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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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목계는 13세기 중국 남송 말기에 쓰촨성에서 태어난 선종 승려이자 화가이다. 그는 청성산에서 오준사범의 제자로 수행했으며, 항저우로 이주하여 류통 사찰 개혁에 참여했다. 목계는 중국에서는 저평가되었으나, 일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가마쿠라 시대부터 무로마치 시대에 걸쳐 일본 수묵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관음원학도", "여섯 개의 감", "소상팔경도" 등이 있으며, 특히 "관음원학도"는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목계의 작품은 고려 말과 조선 시대 문인화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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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계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법상(法常) |
자(字) | 목계(牧谿) |
속성 | 이(李) |
출생 지역 | 사천성 개주(四川省開州) |
생몰년도 | 13세기 (남송 시대) |
활동 시기 | 남송 말기 |
예술 활동 | |
분야 | 화가, 선승 |
스타일 | 선화 (禪畫) |
대표작 | 《육시도》(六柿圖) 《연어도》(燕魚圖) 《관음·원숭이·학 그림》(觀音猿鶴圖) |
특징 | |
화풍 | 거칠고 꾸밈없는 화풍 |
영향 | 일본 무로마치 시대 수묵화에 큰 영향을 미침 |
평가 | 중국에서는 높이 평가받지 못함 일본에서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음 |
추가 정보 | |
소속 | 절강 육통사 |
기타 | 속가 출신 승려 작품 대부분이 일본에 소장 |
2. 생애
목계는 13세기 초(1200년~1210년 사이) 중국 남송 말기에 태어났다.[5] 구체적인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쓰촨성 출신으로 그의 작품 "관음, 학, 긴팔원숭이"에 "촉승 법상근제"(蜀僧法常瑾制중국어)라는 서명이 새겨져 있다.[6] 청성산의 사찰에서 선종 승려 오준사범 (1177–1249)의 제자로 수행했다.[7]
이후 남송의 수도 항저우로 이주하여 서호 근처의 류통(六桐) 사찰 개혁 등 사찰 행사에 참여했다.[8] 류통 사찰과 관련이 있었다는 1차 출처는 없지만, 무기의 영정은 류통 사찰이 있던 창샹 레인에 안치되었다. 가장 가까운 사찰에 승려의 영정을 보관하는 전통에 따라 류통 사찰은 무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무기의 사망 날짜는 지원 시대(1264년~1294년 사이)로 추정된다.[9]
제자로 라창이라는 화승이 있으며, 그의 유품 "죽계도"(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 중요문화재)는 목계의 영향을 보여준다.
2. 1. 출생과 초기 활동
목계는 13세기 초, 대략 1200년에서 1210년 사이 중국 남송 말기에 태어났다.[5] 구체적인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쓰촨성 출신으로 그의 작품 "관음, 학, 긴팔원숭이"에 "촉승 법상근제"(蜀僧法常瑾制중국어)라는 서명이 새겨져 있다.[6] 청성산의 사찰에서 선종 승려 오준사범 (1177–1249)의 제자로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2. 2. 항저우에서의 활동
무기는 나중에 남송의 수도인 항저우로 이주하여 서호 근처의 류통(六桐) 사찰 개혁을 포함한 사찰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8] 무기가 류통 사찰과 관련이 있었다는 1차 출처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무기의 영정은 류통 사찰이 있던 창샹 레인에 안치되었다. 가장 가까운 사찰에 승려의 영정을 보관하는 전통에 따라 류통 사찰은 무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무기의 정확한 사망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원 시대인 1264년부터 1294년 사이로 추정된다.[9]
숭경부 출신으로, 이후 소흥부로 이주하여 선종의 고승 무준 사범의 문하에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남송의 수도 임안에 있는 서호 기슭의 육통사(현재 폐사)에서 활동했다. 중국에서는 그다지 평가받지 못했지만, 가사도와 같은 거물 정치인과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화가로서 충분히 평가받았으며, 강남 산수화의 주류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사후 차츰 잊혀져, 이미 원대에는 "거칠고 고법이 없다"(원말의 회화사가 하문언 『도회보감』 권4 등)는 악평이 있었다. 후대의 문인화 유행으로 인해 목계가 속한 원체화 계열의 화가나 불교 미술은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받았으며, 목계도 그 영향으로 저평가받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3. 작품 세계
목계는 선종 사상을 바탕으로 독특한 수묵화풍을 확립했다. 그의 작품은 간결하면서도 대상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과 깊이 있는 표현이 특징이다. 대표작으로는 관음, 학, 그리고 긴팔원숭이, 여섯 개의 감, 소상팔경도 등이 있다.[10]
숭경부 출신인 목계는 소흥부로 이주하여 선종 고승 무준 사범의 문하에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남송 수도 임안의 서호 기슭에 있는 육통사(현재 폐사)에서 활동했다. 중국에서는 크게 평가받지 못했으나, 가사도와 같은 거물 정치인과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화가로서 충분히 인정받았으며, 강남 산수화의 주류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사후 점차 잊혀져 원대에는 "거칠고 고법이 없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이는 후대 문인화 유행으로 목계가 속한 원체화 계열 화가나 불교 미술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받은 영향으로 보인다.
