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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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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맹광섭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심판, 행정가로 활동했다. 선수 시절에는 공격수로 육군 병참단 축구단 등에서 뛰었으며, 1956년 최우수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심판으로 활동하며 국제 심판 자격을 얻어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킹스컵 등에서 심판을 맡았으며,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과 한국실업축구연맹 심판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89년 K리그 경기 중 발생한 심판 폭행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심판위원장에서 사퇴했다.

2. 선수 경력

서울특별시 출신으로,[1] 전후 육군 병참단 축구단에서 공격수로 활동하며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1956년에는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소속으로 '육군축구대회' 우승에 기여했으며,[2] 같은 해 대한축구협회가 선정한 최우수선수 30명 명단에 포함되었다.[6] 1957년에는 1958년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 예비 명단에 선발되었으나 최종 명단에는 들지 못했다.[9][10] 이후 경평대항축구전 등에 참가했으며,[11] 1962년 재창단한 서울특별시 경찰국 축구단에 합류해 주장을 맡았다.[12]

2. 1. 주요 활약

서울특별시 출신으로,[1] 전후 육군 병참단 축구단에서 공격수로 활동하였다. 1956년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과의 '육군축구대회'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어 팀 우승에 기여했으며,[2] 같은 해 1956년 AFC 아시안컵 예선을 위해 방한한 필리핀과의 친선경기에서 패널티킥 선제골을 기록하며 팀의 3-0 승리를 도왔다.[3][4] 또한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의 1956년 AFC 아시안컵 예선 경기 직후 열린 친선경기에서는 사우스 차이나 AA와 맞붙은 '전서울군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5]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1956년 대한축구협회가 선정한 최우수선수 30명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6]

1957년에는 '이승만 탄생 기념 경축 전국 축구대회'에서 팀의 우승에 일조했으며,[7][8] 같은 해 1958년 아시안 게임에 출전할 국가대표팀 예비 명단에 선발되었으나 최종 명단에서는 제외되었다.[9][10] 이후 1960년 AFC 아시안컵을 앞두고 열린 경평대항축구전에 '서울축구구락부' 소속으로 참가했으며,[11] 1962년 재창단한 서울특별시 경찰국 축구단에 합류해 주장을 맡았다.[12]

선수 은퇴 후에는 철도청 축구단 코치로 활동했으며,[13][14] 축구 심판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1971년 중앙대학교동국대학교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춘계 대회 경기에서 오심 논란으로 경기가 중단되고 경찰이 투입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15][16][17] 같은 해 한국실업축구연맹 이사로 임명되었고,[18] 1973년에는 한국실업축구연맹 경기위원장으로 부임했다.[19] 또한 1973년 국제축구연맹(FIFA) 국제 심판으로 선임되어[20]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킹스컵 심판으로 배정받았다.[21][22]

1974년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 주심을 맡았으나, 경기 종료 3분 전 고려대학교의 패널티킥 선언에 연세대학교 측이 반발하며 선수단을 철수시켜 연세대학교의 기권패가 선언되었다.[23] 이 사건은 언론의 비판을 받았으나,[24][25]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회는 해당 판정이 정당했다고 결론 내리고 연세대학교에 경고 처분을 내렸다.[26][27][28] 그 해 대한축구협회가 지정한 심판원급별제도규정에서 1급 심판으로 분류되었다.[29]

1975년 이란에서 열린 크라운 프린스컵 심판으로 배정되었고,[30] 같은 해 한국실업축구연맹 심판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31] 그러나 그 해 한일은행 축구단과 상업은행 축구단의 대통령배 금융단 축구대회 경기 도중 판정에 불복한 한일은행 선수 최규익에게 폭행당했으며, 트레이너 최명규의 폭언과 경기장 난입으로 경기가 중단되었다. 경기 후에는 한일은행 선수 김명규에게 다시 폭행당하자 해당 대회 심판 불참을 선언했다.[32][33] 같은 해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는 서울은행 축구단 선수 문동일에게 폭언을 듣는 일도 있었다.[34]

1976년 한국실업축구연맹 전형위원회에 포함되어 새로운 집행부에서도 심판위원장에 유임되었으며,[35][36] 우루과이에서 열린 세계 대학생 선수권 대회 심판으로 활동했다.[37] 같은 해 한국고등학교축구연맹전 결승전에 관전하러 갔다가 불참한 심판 대신 투입되기도 했다.[38]

