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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토 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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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토 신이치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주니치 드래건스, 롯데 오리온스, 다이요 웨일스,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등에서 선수로 활동했으며,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에서는 선수 겸 감독을 역임했다. 1964년과 1965년, 1971년에 수위 타자를 차지했으며, 베스트 나인 6회, 올스타전 MVP 2회를 수상했다. 1975년에는 구계 최초로 전 구단 상대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해설가, 야구 학교 설립, 사회인 야구팀 감독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2010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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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토 신이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에토 신이치 1959년 모습
중일 시절 (1959년)
출생일1937년 10월 6일
출생지일본 구마모토현 야마가시
사망일2008년 2월 28일
사망지일본 도쿄도
신장178
체중80
포지션외야수, 1루수, 포수
투구
타석
프로 입단 연도1959년
첫 출장1959년 4월 11일
마지막 경기1976년 8월 14일
선수 경력
아마추어구마모토현립 구마모토 상업고등학교
닛테쓰 광업
일본 야구 체육학교 천성 야구 클럽
프로주니치 드래건스 (1959년 ~ 1969년)
롯데 오리온스 (1970년 ~ 1971년, 1976년)
다이요 웨일스 (1972년 ~ 1974년)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1975년)
감독 경력
기록
타율.287
홈런367
안타2,057
타점1,189
수상
베스트 나인5회 수상
센트럴 리그 수위 타자2회 수상
명예의 전당
종류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연도2010년

2. 선수 경력

닛테쓰 광업

주니치 드래곤스(1959년 ~ 1969년)

롯데 오리온스(1970년 ~ 1971년)

다이요 웨일스(1972년 ~ 1974년)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1975년)

롯데 오리온스(1976년)

연도소속경기 수타석 수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루타 수타점도루도루자희생 번트희생 플라이볼넷고의 4구사구삼진병살타타율출루율장타율OPS
1959년주니치1305294955213919315209841312042753589.281.319.422.742
1960년130474429481081921417361711043655498.252.314.403.718
1961년130540480501281712020777484846624810.267.328.431.760
1962년13356249374142130232246144156053614.288.365.454.820
1963년1405835107214826025249701270561137509.290.370.488.859
1964년140527468571512102123572510647664313.323.387.502.889
1965년1295294437514922229262746302811833613.336.440.5911.032
1966년102413364511171612621391110243154309.321.397.585.982
1967년132553481851332013425778660464144499.277.363.534.898
1968년131535487801472913628693730240565912.302.361.587.948
1969년119497436511222022522184130651945210.280.356.507.863
1970년롯데7218114621424011793111033032236.288.409.541.950
1971년11444638957131812521691310649524115.337.408.555.963
1972년다이요103309276376990181325100022932358.250.324.478.802
1973년11140536530103701515544230138513320.282.351.425.775
1974년111403378341101101616967300124103013.291.333.447.780
1975년다이헤이요883243022869111810636210217033112.228.275.351.626
1976년롯데692372142249206692412041801246.229.287.322.609
통산 : 18년20848047715692420572741536734621189786756776111858752186.287.358.484.841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2. 1. 프로 입단 전

에토 신이치는 북큐슈에서 태어났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집단 피난으로 여러 지역을 전전했다. 어린 시절부터 신문 배달, 아이스캔디 판매 등으로 가계를 도왔다.[3] 야하타 제철에서 외야수를 맡았던 아버지에게 야구를 배워 포수가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의 고향인 야마가로 이사했고, 중학교 진학 후부터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하여 4번 타자 겸 포수로 현 대회에 출전하는 등 활약했다.

중학교 졸업 후 구마모토 상업고등학교에 진학, 1학년 가을부터 주전으로 팀을 이끌었다. 3학년 때 여름 고시엔 현 예선에서 사이온지 아키오가 있던 구마모토 공업고등학교에 패하며 고시엔 진출에는 실패했다.

1956년 고등학교 졸업 후, 에토는 야구로 성공하고자 했으나 취업 자리가 없었다.[6] 그래서 닛테츠 후타세의 노비토 와타루 감독을 찾아갔다.[6] 노비토는 에토의 투지와 좋은 체격을 평가하여,[7] 임시 고용 형태로 채용을 제안했고, 에토는 테스트 입단에 성공했다.[6] 입사 후에는 매일 장시간 육체 노동을 한 뒤 연습에 참가했다. 노비토 감독의 혹독한 지도와 훈련을 견뎌냈고, 훗날 "노비토 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여기에 없었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8] 에토는 입사 직후 오른쪽으로만 타구가 나왔지만, 노비토의 지도로 스윙을 교정했다.(팀 동료 고바 타케시에 의함)[9] 1956년부터 1958년까지 도시 대항에 3년 연속 출전했다. 1957년 대회 1회전에서 가네보 카네카론을 상대로 결승 홈런을 쳤고, 팀 동료 무라카미 슌스케와 함께 대회 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는데 기여했다. 1958년 대회에서는 결승에 진출했지만, 일본 석유에 패했다. 같은 해 산업 대항에서는 일본 맥주를 꺾고 팀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10]

2. 2.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1959~1969)

에토 신이치는 1959년 강견(强肩)과 강타(强打)의 포수로 주니치 드래곤스에 입단했다.[11] 계약금은 500만 엔, 월급은 10만 엔이었다. 당시 주니치는 요시자와 다케오가 주전 포수였기에, 스기시타 시게루 감독은 에토를 1루수로 컨버트하고, 최종적으로 외야를 맡게 할 구상도 있었다.[12]

1959년 4월 15일 요미우리전(고라쿠엔)에서 이토 요시아키를 상대로 프로 첫 홈런을 날렸다.[13] 스기시타 감독은 에토를 130경기에 모두 기용했고,[12] 125경기는 1루수로 출전했다. 신인임에도 모리 토루 다음인 5번 타자로 활약하며,[12] 타율 .281, 15홈런, 84타점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신인왕은 놓쳤다.

1961년에는 외야수를 겸하며, 첫 20홈런을 달성하여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었다. 1962년에는 요시자와의 이적으로 다시 포수로 돌아가고, 모리 토루의 이적으로 4번 타자도 맡게 되었지만, 7월 10일 요미우리전(주니치)에서는 판정에 불만을 품고 심판을 폭행했다.

1963년부터 좌익수로 활약하며 타율 .290, 25홈런, 70타점으로 두 번째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6월 18일 고쿠테츠전(고라쿠엔)에서는 가네다 마사이치를 상대로 만루 홈런을 쳐 역전승을 이끌었다.[13] 8월 25일 요미우리전(주니치)에서는 우천 콜드 게임 (6-6 무승부)에 항의하여, 경기 종료 후에도 홀로 좌익수 수비 위치에 서 있기도 했다.

1964년과 1965년에는 2년 연속 수위 타자를 획득했다. 1964년에는 오 사다하루의 3관왕을 저지하고 타율 .323으로 첫 타격 타이틀을 획득했다. 1965년에는 4월에 근육 파열로 연속 출장 기록이 809경기에서 멈추었지만, 2년 연속 수위 타자에 오르며 오 사다하루의 3관왕을 다시 저지했다. ON포가 모두 현역으로 활약했던 1959년부터 1974년까지의 16년간 세 리그에서 2년 연속 타격 타이틀을 획득한 ON 이외의 선수는 에토뿐이다.

1967년과 1968년에는 34, 36홈런으로 장타력도 발휘했다. 1969년 새로 감독으로 취임한 미즈하라 시게루에게 항의한 것이 분노를 사,[14] 시즌 오프에 트레이드를 통보받았다. 주니치 팬들은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구단 측은 미즈하라의 의지를 우선했다.[15] 에토는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미즈하라의 자택을 방문하여 잔류를 호소했지만,[16]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2월 26일에는 임의 은퇴로 내몰리고 말았다.[17]

2. 3. 롯데 오리온스 시절 (1970~1971)

1970년, 노인(濃人)이 롯데 오리온스의 감독으로 취임하자, 에토를 데려오기 위해 주니치와 협상했다. 6월 4일에 형식상 가와바타 가즈토와의 트레이드 형식으로 에토는 현역 복귀를 이루었다.[17] 6월 17일 대 도에이전에서 대타로 첫 출전했고, 7월부터는 선발로도 기용되었다. 8월 15일 니시테츠전 (헤이와다이)에서는, 2회 초에 좌익수석 최상단에 꽂히는 선제 솔로 홈런, 7회 초에는 또한 좌익수로 향하는 쐐기 솔로 홈런을 날렸다.[18] 중도 합류했음에도 시즌에서 11홈런, 31타점을 기록하며, 10년 만의 롯데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제5전 (도쿄)에서 다카하시 가즈미로부터 선제 1호 2점 홈런을 날렸다.

