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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치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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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린치공산당은 1930년대 일본에서 활동한 일본 공산당의 한 분파로, 여러 차례의 당 중앙 붕괴와 재건을 반복하며 특고(특별고등경찰)의 탄압과 밀정 활동으로 인해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야마모토 마사미, 노로 에이타로 등이 지도부를 이끌었으나, 밀정의 밀고와 내부 갈등으로 인해 주요 간부들이 체포되거나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특히 미야모토 켄지가 밀정으로 의심되는 인물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린치 사건'은 당내 불신을 심화시켰다. 이후 하카마다 사토미가 당을 이끌었지만, 역시 체포되며 린치공산당은 와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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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치공산당
린치 공산당
정당 정보
약칭린치쿄산토
창당1989년
해산1991년
정치적 위치극좌
이념마르크스-레닌주의
반수정주의
호자주의
국제 제휴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 및 단체 국제 회의 (단결 & 투쟁)
국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 조직
지도자아라시 요시히로
기관지프롤레타리아
후신 정당노동자 공산당 (일본)

2. 내력

1932년 10월 아타미 사건으로 일본공산당 중앙 조직이 괴멸된 이후, 당은 극심한 혼란과 위기를 겪었다. 검거를 피한 일부 간부들이 임시 중앙을 조직하려 했으나 번번이 경찰의 탄압으로 와해되었다. 1933년 모스크바에서 귀국한 야마모토 마사미가 당 재건에 나섰지만, 지도부 내부에 침투한 경찰 스파이(오오이즈미 켄조, 미후네 토메키치)의 밀고로 인해 코바야시 타키지가 검거 후 고문으로 사망하고 야마모토 지도부 역시 붕괴하는 등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 시기 당 산하 대중 조직이었던 전국농민조합 전국회의파(전농 전회파)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 역시 공산당의 미숙한 지도와 계속되는 탄압으로 인해 활동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야마모토 지도부 붕괴 후에는 노로 에이타로가 지도부를 이끌었으나, 1933년 6월 감옥에 있던 전 지도부 간부 사노 마나부와 나베야마 사다치카가 코민테른과의 결별, 천황제 인정 등을 주장하며 전향 성명을 발표하면서 당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 성명은 수감 중인 당원들의 대규모 전향으로 이어졌고, 당 조직은 더욱 약화되었다. 노로 역시 스파이 오오이즈미의 밀고로 검거되어 옥사했다.

이후 미야모토 켄지가 잠시 지도부를 맡았으나, 스파이 색출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과정에서 당내 상호 불신이 극에 달했다. 결국 스파이로 의심받던 오바타 타츠오가 사문 과정에서 사망하는 일본공산당 스파이 사문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으로 미야모토마저 검거되었다.

마지막으로 하카마다 사토미가 홀로 중앙위원으로 남았으나, 당내 불신과 분열은 계속되었다. 하카마다가 스파이 색출을 위해 '전 당원 재등록'을 요구하자 오히려 자신이 스파이로 의심받으며 당내 다수파의 이반을 초래했다. 당 중앙과 전협 중앙 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얼마 남지 않았던 대중 조직마저 와해되었고, 결국 1935년 3월 하카마다마저 검거되면서 일본공산당 중앙 조직은 완전히 소멸했다.

이처럼 1930년대 초중반 일본공산당은 아타미 사건 이후 계속된 지도부의 연쇄 검거와 붕괴, 경찰 스파이의 침투, 사노 마나부·나베야마 사다치카의 전향 선언으로 인한 당원 이탈, 스파이 색출 과정에서 불거진 내부 불신과 린치 사건 등으로 인해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다키가와 사건 등 국내의 언론 탄압이 강화되는 상황 속에서 당은 사실상 활동 불능 상태에 빠졌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중앙 조직을 재건하지 못했다.

2. 1. 야마모토 지도부 (1933년 1월 - 5월)

1932년 10월 아타미 사건으로 당 중앙이 괴멸된 후, 검거를 면한 중앙위원 미야가와 토라오가 11월 임시 당 중앙을 조직했으나 곧 검거되어 다시 괴멸되었다.

이듬해 1933년 1월,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귀국한 '''야마모토 마사미'''가 당 중앙을 재건했다. 병상에 있던 노로 에이타로를 비롯해 타니구치 나오헤이, 오오이즈미 켄조가 중앙위원이 되었다. 3월에는 야마시타 헤이지와 미후네 토메키치가 합류했다. 그러나 이 중 오오이즈미와 미후네는 특고 밀정이었다.

이 시기, 공산당 산하의 대중 단체였던 전국농민조합 전국회의파(전농 전회파) 및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는 공산당의 미숙한 지도로 인해 당국의 탄압을 받아 거의 활동 정지 상태에 이르렀다.

5월에는 밀정(오오이즈미로 추정)의 밀고로 작가 코바야시 타키지가 당내 연락 활동 중 검거되어 경찰 취조 중 고문으로 사망했다(고문치사). 같은 달, 스파이 미후네의 밀고로 야마모토, 타니구치, 야마시타가 검거되면서 야마모토 지도부는 붕괴했다.

2. 2. 노로・오오이즈미 지도부 (1933년 5월 - 11월)

야마모토 지도부가 괴멸한 후, 탄압을 피한 중앙위원 '''노로 에이타로'''가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오오이즈미 켄조가 경찰 스파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와 함께 지도부를 이끌었으며, 미야모토 켄지, 헨미 시게오, 오바타 타츠오를 중앙위원으로 보충했다.