1977년에는 두 차례 판정 관련 사건에 연루되었다. 서울시청 축구단과 조홍은행 축구단의 전국실업축구연맹전 경기에서는 판정에 불복한 서울시청 선수 문영서, 김창호에게 폭언 및 폭행을 당했고, 도재용 감독의 선수단 철수 시도로 경기가 중단되었다.[39] 이 사건으로 도재용 감독은 1년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40] 또한 서울시청 축구단한양대학교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도 주심을 맡았으나, 서울시청 선수 이상철, 최기봉, 고홍석, 문영서가 판정에 불복하여 거칠게 항의하자 네 선수에게 경고를 주었지만, 박종환 감독이 재차 항의하며 선수단을 철수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51] 그 해 킹스컵 심판으로도 배정받았다.[41]

1978년 기업은행 축구단과 주택은행 축구단의 대통령배 금융단 축구대회 경기에서 폭우로 인해 전반전 종료 후 대한민국 축구 사상 최초로 '일시중단'을 선언했다.[42] 같은 해 1978년 아시안 게임 축구 심판으로 선정되었으며,[43] 대한축구협회 '축구인의 밤' 행사에서 유공자 표창을 받았다.[44] 이듬해인 1979년 고연전 주심을 맡았으나, 경기 종료 3분 전 양 팀 선수 간 난투극이 벌어지고 고려대학교 선수단이 퇴장하자 경기 중단을 선언했다.[45]

1980년에는 한국실업축구연맹 심판위원장과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을 겸임했다.[46][47] 그 해 한국실업축구연맹이 할렐루야 축구단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자선경기에 출전했던 선수들의 자격을 박탈하자, 대한축구협회가 이에 반발하며 전국실업축구연맹전에 파견했던 심판들을 철수시킬 때 맹광섭도 복귀했다.[48] 같은 해 전국대학축구연맹전에서 심판상을 수상했으며,[49]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심판으로 배정받았다.[50] 1981년 FIFA 국제 심판에서 은퇴했다.[52]

이후 철도청 축구단 감독을 맡았고,[53] 1984년 김영진의 후임으로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 직무대리를 역임했다.[54] 1985년 대한축구협회 이사 및 심판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55][56] 1986년과 1987년 최순영 체제, 이후 이종환 과도 체제에서도 심판위원장직을 유지했다.[57][58][59][60] 1989년 대한축구협회 상임집행이사회에 포함되었으나,[61][62] 같은 해 일화 천마의 박종환 감독이 유공 코끼리와의 한국프로축구대회 경기에서 물의를 일으켜 출장 정지 처분을 받은 상태에서, 포항제철 아톰즈와의 경기 중 주심 임정식에게 폭력을 행사해 추가 징계를 받은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심판위원장에서 사퇴했다.[63] 1990년에는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맡았다.[64]

1993년부터 '한국 OB 축구회' 감사를 지냈으며,[65] 여러 차례 '경평 OB 대항축구전'에 '서울 OB팀' 단장으로 참여했다.[66][67] 2010년에는 공로패를 받았다.[68]

2011년 12월 13일 별세하였다.[69]

3. 심판 경력

선수 생활을 마감한 후 철도청 축구단 코치를 거쳐[13][14] 축구 심판으로 활동했다. 1973년 국제축구연맹(FIFA) 소속 국제 심판으로 선임되어[20]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킹스컵, 이란의 크라운 프린스컵, 우루과이 세계 대학생 선수권 대회, 1978년 아시안 게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등 다수의 국제 대회에서 심판으로 활동했다.[21][22][30][37][43][50]

국내에서는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대통령배 금융단 축구대회, 전국실업축구연맹전, 고연전, 한국프로축구대회 등 여러 주요 대회의 심판을 맡았다. 그러나 활동 기간 동안 오심 논란이나 선수 및 감독의 판정 불복, 경기 중단 사태 등 여러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15][16][17][23][32][33][39][45][51] 1978년 기업은행 축구단과 주택은행 축구단의 대통령배 금융단 축구대회 경기에서는 폭우로 인해 대한민국 축구 사상 최초로 '일시중단'을 선언하기도 했다.[42]

심판 활동과 더불어 축구 행정가로도 활동했다. 1971년 한국실업축구연맹 이사를 시작으로[18] 1973년 한국실업축구연맹 경기위원장,[19] 1975년, 1976년, 1980년에는 연맹 심판위원장을 역임했다.[31][36][46] 또한 대한축구협회에서는 1980년 심판위원,[47] 1984년 심판위원장 직무대리,[54] 1985년부터 1989년까지 이사 및 심판위원장을 역임했다.[55][56][57][58][61][62] 1978년에는 대한축구협회 '축구인의 밤' 행사에서 유공자 표창을 받았으며,[44] 1980년 전국대학축구연맹전에서는 심판상을 수상했다.[49]