1971년에는 에노모토 기하치를 대신해 1루수로 정착하여, 개막부터 4번 타자로 기용되어 3번째 수위 타자를 획득, 사상 최초의 센트럴・퍼시픽 양 리그 수위 타자가 되었다.[19] 이는 2011년에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기록할 때까지, 40년 동안 에토만의 기록이었다.[20] 자신의 생일인 10월 6일에 열린 시즌 최종전 난카이전(도쿄)에서 수위 타자가 확정되었지만, 다음 날 7일에 구단주 나카무라 나가요시로부터 다이요로의 트레이드를 통고받았다.[19] 당초 롯데 측이 에토・나리타 후미오 2명과 히라마츠 마사지와의 트레이드를 제안했지만 다이요 측에서 거절당하여, 에토와 노무라 오사무의 1대1 교환이라는 형태로 협상이 성립되었다.[19] 시즌 도중에 노인이 포기 경기를 일으켜 전반전에서 2군 감독으로 강등(시즌 종료 후 스카우트로 전출), 후반전부터 후임으로 수비・주루를 중시하는 2군 감독 오사와 게이지가 승격(1군・2군 감독을 교체)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트레이드였다.[3]

2. 4. 다이요 웨일스 시절 (1972~1974)

이적 후에는 좌익수로서 시핀, 마츠바라 마코토와 클린업 트리오를 구성하여 중심 타자로서 실적을 남겼지만, 투수진의 약세로 팀은 3년 연속 5위로 끝났다.[18]

1972년 8월 6일의 야쿠르트전 (가와사키)에서는 스트라이크 판정에 격앙하여 주심에게 발길질을 여러 번 하여 퇴장당했다.[18] 1973년 6월 28일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전(가와사키)에서는 8회말 1사에서 유격수 우에다 타케시의 실책으로 출루한 시핀에 이어, 에토가 호리우치 츠네오의 바깥쪽 스트레이트를 받아쳐 백스크린으로 넘기는 2점 홈런으로 역전했다.[18] 그 후 야마시타 리츠오가 막아내 3-2로 승리했으며, 야마시타는 약 1년 만의 승리를 거두었다.[18] 역전 2점 홈런을 친 에토는 홈인 직전에 벤치 앞에서 양손과 한쪽 다리를 들고 껑충 뛰는 특유의 포즈를 선보였고, 경기 후 인터뷰에서 "저런 상황에서는 감을 잡을 수 없어요. 그저 무심코 쳤어요. 헛치지 않고 중견수 방향으로 배트를 밀어내듯이 휘둘렀더니, 치는 순간 들어갈 줄 알았어요"라고 말했다.[18] 백스크린에 들어가는 홈런에는 상금 30만 엔과 1년 치의 청량 음료가 주어졌다.[18]

2. 5.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시절 (1975)

1975년에 가와하라 아키라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플레잉 매니저로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로 이적했다.[21] 이는 시즌 종료 후 감독으로 승격한 아키야마 노보루가 "다루기 어려운 선수"라며 방출을 결정하자, 에토가 구마모토 상업고 출신으로 후쿠오카의 논프로 日鉄二瀬에 있었던 지연을 고려하여 "태평양이라면 받아줄 수 있지 않을까"라며 당시 후쿠오카를 연고로 하던 태평양에 제안한 것이 발단이었다.[21] 한편 태평양 측에서도 이나오 가즈히사의 후임으로 오사와가 9할 9푼 결정된 상황에서[22] "과거 니시테츠와 같은 거친 야구"를 하겠다며 나카무라 나가요시 구단주가 돌연 에토를 감독으로 낙점한 사정이 있었고, 감독 겸임을 조건으로 영입하게 되었다. 구단 운영 회사인 후쿠오카 야구의 경영난으로 인해, 제공된 숙소는 6畳(다다미 6장)짜리 아파트였지만, "나는 야구만 할 수 있으면 된다"며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1974년 11월에 에토를 내보내는 다이요는 나카베 겐키치 구단주가 동석한 기자 회견을 열고, 트레이드라기보다는 태평양 감독 취임을 알리는 내용으로, 새로운 무대에 대한 포부를 길게 이야기했다. 태평양 역시 나카무라 구단주가 동석하여 후쿠오카 시내 호텔에서 기자 회견을 열었지만, 지역 기자 클럽이 "후쿠오카에서 먼저 신임 감독 발표를 하고, 그 다음에 도쿄에서 하겠다는 것이라면 이해하겠지만, 먼저 도쿄에서 발표하다니"라며 격분하여, 나카무라에게 항의문을 제출하고 기자 회견을 보이콧했다.[21]

에토는 "잘리고 나서야 모두 후회한다"고, 한때 자신도 실업가를 목표로 유니폼을 벗었던 경험에서, 히로시마에서 자유 계약이 된 구니사다 야스히로의 후회하는 모습을 보고, 1975년 봄 일찍 테스트를 실시하여 채용했다. 에토는 야쿠르트의 도조 후미히로에게도 "함께 돌봐줄까"라고 말했고, 도조와 구니사다는 "기회를 얻은 우리는 정말 행운아다"라고 입을 모았다. 이 두 명 외에도 "다시 야구를 하고 싶다"는 자유 계약 선수들을 모아 테스트를 실시했고, 도조는 불합격했지만, 구니사다 외 기하라 요시타카・니시자와 마사지・마쓰바야시 시게루가 히로시마에서 태평양으로 이적했다.

또한, 예전에 운영하던 요리집에 자주 술을 마시러 오던 인연으로 교류가 있던 요네카와 야스오를 1군 투수 코치로 초빙[23]했고, 다이요에서는 타격 투수 겸 통역인 고가 히데히코를 데려와, 고가는 1군 투수 코치 보좌로 취임했다.

재임 중에는 유니폼 뒷주머니에 배트를 꽂는 스타일로 주목을 받았고, 투지를 드러내는 플레이와 수뇌진에게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하는 에토는, 투수 출신으로 선수를 장기적인 안목으로 육성하려 했던 전임 이나오의 색깔을 일소하기 위해, 강한 타선을 중심으로 타격에서 승리하는 야구를 표방했다.[24] 트레이드로 닛폰햄에서 시라이시 겐텐, 킨테츠에서 도이 마사히로의 슬러거를 영입했다. 이 시즌의 라이온즈 타선에는 산적 타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개성이 강한 선수들로 구성된 팀은 화끈하게 타격에서 이기는 경기가 있는가 하면, 타격이 부진할 때는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대략적인 야구를 펼쳤지만, 부진한 라이온즈의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팬들에게 안겨주었다.[24]

6월 1일 롯데전(가와사키)에서 미즈타니 노리히로로부터 구계 최초의 전 구단 상대 홈런을, 9월 6일 킨테츠전(후지이데라)에서는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다음날인 7일자 스포니치 도쿄판 2면의 가장 하단에 가로선으로 둘러싸인 기사는 10행 정도였고, 에토는 "기록보다 승리하면 팀이 5할이었다. 이기고 싶었다"라고 한마디만 남겼다.[24] 개성 중시는 개인 성적에도 나타나, 히가시 오사무가 최다승, 이적생 도이가 홈런왕, 시라이시가 수위 타자를 획득했다. 타이틀을 얻게 하기 위해, 시라이시나 도이의 타순을 바꾸는 것은 물론, 결장시키기도 했다. 히가시에 관해서는 연투를 시키고, 승리할 수 있는 경기는 구원 등판시켜 승수를 쌓았다. "타이틀을 얻으면 선수로서 책임감이 싹튼다. 그것이 팀 강화로 이어진다"는 것이 에토의 지론이었다.[24] 팀 성적은 전기 2위, 후기 4위로 통산 3위였고, 구단이 후쿠오카 야구의 경영으로 바뀐 후 첫 A클래스 진입이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도이는 "에토 씨는 문단속 같은 건 말 안 하고, 편한 팀이었어요"라고 말했다.[25] 에토는 "내년에도 산적 야구로 맹활약하여 페넌트에 도전하겠다"며 의욕을 보였지만, 타격 3개 부문에서 2명, 최다승과 총 3명이 주요 타이틀을 3명이나 획득했고, 니시테츠에서 세이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태평양・크라운 시대에서 유일하게 A클래스에 진입했지만 빚이 4였고, 에토의 지휘에 프런트도 "우승도 못했는데 개인 타이틀만 잔뜩 챙겨주고... 계약 갱신이 끔찍한 경영자 울리는 감독이네"라며 얼굴을 찡그렸다. 빚이 늘어나고, 급여가 늦어지기도 했던 당시 태평양에게 에토의 산적 군단은 골칫덩어리가 되어 있었다.[24]

태평양은 앞서 언급한 오사와에게 다시 제안을 했지만, 오사와는 닛폰햄 감독 취임이 결정되었다. 그래서 일단 에토의 유임이 결정되었지만, 같은 해 12월에 프런트는 레오 드로셰를 초빙하는 구상으로 전환하면서 감독을 해임했다. 드로셰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얻자, 에토는 타격 코치 겸 선수로 강등되었지만, "역시 선수 쪽이 나에게 맞다"며 연말에 태평양을 퇴단했다.[24] 에토의 퇴임에 따라 요네카와도 1년 만에 코치를 사임[26]。 그 후, 결국 드로셰는 건강 악화로 인해 일본에 오지 못하고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후임 감독에는 헤드 코치인 키토 마사카즈가 승격되었다.

재임 중에 다케노우치 마사시와 벤치 뒤에서 말다툼을 벌이는 등, 팀 내에 단결력은 생기지 않았다.[27] 다케노우치는 후에 "다음 감독은 에토 씨였지만, 겉보기와는 달랐어. 호쾌한 사람 같잖아? 그게 섬세한 사람이고, 소심하고. 이 사람이랑 나, 한 번 싸운 적이 있어. 그게, 감독 쪽에서 사과해 왔어. 보통 같으면, 선수 입장에서 보면 잘려도 할 수 없는 싸움이었는데. 그런 의미에서는, 속이 깊었던 걸지도 몰라."[28]라고 회상했다.