그러나 1933년 6월, 감옥에 있던 전 간부 사노 마나부와 나베야마 사다치카가 전향 성명서인 「공동피고 동지에게 고하는 서」를 발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코민테른과의 결별, 일국적 사회주의 실현, 중국군벌미국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일본전쟁 지지, 그리고 천황제 인정을 주장했다. 감옥에 있던 카자마 죠키치, 미타무라 시로, 타나카 세이겐 등 다른 간부들도 이에 동조하면서, 수감된 당원들 사이에서 대규모 전향이 이어졌다. 당 중앙위원회는 사노와 나베야마를 제명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러한 전향의 흐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1933년 11월, 스파이였던 오오이즈미의 밀고로 노로 에이타로 위원장이 경찰에 검거되었고, 그는 다음 해인 1934년 2월 감옥에서 사망했다.

2. 3. 미야모토・오오이즈미 지도부 (1933년 11월 - 12월)

노로 에이타로가 검거된 후, 미야모토 켄지는 오이즈미 켄조가 스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와 함께 당 지도부를 구성했다. 중앙위원으로는 하카마다 사토미와 아키사사 마사노스케를 충원했다.

미야모토는 스파이 색출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이러한 방침은 대중 조직의 당 분파(프랙션)에까지 영향을 미쳐 당 전체에 상호 불신과 의심이 만연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 결과, 중앙위원이었던 오이즈미와 오바타 타츠오가 스파이로 의심받게 되었다. 1933년 12월, 두 사람은 사문에 회부되었고, 이 과정에서 오바타가 사망했다(일본공산당 스파이 사문사건 참조). 이로 인해 미야모토는 경찰에 검거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미야모토는 스파이에 대한 당의 처분은 원칙적으로 제명일 뿐이며, 오바타를 살해할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바타가 매독으로 인해 심장이 약한 특이 체질이었기 때문에 격렬한 논쟁 중에 "툭 치니 사망했다"며 과실치사를 주장했다. (그러나 오바타의 동생 등은 오바타에게 그러한 특이 체질은 없었다고 반박했다.) 이는 현재까지도 일본공산당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남아있다.

확실한 스파이였던 오이즈미와 달리, 오바타의 경우에는 스파이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전후 연구를 통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오바타 역시 스파이가 맞다는 것이 일본공산당의 현재 공식 입장이다.

2. 4. 하카마다 지도부 (1933년 12월 - 1935년 3월)

미야모토 겐지가 검거된 후, 하카마다 사토미, 헨미 시게오, 아키사사 마사노스케가 당 지도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헨미와 아키사사가 린치 사건 용의자로 추가 검거되면서, 1934년 4월 이후 중앙위원은 하카마다 사토미 한 명만 남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당 중앙은 사실상 붕괴된 상태였다.

이 시기 일본 공산당은 아타미 사건으로 인한 당 조직 괴멸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감옥에 있던 전 간부 사노 마나부와 나베야마 사다치카의 전향 성명을 시작으로 당원들의 대량 전향이 이어져 당세는 계속 약화되었다. 여기에 경찰 스파이가 당 중앙부에 침투하는 일이 잦아졌고, 이들의 밀고로 간부가 검거될 때마다 남은 당원들이 중앙부를 재건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깊은 의심에 빠진 하카마다는 밀정을 찾아내기 위해 "전 당원의 재등록"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하카마다를 밀정으로 의심하는 “다수파”의 이탈을 불러왔다. 1934년 중반에는 당 중앙(사실상 하카마다)과 전협 중앙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심해졌고, 결국 사실상 활동이 멈춘 상태였던 전협마저 탄압으로 와해되었다. 당 내부에서는 스파이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서로를 의심하는 분위기가 만연했고, 이는 지나친 사문으로 이어졌다.

다키가와 사건 등 일본 내에서 언론 탄압이 심화되는 상황이었지만, 공산당은 이러한 내부 분열과 외부 탄압 속에서 당으로서의 활동을 제대로 이어가기 어려웠다. 결국 1935년 3월, 마지막 중앙위원이었던 하카마다마저 검거되었다.

3. 붕괴 이후

하카마다 사토미가 검거된 후 당 중앙이 괴멸되자, 하카마다 지도부에서 이반한 "다수파" 역시 중심 멤버들이 검거되고 코민테른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에 따라 1935년 9월 "관서지방위원회"가 다수파 해산 성명을 발표했다. 요시미 미츠노리・와다 시사시・오쿠무라 히데마츠 등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같은 해 10월경 "일본공산당 중앙 재건 준비회"로 전환하여 1936년 12월까지 활동했다.

한편, 위장 전향으로 출옥한 카스가 쇼지로는 하라 젠고・타케나카 고자부로 등과 합류하여 1937년 12월 "일본공산주의자단"을 결성했다. 이들은 타키가와 사건 이후 결성된 학생 그룹 "경도대 쾰른"과 연계하여 1938년 9월까지 당 재건을 추진했으며, 이는 노마 히로시의 소설 『어두운 그림』의 배경이 되었다.

그 외에도 오카베 타카시・하세가와 히로시・이토 리츠 등이 중심이 된 "당 재건 준비위원회"(1937년 11월 - 1940년 6월), 카스가 쇼이치 등의 "게이힌 지방당 재건그룹"(? - 1940년 5월), "한신지방당 재건그룹"(? - 1940년 9월) 등이 있었으나, 모두 당 중앙을 재건하기 전에 관련자들이 검거되어 괴멸되었다.

결국 이러한 당 중앙 재건 움직임들은 1940년 중반까지 산발적으로 이어졌으나 모두 탄압으로 종식되었고, 일본공산당 조직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합법화될 때까지 재건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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