조항은 이탈리아와 다른 연합국들 사이의 주요 분쟁거리였다. 이탈리아 수상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와 외무장관 소니노는 런던 조약 이행과 더불어 피우메 합병을 요구했다. 이들은 안전 보장 원칙 적용과 자결주의에 근거하여 피우메 합병을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초기에 이탈리아가 독일에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를 들어 이탈리아가 조약에서 허용하는 것 이상의 주장을 지지할 자격이 없다고 비공개적으로 생각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14개 조항 9항에 따라 해당 지역의 자결을 옹호했으며, 런던 조약을 유럽 외교의 배신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이후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이유로 사정 변경의 원칙 (clausula rebus sic stantibus)을 적용,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영국과 프랑스 대표들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동안, 윌슨은 1919년 4월 24일 자신의 원칙을 설명하고 이탈리아인들의 정의감에 호소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오를란도와 소니노는 이에 항의하며 파리를 떠났고, 이탈리아에서는 국가의 명예를 지킨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5월 7일 복귀 후에도 그들은 연합국으로부터 화해 제안을 기대하며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대표단이 없는 동안 프랑스와 영국은 러시아의 동의가 없다는 이유로 생장드모리엔 협정을 무효화하고 소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의 어떠한 주장도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오를란도와 소니노는 아드리아 해 동부 연안에 대한 주장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다. 오를란도는 자다르와 시베니크를 제외한 달마티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피우메 합병은 고집했다. 소니노는 반대 견해를 가졌다. 이로 인해 "런던 조약 + 피우메"라는 슬로건이 널리 알려졌고, 런던 조약의 약속과 피우메는 이탈리아의 국가적 명예 문제가 되었다. 결국, 아드리아 해 동부 연안에서 이탈리아가 얻은 것은 줄리안 마르크, 이스트리아, 그리고 여러 섬으로 제한되었다. 오를란도와 안테 트룸비치 사이의 협상 이후, 피우메는 독립 도시 지위를 부여받았다. 이탈리아는 타르비시오 주변의 런던 조약 국경 수정을 통해 오스트리아와의 직접적인 철도 연결을 확보하게 되었다. 달마티아에서는 영국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자다르와 시베니크에 대해서만 자유 도시 지위를 지지했고, 프랑스 수상 조르주 클레망소는 자다르에 대해서만 자유 도시 지위를 지지했다. 비밀 베니젤로스-티토니 협정에서 이탈리아는 그리스를 위해 로도스를 제외한 도데카니사 제도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고, 양국은 알바니아 분할에서 서로의 주장을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와 시드니 소니노가 런던 조약에서 약속된 모든 영토나 리예카 시를 확보하지 못하면서, 이탈리아가 평화를 잃고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애국심은 민족주의적 불만으로 바뀌었고, 정부는 국가 이익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오를란도의 후임 총리인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니티는 리예카에 주둔하고 있던 이탈리아군을 철수시키고 도시를 연합군 사령부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이에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참전 용사들과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피우메 점령''을 감행하여 리예카를 점령했다. 단눈치오는 리예카에 카르나로 이탈리아 통치령을 선포했는데, 그 통치 체제는 파시즘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피우메 점령은 이탈리아 사회당, 단눈치오, 그리고 베니토 무솔리니의 압력으로 니티 정부의 몰락을 초래했다. 니티의 후임인 조반니 졸리티와 달마티아 출신의 "민주적 포기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단눈치오는 런던 조약에서 약속된 달마티아의 약속 불이행, "완전히 이탈리아인"인 리예카 시의 합병 실패, 그리고 애매한 아드리아해 지배권이 이탈리아의 전쟁 참여를 무의미하게 만든 것을 언급하며 "우리의 승리, 당신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슬로건으로 비난을 공식화했다. 그의 입장은 불완전한 승리 신화를 낳았다.
