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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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구는 8세기 이후 일본 규슈 지역을 약탈한 신라계 해적을 지칭한다. 신라는 일본과 해상 교류가 잦았고, 해적의 활동도 빈번하여 일본과 대립했다. 신라는 유례왕 시기부터 일본을 여러 차례 공격했으며, 이에 일본은 신라의 침략에 대비하여 방비를 강화했다. 신라구는 9세기부터 10세기까지 고닌, 조간, 간표, 조토쿠 시기에 걸쳐 일본을 침략했다. 이러한 신라구의 활동은 일본에 신국 사상을 확산시키고, 신라에 대한 적대감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규슈 지역 무사 세력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려 건국 이후 신라구의 활동은 감소하고 관련 기록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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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구 | |
---|---|
지도 | |
신라의 입구(新羅の入寇) | |
시기 | 9세기 ~ 14세기 |
장소 | 대마도, 이키, 규슈 북부 연안 |
원인 | 식량 부족, 경제적 어려움, 해적 행위 |
교전 세력 | 신라 왜구 |
상대 | 일본 고려 |
주요 전투 | 도이의 입구(刀伊の入寇) (1019년) |
배경 | |
사회적 배경 | 신라 말기의 사회 혼란 고려 초기의 정치 불안 일본의 지방 세력 성장 |
경제적 배경 | 신라의 경제적 어려움과 식량 부족 고려의 해상 무역 활성화 일본의 경제 성장과 해상 활동 증가 |
경과 | |
9세기 ~ 10세기 | 신라 해적의 활동이 활발해짐. |
11세기 | 도이의 입구(刀伊の入寇) 발생, 여진족 해적의 침입. |
13세기 ~ 14세기 | 왜구의 활동이 본격화됨. 고려와 일본 연안 지역에 피해 발생. |
영향 | |
정치적 영향 | 고려와 일본의 외교 관계 악화. |
경제적 영향 | 연안 지역의 경제적 피해 발생. 해상 무역 위축. |
문화적 영향 | 해적에 대한 공포와 경계심 확산. |
관련 항목 | |
관련 항목 | 왜구 도이의 입구(刀伊の入寇) 고려사 일본사 |
참고 문헌 | |
참고 문헌 | 『고려사』 『일본기략(日本紀略)』 『송사(宋史)』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외부 링크 | |
외부 링크 | 신라 해적, 그들은 누구인가? |
신뤄 구(新罗区) | |
국가 | 중화인민공화국 |
성 | 푸젠성 |
면적 | 2,681km² |
인구 | 74만 명(2012년) |
시간대 | 중국 표준시 (UTC+8) |
행정 구역 등급 | 시할구 |
2. 시대적 배경
신라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해양 문명의 성격을 가진 국가였고, 자연스럽게 해적 활동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양국은 수백 년 동안 서로 상대국을 노략질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신라는 고대 일본 왕조와 극단적으로 대립해왔으며, 이는 신라가 일본을 여러 차례 정벌하는 원인이 되었다. 신라 해적과 신라 해군의 오랜 공세는 일본 고대 정권과 지방민들에게 큰 두려움과 원한을 심어주었다. 일본 사서에 나타나는 신라에 대한 강한 증오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1]
신라 하대에 들어서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호족 세력이 발흥하면서 신라 해적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장보고가 등장하기 전까지 신라와 일본 사이의 해역은 신라 해적의 독무대였다. 745년경부터 750년대 후반까지 신라에서는 기근과 역병이 발생하여 사회가 피폐해졌다. 이로 인해 많은 신라인들이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귀화하였다.[2] 9세기 신라는 후삼국 시대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접어들면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백성들은 정치 혼란으로 고통받았다.