봄의 오픈전에서 나가사키현 이사하야에 갔을 때 젊은 선수들을 모아 타격 이론을 강의했고, 오타 다쿠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에토는 "너, 필요 없어"라며 쓰지 않았다.[29]

괄괄하고 너무나 열정적인 성격으로, 경기에서 선수가 약간의 실수를 범해도 코치를 불러 발로 차기도 했다. 이하라 하루키는 캠프에서 오른쪽 무릎을 다쳤지만 참고 플레이했지만, 한계에 도달했고, 에토의 스타일과 맞지 않는 점도 있어, 구단 상층부에 "트레이드해 주세요"라고 직소했다.[30]

2. 6. 롯데 오리온스 복귀 및 은퇴 (1976)

1976년, 가네다 마사이치 감독은 "프로로서의 삶을 젊은 선수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며 에토 신이치의 롯데 복귀를 권유했다.[31] 가네다는 기자에게 영입 이유를 묻자 "에토에게 남자의 꽃길을 장식하게 해 주겠다"고 답했다.[32] 에토는 아내와 자식을 하카타에 남겨두고 다다미 4장의 합숙소 생활을 선택하고, 술도 끊었으며, 맹렬한 달리기 등으로 13kg 감량에 성공했다.[32] 캠프지 가고시마의 텐몬칸에 있는 살무사 엑기스 라면을 먹고 참았으며[31], 짐 라피버도 먹고 스태미나를 키웠다.[32]

페넌트레이스에 돌입하자, 4월 4일 니혼햄전(고라쿠엔)에서 다카하시를 상대로 선제 1호 2점 홈런을 날리며 팀의 첫 승리에 기여했다. 다음 날 5일에는 노무라를 상대로 역전 2호 솔로 홈런, 14일 긴테츠전(고라쿠엔)에서는 이모토 다카시를 상대로 결승 3호 솔로 홈런을 날렸다. 17일 타이헤이요전(미야기)에서는 1회에 세키모토 시지를 상대로 선제타를 날리는 등, 롯데가 4월에 거둔 11승 중 5승은 에토의 활약 덕분이었다. 5월에는 타율이 3할을 넘었고, 가네다도 "예상 이상이다. 가지고 있는 기술이 다르다. 에토 님 덕분이다"라며 기뻐했지만, 6월이 되자 오른쪽 팔꿈치의 고질적인 부상으로 성적이 급강하했다.[31] 치료를 받았지만 나아지지 않아, 후기가 시작되자 거의 출전 기회가 없어졌다.[31] 7월 7일 타이헤이요전(헤와다이)에서 이시이 시게오를 상대로 마지막 홈런, 8월 13일 타이헤이요전(헤와다이)에서 마지막 안타, 다음 날 14일이 현역 마지막 출전이 되었다.

시즌 도중에 가네다가 코치 보좌 직함을 붙이려고 했지만, 에토는 "나는 코치를 하기 전에 미국의 본고장에서 타격술을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라고 말하며 거절하고[32][33]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

1975년 가와하라 아키라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플레잉 매니저로 태평양 클럽 라이온즈로 이적했다.[21] 이는 시즌 종료 후 감독으로 승격한 아키야마 노보루가 "다루기 어려운 선수"라며 방출을 결정하자, 에토가 구마모토 상업고 출신으로 후쿠오카의 논프로 日鉄二瀬에 있었던 지연을 고려하여 "태평양이라면 받아줄 수 있지 않을까"라며 당시 후쿠오카를 연고로 하던 태평양에 제안한 것이 발단이었다.[21] 한편 태평양 측에서도 이나오 가즈히사의 후임으로 오사와가 9할 9푼 결정된 상황에서[22] "과거 니시테츠와 같은 거친 야구"를 하겠다며 나카무라 나가요시 구단주가 돌연 에토를 감독으로 낙점한 사정이 있었고, 감독 겸임을 조건으로 영입하게 되었다.

구단 운영 회사인 후쿠오카 야구의 경영난으로 인해, 제공된 숙소는 6畳(다다미 6장)짜리 아파트였지만, "나는 야구만 할 수 있으면 된다"며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1974년 11월에 에토를 내보내는 다이요는 나카베 겐키치 구단주가 동석한 기자 회견을 열고, 트레이드라기보다는 태평양 감독 취임을 알리는 내용으로, 새로운 무대에 대한 포부를 길게 이야기했다. 태평양 역시 나카무라 구단주가 동석하여 후쿠오카 시내 호텔에서 기자 회견을 열었지만, 지역 기자 클럽이 "후쿠오카에서 먼저 신임 감독 발표를 하고, 그 다음에 도쿄에서 하겠다는 것이라면 이해하겠지만, 먼저 도쿄에서 발표하다니"라며 격분하여, 나카무라에게 항의문을 제출하고 기자 회견을 보이콧했다.[21]

에토는 "잘리고 나서야 모두 후회한다"고, 한때 자신도 실업가를 목표로 유니폼을 벗었던 경험에서, 히로시마에서 자유 계약이 된 구니사다 야스히로의 후회하는 모습을 보고, 1975년 봄 일찍 테스트를 실시하여 채용했다. 에토는 야쿠르트의 도조 후미히로에게도 "함께 돌봐줄까"라고 말했고, 도조와 구니사다는 "기회를 얻은 우리는 정말 행운아다"라고 입을 모았다. 이 두 명 외에도 "다시 야구를 하고 싶다"는 자유 계약 선수들을 모아 테스트를 실시했고, 도조는 불합격했지만, 기하라 요시타카, 니시자와 마사지, 마쓰바야시 시게루가 히로시마에서 태평양으로 이적했다.

또한, 예전에 운영하던 요리집에 자주 술을 마시러 오던 인연으로 교류가 있던 요네카와 야스오를 1군 투수 코치로 초빙[23]했고, 다이요에서는 타격 투수 겸 통역인 고가 히데히코를 데려와, 고가는 1군 투수 코치 보좌로 취임했다.

재임 중에는 유니폼 뒷주머니에 배트를 꽂는 스타일로 주목을 받았고, 투지를 드러내는 플레이와 수뇌진에게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하는 에토는, 투수 출신으로 선수를 장기적인 안목으로 육성하려 했던 전임 이나오의 색깔을 일소하기 위해, 강한 타선을 중심으로 타격에서 승리하는 야구를 표방[24]했다. 트레이드로 닛폰햄에서 시라이시 겐텐, 킨테츠에서 도이 마사히로의 슬러거를 영입했다. 이 시즌의 라이온즈 타선에는 산적 타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개성이 강한 선수들로 구성된 팀은 화끈하게 타격에서 이기는 경기가 있는가 하면, 타격이 부진할 때는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대략적인 야구를 펼쳤지만, 부진한 라이온즈의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팬들에게 안겨주었다.[24] 6월 1일 롯데전(가와사키)에서 미즈타니 노리히로로부터 구계 최초의 전 구단 상대 홈런을, 9월 6일 킨테츠전(후지이데라)에서는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다음날인 7일자 스포니치 도쿄판 2면의 가장 하단에 가로선으로 둘러싸인 기사는 10행 정도였고, 에토는 "기록보다 승리하면 팀이 5할이었다. 이기고 싶었다"라고 한마디만 남겼다.[24]

개성 중시는 개인 성적에도 나타나, 히가시 오사무가 최다승, 이적생 도이가 홈런왕, 시라이시가 수위 타자를 획득했다. 타이틀을 얻게 하기 위해, 시라이시나 도이의 타순을 바꾸는 것은 물론, 결장시키기도 했다. 히가시 오사무에 관해서는 연투를 시키고, 승리할 수 있는 경기는 구원 등판시켜 승수를 쌓았다. "타이틀을 얻으면 선수로서 책임감이 싹튼다. 그것이 팀 강화로 이어진다"는 것이 에토의 지론이었다.[24] 팀 성적은 전기 2위, 후기 4위로 통산 3위였고, 구단이 후쿠오카 야구의 경영으로 바뀐 후 첫 A클래스 진입이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도이는 "에토 씨는 문단속 같은 건 말 안 하고, 편한 팀이었어요"라고 말했다.[25] 에토는 "내년에도 산적 야구로 맹활약하여 페넌트에 도전하겠다"며 의욕을 보였지만, 타격 3개 부문에서 2명, 최다승과 총 3명이 주요 타이틀을 3명이나 획득했고, 니시테츠에서 세이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태평양・크라운 시대에서 유일하게 A클래스에 진입했지만 빚이 4였고, 에토의 지휘에 프런트도 "우승도 못했는데 개인 타이틀만 잔뜩 챙겨주고... 계약 갱신이 끔찍한 경영자 울리는 감독이네"라며 얼굴을 찡그렸다. 빚이 늘어나고, 급여가 늦어지기도 했던 당시 태평양에게 에토의 산적 군단은 골칫덩어리가 되어 있었다.[24]

태평양은 앞서 언급한 오사와에게 다시 제안을 했지만, 오사와는 닛폰햄 감독 취임이 결정되었다. 그래서 일단 에토의 유임이 결정되었지만, 같은 해 12월에 프런트는 레오 드로셰를 초빙하는 구상으로 전환하면서 감독을 해임했다. 드로셰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얻자, 에토는 타격 코치 겸 선수로 강등되었지만, "역시 선수 쪽이 나에게 맞다"며 연말에 태평양을 퇴단했다.[24] 에토의 퇴임에 따라 요네카와도 1년 만에 코치를 사임[26]。그 후, 결국 드로셰는 건강 악화로 인해 일본에 오지 못하고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후임 감독에는 헤드 코치인 키토 마사카즈가 승격되었다.

재임 중에 다케노우치 마사시와 벤치 뒤에서 말다툼을 벌이는 등, 팀 내에 단결력은 생기지 않았다.[27] 다케노우치는 후에 "다음 감독은 에토 씨였지만, 겉보기와는 달랐어. 호쾌한 사람 같잖아? 그게 섬세한 사람이고, 소심하고. 이 사람이랑 나, 한 번 싸운 적이 있어. 그게, 감독 쪽에서 사과해 왔어. 보통 같으면, 선수 입장에서 보면 잘려도 할 수 없는 싸움이었는데. 그런 의미에서는, 속이 깊었던 걸지도 몰라."[28]라고 회상했다.

