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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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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백겸은 1552년에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실학의 선구자이다. 그는 고증학적 방법론을 통해 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참신한 견해를 제시했으나, 중국 중심의 지리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한백겸은 기자조선 건국 후 시행된 토지 제도인 ‘기田遺制說’과 ‘기田圖’를 연구하여 저서 《기田考》를 저술했고, 《동국지리지》를 저술하여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그는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크게 발돋움하지는 못했지만, 1615년 《동국지리지》를 완성하고 그 해 사망했다. 그의 묘는 경기도 여주시에 있으며, 아들 한흥일은 우의정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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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겸
기본 정보
씨명한백겸
한자 표기韓百謙
출생 연도1552년
사망 연도1615년
직업문신
역사학자
지리학자
생애
출생1552년
사망1615년
경력
직업문신
역사학자
지리학자
기타
참고 자료斗山世界大百科事典

2. 생애

한백겸(韓百謙)은 정여립의 반란 모의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크게 발돋움하지는 못했으나, 고증학적(考証学的) 방법론을 통해 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참신한 견해를 제시하여 실학파(実学派)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2] 그러나 "우리나라는 천지(天地) 동방(極東)의 땅에 있다"고 주장하는 등 중국 중심의 지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2]

기자(箕子)가 조선을 정복하고 기자조선(箕子朝鮮) 건국 후 시행한 토지 제도인 ‘기田遺制說’, ‘기田圖’를 연구하여 저서 『기田考』를 저술하고, 기자가 시행한 정전제(井田制)의 유적이 평양에 남아있음을 증명하여 기자의 업적을 칭송했다.[3]

2. 1. 가문 및 생애 초기

1552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한효윤(韓孝胤)은 경성판관을 지냈고, 숙부 한효순대북파의 영수이며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내면서 폐모론을 주도했으나, 한백겸 형제는 이에 가담하지 않고 남인(南人)에 속했다. 아우 한준겸은 서인에 속했으며, 문장에 뛰어났고 선조의 유언을 받은 일곱 신하 중 한 명으로서 호조판서, 5도도원수를 역임하고 인조의 장인으로서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지고 영돈녕부사를 지냈다. 그러나 한백겸은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젊은 시절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화담 서경덕의 제자였던 행촌(杏村) 민순의 문하에서 《소학》과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웠다. 이후 의리(義理)에 관한 연구에 힘써 육경논맹염락관민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2. 2. 학문 연마와 관직 생활

1586년(선조 19) 주변의 천거로 관직에 올라 중부참봉, 경기전 참봉, 호조좌랑, 형조좌랑을 지냈다. 이후 외직인 황해도 안악현감으로 2년간 근무하였고, 함종현령을 거쳐 강원도 영월군수를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석방되었다. 적소에서 적군에게 아부하여 난을 선동한 자들을 참살한 공으로 내자직장이 되었다가 여러 내외직을 거쳤다.

1602년 청주목사를 지내고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통정대부에 올랐다. 장례원 판결사와 호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08년 선조가 사망했을 때 예(禮)에 밝아 빈전(殯殿)의 상례(尙禮)를 맡았다.

1612년 60세 때 파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낙향하여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1615년 64세에 《동국지리지》 저술을 마치고 그해 가을 7월에 사망하였다.[5]

2. 3. 사후

한백겸의 묘와 신도비는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부평리에 있으며, 저헌 이석형 묘 및 신도비(경기도 기념물 제171호) 근처에 있다. 1998년 4월 13일 경기도 기념물 제165호(《구암 한백겸 묘 및 신도비》)로 지정되었다.[5]

한백겸의 아들 한흥일은 효종 때 우의정을 역임했고, 아우 한준겸은 인조의 장인으로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한백겸은 아들이 정승에 오르면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자신이 세웠으며 원천석을 모신 칠봉서원에 배향되었다.[5]

3. 학문적 업적

한백겸은 주로 지리 연구에 힘썼으며, 그의 독창적인 역사관과 지리 인식을 담은 《동국지리지》는 중요한 저서로 평가받는다. 그는 기자가 시행한 정전제(井田制)의 유적이 평양에 남아 있음을 주장하며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과 '기전도(箕田圖)'를 제시하여, 후대 토지 제도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1. 《동국지리지》 연구

한백겸은 60장에 이르는 작은 책자인 《동국지리지》를 통해 고증학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참신한 견해를 제시하여 실학파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2] 비록 한 편의 논문 정도의 분량이지만, 그의 독창성과 비판 정신이 담긴 학문적 태도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5]

