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한산주는 삼국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 그리고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중부 지역에 존재했던 행정 구역이다. 백제, 고구려, 신라의 각축전 속에서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하고 신주를 설치하면서 한산주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757년 경덕왕 때 '한주'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 때 원래 명칭으로 환원되었다. 신라는 나당 전쟁 이후 황해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한산주의 범위를 넓혔으며, 후삼국 시대를 거쳐 고려 건국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산주는 1개 소경, 27개 군, 46개 현으로 구성되었으며,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한산주 소속 군현의 옛 지명이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시대에 한산주 지역은 원래 마한의 북쪽 지역이었다. 기원전 1세기 후반, 온조왕이 이끄는 부여족 일파가 한강 유역으로 남하하면서 백제가 세워졌으나, 백제는 빠르게 성장하여 마한 연맹체를 노령산맥 남쪽으로 밀어냈다.[1]
한산주는 현재의 경기도, 서울특별시, 충청북도, 황해북도 일부 지역을 포괄하는 넓은 행정 구역이었다.
2. 연혁
314년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하면서 고구려와 백제는 예성강에서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371년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두 나라는 치열하게 싸웠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하남위례성)을 점령하고 백제를 현재의 경기도 지역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이후 백제는 551년 한성 지역을 잠시 회복했지만, 곧 신라가 점령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장수왕 이후 고구려는 한산주 지역을 점령하여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였고, 백제 성왕 때 일시 회복했다가 553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이 지역을 차지하였다. 진흥왕은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여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관리하게 하였다.[2] 557년 신주를 북한산(北漢山, 현 서울의 한강 이북 지역)으로 옮겼고,[3] 이후 전세에 따라 치소가 이동하였다. 568년에는 남한강의 남천(현 경기도 이천시)으로 옮겼다가[4] 604년(진평왕 26년)에 다시 한산정(漢山停, 현 경기도 하남시 일대)을 설치하였다.[5][6]
660년 백제 멸망 후, 한산주로 지명과 거점이 정리되었다.[7] 757년(경덕왕 16년)에 전국의 행정구역 명칭을 중국식 한자어로 고치면서 '한산주'도 '한주'로 개칭되었다. 혜공왕 때 행정구역 명칭을 원래 명칭으로 되돌렸다고 한다.
한산주는 삼국 통일 전쟁 및 나당 전쟁 시기에도 영역이 계속 변화하였는데, 황해도 지역은 나당 전쟁 직후까지 군·현이 설치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가 이후 영역을 정리하고 군·현을 설치하였다. 694년(효소왕 3년)에 송악성(松岳城 : 개성시)과 우잠성(牛岑城)을, 703년(성덕왕 2년)에 개성(開城)을 쌓았고, 748년(경덕왕 7년)에 14개 군·현을 설치하였으며, 762년에도 6개의 성을 쌓았다. 헌덕왕 때 취성군(取城郡)을 설치하고 826년 패강에 길이 300리의 장성(長城)을 쌓아 한산주의 북쪽 경계가 완성되었다.
신라 말, 군웅할거와 토착 호족에 의한 지방자치가 시작되었다. 안성 일대인 죽주에서는 기훤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고, 패서 일대에서는 박지윤, 유천궁, 용건 등의 호족들이 군집하고 있었다. 특히 박지윤은 신라 왕실의 후손임에도 고구려 장군인 대모달(大模達)을 자칭할 만큼 이 지역에서 반(反)신라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7] 이후 궁예는 새 나라를 세우면서 이 점을 적극 활용해 고려를 칭했다. 궁예는 처음에는 패서 일대인 개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워 한반도 중부 지역을 차지했다가, 나중에 철원으로 옮겨 마진(태봉)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그러나 과도한 중앙집권제를 추구하는 등 패서 호족의 반감을 사서 결국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명성산에서 최후를 맞았다. 왕건의 고려는 다시 패서 지역에서 후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2. 1. 삼국시대
한산주가 있던 지역은 원래 마한의 북쪽 지역이었다. 기원전 1세기 후반, 온조왕이 이끄는 부여족 일파가 한강 유역으로 남하하면서 백제가 세워졌다. 그러나 백제는 빠르게 성장하여 마한 연맹체를 노령산맥 남쪽으로 밀어냈다.[1]
314년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하면서 고구려와 백제는 예성강에서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371년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두 나라는 치열하게 싸웠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하남위례성)을 점령하고 백제를 현재의 경기도 지역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이후 백제는 551년 한성 지역을 잠시 회복했지만, 곧 신라가 점령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장수왕 이후 고구려는 한산주 지역을 점령하여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였고, 백제 성왕 때 일시 회복했다가 553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이 지역을 차지하였다. 진흥왕은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여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관리하게 하였다.[2] 557년(진흥왕 18년) 신주를 북한산(北漢山, 현 서울의 한강 이북 지역)으로 옮겼고,[3] 이후 전세에 따라 치소가 이동하였다. 568년(진흥왕 29년)에는 남한강의 남천(현 경기도 이천시)으로 옮겼다가[4] 604년(진평왕 26년)에 다시 한산정(漢山停, 현 경기도 하남시 일대)을 설치하였다.[5][6]
2. 2. 통일신라 시대
553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진흥왕은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여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2] 557년(진흥왕 18년) 신주를 북한산(北漢山, 현 서울의 한강 이북 지역)으로 옮겼는데,[3] 이후에는 전세(戰勢)에 따라 치소(治所)가 이동해 568년(진흥왕 29년)에는 남한강의 남천(현 경기도 이천시)으로 옮겼다가[4] 604년(진평왕 26년)에 다시 한산정(漢山停, 현 경기도 하남시 일대)을 설치하였다.[5][6] 660년에 백제가 멸망한 후 주의 거점과 명칭이 한산주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7] 757년(경덕왕 16년)에 전국의 행정구역 명칭을 중국식 한자어로 고치면서 '한산주'도 '한주'로 개칭되었다. 혜공왕 때 행정구역 명칭을 원래 명칭으로 되돌렸다고 한다.
