맬컴 프레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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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맬컴 프레이저(1930–2015)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인으로, 1975년부터 1983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의 22대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1955년 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국방부 장관, 교육 및 과학부 장관 등을 거쳤으며, 1975년 자유당 대표가 되어 총선에서 승리하며 총리가 되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외교 정책에 힘썼으며, 다문화주의와 난민 수용 정책을 펼쳤다. 1983년 총선에서 패배한 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국제 기구에서 활동하며 국제 문제 해결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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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맬컴 프레이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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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맬컴 프레이저 | John Malcolm Fraser |
| 출생일 | 1930년 5월 21일 |
| 출생지 | 빅토리아 주멜버른 |
| 사망일 | 2015년 3월 20일 |
| 사망지 | 빅토리아 주멜버른 |
| 안장 장소 | 멜버른 종합 묘지 |
| 정당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 다른 정당 | 연립 |
| 교육 | 튜더 하우스 학교 멜버른 문법 학교 |
| 모교 | 옥스퍼드 대학교 마그달렌 칼리지 |
| 친척 | 사이먼 프레이저 시니어 (조부) 사이먼 프레이저 주니어 (삼촌) |
| 배우자 | 타마라 베그스 (1956년 12월 9일 결혼) |
| 자녀 | 4명 |
| 직업 | 목축 농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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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력 | |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 총독 | 존 커 경 젤먼 카우언 경 니니안 스티븐 경 |
| 부총리 | 더그 앤서니 |
| 임기 시작 | 1975년 11월 11일 |
| 임기 종료 | 1983년 3월 11일 |
| 이전 | 고프 휘틀럼 |
| 다음 | 밥 호크 |
| 부대표 | 필립 린치 존 하워드 |
| 임기 시작 | 1975년 3월 21일 |
| 임기 종료 | 1983년 3월 11일 |
| 이전 | 빌리 스네든 |
| 다음 | 앤드루 피콕 |
| 총리 | 고프 휘틀럼 |
| 부대표 | 필립 린치 |
| 임기 시작 | 1975년 3월 21일 |
| 임기 종료 | 1975년 11월 11일 |
| 이전 | 빌리 스네든 |
| 다음 | 고프 휘틀럼 |
| 총리 | 윌리엄 맥마흔 |
| 임기 시작 | 1971년 8월 20일 |
| 임기 종료 | 1972년 12월 5일 |
| 이전 | 데이비드 페어번 |
| 다음 | 고프 휘틀럼 |
| 총리 | 존 고턴 |
| 임기 시작 | 1968년 2월 28일 |
| 임기 종료 | 1969년 11월 12일 |
| 이전 | 존 고턴 |
| 다음 | 나이절 보웬 |
| 총리 | 존 고턴 |
| 임기 시작 | 1969년 11월 12일 |
| 임기 종료 | 1971년 3월 8일 |
| 이전 | 앨런 페어홀 |
| 다음 | 존 고턴 |
| 총리 | 해럴드 홀트 존 맥이웬 존 고턴 |
| 임기 시작 | 1966년 1월 26일 |
| 임기 종료 | 1968년 2월 28일 |
| 이전 | 짐 포브스 |
| 다음 | 필립 린치 |
| 임기 시작 | 1982년 1월 5일 |
| 임기 종료 | 1983년 3월 31일 |
| 이전 | 윌리엄 맥마흔 경 |
| 다음 | 제임스 킬린 경 |
| 의회 | 오스트레일리아 |
| 임기 시작 | 1955년 12월 10일 |
| 임기 종료 | 1983년 3월 31일 |
| 이전 | 돈 맥로드 |
| 다음 | 데이비드 호커 |
| 훈장 | |
| 훈장 | AC CH PC |
| 기타 정보 | |
| 로마자 표기 | John Malcolm Fraser (존 맬컴 프레이저) |
2. 초기 생애
맬컴 프레이저는 1930년 5월 21일 빅토리아 주 멜버른 근교의 투락에서 태어나, 본가의 양 목장에서 자랐다.[1] 그는 1952년 옥스퍼드 대학교 모들린 칼리지에서 정치학·경제학 학위를 취득하고, 빅토리아 주 서부에 있는 본가 소유지를 잇기 위해 호주로 돌아왔다.