4. 1. 유고슬라비아 위원회와 세르비아의 반발
비록 이 조약은 비밀로 유지될 예정이었지만, 1915년 4월 말 유고슬라비아 위원회와 런던의 지지자들은 조약 내용의 개요를 알게 되었다.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위원회는 강력하게 반발하며 협상국 수도에서 항의했다.[1] 파시치는 니슈 선언의 기반이었던 자결 원칙을 무시하고 세르비아와 사전 협의하지 않은 점을 비난했다. 그는 협상국이 크로아티아의 이익과 관련된 국경 문제에 대해 헝가리나 루마니아와 조약을 체결하기 전에 먼저 세르비아와 협의할 것을 요구했으며,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의 미래 정치적 통합에 대한 보장을 요청했다. 파시치는 당시 전시 임시 수도였던 니시에서 영국 대사 찰스 루이 데 그라즈를 통해 그레이에게 그의 제안을 전보로 보냈다. 그러나 그레이는 두 가지 요청 모두를 거절했다. 유고슬라비아 위원회 위원장 안테 트룸비치는 영국 내각의 고위 인사인 크루 경을 만나 크로아티아, 이스트리아, 달마티아의 통합과 세르비아와의 정치적 통합에 대한 지지를 요구했다. 이 조약에 대한 소식은 또한 남슬라브인들의 정치적 통합 방식에 대한 세르비아의 요구에 대해 유고슬라비아 위원회가 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만들었다. 크로아티아인과 슬로베니아인의 통합이 세르비아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에 의해 조약 전문이 공개되었다. 1917년 파시치와 트룸비치는 런던 조약에 명시된 이탈리아의 영토 요구에 맞서 남슬라브인들의 전후 통합 계획을 세운 코르푸 선언을 협상하고 합의했다.4. 2. 이탈리아의 참전과 전황
이탈리아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오스트리아로부터 되찾지 못했던 남티롤, 트렌티노,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피우메, 달마티아 등의 지역(이탈리아의 미수복 지역)을 되찾기를 원했다.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삼국 동맹에 가입해 있었다. 1915년 4월 26일 이탈리아는 연합국 측에 참전하는 대가로 종전 후 미수복 지역을 이양받기로 약속받고, 영국 및 프랑스와 런던 조약을 체결했다.
1915년 5월 22일, 이탈리아 정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만 선전포고하여 알프스 전선을 개설했다. 이는 중앙 연합국 전체에 대한 전쟁을 요구한 런던 조약 2조를 무시한 것으로,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비난했고 러시아는 이탈리아와 독일 간 불가침 협정 가능성을 제기했다.[1] 이탈리아는 군대 준비 부족을 이유로 들었으나, 다른 중앙 연합국, 특히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 지연은 협상국 사이에서 이탈리아의 고립을 초래했다. 이후 협상국의 압력과 내부 갈등으로 8월 20일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했으나, 1916년 8월 27일까지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중앙 연합국에 대패했다. 그러나 1년 후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반격에 성공했지만, 60만 명의 사망자와 사회 불안, 경제 훼손이라는 대가를 치렀다.