봄의 오픈전에서 나가사키현이사하야에 갔을 때 젊은 선수들을 모아 타격 이론을 강의했고, 오타 다쿠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에토는 "너, 필요 없어"라며 쓰지 않았다.[29]

괄괄하고 너무나 열정적인 성격으로, 경기에서 선수가 약간의 실수를 범해도 코치를 불러 발로 차기도 했다. 이하라 하루키는 캠프에서 오른쪽 무릎을 다쳤지만 참고 플레이했지만, 한계에 도달했고, 에토의 스타일과 맞지 않는 점도 있어, 구단 상층부에 "트레이드해 주세요"라고 직소했다.[30]

연도소속순위경기승리패전무승부승률경기 차팀 홈런팀 타율팀 방어율나이
1975년다이헤이요3위130586210.4833위(2위·4위)135.2613.7338세


  • 1975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
  • 1973년부터 1982년까지는 전·후기 제로 종합 순위와 전·후기의 순위를 표시

3. 1.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감독 (1975)

1975년 가와하라 아키라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플레잉 매니저로 태평양 클럽 라이온즈로 이적했다.[21] 이는 시즌 종료 후 감독으로 승격한 아키야마 노보루가 "다루기 어려운 선수"라며 방출을 결정하자, 에토가 구마모토 상업고 출신으로 후쿠오카의 논프로 日鉄二瀬에 있었던 지연을 고려하여 "태평양이라면 받아줄 수 있지 않을까"라며 당시 후쿠오카를 연고로 하던 태평양에 제안한 것이 발단이었다.[21] 한편 태평양 측에서도 이나오 가즈히사의 후임으로 오사와가 9할 9푼 결정된 상황에서[22] "과거 니시테츠와 같은 거친 야구"를 하겠다며 나카무라 나가요시 구단주가 돌연 에토를 감독으로 낙점한 사정이 있었고, 감독 겸임을 조건으로 영입하게 되었다.

구단 운영 회사인 후쿠오카 야구의 경영난으로 인해, 제공된 숙소는 6畳(다다미 6장)짜리 아파트였지만, "나는 야구만 할 수 있으면 된다"며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1974년 11월에 에토를 내보내는 다이요는 나카베 겐키치 구단주가 동석한 기자 회견을 열고, 트레이드라기보다는 태평양 감독 취임을 알리는 내용으로, 새로운 무대에 대한 포부를 길게 이야기했다. 태평양 역시 나카무라 구단주가 동석하여 후쿠오카 시내 호텔에서 기자 회견을 열었지만, 지역 기자 클럽이 "후쿠오카에서 먼저 신임 감독 발표를 하고, 그 다음에 도쿄에서 하겠다는 것이라면 이해하겠지만, 먼저 도쿄에서 발표하다니"라며 격분하여, 나카무라에게 항의문을 제출하고 기자 회견을 보이콧했다.[21]

에토는 "잘리고 나서야 모두 후회한다"고, 한때 자신도 실업가를 목표로 유니폼을 벗었던 경험에서, 히로시마에서 자유 계약이 된 구니사다 야스히로의 후회하는 모습을 보고, 1975년 봄 일찍 테스트를 실시하여 채용했다. 에토는 야쿠르트의 도조 후미히로에게도 "함께 돌봐줄까"라고 말했고, 도조와 구니사다는 "기회를 얻은 우리는 정말 행운아다"라고 입을 모았다. 이 두 명 외에도 "다시 야구를 하고 싶다"는 자유 계약 선수들을 모아 테스트를 실시했고, 도조는 불합격했지만, 기하라 요시타카, 니시자와 마사지, 마쓰바야시 시게루가 히로시마에서 태평양으로 이적했다.

또한, 예전에 운영하던 요리집에 자주 술을 마시러 오던 인연으로 교류가 있던 요네카와 야스오를 1군 투수 코치로 초빙[23]했고, 다이요에서는 타격 투수 겸 통역인 고가 히데히코를 데려와, 고가는 1군 투수 코치 보좌로 취임했다.

재임 중에는 유니폼 뒷주머니에 배트를 꽂는 스타일로 주목을 받았고, 투지를 드러내는 플레이와 수뇌진에게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하는 에토는, 투수 출신으로 선수를 장기적인 안목으로 육성하려 했던 전임 이나오의 색깔을 일소하기 위해, 강한 타선을 중심으로 타격에서 승리하는 야구를 표방[24]했다. 트레이드로 닛폰햄에서 시라이시 겐텐, 킨테츠에서 도이 마사히로의 슬러거를 영입했다. 이 시즌의 라이온즈 타선에는 산적 타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개성이 강한 선수들로 구성된 팀은 화끈하게 타격에서 이기는 경기가 있는가 하면, 타격이 부진할 때는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대략적인 야구를 펼쳤지만, 부진한 라이온즈의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팬들에게 안겨주었다.[24] 6월 1일 롯데전(가와사키)에서 미즈타니 노리히로로부터 구계 최초의 전 구단 상대 홈런을, 9월 6일 킨테츠전(후지이데라)에서는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다음날인 7일자 스포니치 도쿄판 2면의 가장 하단에 가로선으로 둘러싸인 기사는 10행 정도였고, 에토는 "기록보다 승리하면 팀이 5할이었다. 이기고 싶었다"라고 한마디만 남겼다.[24]

개성 중시는 개인 성적에도 나타나, 히가시 오사무가 최다승, 이적생 도이가 홈런왕, 시라이시가 수위 타자를 획득했다. 타이틀을 얻게 하기 위해, 시라이시나 도이의 타순을 바꾸는 것은 물론, 결장시키기도 했다. 히가시 오사무에 관해서는 연투를 시키고, 승리할 수 있는 경기는 구원 등판시켜 승수를 쌓았다. "타이틀을 얻으면 선수로서 책임감이 싹튼다. 그것이 팀 강화로 이어진다"는 것이 에토의 지론이었다.[24] 팀 성적은 전기 2위, 후기 4위로 통산 3위였고, 구단이 후쿠오카 야구의 경영으로 바뀐 후 첫 A클래스 진입이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도이는 "에토 씨는 문단속 같은 건 말 안 하고, 편한 팀이었어요"라고 말했다.[25] 에토는 "내년에도 산적 야구로 맹활약하여 페넌트에 도전하겠다"며 의욕을 보였지만, 타격 3개 부문에서 2명, 최다승과 총 3명이 주요 타이틀을 3명이나 획득했고, 니시테츠에서 세이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태평양・크라운 시대에서 유일하게 A클래스에 진입했지만 빚이 4였고, 에토의 지휘에 프런트도 "우승도 못했는데 개인 타이틀만 잔뜩 챙겨주고... 계약 갱신이 끔찍한 경영자 울리는 감독이네"라며 얼굴을 찡그렸다. 빚이 늘어나고, 급여가 늦어지기도 했던 당시 태평양에게 에토의 산적 군단은 골칫덩어리가 되어 있었다.[24]

태평양은 앞서 언급한 오사와에게 다시 제안을 했지만, 오사와는 닛폰햄 감독 취임이 결정되었다. 그래서 일단 에토의 유임이 결정되었지만, 같은 해 12월에 프런트는 레오 드로셰를 초빙하는 구상으로 전환하면서 감독을 해임했다. 드로셰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얻자, 에토는 타격 코치 겸 선수로 강등되었지만, "역시 선수 쪽이 나에게 맞다"며 연말에 태평양을 퇴단했다.[24] 에토의 퇴임에 따라 요네카와도 1년 만에 코치를 사임[26]。그 후, 결국 드로셰는 건강 악화로 인해 일본에 오지 못하고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후임 감독에는 헤드 코치인 키토 마사카즈가 승격되었다.

재임 중에 다케노우치 마사시와 벤치 뒤에서 말다툼을 벌이는 등, 팀 내에 단결력은 생기지 않았다.[27] 다케노우치는 후에 "다음 감독은 에토 씨였지만, 겉보기와는 달랐어. 호쾌한 사람 같잖아? 그게 섬세한 사람이고, 소심하고. 이 사람이랑 나, 한 번 싸운 적이 있어. 그게, 감독 쪽에서 사과해 왔어. 보통 같으면, 선수 입장에서 보면 잘려도 할 수 없는 싸움이었는데. 그런 의미에서는, 속이 깊었던 걸지도 몰라."[28]라고 회상했다.

봄의 오픈전에서 나가사키현이사하야에 갔을 때 젊은 선수들을 모아 타격 이론을 강의했고, 오타 다쿠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에토는 "너, 필요 없어"라며 쓰지 않았다.[29]

괄괄하고 너무나 열정적인 성격으로, 경기에서 선수가 약간의 실수를 범해도 코치를 불러 발로 차기도 했다. 이하라 하루키는 캠프에서 오른쪽 무릎을 다쳤지만 참고 플레이했지만, 한계에 도달했고, 에토의 스타일과 맞지 않는 점도 있어, 구단 상층부에 "트레이드해 주세요"라고 직소했다.[30]

연도소속순위경기승리패전무승부승률경기 차팀 홈런팀 타율팀 방어율나이
1975년다이헤이요3위130586210.4833위(2위·4위)135.2613.7338세


  • 1975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
  • 1973년부터 1982년까지는 전·후기 제로 종합 순위와 전·후기의 순위를 표시

4. 은퇴 후 활동

은퇴 후 1977년부터 도쿄 12채널→텔레비전 도쿄 「○요일 나이트→전국 나이트」, 라디오 간토 「딱 맞는 나이트」 해설자를 맡았다.[34] 에토는 "은퇴 후에는 주니치 신문 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방송국과 스폰서와의 교류를 좋아하지 않아 해설자 시절에는 번민했다.[34] "나는 이 일이 싫어"라고 공언했고, "얼마나 사전에 취재해도 무능한 아나운서가 망쳐. 팔고 싶은 선수를 추천해 오지만, 나는 야구에 대해서는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없어"라고 말했다.[34]