2. 1. 가족 배경
존 맬컴 프레이저는 1930년 5월 21일 멜버른 투락에서 우나 아놀드(옛 성은 울프)와 존 네빌 프레이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양쪽 모두 정치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1]아버지 존 네빌 프레이저는 와쿨 샤이어 의회에서 봉사했고, 2년 동안 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빌리 휴즈의 팬이었고 리처드 케이시의 친구였다.[1]
프레이저의 할아버지 사이먼 프레이저 경은 캐나다 노바스코샤 출신으로 1853년 호주에 도착하여 철도 계약업자로 재산을 모았다. 이후 목축 토지를 소유하며 "스쿼토크라시"의 일원이 되었다. 사이먼 프레이저는 식민지 빅토리아 의회 양원에서 모두 봉사했으며, 1890년대 여러 제헌 회의에서 빅토리아를 대표했다. 그는 1901년부터 1913년까지 연방 상원의 초대 의원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1]
프레이저의 외할아버지 루이스 울프는 뉴질랜드 더니딘에서 태어나 어릴 때 호주에 도착했다. 그는 유대인 혈통이었으며, 공인 회계사였다. 그는 1901년 상원 선거에 자유 무역가로 서호주에서 출마했지만, 400표를 얻는 데 그쳤다.[1]
2. 2. 유년 시절
프레이저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뉴사우스웨일스주 물라메인 근처 에드워드 강에 위치한 15000ha 규모의 양 목장인 '발풀-냥'에서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옥스퍼드 대학교 매그달렌 칼리지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지만, 변호사로 활동하지 않고 목축업자의 삶을 더 선호했다. 프레이저는 8살 때 심각한 폐렴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다. 그는 10살까지 홈스쿨링을 받았고, 이후 사우스 하이랜드에 있는 튜더 하우스 스쿨에 기숙했다.[1] 1940년부터 1943년까지 튜더 하우스에서, 1944년부터 1948년까지는 멜버른 문법 학교에서 중등 교육을 마쳤으며, 러스덴 하우스의 멤버였다.[1] 멜버른 문법 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부모님이 소유한 멜버른 콜린스 스트리트의 아파트에서 살았다.[1] 1943년, 프레이저의 아버지는 가뭄에 취약했던 '발풀-냥'을 매각하고 빅토리아주 웨스턴 디스트릭트의 '나린'을 구입했다.[1] 그는 어린 시절의 집이 팔린 것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 사실을 알게 된 날을 생애 최악의 날로 여겼다.[1]2. 3. 대학 시절
프레이저는 1949년에 매그덜렌 칼리지,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철학, 정치, 경제 (PPE)를 전공했으며 1952년 3등 명예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프레이저는 학문적으로 뛰어난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옥스퍼드에서의 시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배운 지적 각성의 시기로 여겼다.[1] 그의 대학 튜터는 해리 웰던(Thomas Dewar Weldon)이었으며, 그는 프레이저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옥스퍼드에서의 친구들로는 레이먼드 본햄 카터, 니콜라스 브라운-윌킨슨(Nicolas Browne-Wilkinson, Baron Browne-Wilkinson), 존 터너가 있었다.[1] 2학년 때는 앤 페어번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시인이 된 앤 리드와 교제했다.[1] 졸업 후, 프레이저는 법학 학위를 취득하거나 영국 육군에 입대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결국 호주로 돌아가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기로 결정했다.[1]3. 정치 경력
맬컴 프레이저는 1952년 호주로 돌아와 청년 자유당 활동을 시작하며 정치 경력을 쌓았다. 해밀턴 회의에 참석하고 지역 당 관계자들과 친분을 쌓았다.[2] 1953년 와논 선거구의 자유당 예비 선거에서 승리했고,[2] 1954년 1월부터 "하나의 호주"라는 제목의 라디오 방송을 1983년 정계 은퇴할 때까지 진행하며 대중적 지지 기반을 넓혔다.[3]
3. 1. 하원 의원 당선 (1955)
1954년 연방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6] 그러나 1955년 선거에서 와논 선거구에 출마하여 오스트레일리아 역사상 최연소(25세)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6]|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1차 득표율 | 1차 득표수 | 2차 득표율 | 2차 득표수 | 결과 | 당락 |
|---|---|---|---|---|---|---|---|---|---|
