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다 도모노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에다 도모노리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1990년부터 2013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 3번의 고시엔 대회 출전, 1989년 히로시마에 4순위로 지명된 후 프로에 데뷔했다. 1991년 개막전에서 첫 홈런을 기록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1990년대 초반 팀의 주축 타자로 활약하며 골든 글러브상과 베스트 나인에 여러 번 선정되었다. 1995년 아킬레스건 부상 이후 어려움을 겪었지만, 2000년대 초반 재기에 성공하여 2007년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2013년 은퇴 후에는 히로시마 구단 어드바이저, 야구 해설가 등으로 활동하며, 아마추어 골퍼로도 활동하고 있다. 통산 타율 3할을 11번 기록했으며, 2013년 은퇴 경기에서 마지막 안타를 기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구마모토현 출신 야구 선수 - 오타케 고타로
오타케 고타로는 쿠마모토현 출신의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거쳐 한신 타이거스에서 왼손 투수로 활약하며 2023년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완급 조절과 다양한 구종 구사, 그리고 '오타케 고타로(大雨降太郎)'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 구마모토현 출신 야구 선수 - 아키야마 고지
아키야마 고지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출신으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외야수로 활약하며 통산 437홈런과 303도루를 기록,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주장이자 MVP 수상자였으며, 은퇴 후에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으로서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 센트럴 리그 골든 글러브상 - 기타벳푸 마나부
기타벳푸 마나부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213승을 기록한 전설적인 투수로, 일본시리즈 우승과 MVP 수상, 명예의 전당 헌액 등 화려한 선수 경력 이후 야구 해설가, 지도자, 유튜버로 활동했다. - 센트럴 리그 골든 글러브상 - 후루타 아쓰야
후루타 아쓰야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 감독, 해설가 및 방송인으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주전 포수로서 뛰어난 타격과 수비 능력으로 MVP를 수상하고 도루 저지율 신기록을 세웠으며, 선수회 회장으로서 파업을 주도하여 선수 권익 신장에 기여했고 야쿠르트 스왈로스 감독을 역임했다. - 명구회 - 기타벳푸 마나부
기타벳푸 마나부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213승을 기록한 전설적인 투수로, 일본시리즈 우승과 MVP 수상, 명예의 전당 헌액 등 화려한 선수 경력 이후 야구 해설가, 지도자, 유튜버로 활동했다. - 명구회 - 후루타 아쓰야
후루타 아쓰야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 감독, 해설가 및 방송인으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주전 포수로서 뛰어난 타격과 수비 능력으로 MVP를 수상하고 도루 저지율 신기록을 세웠으며, 선수회 회장으로서 파업을 주도하여 선수 권익 신장에 기여했고 야쿠르트 스왈로스 감독을 역임했다.
마에다 도모노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마에다 도모노리 |
원어 이름 | 前田 智徳 |
로마자 표기 | Maeda Tomonori |
출생일 | 1971년 6월 14일 |
출생지 | 구마모토현 다마나군 다이메이 정(현: 다마나시) |
신장 | 176 |
체중 | 80 |
포지션 | 외야수 |
투구 | 우 |
타석 | 좌 |
프로 입단 연도 | 1989년 |
드래프트 순위 | 드래프트 4위 |
첫 출장일 | 1990년 6월 6일 |
최종 출장일 | 2013년 10월 3일 (은퇴 경기) |
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90 – 2013) |
수상 내역 | |
베스트 나인 | 4회 (1992년 - 1994년, 1998년) |
골든 글러브 | 4회 (1991년 - 1994년) |
JCB,MEP 어워드 | 3회 (1992년, 1997년, 1998년) |
컴백 선수상 | 1회 (2002년) |
올스타 출전 | 7회 (1993년, 1994년, 1996년, 1998년, 2005년, 2007년, 2008년) |
올스타 MVP | 1회 (2005년) |
선수 정보 | |
데뷔 리그 | NPB |
데뷔 날짜 | 1990년 6월 6일 |
데뷔 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최종 리그 | NPB |
최종 날짜 | 2013년 10월 3일 |
최종 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코치 정보 | |
코치 경력 | 히로시마 도요 카프 (2013) |
기타 정보 | |
연봉 | 5,600만 엔(2012년) |
2. 프로 입단 전
구마모토현 다마나군 다이메이 정(현 다마나시) 출신으로, 구마모토 공업고등학교(약칭 구마코)에 진학했다. 구마코 시절 2학년 봄·여름, 3학년 여름 총 3번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다. 3학년 여름에는 주장, 4번 타자, 중견수로 활약했으며, 고등학교 2학년 후배로 시오자키 마코토가 있었다.
3학년 때 고시엔 대회 후, 세이부 라이온즈를 제외한 11개 구단이 구마코를 방문했고, 마에다의 자택에도 8개 구단의 스카우트가 찾아왔다. 특히 지역 연고 팀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는 상위 지명을 시사하는 등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1989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다이에의 지명은 없었고,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4순위로 지명했다. 마에다는 드래프트 회의 텔레비전 중계를 본 후 1시간 가까이 울며 프로 입단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히로시마 스카우트 미야가와 다카오의 설득으로 입단을 결심했다.[2] (드래프트 비화는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룸)
1989년 여름, 고등학교 3학년 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熊本 대회 결승전에서 도카이대 부속 제2고등학교와의 경기 중, 상대 투수에게 "승부해! 스트라이크 넣어!"라고 소리친 일화가 있다. 이 경기에서 승리하여 고시엔에 진출했다.
고시엔 첫 경기인 니치다이 미시마전에서 1회 초에 적시타를 쳤지만, 자신의 타격 내용에 만족하지 못하고 수비에 나서지 않으려 했던 적이 있다. 당시 마에다는 동갑내기인 모토키 다이스케를 강하게 라이벌로 여겼고, 홈런을 연발하는 모토키에게 지지 않으려는 마음이 컸다고 한다. 마에다의 은사이자 야구 부장이었던 다즈메 마사카즈는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연습 시합에서도 안타를 쳐도 마음에 안 드는 타구이면 같은 행동을 했었다고 언급했다.[44]
2. 1. 드래프트 비화
드래프트 전, 마에다는 후배가 다른 학교 학생에게 폭행당한 것을 알고 단신으로 그 학교에 쳐들어가 복수를 했다는 내용의 문서가 각 구단에 전달되었다.[3] 이 때문에 지역 연고 팀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상위 지명이 예상되었으나,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다이에로부터 지명을 받지 못했다.[2]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스카우트 미야가와 다카오는 마에다가 프로 입단을 거부하자, "다이에는 지명하지 않았지만, 우리들은 (지명의) 약속을 지켰다. 남자라면 약속을 지켜라"라고 설득하며 타격 이론을 이야기했다. 마에다는 미야가와의 인간성에 끌려 히로시마 입단을 결심했다.[2]
3. 프로 입단 후
2013년 12월 26일, 마에다 도모노리는 히로시마 구단과 어드바이저 계약을 체결했다.[17] 이를 통해 구단 주최 이벤트 출연 및 상품 개발에 대한 조언을 제공했다. 2014년부터는 주고쿠 신문의 야구 평론가[18], TV 아사히(2022년까지)·히로시마 홈 TV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다.