1981년 FIFA 국제 심판에서 은퇴했으며,[52] 1989년 한국프로축구대회에서 발생한 박종환 감독의 심판 폭행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직에서 사퇴했다.[63] 이후에도 1990년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맡았고,[64] 1993년부터 '한국 OB 축구회' 감사,[65] '경평 OB 대항축구전' 서울 OB팀 단장 등으로 활동하며 축구계와 인연을 이어갔다.[66][67] 2010년에는 공로패를 받았다.[68]

3. 1. 주요 심판 활동

선수 생활을 마감한 뒤에는 철도청 축구단의 코치로 활동했으며,[13][14] 이후 축구 심판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심판 활동 초기인 1971년, 중앙대학교동국대학교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춘계 대회 경기에서 오심 논란에 휘말렸다. 이 판정 문제로 경기가 10여 분간 중단되고 경찰까지 투입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15][16][17] 같은 해 한국실업축구연맹의 이사로 임명되었고,[18] 1973년에는 한국실업축구연맹의 경기위원장으로 부임했다.[19] 또한 1973년 국제축구연맹(FIFA) 소속 국제 심판으로 선임되어,[20]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킹스컵 등 국제 대회의 심판으로 활동했다.[21][22]

그러나 국내 경기에서는 여러 차례 판정 논란과 불미스러운 사건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1974년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 주심을 맡았을 때, 경기 종료 3분 전 고려대학교의 패널티킥 선언에 연세대학교 측이 강하게 반발하며 선수단을 철수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연세대학교의 기권패로 경기가 마무리되었고,[23] 이 사건은 언론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으며 큰 논란이 되었다.[24][25] 대한축구협회는 심판위원회를 열어 맹광섭과 감독관 정남식의 의견을 들은 뒤, 페널티킥 판정이 정당했다고 결론 내리고 연세대학교에 경고 처분을 내렸다.[26][27][28] 같은 해 대한축구협회가 제정한 심판원급별제도규정에서 1급 심판으로 분류되었다.[29]

1975년에는 이란에서 열린 크라운 프린스컵 심판으로 배정받았고,[30] 같은 해 한국실업축구연맹의 심판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31] 하지만 그 해 대통령배 금융단 축구대회 중 한일은행 축구단과 상업은행 축구단의 경기에서 판정에 불복한 한일은행 선수 최규익에게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맹광섭이 최규익에게 퇴장을 선언하자 트레이너 최명규까지 경기장에 난입해 폭언을 하면서 경기가 10여 분간 중단되었다. 심지어 경기 후 경기장 밖에서 한일은행 선수 김명규에게 다시 폭행을 당하자, 맹광섭은 해당 대회 심판 불참을 선언하였다.[32][33] 같은 해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의 주심을 맡았으나 대회 도중 서울은행 축구단의 문동일에게 폭언을 들었으며, 이로 인해 상벌위원회가 개최되어 폭언을 가한 문동일이 경고 처분을 받았다.[34]

1976년에는 한국실업축구연맹의 새로운 집행부 구성을 위한 전형위원회에 포함되었으며,[35] 새 집행부에서는 심판위원장에 유임되었다.[36] 또한 우루과이에서 개최된 세계 대학생 선수권 대회의 심판으로 배정받았으며,[37] 같은 해 벌어진 한국고등학교축구연맹전 결승전 관전 목적으로 경기장을 찾았다가 해당 경기에 무단으로 불참한 심판 대신 맹광섭이 심판으로 투입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38]

1977년 서울시청 축구단과 조홍은행 축구단과의 전국실업축구연맹전 경기에서 주심을 맡았으나 판정에 불복한 서울시청 선수인 문영서와 김창호에 의해 폭언 및 폭행을 당하자 맹광섭은 두 선수의 퇴장을 선언했지만 서울시청의 도재용 감독이 선수단 철수를 시도하며 경기가 10여분 중단되었으며,[39] 이로 인해 상벌위원회가 개최되어 폭언을 가한 도재용 감독이 1년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40] 그리고 그 해 킹스컵의 심판으로 배정받았다.[41] 또한 1977년 서울시청 축구단한양대학교와의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 주심을 맡았으나 서울시청 선수인 이상철, 최기봉, 고홍석, 문영서가 판정에 불복하여 거칠게 항의하자 맹광섭은 네 선수에게 경고를 주었지만 서울시청의 박종환 감독이 재차 항의하며 선수단을 철수시키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으며,[51]