2. 1. 일본과의 관계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건국 초기부터 일본의 신라에 대한 군사적 침공이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 일본 측이 승리하여 신라 측은 식량, 금전, 일부 영토 등을 일본에 할양했다.[3] 신라 건국의 왕족인 석씨(昔氏)는 왜인(倭人)으로 여겨지며, 신라 중진에도 왜인이 등용되었다.[3] 《삼국사기》에는 수천 명 규모의 왜인이 신라로 도래했다는 기록이 있다.[3]663년 (덴지 천황 2년) 8월, 왜국은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당·신라 연합군과 백강구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
668년 이후, 일본은 견신라사를 파견했다. 덴무 천황 즉위부터 780년까지, 일·라 관계 정세에 따라 견일본사가 30회 이상 파견되었다.
672년 임신 정변에서 승리한 오아마 황자(후의 덴무 천황, 재위 673년 - 686년)는 친신라 정책을 채택했다. 지토 천황 (재위 690년 - 697년)도 덴무 천황의 외교 방침을 계승하여 친신라 정책을 펼쳤으나, 신라에 대해서는 대등한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신라가 일본에 조공하는 관계를 강요했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대항 관계에서 그 조건을 받아들여 일본에 조공하는 관계를 맺었다.[5]
735년(덴표 7년) 일본에 입경한 신라 사신이 국호를 "왕성국"으로 개칭했다고 알리자, 일본 조정은 무단으로 국호를 개칭한 것을 책망하고 사신을 돌려보냈다.[13] 신라가 스스로를 '왕성국(수도)', 일본을 '번국(제후국)'으로 낮춰 부른 이 사건은, 일본이 신라를 종속국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13]
736년 (천평 8년), 견신라대사 아베 계마로가 신라에 갔으나 외교 사절로서 예우를 받지 못하자, 일본 조정은 이세 신궁 등 여러 신사에 신라의 무례를 보고하고 조복을 위한 봉폐를 하였다. 이후 얼마 동안 신라 사신의 입경을 허락하지 않았다.[13]
752년 (천평승보 4년), 신라 왕자 김태렴 등 700여 명의 신라 사신이 일본에 와서 조공했다.[13] 이때는 왕자에 의한 조공이었으므로 외교적으로는 일본에 복속된 형태가 되었다.
753년 (천평승보 5년), 장안 대명궁에서 개최된[18] 당의 조하에서 견당사 오오토모노코마로가 신라 사신과 자리다툼을 벌여 뜻을 관철시켰다.[13] 이때 당은 일본 측의 신라가 왜의 종속국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신라를 하위에 두었다.
758년,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신라가 일본 사신에게 무례를 범했다는 이유로 신라 정벌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되지 않았다.[20][21][22]
780년에 정규적인 견신라사는 중단되었으나, 민간 차원(주로 무역)에서의 교류는 계속되었다.[23]
3. 신라의 일본 정벌과 신라구의 발흥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라는 강국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늘 군사력의 한계에 직면했고, 이는 대한해협에 들끓던 왜구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고대 일본은 왜구를 통해 신라 해안가를 약탈했고, 때로는 일본 본국에서 정규군을 파병해 신라 후방을 노략질했다.[4]
이에 신라는 서기 200년경 중반부터 국력을 일신한 후, 왜구 발호의 1차적 책임이 있는 고대 일본 정권을 원정하기 시작했다. 신라 유례왕(291년)부터 진흥왕, 진평왕(583년) 시기에 일본을 공격했고, 태종 무열왕(654~661) 시절에는 대마도를 공격했으며, 통일신라 성덕왕 시절(718년, 720년)에는 현재의 미야자키현과 일본 서쪽 변방을 공격했다.[4]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신라는 1만리 길의 거대한 파도를 넘어 명석(明石)에 뛰어난 병사들을 주둔시키고 백마를 잡아 적관(赤關)의 맹세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는 유례왕 8년에 일본 조정을 토벌하고자 대군을 일으켜 나니와(難波) 근방의 아카시노우라(明石浦)까지 진출, 오사카 근처에 포진하여 오진 천황에게 백마의 피를 마시는 적관의 맹세를 받고 다시는 신라에 불손하게 굴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4]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따르면, 응신 22년은 신라 유례왕 8년, 중국 진 혜제 원강 원년(291년)에 해당하는데, 그 사실이 동사에는 실려 있지 않다고 했다.[4]
『해동기(海東記)』에는 "달민천황 계묘년(583년)에 신라가 서비를 쳐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그 해는 신라 진평왕 5년에 해당하고, 원정천황 경신년(720년)에도 신라가 서비를 쳐들어왔는데, 그 때는 신라 성덕왕 19년이다. 지금 동래 바다 절영도에 옛 진지가 있는데, 세상에 전해 오는 말로 신라 태종이 왜국을 정벌할 때 쌓은 것이라 하여 태종대라고 불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4]
고대 일본은 신라의 대규모 정벌과 신라 해적들의 발흥에 두려워했으며,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침공당하자 백강구 전투에 참전했으나 대패했고, 이후 일본은 신라와 당이 연합해 일본으로 쳐들어올 것을 우려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 해적의 빈번한 침입은 일본을 공포에 떨게 했다.[4]
4. 신라구의 활동
신라구는 신라 남부 연해 유민 또는 해적으로, 8세기 이후 대마도와 북규슈를 빈번하게 습격했다.[1] 이들은 조직적인 대집단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국가 또는 강대한 호족의 관여가 의심되기도 한다.