마에다 도모노리는 아마추어 골퍼로도 활동하고 있다. 2021년 6월에는 주고쿠 아마추어 선수권에서 4위를 차지하여 일본 아마추어 골프 선수권 출전권을 얻었으나[19], 출전을 포기했다.[20]
미즈타니 사네오는 마에다에 대해 "낯가림을 하는 타입이지만, 예의 바르고 겸손한 성격이다. 루키 때부터 관찰력이 대단했다. 다른 사람의 타격을 보거나, 보는 각도에 대한 센스도 있었다", "야구에 대해 진지한 녀석이다. 겸손하다. 겸손하기 때문에 묵묵히 연습한다"고 평가했다.
마에다는 히로시마 입단 후 팀 선배인 니시다 신지를 '스승'으로 따랐으며, 니시다, 오토 시게토와 함께 자주 식사를 했다.[40]
마에다는 단 것을 매우 좋아하여, 현역 시절에는 빵이나 아이스크림 종류를 즐겨 먹었다. 선수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큰 부상을 당한 후 식생활을 개선했고, 부인 또한 쿄린 예방 의학 연구소의 야마다 토요후미 소장에게 영양학을 배워 식단 개선에 힘썼다.[41] 그럼에도 단 것을 완전히 끊지는 않았으며, 2012년 교류전에 맞춰 마쓰다 스타디움에서 발매된 구단 콜라보 메뉴에서 자신의 취향을 담은 "프렌치 파르페"를 고안하기도 했다.[42]
- 슈퍼 베이스볼
- 히로시마 홈 TV가 제작하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 주최 경기의 히로시마현 로컬 방송(『카프 응원 중계 "승리 습관."』)이 중심이었지만, 이나바 아쓰노리가 야구 일본 대표 감독으로 취임한 2018년부터는 TV 아사히 제작 중계나 BS 아사히와 TV 아사히의 공동 제작에 의한 위성파 중계를 담당하는 빈도가 증가했다.
- 보도 스테이션 (수시 · 프로 야구 캐스터)
- 피타뉴스 (수시 · 코멘테이터)
- 닛폰 방송 쇼업 나이터 (2014년 6월 13일 세 · 파 교류전 「사이타마 세이부 × 히로시마」 4회전에서 게스트 해설자로 출연)
3. 1.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1990-2013)
前田 智徳일본어는 1990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하여 2013년까지 활약한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했으며, 뛰어난 타격과 수비를 겸비하였다. 선수 생활 동안 잦은 부상에 시달렸지만, 불굴의 의지로 재활에 성공하며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1995년 아킬레스건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당한 이후에도 꾸준히 재활과 노력을 통해 복귀하여 팀에 공헌했다. 특히, 2000년대 후반에는 대타로 출전하여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적인 안타를 쳐내며 팀 승리에 기여했다. 2007년에는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고, 2013년 은퇴할 때까지 히로시마 한 팀에서만 뛰며 프랜차이즈 스타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3. 1. 1. 초창기 (1990-1994)
1990년 6월 6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6번·중견수로 선발 출전하여 공식전 첫 출전을 기록, 2루타를 포함해 4타수 2안타 1타점을 기록했다.[2]1991년 개막전에 1번·중견수로 선발 출전, 프로 데뷔 첫 홈런을 쳐냈다.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개막전 첫 회 선두 타자 홈런으로는 유일한 기록이다. 시즌 중 타격 부진으로 선발에서 제외되기도 했으나, 6월 이후 2번 타자로 정착했다. 129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71, 14도루, 30희생 번트를 기록하며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외야수 부문 골든 글러브상을 최연소(19세)로 수상했다.[2]
1992년 개막 이후 6월 3일까지는 2번 타자로 뛰었으나, 이후 주로 3번 타자를 맡았다. 전 경기(130경기)에 출전하여 타점왕은 놓쳤지만, 일본인 선수 최다 타점(89타점)과 득점권 타율 .358을 기록했다. 리그 5위의 타율 .308로 처음 3할 타율을 달성했으며, 이후 규정 타석을 채운 시즌 중 1991년, 2003년, 2007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3할 이상을 기록했다. 도루 18개로 리그 4위, 수비에서는 자살과 보살 모두 리그 1위를 기록하며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2]
1993년 2년 연속 전 경기(131경기) 출장을 달성, 리그 3위(타이)인 27홈런, 리그 4위이자 일본인 선수 중 1위인 타율 .317, 리그 최다 2루타와 최다 루타를 기록했다. 시즌 후 구단으로부터 등번호 1번을 제안받았으나, "지금 번호(31번)가 마음에 듭니다"라며 사양했다. 그러나 며칠 후 구단주의 권유로 등번호 1번을 달게 되었다.[2]
1994년 개막 이후 4번 타자로 출전했으나, 4월 30일부터는 3번 타자로 고정되었다. 알론조 파웰과 수위타자 경쟁을 벌여 3리 차이로 리그 2위(.321)를 기록했고, 홈런은 리그 5위(타이)인 20홈런을 기록했다. 4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과 3년 연속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2]
3. 1. 2. 부상과 시련 (1995-2001)
1995년 5월 23일 야쿠르트전에서 주루 도중 오른쪽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큰 부상을 입었다.[4][5] 이 부상으로 선수 생명이 위기에 놓였고, 이후 그의 플레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1996년 개막전에 선발 출전했지만, 다리 근육 파열로 인해 몇 경기에 결장했다. 5월에 복귀한 후에는 거의 모든 경기에 출전하여 2년 만에 규정 타석에 도달했다. 그 해부터 1999년까지 4년 연속 타율 3할 이상·득점권 타율 .340 이상(.368, .368, .358, .343)을 기록했다.
1997년에는 부상의 영향으로 휴식을 취하면서 출전했기 때문에, 최종전 9회 종료 시점에서는 규정 타석에 약간 못 미쳤지만, 연장전에 돌입하여 타석이 돌아와 간신히 도달했다.
1998년에는 다리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중견수에서 우익수로 수비 위치를 변경했다. 개막전부터 6일간 1번 타자로 출전했고, 그 이후에는 3번에 정착했다. 그 해는 타격 컨디션이나 발 상태가 좋아서 매 경기 선발 출전을 이어갔다. 4월에 타율 .370·5홈런·16타점을 기록하여 월간 MVP를 수상했다. 전반기를 타율 .336·14홈런으로 마감했고, 인터뷰에서는 "부상 없이 해낼 수 있어서 그것이 가장 기쁘다"라고 언급했다. 8월에는 수위 타자 경쟁 1위에 오르고, 5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 월간 성적으로 타율 .368·9홈런·26타점을 기록하여 한때 리그 3관왕이 될 정도의 활약으로 8월 월간 MVP를 수상했다. 9월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도쿄 돔의 간판을 직격하는 홈런을 쳐 상금 100만엔을 획득했다. 같은 달 13일 야쿠르트전에서 23번째 맹타상을 기록하여 지금까지 요나미네 가나메가 가지고 있던 센트럴 리그 시즌 최다 기록을 46년 만에 갱신했다. 하지만 15일 경기에서 주루 중 왼쪽 종아리를 다쳐 일어설 수 없게 되어 결장했다. 남은 경기를 망쳤다. 127경기 출전에 그쳐 자신이 목표로 했던 "전 경기 출전"에는 아쉽게 미치지 못했다. 시즌을 통틀어 스즈키 다카노리·쓰보이 도모치카 등과 수위 타자 경쟁을 벌여 2리 차이로 타율 .335로 리그 2위로 끝났지만, 1993년 이래 리그 최다 2루타·최다 루타를 기록했다. 4년 만에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그 해 시즌의 수위 타자 경쟁은 스즈키(요코하마)의 타율이 .337, 마에다가 .335인 상태에서 남은 경기는 양 팀의 직접 대결뿐이었지만, 요코하마 감독 곤도 히로시는 경기 전에 "히로시마가 마에다를 출전시킨다면, 스즈키를 쉬게 하고, 마에다를 모든 타석에서 고의 사구를 시키겠다"라고 발언했다. 이를 들은 마에다도 "팬들에게 보기 흉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고의 사구 당할 바에는 경기에 출전하지 않겠다"라고 출전을 거부했고 결국 양 선수가 결장했다.