| 1954년 선거 | 하원의원 (워넌 선거구) | 21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49.98% | 18,492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2위 | 낙선 | |
| 1955년 선거 | 하원의원 (워넌 선거구) | 22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48.9% | 19,911표 | 59.3% | 24,183표 | 1위 | ![]() |
프레이저는 당시 의회에 입성한 25세로, 다른 의원들보다 4살이나 어렸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지 않은 최초의 인물이었다.[6]
3. 2. 내각 각료 (1966-1972)
Harold Holt영어 총리 내각에서 1966년 육군 장관으로 임명되어 베트남 전쟁 징병 프로그램을 주도했다.[9] 존 고턴 총리 하에서는 교육과학부 장관(1968-1969)과 국방부 장관(1969-1971)을 역임했다. 1971년 고턴 총리의 간섭을 비판하며 국방부 장관직을 사임했고, 이후 고턴 총리의 사임을 초래했다. 윌리엄 맥마흔 총리 내각에서 다시 교육과학부 장관(1971-1972)을 역임했다.3. 3. 야당 시절 (1972-1975)
1972년 선거에서 연립 여당이 패배한 후, 프레이저는 맥마흔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자유당 대표 자리를 놓고 경쟁한 다섯 명의 후보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존 고튼과 제임스 킬런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지만, 3차 투표에서 탈락했다. 빌리 스네든은 결국 5차 투표에서 나이젤 보웬을 단 한 표 차이로 이겼다. 자유당만으로 구성된 새로운 그림자 내각에서 프레이저는 1차 산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역할은 그를 주로 대중의 시야에서 벗어나게 하고, 연립 정부가 다시 집권하면 국민당의 일원에게 주어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굴욕으로 여겨졌다.[13] 1973년 8월 개편에서 스네든은 그를 자유당의 노사 관계 대변인으로 임명했다. 그는 퇴임하는 나이젤 보웬을 대신하여 외무를 담당하길 희망했지만, 그 역할은 앤드루 피콕에게 주어졌다.[14] 프레이저는 1974년 4월 발표된 당의 새로운 노사 관계 정책 개발을 감독했다. 이 정책은 연립 정부가 추진했던 정책보다 더 유연하고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언론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15] 프레이저의 전기 작가 필립 에어스에 따르면, "새로운 정책을 수립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대중적 이미지를 수정하고 전통적으로 적대적인 분열을 넘어 훌륭한 소통가로 부상하는 데 성공했다".[14]1974년 선거에서 자유당이 패배한 후, 프레이저는 11월에 스네든에게 지도력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이 도전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스네든의 여론 지지율은 계속 하락했고, 의회에서 휘틀럼을 이길 수 없었다. 프레이저는 1975년 3월 21일에 다시 스네든에게 도전했고, 이번에는 성공하여 자유당 대표이자 야당 대표가 되었다.
3. 4. 1975년 헌정 위기
휘틀럼 정부가 여러 장관 스캔들에 휩싸이자, 프레이저는 조기 총선을 통해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연립 상원 의원들에게 정부 예산안 처리를 지연시키도록 지시하여 정치적 교착 상태를 야기했다. 이 기간 동안 정부는 의회 밖에서 재정 지원을 모색했고, 총독 존 커 경은 1975년 11월 11일 휘틀럼을 총리직에서 해임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현재까지도 논란의 대상이다.[16]프레이저는 이러한 정치적 교착 상태를 끝내고 즉시 양원 해산 선거를 실시하는 조건으로 임시 총리로 임명되었다.
선거가 공고된 직후인 1975년 11월 19일, 프레이저에게 편지 폭탄이 배달되었으나, 그에게 전달되기 전에 발견되어 해체되었다. 비슷한 장치가 총독과 퀸즐랜드 주 요한 뱁케-피터슨 주지사에게도 보내졌다.[17][18]
4.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1975-1983)

1975년 선거에서 프레이저는 자유-국민당 연립을 이끌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연립은 총 127석 중 91석을 얻어 55석의 다수당을 확보했는데,[19] 이는 현재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역사상 최대 규모이다. 이후 1977년 선거에서도 연립은 승리하여 두 번째 임기를 이어갔다. 자유당은 이 두 선거에서 단독으로 과반수를 확보하여 국민당의 지지 없이도 통치할 수 있었지만, 상원에서 법안 통과를 위해 연립을 유지했다.