1978년 기업은행 축구단과 주택은행 축구단과의 대통령배 금융단 축구대회 경기 도중 폭우로 인해 전반전 종료 후 대한민국 축구 사상 최초로 '일시중단'을 선언하는 기록을 남겼으며,[42] 1978년 아시안 게임의 축구 분야 대한민국 심판으로 선정되었다.[43] 또한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1978년 개최된 대한축구협회 '축구인의 밤' 행사에서 유공자 표창을 받았으며,[44] 1979년 열린 고연전의 주심을 맡았으나 경기 종료 3분전 양 팀간 집단 난투극이 벌어진 뒤 고려대학교 선수단이 경기장 밖으로 퇴장하자 경기 중단을 선언하였다.[45]

1980년에는 한국실업축구연맹의 심판위원장 및 대한축구협회의 심판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46][47] 그 해 한국실업축구연맹에서 할렐루야 축구단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자선경기에 출전했던 선수들의 대회 출전 자격을 박탈한 것에 대해 대한축구협회 측이 반발하여 전국실업축구연맹전에 파견되었던 심판들을 철수시키자 맹광섭 또한 복귀하였다.[48] 그리고 같은 해 개최된 전국대학축구연맹전 대회에서 심판상을 수상했으며,[49]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의 심판으로 배정받았다.[50] 1981년 국제축구연맹 소속 국제 심판에서 은퇴를 선언하였다.[52]

국제 심판 은퇴 후에는 철도청 축구단의 감독으로 활동했으며,[53] 1984년 김영진의 후임으로 대한축구협회의 심판위원장 직무대리를 맡았다.[54] 이후 1985년 대한축구협회의 이사 및 심판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55][56] 1986년 심판위원장에 유임되었다.[57] 그 뒤 1987년 출범한 최순영 체제의 대한축구협회 집행부의 심판위원장으로 유임되었으며,[58] 그 해 최순영이 사퇴하고 집행부가 이종환 과도 체제로 운영된 이후에도 계속 심판위원장을 맡았다.[59][60] 또한 1989년 대한축구협회의 심판위원장을 유지하며 상임집행이사회에 포함되었으나,[61][62] 같은 해 9월 2일 일화 천마포항제철 아톰즈와의 한국프로축구대회 경기에서 주심을 맡은 임정식에게 박종환 일화 천마 감독이 폭력을 가해 1년 자격 정지 처분이 추가로 내려진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심판위원장에서 사퇴하였다. (박종환 감독은 이전 8월 5일 유공 코끼리와의 경기에서 물의를 빚어 이미 18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은 상태였다.)[63] 그리고 1990년 대한축구협회의 이사를 맡았다.[64]

이후 1993년부터 '한국 OB 축구회'의 감사를 지냈으며,[65] 다수의 '경평 OB 대항축구전'에 '서울 OB팀'의 단장으로 참여하기도 했다.[66][67] 그 뒤 2010년 공로패를 수여받았다.[68]

2011년 12월 13일 세상을 떠났다.[69]

3. 2. 논란 및 사건

1971년 중앙대학교동국대학교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춘계 대회 경기에서 주심을 맡았으나, 오심 논란으로 경기가 10여 분간 중단되고 경찰까지 투입되는 상황이 발생했다.[15][16][17]

1974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고려대학교 vs 연세대학교) 주심을 맡았다. 경기 종료 3분 전, 고려대학교의 패널티킥을 선언하자 연세대학교 측이 강하게 반발하며 선수단을 철수시켰다. 이로 인해 경기가 중단되었고, 연세대학교의 기권패로 처리되어 고려대학교가 우승했다.[23] 해당 판정은 언론의 비판을 받으며 논란이 되었지만,[24][25] 대한축구협회는 심판위원회를 열어 맹광섭과 감독관 정남식의 의견을 청취한 뒤, 페널티킥 판정이 정당했다고 결론 내리고 연세대학교에 경고 처분을 내렸다.[26][27][28]