1999년에는 전년도의 활약으로 주변에서도 타격 타이틀 획득을 기대하며 시즌에 돌입했지만, 다리 상태가 좋지 않아 부상과의 관계에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컨디션도 좋아지지 않았지만, 최종적으로 타율 3할을 기록했다.
2000년에는 FA로 요미우리에 이적한 에토 아키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4번으로 기용되었다. 그 해는 초반부터 타격이 좋아서, 4월 월간 MVP를 수상하는 등 하이 페이스로 홈런을 양산했지만, 시즌 도중에 왼쪽 아킬레스건 상태가 악화되어 부진에 빠졌다. 7월 27일에 건초 활막 절제 수술을 받고, 남은 시즌은 재활에 힘썼다. 같은 해에 FA 자격을 취득했지만, 행사하지 않았다.
2001년 3월에 결혼했다. 그러나 그 해 시즌에도 다리 상태가 좋지 않아, 공식전 출전은 27경기에 그쳤고, 0홈런으로 끝났다.
3. 1. 3. 재기와 활약 (2002-2007)
2002년에는 개막부터 선발 출전하여, 4월 5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전에서 야마모토 마사에게서 약 2년 만에 홈런을 쳐냈다.[4] 4월 6일 경기 중, 마에다의 주루에 불만을 품은 루이스 로페스가 더그아웃에서 마에다를 붙잡아 소동이 일어났다.[4] 이 사건으로 로페스는 다음 날부터 출전 선수 등록이 말소되어 10일간 근신 처분을 받았고, 2군 훈련 참가도 금지되는 엄벌을 받았다. 이후 양자 간 대화 자리가 마련되어 화해했다.[4] 4월에는 5번, 5월 이후에는 6번 타자로 선발 출전했지만, 8월 이후에는 5번 타자로 자리를 잡았다.[4] 타율 3할을 기록하며 컴백상을 수상했다.[4]2003년에는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한 가네모토 도모아키를 대신해 좌익수를 맡았다.[4] 128경기에 출전해 21홈런 71타점을 기록했지만, 8월 이후 타율이 3할 아래로 떨어지면서 최종 타율 .290으로 시즌을 마쳤다.[4]

2004년에는 개막전인 4월 2일부터 4월 23일까지 19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다. 이는 개막 이후 연속 경기 안타로는 구단 기록이자 역대 4위 기록이다.[4] 2년 만에 타율 3할을 달성했다.[4]
2005년에는 '5번·좌익수'로 146경기 모두 선발 출전하여 타율 .319, 32홈런, 개인 최다인 172안타를 기록했다.[4] 1993년 이후 12년 만에 전 경기 출전을 달성했고, 삼진율 .073은 개인 최고 기록이었다.[4]
2006년에는 마티 레오 브라운 신임 감독에게서 야수 캡틴으로 지명되었다.[4] 개막 초에는 출루율이 높은 점을 인정받아 2번 타자를 맡았지만, 타격 부진으로 보름 만에 5번으로 돌아갔다.[4] 5월 25일에는 통산 100보살을 달성했다.[4] 8월 22일 한신전에서 우전 안타를 쳐 통산 3000루타를 달성했다(통산 40번째).[4] 134경기에 출전해 리그 4위인 타율 .314로 시즌을 마감하며 통산 11번째 3할(역대 5위 타이기록)을 기록했다.[4] 규정 타석을 채운 시즌 중에서는 개인 최고인 득점권 타율 .373(리그 2위)을 기록했다.[4]
2007년 9월 1일 주니치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8회 말, 히사모토 유이치에게서 우전 2점 적시타를 쳐내며 NPB 통산 36번째 2000안타를 달성했다.[4] 31삼진은 4년 연속 리그 최소(규정 타석 도달자 중), 삼진율 .075도 리그 최소였다.[4] 하지만 부상이 잦아 규정 타석은 최종전에서야 채웠고, 4년 만에 시즌 타율 3할을 넘기지 못했다.[4] 같은 해 올스타전에서는 제1경기에서 대타 홈런을 기록했다.[4]
3. 1. 4. 베테랑의 품격 (2008-2013)
2008년, 84경기에만 출전하며 타율 2할 7푼과 4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후반기에는 젊은 선수들에게 밀려 선발에서 제외되었지만, 대타로서는 3할 7푼 2리의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 시즌 후 FA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현역 연장을 결심했다.2009년에는 스프링 캠프부터 컨디션 난조를 겪었고, 감독의 젊은 선수 기용 방침으로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1군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팀 동료인 오가타 고이치의 은퇴 경기에서 꽃다발을 전달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2010년에는 대타로 출전을 목표로 조정을 거쳐 3월 4일 시범 경기에서 2008년 10월 이후 첫 대외 경기에 출전했다. 정규 시즌 개막 후 3월 29일에는 대타로 2년 만에 정규 경기에 출전하여 희생 플라이를 기록했다. 4월 11일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2년 만의 홈런을 쳤고, 4월 16일 마쓰다 스타디움에서는 아사오 다쿠야를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기록하며 16년 만의 끝내기 안타이자 마쓰다 스타디움 첫 안타의 주인공이 되었다. 주로 대타로 기용되어 2할 대 전반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대타로서는 팀 내 최다인 62경기에 출전했다. 지명타자 제도를 시행한 센트럴·퍼시픽 교류전에서는 지명타자로 6경기에 선발 출장했다.
2011년에도 대타로 출전하여 4경기에서 결승타를 기록하는 등 활약했다. 마쓰다 하지메 구단주로부터 다음 시즌에도 선수 생활을 계속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2012년 역시 대타로 기용되는 일이 많았다. 7월 1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전에서 결승 적시타를 날려 '조지아 혼' 상을 수상했다. 시즌 타율 .327, 출루율 .408을 기록하며 대타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가네모토 도모아키와 이시이 다쿠로의 은퇴로 현역 선수 중 일본 프로 야구 통산 최다 안타 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2013년 4월 23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에무라 마사야에게 왼쪽 손목에 사구를 맞아 '왼쪽 척골 골절' 진단을 받았다. 부상 이후 재활에 힘썼지만, 9월 27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10월 3일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은퇴 경기에서 8회 말 대타로 출전해 투수 땅볼로 물러났고, 9회 초 우익수 수비를 보며 마쓰다 스타디움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경기 후 은퇴식을 가졌다.
