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가쓰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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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 가쓰나가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578년 오와리국 또는 오미국에서 태어나, 1587년 규슈 정벌 이후 고쿠라 영지를 받았다.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가담하여 패배 후 영지를 잃었다.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위해 싸웠으며, 최후에는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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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와리 모리씨 - 모리 가쓰노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무장 모리 가쓰노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서 규슈 평정과 히고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웠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한 후 몰락했고 야마우치 가즈토요의 도움으로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후손으로는 매니 모리 미크로네시아 연방 대통령이 있다. - 오와리 모리씨 - 고쿠라성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고쿠라기타구에 위치한 고쿠라성은 가마쿠라 시대 축성 추정,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에 걸쳐 주인이 바뀌고 개축되었으며, 1959년 재건된 천수각 내부에 민속 박물관이 있고 속 일본 100명성으로 선정된 시민 휴식 및 관광 명소이다. - 1577년 출생 - 베아트리체 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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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가쓰나가 | |
---|---|
기본 정보 | |
씨족 | 모리 씨 → 모리 씨 (오와리) |
이름 | 모리 가쓰나가 |
이명 | 기치마사 통칭: 부젠노카미 |
생몰년 | 1577년 ~ 1615년 6월 4일 |
관직 | |
관위 | 종5위하 부젠노카미 |
가족 관계 | |
부모 | 아버지: 모리 가쓰노부 |
형제 | 가쓰나가, 기치치카 (야마우치 가쓰치카) |
배우자 | 정실: 아히메 ( 류조지 마사이에 딸) 계실: 불명 |
자녀 | 가쓰이에, 타로베에 (쓰루치요), 딸 |
경력 | |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주군 | 도요토미 히데요시 → 히데요리 |
기타 정보 | |
개명 | 모리 기치마사 → 모리 가쓰나가 |
묘소 | 불명 |
2. 생애
덴쇼 6년(1578년), 모리 가쓰노부의 아들로서 오와리국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오미 나가하마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아버지 가쓰노부와 마찬가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다.
덴쇼 15년(1587년), 규슈 평정을 마친 히데요시는 부젠 8군 중 구로다 요시타카에게 6군 12만 석을, 요시나리에게 규구군, 다카우군의 2군 6만 석을 주어 오구라의 영주로 삼았지만, 이 6만 석 중 1만 석이 가쓰나가에게 부여되었다.[7] 덴쇼 16년(1588년)에는 모리 데루모토의 접대역이 되어 노 흥행에서 북을 선보였고, 데루모토와 공가중과의 회견에 동반을 허락받았다. 덴쇼 18년(1590년)에는 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가 일본에 방문했을 때 고쿠라에서 마중했다.
게이초 2년(1597년), 조선 출병에 종군하여 임진왜란 때 울산왜성을 구원하고 조명연합군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13] 전쟁터에서는 조선에서 입수한 개를 도요토미 히데쓰구에게 보내 사례장을 받았다. 게이초 3년(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유물로 사다사의 칼을 받았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서군에 참전했다. 가쓰나가는 규슈에 있던 아버지를 대신해 중앙에서 군세를 지휘하며 후시미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모리 데루모토와 우키타 히데이에로부터 감사장과 3,000석을 더 받았다. 그러나 모리 구자에몬(가와라다케 성 성주) 등 많은 가신을 잃었다. 이어진 아노쓰 성 전투와 세키가하라 본선에서는 안코쿠지 에케이의 휘하에 놓여 활약하지 못했다.
구로다 뇨스이에게 고쿠라 성을 빼앗겨 영지를 잃게 된 가쓰나가는 아버지와 함께 가토 기요마사[15], 야마우치 가즈토요[16]에게 차례로 맡겨졌다. 친분이 있던 야마우치 가문에서는 1천 석을 받아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가쓰나가의 동생은 야마우치성을 받고 야마우치 요시치카로 개명하여 2천 석을 받았으나, 게이초 18년(1613년)경 도사를 떠나 기슈 아사노 가문을 섬겼다. 가쓰나가는 고치성 북부 구마무라에서 생활하며 때때로 등성했다.
게이초 15년(1610년) 5월 25일, 정실 야스히메가 사망하자 가쓰나가는 출가하여 잇사이(一斎일본어)라 불렀다. 이듬해 5월 6일 아버지 가쓰노부가 사망하자, 7일에 하쿠운인덴 고유키진기(白雲院殿好雪神祇일본어)라는 시호를 내려 에노쿠치 무라오도야마 키엔방(江ノ口村尾戸山喜圓坊일본어)에 장사지내고, 후에 하타무라 야스야마(秦村泰山일본어)로 이장했다.