이 기간 중 1977년에 영화 『야구광의 시』에 해설자 역으로 출연하여 야구 기술 지도를 담당했고, 소년 야구 지도에도 참여하여, 1978년에는 소년 야구와 풀뿌리 야구를 중심으로 한 야구 잡지 『열구』를 발행했다.[35] 1980년 9월에는 구마모토 니치니치 신문사의 후원으로 구마모토시의 소년 야구 선수 30여 명을 이끌고 브라질 원정을 실시했다.[36][37] 귀국 후, 세계소년야구협회(현재의 소년 연식 야구 국제 교류 협회)의 이사로서 활동했지만,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려 이사직을 사임했다.[36][37]

1985년 4월부터는 시즈오카현다고군아마기유가시마정에 일본 야구 체육 학교(통칭 "에토 주쿠")를 설립했다.[39] 처음에는 아마기유가시마정에 야구장이 건설될 예정이었고, 조렌 폭포 관광 협회의 주도로 야구와 관광을 묶은 볼 파크 여관 등의 착상이 있었다.[34] 에토는 야구 학교 설립과 소년 야구 지도를 통해 폐쇄적인 일본의 육성 상황에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34]

아마기의 구장이 준공되자, 에토는 관광 협회의 협력을 얻어, 영업을 중단할 예정이었던 『린센』이라는 여관을 기숙사로 빌렸다.[34] 이후 합숙소는 "백련료"로 명명되었다. 잡지신문에 "'''일본 야구 체육 학교가 개교합니다!'''"라는 광고를 내어 입교할 선수를 모집했다.[34] 학교법인화를 목표로 했지만, 첫 해에는 학생이 23명밖에 모이지 않아, 신청은 보류되었다.[34] 임의 단체로 남아 있었지만, 1985년 4월 10일에는, 유가시마정의 강당을 빌려, 개교식이 열렸다.[34]

야구 지도는 아마추어 지도자 자격을 취득한 쓰치야 히로미쓰가 맡았으며, 에토는 낡은 야구도를 배제하고 다저스에서 돌아온 쓰치야에게 세계의 선단을 달리는 베이스볼을 배우는 시도였다.[34] 에토는 교장으로서 기숙사나 그라운드에서의 폭력에 의한 지도를 금지하는 것을 철저히 했다.[34]

개교 후 3개월 정도 지난 무렵, 메구로 고등학교럭비부 감독 우메키 쓰네아키를 초빙하여 강의를 열었다.[34] 우메키는 스파르타 지도 효과를 이야기했지만, 질의 응답 시간에 한 학생이 "폭력은 절대 반대입니다. 저는 선배에게 맞아서, 야구에 싫증이 났습니다."라고 말했다.[34] 에토는 자신의 생각이 침투하고 있다는 기쁨을 느꼈다.[34] 에토는 저서에서 "사람들은 우리 학교를 도츠카 요트 스쿨과 종종 혼동한다...우리 학교는 어디까지나 프로의 기술을 추구하는 집단이어야 한다."라고 적고 있다.[34]

학생 23명 중에는, 1988년에 한신에 테스트 입단한 다케미네 조타로[40]와 야구 브라질 대표 투수 다니엘 미사키의 아버지인 마르셀 미사키가 포함되어 있었다.

오전의 좌학 수업에서는, 에토의 인맥을 활용하여, 몇몇 선수나 OB가 강의에 왔고, 에가와 스스무가 강의를 한 후에는, 기숙사의 빨간 전화 앞에 줄이 늘어섰다.[41] 같은 해 말에는 전 축구 일본 대표의 가마모토 구니시게가 강연을 방문했고, 프로 지망 투수와 대결하여 좌익수 펜스를 넘는 홈런을 날렸다.[42][43] 에토는 "당신, 만약 야구를 했다면 오, 나가시마 클래스가 되었을 거야"라고 말했다.[42][43]

1986년부터 동교의 클럽 팀 "'''아마기 베이스볼 클럽'''"이 사회인 클럽 팀으로 등록되어, 공식전 참가가 허가되었다.[41] 학교 자체는 아직 학생 수가 23명으로, 학교법인 신청 기준인 40명에 달하지 못해 임의 단체로 남아 있었다.[41] 경기는, 주오 대학, 고쿠시칸 대학과 같은 도토 대학 야구 리그 팀이나 스리본드, 요크 베니마루 등의 사회인 팀과 치러졌다.[41] 1991년에는 감독으로 오카지마 히로하루를 초빙하고, 클럽 선수권에서 첫 우승을 거둔다.[44] 에토 자신은 아마추어 지도 자격이 없었지만, 야구 연맹의 승인을 받아 고문이라는 입장에서 벤치에 들어갔다.[44] 1992년에는 야오한과 업무 제휴를 맺고, 팀명을 "'''야오한 재팬 경식 야구부'''"로 개칭했다.[44] 1994년에는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첫 출장하여 1회전에서 이스즈 자동차를 꺾었지만, 2회전에서 혼다 기연 스즈카에 패퇴했다.[44] 1995년부터는 감독이 오카지마에서 가토 가즈유키 코치로 교체되었다.[44] 롯데 시절의 맹우였던 키타루 마사아키와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히로오카 다쓰로가 지도를 와주었다.[44] 1997년에는 3년 만에 2번째 도시 대항 야구 대회 출전을 달성한다.[44]

히로오카, 에가와와 같은 사람들이 지도를 와주었고, 특히 히로오카는 빈번하게 방문하여, 내야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투수의 기술에 대해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다.[38] 강의 시간에는 에토 자신이 강단에 서서, 『다저스의 전법』도 필독으로, 『공격 시에는 항상 1, 3루로 하고 계속하라』고 가르쳤다.[38]

"프로는 좋아"라고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해 들려주어 모티베이션을 높였다.[38] 기업 스포츠에서도 실력이 급여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야오한에 호소하여, 선수에게는 연공서열이 아니라 야구의 기량으로 급여가 지불되게 되었다.[38]

도시 대항 종료 후, 1997년 9월에 모회사가 도산하여 활동을 휴지했다.[44] 에토는 팀을 맡아줄 기업을 찾기 위해 분주했고,[44] 1998년부터 암웨이와 업무 제휴를 맺은 뒤 클럽 팀 "'''암웨이・레드삭스'''"로 재출발했다.[44] 암웨이 측은 톱인 에토를 필두로 한 자사 회원 확대를 기대했지만, 에토는 완강하게 거절했고, 네이밍 라이츠 이상의 일은 하지 않았다.[44] 같은 해의 클럽 선수권에서 7년 만에 2번째 우승을 달성했다.[44] 에토는 이전부터 여자 야구의 보급에도 주력을 하고, 클럽 팀으로 바뀐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레드삭스에 여자 선수도 등록하는 것을 생각했다.[44] 아마기 돔에서 열린 셀렉션의 결과, 4명을 선수로 채용하고, 봄부터 경기에 참가시켰다. 마쓰모토는 여자 야구부가 있는 가나자와 학원 대학의 OG였다.[44] 1999년부터는 마루한이 스폰서로 붙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흐지부지되고, 팀은 같은 해를 마지막으로 활동을 종료했다.[44]

강의 시간에는 기술론과 야구론을 철저하게 가르쳤고, 팀이 야오한→암웨이로 바뀌어도 『'''아마기 베이스볼 스쿨'''』이라고 으로 적은 목제 수제 느낌 넘치는 간판은, 기숙사 입구에서 절대 떼어내지 않았다.[38]

기타 활동으로는 1993년부터 기후현 스포츠 소년단 지도원을 종신한 외에, 브라질에서의 야구 지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야구 프로화에도 힘썼다. 2001년에는 자유 연합의 후보로 제19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비례 대표 구에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스루가다이 대학 비상근 강사, 특정 비영리 활동 법인 월드 베이스볼 아카데미 이사장도 역임했다.

미쓰비시 자동차 오카자키를 몇 번 지도한 적도 있었지만, 에토가 어떤 선수에게 타격을 가르치고 있는 바로 옆에서, 선수끼리 다투고 싸움을 시작한 적이 있었다.[45] 에토는 "내가 가르치고 있는 옆에서, 싸움을 하고 있는 녀석이 있다. 이거, 굉장한 팀이네"라고 놀랐다.[45]

2003년 여름 무렵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입원, 이후에는 병상 생활이었다. 2008년 2월 28일 간암으로 인해 도쿄도 내 병원에서 사망했다. 장례식・고별식은 도쿄도 기리가야 사이장에서 열렸다. 장례 위원장은 시부사와 요시카즈 전 세 리그 사무국장. 상주는 삼녀가 맡았다. 2010년, 야구 명예의 전당 입성.