4. 은퇴 후
2013년 12월 26일, 히로시마 구단은 마에다 도모노리와 어드바이저 계약을 체결했다. 마에다는 구단 주최 이벤트 출연 및 상품 개발에 대한 조언을 하는 역할을 맡았다.[17] 2014년부터는 주고쿠 신문의 야구 평론가[18], TV 아사히(2022년까지)와 히로시마 홈 TV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다.
마에다는 아마추어 골퍼로도 활동하고 있다. 2021년 6월에는 주고쿠 아마추어 선수권에서 4위를 차지하여 일본 아마추어 골프 선수권 출전권을 획득했다.[19] 하지만, 일본 아마추어 골프 선수권 대회 기간과 일정이 겹쳐 출전 여부가 불투명하다고 밝혔고, 결국 출전을 포기했다.[20]
TV 아사히 계열의 슈퍼 베이스볼에서는 주로 히로시마 홈 TV가 제작하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 주최 경기의 히로시마현 로컬 방송(『카프 응원 중계 "승리 습관."』이라는 프로그램명으로 방송되며, 『J SPORTS STADIUM』에도 동시 배포)을 중심으로 해설을 맡았다. 그러나 이나바 아쓰노리가 야구 일본 대표 감독으로 취임한 2018년부터는 TV 아사히 제작의 간토 로컬 · 지상파 전국 네트워크 중계나 BS 아사히와 TV 아사히 (한신전은 아사히 방송 TV, 소프트뱅크전은 규슈 아사히 방송)의 공동 제작에 의한 위성파 중계를 담당하는 빈도가 증가했다. 히로시마 홈 TV의 로컬 방송은 기타벳푸 마나부가 단독으로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기타벳푸가 병 치료를 위해 활동을 중단한 2020년부터 2022년에는 로컬 중계 담당이 증가했고(TV 아사히 · BS 아사히 출연 시의 로컬 방송은 사토자키 토모야 · 카네이시 아키토 · 이바타 히로카즈 · 타츠카와 미츠오가 담당), 2023년에는 기타벳푸의 병세 악화와 사망으로 인해 TV 아사히 (BS 아사히 포함)가 히로시마 홈 TV와 별도 제작을 하는 히로시마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을 포함하여 다른 해설자(후루타 아츠야 · 마츠자카 다이스케 · 쿠도 키미야스 · 츠지 하히코 · 카네무라 아키라 · 토리타니 타카시 등)에게 할당하는 배려를 하여, 히로시마 홈 TV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하였다.
5. 선수로서의 특징
마에다 도모노리는 "천재"라고 불리는 타격 센스를 지녔다.[21] 통산 안타의 50%가 당겨치는 방향일 정도로 풀 히터 경향을 보였다.[22] 부상 이전에는 반대 방향으로도 타구를 멀리 보낼 수 있었지만, 부상 이후에는 오른발 버티기가 잘 되지 않아 왼쪽 방향으로는 비거리가 나오지 않게 되면서 중앙, 우측 방향으로 홈런을 치게 되었다고 한다.[23] 부드러운 타격도 특징인데, 마에다는 "타이밍을 천천히 잡고 싶다", "스윙은 느린 정도가 딱 좋다"고 말했다. 가와카미 데쓰하루의 조언으로 그립 위치를 수정하여 톱이 얕고 콤팩트한 타격 폼을 완성했다. 마에다는 "우선 맞히고 공을 확실하게 잡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고 말했다. 현역 말년에는 대타로 활약했다.
현역 시절 약점으로 꼽았던 투수는 야마모토 마사, 고바야시 마사토[24] 등이다. 특히 고바야시는 마에다 본인이 교체를 요청할 정도로 약했다.
아킬레스건 부상 이전에는 빠른 발과 뛰어난 수비를 자랑했으며, 1991년부터 1994년까지 4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25] 1997년까지 주로 중견수를 맡았고, 1998년부터는 다리에 가해지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우익수로, 2003년부터는 좌익수를 맡았다.
5. 1. 타격
"천재"라고 불리는 타격 센스를 자랑했다.[21] 통산 안타의 50%가 당겨치는 방향일 정도로 풀 히터 경향을 보였다.[22] 부상 이전에는 반대 방향으로도 타구를 멀리 보낼 수 있었지만, 부상 이후에는 오른발 버티기가 잘 되지 않아 왼쪽 방향으로는 비거리가 나오지 않게 되면서 중앙, 우측 방향으로 홈런을 치게 되었다고 한다.[23] 부드러운 타격도 특징인데, 마에다는 "타이밍을 천천히 잡고 싶다", "스윙은 느린 정도가 딱 좋다"고 말했다. 가와카미 데쓰하루의 조언으로 그립 위치를 수정하여 톱이 얕고 콤팩트한 타격 폼을 완성했다. 마에다는 "우선 맞히고 공을 확실하게 잡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고 말했다.현역 말년에는 대타로 활약했다.
현역 시절에 약점으로 꼽았던 투수는 야마모토 마사, 고바야시 마사토[24] 등이다. 특히 고바야시는 마에다 본인이 교체를 요청할 정도로 약했다.