2. 1. 전력
덴쇼 6년(1578년), 모리 가쓰노부의 아들로서 오와리국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지만, 오미 나가하마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5] 아버지 가쓰노부와 마찬가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다.1587년, 규슈 정벌을 마친 히데요시는 부젠국 8군 중 구로다 요시타카에게 6군 12만 석을, 요시나리에게 기쿠 군, 다카와 군 2군 6만 석을 주어 고쿠라의 영주로 삼았지만, 이 6만 석 중 1만 석이 가쓰나가에게 주어졌다.[7]
1597년, 조선 출병에 종군했다. 게이초의 역에서는 울산왜성을 구원하여 명나라·조선 연합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13]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서군에 가담하여 후시미 성 전투에 참가했다. 가쓰나가는 특별한 공적을 세워 모리 데루모토·우키타 히데이에로부터 감사장과 3,000석을 더 받았다. 그러나 모리 구자에몬(가와라다케 성 성주) 등 많은 가신을 잃었다. 이어지는 아노쓰 성 전투에서는 나가쓰카 마사이에·안코쿠지 에케이와 함께 성 아래 마을을 불태웠다.
세키가하라 본 전투 시에는 가쓰나가는 데루모토 가신과 함께 안코쿠지 에케이의 지휘 하에 놓였다. 가문도 혼란 상태에 있어 활약할 기회 없이 끝났다.
부젠에서는 고쿠라 성을 구로다 조스이(요시타카)에게 빼앗겼으며, 전후 영지를 잃게 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그 신병을 가토 기요마사[15], 이어서 야마우치 가즈토요에게 맡겨졌다.[16]
2. 2. 오사카 전투
게이초 19년(1614년),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초청을 받아 도사에서 탈출을 계획했다. 도쿠가와 편에 선 번주 야마우치 다다요시에게는, 과거 중도 시절에 목숨을 걸고 서로 돕기로 약속했으니 다다요시의 진중(포위 측)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21] 장남 모리 가쓰이에 대신 차남 쓰루치요(다로베)를 인질로 남겼기에[22] 야마우치 야스토요는 안심하고 보냈지만, 가쓰나가와 가쓰이에 모두 배로 도망쳐 오사카 측으로 향했다. 야마우치 다다요시는 격노하여 가쓰이에의 감시역이었던 야마우치 시로베에게 할복을 명했고,[23] 쓰루치요와 가쓰나가의 아내와 딸은 성 안에 연금되었다.[24]오사카성에 입성한 모리 가쓰나가는 도요토미 가문의 가신으로서 여러 장수들의 신망을 얻어 오사카 성의 5인방으로 불렸다.[25]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는 성의 서북쪽, 현재의 이마바시 부근을 수비했지만, 눈에 띄는 활약은 없었다.[26]
게이초 20년(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5월 6일 도묘지 전투에서 패퇴한 고토 모토쓰구 등의 패잔병을 모리 가쓰나가대가 수용했다. 가쓰나가는 자군 중에서 추출한 총대를 도노에 남겨두고,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오사카성 방면으로 철수했다.[27]
7일 덴노지구치 전투에서는 아들 가쓰이에, 가시이 마사타카, 야마모토 기미오, 다케다 나가오, 아자이 나가후사 등 병사 4천을 이끌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진 정면인 시텐노지 남문 앞에 포진했다. 혼다 다다토모의 공격을 받자 사나다 노부시게는 이에 응하지 말라고 전령을 보냈고, 가쓰나가도 아군을 억제하려 했으나 전투가 격렬해져 포기했다. 오히려 혼다대에 역습하여 다다토모, 오가사와라 히데마사, 다다나가 부자를 순식간에 무찔렀다. 이어서 아사노 나가시게, 아키타 사네스에, 사카키바라 야스카쓰, 안도 나오쓰구, 로쿠고 마사노리, 센고쿠 다다마사, 스와 다다쓰네, 마쓰시타 시게쓰나, 사카이 이에쓰구, 혼다 다다즈미의 부대를 격파하고 마침내 이에야스의 본진에 돌입했다. 그러나 사나다군이 전멸하고 전선이 붕괴되자 사방에서 관동세의 공격을 받아 결국 철수를 시작했다. 시치테구미 제장들이 반격으로 도도 다카토라를 무찌르자, 가쓰나가도 이에 협력하여 쓰치야마에서 잠시 이이 나오타카나 호소카와 다다오키 등의 공격을 막았지만, 성내로 철수했다.
8일, 마지막에는 수호하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가이샤쿠한 후[28] 아들 가쓰이에, 동생 야마우치 간카이유 요시치카와 함께 노전 야쿠라(야마자토마루)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향년 37세였다.