1975년 대통령배 금융단 축구대회 중 한일은행 축구단과 상업은행 축구단의 경기에서는 판정에 불복한 한일은행 선수 최규익에게 폭행을 당했다. 맹광섭이 최규익에게 퇴장을 선언하자, 한일은행 트레이너 최명규가 경기장에 난입해 폭언을 하면서 경기가 10여 분간 중단되었다. 경기 후에는 경기장 밖에서 한일은행 선수 김명규에게 추가로 폭행을 당했고, 결국 맹광섭은 해당 대회 심판 불참을 선언했다.[32][33] 같은 해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는 서울은행 축구단 선수 문동일로부터 폭언을 듣는 일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문동일은 상벌위원회에서 경고 처분을 받았다.[34]

1977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서울시청 축구단과 조홍은행 축구단의 경기에서도 판정 시비가 있었다. 판정에 불복한 서울시청 선수 문영서와 김창호에게 폭언 및 폭행을 당하자 맹광섭은 두 선수의 퇴장을 선언했다. 그러나 서울시청 도재용 감독이 선수단 철수를 시도하며 경기가 10여 분간 중단되었다.[39] 이 사건으로 도재용 감독은 상벌위원회로부터 1년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40] 같은 해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서울시청 축구단 vs 한양대학교)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판정에 불복한 서울시청 선수 이상철, 최기봉, 고홍석, 문영서가 거칠게 항의하자 맹광섭은 경고를 주었으나, 서울시청박종환 감독이 이에 재차 항의하며 선수단을 철수시켰다.[51]

1979년 정기 고연전 주심을 맡았을 때는 경기 종료 3분 전 양 팀 선수들 간의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후 고려대학교 선수단이 경기장을 이탈하자 경기 중단을 선언했다.[45]

1989년 9월 2일, 한국프로축구대회 일화 천마포항제철 아톰즈의 경기에서, 이전 사건으로 18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은 상태였던 일화 천마의 박종환 감독이 주심 임정식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종환 감독은 이 일로 1년 자격 정지 추가 징계를 받았으며, 당시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이었던 맹광섭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심판위원장직에서 사퇴했다.[63]

4. 행정 경력

선수 생활을 마친 뒤 철도청 축구단 코치를 시작으로 지도자 및 행정가의 길을 걸었다.[13][14] 축구 심판으로도 활동하여 1973년 국제축구연맹(FIFA) 국제 심판으로 선임되었고,[20] 1981년까지 국내외 주요 경기에서 활약했다.[52] 한국실업축구연맹대한축구협회에서 이사, 경기위원장, 심판위원장 등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축구 행정 발전에 기여했다.[18][19][31][36][47][55][56][57][58][61][62] 1985년부터 1989년까지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을 지냈으며,[55][56][57][58][61][62] 이후 1990년 협회 이사를 맡았다.[64] 행정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는 '한국 OB 축구회' 감사[65] 및 '경평 OB 대항축구전' 서울 OB팀 단장[66][67] 등으로 활동하며 축구계 원로로서 역할을 했다. 1978년 대한축구협회 유공자 표창,[44] 1980년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심판상,[49] 2010년 공로패[68] 등을 수상했다. 2011년 12월 13일 별세했다.[69]

4. 1. 주요 행정 활동

선수 생활을 정리한 후 철도청 축구단 코치로 활동했으며,[13][14] 이후 주요 축구 경기에서 심판으로 활동했다. 1971년 중앙대학교동국대학교 간의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춘계 대회 경기에서는 오심 논란으로 경기가 10여 분간 중단되고 경찰이 투입되는 일이 있었다.[15][16][17]

1971년 한국실업축구연맹 이사로 임명되었고,[18] 1973년에는 같은 연맹의 경기위원장으로 부임했다.[19] 같은 해 국제축구연맹(FIFA) 국제 심판으로 선임되었으며,[20]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킹스컵 심판으로 배정받았다.[21][22]

1974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에서 주심을 맡았으나, 경기 종료 3분 전 고려대학교의 패널티킥 선언에 연세대학교 측이 강하게 반발하며 선수단을 철수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연세대학교의 기권패가 선언되어 고려대학교가 우승했다.[23] 이 사건이 여러 언론의 비판을 받으며 논란이 되자,[24][25] 다음 날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회는 맹광섭과 당시 경기 감독관이었던 정남식의 의견을 청취한 후, 페널티킥 판정이 정당했다고 결론 내리고 연세대학교에 경고 처분을 내렸다.[26][27][28] 같은 해 대한축구협회에서 제정한 심판원급별제도규정에 따라 1급 심판으로 분류되었다.[29]