5. 2. 수비 및 주루
아킬레스건 부상 이전에는 빠른 발과 뛰어난 수비를 자랑했으며, 1991년부터 1994년까지 4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25] 1997년까지 주로 중견수를 맡았고, 1998년부터는 다리에 가해지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우익수로 전향했다. 2003년부터는 좌익수를 맡았다.6. 평가
노무라 가쓰야는 마에다가 프로에 데뷔한 1년차에 "어째서 저 선수가 우리 리스트에 없는 거야"라며 스카우트를 심하게 질책했다.[26] 야마모토 고지는 "무엇보다 유니폼을 입는 맵시가 마음에 들었다. 이런 선수는 성공한다", "타격을 보고 더욱 놀랐다."고 회상했다.[26] 오치아이 히로미쓰는 1999년 인터뷰에서 "지금 일본 야구계에는, 나는 2명의 천재 타자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명은 오릭스의 이치로이고, 다른 한 명은 마에다이다"라고 말했다.[27]
이마나카 신지는 "나에게 있어서 특별한 존재는 마에다와 오치아이(히로미쓰) 두 사람뿐", "주자가 있을 때의 집중력은 대단했다."고 말했다. 이토 토모히토는 "내가 상대했던 타자 중에서는 넘버원. 배트 컨트롤이 천재적이라 전혀 약점이 없었다"라고 말했다.[27]
마키하라 히로미는 "가운데 공은 뻔히 보고 놓치면서, 어려운 공은 확실하게 안타로 만든다."고 평했다.[27] 야마모토 마사는 마에다의 현역 은퇴 시, "천재라고 자주 말하지만, 노력의 천재라고 생각한다."고 코멘트를 남겼다.[30] 팀 동료였던 오가타 고이치는, 은퇴 후에 "23년 동안, 여러 선수를 봤는데, 그래서 말하면 제 안에서 넘버원은 마에다 토모노리다."라고 말했다.[31]
마쓰이 히데키는 1995년, "주간 베이스볼"에서 "'남자'를 느끼게 하는 선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마에다 씨의 등에서 '남자'를 느낍니다."라고 말했다. 미즈타니 미오는, "경기 중에 투수에게 당하면, 엄청나게 분한 표정을 짓는다. 분해서 참을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라고 말했다.[34]
기타벳푸 마나부는 마에다를 "장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36] 니노미야 세이준은 마에다와의 인터뷰 제목으로 "마에다 토모노리에게, 에노모토 기하치의 환영을 보았다"라고 평했다.[36] 이치로는, "저를 천재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진짜 천재는 마에다 씨입니다"라고 평가했다.[37]
후루타 아쓰야는 2021년 5월에 "홈런을 노리기보다는 홈런으로 만들 수 있는 공을 노린다"라고 말했다.[38]
7. 일화
2013년 12월 2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구단은 마에다 도모노리와 어드바이저 계약을 체결했다. 마에다는 구단 주최 이벤트 출연, 상품 개발에 대한 조언 등을 제공했다.[17] 2014년부터는 주고쿠 신문 야구 평론가[18], TV 아사히(2022년까지)·히로시마 홈 TV 야구 해설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아마추어 골퍼로도 활동 중인 마에다는 2021년 6월 주고쿠 아마추어 선수권에서 4위를 기록, 일본 아마추어 골프 선수권 출전권을 획득했다.[19] 그러나 대회 기간 중 일정이 겹쳐 출전 여부가 불투명하다고 밝혔고, 결국 출전을 포기했다.[20]
7. 1. 인물
낯가림을 하는 성격이지만, 예의 바르고 겸손하다는 평가를 받는다.[40] 루키 시절부터 관찰력이 뛰어나고, 다른 사람의 타격을 보거나 각도를 분석하는 센스가 있었다고 한다.[40] 야구에 대한 진지함과 겸손함으로 묵묵히 연습하는 스타일이다.[40]히로시마 입단 후에는 팀 선배인 니시다 신지를 '스승'으로 따랐으며, 오토 시게토와 함께 셋이서 자주 식사를 했다고 한다.[40]
단 것을 매우 좋아해서 현역 시절, 특히 독신일 때는 빵이나 아이스크림 종류를 가리지 않고 즐겨 먹었다. 그러나 선수 생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큰 부상을 겪은 후 식생활을 개선했다. 부인 또한 쿄린 예방 의학 연구소의 야마다 토요후미 소장에게 영양학을 배워 식단 개선을 통해 부상을 쉽게 당하는 체질을 개선하고자 노력했다.[41]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것을 완전히 끊지는 않았으며, 디저트를 좋아하는 취향을 밝히기도 했다. 2012년 교류전 때는 마츠다 스타디움에서 판매하는 구단 콜라보 메뉴로 "내 휴일!"이라는 이름의 프렌치 토스트에 아이스크림과 메이플 시럽을 곁들인 "프렌치 파르페"를 고안하기도 했다.[42] 본인 말에 따르면, "구장(마츠다 스타디움) 락커룸 냉장고 안에 싼 (아이스크림)가 가득 들어있는 것을 보면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43]
7. 2. 고교 시절
前田 智徳|마에다 도모노리일본어는 구마모토현 다마나군 다이메이 정(현 다마나시) 출신으로 1987년 구마모토 현립 구마모토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 때 춘계와 하계, 3학년 하계 대회 등 총 3차례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다. 3학년 여름에는 팀의 주장, 4번 타자, 중견수로 활약했다.1989년 여름,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熊本 대회 결승전(후지사키다이 현영 야구장)에서 도카이대 부속 제2고등학교와 경기에서 0-1로 뒤진 4회 초 마에다의 타석 때 상대 투수 나카오 아쓰타카가 볼 2개를 먼저 던지자, 마에다는 방망이를 든 채 마운드로 다가가 "승부해! 스트라이크 넣어!"라고 소리쳤다. 이에 나카오가 "뭐라고!"라고 되받아치자, 구심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플레이가 재개된 후, 나카오가 승부를 걸어온 공을 라이트 스탠드로 날려 보냈다.[39] 이 시합에서 이긴 구마모토 공업고등학교는 고시엔에 출전했다.
고시엔 첫 시합인 니치다이 미시마전에서 마에다는 1회 초에 적시타를 쳤지만, 공격이 끝난 후 "안 돼요. 저는 이제 안 돼요"라며 머리를 감싸고 울부짖으며 수비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마에다는 동갑내기인 모토키 다이스케를 강하게 라이벌로 여겼고, 홈런을 연발하는 모토키에게 지지 않으려고 했던 첫 시합에서 제대로 치지 못한 것에 납득할 수 없었다고 한다.[44]
7. 3. 프로 야구 선수 시절
前田 智徳|마에다 도모노리일본어는 1990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하여 2013년 은퇴할 때까지 활약한 프로 야구 선수이다.- '''1990년''' 6월 6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공식전에서 "6번·중견수"로 선발 출장하여 2루타를 치는 등 4타수 2안타 1타점을 기록했다.
- '''1991년''' 2월 24일 롯데 오리온즈와의 시범 경기에서 5타수 5안타(2루타 4개)를 기록했다. 개막전에 "1번·중견수"로 선발 출장하여 프로 첫 홈런을 쳤다. 프로 첫 홈런을 개막전 첫 회 선두 타자로 장식한 것은 마에다가 유일하다. 6월 이후에는 2번 타자로 정착하여 129경기에 출전, 타율 .271, 14도루, 30희생타로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외야수로는 최연소(19세 개막)로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 '''1992년''' 개막전부터 6월 3일까지 2번 타자로 출전했지만, 이후 주로 3번 타자를 맡았다. 전 경기에 출전하여 타점왕은 놓쳤지만 래리 시츠에 이어 리그 2위인 89타점, 득점권 타율 .358을 기록했다. 리그 5위인 타율 .308로 처음으로 3할 타율에 진입했다. 이후 규정 타석에 도달한 해에는 1991년·2003년·2007년을 제외하고 3할 타율을 달성했다. 도루 18개로 리그 4위, 수비에서는 자살 수, 보살 수 모두 리그 1위를 기록했다. 외야수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 '''1993년''' 2년 연속 전 경기 출전을 달성, 리그 3위 타이인 27홈런, 리그 4위 타율 .317(일본인 선수 중 리그 1위), 리그 최다 2루타·최다 루타, OPS .945를 기록했다.
- '''1994년''' 개막전부터 4번 타자로 나섰지만, 4월 30일 이후 3번에 고정되었다. 알론소 파웰과 수위 타자 경쟁을 벌여 3리 차로 리그 2위인 타율 .321, 홈런은 리그 5위 타이인 20홈런을 기록했다. 4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 3년 연속 베스트 나인을 획득했다.
- '''1995년''' 개막부터 2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했지만, 아킬레스건 통증이 심해 매 경기 테이핑이 필수였다. 5월 23일 야쿠르트전에서 2루 땅볼을 치고 1루로 달리던 중 오른쪽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큰 부상을 입었다.[4][5] 선수 생명의 위기에 빠지며 남은 시즌을 망쳤다.