4. 3. 생장드모리엔 협정
1917년 1월과 2월 런던, 그리고 4월 생장드모리엔에서 연합국들이 오스만 제국의 분할(Partition of the Ottoman Empire)을 논의했다. 이탈리아는 1915년 런던 조약에 따라 안탈리아(Antalya) 지역에서 약속된 영토를 요구했고, 코냐와 아다나 주도 추가로 요구했다. 이 요구는 생장드모리엔 협정에서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프랑스는 러시아의 협정 확인을 요구했는데,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불가능해졌다.4. 4. 파리 강화 회의
파리 강화 회의에서 런던 조약 조항은 이탈리아와 다른 연합국들 사이의 주요 분쟁거리였다. 이탈리아 수상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와 외무장관 소니노는 런던 조약 이행과 더불어 피우메 합병을 요구했다. 이들은 안전 보장 원칙 적용과 자결주의에 근거하여 피우메 합병을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초기에 이탈리아가 독일에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를 들어 이탈리아가 조약에서 허용하는 것 이상의 주장을 지지할 자격이 없다고 비공개적으로 생각했다.프랑스와 영국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을 통해 아드리아 해에서 이탈리아의 야망을 억제하려 했다. 윌슨은 14개 조항 9항에 따라 해당 지역의 자결을 옹호했다. 윌슨은 런던 조약을 유럽 외교의 배신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이후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이유로 사정 변경의 원칙 (clausula rebus sic stantibus)을 적용,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영국과 프랑스 대표들이 이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동안, 윌슨은 1919년 4월 24일 자신의 원칙을 설명하고 이탈리아인들의 정의감에 호소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오를란도와 소니노는 이에 항의하며 파리를 떠났고, 이탈리아에서는 국가의 명예를 지킨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5월 7일 복귀 후에도 그들은 연합국으로부터 화해 제안을 기대하며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대표단이 없는 동안 프랑스와 영국은 러시아의 동의가 없다는 이유로 생장드모리엔 협정을 무효화하고 소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의 어떠한 주장도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오를란도와 소니노는 아드리아 해 동부 연안에 대한 주장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다. 오를란도는 자다르와 시베니크를 제외한 달마티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피우메 합병은 고집했다. 소니노는 반대 견해를 가졌다. 이로 인해 "런던 조약 + 피우메"라는 슬로건이 널리 알려졌고, 런던 조약의 약속과 피우메는 이탈리아의 국가적 명예 문제가 되었다. 결국, 아드리아 해 동부 연안에서 이탈리아가 얻은 것은 줄리안 마르크, 이스트리아, 그리고 여러 섬으로 제한되었다. 오를란도와 안테 트룸비치 사이의 협상 이후, 피우메는 독립 도시 지위를 부여받았다. 이탈리아는 타르비시오 주변의 런던 조약 국경 수정을 통해 오스트리아와의 직접적인 철도 연결을 확보하게 되었다. 달마티아에서는 영국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자다르와 시베니크에 대해서만 자유 도시 지위를 지지했고, 프랑스 수상 조르주 클레망소는 자다르에 대해서만 자유 도시 지위를 지지했다. 비밀 베니젤로스-티토니 협정에서 이탈리아는 그리스를 위해 로도스를 제외한 도데카니사 제도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고, 양국은 알바니아 분할에서 서로의 주장을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4. 5. '불완전한 승리'와 파시즘 대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와 시드니 소니노는 런던 조약에서 약속된 모든 영토나 리예카 시를 확보하지 못했기에, 이탈리아가 평화를 잃고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애국심은 민족주의적 불만으로 바뀌었고, 정부는 국가 이익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오를란도의 후임 총리인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니티는 리예카에 주둔하고 있던 이탈리아군을 철수시키고 도시를 연합군 사령부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이에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참전 용사들과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국경 지역에 배치된 정규군의 지원을 받음)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피우메 점령''을 감행하여 리예카를 점령했다. 단눈치오는 리예카에 카르나로 이탈리아 통치령을 선포했는데, 그 통치 체제는 파시즘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으며 파시스트들이 추구하는 대안적인 의회 질서의 모델이 되었다.
피우메 점령은 이탈리아 사회당, 단눈치오, 그리고 베니토 무솔리니의 압력으로 니티 정부의 몰락을 초래했다. 니티의 후임인 조반니 졸리티와 달마티아 출신의 "민주적 포기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단눈치오는 런던 조약에서 약속된 달마티아의 약속 불이행, "완전히 이탈리아인"인 리예카 시의 합병 실패, 그리고 애매한 아드리아해 지배권이 이탈리아의 전쟁 참여를 무의미하게 만든 것을 언급하며 "우리의 승리, 당신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슬로건으로 비난을 공식화했다. 그의 입장은 불완전한 승리 신화를 낳았다.
5. 평가 및 비판
진보 진영에서는 런던 조약이 제국주의적 야합이며,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비판한다. 이탈리아가 약속받은 영토에는 다수의 슬라브족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수 진영에서는 런던 조약이 이탈리아의 정당한 요구를 반영한 것이며, 연합국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특히, 피우메를 얻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크다. 런던 조약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 국내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파시즘 대두의 한 원인이 되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