1975년 이란에서 개최된 크라운 프린스컵 심판으로 활동했으며,[30] 같은 해 한국실업축구연맹 심판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31] 그러나 같은 해 대통령배 금융단 축구대회 중 한일은행 축구단과 상업은행 축구단의 경기에서 판정에 불복한 한일은행 선수 최규익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맹광섭이 최규익에게 퇴장을 명하자 트레이너 최명규가 경기장에 난입해 폭언하면서 경기가 10여 분간 중단되었다. 경기 후 경기장 밖에서 한일은행 선수 김명규에게 다시 폭행당하자, 맹광섭은 그 자리에서 해당 대회 심판 불참을 선언했다.[32][33] 또한 같은 해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 주심을 맡았을 때 서울은행 축구단 선수 문동일에게 폭언을 듣는 일도 있었으며, 이로 인해 상벌위원회가 개최되어 문동일은 경고 처분을 받았다.[34]

1976년 한국실업축구연맹의 새 집행부 구성을 위한 전형위원회에 포함되었고, 새 집행부에서도 심판위원장직을 유지했다.[35][36] 우루과이에서 열린 세계 대학생 선수권 대회 심판으로 배정받았고,[37] 같은 해 한국고등학교축구연맹전 결승전을 관전하러 갔다가 무단 불참한 심판 대신 긴급 투입되는 해프닝도 있었다.[38] 1977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서울시청 축구단과 조홍은행 축구단의 경기에서 주심을 맡았을 때, 판정에 불복한 서울시청 선수 문영서와 김창호에게 폭언 및 폭행을 당했다. 맹광섭이 두 선수에게 퇴장을 선언하자 서울시청의 도재용 감독이 선수단 철수를 시도하며 경기가 10여 분간 중단되었으며,[39] 이 사건으로 상벌위원회는 도재용 감독에게 1년 자격 정지 처분을 내렸다.[40] 같은 해 다시 킹스컵 심판으로 배정받았다.[41]

1978년 대통령배 금융단 축구대회 기업은행 축구단과 주택은행 축구단의 경기 도중 폭우로 인해 전반전 종료 후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일시중단'을 선언하기도 했다.[42] 같은 해 1978년 아시안 게임 축구 종목의 대한민국 심판으로 선정되었고,[43]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1978년 대한축구협회 '축구인의 밤' 행사에서 유공자 표창을 받았다.[44] 1979년 고연전 주심을 맡았으나, 경기 종료 3분 전 양 팀 간 집단 난투극이 벌어진 후 고려대학교 선수단이 퇴장하자 경기 중단을 선언했다.[45]

1980년 한국실업축구연맹 심판위원장 및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으로 선임되었다.[46][47] 같은 해 한국실업축구연맹이 할렐루야 축구단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자선경기에 출전했던 선수들의 대회 출전 자격을 박탈하자, 대한축구협회가 이에 반발하여 전국실업축구연맹전에 파견했던 심판들을 철수시켰고 이때 맹광섭도 복귀했다.[48] 같은 해 전국대학축구연맹전에서 심판상을 수상했고,[49]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심판으로 배정받았다.[50] 한편, 1977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서울시청 축구단한양대학교) 주심을 맡았을 때, 서울시청 선수 이상철, 최기봉, 고홍석, 문영서가 판정에 불복하며 거칠게 항의하자 네 선수에게 경고를 주었으나, 박종환 감독이 재차 항의하며 선수단을 철수시키는 사건도 있었다.[51] 1981년 FIFA 국제 심판에서 은퇴했다.[52]

이후 철도청 축구단 감독으로 활동했으며,[53] 1984년 김영진의 후임으로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 직무대리를 맡았다.[54] 1985년 대한축구협회 이사 및 심판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55][56] 1986년 심판위원장에 유임되었다.[57] 1987년 출범한 최순영 회장 체제의 대한축구협회 집행부에서도 심판위원장으로 유임되었으며,[58] 최순영 회장 사퇴 후 이종환 과도 체제에서도 심판위원장직을 유지했다.[59][60] 1989년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직을 유지하며 상임집행이사회에 포함되었으나,[61][62] 같은 해 9월 일화 천마박종환 감독이 한국프로축구대회 경기 중 주심 임정식에게 폭력을 가해 1년 자격 정지 처분을 받은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심판위원장에서 물러났다.[63] 이후 1990년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지냈다.[64]

행정 일선에서 물러난 후 1993년부터 '한국 OB 축구회' 감사를 지냈으며,[65] 여러 차례 열린 '경평 OB 대항축구전'에 '서울 OB팀' 단장으로 참여하기도 했다.[66][67] 2010년 축구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공로패를 받았다.[68]