- '''1996년''' 개막전에 선발 출전했지만, 다리 근육 파열로 몇 경기 결장했다. 5월 복귀 후에는 거의 모든 경기에 출전하여 2년 만에 규정 타석에 도달했다. 이 해부터 1999년까지 4년 연속 타율 3할 이상·득점권 타율 .340 이상(.368, .368, .358, .343)을 기록했다.
- '''1997년''' 부상으로 휴식을 취하며 출전했기 때문에, 최종전 9회 종료 시점에는 규정 타석에 약간 못 미쳤지만, 연장전에 돌입하여 타석이 돌아와 간신히 도달했다.
- '''1998년''' 개막전부터 6일간 1번 타자로 출전했고, 이후에는 3번에 정착했다. 4월에 타율 .370·5홈런·16타점으로 월간 MVP를 수상했다. 8월에는 5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 월간 성적 타율 .368·9홈런·26타점으로 8월 월간 MVP를 수상했다. 9월 13일 야쿠르트전에서 23번째 맹타상을 기록, 요나미네 이사오가 가지고 있던 센트럴 리그 시즌 최다 기록을 46년 만에 갱신했다. 스즈키 다카노리·쓰보이 도모야와 수위 타자 경쟁을 벌여 2리 차이인 타율 .335로 리그 2위를 기록했지만, 1993년 이래 리그 최다 2루타·최다 루타를 기록했다. 4년 만에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 '''1999년''' 다리 상태가 좋지 않아 부상으로 휴식을 취했다. 컨디션도 좋지 않았지만, 최종적으로 타율 3할을 기록했다.
- '''2000년''' FA로 요미우리에 이적한 에토 아키라를 대신해 4번으로 기용되었다. 4월 월간 MVP를 수상하며 홈런을 양산했지만, 시즌 도중 왼쪽 아킬레스건 상태가 악화되어 부진에 빠졌다. 7월 27일 건초 활막 절제 수술을 받고 남은 시즌은 재활에 힘썼다. FA 자격을 취득했지만 행사하지 않았다.
- '''2001년''' 3월에 결혼했다. 다리 상태가 좋지 않아 공식전 출전은 27경기에 그쳤고, 0홈런으로 끝났다.
- '''2002년''' 개막부터 선발 출전하여 4월 5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야마모토 마사에게 2년 만의 홈런을 쳤다. 타율 3할을 기록하고 컴백상을 수상했다.
- '''2003년''' 128경기에 출전하여 21홈런, 71타점을 기록했지만, 최종 타율 .290으로 시즌을 마쳤다.
- '''2004년''' 개막전인 4월 2일부터 4월 23일까지 19경기 연속 안타(개막 이후 연속 경기 안타 구단 기록, 역대 4위)를 기록했다. 시즌에서는 2년 만에 타율 3할에 도달했다.
- '''2005년''' "5번·좌익수"로 146경기 모두 선발 출전, 타율 .319·32홈런, 개인 최다 172안타를 기록했다. 전 경기 출전은 1993년 이후 12년 만이었고, 삼진율 .073은 개인 최고였다.
- '''2006년''' 마티 레오 브라운 감독에게 야수 캡틴으로 지명되었다. 134경기에 출전하여 리그 4위 타율 .314로 통산 11번째 3할(역대 5위 타이)을 기록했다. 규정 타석 도달 시즌 중 개인 최고 득점권 타율 .373(리그 2위)을 기록했다.
- '''2007년''' 9월 1일 주니치전에서 8회 말 히사모토 유이치에게 우전 2점 적시타를 쳐 NPB 통산 36번째 2000안타를 달성했다. 31삼진은 4년 연속 리그 최소(규정 타석 도달자 중), 삼진율 .075도 리그 최소였다. 부상이 잦아 규정 타석에는 최종전에서 도달했다. 4년 만에 시즌 타율 3할을 넘지 못했다.
- '''2008년''' 대타로 타율 .372를 기록했다. 최종 84경기 출전, 타율 .270, 4홈런을 기록했다. 10월 10일 구단과 회담을 갖고 FA권 불행사와 2009년 시즌 선수 전임으로 현역 속행이 결정되었다.
- '''2009년'''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1군 경기 출전 없이 시즌을 마쳤다.
- '''2010년''' 3월 29일 대타로 2년 만에 공식전에 출전, 무사 만루에서 희생 플라이를 쳤다.[7] 4월 16일 마쓰다 스타디움에서 아사오 다쿠야에게 16년 만의 끝내기 안타를 쳤다. 이 안타는 마쓰다 스타디움 첫 안타였다. 5월 21일 교류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서 8회 초 양야오쉰에게 시즌 2호 2점 홈런을 쳤지만,[8] 이것이 현역 마지막 홈런이 되었다.
- '''2011년''' 4경기에서 결승타를 치는 등 대타의 비장의 카드로 활약했다.
- '''2012년''' 대타의 비장의 카드로 기용되었다.[9] 7월 1일 DeNA전에서 결승 적시타를 쳐 "조지아 혼"상에 선정되었다.[10] 시즌 성적도 타율 .327, 출루율 .408을 기록했다.
- '''2013년''' 4월 21일 요미우리전에서 대타로 출전, 매시슨에게 동점 2점 적시타를 쳤다.[12] 이것이 2119번째이자 현역 마지막 안타였다.[13] 4월 23일 야쿠르트전에서 에무라 마사야에게 왼손목에 투구를 맞아 "왼쪽 척골골절" 진단을 받았다. 9월 27일 기자 회견을 갖고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14] 10월 3일 주니치전이 은퇴 경기가 되어, 8회 말 고쿠보 테쓰야의 대타로 출전, 고구마 료스케에게 투수 땅볼로 아웃되었다. 9회 초 우익수로 들어가 마쓰다 스타디움에서 처음으로 수비를 맡았다.[15]
8. 상세 정보
2013년 12월 26일, 히로시마 구단과 어드바이저 계약을 체결하여 구단 주최 이벤트 출연 및 상품 개발에 대한 조언 등을 제공했다.[17] 2014년부터는 주고쿠 신문의 야구 평론가[18]와 TV 아사히(2022년까지)·히로시마 홈 TV의 야구 해설자를 맡고 있다.
아마추어 골퍼로도 활동하며, 2021년 6월에는 주고쿠 아마추어 선수권에서 4위를 차지하여 일본 아마추어 골프 선수권 출전권을 획득했으나[19], 출전을 포기했다.[20]
- 슈퍼 베이스볼
- 히로시마 홈 TV가 제작하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 주최 경기의 히로시마현 로컬 방송 (카프 응원 중계 '승리 습관.')을 중심으로 해설을 담당했다. J SPORTS STADIUM에도 동시 배포되었다.
- 이나바 아쓰노리가 야구 일본 대표 감독으로 취임한 2018년부터는 TV 아사히 제작의 간토 로컬 · 지상파 전국 네트워크 중계나 BS 아사히와 TV 아사히 (한신전은 아사히 방송 TV, 소프트뱅크전은 규슈 아사히 방송)의 공동 제작에 의한 위성파 중계를 담당하는 빈도가 증가했다.