4. 1. 야구 해설가

은퇴 후 1977년부터 도쿄 12채널→텔레비전 도쿄 「○요일 나이트→전국 나이트」, 라디오 간토 「딱 맞는 나이트」 해설자를 맡았다.[34] 에토는 "은퇴 후에는 주니치 신문 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서, 야구를 언어화하여 전달하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34] 하지만 텔레비전 방송국이나 스폰서와의 교류를 좋아하지 않아, 해설자 시절에는 번민했다.[34] 에토는 "나는 이 일이 싫어"라고 공언했고, "얼마나 사전에 취재해서 현장에 임해도 무능한 아나운서가 망쳐. 팔고 싶은 선수를 추천해 오지만, 나는 야구에 대해서는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없어"라고 말한 외에도, "신인 선수의 평가나 순위 예상에 대해 굽혀서까지 코멘트를 내는 것은, 싫어서 견딜 수 없다"라고 친한 사람에게 털어놓았다.[34]

이 기간 중 1977년에 영화 『야구광의 시』에 해설자 역으로 출연하여 야구 기술 지도를 담당한 외에, 소년 야구 지도에도 참여하여, 1978년에는 소년 야구와 풀뿌리 야구를 중심으로 한 야구 잡지 『열구』를 발행했다.[35] 1980년 9월에는 구마모토 니치니치 신문사의 후원을 받아, 구마모토시의 소년 야구 선수 30여 명을 이끌고 브라질 원정을 실시했다.[36][37]

4. 2. 일본 야구 체육 학교 설립

1985년 4월, 에토 신이치는 시즈오카현 아마기유가시마정에 일본 야구 체육 학교(통칭 "에토 주쿠")를 설립했다.[39] "일본 제일의 후지산 아래에서 일본 제일이 되겠다"는 결심으로 설립된 이 학교는,[38] 당초 아마기유가시마정에 야구장이 건설될 예정이었고, 조렌 폭포 관광 협회의 주도로 야구와 관광을 연계한 볼 파크 여관 등의 구상이 있었다.[34] 에토는 야구장 건설 어드바이저로서 태양의 방향과 홈 베이스 위치 등에 대한 조언을 하던 중, 이곳에서 야구 학교를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34]

소년 야구 지도를 하면서 일본 육성 환경의 폐쇄성에 분노를 느꼈던 에토는,[34] 관광 협회의 협력을 얻어 영업 중단 예정이었던 여관 '린센'을 기숙사로 빌리고, '백련료'로 명명했다.[34] 야구장 관리를 통해 사용 허가를 받고, 연습 장소와 숙박 시설을 확보한 후, 잡지와 신문에 "일본 야구 체육 학교가 개교합니다!"라는 광고를 내어 입교할 선수를 모집했다.[34] 학교법인화를 목표로 문부성 OB를 교무부장으로 초빙하여 수업 커리큘럼을 작성하고 신청 서류도 준비했지만, 첫 해에는 학생이 23명밖에 모이지 않아 학교법인 신청은 보류되었다.[34]

1985년 4월 10일, 유가시마정의 강당에서 임의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개교식이 열렸다.[34] 모인 학생들은 15세부터 23세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야구를 계속하고 싶은 사람,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체벌을 견디지 못하고 퇴부한 사람, 폭주족에 들어가 파출소를 습격하여 퇴학당한 사람 등이었다.[34]

야구 지도는 아마추어 지도자 자격을 취득한 쓰치야 히로미쓰가 담당했다.[34] 에토는 낡은 야구도를 배제하고,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돌아온 쓰치야에게 세계 최첨단의 야구를 배우고자 했다.[34] 쓰치야는 기술과 전술을 꼼꼼하게 지도하며, 본고장 미국의 방법을 항상 의식했다.[34] 에토는 교장으로서 기숙사와 그라운드에서의 폭력에 의한 지도를 금지하고, 코치에게도 엄명했다.[34] 학생들에게는 의견이 있으면 분명하게 말하라고 강조했다.[34]

개교 후 3개월쯤 뒤, 메구로 고등학교 럭비부 감독 우메키 쓰네아키를 초빙하여 강의를 열었다.[34] 우메키는 자신의 군대식 지도 효과를 이야기하며 긴장감을 조성했지만, 질의응답 시간에 최고령 학생이 폭력에 반대하며 인간적인 대우를 요구했고, 에토는 자신의 생각이 침투하고 있다는 기쁨을 느꼈다.[34] 에토는 저서에서 도츠카 요트 스쿨과의 혼동을 언급하며, 프로의 기술을 추구하는 집단으로서 야구 기술과 지식을 가르치는 데 힘으로 하는 것은 소용없다고 강조했다.[34]

학생 중에는 1988년 한신에 테스트 입단한 다케미네 조타로,[40] 야구 브라질 대표 투수 다니엘 미사키의 아버지인 마르셀 미사키가 있었다. 오전 좌학 수업에는 에토의 인맥을 활용하여 요미우리 자이언츠 팜 디렉터였던 동생 쇼조, 에가와 스스무 등이 강의를 왔다.[41] 에가와의 강의 후, 기숙사의 빨간 전화 앞에 학생들이 줄을 서서 부모, 친척, 친구들에게 감동을 전했다.[41] 같은 해 말에는 전 축구 일본 대표 가마모토 구니시게가 강연을 왔고, 프로 지망 투수와의 대결에서 좌익수 펜스를 넘는 홈런을 날려 에토를 놀라게 했다.[42][43]

1986년부터는 '아마기 베이스볼 클럽'이 사회인 클럽 팀으로 등록되어 공식전 참가가 허가되었다.[41] 학교 자체는 여전히 학생 수가 23명으로 학교법인 신청 기준에 미달하여 임의 단체였고, 기숙사는 낡은 여관을 전용한 열악한 환경이었다.[41] 주오 대학, 고쿠시칸 대학 등의 도토 대학 야구 리그 팀이나 스리본드, 요크 베니마루 등의 사회인 팀과 경기를 치렀고,[41] 같은 해 전일본 클럽 야구 선수권 대회에 첫 출장했다. 1991년에는 오카지마 히로하루를 감독으로 초빙하여 클럽 선수권에서 첫 우승을 거두었다. 에토는 아마추어 지도 자격이 없었지만, 야구 연맹의 승인을 받아 고문 자격으로 벤치에 들어갔다.[44]

1992년, 야오한과 업무 제휴를 맺고 팀명을 '야오한 재팬 경식 야구부'로 변경했다.[44] 에토는 야오한 오너 일족에게 사명 변경에 따른 광고 비용 대신 야구 팀에 투자할 것을 설득했다.[44] 클럽 등록에서 기업 등록으로 변경하고 선수 강화를 진행하여, 1994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첫 출장하여 1회전에서 이스즈 자동차를 꺾었지만, 2회전에서 혼다 기연 스즈카에 패했다. 톱타자 오니시 다카유키는 에토의 옛 소속팀 주니치에 입단했다.[44] 1995년부터는 감독이 가토 가즈유키 코치로 교체되었고,[44] 같은 해 시즈오카 예선에서 전패했지만, 에토는 롯데 시절 맹우였던 기타루 마사아키와 히로오카 다쓰로의 지도를 받았다.[44] 1997년에는 3년 만에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2번째 출전을 달성했다.[44]

히로오카, 에가와 등이 지도를 왔고, 특히 히로오카는 자주 방문하여 내야수 출신임에도 투수 기술을 가르쳤다.[38] 에토는 『다저스의 전법』을 필독으로, 공격 시에는 항상 1, 3루를 만들고, 수비 시에는 만들지 않도록 가르쳤다.[38] 기업 스포츠에서도 실력이 급여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야오한에 호소, 선수들에게는 연공서열이 아닌 야구 기량으로 급여가 지급되도록 했다.[38]

1997년 도시 대항 종료 후, 모회사가 도산하여 활동이 중단되자,[44] 에토는 팀을 맡아줄 기업을 찾기 위해 분주했다.[44] 1998년부터 암웨이와 업무 제휴를 맺고 클럽 팀 '암웨이 레드삭스'로 재출발했지만, 스폰서료는 연간 500만 엔에 불과했다.[44] 에토는 인간 관계를 비즈니스로 하는 것을 싫어하여 암웨이 측의 회원 확대 기대를 거절했다.[44] 선수들은 휴업 보상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플레이했고,[44] 같은 해 클럽 선수권에서 7년 만에 2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에토는 여자 야구 보급에도 주력하여, 레드삭스에 여자 선수도 등록하는 것을 생각했다.[44] 1999년부터 마루한이 스폰서로 붙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흐지부지되었고, 같은 해를 마지막으로 팀 활동이 종료되었다.[44]

에토는 강의 시간에 기술론과 야구론을 가르쳤고, 팀이 야오한에서 암웨이로 바뀌어도 '아마기 베이스볼 스쿨'이라고 쓴 목제 간판은 떼어내지 않았다.[38]

4. 3. 사회인 야구팀 감독

은퇴 후 1977년부터 텔레비전 도쿄, 라디오 간토에서 해설자를 맡았다.[34] 해설자 시절, 방송국이나 스폰서와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신인 선수 평가 등에 대한 압박감을 토로하기도 했다.[34] 이 기간 동안 영화 야구광의 시에 출연하고, 소년 야구 지도 및 야구 잡지 발행,[35] 브라질 원정 등을 진행했다.[36][37]

1985년 4월, 시즈오카현 아마기유가시마정에 일본 야구 체육 학교(통칭 "에토 주쿠")를 설립했다.[38][39] 이는 "일본 제일의 후지산 아래에서 일본 제일이 되겠다"는 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38] 처음에는 야구장 건설 예정이었으나, 에토는 야구 학교 설립을 결심하게 되었다.[34] 소년 야구 지도를 통해 일본 육성 환경의 폐쇄성에 분노를 느낀 것도 영향을 미쳤다.[34]

관광 협회의 협력을 얻어 여관을 기숙사로 빌리고, "백련료"로 명명했다. 야구장 관리를 통해 연습 장소와 숙박 시설을 확보한 후, 잡지나 신문에 광고를 내어 입교할 선수를 모집했다.[34] 학교법인화를 목표로 했으나, 학생 수 부족으로 신청은 보류되었다.[34] 임의 단체였지만, 1985년 4월 10일 개교식을 열었다.[34] 학생들은 15세부터 23세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등학교 중퇴자, 대학 퇴학생, 폭주족 출신 등도 있었다.[34]

야구 지도는 쓰치야 히로미쓰가 맡았으며, 에토는 낡은 야구도를 배제하고 세계 선진 야구를 배우려는 시도였다.[34] 쓰치야는 기술, 전술을 꼼꼼히 지도하고, 본고장 미국의 방법을 의식했다.[34] 에토는 교장으로서 폭력에 의한 지도를 금지하고, 학생들에게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도록 했다.[34] 메구로 고등학교 럭비부 감독 우메키 쓰네아키의 강연에서, 한 학생이 폭력 반대 의견을 말하자 에토는 기쁨을 느꼈다.[34] 에토는 저서에서, 학교가 도츠카 요트 스쿨과 혼동되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하며, 프로 기술을 추구하는 집단임을 강조했다.[34]

학생 중에는 1988년 한신에 테스트 입단한 다케미네 조타로,[40] 브라질 대표 투수 다니엘 미사키의 아버지인 마르셀 미사키가 있었다. 에토의 인맥을 통해 에가와 스스무,[41] 가마모토 구니시게[42][43] 등이 강의를 왔다.