4. 1. 주요 정책
1975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선거와 1977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선거에서 연이어 승리한 맬컴 프레이저는 자유당-국민당 연립 정부를 이끌며 국내외 정책에서 중요한 변화를 추진했다.[19]프레이저 정부는 케인즈 경제학에 기반한 경제 정책을 펼쳤으나,[21] 1973년 석유 파동의 여파로 스태그플레이션과 높은 실업률을 겪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방송 공사(ABC) 등 공공 부문 예산을 삭감하기도 했다.[20]
이민 정책에서는 "재정착을 위한 난민 수용에 대한 인도적 약속"을 내세워,[27] 아시아계 이민과 난민 수용을 확대했다. 다문화주의를 지지하며 특별 방송 서비스(SBS)를 설립했다.[28]
외교적으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고 로디지아 백인 소수 통치를 비판하며 영연방 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병합을 인정하면서도 동티모르 난민에게 호주 망명을 허용했으며,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1980년 하계 올림픽 모스크바 보이콧을 지지했다.
4. 1. 1. 국내 정책
맬컴 프레이저는 휘틀럼 정부의 일부 프로그램(미디어부 등)을 빠르게 해체하고, 보편적 건강 보험 시스템인 메디뱅크를 대대적으로 변경했다. 초기에는 휘틀럼의 세금 및 지출 수준을 유지했지만, 곧 1인당 실질 세금 및 지출은 증가하기 시작했다. 1973년 석유 파동 이후 급등했던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데 성공했는데, 당시 OPEC 국가들은 욤 키푸르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지한 국가에 석유 판매를 거부했었다. 프레이저의 "레이저 갱(Razor Gang)"은 오스트레일리아 방송 공사(ABC)를 포함한 많은 연방 공공 부문의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20]프레이저는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케인즈 경제학을 실천했으며,[21] 이는 그의 임기 동안 예산 적자를 기록한 것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난다.[22] 그는 자유당의 마지막 케인즈주의 총리였다. 오랫동안 자유당의 우파로 간주되었지만, 정치적 적들이 예측했고 일부 지지자들이 원했던 급진적인 보수 프로그램은 수행하지 않았다. 프레이저의 비교적 온건한 정책은 재무부 장관(Treasurer) 존 하워드와 재정 보수주의 및 경제 자유주의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다른 장관들을 실망시켰다.[21] 정부의 경제 기록은 1973년 석유 파동의 지속적인 영향으로 부분적으로 발생한 "스태그플레이션"과 함께 두 자릿수의 실업률 및 인플레이션으로 얼룩졌다.
프레이저는 이민 정책과 관련해서도 비평가들을 놀라게 했다. 1977년 내각 문서에 따르면, 프레이저 정부는 "재정착을 위한 난민 수용에 대한 인도적 약속"을 공식 정책으로 채택했다.[27] 프레이저의 목표는 아시아 국가로부터의 이민을 확대하고 더 많은 난민이 호주에 입국하도록 허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다문화주의를 강력히 지지했으며, 휘틀람 정부에서 처음 설립된 라디오 방송국을 기반으로 정부 지원 다국어 라디오 및 텔레비전 네트워크인 특별 방송 서비스(SBS)를 설립했다.[28]
SBS를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저 정부는 국영 방송사 오스트레일리아 방송 공사(ABC)에 대해 엄격한 예산 삭감을 시행했다. ABC는 연립 정부로부터 ''오늘의 이 날(This Day Tonight)''과 ''포 코너스(Four Corners)''를 포함한 TV 프로그램과 ABC의 새로운 청소년 대상 라디오 방송국 더블 제이(Double Jay)의 "좌파 편향" 및 "불공정" 보도에 대해 반복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삭감의 결과 중 하나는 더블 제이가 첫 번째 방송국인 전국 청소년 라디오 네트워크를 설립하는 계획이었는데, 이 네트워크는 여러 해 동안 지연되었고 1990년대까지 실현되지 못했다.
프레이저는 호주 원주민에게 노던 준주의 전통적인 토지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제정했지만, 보수적인 주 정부에 토지 권리 법을 강요하는 것은 거부했다.