- 기타벳푸 마나부가 병 치료를 위해 활동을 휴지한 2020년 - 2022년에는 로컬 중계 담당이 증가했다.
- 2023년에는 기타벳푸의 사망으로 히로시마 홈 TV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하였다.
- 2014년 올스타전 제1전에서는 방송석 해설, 제2전에서는 리포터로 출연했다.
- 보도 스테이션 (수시 · 프로 야구 캐스터)
- 피타뉴스 (수시 · 코멘테이터)
- 닛폰 방송 쇼업 나이터 (2014년 6월 13일 세이부-히로시마전 게스트 해설)
8. 1. 수상·타이틀 경력
수상 | 연도 |
---|---|
베스트 나인 | 1992년 ~ 1994년, 1998년 |
골든 글러브상 | 1991년 ~ 1994년 |
월간 MVP | 1992년 9월, 1998년 4월·8월, 2000년 4월 |
우수 JCB・MEP상 | 1992년, 1997년, 1998년 |
JA 전농 Go・Go상 (매직 글러브상) | 1994년 6월 |
컴백상 | 2002년 |
올스타전 MVP | 2005년 제2차전 |
올스타전 우수 선수상 | 2007년 제1전 |
히로시마현민 영예상 | 2007년 9월 12일 |
다마나시민 영예상 | 2007년 9월 28일 |
‘조지아혼’상 | 2012년도 제7회 |
센트럴 리그 스타 대상 | 1996년 |
센트럴 리그 특별 공로상 | 2013년 |
8. 2. 주요 기록
기록 종류 | 내용 | 달성일 | 상대팀 | 구장 | 비고 |
---|---|---|---|---|---|
첫 출장 | 첫 선발 출장 | 1990년 6월 6일 | 야쿠르트 스왈로스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6번·중견수 |
첫 타석 | |||||
첫 안타 | |||||
첫 타점 | 상동 | 상동 | 상동 | 1회말에 니시무라 다쓰지로부터 적시 2루타 | |
첫 도루 | 1990년 6월 21일 | 야쿠르트 스왈로스 | 메이지 진구 야구장 | 7회초에 2루 안착(투수: 란바시 유키히토, 포수: 후루타 아쓰야) | |
첫 홈런 | 1991년 4월 6일 | 야쿠르트 스왈로스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1회말에 나이토 나오유키로부터 선두 타자 홈런 | |
통산 100홈런 | 1997년 7월 17일 | 주니치 드래건스 | 나고야 돔 | 1회초에 무라타 가쓰요시로부터 우월 2점 홈런, 역대 193번째 | |
통산 1000안타 | 1998년 8월 28일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 요코하마 스타디움 | 7회초에 아와노 히데유키로부터 중견 펜스를 직격한 2점 적시 2루타, 역대 189번째 | |
통산 1000경기 출장 | 1999년 7월 22일 | 한신 타이거스 | 한신 고시엔 구장 | 3번·우익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353번째 | |
통산 150홈런 | 2000년 4월 9일 | 한신 타이거스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8회말에 커트 밀러로부터 우월 역전 결승 만루 홈런, 역대 112번째 | |
통산 200홈런 | 2004년 4월 9일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3회말에 피트 워커로부터 우월 솔로 홈런, 역대 78번째 | |
통산 1500안타 | 2004년 5월 8일 | 요미우리 자이언츠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5회말에 마에다 유키나가로부터 좌중간에 2루타, 역대 84번째 | |
통산 5000타수 | 2004년 6월 4일 | 주니치 드래건스 | 나고야 돔 | 6회초에 아사쿠라 겐타로부터 우월 솔로 홈런 | |
통산 1500경기 출장 | 2004년 9월 10일 | 주니치 드래건스 | 나고야 돔 | 5번·좌익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142번째 | |
통산 250홈런 | 2005년 9월 28일 | 야쿠르트 스왈로스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7회말에 요시카와 마사히로로부터 우월 솔로 홈런, 역대 47번째 | |
통산 300개의 2루타 | 2005년 10월 4일 | 요미우리 자이언츠 | 도쿄 돔 | 5회초에 노마구치 다카히코로부터 우익선상 2루타, 역대 44번째 | |
통산 3000루타 | 2006년 8월 22일 | 한신 타이거스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4회말에 이가와 게이로부터 우전 안타, 역대 40번째 | |
통산 1000타점 | 2007년 8월 12일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7회말에 세스 그레이싱어로부터 2루 땅볼, 역대 31번째 | |
통산 2000안타 | 2007년 9월 1일 | 주니치 드래건스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8회말에 히사모토 유이치로부터 우전 2점 적시타, 역대 36번째 | |
통산 2000경기 출장 | 2008년 10월 7일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 요코하마 스타디움 | 9회초에 구라 요시카즈의 대타, 역대 41번째 | |
통산 350개의 2루타 | 2012년 4월 22일 | 주니치 드래건스 | MAZDA Zoom-Zoom 스타디움 히로시마 | 8회말에 아사오 다쿠야로부터 우익선상 적시 2루타, 역대 33번째 |
- '''시즌 타율 3할 이상''': 11회 (1992년 ~ 1994년, 1996년 ~ 1999년, 2002년, 2004년 ~ 2006년) ※ 역대 5위 타이.
- '''시즌 맹타상''': 23회 (1998년) ※ 센트럴 리그 역대 2위, 양대 리그 역대 3위 타이.[17]
- '''타격 10위권 진입''': 10회 (1992년 ~ 1994년, 1996년 ~ 1998년, 2002년, 2004년 ~ 2006년) ※ 역대 8위 타이.
- '''1경기 6안타''' (1997년 9월 19일) ※연장 경기에서의 2안타를 포함.[18]
- '''5경기 연속 홈런''' (1998년 8월 6일 ~ 8월 11일)
- '''4경기 연속 홈런''': 2회 (2005년 9월 2일 ~ 9월 7일, 2006년 9월 3일 ~ 9월 8일)
- '''11경기 연속 득점''' (1998년 4월 25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전(나고야 돔) ~ 5월 9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전(구마모토 구장))[19]
- '''37경기 연속 출루''' (2002년 7월 30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 9월 13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전(히로시마 시민 구장))[20]
- '''월간 안타 개수''': 41개 (2002년 8월), 39개 (1998년 8월)
- '''월간 타점 수''': 26타점 (1998년 8월)
- '''통산 만루 홈런''': 6개
- '''올스타전 출장''': 7회 (1993년, 1994년, 1996년, 1998년, 2005년, 2007년, 2008년)
- '''수위 타자 미획득에서의 통산 타율 .3023''' (5000타수 이상에서의 역대 최고)
8. 3. 등번호
연도 | 등번호 |
---|---|
1990년 ~ 1991년 | 51 |
1992년 ~ 1993년 | 31 |
1994년 ~ 2013년 | 1 |
참조
[1]
웹사이트
孤高の天才と呼ばれた名打者・前田智徳。ドラフト4位指名の理由【カープ名スカウトが語る】|carp|編集部コラム
https://www.hiroshim[...]
2021-09-14
[2]
간행물
月刊アスリートマガジン
株式会社アスリート
1995-04-20
[3]
뉴스
時事ドットコムニュース>特集>背番号1の天才打者、3つの記憶(3/6)
https://www.jiji.com[...]