1986년부터 동교의 클럽 팀 "아마기 베이스볼 클럽"이 사회인 클럽 팀으로 등록되어 공식전 참가가 허가되었다.[41] 학교는 여전히 임의 단체였고, 환경은 열악했다.[41] 주오 대학, 고쿠시칸 대학, 사회인 팀 등과 경기를 치렀고,[41] 1986년 전일본 클럽 야구 선수권 대회에 첫 출전했다. 1991년, 오카지마 히로하루를 감독으로 초빙하여 클럽 선수권에서 첫 우승을 거두었다. 에토는 고문 자격으로 벤치에 들어갔다.[44] 1992년, 야오한과 업무 제휴를 맺고 팀명을 "야오한 재팬 경식 야구부"로 개칭했다.[44] 에토는 야오한에 투자를 설득했다.[44] 기업 등록으로 변경 후, 1994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첫 출장하여 1회전 승리, 2회전 패퇴했다. 오니시 다카유키가 주니치에 입단했다.[44] 1995년부터 감독이 가토 가즈유키로 교체되었다.[44] 롯데 시절 동료였던 기타루 마사아키, 히로오카 다쓰로가 지도를 왔다.[44] 1997년, 3년 만에 도시 대항에 출전했다.[44]

히로오카, 에가와 등이 지도를 왔고, 특히 히로오카는 자주 방문하여 투수 기술을 가르쳤다.[38] 에토는 『다저스의 전법』을 필독으로, 공격 시 1, 3루를 계속하라고 가르쳤다.[38] 기업 스포츠에서도 실력에 따른 급여를 지급해야 한다고 야오한에 호소하여, 선수 급여가 야구 기량으로 결정되게 되었다.[38]

1997년 9월, 모회사 도산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44] 에토는 팀을 맡아줄 기업을 찾기 위해 분주했고,[44] 1998년부터 암웨이와 업무 제휴하여 클럽 팀 "암웨이・레드삭스"로 재출발했다. 암웨이 측은 회원 확대를 기대했지만, 에토는 거절했다.[44] 선수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플레이했고,[44] 같은 해 클럽 선수권에서 두 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여자 선수 마쓰모토 아야노가 결승에서 위닝볼을 잡았다.[44] 에토는 여자 야구 보급에 주력하여, 여자 선수도 등록하는 것을 생각했다.[44] 1999년, 마루한의 스폰서 움직임이 있었지만 흐지부지되었고, 팀은 활동을 종료했다.[44]

강의 시간에는 기술론과 야구론을 가르쳤고, 팀이 야오한, 암웨이로 바뀌어도 『아마기 베이스볼 스쿨』이라는 간판을 유지했다.[38]

기타 활동으로 1993년부터 기후현 스포츠 소년단 지도원을 종신했고, 브라질 야구 지도, 오스트레일리아 야구 프로화에 힘썼다. 2001년 참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스루가다이 대학 비상근 강사, 월드 베이스볼 아카데미 이사장도 역임했다.

미쓰비시 자동차 오카자키를 지도한 적이 있었는데, 선수끼리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45]

4. 4. 기타 활동

은퇴 후에는 1977년부터 도쿄 12채널→텔레비전 도쿄 「○요일 나이트→전국 나이트」, 라디오 간토 「딱 맞는 나이트」 해설자를 맡았다.[34] 에토는 "은퇴 후에는 주니치 신문 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방송국과 스폰서와의 교류를 좋아하지 않아 해설자 시절에는 번민했다.[34] "나는 이 일이 싫어"라고 공언했고, "얼마나 사전에 취재해도 무능한 아나운서가 망쳐. 팔고 싶은 선수를 추천해 오지만, 나는 야구에 대해서는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없어"라고 말했다.[34]

이 기간 중 1977년에 영화 『야구광의 시』에 해설자 역으로 출연하여 야구 기술 지도를 담당했고, 소년 야구 지도에도 참여하여, 1978년에는 소년 야구와 풀뿌리 야구를 중심으로 한 야구 잡지 『열구』를 발행했다.[35] 1980년 9월에는 구마모토 니치니치 신문사의 후원으로 구마모토시의 소년 야구 선수 30여 명을 이끌고 브라질 원정을 실시했다.[36][37] 귀국 후, 세계소년야구협회(현재의 소년 연식 야구 국제 교류 협회)의 이사로서 활동했지만,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려 이사직을 사임했다.[36][37]

1985년 4월부터는 시즈오카현다고군아마기유가시마정에 일본 야구 체육 학교(통칭 "에토 주쿠")를 설립했다.[39] 처음에는 아마기유가시마정에 야구장이 건설될 예정이었고, 조렌 폭포 관광 협회의 주도로 야구와 관광을 묶은 볼 파크 여관 등의 착상이 있었다.[34] 에토는 야구 학교 설립과 소년 야구 지도를 통해 폐쇄적인 일본의 육성 상황에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34]

아마기의 구장이 준공되자, 에토는 관광 협회의 협력을 얻어, 영업을 중단할 예정이었던 『린센』이라는 여관을 기숙사로 빌렸다.[34] 이후 합숙소는 "백련료"로 명명되었다. 잡지신문에 "'''일본 야구 체육 학교가 개교합니다!'''"라는 광고를 내어 입교할 선수를 모집했다.[34] 학교법인화를 목표로 했지만, 첫 해에는 학생이 23명밖에 모이지 않아, 신청은 보류되었다.[34] 임의 단체로 남아 있었지만, 1985년 4월 10일에는, 유가시마정의 강당을 빌려, 개교식이 열렸다.[34]

야구 지도는 아마추어 지도자 자격을 취득한 쓰치야 히로미쓰가 맡았으며, 에토는 낡은 야구도를 배제하고 다저스에서 돌아온 쓰치야에게 세계의 선단을 달리는 베이스볼을 배우는 시도였다.[34] 에토는 교장으로서 기숙사나 그라운드에서의 폭력에 의한 지도를 금지하는 것을 철저히 했다.[34]

개교 후 3개월 정도 지난 무렵, 메구로 고등학교럭비부 감독 우메키 쓰네아키를 초빙하여 강의를 열었다.[34] 우메키는 스파르타 지도 효과를 이야기했지만, 질의 응답 시간에 한 학생이 "폭력은 절대 반대입니다. 저는 선배에게 맞아서, 야구에 싫증이 났습니다."라고 말했다.[34] 에토는 자신의 생각이 침투하고 있다는 기쁨을 느꼈다.[34] 에토는 저서에서 "사람들은 우리 학교를 도츠카 요트 스쿨과 종종 혼동한다...우리 학교는 어디까지나 프로의 기술을 추구하는 집단이어야 한다."라고 적고 있다.[34]

학생 23명 중에는, 1988년에 한신에 테스트 입단한 다케미네 조타로[40]와 야구 브라질 대표 투수 다니엘 미사키의 아버지인 마르셀 미사키가 포함되어 있었다.

오전의 좌학 수업에서는, 에토의 인맥을 활용하여, 몇몇 선수나 OB가 강의에 왔고, 에가와 스스무가 강의를 한 후에는, 기숙사의 빨간 전화 앞에 줄이 늘어섰다.[41] 같은 해 말에는 전 축구 일본 대표의 가마모토 구니시게가 강연을 방문했고, 프로 지망 투수와 대결하여 좌익수 펜스를 넘는 홈런을 날렸다.[42][43] 에토는 "당신, 만약 야구를 했다면 오, 나가시마 클래스가 되었을 거야"라고 말했다.[42][43]

1986년부터 동교의 클럽 팀 "'''아마기 베이스볼 클럽'''"이 사회인 클럽 팀으로 등록되어, 공식전 참가가 허가되었다.[41] 학교 자체는 아직 학생 수가 23명으로, 학교법인 신청 기준인 40명에 달하지 못해 임의 단체로 남아 있었다.[41] 경기는, 주오 대학, 고쿠시칸 대학과 같은 도토 대학 야구 리그 팀이나 스리본드, 요크 베니마루 등의 사회인 팀과 치러졌다.[41] 1991년에는 감독으로 오카지마 히로하루를 초빙하고, 클럽 선수권에서 첫 우승을 거둔다.[44] 에토 자신은 아마추어 지도 자격이 없었지만, 야구 연맹의 승인을 받아 고문이라는 입장에서 벤치에 들어갔다.[44] 1992년에는 야오한과 업무 제휴를 맺고, 팀명을 "'''야오한 재팬 경식 야구부'''"로 개칭했다.[44] 1994년에는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첫 출장하여 1회전에서 이스즈 자동차를 꺾었지만, 2회전에서 혼다 기연 스즈카에 패퇴했다.[44] 1995년부터는 감독이 오카지마에서 가토 가즈유키 코치로 교체되었다.[44] 롯데 시절의 맹우였던 키타루 마사아키와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히로오카 다쓰로가 지도를 와주었다.[44] 1997년에는 3년 만에 2번째 도시 대항 야구 대회 출전을 달성한다.[44]