4. 1. 2. 이민 정책
프레이저는 이민 정책과 관련하여 비평가들을 놀라게 했다. 1977년 내각 문서에 따르면, 프레이저 정부는 "재정착을 위한 난민 수용에 대한 인도적 약속"을 공식 정책으로 채택했다.[27] 프레이저의 목표는 아시아 국가로부터의 이민을 확대하고 더 많은 난민이 호주에 입국하도록 허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다문화주의를 강력히 지지했으며, 휘틀람 정부에서 처음 설립된 라디오 방송국을 기반으로 정부 지원 다국어 라디오 및 텔레비전 네트워크인 특별 방송 서비스(SBS)를 설립했다.[28]4. 1. 3. 외교 정책
프레이저는 총리로서 외교 정책에 특히 적극적이었다. 그는 영연방을 지원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를 위한 캠페인을 벌였으며, 논란이 많았던 1981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럭비 유니온 투어를 위해 호주 영토에서 연료를 보급하려는 스프링복 럭비팀의 항공기 운항을 허가하지 않았다.[23] 하지만, 1977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키 보트 낚시팀의 이전 투어는 뉴질랜드로 가는 길에 호주를 통과하도록 허용되었고, 이 수송 기록은 내각 명령에 의해 억제되었다.[24]프레이저는 로디지아의 백인 소수 통치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1979년 영연방 회의에서 프레이저는 나이지리아의 동료와 함께 새로 선출된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를 설득하여 내부 합의 짐바브웨 로디지아 정부를 인정하지 않도록 했다. 대처는 이전에 이를 인정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 후, 랭커스터 하우스 협정이 체결되었고 로버트 무가베는 독립 짐바브웨의 지도자로 1980년 선거에서 선출되었다. 던컨 캠벨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프레이저가 백인 소수 통치를 종식시키는 데 "주요 설계자"였다고 말했다.[25] 탄자니아 대통령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프레이저의 역할을 "많은 부분에서 매우 중요했다"고 말했으며, 잠비아 대통령 케네스 카운다는 그의 기여를 "필수적"이라고 불렀다.[26]
프레이저 재임 기간 동안 호주는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병합을 인정했지만, 많은 동티모르 난민에게 호주 망명이 허용되었다.
프레이저는 미국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1980년 하계 올림픽 모스크바 보이콧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일부 스포츠 단체가 참가하지 않도록 설득했지만, 호주 올림픽 위원회가 모스크바 올림픽에 팀을 파견하는 것을 막으려 하지는 않았다.
4. 2. 1983년 총선 패배와 정계 은퇴
1980년대 초반 경기 침체와 당내 갈등으로 인해 프레이저의 정치적 입지는 약화되었다. 1982년 초, ACTU 의장 출신 밥 호크는 여론 조사에서 프레이저와 노동당 대표 빌 헤이든을 앞섰다. 프레이저는 노동당 내분 사태를 이용하여 1982년 가을 조기 총선을 계획했지만, 허리 부상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회복 직후, 자유당은 플린더스 보궐선거에서 간신히 승리했고, 이에 프레이저는 헤이든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29]1983년 2월 3일, 프레이저는 이중 해산 선거를 요청했지만, 헤이든은 프레이저가 정부 청사로 가기 불과 두 시간 전에 노동당 대표직에서 사임했고, 밥 호크가 그를 대신하게 되었다. 프레이저는 "한 번에 두 명의 노동당 지도자를 날려 버리겠다"라고 반응했지만, 노동당은 여론 조사에서 급증했다.[29]
1983년 3월 5일 선거에서 연합은 24석을 잃는 대패를 당했고, 이는 연방 이후 비노동당 정부의 최악의 패배였다. 프레이저는 즉시 자유당 대표직 사임을 발표하고 1983년 3월 11일 총리직에서 공식적으로 사임했으며, 두 달 후 의회에서 은퇴했다. 그는 현재까지 지방 선거구 출신 마지막 비임시 총리이다.