신라와 관련된 대부분의 자료는 일본 측에서 작성한 것이다. 다이카 원년(645년)에 단고국에 쳐들어온 신라의 적을 토벌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신빙성은 의문시된다. 668년에는 신라 승려 도행이 구사나기 검을 훔쳐 신라로 도망치려다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811년 12월에는 신라인 약 110명이 5척의 배로 고지카시마(小近島)에 침공해 약 9명을 죽이고 100명을 사로잡았다는 기록이 《일본기략》에 전해진다. 《일본후기》 812년 정월 5일조에는 쓰시마섬에서 신라 배 3척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었고, 813년 3월 18일에는 히젠노쿠니에서 신라인 110명이 상륙해 섬 주민들과 싸웠다는 보고가 있었다. 820년 2월 13일에는 도토우미ㆍ스루가 두 구니로 옮겼던 신라인 700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건들(고닌의 한구)에 대한 대책으로 일본 조정에서는 신라어 구사가 가능한 자를 쓰시마섬에 배치하고, 796년 이래 폐지한 노사(弩師)를 부활시켰다.
997년에는 '고려국인'이 규슈를 약탈했다는 기록이 《햐쿠렌쇼》에 나타나는데, 《일본기략》은 이때 규슈를 약탈한 주체를 남만의 도적, 아마미 섬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피해 규모나 정황상 고려인의 소행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조토쿠의 한구)
863년에 단고에 왔던 신라인 54명은 스스로 '신라 동쪽에 있는 세라국 백성'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1093년에는 고려 선병들이 '해적선'을 나포했는데, 이 배에는 송과 일본 사이의 교역품이 실려 있었다.
신라구가 발생한 이유로는 745년경부터 750년대 후반에 걸쳐 신라에서 기근과 역병이 발생하여 사회가 피폐해졌다는 점이 지적된다.[2] 755년에는 굶주림 때문에 자신의 허벅지 살을 잘라 아버지에게 먹인 남자의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였다.[2] 당시 많은 신라인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귀화했다.[2]
당시 신라는 후삼국 시대로 이어지는 혼란기였으며, 왕권은 지방까지 충분히 미치지 못했다. 일본은 백강 전투 이후 당과 신라의 연합 공격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신라의 행동은 도발적으로 여겨졌다.
4. 1. 고닌(弘仁)의 한구 (811년 ~ 820년)
811년 12월 6일[26], 신라 배 세 척이 쓰시마 섬 서해에 나타나 그중 한 척이 시모아가타군 사스우라에 닿았다. 배에는 10명 정도가 타고 있었고, 나머지 두 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26].다음 날인 811년 12월 7일 새벽[27], 등불을 켜고 서로 연결된 20여 척의 배가 섬 서쪽 해상에 나타났고, 이 배들이 해적선임이 판명되었다[26]. 먼저 닿았던 자들 중 5명을 살해했지만, 나머지 5명은 도주했고, 그중 4명은 훗날 붙잡았다[26]. 섬의 병고를 지키기 위해 군사들을 동원했다[26]. 또한 멀리 신라(한반도 방면)를 바라보니, 매일 밤 여러 곳에서 불빛이 보인다고 다자이후에 보고되었다. 다자이후는 사실 여부를 묻기 위해 신라어 통역과 군기를 쓰시마 섬에 파견했고, 더 나아가 옛 관례에 준하여 요해지의 경비를 해야 할 것을 다자이후 관내와 나가토, 이와미, 이즈모 등의 국가에 통지했다.
