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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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진주는 신라가 685년 백제 남부 지역에 설치한 발라주의 치소를 광주광역시 일원으로 옮기고 개명한 지명이다. 757년 무주로 개칭되었으나 이전 명칭이 함께 사용되었으며, 완도에 청해진이 설치되면서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무진주는 현재의 전라남도와 전북 고창군을 아우르는 지역이었으며, 고려 시대에는 후백제와 고려의 격전지였고, 이후 전라도로 통합되었다가 1896년 13도제 개편으로 전라도가 분리되면서 전남의 일부가 되었다.
676년 한반도에서 당나라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한 신라는 685년 문무왕 5년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9주로 재정비하면서 백제의 남부지방에 설치했던 발라주의 치소를 광주광역시일원으로 이전해 '''무진주'''로 개명했다. 757년 전국의 행정구역명칭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지자 무진주도 무주(武州)로 개명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이전의 명칭이 공용되었다. 신라군은 백적•백황의 만보당과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이 주류했다. 828년 완도 일대에 청해진이 설치되는 등 무진주 서남해안은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2. 고대
2. 1. 마한 시대
유사 이래 전라남도 지역은 마한의 땅이었으나 온조왕~다루왕 치하의 백제에 의해 마한이 패망하고 노령산맥 이북의 영역이 백제에 편입되었다. 노령산맥 이남의 호남 지방에 잔존한 마한 세력은 백제의 영향력하에서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침미다례라는 소국 연맹을 형성했다.
침미다례는 근초고왕 때에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가 백제에 신속하는 한편으로 영산강 유역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문명과 정치 체제를 유지했는데 3세기 초입에는 나주시의 보라국(保羅國또는 不彌國)을 중심으로 가야의 포상팔국에 가맹해 가락국 및 신라와 항쟁하기도 하는 한편 중국과의 교역 등을 통해 국제 사회에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475년 고구려의 압력을 받고 있던 한성백제가 고구려군의 대대적인 남침으로 패망하여 잔여 세력이 웅진으로 천도하는 등 전남 지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자 대가야가 서방으로 진출을 개시해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여수시, 순천시, 광양시 등지를 정복했다. 후에 동성왕 치하에서 세력을 회복한 백제는 무령왕 대에 남방으로 경략이 이루어져 침미다례를 완전히 병합해 구지하성(久知下城:전남 장성)을 중심으로 5방 중에 남방(南方)을 설치했다. 침미다례를 병합한 이후에는 전북의 기문 지방과 함께 가야가 차지한 전남 동부 지역-섭라 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두고 가야와 분쟁을 벌여 축출함으로써 호남 지역을 완전히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2. 2. 백제 시대
유사 이래 전라남도 지역은 마한의 땅이었으나 온조왕~다루왕 치하의 백제에 의해 마한이 패망하고 노령산맥 이북의 영역이 백제에 편입되었다. 노령산맥 이남의 호남 지방에 잔존한 마한 세력은 백제의 영향력하에서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침미다례라는 소국 연맹을 형성했다.
침미다례는 근초고왕 때에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가 백제에 신속하는 한편으로 영산강 유역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문명과 정치 체제를 유지했는데 3세기 초입에는 나주의 보라국(保羅國또는 不彌國)을 중심으로 가야의 포상팔국에 가맹해 가락국 및 신라와 항쟁하기도 하는 한편 중국과의 교역 등을 통해 국제 사회에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475년 고구려의 압력을 받고 있던 한성백제가 고구려군의 대대적인 남침으로 패망하여 잔여 세력이 웅진으로 천도하는 등 전남 지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자 대가야가 서방으로 진출을 개시해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여수, 순천, 광양 등지를 정복했다. 후에 동성왕 치하에서 세력을 회복한 백제는 무령왕 대에 남방으로 경략이 이루어져 침미다례를 완전히 병합해 구지하성(久知下城:전남 장성)을 중심으로 5방 중에 남방(南方)을 설치했다. 침미다례를 병합한 이후에는 전북의 기문 지방과 함께 가야가 차지한 전남 동부 지역-섭라 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두고 가야와 분쟁을 벌여 축출함으로써 호남 지역을 완전히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660년 백제가 신라에 패망하자 당나라는 백제 고토를 가로채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전남 지역에는 그 산하에 담양군의 분차주, 나주시일원의 대방주, 영광군의 사반주의 3개 주를 구획했지만 3개 주는 제구실을 할 수가 없었고 그나마 3주는 전남 지역의 반(半)도 지배하지 못했다. 신라는 당나라의 웅진도독부는 무시한 채 나주시일원을 치소로 '''발라주'''(發羅州)를 설치했다.