[4]
방송
Get Sports
テレビ朝日
2014-01-13
[5]
기타
Get Sports プロ野球引退SP 去りゆく者たちへの讃歌
[6]
웹사이트
前田、代打で出場 復活への一歩
http://www.chugoku-n[...]
2010-03-04
[7]
웹사이트
広島前田智が2年ぶりの公式戦打席
https://www.nikkansp[...]
2010-03-28
[8]
웹사이트
2010年5月21日(金)福岡ソフトバンク vs 広島 試合速報
https://www.softbank[...]
null
[9]
웹사이트
【広島】前田智2点適時打「体が反応」
https://www.nikkansp[...]
2012-05-03
[10]
웹사이트
魂こもった打撃技術を置き土産に 第7回(7月上期) ジョージア魂賞受賞:広島東洋カープ 前田智徳選手
http://www.georgia.j[...]
null
[11]
웹사이트
安打【通算記録】
https://npb.jp/bis/h[...]
[12]
뉴스
前田智 いぶし銀打 151キロ初球「一振りで仕留められた」
https://www.sponichi[...]
스포니치
2013-04-22
[13]
웹사이트
前田智徳インタビュー 「闘い」との別れ 野球コラム
https://column.sp.ba[...]
2013-12-25
[14]
뉴스
前田智が引退表明 広島一筋24年、現役生活にピリオド
https://www.sponichi[...]
스포츠니폰
2013-09-27
[15]
뉴스
前田智 最終打席は投ゴロ マツダで初の守備も
https://www.sponichi[...]
스포츠니폰
2013-10-03
[16]
뉴스
前田智あいさつ「故障だらけの野球人生」も広島一筋のプロ生活に誇り
http://www.sponichi.[...]
스포츠니폰
2013-10-03
[17]
뉴스
広島 前田氏とアドバイザー契約、商品開発に助言
스포츠니폰
2013-12-26
[18]
뉴스
2014年2月1日からスポーツ面 「前田智徳の目」カープ見つめる
http://www.chugoku-n[...]
中国新聞
2014-01-17
[19]
웹사이트
【アマゴルフ】元カープ前田智徳が日本選手権切符 「うそでしょ」
https://www.chugoku-[...]
2021-06-18
[20]
웹사이트
日本アマチュアゴルフ選手権に中島啓太、杉原大河ら出場
https://mycaddie.jp/[...]
2021-06-28
[21]
웹사이트
前田智徳と高橋由伸 「平成最強の天才打者」はどっち? {{!}} 野球コラム
https://column.sp.ba[...]
2021-03-20
[22]
웹사이트
イチローが惚れた男〈天才打者前田智徳〉
https://middle-edge.[...]
2016-11-25
[23]
Youtube
【憲伸&前田】新庄監督への呟きが秋季キャンプで実現!! 天才前田智徳がたどり着いた“究極の左打ち”を【実演指導】
https://www.youtube.[...]
川上憲伸 カットボールチャンネル
2022-08-25
[24]
웹사이트
野村謙二郎「変わるしかなかった」【第10話】2人の“前田”とのエピソード|carp|連載|アスリートマガジンWEB(2/3)
https://www.hiroshim[...]
2020-06-01
[25]
웹사이트
下位指名からの下克上! カープで育った左の好打者たち。|carp|編集部コラム
https://www.hiroshim[...]
null
[26]
웹사이트
天才・前田智徳を本気にさせてくれ(前編)
http://www.ninomiyas[...]
2010-05-06
[27]
신문
日刊スポーツ
1999-02-27
[28]
웹사이트
広島カープの苦境を救え 天才・前田智徳、ただいま参上!
https://gendai.media[...]
現代ビジネス
2015-05-03
[29]
서적
落合博満の超野球学 バッティングの理屈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30]
웹사이트
広島の前田智引退・談話 時事ドットコム
http://ceron.jp/url/[...]
[31]
잡지
週刊プレイボーイ
null
[32]
웹사이트
【9月1日】2007年(平19)前田智徳、打たないわけにはいかなかった2000本安打
https://web.archive.[...]
[33]
신문
朝日新聞
2007-09-04
[34]
웹사이트
”育ての親”水谷実雄氏、引退した前田智徳氏との思い出を語る(THE PAGE)
https://news.yahoo.c[...]
2013-12-28
[35]
웹사이트
【広島】前田智号泣 水谷コーチに引退報告
https://www.nikkansp[...]
2013-10-02
[36]
간행물
新サムライ伝説
Number
1993-08-20
[37]
웹사이트
サムライ前田智徳秘話。「究極のマイナス思考」と「人生、平均の法則」
http://sportiva.shue[...]
[38]
Youtube
必見!「右半身で打つ」 和田一浩 打撃の極意【バッターズバイブル】
https://www.youtube.[...]
2021-05-14
[39]
간행물
Title
文藝春秋
2000-07
[40]
웹사이트
引退・前田に2位でCSを
https://www.ninomiya[...]
2013-10-01
[41]
웹사이트
【野球】「あんなにすがすがしい顔を見たことなかった」 広島・前田智徳選手の家族も快挙達成に感激
https://5ch-ranking.[...]
2007-09-02
[42]
웹사이트
第2弾!「選手プロデュースメニュー」発売開始
https://web.archive.[...]
2012-05-15
[43]
Youtube
メジャーリーガー・マエケンが語る 日本シリーズ勝負のカギ!! 前田健太×前田智徳が初コラボ!!!【独占対談】
https://www.youtube.[...]
2020-11-24
[44]
웹사이트
天才・前田智徳を本気にさせてくれ(後編)
https://www.ninomiya[...]
2010-05-07
[45]
간행물
Number
文藝春秋
2005-07-28
[46]
서적
あぶさん「戦線離脱」
My First BIG(コンビニコミック版)
2002-05
[47]
방송
人生が変わる1分間の深イイ話
2012-11-12
[48]
간행물
Number
文藝春秋
1993-09-05
[49]
간행물
Number
文藝春秋
1999-04-22
[50]
간행물
Title, Number
文藝春秋
1999-04-22
[51]
웹사이트
二宮清純「前田智徳、恩師は故郷にありて」(2/2)
https://gendai.media[...]
2013-10-18
[52]
뉴스
朝日新聞
1998-09-15
[53]
간행물
Athlete(アスリートマガジン)
株式会社アスリート
2000-05-20
[54]
서적
ベースボール・レコード・ブック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996-12
[55]
웹사이트
セントラル・リーグ表彰 {{!}} 2013年 表彰選手
https://npb.jp/award[...]
[56]
잡지
週刊ベースボール
2014-08-25
[57]
뉴스
中日、山本昌の背番号「34」を準永久欠番扱いしなかったことの是非
https://thepage.jp/d[...]
THE PAGE
2015-12-12
[58]
문서
[59]
문서
[60]
문서
[61]
문서
[62]
문서
[63]
문서
[64]
문서
[65]
문서
[66]
문서
[67]
문서
[68]
문서
[69]
문서
[70]
문서
[71]
뉴스
『サンデーステーション』ではメインキャスターを担当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