813년 2월 29일, 히젠 마쓰우라군고토 열도 고치카 섬(오지카 섬)에 신라인 110명이 다섯 척의 배를 타고 상륙했다. 신라 해적은 섬 주민과 교전하여, 섬 주민 9명을 살해하고 100명을 포로로 잡았다[28][29]. 이날은 키이단 교위 테이큐 등이 떠난 날이었다.
813년 4월 7일, 신라인 잇세이, 세이칸하 등이 일본에서 신라로 귀국했다고 다자이후에서 보고되었다. 이 보고에 대해 신라인들을 심문하고, 귀국을 원하는 자는 허가하고, 귀화를 원하는 자는 관례에 따라 처치하라고 지시했다[30].
820년에는 도토우미·스루가 두 구니로 이주했던 신라인 700명이 반란을 일으켜 백성을 살해하고 관청을 불태웠다. 이들은 이즈 국의 곡식을 훔쳐 배를 타고 해상으로 나갔으나, 사가미, 무사시 등 7개 국 병사들에게 진압되었다. 이 사건은 신라인들이 일본 조정에 의해 강제 이주된 것에 앙심을 품고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
사후 대책으로 통역을 쓰시마에 두고, 상인, 표류자, 귀화·난민으로 위장하여 매년 쳐들어오는 신라인 집단을 신문할 수 있도록 했으며, 쇼와 2년(835년)에는 사키모리를 330명으로 증강했다[29]. 쇼와 5년(838년)에는 796년 이래 끊어졌던 노사(도사)를 부활시켜 이키에 배치했다[29]. 노사는 큰 활의 사격을 가르치는 교관이다[29].
4. 2. 조간(貞觀)의 한구 (869년 ~ 870년)
869년, 신라 해적이 배 2척을 타고 하카타를 약탈했다. 이들은 부젠 국의 공물인 견면(絹綿)을 훔쳐 도망쳤다. 일본 조정은 연해 지역의 경비를 강화하고, 신라 상인 윤청 등 30명을 추방했다.[1]쓰시마 출신 사냥꾼 우라베노 오토시마로가 신라의 상황을 전하자, 일본 조정은 다자이후 관내의 신라인들을 무쓰 국 등으로 이주시켰다. 당시 신라는 대형 선박을 건조하고 군사 훈련을 강화하고 있었는데, 일본측에서 그 이유를 묻자 "쓰시마를 정벌하여 차지하고자 한다"고 답했다.[1]
870년, 일본 조정은 쓰시마 섬에 쇠뇌 기술자와 방인을 배치하고,[29] 이세 신궁, 이와시미즈 하치만구, 가시이, 진구 황후 릉 등에 봉폐 및 고문(告文)을 올려 "일본은 신국(神國)이라 적국의 배는 오기도 전에 가라앉으리라"라며 신국사상을 퍼뜨렸다.[36]
4. 3. 간표(寛平)의 한구 (893년 ~ 895년)
寛平|간표일본어 5년(893년) 5월 11일, 다자이후는 신라 해적을 발견했다. 이들은 히고국(肥後国) 아키타군에 들어와 사람을 죽이고 집을 불태웠으며, 히젠국(肥前国) 마쓰우라군(松浦郡)에서 멀리 도망쳤다.[29] 이듬해인 寛平|간표일본어 6년(894년) 4월, 일본 조정은 신라 해적이 쓰시마섬을 습격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조정은 연안의 여러 구니에 경계를 명하고, 참의 후지와라노 구니쓰네를 곤노소치로 파견했지만, 해적은 이미 도망친 뒤였다.[29]寛平|간표일본어 7년(895년) 9월 5일 아침, 쓰시마노카미 훈야노 요시토모는 군사(郡司)와 사졸을 격려해 신라 해적의 배 45척을 쇠뇌로 무장한 수백 명의 군세로 맞아 싸웠다.[29] 그는 간교의 난(883년)을 진압한 경험이 있었다. 요시토모는 군사를 정돈하고, 1백 명의 병사를 20개로 나누었다. 그리고 약한 병졸 40명을 주어 적을 유인하게 한 뒤, 수많은 쇠뇌를 한꺼번에 쏘게 했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싸움 속에서 도망치는 도적들을 추격해 대장 3명과 부장 11명을 포함한 도적 302명을 사살하고, 배 11척과 많은 병기를 빼앗고, 도적 한 명을 생포했다.[29]
현춘(玄春)이라는 이름의 신라인 포로는, 신라에 큰 흉년이 들어 창고는 텅 비고 백성도 굶주리고 있으며 왕성 또한 예외가 아니라, '왕'은 곡식과 견면을 가져오라며 배 1백 척과 2,500명의 군사를 각지에 파견했다고 증언했다. 자신들은 왕이 파견한 그 많은 부대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며, 도망친 자들 가운데 뛰어난 장군이 세 명이나 더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강한 자는 한 명의 당인(唐人)이라고 증언했다.[29]