목계의 제자로는 라창이 있으며, 그의 유일한 유작인 "죽계도"(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 중요문화재)는 목계의 화풍을 보여준다.
3. 1. 대표작
묵기(牧谿)의 대표작으로는 교토 다이토쿠지에 소장된 삼연작 "관음, 학, 그리고 긴팔원숭이", "호랑이", "용" 등이 있다. 또한, 자주 복제되는 "여섯 개의 감"과 소상팔경도 중 일부, 세이카도 문고 미술관에 있는 나한도 등이 묵기 또는 "묵기 양식"으로 여겨진다.[10]목계의 작품들은 대부분 일본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부는 국보 또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구분 | 작품명 | 소장처 | 비고 |
---|---|---|---|
국보 | 관음원학도 | 다이토쿠지 | |
국보 | 연사만종도 | 하타케야마 기념관 | |
국보 | 어촌 석조도 | 네즈 미술관 | |
중요문화재 | 원포귀범도 | 교토 국립 박물관 | |
중요문화재 | 평사낙안도 | 이데미츠 미술관 | |
중요문화재 | 용호도 | 다이토쿠지 | |
중요문화재 | 부용도 | 다이토쿠지 | |
중요문화재 | 밤도・감도 | 료코인 | |
중요문화재 | 나한도 | 세이카도 문고 미술관 | |
중요문화재 | 죽작도 | 네즈 미술관 | |
중요문화재 | 류엔도 | 도쿠가와 미술관 | |
기타 | 나복무청도 | 산노마루 쇼조칸 | |
기타 | 노자상 | 오카야마현립 미술관 | |
기타 | 포대도 | 개인 소장 | |
기타 | 강천모설도 | 개인 소장 | |
기타 | 동정추월도 | 도쿠가와 미술관 | |
기타 | 소상야우도 | 개인 소장 | |
기타 | 혐자화상도 | 개인 소장 | |
기타 | 출산석가도 | 개인 소장 | |
기타 | 사생권 | 타이베이 국립 고궁 박물원 | 전 목계 |
3. 1. 1. 관음, 학, 긴팔원숭이 (일본 다이토쿠지 소장, 국보)
교토 대덕사에 소장된 무치의 ''관음, 학, 그리고 긴팔원숭이''는 무치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작품은 세 폭의 족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백의(白衣)를 입은 관음보살, 학, 긴팔원숭이를 묘사하고 있다.[11][12]
관음보살은 삼폭화의 중심에 자리하며, 절벽에 기대앉은 채 느슨하게 접힌 옷자락으로 손과 다리를 가리고 있다. 화려한 머리 장식과 보석은 보살의 지위를 나타낸다. 버드나무 가지는 관음보살의 왼쪽에 놓여 있으며, 달빛 아래 물가에 앉아 있는 듯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림 왼쪽 하단에는 무치의 서명 "촉(蜀)의 승려 법창(法常)이 공경히 만들다"와 "무기(牧谿)" 도장이 함께 찍혀 있다.[11]
학은 삼폭화의 왼쪽 그림에서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인 채, 머리를 들고 목을 쭉 뻗어 부리를 활짝 벌리고 크게 울부짖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11] 반대편에는 어미 긴팔원숭이가 마른 나뭇가지에 앉아 오른팔로 아기 긴팔원숭이를 안고, 왼손으로 나뭇가지를 잡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12]
이 세 그림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언제 옮겨졌는지는 정확히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1466년 인료켄 파빌리온에서 일어난 사건과 활동을 기록한 ''인료켄 니치로쿠(蔭涼轩日録)''에 처음 삼폭화로 언급되었으며, 16세기에 대원종신에 의해 대덕사에 기증되었다.[13]