3. 통일신라 시대
3. 1. 무진주 설치
676년 한반도에서 당나라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한 신라는 685년 문무왕 5년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9주로 재정비하면서 백제의 남부지방에 설치했던 발라주의 치소를 광주광역시일원으로 이전해 '''무진주'''로 개명했다. 757년 전국의 행정구역명칭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지자 무진주도 무주(武州)로 개명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이전의 명칭이 공용되었다. 신라군은 백적•백황의 만보당과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이 주류했다. 828년 완도 일대에 청해진이 설치되는 등 무진주 서남해안은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무진주는 지금의 전라남도(광주광역시 포함) 전역에 전북의 고창군 대부분을 합친 지역이다.
3. 2. 행정 구역 개편
757년 경덕왕이 지명을 고쳤을 당시 무진주에는 14개 군, 44개 현이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지리지〉에 전해지는 무주 조에는 15개 군 43개 현이 나타나고 있어 차이가 있다. 한편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무주 소속 군현의 옛 지명을 대부분 백제의 지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3. 3. 해상 무역의 중심지
676년 한반도에서 당나라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한 신라는 685년 문무왕 5년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9주로 재정비하면서 백제의 남부지방에 설치했던 발라주의 치소를 광주광역시 일원으로 이전해 '''무진주'''로 개명했다. 757년 전국의 행정구역명칭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지자 무진주도 무주(武州)로 개명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이전의 명칭이 공용되었다. 신라군은 백적•백황의 만보당과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이 주류했다. 828년 완도 일대에 청해진이 설치되는 등 무진주 서남해안은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다.4. 고려 시대
신라 말기의 행정 체제의 붕괴로 각 지역이 지방호족에 의한 자치체제로 이행하자 대외무역 등으로 막대한 세력을 축적한 서남지방은 각 호족세력과 능창 등의 해적세력이 발호했다. 여수, 순천 일대에서 해적을 소탕하며 세력을 키운 견훤은 무진주의 치소를 점령해 스스로 왕을 칭했고 무진주를 기반으로 완산주로 북상해 후백제를 건국했다. 무진주 대부분은 후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해외무역의 중심지였던 금성[1]중심의 서남지역은 궁예의 후고구려와 결탁해 이 지역은 고려의 영역으로 들어갔고 두나라의 주요 전장 중에 한곳이 되었다.[2] 후삼국의 통일 후 983년 고려 성종2년 중앙정부의 출장소인 12목 중에 나주(羅州)·승주(昇州의 2목이 설치되었고 995년 성종 14년에 전국을 10도로 개편하며 해양도(海陽道)가 설치되어 14주 62현을 관할하였다. 1018년 전국을 5도 양계로 다시 재편하면서 전북의 강남도와 폐합되어 전라도가 되었다. 전남이 다시 독립된 행정단위가 된 것은 1896년 전국이 13도제로 개편되어 전라도가 양분되면서이다.