한백겸의 학문적 업적으로는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과 '기전도(箕田圖)'가 있다. 기전도는 고조선의 왕 기자가 시행하였다는 정전(井田) 제도의 유적이 평양에 남아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기전유제설과 한백겸의 이 그림은 후대의 토지 제도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5] 이후 실학자들은 《반계수록》, 《경세유표》 등에서 토지 소유의 평등과 균등 분배를 주장하며, 주자가 부인하여 일반적인 성리학자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했던 정전 제도가 한백겸의 실증적 연구를 통해 실제로 존재했음을 밝혀냈다. 이는 실학자들이 자신들의 학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활용되었다.[5]

한백겸은 정여립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크게 발돋움하지는 못했지만,[2] 은나라의 정치가 기자가 기자조선 건국 후 시행한 토지 제도인 '기전유제설', '기전도'를 연구하여 저서 《기전고》를 저술하고, 기자가 시행한 정전제의 유적이 평양에 남아있음을 증명하여 기자의 업적을 칭송했다.[3] 다만, "우리나라는 천지(天地) 동방(極東)의 땅에 있다"고 주장하는 등 중국 중심의 지리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2]

4. 평가

이항복은 한백겸을 당대 주역 연구의 대가로 칭송하였으며, 모든 경서에 두루 밝았으나 유독 《주역》에 깊은 연구가 있어 당시 세상에서 모두 그가 큰 주역학자임을 인정했다고 평가했다.[5] 정경세는 한백겸의 묘갈명에서 그가 국가에서 간행한 《주역전의(周易傳義)》라는 책의 교정을 맡았다고 하며 그의 학문적 업적을 기렸다.[5]

유형원은 "오직 근세의 한백겸이 변론했던 것이, 천년동안 정해지지 못했던 것을 깊이 알아냈으니 그분의 학설에 의해서 확정한다"고 격찬하며 그의 학설을 그대로 수용하였고,[5] 신경준, 안정복 등도 한백겸 학설에서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았다. 정약용은 그의 저서 《아방강역고》에서 "한백겸의 학설은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라고 단정하여 높은 수준의 학문이라고 평가했다.[5]

역사학자 이기백은 《구암유고 동국지리지》 서문에서 "그의 주장이 반드시 옳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당시의 학문적 수준에 비추어볼 때 그의 주장은 실로 놀랍도록 참신한 새 학설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주장은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 여러 실학자들의 전제개혁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한백겸은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크게 발돋움하지는 못했으나, 고증학적 방법론을 통해 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참신한 견해를 제시하여 실학파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2] 그러나 "우리나라는 천지(天地) 동방(極東)의 땅에 있다"고 주장하는 등 중국 중심의 지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도 지적받는다.[2]

5. 저서

1615년 64세에 명저인 《동국지리지》를 저술하였고, 같은 해 가을 7월에 세상을 떠났다.[5] 《동국지리지》는 60장에 이르는 작은 책으로, 한 편의 논문에 지나지 않지만, 독창성과 비판정신이 가득한 학문적 태도로 인해 큰 영향을 끼쳤다.

한백겸은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과 '기전도(箕田圖)'라는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기전도는 고조선의 기자가 시행했다는 정전제의 유적이 평양에 남아 있음을 입증하는 자료였다. 기전유제설과 기전도는 후대 토지제도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5]


  • 《기다고(箕田考)》

6. 가족 관계

항목내용
조부한여필(韓汝弼)
아버지한효윤(韓孝胤)
남동생한중겸(韓重謙)
남동생한준겸(韓浚謙) - 인열왕후의 부친
장인구사중(具思仲, 1535 ~ ?) - 구사맹의 남동생
장모창녕 조씨 - 조세기(曺世器)의 딸
부인구애영(具愛英)
아들한흥일(韓興一, 1587 ~ 1651)
며느리이효절(李孝節, 1618 ~ ?)
홍비(洪棐)의 처

[5]

참조

[1] 뉴스 한백겸 韓百謙,1552~1615 https://www.doopedia[...] 2022-06-26
[2] 서적 「東海無潮説」攷 大阪市立大学大学院文学研究科 2004-03
[3] 서적 韓國歷史與現代韓國 https://books.google[...] 台湾商務印書館 2005-08-01
[4]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
[5] 뉴스 경향닷컴 | Kyunghyang.com http://news.khan.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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