이 그림들은 무치가 처음부터 한 세트로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관음보살 그림에 오준이 인용한 시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네 번째 구절을 제외하면 관음보살과 긴팔원숭이만 시에 언급되어 있어, 학자들은 오준의 시가 세 그림이 삼폭화로 제작되었다는 이론을 뒷받침하지 못한다고 보기도 한다. 또한 낸시 웨이는 관음보살 그림이 다른 두 그림보다 훼손이 심하다는 점을 들어 세 작품이 서로 다른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14] 반면, 미술사학자 후쿠이는 세 그림의 환경적 설정이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처음부터 삼폭화로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15]
3. 1. 2. 여섯 개의 감 (일본 다이토쿠지 료코인 소장)

''Six Persimmons''(여섯 개의 감)는 목계의 주요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그림은 1606년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다이토쿠지의 료코인에 사찰 설립 선물로 전달되기 전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료코인에서는 다도 행사가 자주 열렸기 때문에, 이 그림은 다도 행사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다.[1]
여섯 개의 감은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림의 의미는 맛, 생각, 지혜, 방법, 그리고 선종의 조사와 관련된 숫자 "6"과 관련이 있다. 미술사학자 로렌스 식먼은 이 그림이 불교의 근본적인 본질과 일치하는 감의 의미를 강조하며, 화가의 순간적인 세계관을 포착했다고 평가했다.[16]
20세기에 ''Six Persimmons''의 인쇄본은 책 표지나 벽걸이 포스터로 자주 제작되었다. 또한, ''Six Persimmons''는 다른 선불교 그림들과 함께 서양에 선에 대한 매혹의 물결을 가져왔다.[17] 영국의 동양학자이자 중국학자인 아서 웨일리는 이 그림을 "엄청난 평온함으로 응고된 열정"이라고 묘사했다.[10]
3. 1. 3. 소상팔경도 (瀟湘八景圖)
소상팔경은 중국 호남성 동정호 남쪽의 소수와 상강이 합류하는 지역의 아름다운 여덟 가지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목계의 소상팔경도는 현재 7점이 전해지며, 원래 두루마리 형태였으나 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의해 족자로 개장되었다.[21] 각 그림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결하면서도 시적으로 표현하여 보는 이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7점의 소상팔경도는 다음과 같다.
제목 | 소장처 | 비고 |
---|---|---|
연사만종도 | 하타케야마 기념관 | 국보 |
어촌석조도 | 네즈 미술관 | |
원포귀범도 | 교토 국립 박물관 | 중요문화재 |
평사낙안도 | 이데미츠 미술관 | 중요문화재 |
용호도 | 다이토쿠지 | 1269년 |
동정추월도 | 도쿠가와 미술관 | |
소상야우도 | 개인 소장 |
1728년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당시 다이묘 가문에 분장되어 있던 팔경도를 한자리에 모아 감상하려 했다.[21] 팔경의 나머지 하나(산시청람)는 소재 불명이며 모본만 남아있다.
4. 중국과 일본에서의 평가
목계는 당대 중국에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일본에서는 그의 작품이 널리 수집되고 큰 영향을 미쳤다.