전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사 야마우치 다다요시에게 성안에 갇혀 있던 모자 3명을 경으로 호송하도록 명했다. 10세의 다로베는 참수되었지만, 다로베 이외의 친척은 구명되어 도사로 돌아갔다.[29]
3. 일화
- 오사카 전투가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리 가쓰나가는 어느 날 아내와 자식들에게 "나는 도요토미 가에 큰 은혜를 입었으니, 히데요리 공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싶다. 하지만 내가 오사카를 편들면 남은 너희들에게 어려움이 닥칠 것이다."라며 한숨을 쉬며 눈물을 흘렸다. 이를 들은 아내는 "당신의 헌신은 집안의 명예입니다. 남은 자들이 걱정되신다면 저희는 이 섬의 파도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가쓰나가에게 용기를 주었다. 가쓰나가는 기뻐하며 묘안을 생각해 자식 가쓰이에와 함께 오사카성으로 달려갔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이에야스는 "장부의 뜻이 있는 자는 모두 이와 같구나. 그의 처자를 용서하고 벌하지 말라."라고 명령하여 가쓰나가의 아내와 차남 타로베에가 성 안으로 초청되어 보호받았다고 한다.[30][31]
- 도묘지 전투에서는 짙은 안개 때문에 사나다 노부시게(사나다 유키무라)와 모리 가쓰나가 등의 후위 부대가 제때 도착하지 못해 고토 모토쓰구 등 이름 있는 무장들이 전사했다. 늦게 합류한 사나다 노부시게는 가쓰나가에게 "짙은 안개 때문에 아군을 구하지 못하고 고토 마타베(고토 모토쓰구) 등을 죽게 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마침내 도요토미 가문의 운도 다했을지도 모릅니다."라고 한탄하며, 이 자리에서 죽을 각오를 했다. 이를 들은 가쓰나가는 "여기서 죽어도 소용없다. 바라건대 우부(도요토미 히데요리) 님의 말 앞에서 화려하게 죽읍시다."라고 위로했다고 한다.[32]
- 모리 가쓰나가는 덴노지구 결전에서 많은 활약을 보였는데, 이를 지켜보던 구로다 나가마사는 동료인 가토 요시아키에게 "금륜을 뽑은 깃발의 성병이 힘껏 싸우고 있는데, 저 대장은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요시아키는 "모리 이키노카미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을 들은 나가마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린 아이로 생각했는데, 무략에 능숙한 대장이 되었구나."라며 감탄했다고 한다.[33][34]
- 당시 오사카 성의 싸움을 목격한 선교사는 "선두에는 사나다 및 다른 한 사령관 모리의 부젠이 있었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용기를 가지고 싸워 3, 4차례 격렬하게 적을 공격했으므로, (중략) 내부(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실망에 빠져, 일본의 풍습에 따라 그의 배를 가르려 했다."라고 보고했다. (「1615년 및 1616년 예수회의 파드레 등이 동회의 총장에게 보낸 일본의 연보」[35]). 사나다와 모리의 분투는 『야마시타 비록』, 『조잔 기담』, 『무가 사기』의 기술에서도 보인다.[36]
- 에도 시대 중기의 문인 간자와 테이칸은 자신의 저서인 수필 『옹초』에서 모리 가쓰나가의 활약을 칭찬하며 "안타깝다, 후세에는 사나다를 말하고 모리를 말하지 않으니, 이는 모리가 불초한 탓인가?"라고 기록하고 있다.[37]
- 오사카 전투 후, 도사 야마우치 가에서는 가쓰나가의 옛 신하인 스기 사에몬에게 명령하여 가쓰나가에 대한 것을 정리하게 했다. 이것은 『모리 부젠노카미 전 1권』으로 오랫동안 야마우치 가문에 전해졌으며, 가쓰나가에 관한 기록으로는 유일한 것이다.[38] 다이쇼 말년에 후쿠모토 니치난이 이것을 보고 『오사카 성의 칠 장성』(아래 게재)을 썼다. 현재 시중에 유포되고 있는 가쓰나가의 생년 등은 『모리 부젠노카미 전 1권』에 근거한 것이다.
4. 관련 작품
; 소설
- 이케나미 쇼타로 「홍염」 (신초 문고 『흑막』에 수록)
- 니키 히데유키 『오사카 장성전』 (세이카이샤 FICTIONS 전 3권. 개제하여 『사나다를 말하고, 모리를 말하지 않다 오사카 장성전』 고단샤 문고 전 2권)
- 나카지 케이타 『사자는 죽지 않는다』 (주오코론신샤 문고)
- 이마무라 쇼고 『유키무라를 쳐라』 (주오코론신샤)
; 영화
- 사나다 유키무라의 모략 (1979년, 도에이) - 배역: 오카지 센
- 차차 천애의 귀비 (2007년, 도에이) - 배역: 마쓰나가 데츠쿠로
- 사나다 십용사 (2016년, 쇼치쿠) - 배역: 반도 쿠미
; 텔레비전 드라마
- 도쿠가와 이에야스 (1983년, NHK 대하드라마) - 배역: 아오키 요시로
- 사나다 태평기 (1985년, NHK 신 대형 시대극) - 배역: 미야우치 히로시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2000년, NHK 대하드라마) - 배역: 후쿠나카 세이시로
- 사나다마루 (2016년, NHK 대하드라마) - 배역: 오카모토 켄이치
- 어떻게 할까 이에야스 (2023년, NHK 대하드라마) - 배역: 스가와라 타쿠마
; 악곡
- 사쿠라유키 「푸른 폭풍의 성」 (작사: 토노 유키, 작곡: 모리 노부히로)
; 역사서
- 학습연구사 편 『오사카의 진 - 킨조 공방사상 최대의 군략』 학습연구사, 1994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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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murai: An Illustrated History
https://books.google[...]
Tut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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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兵家茶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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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大坂陣聞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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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武家事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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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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