2011년 12월 13일 세상을 떠났다.[69]

5. 말년

1989년 일화 천마박종환 감독이 심판 폭행 사건을 일으킨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에서 사퇴하였다.[63] 이후 1990년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맡았다.[64]

1993년부터 '한국 OB 축구회'의 감사를 지냈으며,[65] 여러 차례 '경평 OB 대항축구전'에 '서울 OB팀'의 단장으로 참여하기도 했다.[66][67]

2010년 공로패를 수여받았다.[68]

2011년 12월 13일 세상을 떠났다.[69]

6. 기타

1974년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의 심판으로 활약한 것이 2002년 FIFA 월드컵 심판으로 참여한 김영주의 축구 심판 데뷔 동기를 제공했다.[70]

참조

[1] 뉴스 자랑스런 서울시민 600人(인)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4-11-29
[2] 뉴스 兵站團(병참단)팀優勝(우승) 陸軍蹴球終幕(육군축구종막)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56-04-06
[3] 뉴스 長安(장안)의人氣集中(인기집중)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56-04-19
[4] 뉴스 陸軍代表(육군대표) 三對(삼대)○으로勝利(승리) 對比國(대비국)틤親善蹴球戰(친선축구전)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56-04-24
[5] 뉴스 24日(일)에 入京(입경) 中國蹴球團(중국축구단)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56-08-22
[6] 뉴스 蹴球選手(축구선수)30名決定(명결정) 今年度最優秀(금년도최우수) 成績(성적)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56-12-13
[7] 뉴스 3對(대)3으로無勝負(무승부)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57-04-24
[8] 뉴스 兵站團(병참단)「팀」優勝(우승) 本社後援全國蹴球大會閉幕(본사후원전국축구대회폐막)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57-04-30
[9] 뉴스 蹴球代表候補(축구대표후보) 決定(결정)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57-08-22
[10] 뉴스 蹴球選手(축구선수)25名(명) 决定(결정) 亞洲競技大會(아주경기대회)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57-12-25
[11] 뉴스 京(경)·平蹴球戰復活(평축구전부활)을 歡迎(환영)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60-10-09
[12] 뉴스 攻(공)·防兼(방겸)한强力(강력)한팀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62-03-08
[13] 뉴스 河英錫(하영석)선수잠적 스카웃희생된듯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67-11-28
[14] 뉴스 實業(실업)축구 스카웃 版圖(판도) (下(하)) 市廳(시청)팀창단으로 活氣(활기)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75-12-06
[15] 뉴스 대통령金盃(김배) 고교축구최종일 팀웍에눌린個人技(개인기) 후반2분 安東憲(안동헌) 결승골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70-06-08
[16] 뉴스 첫날부터 골러쉬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72-07-05
[17] 뉴스 스포츠精神(정신) 아쉬운 競技場(경기장) 매너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1-06-11
[18] 뉴스 實業(실업)축구새집행부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71-02-01
[19] 뉴스 實業蹴球(실업축구) 상임理事陣(이사진)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3-01-25
[20] 뉴스 國際(국제)축구심판 추천 蹴協(축협),李愚鉉(이우현)등7명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73-12-26
[21] 뉴스 3回亞洲(회아주)축구 朴(박)대통령 始蹴(시축)…開幕(개막)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73-09-22
[22] 뉴스 킹스컵 蹴球(축구)대회 選手團(선수단) 17명確定(확정)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3-12-06
[23] 뉴스 핸들링PK宣言(선언)에 不服退場(불복퇴장) 延世棄權敗高大(연세기권패고대)우승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4-12-02
[24] 뉴스 全國蹴球(전국축구)선수권大會(대회) 總評(총평) 世態(세태)에물든 大學(대학)스포오츠指導者(지도자)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4-12-02
[25] 뉴스 연대 퇴장으로 오점 남긴 축구 선수권 결승전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1974-12-02
[26] 뉴스 "연·고대 축구 결승전 심판 판정은 옳았다"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1974-12-04
[27] 뉴스 延大(연대)팀懲戒(징계) 불가피 高延(고연)축구 判定(판정)정당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4-12-04
[28] 뉴스 高(고)·延戰(연전) 축구亂動(난동) 매듭 延大(연대)에가벼운 警告狀(경고장)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75-01-11
[29] 뉴스 審判(심판) 級別(급별)제도 실시 蹴協(축협),1次(차)로 32명에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4-12-24
[30] 뉴스 이란王子杯(왕자배) 축구 韓國代表團(한국대표단) 확정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5-01-20
[31] 뉴스 實業蹴球聯(실업축구련)새집행부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75-03-26
[32] 뉴스 판정불만, 폭행·폭언난무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1975-09-13