13세기와 14세기 중국에서 목계는 당시 주류에 의해 무시되었고, 원나라에서는 그의 화풍이 "거칠다"는 비판을 받았다.[1]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의 작품이 묘신지, 엔가쿠지와 같은 여러 선종 사찰과 아시카가 막부 소장품 목록에서 발견될 정도로 널리 수집되었다.[1]
목계는 뛰어난 중국 화가이자 문화 전파자로 여겨져 14세기부터 많은 일본 화가들에게 존경받았으며, 그의 화풍은 목암 영원을 비롯한 일본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6]
4. 1. 중국에서의 평가
오늘날 목계는 선화의 선구자로 존경받고 있다.[18] 그러나 목계는 당시 중국 송나라에서는 주류에 의해 무시되었고, 이후 원나라에서 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목계의 그림은 송나라의 "자연주의"를 뚜렷하게 전달했는데, 이는 조맹부가 이끈 원나라 후기(1271–1368)의 고전주의 회귀 경향과 모순되었다. 하문원과 같은 원나라 비평가들은 목계의 화풍을 "대충,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다" 그리고 "사찰에 전시하기에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1]원말의 회화사가 하문언은 『도회보감』 권4 등에서 목계의 화풍을 "거칠고 고법이 없다"고 평가했다. 후대의 문인화 유행으로 인해 목계가 속한 원체화 계열의 화가나 불교 미술은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받았으며, 목계도 그 영향으로 인해 저평가받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가사도와 같은 거물 정치인과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화가로서 충분히 평가받았으며, 강남 산수화의 주류에 위치했다고 여겨진다.
4. 2. 일본에서의 평가와 영향
14세기 초 가마쿠라 시대 말, 목계의 작품은 일본에 전해졌다. 남송 말 원 초와 원말명초의 왕조 교체로 인한 혼란으로 작품이 유출되었고, 중일 선종 사찰의 교류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목계의 동문에는 무학조원과 올암보녕 등 일본에 온 중국 승려와 원이 외에도 많은 일본인 유학 승려가 있었다.[1] 14세기 중반에는 위작이 많이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으며, 당시 문헌에서 단순히 "화상"이라고 하면 목계를 지칭할 정도로 친숙했다. 기록도 많이 남아있어, 목계 작품의 내력도 상당히 정확하게 알 수 있다.[1] 그의 작품은 묘신지 및 엔가쿠지와 같은 여러 일본 선종 사찰의 목록, 그리고 아시카가 막부 소장품에서 발견되었다.뛰어난 중국 화가이자 문화 전파자로 여겨진 목계는 14세기부터 많은 일본 화가들의 존경을 받았다. 선화가 목암 영원이 그 예이다. 목계는 가마쿠라 시대(1185–1333)와 남북조 시대(1336–1392)에 가장 유명하고 칭송받는 선화가였다. 목계보다 일본 회화사에 더 큰 영향을 미친 중국 예술가는 없었다.[6] 일본에서 "목계" 또는 "존자"로 알려진 목계와 그의 화풍은 붓놀림과 모티프 사용에 있어 한 세대의 일본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6] 먹으로 그린 새와 꽃 병풍은 무로마치 시대(1336–1573)의 중요한 개념이었는데, 이는 목계가 삼폭화 ''관음, 학, 긴팔원숭이''와 그의 몰골법으로 대중화했다. "목계 모드"라는 용어는 얇은 먹 윤곽선이 없는 몰골법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목계 모드"는 14세기 일본 화가들에 의해 대대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자연주의와 즉흥적인 깨달음이라는 아이디어를 통해 선 예술 작품의 본질과 연결되었다.[20]
독특한 기법으로 그려져 보는 사람에게 습윤한 대기를 실감하게 하는 수묵화는 평가가 높았고, 무로마치 시대의 수묵화에 큰 영향을 주어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초기에는 가옹이 유명하다. 15세기의 노아미에 이르면 "화조도병풍"(이데미쓰 미술관 소장)처럼 목계 그림의 모티프를 병풍 안에 흩뿌린 작품까지 등장한다. 목계의 모티프 중에서도 원숭이는 매우 인기가 많았고, 설촌과 식부휘충과 같은 간토 수묵화 화가들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가장 열성적으로 목계를 배운 화가는 하세가와 도하쿠이다. "등백화설"에서도 많은 항목을 목계에 할애하여, 명백히 목계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 많이 남아있다. 걸작 "송림도병풍"도 그 성과가 결실을 맺은 작품으로 여겨진다.
현재 목계의 우수한 작품은 거의 모두 일본에 있으며, 국보,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작품도 많다. 중국, 대만, 유럽에는 전칭작을 포함하여 목계의 그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참조
[1]
서적
Critical terms for the study of Buddhism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5
[2]
서적
Ink painting in medieval kamakura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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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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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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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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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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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Long strange journey: on modern Zen, Zen art, and other predica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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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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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Metamorphosis of form and meaning: Ink bird-and-flower screensMuromachiachi japan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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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有徳院殿御実記付録 巻十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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