히로오카, 에가와와 같은 사람들이 지도를 와주었고, 특히 히로오카는 빈번하게 방문하여, 내야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투수의 기술에 대해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다.[38] 강의 시간에는 에토 자신이 강단에 서서, 『다저스의 전법』도 필독으로, 『공격 시에는 항상 1, 3루로 하고 계속하라』고 가르쳤다.[38]

"프로는 좋아"라고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해 들려주어 모티베이션을 높였다.[38] 기업 스포츠에서도 실력이 급여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야오한에 호소하여, 선수에게는 연공서열이 아니라 야구의 기량으로 급여가 지불되게 되었다.[38]

도시 대항 종료 후, 1997년 9월에 모회사가 도산하여 활동을 휴지했다.[44] 에토는 팀을 맡아줄 기업을 찾기 위해 분주했고,[44] 1998년부터 암웨이와 업무 제휴를 맺은 뒤 클럽 팀 "'''암웨이・레드삭스'''"로 재출발했다.[44] 암웨이 측은 톱인 에토를 필두로 한 자사 회원 확대를 기대했지만, 에토는 완강하게 거절했고, 네이밍 라이츠 이상의 일은 하지 않았다.[44] 같은 해의 클럽 선수권에서 7년 만에 2번째 우승을 달성했다.[44] 에토는 이전부터 여자 야구의 보급에도 주력을 하고, 클럽 팀으로 바뀐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레드삭스에 여자 선수도 등록하는 것을 생각했다.[44] 아마기 돔에서 열린 셀렉션의 결과, 4명을 선수로 채용하고, 봄부터 경기에 참가시켰다. 마쓰모토는 여자 야구부가 있는 가나자와 학원 대학의 OG였다[44]。 1999년부터는 마루한이 스폰서로 붙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흐지부지되고, 팀은 같은 해를 마지막으로 활동을 종료했다.[44]

강의 시간에는 기술론과 야구론을 철저하게 가르쳤고, 팀이 야오한→암웨이로 바뀌어도 『'''아마기 베이스볼 스쿨'''』이라고 으로 적은 목제 수제 느낌 넘치는 간판은, 기숙사 입구에서 절대 떼어내지 않았다[38]

기타 활동으로는 1993년부터 기후현 스포츠 소년단 지도원을 종신한 외에, 브라질에서의 야구 지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야구 프로화에도 힘썼다. 2001년에는 자유 연합의 후보로 제19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비례 대표 구에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스루가다이 대학 비상근 강사, 특정 비영리 활동 법인 월드 베이스볼 아카데미 이사장도 역임했다.

미쓰비시 자동차 오카자키를 몇 번 지도한 적도 있었지만, 에토가 어떤 선수에게 타격을 가르치고 있는 바로 옆에서, 선수끼리 다투고 싸움을 시작한 적이 있었다.[45] 에토는 "내가 가르치고 있는 옆에서, 싸움을 하고 있는 녀석이 있다. 이거, 굉장한 팀이네"라고 놀랐다.[45]

2003년 여름 무렵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입원, 이후에는 병상 생활이었다. 2008년 2월 28일 간암으로 인해 도쿄도 내 병원에서 사망했다. 장례식・고별식은 도쿄도 기리가야 사이장에서 열렸다. 장례 위원장은 시부사와 요시카즈 전 세 리그 사무국장. 상주는 삼녀가 맡았다. 。2010년, 야구 명예의 전당 입성.

5. 플레이 스타일

투지 넘치는 자세와 호쾌한 스윙, 1루에서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는 등 항상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 스타일로 '''투장'''이라는 이명을 얻었다. 1962년 7월 10일 요미우리 전에서 판정에 대한 불신으로 심판을 가격했으며 1972년 8월 6일 야쿠르트 전에서는 스트라이크 판정에 격앙되어 심판을 구타했고 퇴장당했다. 1963년 8월 25일 요미우리 전(나고야 구장)에서 6회 우천으로 콜드 게임(6대 6 무승부)이 선언되자 이에 항의하여 경기 종료가 선언되었음에도 빗속에서 혼자 좌익수의 수비 위치에 서 있었다. 경기가 성립해야 2홈런도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끌어올리도록 코치에게 설득되어 이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고 결국 당시 감독이었던 스기우라 기요시가 설득한 후에야 덕 아웃으로 들어갔다.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의 겸임 감독 시절에는 유니폼 뒷주머니에 배트를 넣는 스타일로 눈길을 끌었다. 등번호 8번을 오랫동안 달았던 것에서 유래한 별명인 '''에이트맨'''으로 불렸다.

"'''신중하게 타격하는 것, 특히 마지막 타석을 소중히'''"를 모토로 상대 팀의 선발 로테이션을 1개월 앞까지 예측하고, 과거 수년간의 데이터와 대조하며, 실전적인 배팅을 예습하는 세심하고 끈기 있는 연구에 의해 뒷받침된 배팅이었다. 공을 잡으러 가지만 하반신은 남고, 밟고 반신으로 자세를 취하면 아웃 코스가 약해지기 때문에, 바깥으로 도망가는 공이라도 배트의 중심에 맞았다. 그것을 오른손을 돌리지 않고 헤드를 좌중간으로 가져갔지만, 타구도 그야말로 탄알 라이너였고, 유격수가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점프한 공이 가속하여 그대로 좌익수석에 꽂히는 경우도 있었다. 포수 출신으로 외야 수비는 특기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강견에는 정평이 있으며, 1969년에는 15개의 보살을 기록했다.

6. 논란 및 비판

7. 수상 및 기록

7. 1. 타이틀

에토 신이치는 1964년, 1965년, 1971년에 수위 타자를 3회 차지했다. 2년 연속 수위 타자는 센트럴 리그 역대 4위이며, 우타자 4위에 해당한다. 또한, 양대 리그에서 모두 수위 타자를 차지한 선수는 에토와 우치카와 세이이치 두 명뿐이다. 1971년에는 최고 출루율도 기록했다.

7. 2. 수상

에토 신이치는 베스트 나인에 6회(1961년, 1963년 ~ 1966년, 1968년) 선정되었고, 올스타전 MVP는 2회(1965년 3차전, 1968년 1차전) 수상했다. 2010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7. 3. 개인 기록

에토 신이치는 1959년 4월 11일 다이요 웨일스전(주니치 스타디움)에 5번·1루수로 첫 출장과 첫 선발 출장을 기록했다. 같은 경기 6회 말에 스즈키 다카시에게서 우전 적시타를 날려 첫 안타와 첫 타점을 동시에 달성했다. 4월 1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고라쿠엔 구장)에서는 9회 초 이토 요시아키에게서 좌월 투런 홈런을 기록하며 첫 홈런을 쏘아 올렸다.

1964년 4월 5일 한신 타이거스전(주니치 스타디움)에서 통산 100홈런, 1966년 5월 3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고라쿠엔 구장)에서 통산 150홈런을 기록했다. 1966년 6월 26일 다이요 웨일스전(가와사키 구장)에서 통산 1,000안타, 1966년 8월 4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주니치 스타디움)에서 통산 1,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1967년 9월 19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고라쿠엔 구장)에서 통산 200홈런, 1969년 5월 2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주니치 스타디움)에서 통산 250홈런을 기록했다. 1970년 8월 16일 니시테쓰 라이온스전(오구라 구장)에서 통산 1,500안타, 1971년 4월 29일 난카이 호크스전(오사카 구장)에서 통산 1,5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1971년 8월 5일 도에이 플라이어스전(도쿄 스타디움)에서 통산 300홈런, 1972년 7월 1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아오모리 현영 야구장)에서 통산 1,000타점을 기록했다. 1973년 5월 26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가와사키 구장)에서 통산 3,000루타, 1974년 9월 23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전(가와사키 구장)에서 통산 350홈런을 달성했다.

1975년 8월 27일 닛폰햄 파이터스전(헤이와다이 구장)에서 통산 2,000경기 출장, 1975년 9월 6일 긴테쓰 버팔로스전(후지이데라 구장)에서 통산 2,000안타를 기록했다.

그 외에도 1975년 6월 1일 롯데 오리온스전(가와사키 구장)에서 역대 최초로 전 구단 상대 홈런을 기록했으며, 올스타전에 11회(1959년, 1961년 ~ 1969년, 1971년) 출전했다.

8. 기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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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웹사이트 権藤博が語る、王貞治と江藤慎一との打撃の共通点。「生き残るために変化を恐れない」 https://sportiva.shu[...] 集英社 2022-03-10
[5] 서적 宝塚歌劇支局 1 青弓社 200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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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웹사이트 제3회 가마모토 구니시게(3)볼을 두드리는 힘을 기초에 착실하게 힘을 축적한 대학시대 http://library.footb[...]
[44] 웹사이트 江藤慎一의 만년은 스폰서 찾기에 분주 소속 선수의 세일즈를 위해 아침 6시 반에 스카우트에 전화를 계속 걸었다 https://sportiva.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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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웹사이트 王貞治가 「특별한 존재였다」라고 칭찬하는 남자。江藤慎一는 사상 처음으로 양 리그에서 수위타자가 되었다 https://sportiva.shu[...]
[48] 서적 프로야구를 창조한 명선수・이색선수400인
[49] 뉴스 「투장」세・파에서 수위타자 고・江藤慎一씨(야구전당・엑스퍼트부문) https://www.asahi.co[...] 아사히신문
[50] Youtube 梅田香子 🇺🇸신간「히틀러와 악수한 일본의 소녀 이나다 에츠코전」 https://mobile.twitt[...]
[51] 뉴스 방기시합…2군감독へ강등 귀향、고엽카프주목 https://www.sankei.c[...] 산케이신문 2022-04-03
[52] 뉴스 방기시합…2군감독へ강등 귀향、고엽카프주목 https://www.sankei.c[...] 산케이신문 2022-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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