5. 정계 은퇴 이후
프레이저는 정계에서 은퇴한 후 국제 연합과 영국 연방에서 활동하며 국제 문제 해결에 힘을 쏟았다. 1985년 유엔 남아프리카 다국적 기업 역할에 관한 저명인사 패널 의장을 맡았고, 1985년부터 1986년까지는 영연방 남아프리카 저명인사 그룹 공동 의장(호크 총리 임명)을 역임했다.[59] 1989년부터 1990년까지는 유엔 사무총장 아프리카 상품 문제 전문가 그룹 의장을 맡았다.[59]
1990년부터 1995년까지 국제 CARE 기구의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국제적인 인도주의 활동에 앞장섰다.[59] 2006년에는 아시아 태평양 군사 법률 센터의 석좌 연구원으로 임명되었고, 2007년 10월에는 "테러의 그림자 속에서 안보를 찾아서: 법치의 중요성"이라는 주제로 첫 번째 교수 강연을 했다.[30]
2009년, 프레이저는 토니 애보트가 자유당 대표 경선에서 승리하자 자유당이 "더 이상 자유당이 아닌 보수당"이라며 탈당했다.[43][44]
그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외교 정책에 대한 존 하워드의 제휴를 비판하며, 이것이 호주와 아시아의 관계를 악화시킨다고 보았다.[32][33] 망명 신청자에 대한 하워드의 정책에 반대했으며, 호주 공화국을 지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32][33]
2007년, 프레이저는 겟업! 회원들에게 보낸 공개 서한에서 이라크 정책 변경 캠페인을 지지하도록 권장했다.[37] 그는 미국이 이라크 및 중동 문제에 대한 외교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호주군은 크리스마스 전에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8]
2011년, 프레이저는 핵확산 금지 조약 서명국이 아닌 인도에 우라늄 수출을 허용하기로 한 호주 정부의 결정을 강하게 비판했다.[45] 2012년에는 호주에 주둔하는 미국 군사력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밝혔다.[46] 또한, 호주와 서방 세계의 인권 상황을 비판하며, 비밀 구금 허용 법률과 정보 기관 권한 확대를 우려했다.[47]
2013년, 프레이저는 오스트레일리아 녹색당 상원 의원 사라 핸슨-영의 재선을 지지하는 텔레비전 광고에 출연하여 그녀가 "합리적이고 공정한 목소리"를 내왔다고 평가했다.[48]
프레이저는 ''위험한 동맹''(멜버른 대학교 출판부, 2014)이라는 책을 통해 미국 예외주의와 미국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미국에 대한 "전략적 의존"을 경고했다.[49][50][51]
6. 사망과 유산
맬컴 프레이저는 2015년 3월 20일 짧은 지병을 앓은 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7][58] 그의 사망은 전임자이자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고프 휘틀럼이 사망한 지 5개월 만이었다.[59]
그의 장례식은 2015년 3월 27일 멜버른의 스코츠 교회에서 국장으로 거행되었다.[62] 유해는 멜버른 일반 묘지의 총리 정원에 안치되었다.
2004년 프레이저는 멜버른 대학교를 그의 개인 서류와 도서관의 공식 보관자로 지정하여 대학교에 맬컴 프레이저 컬렉션을 만들었다.[63]
2018년 6월, 그는 멜버른 북서부 교외의 호주 선거구인 프레이저 선거구의 명명으로 영예를 얻었다.[64]
7. 역대 선거 결과
|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1차 득표율 | 1차 득표수 | 2차 득표율 | 2차 득표수 | 결과 | 당락 |
|---|---|---|---|---|---|---|---|---|---|
| 1954년 선거 | 하원의원 (워넌 선거구) | 21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49.98% | 18,492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2위 | 낙선 | |
| 1955년 선거 | 하원의원 (워넌 선거구) | 22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48.9% | 19,911표 | 59.3% | 24,183표 | 1위 | |
| 1958년 선거 | 하원의원 (워넌 선거구) | 23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48.2% | 20,550표 | 62.3% | 25,591표 | 1위 | |
| 1961년 선거 | 하원의원 (워넌 선거구) | 24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48.4% | 20,833표 | 63.8% | 27,466표 | 1위 | |
| 1963년 선거 | 하원의원 (워넌 선거구) | 25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51.9% | 22,503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 1966년 선거 | 하원의원 (워넌 선거구) | 26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53.3% | 23,220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 1969년 선거 | 하원의원 (워넌 선거구) | 27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51.3% | 23,711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 1972년 선거 | 하원의원 (워넌 선거구) | 28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46.1% | 21,760표 | 56.0% | 26,445표 | 1위 | |
| 1974년 선거 | 하원의원 (워넌 선거구) | 29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54.8% | 28,117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 1975년 선거 | 하원의원 (워넌 선거구) | 30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63.3% | 33,290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 1977년 선거 | 하원의원 (워넌 선거구) | 31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56.7% | 35,640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 1980년 선거 | 하원의원 (워넌 선거구) | 32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58.4% | 37,680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 1983년 선거 | 하원의원 (워넌 선거구) | 33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57.6% | 37,792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8. 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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