4. 4. 조토쿠(長徳)의 한구 (997년)
997년, 고려인들이 쓰시마, 히젠, 이키, 히고, 사쓰마 등 규슈 전역을 습격했다.[40] 이들은 민가를 불태우고 재산을 약탈했으며, 남녀 300명을 납치했다.[29] 이 사건은 '남만의 입구'라고도 불리며, 아마미 섬 사람도 도적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41]《일본기략》은 이때 규슈를 약탈한 주체를 남만의 도적, 아마미 섬 사람이라고 하며 《쇼유키》에 보이는 보고서의 설을 싣고 있으나, 《햐쿠렌쇼》에는 '고려국인'이 규슈를 '노략'해 정벌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같은 해 11월, 일본 조정은 남만 토벌을 명하고, 다음 해 9월에는 기카이 섬에 남만 체포를 요구했다.[42]
피해 규모가 지쿠젠, 지쿠고, 사쓰마, 이키, 쓰시마섬이라 보고된 점으로 보아 아마미 섬 사람의 단독 행위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고, 수백 명이 납치된 것 또한 전례없는 일이었다. 간표의 신라구와 아주 비슷할뿐 아니라 조호 3년(1001년)에도 이미 고려인에 의한 해적 행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후지와라 사네스케의 《쇼유키》 해당 기사의 표제는 아예 '고려국의 도적'으로 단정하고 있다.
5. 영향
8세기 이후 대마도와 북규슈를 습격했던 신라 해적 또는 유민들의 침입은 일본에 신국 사상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 일본에서는 신라를 "흉독한 늑대"나 "간사함을 품은 자" 등으로 표현하며 적대시했고, 신라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쇼와 원년(834년)에는 피해 지역 백성들이 신라인에게 활을 쏘아 상처를 입히는 등 재류 신라인에 대한 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조정에서는 신라인의 내항을 전면 금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국 귀화 의사가 있는 자들을 받아들이는 어정쩡한 대응을 계속했다.[33]
신라구 토벌은 규슈에서 무사 세력의 성장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쇼니 씨 등은 부관의 명목으로 외교권의 일부를 관장하는 특이한 형태로 성장했다.
한반도에서 후삼국 시대의 혼란이 고려 건국으로 진정되자, 일본 측 사서에서 신라구에 대한 기록은 사라졌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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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書籍名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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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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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観八年応天門失火事件と新羅賊兵
2000
[40]
간행물
百練抄
0997-10-01
[41]
간행물
紀略, 小右記
[42]
간행물
紀略
[43]
서적
2007
[44]
역사서
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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