[33] 뉴스 어제 두곳서 잇단 불상사 활개치는「球場暴力(구장폭력)」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5-09-13
[34] 뉴스 서울銀(은)축구 文東一(문동일)선수에 警告(경고)처분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75-11-05
[35] 뉴스 김우근회장 유임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1976-01-17
[36] 뉴스 실업 축구연맹 새집행부 구성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76-01-20
[37] 뉴스 任期滿了(임기만료)따라 蹴球國際審判(축구국제심판) 6名(명)을재추천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6-07-06
[38] 뉴스 입으로만"韓國蹴球(한국축구)의기둥"…高校大會(고교대회)에審判不參(심판불참)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6-10-22
[39] 뉴스 市廳(시청)두選手(선수) 主審(주심)에行悖(행패) 退場命令(퇴장명령)에監督(감독)까지加勢(가세)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7-07-21
[40] 뉴스 主審(주심)에暴言(폭언)·게임抛棄(포기)종용 都在鏞監督(도재용감독)에資格停止(자격정지)1年(연)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7-07-23
[41] 뉴스 킹스컵 蹴球大會(축구대회)에 忠武(충무)팀을 보내기로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77-10-05
[42] 뉴스 비로一時中斷(일시중단) 實業(실업)축구企銀(기은)·住銀(주은)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8-03-10
[43] 뉴스 亞洲(아주)경기 會議(회의)대표 17종목 18명을확정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78-11-14
[44] 뉴스 來(내)19일축구인의밤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79-01-11
[45] 뉴스 延(연)·高(고) 2승1무 비겨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79-10-01
[46] 뉴스 모스크바 체조강습회에 김진수·이덕분씨 참가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1980-01-12
[47] 뉴스 축구협회 분과위원회 구성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0-02-01
[48] 뉴스 蹴協(축협) 實業(실업)연맹전 인정 안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0-06-20
[49] 뉴스 春季(춘계)대학축구 國民(국민)·成大(성대)공동優勝(우승)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0-09-03
[50] 뉴스 아시아 靑少年(청소년)축구 한국代表(대표)팀 결단식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0-11-26
[51] 뉴스 더티플레이에 코치추태…서울市廳(시청)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0-11-26
[52] 뉴스 축구 국제심판에 羅允植(나윤식)씨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1-07-09
[53] 뉴스 슈퍼리그 出帆(출범)에 15개實業(실업)축구팀 발 동동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3-04-13
[54] 뉴스 스포츠 短信(단신)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4-06-27
[55] 뉴스 축구협회 집행부 구성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5-01-22
[56] 뉴스 축구協(협) 상근부회장 李壽煥(이수환)씨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 1985-01-24
[57] 뉴스 14개 分科委長(분과위장) 業務(업무)분장 끝내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 1986-02-05
[58] 뉴스 마라도나 來韓(내한)확정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 1987-01-31
[59] 뉴스 축구협 회장에 李鍾煥(이종환)씨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7-12-01
[60] 뉴스 축구협회 새집행부 구성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7-12-03
[61] 뉴스 축구 협 새 집행부 구성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1989-03-06
[62] 뉴스 축구협 겨울잠 깨고 기지개 http://newslibrary.n[...] 한겨레 1989-03-07
[63] 뉴스 "朴(박)종환감독 1년간 자격정지"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9-09-11
[64] 뉴스 축구협 신집행부 구성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1990-02-01
[65] 뉴스 OB축구회 회장에 김화집씨 http://sports.news.n[...] 연합뉴스 1993-04-12
[66] 뉴스 "'경평축구' 부활...19일 서울-평양출신 OB전"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997-10-17
[67] 뉴스 50∼60대 OB들 동대문서 `축구잔치'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998-11-03
[68] 뉴스 OB축구회, ‘2010 한국원로축구인의 날’ 개최 http://besteleven.co[...] 베스트일레븐 2010-12-15
[69] 뉴스 맹광섭 별세·종환 부친상·정영훈 장인상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11-12-14
[70] 뉴스 “브라질터키전 심판 지금도 못잊어요”한국 월드컵 주심 1호 김영주 씨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00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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