4. 1. 후삼국 시대의 격전지
신라 말기 행정 체제가 붕괴되면서 각 지역은 지방 호족에 의한 자치 체제로 이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외 무역 등으로 막대한 세력을 축적한 서남 지방에서는 각 호족 세력과 능창 등의 해적 세력이 발호했다. 여수, 순천 일대에서 해적을 소탕하며 세력을 키운 견훤은 무진주의 치소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을 칭했다. 이후 견훤은 무진주를 기반으로 완산주로 북상하여 후백제를 건국하였다.무진주 대부분은 후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해외 무역의 중심지였던 금성[1] 중심의 서남 지역은 궁예의 후고구려와 결탁하여 고려의 영역으로 들어갔고, 이 지역은 두 나라의 주요 전장 중 한 곳이 되었다.[2]
4. 2. 해양도와 전라도
신라 말기 행정 체제가 붕괴되면서 각 지역은 지방 호족에 의한 자치 체제로 이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외 무역 등으로 막대한 세력을 축적한 서남 지방에는 각 호족 세력과 해적 세력인 능창 등이 발호했다. 여수, 순천 일대에서 해적을 소탕하며 세력을 키운 견훤은 무진주의 치소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을 칭했으며, 무진주를 기반으로 완산주로 북상해 후백제를 건국했다. 무진주 대부분은 후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해외 무역의 중심지였던 금성[1] 중심의 서남 지역은 궁예의 후고구려와 결탁하여 고려의 영역으로 들어갔고, 이 지역은 두 나라의 주요 전장 중 한 곳이 되었다.[2]후삼국 통일 후 983년(고려 성종 2년), 중앙 정부의 출장소인 12목 중 나주(羅州)·승주(昇州) 2목이 설치되었다. 995년(고려 성종 14년)에는 전국을 10도로 개편하면서 해양도(海陽道)가 설치되어 14주 62현을 관할하였다. 1018년 전국을 5도 양계로 다시 재편하면서 전북의 강남도와 폐합되어 전라도가 되었다. 전남이 다시 독립된 행정 단위가 된 것은 1896년 전국이 13도제로 개편되어 전라도가 양분되면서이다.
5. 조선 시대
5. 1. 전라도의 분리
신라 말기 행정 체제가 붕괴되면서 각 지역은 지방 호족에 의한 자치 체제로 이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외 무역 등으로 막대한 세력을 축적한 서남 지방에는 각 호족 세력과 능창 등의 해적 세력이 발호했다.[1][2] 여수, 순천 일대에서 해적을 소탕하며 세력을 키운 견훤은 무진주의 치소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을 칭했으며, 무진주를 기반으로 완산주로 북상해 후백제를 건국했다. 무진주 대부분은 후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해외 무역의 중심지였던 금성은 궁예의 후고구려와 결탁해 고려의 영역으로 들어갔고, 이 지역은 두 나라의 주요 전장 중 한 곳이 되었다.[1][2]후삼국 통일 후 983년 고려 성종 2년에 중앙 정부의 출장소인 12목 중 나주(羅州)·승주(昇州) 2목이 설치되었고, 995년 성종 14년에 전국을 10도로 개편하면서 해양도(海陽道)가 설치되어 14주 62현을 관할하였다. 1018년 전국을 5도 양계로 다시 재편하면서 전북의 강남도와 폐합되어 전라도가 되었다. 전남이 다시 독립된 행정 단위가 된 것은 1896년 전국이 13도제로 개편되어 전라도가 양분되면서이다.
6. 근현대
6. 1. 일제강점기
6. 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7. 행정 구역 (통일신라 시대)
757년 경덕왕이 지명을 고쳤을 당시 무진주에는 14개 군, 44개 현이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지리지〉에 전해지는 무주 조에는 15개 군 43개 현이 나타나고 있어 차이가 있다. 한편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무주 소속 군현의 옛 지명을 대부분 백제의 지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래 표에서 특별한 표시가 없는 옛 지명은 모두 백제의 지명이다.
참조
[1]
문서
나주
[2]
서적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2000
[3]
문서
[4]
문서
[5]
문서
[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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