한산주는 삼국 통일 전쟁 및 나당 전쟁 시기에도 영역이 계속 변화하였는데, 황해도 지역은 나당 전쟁 직후까지 군·현이 설치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가 이후 영역을 정리하고 군·현을 설치하였다. 694년(효소왕 3년)에 송악성(松岳城 : 개성시)과 우잠성(牛岑城)을, 703년(성덕왕 2년)에 개성(開城)을 쌓았고, 748년(경덕왕 7년)에 14개 군·현을 설치하였으며, 762년에도 6개의 성을 쌓았다. 헌덕왕 때 취성군(取城郡)을 설치하고 826년 패강에 길이 300리의 장성(長城)을 쌓아 한산주의 북쪽 경계가 완성되었다.
2. 3. 나당전쟁과 패강진 설치
660년 백제 멸망 후, 한산주로 지명과 거점이 정리되었다.[7] 삼국 통일 전쟁 및 나당 전쟁 기간 동안 한산주의 영역은 계속 변했다. 황해도 지역은 나당 전쟁 직후까지 군현이 설치되지 않았으나, 이후 영역이 정리되고 군현이 설치되었다. 신라는 황해도 지역을 영토로 편입하면서 방어와 북방 진출을 위해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 근처[8]에 패강진을 설치했다. 이를 통해 신라는 살수 유역을 가시권에 넣었고, 발해와는 평북 일대를 중립 지대로 두고 국경을 접했다.[9] 이후 신라가 쇠퇴하면서 이 지역은 주인이 없는 땅이 되어 황폐해졌다가 후삼국 시대 고려의 영토가 되어 서경으로 승격되었다.
2. 4. 후삼국시대와 고려 건국
신라 말, 군웅할거와 토착 호족에 의한 지방자치가 시작되었다. 안성 일대인 죽주에서는 기훤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고, 패서 일대에서는 박지윤, 유천궁, 용건 등의 호족들이 군집하고 있었다. 특히 박지윤은 신라 왕실의 후손임에도 고구려 장군인 대모달(大模達)을 자칭할 만큼 이 지역에서 반(反)신라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7] 이후 궁예는 새 나라를 세우면서 이 점을 적극 활용해 고려를 칭했다. 궁예는 처음에는 패서 일대인 개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워 한반도 중부 지역을 차지했다가, 나중에 철원으로 옮겨 마진(태봉)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그러나 과도한 중앙집권제를 추구하는 등 패서 호족의 반감을 사서 결국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명성산에서 최후를 맞았다. 왕건의 고려는 다시 패서 지역에서 후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3. 한산주의 지리적 범위
3. 1. 소속 군현
3. 2. 《삼국사기》 지리지 기록의 특징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한산주 소속 군현의 옛 지명은 옛 백제 땅이었던 곳도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즉, 《삼국사기》나 《세종실록 지리지》 등에서 사용된 "本高句麗"는 해당 지역이 신라에 흡수되기 전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의미이지, 원래부터 고구려 땅이었다는 뜻은 아니다.[10][11]757년 경덕왕이 지명을 고쳤을 당시 한산주에는 1개 소경, 27개 군, 46개 현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1개 소경, 28개 군, 49개 현이 나타나는데, 이는 헌덕왕 때 설치된 취성군과 그 소속 현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참조
[1]
서적
삼국사기 제23권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2]
서적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흥왕
[3]
서적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흥왕
[4]
서적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흥왕
[5]
서적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평왕
[6]
서적
삼국사기 제40권 잡지 제9(신라 무관 3)
[7]
서적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6 문무왕 上
[8]
서술
[9]
논문
통일신라의 북방진출 연구
2001
[10]
서적
삼국사기 제35권 잡지 제4 (신라)
[11]
서적
삼국사기 제37권 잡지 제6 (고구려)
[12]
서적
세종실록 지리지 경도 한성부
[13]
서적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광주목
[14]
서술
[15]
서술
[16]
서술
[17]
서술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